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기축
행 호군(行護軍) 정온(鄭蘊)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궁벽한 시골에 살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이 퍽 드물었기 때문에 정전에 낙뢰했다는 이변의 소식을 뒤늦게야 듣고 깜짝 놀라 두려워하면서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구언(求言)하신 성지를 직접 보고서야 참으로 이런 변괴가 있었다는 것을 바야흐로 알고 신이 진정 괴이하게 여겨 탄식하며 침식이 편치 못하였습니다. 신이 지난 경오년035) 에 있었던 천둥 이변의 성지에 응하여 진언했는데, 물의가 세차게 일어나 대간(臺諫)들이 번갈아 공박하며 목을 베야 한다고 차자를 올려 주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만, 다행히 상의 밝으신 통찰에 힘입어 끝내 보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지금 또 그전처럼 어리석고 망령된 짓을 하여 아무 재앙은 아무 일에 응하여 나타난 징조요, 어떤 변괴는 어떤 정사의 잘못을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필시 지난날의 주청을 되풀이 할 것이요, 전하께서는 마치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이 살인했다고 연거푸 세 사람이 고하자, 베를 짜다가 북을 팽개치고 달아난 것처럼 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길에서 오가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천재에 대응할 수 있는 일을 실행하여 친한 이에게 친히 해 주는 의리를 돈독하게 하려고 할 때마다 대간의 저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먼 곳에서 전해 들은 말이라 믿을 수는 없지만 만일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신의 말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배척을 당하게 됨과 아울러 그전의 목을 베야 한다는 주청이 계속될 것입니다.
아, 낙뢰의 이변은 예로부터 더러 있는 일이지만 태묘(太廟)의 나무와 정전의 기둥에 벼락을 쳐서 이번처럼 놀랍고 두려운 적은 없었으니, 하늘이 경계를 부질없이 보였겠습니까.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리셨던 성교 10조목에 대해선 신이 어떻게 경계해야 하는가 말씀 올릴 겨를이 없어서 다만 크고 중요한 근본에 대해서만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한(漢)나라 명신 동중서(董仲舒)는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조정·백관·만민·사방의 근본을 삼았고, 송나라 명신 주희(朱熹)는 임금의 마음으로써 태자·대신·강유(綱維)036) ·풍속·민력(民力)·군정의 근본을 삼았는데, 이것은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대경(大經)입니다. 전하의 학문이 높고 밝으신 것은 신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변괴가 겹쳐 나타나고 자주 발생했다는 것은 아무리 쇠하여 어지러운 나라라도 일찍이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더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빨리 덕을 삼가하며 마음의 체를 힘써 넓히고 치우쳐 바르지 못한 조짐을 제거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니 매우 가상한 마음이 든다. 일일이 들어 말한 약석(藥石)과 같은 교훈적인 말을 마땅히 명심하고 늘 삼갈 것이니, 경은 행여 사양치 말고 속히 서울로 올라와 나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11월 2일 경인
일관(日官) 홍경립(洪景立)이 상소하기를,
"신이 별의 관측에 통달은 못하였으나 하찮은 견해마저 없지는 않습니다. 금년 2월에 원수(元帥)를 따라 서로(西路)에 나갔다가 심상치 않은 변괴를 목격하였으므로 감히 어리석은 소견이나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3월 22일 묘시(卯時)에는 하늘이 울었고 사시(巳時)에는 진영(鎭營)의 머리에 별이 떨어졌는데, 《성전(星傳)》을 살펴보니 ‘큰 별이 떨어지면 양(陽)이 그 자리를 잃은 것으로 재해가 일어날 조짐이다.’ 하였고, 또 ‘별이 떨어진 그 아래에는 의당 전쟁터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14일 밤 4경에 사람처럼 생긴 물체가 손방(巽方)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내려갔고, 3월부터 4월에 걸쳐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난 지가 지금 벌써 9개월째입니다. 《성전》을 살펴보니 ‘많은 사람이 주거가 없이 떠돌아다니고 전쟁이 아울러 일어난다.’ 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벼락이 여염집에다 치지 않고 바로 정전에다 쳤습니다. 점괘로 보건대 ‘3년 내에 그 응험이 필시 처참할 것이다.’ 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이번 우박의 재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것으로 《성전》을 살펴보니 ‘임금이 과실 듣기를 싫어하고 어진 이를 물리치고 사악한 이를 쓰면 우박이 내린다.’ 하였고, 또 ‘정치의 방도가 번잡 가혹하고 부역이 급박하며 명령이 자주 바뀌면 그 점괘가 우박으로 나오는데, 병사 사용을 금하지 않으면 강한 신하가 반역을 꾀하지만 어진 이를 등용하고 정사를 관대하게 한다면 잘못에 대한 벌을 내리지 않고 재해가 없어질 것이다.’ 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나에게는 이런 일이 없다고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옛날 송 경공(宋景公)의 한 마디 말에 형혹성이 심성(心星)을 범하다 물러났고 보면, 임금의 일거 일동이야말로 위로 하늘에 응하는 것이니 닦고 반성하는 방도는 선행을 힘써 하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신이 지난 갑자년037) 원수를 따라가 서로(西路)의 진영에 있었을 적에도 그때의 변괴가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으나 뒤이어 역적 이괄의 변란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오늘의 변괴는 전에 비하여 더욱 참혹한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금할 수 없어 감히 이렇게 진달합니다."
하였는데, 회답이 없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본조에서 삼명일(三名日)에 올렸던 진하 전문(陳賀箋文)의 하(賀)자를 위(慰)자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전문을 바칠 때에 착용할 복색은 평상시의 복색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니 돌아오는 11월 7일 탄신에는 왕세자와 백관(百官) 모두가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전문을 올리고 예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시 정지하라고 답하였다.
11월 3일 신묘
호조가 아뢰기를,
"평택(平澤) 등 10개 고을에 완전히 재해를 입은 곳이 무려 1천 5백여 결에 이르고 부분적으로 재해를 입은 곳이 4백여 결이나 되어 금년 세입의 수량 감축이 이렇게까지 심합니다. 1개 도만 하여도 이와 같고 보면 다른 도도 예상할 수 있으니, 앞으로 써야 할 경비를 생각할 때 몹시 걱정됩니다. 그리고 그전부터 조정에서 만일 재해를 입은 전답에 대해서 면세해 주라는 조치를 내리면 수령이 전혀 착실하게 조사하지 않아서 허와 실이 분명치 않은 걱정을 끼쳐 몹시 가증스러웠는데, 관찰사가 이미 감면해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니 본조로서는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재해를 입은 고을은 세미(稅米)·수미(收米)와 서량(西糧) 분의 5결포(結布)를 전액 모두 감면해 주고 부분적으로 입은 재해에 대해 감면할 경우에는 마땅히 경중을 구분하고 계산하여 감면해 주되, 각사(各司)의 공물(貢物)에 있어서는 이미 공안(貢案)에 원래 정한 수량이 있으니 비록 흉년을 당하였더라도 임시로 감면해 주는 규례는 무시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부총 정룡(程龍)을 접견할 때 착용할 복색에 대해서 일찍이 예조의 계사로 인하여 백색 관과 백색 띠를 쓰기로 강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패문(牌文)을 보면 흠 차사(欽差使)로서 자처하였고 또 병부(兵部)의 자문 내용에 ‘성지 차사(聖旨差使)로 간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우리로서는 흠 차사로 접대해야 하기 때문에 정사를 보시는 복색으로 접견하는 것이 예의상 옳지 않을 듯합니다. 그리고 접견할 때에 불쑥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되면 앞뒤가 뒤바뀔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또 한인들은 으레 무늬 없는 검은 도포를 소복(素服)이라고 한다니 이것으로 접견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유성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필성(畢星) 위로 들어갔다.
11월 4일 임진
호조가 아뢰기를,
"돈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청(廳)을 설치하여 본조의 당상관 및 낭청 3명과 상평청(常平廳)의 낭청 2명이 각각 맡아 좌우로 나누어 돈을 주조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평청에서 돈을 주조하는 과정을 감독하여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지 못하게 엄히 금지하여 남발하는 폐단이 없게 하고, 돈을 몰래 만든 자는 《대명률》에 의하여 교수형에 처하고 협력한 장인도 이와 같은 죄를 적용하며, 각 아문에서도 돈을 만들지 못하게 단속해야겠습니다. 또 신들이 만력통보(萬曆通寶)와 조선통보를 가져다 살펴보니, 만력통보는 무게가 한 돈 너 푼인데 조선통보는 그 부피가 너무 작습니다. 그러니 만력통보의 모양새를 따라 조선통보를 만들되 팔분체(八分體)의 글자로 바꾸어서 새돈과 헌돈을 구분하게 하소서.
그리고 병인년038) 의 사목에는 돈 1문(文)을 쌀 한 되 값에 준하여 그 단위를 정하였는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 단위가 너무 높으므로 1문당 쌀 반 되 값에 준해서 단위를 정하면 평등할 것이라 하니, 이것으로 규정하되 단지 주석으로 만든 돈은 1문당 쌀 한 되 값으로 기준을 잡으소서. 그리고 공가(公家)에서 의당 받아들여야 할 무명과 쌀 등의 물품은 혹 3,4 분지 1을 돈으로 계산하여 받게 해야겠으나 전세(田稅)나 삼수량(三手糧) 따위의 물품은 먼 지방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돈을 갑자기 마련하여 대납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사(三司)에서 죄인에게 거두는 속전(贖錢)과 각사의 작지가(作紙價)를 우선 돈으로 바치게 하고, 모든 시중에서 사는 물건과 상역(賞役)에 내려 주는 물품은 원래의 수효를 참작하여 돈으로 계산해 주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의 걱정은 돈을 많이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에 있으므로, 중국의 돈을 통용한다면 역관(譯官) 무리들이 필시 많이 사들여 올 것입니다. 그 단위를 우리 나라의 돈 단위와 동등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중국 돈은 통용할 수 없다."
하였다.
무과의 거자(擧者) 이광필(李光弼)이 상소하기를,
"신이 뒤늦게 문필을 놓고 무예에 종사하여 다행히 초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번 복시에서는 합격자 중 가장 점수를 적게 얻었습니다. 바라건대, 조종조의 규례에 따라 남은 경전을 마저 강하게 윤허하여 주소서."
하니, 이 일을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법전에 실려 있지 않은 일이라고 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근래에 무신들이 전혀 글을 읽지 않고 있다. 이 사람에게 특별히 강하게 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전부터 중국의 조사(詔使)가 올 때에, 상께서 비록 슬프고 괴로운 상중(喪中)에 계시더라도 잔치를 베풀 때마다 주례(酒禮)를 시행한 것은 바로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을 공경하는 뜻에서 한 것입니다. 이번 부총의 내방에 있어서 접대하는 사체가 물론 조서를 받들고 온 사신과는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이미 흠차 사신이라고 칭하였고 보면 상께서 접견하실 적에 다례(茶禮)만을 행하면 너무나 간략한 것 같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영의정 윤방(尹昉)과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등이 의논드리기를,
"비록 흠차라고 칭하였더라도 주례까지 베푼다면 과연 미안스러울 듯하니, 다례만을 행하는 것이 아마 예에 맞을 듯싶습니다. 접대소로 하여금 먼저 상께서 지금 상중에 있기에 접견할 때 다례만 행한다는 뜻을 귀띔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대신들의 계사로 인하여 중국 조정의 술 석잔 드리는 예에 의거하여 행하였다.
11월 6일 갑오
접반사 신계영(辛啓榮)이 치계하였다.
"부총 정룡이 파주(坡州)에 도착하였을 적에 신을 보자고 요청하더니 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병부의 차부(箚付)를 내보이며 손으로 ‘노역(奴逆)을 거절하라.’ 한 조목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나에게 소관된 것 중에서 가장 큰 일이다.’ 하였습니다. 차부의 내용 중에 ‘조선국이 노적에게 핍박을 당하여 위협이 더욱 심했는데도 우리를 배반하지 않은 것은 중국 조정에서 도와준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적이 배와 군량을 빌려 달라 하자 조선이 반은 미루고 반은 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여순을 빼앗기고 관군(官軍)이 좌절당하였으니, 조선이 그들의 뜻에 맞추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배를 모두 동원해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에게 주어 등진(登津)으로 가게 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신이 이르기를 ‘소국이 중국 조정에 대하여 군신간의 의리와 부자간의 은정이 있다는 것을 만천하가 다 아는 바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추로(醜虜)에게 핍박당하여 비록 백성을 살리기 위한 계책에서 유대 관계를 면치 못하고 있으나 벌써 사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소국의 군신들이 매양 병력이 약하여 의리를 내걸고 일어나 적을 무찌르지 못하고 이 노적과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여순을 빼앗겼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설령 나라가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하니, 정 부총이 말하기를 ‘부총 심세괴는 글을 모르는 무인인지라 지금 섬 안이 몹시 굶주려 대중의 감정이 근심 중에 있으니 만일 제때에 구제해 주지 않는다면 뜻밖의 환란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접반사가 이 사실을 빨리 위에 알려서 그들의 위급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관향사 김광욱(金光煜)이 치계하였다.
"한번 서쪽 변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뒤로 크고 작은 공물과 각사의 노비 신공을 쌀로 바꾸어 내게 하여 서군(西軍)의 군량을 준비하게 하였는데, 사복시의 제원(諸員)들도 그 중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다시 그들로 하여금 상납하게 하였다 합니다. 군량의 저축이 날마다 줄어드는데 또 극심한 흉년을 만났으니, 청북(淸北)의 떠돌아 다니는 백성을 무엇으로 구휼해 주며 모든 성을 지키는 병사들을 무엇으로 구제해 주겠습니까. 당초의 사목대로 세포(稅布)를 쌀로 바꾸어 내게 하여 군량에 보태어 쓰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해 주소서. 그리고 여러 도의 산간 고을에서 서군 군량 몫으로 1년에 바치는 무명의 수량이 무려 2백 50 동에 이르는데, 이 무명은 오로지 서군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도 전후의 향신(餉臣)들이 일찍이 뽑아 쓰지 못했고 해조에서도 내려보내지 않고 있으니, 자못 당초에 이름 붙였던 의미가 없습니다. 대저 이 무명은 이미 관향사의 소관이기에 해조에서 가져다 써서는 안되는데 경비가 매우 군색하기 때문에 부득이 꾸어 쓴 듯합니다. 앞으로는 해마다 봉납한 것을 일일이 내려보내어 안주(安州)와 황주(黃州) 두 고을에 나누어 들여 놓았다가, 뜻밖의 사변에 쓰게 하소서. 군량에 관계된 일이므로 감히 이와 같이 적어 올립니다."
11월 7일 을미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부총 정룡을 접견하니, 부총이 병부의 자문과 차자 2통을 드렸는데, 자문 내용에 ‘저 노적이 배와 식량을 빌려 달라고 할 적에 조선에서 반은 미루고 반은 들어 주었다….’라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상이 다 보고 나서 말하기를,
"과인이 무상(無狀)하여 부모의 나라에 신의를 얻지 못하였으니 매우 두렵고 부끄럽소이다."
하니, 부총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딴 뜻이 없소. 다만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노적에게 투항했기 때문에 여순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마침 귀국의 사신이 오래도록 오지 않았기 때문에 관내(關內)에서는 과연 이러한 유언비어가 떠돌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배신(陪臣)이 들어오자 섬의 진영에서 조정에 알렸으므로 황상께서 환히 통촉하셨고 본 병부도 매우 명쾌하게 혐의를 씻었으니, 왕께서는 과히 염려치 마시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소방(小邦)의 원통한 정상을 만일 온 천하에 드러내 보일 수만 있다면 비록 사후라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을 것이외다."
하였다.
이날 상이 소복 차림으로 흰 어가를 타고 나갔는데 백관들이 모두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어가를 뒤따랐다. 어막(御幕)에 이르러 상이 검은 도포로 바꿔 입으니, 입시했던 여러 신하들도 흑삼(黑杉)으로 갈아입고 예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상이 또 어막에 들어가 도로 소복으로 갈아입으니, 백관들도 다시 천담복으로 갈아입고 뒤따랐다.
병부의 차부에,
"섬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회복을 도모하고 속국(屬國)과 연합하여 역적 모의한 자를 징벌하고자 하오니,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윤허를 내려 주시어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게 해 주는 일로 차부합니다.
참장(參將) 정룡은 지혜와 담력이 모두 뛰어나 일찍이 섬의 변란을 안정시켰으니, 바라건대 일에 재능 있는 관원 2명을 뽑아서 정룡과 함께 그곳에 이르러 그들의 정상을 알아내어 빠른 배편으로 급히 알려 대처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일로 황상께 아뢰었는데, 인하여 성지(聖旨)를 받드니 ‘도장(島將) 심세괴(沈世魁)에게 총병의 직함을 더 붙여 주고 그로 하여금 피도(皮島)를 지켜 적의 초멸과 강토의 회복을 도모하게 하라. 그리고 해번(海蕃)039) 은 본디 충성으로 순종하고 있으니 너희 병부에서 이문하여 잘 타일러 반역한 오랑캐들을 거절하여 배와 양식을 절대 빌려 주지 말게 하라. 공적이 있기를 기다려 별도로 후한 상을 내리겠다. 정룡은 이미 쓸 만하다고 하였으니 역시 부총의 직함을 더하여 유능한 관리와 함께 나아가 마음을 써 일을 보게 하는 한편 해상의 정황을 계속 급히 알려 조도(調度)할 수 있게 하라. 속히 시행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것이 정룡이 나오게 된 이유이니, 그 실은 병부의 차관이었다.
11월 8일 병신
부총 정룡이 와서 사례하였는데, 상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부총을 접견하였다. 그가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기를 청한 다음 밀서 한 통을 드렸는데, 이것은 대개 심세괴가 배를 불살랐다고 속여 말하는 등 정적(情迹)이 편안치 않아서 조석간에 사변이 생길 수도 있으나, 외국에 공개적으로 말하여 심 장군의 의심을 사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글을 바칠 즈음에 가정(家丁)일지라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것으로 혹여 섬 안에 누설될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상이 다 보고 나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과 충분히 의논하고서 대답하겠소이다."
하고, 잠시 후에 접견을 마치고 나왔다.
11월 9일 정유
도독 심세괴가 보낸 자문에,
"중국의 백성과 귀국의 군민(軍民)들은 기쁜 일과 슬픈 일에 서로 돌봐 주고 있어 원래 둘로 나누어 볼 수 없는데, 정주(定州)의 절제사가 사소한 일을 참지 못하고 공공연히 민중을 이끌고 천총 하승공(河承功)을 두들겨 죽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형벌을 받아야 할 큰 일도 아닌데 함부로 죽이고 함부로 가두어서 중국 조정을 기만하는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독의 천총 하승공이 정주에 이르러 마부와 말을 준비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사람들을 멋대로 잡아가므로 목사 최유해(崔有海)가 엄중히 금제하자, 하승공이 크게 성내어 즉시 칼을 뽑아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최유해를 쳤다. 고을 사람들이 몹시 놀라 뿔피리를 불어 군사를 모아 하승공 일행을 둘러싸고 마구 때렸는데, 하승공은 죽고 남은 그의 하인들은 모두 영변부(寧邊府)로 압송하여 가두어 둔 지 오래되었다. 그때 마침 한 명이 피하여 달아나 섬으로 돌아가서 심 장군에게 알렸기 때문에 이 자문을 보낸 것이다.
관향사 김광욱이 치계하기를,
"공명첩(空名帖)을 이미 죄다 내어 팔아서 앞으로 군량을 잇댈 계책이 전혀 없으니 통정(通政)·첨정(僉正) 등속의 공명첩을 아울러 넉넉히 내려 보내어 만일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항성(亢星) 위로 들어갔다.
11월 10일 무술
도독 심세괴의 접반사 한명욱(韓明勗)이 치계하였다.
"도독은 본디 요동(遼東)의 상인 출신으로 얼굴 모양이 악독스럽고 말투가 험하고 패려한데다 글도 모르고 아랫사람들의 사정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직위가 오른 뒤로는 또 자못 교만, 방자해져서 병력이 5천 명도 채 안되는데, 1만여 명이라고 조정에 거짓 보고했으며 지난날 배를 불살랐던 일이 자기의 공이라고 하고는 하 태감(河太監)에게 뇌물을 많이 주어 조정에 주문하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도독(都督) 주문욱(周文郁)이 그의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성이 나 하 태감에게 참소하여 그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앙화를 받게 하였기 때문에 등주(登州)·내주(萊州)의 사람들이 너나 없이 몹시 탄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조가 아뢰기를,
"어제 부총이 우리 나라의 관직 이름을 책자에 써서 접대소에 내주면서 그 밑에다 성명을 써 넣어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책자를 가져다 보니 우리 나라의 관직 이름을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경연관과 약간의 각사(各司)만이 빠져 있었습니다. 부총이 과연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까지 세밀히 알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으니 자못 괴이하게 여길 만한 일입니다. 그중 공신들의 군호(君號)에 있어서는 중국으로 보내는 문서에는 으레 휘(諱)하고 쓰지 않았었는데, 지금 저들이 벌써 먼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써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공신들의 군호도 아울러 써서 주어도 무방하다."
하였다.
한여직(韓汝溭)을 우참찬으로, 조방직(趙邦直)을 우승지로, 권확(權鑊)을 좌부승지로, 유성증(兪省曾)을 사간으로, 송시길(宋時吉)·임련(林堜)을 장령으로, 김광혁(金光爀)을 헌납으로, 홍명구(洪命耉)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11월 11일 기해
사간원이 아뢰기를,
"정주(定州)의 사변에서 중국의 장수와 서로 싸워 중국에서 조사하는 조치까지 있게 되었으니, 당시 목사 최유해를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추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옷이 엷은 군사에게는 겨울 옷을 지급하라."
11월 12일 경자
상이, 올해 가도(椵島)에다 지급한 양곡의 수량을 조사해 올리라고 분부하였다. 그 내력은 정월에 하상진(夏尙進)이 물품과 재화를 가지고 왔을 때 관향사로 하여금 무역하게 하였던 1천 석과 그 후 도독 심세괴의 자문으로 인해서 그냥 주었던 2천 석과 또 고진공(高進功)이 왔을 때 무역했던 3천 석 등 전후 교역한 것과 그냥 준 수량이 모두 6천 석이었는데, 양 도독(楊都督)에게 준 3백 석과 도독(都督) 주문욱에게 주었던 1백 석의 양곡은 이 6천 석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11월 13일 신축
평안 감사(平安監司)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평양은 도내의 근본이므로 사인(士人)들이 가장 번성한데다 그 중에는 문관도 많은데, 어찌 재능과 품행이 숭상할 만한 한두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태어난 지역에 구애되어 청현(淸顯)의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전조(銓曺)의 계사로 인하여 문학(文學) 황윤후(黃胤後)가 청현의 벼슬길에 첫번째로 들어가자 온 고을 사람들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니 그 부추겨 주고 권장, 격려하는 방법에 도움이 없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란을 한바탕 겪은 뒤로는 청북(淸北)의 각군(各郡)이 마치 버림받은 땅과 같이 되어 서적이 없기 때문에 글을 읽을 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학식 있는 사람이 신에게 와서 호소하면서 눈물을 흘린 일까지 있었는데, 무릇 보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만일 《대학》·《소학》 책 몇십 질을 서울에서 내려보내 주신다면 그들도 조정이 수습, 권면하고 있다는 뜻을 알 것이므로 분발하고 격려하는 효과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이조가 복계하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재능을 가지고도 헛되이 늙어가는 자들이 필시 많을 것이니, 도내에 눈에 띄게 두드러진 재능과 품행이 있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로 하여금 대략 부류대로 사람들의 성명을 열거하여 주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을 병조 판서로,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최연(崔葕)을 집의로, 김경여(金慶餘)·정뇌경(鄭雷卿)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4일 임인
비국이 아뢰기를,
"접반하는 신하를 통하여 부총 정룡이 우리 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싶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중에 은근히 언급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기왕 오랫동안 머물 의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측에서 먼저 머물도록 요청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접대소가 아뢰기를,
"방금 부총이 접반사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섬에 있을 때 노차(奴差)가 중국 사람을 잡아다 상당히 괴롭혔던 일이 있었는데, 나의 이번 행차를 그들이 필시 알 것이다. 내가 만일 철산(鐵山)에 도착하여 강이 얼어 물을 못 건너게 되면 여의치 않은 일이 많을 것인데, 지금 어지신 왕의 머물라는 요청을 받고 보니 과연 미리 제마음을 알아 주셨기 때문에 즉시 분부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섬에서 온 사람들을 죄다 보내고 다만 수하 몇 사람만 약간 남겨 두고서 간편하게 머물러 있어야겠으나, 여기서 묵게 되면 여러모로 폐단을 적지 않게 끼칠 것이므로 서울과 거리가 2백∼3백 리쯤 되는 곳에 조용한 관아나 깊숙하고 궁벽한 절에다 거처를 옮겨 지내게 해 준다면 매우 편이할 듯하다. 나의 수하에게 제공할 것도 귀국에 폐를 끼칠 수 없으니 내가 가지고 왔던 물품을 팔아 그들을 먹이겠다.’고 했습니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부총에게 남한산사(南漢山寺)로 옮겨 묵도록 허락하였다.
11월 16일 갑진
전라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치계하기를,
"진안(鎭安)에 사는 유생 김우정(金禹鼎) 등이 신에게 글을 올리기를 ‘본 고을의 향교가 관아와 거리가 멀고 관리하는 하인의 수가 적어 제대로 수호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지대가 낮고 습하여 건물의 골격이 부식(腐蝕)되고 있으니, 좀더 여염집에 가까우면서 넓고 트인 곳으로 옮겨 세워 수호하기에 편리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 일은 실로 온 고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원한 것이며 일의 형세도 온편한 듯하니, 요사이 풍수지리설에 미혹되어 망령되이 옮기고자 하는 자들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가 회계하기를,
"관찰사의 치계대로 향교를 옮겨 세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임광(任絖)을 집의로, 이래(李崍)를 장령으로 삼았다.
11월 17일 을사
식년(式年)의 문·무과 전시(殿試)를 실시하여 문과에는 목행선(睦行善) 등 33명을, 무과에는 강진(姜戩) 등 28명을 합격시켰다.
영변 방어사(寧邊防禦使) 유림(柳琳)이 치계하기를,
"본성(本城)이 창성(昌城)·삭주(朔州)·강계(江界)·이산(理山)의 길에 끼어 있어 본디 큰 고을이라고 하였는데, 정묘년040) 무렵에 군영을 옮긴 후부터 크고 작은 영속(營屬)이 죄다 안주(安州)로 옮겨 가고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인기척이 적적했습니다. 그러나 남군(南軍)이 들어와 성곽의 다락집 짓는 일을 보면서부터는 모두 이르기를 ‘다락집을 다 지은 뒤에 남군을 더 받아들인다면 거의 믿을 만한 형세를 갖출 것이다.’ 하여, 약간 남은 백성들이 조금 굳은 의지를 갖더니, 남군이 이어 나가고 대리 방어병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는 백성들이 다 의혹을 품어 이미 몹시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 성에 소속된 강변의 6개 고을 토병(土兵)은 길이 매우 멀어서 사변 소식을 듣더라도 달려올 리 만무합니다. 적이 만일 용천(龍川)·의주(義州)의 길을 타고 와 곧장 창주·삭주의 경계에 이르러 구성(龜城)·태천(泰川)의 길로 군사가 몰래 들어온다면 비록 파발 전령이나 봉화가 없더라도 적군의 동태를 미리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벌써 강물이 얼어붙어 있으므로 방어 준비가 시급하니 남군이 많고 적고 간에 제때에 나누어 방비하여 새로 설치한 국경 요새로 하여금 반드시 지킬 수 있는 곳이 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기를,
"본부(本府)의 군인 숫자가 과연 매우 적기 때문에 남군과 함께 힘을 합하여 지키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별안간 일어나는 변사에 대비하는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안주에 첨가된 수비 병사 2천 4백 명 중에 2백 명을 덜어내서 영변으로 들여보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아도 수가 적은 방비 군사를 지금 또 옮겨 보내게 되면 본성의 수비 방어가 필시 외롭고 약해질 것이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병사 2백 명이 안주 땅에서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지만 영변에 있어서는 실로 관계된 바 중대하기 때문에 이렇게 복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나누어 보내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8일 병오
평안 감사 장신이 치계하기를,
"최유해가 중국 사람을 접대할 때 잘 처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중국인이 먼저 칼을 뽑아 수령을 쳐 상처를 입혔으니 그 잘잘못을 따진다면 저절로 책임 소재가 판명될 것입니다. 서로 싸울 때에 설령 죽인 자가 있더라도 주범을 찾아내기가 몹시 어렵고 그 많은 아전과 주민을 모두 살인죄로 논결하기도 곤란한 일입니다. 더구나 수령이 변을 당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처하였고 보면 그 지역 백성으로서 분발해 일어나 어려운 상황을 구하려는 것은 본디 그들이 해야 할 정당한 도리입니다. 이미 조사한 뒤에 죽인 자가 나오면 그 일의 형세로 보아 부득이 중국 총진(摠鎭)에 사실대로 말해야 될 것이고, 그들이 죽게 된 연유를 듣고 나면 트집을 잡아 잘못을 책망함이 필시 전날보다 심할 것이니, 신은 조사한 후에 더욱 난처한 걱정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정주의 인민이 한번 변이 생긴 뒤로 섬에서 뜻밖의 일이라도 벌일까 염려하여 짐을 걸머지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기에 신이 여러모로 타일러 겨우 진정시켰는데, 지금 만일 조정에서 다시 조사하여 처벌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듣는다면 우매한 백성이 끝판에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를 몰라 필시 놀라 도망쳐 흩어질 것이니, 이 역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영변에 가두어 둔 중국인들을 이미 석방하였으니 이 뒤의 결말은 오직 사태를 보아 임시 대처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기를,
"최유해가 구타당할 때에 칼과 몽둥이로 번갈아 맞는데도 백성된 처지로서 보고만 서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윗사람에게 친근히 하는 의리가 아니라서 놀라 황급히 달려가 구제하느라고 피차간에 서로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상자를 내고 말았으니, 사람의 목숨은 매우 귀중하므로 역시 논죄하지 않고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적극 가담한 주동자 한 사람만 찾아내어 그들의 처분을 기다리게 하고 그 밖의 사람은 일체 불문에 붙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앞장선 주동자를 찾아내어 처벌하게 되면 앞으로 다시 이같은 변이 발생하더라도 아전과 백성들이 달려와 구원하기를 꺼릴 것이니, 그중에 중국인을 쳐 죽인 자 한 사람만 찾아내어 가두고 치죄하라."
하였다.
11월 19일 정미
정언 정뇌경이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신이 특별히 과분한 은혜를 입어 선대의 과오를 깨끗이 씻어 주고 시종(侍從)의 반열에 두셨으니, 그 직무의 책임을 다하여 하찮은 능력이나마 발휘하는 것이 곧 오늘날 신의 임무입니다. 지난날 한형길(韓亨吉)이 형벌을 남용하여 잔인하고 혹독하게 한 짓에 대해서 전하는 자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신이 그때 언관의 자리에 있었기에 들은 대로 그를 논박하였지 그 사이에 조금도 개인의 감정을 보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부제학 정백창(鄭百昌)과 우연히 대궐 아래서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던 중에 갑자기 신에게 묻기를 ‘네가 어떻게 감히 나와 친한 사람을 규탄하는가.’ 하고는 꾸짖고 욕하면서 선대의 과오를 들추어 내며 논박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신의 선대 과오에 대해서는 온 나라가 다 아는 바이므로 신이 감히 스스로 숨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상이 이미 그 과오를 깨끗이 씻어 주고 신을 거두어 쓰셨고 보면, 신이 비록 무상하지마는 시종의 반열에 있으므로 사대부간의 서로 존경하는 도리로 볼 때 아마도 이렇게 해서는 안되리라고 여깁니다. 신이 어떻게 그의 모욕을 무릅쓰고 아무 말없이 직에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사간원이 처치하기를,
"예로부터 사람을 쓰는 방도는 윗대의 과오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뇌경의 인품을 청의(淸議)가 이미 허락하였고, 성상께서 신중히 간택하여 삼사(三司)에다 등용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정뇌경이 언관의 자리에서 일에 따라 규탄하는 것은 바로 그가 해야 할 직무입니다. 그런데 정백창이 그를 면전에서 꾸짖어 모욕을 주었으니 책임의 소재가 따로 있습니다. 다시 출사(出仕)하라고 명하소서. 조정에서는 예의와 겸양의 덕이 귀중하고 사대부 사이에는 서로 공경하는 것이 귀중합니다. 그런데 부제학 정백창은, 자기와 친한 사람을 논박하였다는 이유로 시종신을 꾸짖어 모욕하였으니, 이야말로 관료들 사이에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다만 술자리에서 저지른 실수로만 간주하고 논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3일 신해
황해도의 연안부(延安府)에 모양은 꿩 같고 발은 쥐를 닮은 새가 들판을 덮을 정도로 날아왔다.
화성(火星)이 자미 서원(紫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11월 25일 계축
호차 용골대가 왔다.
서경우(徐景雨)를 대사간으로, 오전(吳竱)을 지평으로, 이기발(李起浡)을 정언으로, 조수익(趙壽益)을 검열로 삼았다.
11월 27일 을묘
호차가 철산(鐵山)에 이르러 중국인을 생포하고 섬으로 글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국의 한은 심 장군 막부 【 섬 안의 장수는 심세괴다.】 와 여러 장군에게 글을 보냅니다. 할 말은 전번 글에 죄다 적었으니, 장군과 휘하의 장군들은 빨리 함께 논의하여 판단하시오. 만일 하늘이 도와준다면 대사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의 부귀와 공명은 자연히 한량 없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머뭇거리고 시일을 끌다가 기회를 한번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장군은 일찌감치 어디로 귀의할 것인가 결정하여 속히 회답하여 주기 바랍니다. 천총(天聰) 7년 11월 16일."
11월 30일 무오
호차 용골대가 평양에 도착하여 앞서 금국 한의 글을 보냈는데, 글에 이르기를,
"금국의 한은 조선 국왕에게 글을 드립니다. 주신 글을 살펴보니 시장 무역이 벌써 단절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사이가 좋은데 서로 통상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상 맞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 차인(差人)을 보내서 의사를 전달합니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차인의 입을 통해서 죄다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글에 이르기를,
"그 전에 멀리서 보내 주신 부의를 받았으나 미처 사례하지 못하고, 지금에야 변변찮은 물건을 준비하여 작은 정성이나마 표하려고 검은 담비 가죽 10장과 인삼 10근을 삼가 갖추어 보내 올리오니,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답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금국의 한에게 답합니다. 차인이 평양에 이르러 전해 준 국서를 보고 말씀하신 뜻을 잘 알고 나니 참으로 위안이 됩니다. 예로부터 두 나라의 사이가 좋고 친할 적에는 반드시 통상 교역을 허락하였으니, 대개 지역에 따라 생산된 물품이 각각 귀하고 천한 면이 있으므로 진실로 값을 잘 맞추어 교역하여 여기에서 나는 물품으로 나지 않는 것과 바꾼다는 것이야말로 두 나라 사람들의 똑같은 소망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상인들이 한 사람도 만중(灣中)에 가서 교역하기를 바라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사실 일의 형세가 불편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정이 원하여 따르지 않는 바를 억압적으로 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전후하여 드렸던 글 내용에 이러한 뜻을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역시 한께서 양해하여 주실 줄 믿었습니다. 지금 보내 주신 글을 보니 참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본국의 통신사가 방문할 때에 약간의 상인을 데리고 가서 재화 유통을 돕고자 하는데, 이 역시 마지못하여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전에 귀국이 동기(同氣)의 상(喪)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약소한 부의를 보내 드렸기에 지금까지 부끄럽기만 했는데, 글을 보내 답례하셨고 거듭 검은 담비 가죽과 인삼을 보내주시니 더욱 송구스러워 땀만 납니다. 한 해가 저물어 추위가 심하므로 다만 기거를 더욱더 진중히 하시기 바라며 삼가 답합니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정두원(鄭斗源)이 치계하기를,
"본부의 진사 고형(高逈) 등 6백 30명이 소장(訴狀)을 바쳐 이르기를 ‘우리 송도(松都)의 상인들에게는 세금을 내고 사용하는 시장의 점포가 있어 세금으로 포루(布縷)·속미(粟米)·소과(蔬果)·어육(魚肉) 등을 냈습니다. 각각 그들 생업에 따라 세금을 마련하여 공가(公家)의 크고 작은 수요를 감당하여 전해 내려온 지 2백 년이 되었어도 폐단이 없었으니, 어찌 예전 관례가 편리하고 마땅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 유수 홍방(洪霶)이 만들어 낸 대동법에 있어서는 실상 불편한 점이 그 가운데 있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대개 재물은 한도가 있고 소비는 쓰임에 따라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정된 재물로 일정치 않은 소비에 대응한다면 1개월의 비용이 반 달만에 다 없어지고 1년의 예산 비용이 반 년만에 다 없어질 것이니, 이렇게 되면 반드시 그 다음달, 다음해에 받을 세금을 미리 앞당겨서 부족분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달마다 해마다 늘어나면 부유한 자는 지탱하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은 필시 흩어져 달아날 것이니, 백성들이 미워하는 바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본부는 거의 모두 시정(市井)의 사람이기 때문에 대체로 생업을 하여 공역에 응하는 바가 단지 판매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번 돈으로 하루의 공역을 내고 한 달간 번 돈으로 한 달의 공역을 내고 있기 때문에 세금을 서서히 거두어 들인다면 백성들은 괴로움이 적고 공과 사가 함께 편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대동법은 모든 가구의 재물을 걷어다가 온갖 물건의 값을 충당하고 있으므로 관부(官府)의 문이 도리어 사고 파는 장소가 되어 공사간이나 상하간이 지쳐 어지러워지는 결과만 낳게 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러한 실정을 성상께 전달하여 예전 관례를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신이 고찰해 보건대, 본부에서 관직을 설치하고 나누어 맡겨 방민(坊民) 통솔하기를 한결같이 한성부와 같이 하고 있는데, 이미 받아들일 전결이 없는데도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공가에서 필요한 바를 또 하는 수 없이 끌어 쓰고 있는 형편이고 보면, 그들이 호소하는 것도 당연한 듯합니다. 그런데 전 유수 홍방은 민간의 이익과 손해되는 점을 깊이 알지 못하고 이런 경솔한 짓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초의 대동법은 부유한 집에서만 받아들였고 빈천한 집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아 그 법이 사실 다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폐지하소서."
하니, 조정이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29권, 인조 12년 1634년 1월 (0) | 2025.12.30 |
|---|---|
|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12월 (0) | 2025.12.30 |
|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10월 (1) | 2025.12.30 |
|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9월 (1) | 2025.12.30 |
|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8월 (0) | 2025.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