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3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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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경신

밤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영의정 윤방과 우의정 김류가 겨울에 천둥이 울린 변괴 때문에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잘못은 사실 나에게 있으니 경들은 안심하라."

 

최연을 집의로,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일 신유

사간원이 아뢰기를,
"한원(翰苑)029)  의 관직은 소임이 매우 중하므로 상의하여 추천할 적에 각료들의 의논이 하나로 귀결된 다음에 널리 중의(衆議)를 물어 그 사람에 대해 흡족하여 이의가 없어야 비로소 향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는 것이니, 그 신중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번에 새로 천거한 사관(史官) 5명 【 유황(兪榥)·조중려(趙重呂)·조수익(趙壽益)·김익희(金益熙)·이행우(李行遇).】  중에 어떤 사람 【 대개 조중려를 가리킨다.】 은 각료의 의논에서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검열 송몽석(宋夢錫)이 5명과 아울러 천거하여 놓고 마치 각료의 의논에서 이미 찬동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밖에 나아가 여러 곳에 알리고 돌아와서는 바깥 의논이 벌써 정해졌다고 말하여 마침내 아울러 천거하였기 때문에 물의가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를 파직하시고, 동참한 관원도 옛 규식을 실추시킨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송몽석도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4일 계해

구관소(句管所)가 아뢰기를,
"네 곳에 연회를 여는 일로 호차(胡差)에게 따지니 그들이 말하기를 ‘애초에는 여덟 곳으로 확정했는데 지금 또 네 곳을 감소하였고 대신들이 또 네 곳마저 하기 어렵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두 장수와 상의하여 조선이 말한 바를 한결같이 따라 세 곳으로써 영구히 정식(定式)을 삼기로 했으니, 앞으로는 연회를 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에 정한 약속대로 하되, 대관(大官)이 나올 때에는 연회를 열고 평상시에 내왕하는 차인(差人)에게는 열지 말라."
하였다.

 

금의 용골대 등이 돌아갔다.

 

10월 6일 을축

공청도 연기현(燕岐縣)에 사는 유학(幼學) 안연경(安延慶)의 아들 안극행(安克行)이 나이 12세에 그의 어미가 병이 심하여 기절하자 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빼서 그의 어미에게 먹여 살렸고, 홍산현(鴻山縣)에 10세된 논금(論金)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의 어미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보고 한 손으로는 자기 어미를 붙들고 한 손으로 호랑이를 쳐서 어미를 살려냈다. 감사가 그 사실을 조정에 아뢰니, 포상하라 명하였다.

 

유성이 성성(星星)에서 나와 익성(翼星)의 위쪽으로 들어갔다.

 

신민일(申敏一)을 사간으로, 김광혁(金光爀)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7일 병인

상이 미령한 지 오래되어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에게 번침(燔鍼) 치료를 자주 받았는데, 간혹 한 혈(穴)씩 좌우에 조금 차이가 나게 놓았다. 이에 상이 그 시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의관에게 물었다. 약방(藥房)030)  이 침을 놓은 의관과 그때 동참했던 의관들을 함께 추치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군부(君父)가 침술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중한 일이므로 침을 놓는 의원은 십분 자세히 살펴야 하는데도, 망령되이 그 기술만 믿다가 그르치는 걱정을 끼쳤습니다. 그 밖의 어의(御醫)도 같이 입사하였다면 침을 놓을 때 반복해서 주의 깊게 살폈어야 할 것인데, 뒤따라 드나들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침을 놓은 의관과 함께 입시했던 의원들은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처단하소서. 그리고 약방 제조는 반드시 입시해야 하는 종전의 예가 있는데 1년이 넘도록 침을 맞으시면서 끝내 입시를 윤허하지 않으시니 사람들이 미안해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침술 의원이 점혈(點穴)031)  을 잘못 잡았으나 약방 제신들이 멀리 문밖에 있었으므로 미리 알 길이 없었으니 사리로 미루어 볼 때 더욱 미안합니다. 그러니 침을 맞으실 때면 구례에 따라 같이 참석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의관은 이미 추고하였으니 중벌로 다스릴 필요가 없다."
하였다. 간원도 침술 의원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주라고 주청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10월 8일 정묘

경상 병사 박상(朴瑺)이 치계하기를,
"새로 나온 염초 굽는 방법을 일일이 전수하여 익히게 하고자 본영(本營)에다 국(局)을 설치하였습니다. 도내 여섯 고을도 염초를 굽게 하면 7월 이후에는 구워낸 수량이 무려 1천여 근에 이를 것이니, 지금부터 여러 곳에서 구워 낸다면 앞으로 화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운 염초는 그 수량을 회록(會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리 나라에는 처음에 염초가 없었으므로 중국에서 사다가 썼는데, 정두원(鄭斗源)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염초 굽는 법을 배워 가지고 왔다. 이에 그 법을 전수하여 익히게 하여 그 용도를 넓혔다.

 

10월 9일 무진

평양(平壤)의 유학 양의원(楊懿元) 등이 상소하기를,
"우리의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방을 맡아 8조목으로 가르쳐 떳떳한 윤리가 정립되었기 때문에 오랑캐의 풍속을 면하고 예의 바른 나라가 되었으니 그 분의 공적과 덕업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데다가 지치(至治)의 혜택을 이곳이 더욱 많이 받았으므로,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이 순임금이 요임금을 사모한 것보다도 더 간절합니다. 그 때문에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이 감사로 있을 때 유생들이 창광(蒼光)의 양지쪽, 정전(井田)의 북쪽에다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도덕을 강명(講明)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그 후 감사 김계휘(金繼輝)가 ‘홍범 서원(洪範書院)’이라 이름을 붙이었고 유생 양덕록(楊德祿) 등이 상소하여 인현(仁賢)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정 이후에 또 상소를 올렸는데 그 당시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기자의 화상(畫像)을 서원에다 봉안(奉安)할 것을 주청해서 이미 기자의 온윤(溫潤)한 용모를 그려 놓았으나 갑자기 호란을 만나 봉안하지 못했기에 선비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경의 사변이 약간 안정되고 사문(斯文)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미 내렸던 명을 덮어 두고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국가의 흠입니다. 더구나 화상을 재실에 오래 방치해 두는 것도 실은 거북스럽습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서 세상에 보기 드문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예조가 회계하기를,
"상소한 내용대로 시행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0일 기사

조경(趙絅)을 응교로, 김익희(金益熙)를 검열로 삼았다.

 

10월 13일 임신

고령(高靈)에 사는 전 참봉 이현룡(李見龍) 등이 상소하여, 선사(先師) 신(臣) 배신(裵紳)을 포상하고 이름을 기록하여 선비를 숭상하는 도를 중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가 회계하기를,
"배신의 학문과 덕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선배들이 있긴 합니다마는, 그가 죽은 지가 오래되어 그의 학행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그를 사모하는 문하생과 후학들이 대궐 앞에 나아와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포상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사(先師)를 위해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정성은 가상합니다마는 포상할 만한 근거가 없고 또 그가 후세에 남긴 글도 없어서 그가 실천한 행적을 상고하여 확인하기가 어려우니, 그에게 특별한 은전을 추증하기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잠시 중외(中外)의 공론이 하나로 모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5일 갑술

태백성이 나타났다.

 

이조가 아뢰기를,
"을축년에 이원익(李元翼)이 정승으로 있을 때 홍문관에서 올린 차자로 인하여 서얼(庶孽)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사목(事目)을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양첩(良妾)한테서 난 사람은 손자 대에 가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천첩(賤妾)한테서 난 사람은 증손자 대에 가서야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요직(要職)은 허락하되 청직(淸職)은 허락하지 않기로 정한 뒤에, 이를 품의하여 성지(聖旨)의 재가를 받고 양사가 서경(署經)하여 예조에다 간직해 두었으므로 이미 한 세대의 성법(成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9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시행하지 않아 강론하여 정한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몹시 미안한 일입니다. 삼가 보건대, 서얼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으레 제수하는 관직은 봉상시나 교서관의 3∼4 자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더라도 능력을 발휘할 데가 없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사목 내에서 이른바 ‘요직은 허락한다.’는 것은 바로 호조·형조·공조의 3낭관과 각사(各司) 등의 관직입니다. 지금부터는 수교(受敎)대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의망(擬望)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있어서 문벌에 관계가 없는데 또 지방에 따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조종조에서는 서북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재능과 품행이 있으면 대각(臺閣)을 두루 역임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백여 년 전에 문형(文衡)을 맡은 어떤 재상이 서쪽 지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도의 선비들과 사이가 나빴는데, 사리에 맞지 않은 말을 지어내어 처음으로 양계(兩界) 사람들이 청현(淸顯)의 벼슬을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먼 지방 사람들이 다시금 명성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 성대(聖代)가 중흥하여 만화(萬化)가 다시 새로워져 한 시대의 인재가 모두 발탁되었는데도, 유독 서북인들만은 아직도 잘못된 구례(舊例)를 따라 마치 외방 사람처럼 무관하게 보고 있으니, 이는 천지와 같이 넓고 큰 성덕(聖德)에도 오히려 유감된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이조에 있으면서 이에 대해 여러 번 상의한 나머지 재능에 따라 선발하여 청망(淸望)의 추천에다 넣어 보려고 했습니다마는, 1백여 년간 폐지됐던 일을 감히 하루 아침에 개방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재량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가 매우 온당하니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화폐의 사용이 위로는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 시대부터 아래로는 한(漢)·당(唐)·송(宋)·원(元)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통용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그 화폐는 아주 가볍지만 그 용도가 매우 광범위해서 중국에 두루 쓰이고 있는데 그 효과가 곡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나라만은 아직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재물을 늘리는 데 있어서 하나의 크게 잘못된 점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병인년에 본조에서 청을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여 시행한 지 겨우 두서너 달만에 정묘 호란을 만나서 그만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주조한 것이 상당히 남아 있고, 또 왜인이 조공하는 동전이 해마다 몇만 근에 밑돌지 않습니다. 만일 상평청(常平廳)에 저축해 둔 쌀과 베로 보조하여 더 만든다면 적은 것으로 말미암아 점점 많아지고 안으로부터 외부에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집집마다 재산이 넉넉해지고 국가 재정이 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한가 아니한가를 조사하게 하여, 만일 그것이 불가하다고 할 때에는 놔두고 쓰지 말고 할 만한 일이라고 할 때에는 단연코 시행해서 금방 설치했다가 금방 폐지하는 병폐가 없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기를,
"마땅히 호조가 아뢴 것을 따라서 돈을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6일 을해

김광현(金光炫)을 대사헌으로, 김반(金槃)을 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7일 병자

좌의정 오윤겸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추숭이 예가 아니라고 하여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는데, 대례(大禮)가 정해지자 관직을 극력 사양하고 광주(廣州)로 물러가 살았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좌상을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재삼 친절하게 타이르니 비로소 입조(入朝)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동부승지 신득연(申得淵)은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정청한 사람이었는데 조정에서 그의 과거 잘못을 불문하고 기용하였으니, 신득연으로서는 십분 근신하여 자기 허물을 보완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을 받았고, 사명(使命)을 받들고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왕명을 욕되게 한 죄가 있었습니다. 승지는 바로 주상을 가까이 모시기 때문에 그 인선을 매우 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을 그대로 눌러 있게 할 수 없으니 그를 파직하소서."
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10월 19일 무인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쪽 변경은 현재 경계의 급보가 없으니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을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금년 7월 17일 밤에 벼락이 쳤는데 특히 대전 안이 혹심하였기 때문에 성상께서 매우 놀라 구언(求言)하는 성지를 내리시면서 ‘법궁 정전은 바로 임금이 정치를 하는 막중한 곳인데 전에 없는 이변을 갑작스레 여기에다 내렸으니, 하늘의 깊은 뜻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신이 일찍이 살펴보니, 《주역》의 8괘 중에 1양(陽)이 2음(陰)의 아래 있는 것이 곧 천둥의 상이기 때문에 그 괘 이름을 ‘진(震)’이라 하였습니다. 공자의 계사전(繫辭傳)에 ‘천둥으로 진동시킨다.’ 하였고 또 ‘격렬한 천둥으로 고동시킨다.’ 하였으며, 그리고 ‘만물을 움직이는 것이 천둥보다 빠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건대, 천둥은 천지가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상도(常道)입니다. 2월부터 천둥을 치기 시작하여 8월에 이르러 그치는 것을 보면, 1년 중 3계절에 천둥이 일어나는데 봄철에 일어나는 것은 만물의 생기(生氣)를 고동시키는 것이니, 어찌 조화의 신비로운 공력과 만물이 생성(生成)하는 현묘한 기틀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천둥이 쳐야 답답한 자는 열리고 정체된 자는 일어나며 막힌 자는 통하고 게으른 자는 떨쳐 일어나며 해이한 자는 분발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어느 것이나 작동시키는 도리입니다. 그렇다면 금년 대전 안에다 벼락을 친 것은 어떤 답답함을 열며, 어떤 침체를 일으키며, 어떤 막힘을 통하게 하며, 어떤 게으름을 떨쳐 일어나게 하며, 어떤 해이함을 분발하게 하기 위한 것일 겁니다. 그리고 벼락을 야외나 산림(山林)에다 치지 않고 법궁(法宮) 안에 치고 바깥 나무나 돌에다 치지 않고 궁전의 주달(柱闥)에다 친 것을 보면, 오늘날 천지의 깊은 의도가 진실로 전하한테만 있는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전하를 진동시키고 작동시킨 것은 하늘이 전하를 따뜻이 사랑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릇 사람의 일에 있어서도 그것을 의당 하여야 하는데도 하지 않고 의당 행해야 하는데도 행치 않으며 의당 써야 하는데도 쓰지 않는 것이나, 마땅히 고쳐야 하는데도 고치지 않고 머물러야 하는데도 머무르지 않으며 떠나야 하는데도 떠나지 않는 것은 답답함, 막힘, 치우침, 정체됨, 게으름, 해이함이 병이 되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전혀 이러한 병폐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지 중에 열거하였던 10조목으로 말하더라도 이것이 오늘날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총명과 예지가 무슨 일인들 그 이익과 손해를 통촉하지 못하고 무슨 정사인들 그 득과 실을 살피지 못하며 어느 사람인들 그의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 보지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통촉하고도 그 행함과 그침을 결단하지 못하고 살피고도 그를 쓰고 안쓰는 것을 결단하지 못하며, 꿰뚫어 보고도 그 취사 선택을 결단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마땅히 하지 않아야 될 것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은 바가 있을 것이고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을 행하는 바가 있을 것이며, 마땅히 써야 할 것을 쓰지 않는 바가 있고 마땅히 쓰지 않아야 할 것을 쓰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못하고 중지해야 할 것을 중지하지 못하며,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반드시 전혀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대저 이와 같다면 지극히 착한 경지를 어느 때에 이룰 것이며 융성한 덕을 어느 때에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반정으로 보위(寶位)에 오르신 지 지금 11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묘당에서 들으셨던 모유(謨猷)와 경연에서의 강론 그리고 대소인들이 소장(疏章)으로 진달하였던 것들 가운데 격언과 지론(至論)으로서 약석(藥石)이 될 만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매양 듣고 답할 즈음에 반드시 ‘깊이 생각하겠다.’ 하셨고 반드시 ‘가슴에 간직하여 잊지 않겠다.’ 하셨는데, 전하께서 과연 그 들었던 바를 깊이 생각하여 마음에 얻은 바가 있으며, 진달했던 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여 몸소 실천하신 바가 있습니까? 흐르는 물처럼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공이 굴러가듯이 말을 듣는 것은 바로 제왕의 아름다운 덕인데, 전하께서는 과연 실지로 이러한 덕이 있습니까. 전하께서는 본래 천성으로 타고난 훌륭한 자질이 있는데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사업에 대해 어떻게 뜻을 가지셨습니까. 도덕과 사업을 반드시 성현처럼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셨을 것입니다. 또 혼조의 어지러운 정국을 만나서 무릇 눈으로 보고 탄식하고 마음에 격분하여 강개하신 바가 필시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정 이후로 담당하고 파악하면서 처음부터 지극한 덕과 큰 공을 이루리라 스스로 격려하지 않으셨습니까. 고인은 하루 공부하면 하루 만큼의 공부 효과가 있고 1년 공부하면 1년 만큼의 공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10년 중에 성취하신 것과 판득(辦得)하신 것을 되돌아 볼 때 과연 새로 즉위하실 때 가졌던 마음과 부합되고 그 전에 뜻하셨던 사업을 거의 다 달성하였다고 여기십니까. 요·순의 마음을 본받지 않으면 다 격이 낮은 심법(心法)이며, 하·은·주(夏殷周) 3대의 정치를 본받지 않으면 모두 구차한 정치입니다.
그리고 《주역》 건괘(乾卦)의 문언(文言)에 구오(九五) 대인(大人)의 도리에 대해 공자가 말하기를 ‘천지의 공덕과 합치하고 일월의 밝음과 합치하며 사시(四時)의 차례와 합치하고 귀신의 길흉(吉凶)과 합치한다.’ 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계신 자리도 역시 동방의 구오 대인의 자리이며, 맡은 바도 하늘에 나는 용이 조화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인식하고 경험한 것이 공자가 말한 네 가지 합하는 도와 견주어 볼 때 어떠하십니까. 그 직위와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힘과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보면 하늘이 전하에게 경계를 보인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이번에 하늘이 전하를 아껴서 내린 변괴로 인하여 재앙을 상서로 바꾸고 앙화를 복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극진히 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노여워하여 마침내 어떠한 재앙을 내릴지 끝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재앙을 상서로 바꾸고 앙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는 방법도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장횡거(張橫渠)032)  가 말하기를 ‘음기(陰氣)가 모여 엉기어서 그 안에 든 양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며 서로 부딪쳐 격렬한 천둥이 된다.’ 하였는데, 이것도 《주역》을 근거로 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마음에도 이성과 욕심이 있는데 이성은 양, 욕심은 음이고, 일에 있어서는 옳음과 그름이 있는데 옳은 것은 양, 그른 것은 음이고, 사물에는 바르지 못함과 바름이 있는데 바른 것은 양, 바르지 못한 것은 음입니다. 천지의 도가 인도(人道)와 서로 유통하여 느끼는 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도리가 아래에서 잘못하면 하늘이 위에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니, 어떻게 아무런 이유 없이 재변이 생기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욕심이 반드시 이성을 가리고 일에 있어서는 그른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을 이기며, 사물에 있어서는 바르지 못한 것이 반드시 바른 것을 억누르고 마는데, 이는 모두 양의 도가 음의 도에게 폐쇄를 당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천둥을 쳐 보이는 바가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하는 데 있어서 별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다만 마음엔 욕심을 버리고 한결같이 이성에만 따라서 하고 일에는 그른 것을 버리고 한결같이 옳은 것에만 따라서 하며, 사물에는 바르지 않은 것을 버리고 한결같이 바른 것에만 따라서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미 양명(陽明)의 도를 얻었다면 천심(天心)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변괴를 당하여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을 어찌 임금만 가져야 하겠습니까. 무릇 천둥이 치면 초목과 금수까지도 진동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더구나 사람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천지의 사이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과 일이 있기 때문에 모두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닦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왕조에 있으면서 하늘에 대신하여 일을 하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임금은 그 도를 맡아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반드시 몸소 먼저 수양하고 반성해야 아랫사람들이 누구나 분발 진작될 것입니다. 오늘날 만일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려고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리 날마다 큰 천둥 소리를 듣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성상의 춘추가 중년에 다다랐으니 이야말로 분발하여 떨쳐 일어날 기회입니다. 하늘이 마침 이때에 경계를 보였으니 신은 오늘날에다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신이 《주역》의 64괘 중에서 특별히 진괘를 취한 것은, 혹은 아래에 있어 정(貞)이 되고 혹은 위에 있어 회(悔)가 되는 것이 16개의 괘가 있어서 이니 별도로 책 한 권을 만들어 올립니다. 이는 진괘의 용도가 여기에 다 열거되어 실은 오늘날 재변에 대처하는 방법에 절실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감히 올리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세히 살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를 읽고 전후 정성스러운 경의 뜻을 가상하게 여기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스스로 채찍질해 가며 무언가 잘 해보려고 하였지만 재주와 학식이 미치지 못하여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룬 채 탄식했을 뿐이다. 경이 말한 교훈적인 말은 하나도 격언과 지론이 아닌 것이 없으니 감히 자리의 바른 편에 두고 조석으로 보면서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수군(水軍)·육군(陸軍) 1명에 대하여 각호(各戶)마다 3인을 딸려 주는 것은 바로 조종조 때부터 실시해 오던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군적(軍籍)을 새로 바꿀 때 한정(閑丁)의 수효가 적어서 각호마다 2명의 보인(保人)만 딸려 주고 나머지 보인[末保] 1명은 그 호수(戶首)로 하여금 스스로 듣고 보아서 얻는 대로 채워 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로 더러 채워 정한 자가 있었는데 대부분 그 호수의 자식으로서 나이 어린 아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이에게 다른 부역을 부담시킬까 싶어서 미리 스스로 보인으로 정하여 집안 식구가 모여살기 위한 계책에서 입니다. 이는 모두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보인이기에 관가에서는 다만 그들이 정한 대로 세초(歲抄)하여 계문(啓聞)하고만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을 또 뽑아 내어 다른 데로 돌려 쓴다면 이것은 원래 보인을 딸려주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 누가 자진하여 정하겠으며 또한 어찌 조종조에서 3보를 딸려주는 본뜻이라고 하겠습니까.
신미년033)   겨울에 연신의 계사로 인하여 영남 지방에서 정한 나머지 보인마다 베를 거두어 들였다는 사실을 듣고, 매우 해괴하게 여겨 관찰사를 추치할 것을 주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봄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황용정(黃用正)이 아뢴 바를 보았더니 본영(本營)에 소속된 수군의 나머지 보인을 고기잡이 배의 격군(格軍)으로 옮겨 쓸 것을 주청하였고, 요사이 또 전라 병사 이의배(李義培)의 장계를 보니 본도 수군의 나머지 보인을 오는 갑인년034)   분의 군인 가운데서 뽑아 쓸 것을 주청하였습니다. 이것은 군사 정무의 더없이 중요한 것인데 본도의 감사와 병사가 묘당에 즉시 계품하지 않고 마음대로 뽑아 썼으니, 군병들이 한없이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육군의 나머지 보인을 빼어 쓰는 것은 너무나 근거 없는 일이지만, 수군은 지난해 번을 나눌 때에 각호의 보인 2명에게는 4개 번으로 나누어 만들어서 각각 1개월의 역을 하게 하였으나 나머지 보인 2명에게는 입역(立役)한 일이 없었으니, 외방에서 더러 베를 거두고자 하거나 더러 옮겨 이용하려 하는 것은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군은 몹시 고된 일이라서 사람마다 꺼리어 도망자가 잇따르고 있으니, 만일 별다른 특별 대우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장차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들의 생각에는 잠시 불문에 부쳐 두고 나머지 보인으로 번의 식량을 돕도록 하거나 번 가운데 사고가 생기면 이들로 대신 보내도록 허락하여 그들의 노고를 나누고 위급을 구원해 주는 바탕을 만들고, 각처에 있는 수군의 비어 있는 보인이 모두 채워 정해질 때를 기다려서 다시 번 나누는 것을 의논하여 그들의 수고를 완화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하면 조정에 있어서는 신용을 잃었다고 탄식하지 않을 것이요, 군정에 있어서는 비어 있는 보인이 다 정해지는 이익이 있을 것이니 온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의당 먼저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수군·육군의 비어 있는 보인이 몇 명이나 정해졌는가와 나머지 보인을 뽑아 베를 거두어 들이게 한 명령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가를 조사한 다음에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0일 기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10월 21일 경진

여이징(呂爾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2일 신사

황해 감사 오숙이 치계하기를,
"이번에 호차(胡差)가 지나갈 적에 침범하여 욕보이고 약탈한 소행은 근래에 들어 이렇게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호행(護行) 선전관이 누구인지도 몰라도 그들이 탐욕을 부리게 종용하여 가는 곳마다 폐를 끼쳤습니다. 호역(胡譯)인 정명수(鄭命守)[鄭命壽]는 은산현(殷山縣)의 하인인데, 평산 현감(平山縣監) 홍집(洪)이 일찍이 은산 현감으로 있을 때에 정명수에게 곤장을 쳐 벌을 준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관아에 갑작스레 뛰어들어 그에게 심한 모욕을 자행하였으니 매우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용골대가 소란을 일으킨 정상은 정묘 호란 이후로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호행 선전관으로서는 금지시키기 어려울 듯합니다마는, 그들을 부추겨 가며 탐욕을 부리게 놓아 두었으니 그에게 호행을 맡겨 보낸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를 엄하게 추고하소서. 앞으로는 사리에 밝은 호역 1명을 선전관의 일행과 함께 보내어 그로 하여금 엄중하게 금지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정명수에 대해서는 그가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 용골대가 거느리고 왔으니 그 역시 박중남(朴仲男)과 같은 유입니다. 아무리 벌을 주고 싶어도 형세상 줄 수 없으니 이와 같은 뜻으로 회이(回移)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3일 임오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부사(副使)        김영조(金榮祖)가 치계하였다.
"신들이 9월 7일 평도(平島)에 도착하여 난리를 피해 온 중국인으로 인하여 노적(奴賊)이 여순을 쳐부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영원 항구(寧遠港口)에 이르러서 적병이 조 총병(祖摠兵)에게 격퇴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즉시 도사(都司)        한방기(韓邦奇)의 아문으로 갔는데 한 도사가 신들에게 말하기를 ‘귀국과 중국과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간과 같은 처지이니 노적에게 배를 빌려 주거나 군량을 보조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지난번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을 추격하여 무찌를 때에 본국의 변경 장수가 화수(火手)를 많이 거느리고 가서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적을 무찔렀는데 공으로 승전 금화(勝戰金花)까지 받았다. 어찌 적에게 배를 빌려 주고 군량을 보조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이것은 필시 흉악한 적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소치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또 순무(巡撫) 방일조(方一藻)의 아문에 이르러 자문(咨文)을 들이고 이내 적에게 무고(誣告)당한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니, 방 순무가 한참 동안 위로하고 달래며 말하기를 ‘중국 장수가 공·경을 추격하여 무찌를 적에 귀국이 병사와 군량을 많이 원조해 주었으므로 조정에서 매우 가상히 여겨 칙서를 보내어 권장 격려하려고 한다. 한 도사의 말은 매우 근거가 없으니 안심하고 염려치 말라.’ 하고, 또 ‘방금 부총(副摠)        심세괴(沈世魁)가 게첩(揭帖)을 등주 무원(登州撫院)으로 보내면서 「8월 13일에 중국 장수 4명이 귀국의 방어사와 합동하여 공·경의 적선 60여 척을 무찔러 불살랐다.」 하였다.’고 귀뜸해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역시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넉넉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향사(管餉使) 김광욱(金光煜)이 치계하기를,
"이번 용골대의 행차에, 수령들을 협박하여 물화를 내어 팔게 하면서 온갖 모욕과 압박을 자행하였으니, 이런 사태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국고 저축은 장차 우리의 소유가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방 신하가 받은 모욕이야 돌아볼 것조차 없지마는 국위를 적지 않게 손상시켰습니다. 만일 국서(國書)를 주고받을 즈음에 자세한 사정을 빠짐없이 갖추어 엄격한 말로 단호히 거절한다면 거의 징계되어 조심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관향사는 물품과 재화만 관리하고 수하에 딸린 병사가 없으므로 아무리 행패를 막고 싶어도 사세상 쉽지 않습니다. 그때에 병사(兵使) 신경원(申景瑗)의 처지로서는 휘하 장병이 있었으니 이치상 엄금해야 할 것인데도 내버려 두고 전혀 엄하게 단속하지 않았으니, 그가 나라를 매우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 뒤로 다시 이런 변이 있게 되면 신경원은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그에게 알리소서. 국서 내용에 이러한 폐단을 언급하면 무방할 듯합니다마는 그전에 더러 언급하였으나 그때마다 그들의 노여움을 한층 더 사는 근심만 초래하였고 보면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차인(差人)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야기하는 중에 약간 언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5일 갑신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구진성(句陳星) 아래로 들어갔다.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도승지로 삼았다.

 

10월 27일 병술

유성이 진성(軫星) 아래로 들어갔다.

 

부총 정룡(程龍)이 섬사람들을 안정시키고 속국(屬國)과 연합한다는 명목으로 등주에서 바다를 건너왔다.

 

이조가 아뢰기를,
"수령을 자주 체직시키는 것이 오늘날 백성을 괴롭히는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그리고 고과(考課)의 법에 있어서는 무능한 이를 물리치고 유능한 이를 등용하는 것인데, 관찰사로 있는 자가 공정한 도리를 극진히 따르지 않아 잔폐한 고을의 세력 없는 수령들은 으레 낮은 성적 평가를 받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지금 울진현(蔚珍縣)에서 사는 유학(幼學) 전선(田銑) 등이 올린 상소 내용을 보건대 ‘10년 동안에 바뀐 수령의 수효가 11명이었다.’ 하니 참으로 매우 해괴합니다마는, 그가 10년 동안 위임시켜 달라고 한 말은 법전에 위배되므로 형편상 원하는 대로 해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출척(黜陟)할 때에 공정한 도리를 힘써 따라 세력이 있고 없는 것으로 치적(治績)의 고하를 잘못 평가하지 않게 한다면 잔폐를 회복하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본도 감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8일 정해

이상길(李尙吉)을 대사헌으로, 홍명구(洪命耉)를 우승지로, 이식(李植)을 이조 참의로, 정백창을 부제학으로, 행 부제학 조익을 발탁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29일 무자

부총 정룡(程龍)의 접반사 신계영(辛啓榮)이 치계하였다.
"신이 가산(嘉山)에 도착하니 부총이 신을 만나 보고 그의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나서 한 통의 글을 내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지니고 왔던 자문(咨文)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우리 조정에서 섬 안의 사기가 그전과 다르다는 것을 듣고는 나를 파견하여 비밀리에 탐사하게 하였고, 또 그대의 나라로 하여금 노적을 거절하여 배와 군량을 절대 빌려 주지 말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여순의 변란으로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였는데, 금년 겨울에는 오로지 귀국의 구제만을 믿고 있으니, 원컨대 연해변에 있는 각 고을로 하여금 양곡을 내다 팔게 하여 얼음이 얼기 전에 섬 안으로 군량미를 운반해 주었으면 한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제가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국왕에게 아뢰겠다.’ 했더니, 부총이 자못 불쾌한 기색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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