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신유
강원 감사 강홍중(姜弘重)이 치계하기를,
"조총(鳥銃)은 오늘날 적을 막는 데 필요한 가장 좋은 무기인데, 속오군(束伍軍)은 경비가 모자라 자체에서 화약을 마련하지 못하고 또 관청에서 지급하는 규례가 없으니, 한갖 포수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실지로 총쏘는 법을 알지 못하고 명칭만 붙여 대열을 따라다닐 따름입니다. 그리고 영장(營將)의 설치는 오로지 군졸을 훈련시켜 위급할 때에 쓰려고 한 것인데 대부분 적임자를 얻지 못하여 흔히 여러 고을에서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각별히 가려 보내서 항목을 엄밀히 세워 두루 순찰하면서 사열하게 하고, 여러 고을에 화약을 알맞게 나누어 포수에게 지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착실히 교련하게 하소서."
하였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영장의 설치는 그 책임이 매우 중요하므로 본조에서 조심스럽게 가려 뽑지 않는 것이 아닌데, 결원이 생긴 자리가 허다히 있으며 또한 그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장계 내용을 보건대, 그 폐단이 없지 않은 것 같으니, 지금부터는 더욱더 적임자를 가려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기술과 솜씨가 익숙하지 않은 포수를 쓴다는 것은 이른바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싸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공청도와 함경도의 관례에 따라 각 고을에서 매월 정례적으로 올리는 화약과 탄환을 반은 회록(會錄)하고 나머지 반은 나누어 주어서 연습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심재(沈𪗆)를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6일 갑자
부총 정룡이 책자를 보내면서 벼슬아치들이 지은 시구(詩句)를 써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대신 이하 시문에 능한 여러 선비들에게 지어 보내게 하니 모두 80여 편이었다.
12월 7일 을축
평안 감사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호차 용골대[龍胡]가 주연을 베풀어 국빈을 대접하는 일로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작년 가을 상경했을 때에 세 군데에서 잔치 베푸는 일을 이미 확정하였다. 이제 와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갑자기 정지하면서 높은 관원이 나올 때에만 잔치를 베푼다고 말하니, 귀국이 내가 높은 관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봄가을 절사(節使)의 행차가 1년에 두 번에 불과하다. 만일 이 행차에게만 세 군데에서 잔치 베푸는 것으로 길이 격식을 삼는다면, 이 밖의 별사(別使)에게는 벼슬의 고하나 나온 횟수를 막론하고 모두 잔치를 베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어 입증하라. 그러면 감히 딴 말을 하지 않겠다. 모름지기 속히 조정에 알리라. 회답이 올 때까지 물러가 안주(安州)에 머물겠으며, 예단(禮單)에 대해서는 잔치 베푸는 일이 결정되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겠다.’ 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잔치를 베푸는 일에 대하여 그들이 전날 서울에 있을 때에 이미 세 군데에 베풀겠다는 뜻을 말해 놓고 이제 와서 베풀지 않는다고 하니, 이런 트집잡는 말이 있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그리고 뒷날 높은 관원이라 칭하고 빈번히 나오게 되면 그 때에 가서 틀어막기도 몹시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니 그가 말한 대로 다만 봄가을에 나오는 신사(信使)에게만 잔치를 베풀기로 허락하고, 이어 명백히 서류를 작성해서 입증의 근거를 만드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용호의 말이 지금은 이와 같을지라도 다른날 고관이 나올 때에 용호가 말한 것으로 영구히 따라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니, 이전대로 타이르라고 분부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9일 정묘
홍보(洪靌)를 형조 판서로, 최연을 집의로, 임광을 교리로, 이일상(李一相)을 대교(待敎)로 삼았다.
12월 11일 기사
전라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치계하기를,
"금년의 흉년은 본도가 더욱 심하게 들어 온갖 곡식이 익어 새로 나오는 이때에 벌써 기근의 걱정이 닥쳤습니다. 현재 시중의 물가가 무명 한 필 값이 곡식 다섯 말에 불과한데, 바치는 공물과 쌀로 환산하여 내는 여러 가지 세금을 일체 풍년의 예대로 미필당 쌀 열 말을 바치게 하니, 백성들이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예전부터 흉년에는 으레 정해진 말 수를 감해 주는 규례가 있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한결같이 시중 가격을 따라 받게 하여 조금이라도 민력을 덜어주게 하소서."
하니, 조정이 따랐다.
제주 목사 이확(李廓)이 치계하기를,
"바다에 표류하던 중국 선박이 제주도 경내로 들어와 정박하였기에 그들에게 자세히 물어 보니 ‘제남부(濟南府)의 속읍인 빈주(濱州)·정주(定州) 등지에 사는 사람들인데, 가도에 식량을 운반하는 일로 등주(登州)의 화풍창(和豐倉)에서 좁쌀 4백 60석을 싣고 10월 9일에 출항하여, 황성도(皇城島)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 갑자기 사납게 부는 광풍을 만나 돛자락이 찢기고 부서졌다. 밤낮을 표류하다가 다행히 본주의 바깥 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는데, 바람이 매우 사나워 갑판이 부딪쳐 부서지는 바람에 군량미는 죄다 젖어 버렸고 겨우 맨몸만 빠져 나와 해안으로 올라왔다.’ 하기에 즉시 공관(公館)으로 데려다 묵게 하였으나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으니, 전례에 따라 선체를 정돈하여 순풍을 기다렸다가 내보내어 제일 가까운 육지의 관아에다 넘기게 하소서."
하니, 조정이 허락하였다.
12월 12일 경오
간원이 아뢰기를,
"임진년의 변란 때에 여러 고을의 전안(田案)이 병화(兵火)로 모두 타 버려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열 개 중에 한둘도 되지 않습니다. 이 근래 몇 년 사이에 논밭을 측량하여 세금을 고르게 하는 행정이 아직 거행되지 않았으며, 더구나 여러 고을 중 더러 옛 전안이 그대로 있는 곳은 결부(結負)의 과중함이 새 전안보다 10배나 된다 하니, 부역의 고르지 못하기가 이렇게까지 극심합니다. 현재 호서(湖西) 지방에서 대동법을 실시하려고 하는데 만일 먼저 그 근본을 바루지 않으면 고르지 못한 폐단이 전날과 같을 것이니, 이 기회에 즉시 논밭 측량을 실시하여 나라에는 일정한 제도가 있게 하고 백성에게는 한쪽만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밭을 측량할 적당한 시기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계사가 이와 같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의논드리기를,
"금년에 본도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잠시 명년 가을을 기다렸다가 다른 도와 다같이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3일 신미
상이 하교하였다.
"호군(護軍) 장현광(張顯光)과 사업(司業) 박지계(朴知誡)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고 은거하면서 평소의 뜻대로 지켜 나가고 있다. 나의 여러 차례 부름으로 인하여 때로 선뜻 마음을 고쳐 먹고 왔다가는 오래지 않아 다시 나를 버리고 가니 그때마다 실의에 빠져 의욕을 잃곤 하였다. 지금 한 해가 드디어 저물려고 하니, 의당 수령으로 하여금 찾아보고 음식물을 후하게 내려주게 하라."
사신은 논한다. 장현광은 한 시대의 어진 유학자로 산림에서 은거 생활하는, 나이와 덕망이 함께 높은 사람이다. 상이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특별한 총애로 대우하여 높였으니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박지계 같은 사람은 학술이 정미롭지 못하여 일찍이 추숭(追崇)하던 날에 남의 뜻에 영합(迎合)하는 논의를 폈다. 장현광에게 비할 적에 하늘과 땅의 차이 뿐만이 아닌데도 지금 그와 나란히 칭하고 있으니, 이름과 실상을 조사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40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역사-편사(編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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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장현광은 한 시대의 어진 유학자로 산림에서 은거 생활하는, 나이와 덕망이 함께 높은 사람이다. 상이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특별한 총애로 대우하여 높였으니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박지계 같은 사람은 학술이 정미롭지 못하여 일찍이 추숭(追崇)하던 날에 남의 뜻에 영합(迎合)하는 논의를 폈다. 장현광에게 비할 적에 하늘과 땅의 차이 뿐만이 아닌데도 지금 그와 나란히 칭하고 있으니, 이름과 실상을 조사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12월 14일 임신
염우혁(廉友赫)을 지평으로 삼았다. 우혁은 단천(端川) 사람이다. 서북 지방에 예로부터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서북 사람을 거두어들여 써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이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12월 15일 계유
호조 판서 김기종(金起宗)이 세 번째 사양하여 체직되었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오늘날 탁지(度支)의 책임이 더욱 중한데, 김기종이 신병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 나이가 젊고 힘이 세며 사무를 처리하는 재능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 부임한 지가 오래지 않아 무릇 시설한 바를 미처 다 정돈하지 못했는데 지금 만약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제수하면 수습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니 그대로 맡겨 효과를 바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6일 갑술
대사헌 김상헌(金尙憲), 집의 최연(崔葕), 지평 심재(沈𪗆) 등이 차자를 올려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 아뢰기를,
"첫째는 사사로운 욕심을 끊어 성상의 옥체를 보양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한 몸의 주재(主宰)라서 마음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으면 지기(志氣)가 맑고 밝아 온갖 바르지 못한 것이 접근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미진한 찌꺼기가 남아 있게 되면 부정한 기운이 침범하여 마음이 도리어 그것에 제어됩니다. 대개 부정한 기운이란 반드시 음과 양의 조화를 깨뜨리고 귀신의 빌미가 되는 것만이 아니요, 편사(偏邪)나 기욕(嗜慾)으로서 마음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하께서 늘 학문에 종사하시는 뜻은 비록 근실하지만 사욕을 다스리는 공력이 아직 미진해서 사물을 응접하는 즈음에 사심의 동요를 면치 못하여 맑고 밝은 의기가 그로 말미암아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이 의심을 낳고 의심이 의혹을 낳고 의혹이 병을 낳아 점차로 고질이 되어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므로 몇 년 동안 꾸준히 조섭하셨으나 병의 근원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일반 의원의 얕은 의술로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며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루고 다스리어, 부정한 기운이 그 사이에 범하지 못하게 하여 옥체를 조섭하시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둘째는 실지로 효과 있는 은덕을 실천하기에 힘써서 하늘의 경계에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이므로 이쪽과 저쪽이 서로 간격이 없습니다. 속마음이 움직이자마자 참과 거짓이 바로 나타나 어린 아이도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이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몇 해 사이에 나타난 천지의 재변이 거의 낱낱이 세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정전의 낙뢰는 그 변괴가 더욱 컸으니, 하늘이 우리 전하에게 어찌 이다지도 준엄하게 경고한단 말입니까? 그 당시 정전을 피하시고 악기를 거두자는 주청은 형식이나마 닦자는 것이었는데, 그 역시 너무나 간략히 하고 말았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혼자 계시면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감히 과도하게 편히 지내지 않으셔서 하늘의 뜻을 감격시킬 수 있는 점이 있으셨습니까? 임금은 하늘과 땅으로 부모를 삼습니다. 부모가 노여워하는데도 정성스런 마음으로써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그 자식의 직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변이 나타난 것은 우연한 일이니 깊이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 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진실로 이런 말이 있었다면 이는 곧 간특한 사람들이 전하를 그르치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실덕(實德)을 힘써 실천하여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완화하는 근본을 삼으소서.
셋째는 언로(言路)를 넓혀 듣고 보는 바를 널리 구하는 것입니다.
나라에 대간(臺諫)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귀와 눈이 있는 것과 같은데 임금이 대간을 가볍게 여겨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귀와 눈을 가리고서 잘 들리고 잘 보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천하에 어찌 이같은 이치가 있겠습니까. 아, 사람치고 누가 귀가 밝고 싶지 않으리오마는 그의 귀가 밝지 못한 까닭은 남의 귀밝음이 나만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요, 누가 눈이 밝고 싶지 않으리오마는 그의 눈이 밝지 못한 까닭은 남의 눈밝음이 나만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남의 귀밝음으로 자기의 밝음을 삼는다면 이는 천하가 다 나의 귀요, 남의 눈밝음으로 자기의 밝음을 삼는다면 이는 천하가 다 나의 눈입니다. 천하로써 귀와 눈을 삼고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 자는 있지 않았고, 스스로 자기의 귀밝음과 눈밝음만 쓰기를 좋아하고서 나라를 어지럽히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언로가 막히어 사람마다 입을 다물고 다시금 귀에 거슬리는 바른 말을 주상에게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외로이 계신 처지를 누구나 한심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홀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시니, 만일 하루 아침에 무슨 변이라도 생기면 갑자기 와해되어 국가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마시고 언로를 활짝 열어서 눈을 밝게 하고 귀를 트이게 할 수 있는 방도를 다하소서.
넷째는 궁금(宮禁)을 엄히 단속하여 왕래하며 교제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임금이 구중 궁궐에 계시면서 신하들이 하는 일이나 여론의 시비나 여염의 풍속 등등을 알고 싶을 때 환관들이나 친척붙이, 그리고 사적으로 친근한 사람에게 물으실 것인데, 간사하고 아첨하는 그들이 임금의 뜻을 살피며 엿보고 있다가 반드시 어떤 기회를 틈타서 그의 사삿일을 행사할 것입니다. 또한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 궁중에 드나들면서 대궐 밖의 일을 망령되이 아뢰고 대궐 안의 일을 경솔히 누설하면서 악을 선이라 하고 곧은 것을 굽은 것이라 하며 개인의 말을 공평한 의논이라 하고 바른 사람을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 하여, 마침내 그들에게 가리워지고 마는데 이는 말세 제왕들에게 늘 있는 걱정거리입니다. 신들은 이와 같은 성군(聖君)의 치세에 과연 이러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정이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단서와 음과 양이 성하고 쇠하는 기틀이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군은 대신으로 배와 가슴을 삼고 대간으로 귀와 눈을 삼는 것인데, 어째서 곧지 않은 길을 때로 열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드나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내전을 엄하게 단속하여 안팎의 구분을 확실히 지어 왕래하며 교제하는 조짐을 길이 막으소서.
다섯째는 번잡한 일을 덜어 백성들의 수고를 늦추어 주는 일입니다.
국가의 훌륭한 정치는 백성들의 힘을 느슨하게 해 주는 일보다 앞에 할 일이 없는데, 번잡한 일을 덜어 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힘이 늦추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한 가지 분부를 내리고 내일 또 하나의 명령을 내리고는 내가 백성들의 폐단을 없앴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른바 말로만 베푸는 은혜로서 실제로는 백성에게 혜택이 이르지 않으니 무슨 덕택을 입혔다고 하겠습니까. 민생(民生)이 무겁게 지우는 세금에 시달려 찌든 적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위로 중국 조정을 섬기면서 섬에 있는 우방 인민들을 겸하여 구제하며 북쪽으로는 노(虜)에게 재폐(財幣)를 바치고 남쪽으로는 왜인(倭人)의 요구를 감당하고 있으니 사소한 백성의 힘으로는 이미 견디어 낼 수 없는데, 거기다 제사(諸司)가 물건을 흥정 판매하여 하찮은 물건까지도 세금을 매겨 거두어 들이면서 경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모두 잡다하게 빠져나가 버리고 마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거듭 곤궁해지고 나라도 따라서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너그럽게 해 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계책을 엄히 물리치게 하되, 수재나 화재를 구제하는 것처럼 급히 하여 혹 조금도 늦추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도 의당 깊이 우려하시고 매우 가슴 아파하여 백성을 자식처럼 여겨, 왕자의 저택이 너르지 못한 것이 염려되면 생활고로 이리저리 떠돌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아랫백성을 생각하고, 왕자의 재산이 풍족하지 못한 것이 염려되면 세금이 무겁고 공역이 번거로워 파산한 아랫백성들을 생각하고, 왕자의 심부름하는 하인이 부족한 것이 염려되면 노비를 내사(內司)나 궁가(宮家)에게 빼앗겨 원통함을 품고도 씻을 길이 없는 아랫백성을 생각하여, 은택을 널리 베풀어 친해야 할 사람을 친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을 힘써 베푸소서.
여섯째는 훌륭한 장수를 가려 뽑아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에 자기 몸을 잊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룬 자는 전날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하찮은 사람 중에서 나오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대개 훈공을 세운 신하와 노련한 장수는 부귀를 이미 끝까지 누린 자들입니다. 대체로 부귀하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교만심이 생기면 평소 거느린 사졸들을 따뜻이 어루만지지 않아 그들이 전쟁을 당해서 목숨 바쳐 싸우기를 즐겨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자연적인 형세입니다. 반드시 한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나 1백 명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나 부장(副長)들 가운데서나 군대의 항오 사이에서 인재를 구하여, 그의 계책이나 재주를 시험하여 그 천성이 후하고 침착하면서 굳센 사람을 택하소서. 조그마한 결점을 따지지 말고 그 재주와 지략을 살핀 연후에, 특별히 뽑아 쓰는 예로 대우하고 녹봉을 후하게 주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의 생활이 부족함을 없게 해주는 한편 굳세고 날랜 병졸들로 하여금 그의 지휘를 받게 하소서. 또 그 가운데서 자부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다른 마음이 없이 충직하고 성실한 자를 관찰하여 대장으로 뽑아, 그로 하여금 조정 밖의 병마(兵馬)을 통제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적임자를 얻게 되어 국가를 적에게 넘겨 주는 걱정이 없을 것이요, 국경의 방어도 따라서 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차자의 사연을 의당 유념하겠다."
하였다.
12월 17일 을해
해주(海州)에 문과와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해주는 곧 상이 탄생한 곳이다. 본주(本州)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과거 설치를 주청하였는데, 예조가 그들의 말대로 하는 것이 온당하겠다고 회계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능산 부정(綾山副正) 이희(李僖)가 고변하기를,
"선공감 역(繕工監役) 이형익(李馨益)이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금원령(錦原令) 이탁(李倬)의 집에 가서 이일(李逸)·한 첨지(韓僉知)란 자와 함께 술을 마시는데, 탁이 술에 취하여 노래하기를 「하늘의 뜻에 응하고 국민의 의사에 순종하여 인성(仁城)이 나왔다.」 하였는데, 내가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또 한번은 나의 집에서 술 마시던 중에 또 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에 배명순(裵命純)이란 자가 좌중에 있다가 역시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술에 취해 함부로 한 말이라 하더라도 말이 매우 도리에 어긋났기에 감히 주달합니다."
하니, 상이 금원령 탁·심응택(沈應澤)·이형익·배명순 등을 의금부에서 국문하라고 분부하였다. 심응택은 이른바 한 첨지이다. 탁이 즉시 자백하여 그가 납잡한 말을 했다고 시인하고는, 이항(李航)·이일(李𦨙)·김치근(金致近)·이희운(李希雲)·박대운(朴大雲)·홍승립(洪承立) 등을 끌어들였다. 김치근은 실지로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반역을 꾀한 사실도 없었으므로 다만 탁과 심응택만 사형에 처하였는데, 응택은 탁과 서로 응답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항·이일 역시 탁과 친절하다는 이유로 장형(杖刑)을 받다가 죽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으며 능산 부정 희는 도정(都正)으로 승급되었는데 고변한 데 대한 공로로 상을 준 것이다.
12월 18일 병자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김수익(金壽翼)이 치계하여 연천 현감(漣川縣監) 윤염(尹爓), 적성 현감(積城縣監) 김한일(金漢一), 파주 목사(坡州牧使) 심기성(沈器成)의 탐오(貪汚)한 정상을 아뢰니, 상이 모두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분부하였다.
12월 21일 기묘
전라도 고부(古阜)에 사는 생원 조극눌(趙克訥) 등이 상소하기를,
"고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과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준(金俊)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지키어 의리를 지킨 선두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만일 이 두 신하가 없었더라면 하늘이 정한 오상(五常)이 어디에 매어 존재하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누구를 의지하여 닦였겠습니까. 바다 건너 9주(九州) 같은 먼 데서도 오히려 듣고 슬퍼하는데, 하물며 같은 동리에 살던 사람들이겠습니까. 신들은 그들이 죽은 지 오래됨에 따라 사적이 묻혀 없어질까 염려되어 금년에야 비로서 사당을 처음 세우고 송상현과 김준의 두 위판(位版)을 설치하여 제사드릴 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당이 집은 이루었지만 명칭이 없어서 제사지내는 격식이 자못 빠져 있으니, 바라건대 포충(褒忠)과 정렬(旌烈) 등의 사당 규례에 따라 특별히 편액을 내려 주시어 총광(寵光)을 입을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국토를 수호하는 관원이 국경을 지키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늠름한 절의는 백세 뒤에도 사모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중에는 의논할 만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송상현이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켜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던 사실은 참으로 옛사람에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김준의 죽음도 송상현의 충의심이 격렬했던 것과 같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고을 사람들이 그의 절의에 감복하여 사당을 세우고 사액을 주청한 그 뜻이 가상하니,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사당을 처음 설립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경진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본조의 낭청이 각릉(各陵)에 부정이 있나 없나를 조사하여 올린 서계를 보건대, 동도(東道)와 서도(西道)가 각각 같지 않았습니다. 서도에 있는 능들은 사초(莎草)가 모두 무성하다고 하였고 잡초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동도에 있는 능 중에서 사초가 무성한 곳은 한두 능에 불과하다고 하였는데, 동도와 서도가 의당 이와 같이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른바 사초라는 것은 바로 모화관(慕華館)에 있는 풀로 그 잎은 가늘면서 짧고 그 뿌리는 연결되어 땅의 표면을 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 능에 쓸 때에는 반드시 여기서 가져갔습니다. 또 이른바 잡초라는 것은 이 풀이 아닙니다. 사초와 잡초가 본디 서로 섞여 사는데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곳에는 잡초가 살지 못하고 사초만 살아 남게 됩니다. 모화관의 사초가 가장 정미롭고 좋은 것은 사람들에게 많이 밟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묘 위는 사람들이 밟지 않는 곳이기에 다른 풀이 자연히 무성해지기 마련이니, 보통 오래된 무덤에 이 풀이 조금 있기도 하고 전혀 없기도 하는 것은 이세(理勢)상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초가 있고 없는 것은 장사한 지가 오래고 가까움으로 말미암아 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서도의 각릉에 이른바 사초가 무성하다고 한 것은 이 모두가 진짜 사초가 아닙니다. 대개 진짜 사초와 잡초를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만 능위에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고는 문득 사초가 무성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도의 낭청은 진짜 사초와 잡초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사초는 없고 잡초만 무성하다.’ 하기도 하고 ‘사초와 풀이 섞여 우거졌다.’ 하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사간의 무덤에 진짜 사초가 우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초를 바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진짜 사초와 딴 풀과는 차이를 두지 않았지만 쑥과 잡나무에 있어서는 그 뿌리가 깊이 뻗기 때문에 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산릉(山陵)의 옛날 규칙에 매년 한식마다 단지 쑥만 뽑는다고 하였고 잡초를 없앤다는 규칙은 없으며, 사초가 말라 손상되면 보수한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른바 사초가 말라 손상되었다는 것은 풀이 죽어 흙이 드러난 상태를 보통 말한 것이지 진짜 사초만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2백 년을 내려오면서 풀이 우거지도록 버려두고 잡초를 없앤 적이 없었으니 오늘날에 와서 진짜 사초가 없다는 것은 그 이치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실상 이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사초를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일 사초를 바꾼다면 동서도의 어느 능이나 모두 바꾸어야 될 형편입니다. 그리고 지금 비록 사초를 바꾼다 하더라도 두어 해가 안되어 딴 풀이 또 섞여 자라나면 의당 다시 바꾸어야 하므로 능을 지키는 관리가 사실을 아뢰지 않은 죄를 입을까 싶어서 분잡하게 사초를 바꾸자고 주청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능을 보수하는 일이 해마다 발생할까 염려됩니다.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는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능 위에서 놀라게 하면 또한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옛날에는 무덤을 보수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무덤의 보수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자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옛날과 지금의 예서(禮書)에 무덤에는 반드시 무슨 풀을 심어야 한다는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건원릉(健元陵)의 사초가 모화관의 사초와 다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능 위에 이 풀만 남겨 두고 그 밖의 잡초를 모조리 제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릇 능 위에 풀이 빽빽이 우거져 이즈러진 곳이 없는 곳은 사초니 잡초니 논할 것 없이 모두 바꾸지 말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다만 ‘영릉(英陵)에는 잡초가 다른 곳보다 몹시 무성하다.’ 하니, 아마도 바꾸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능침에 관한 일은 중대하므로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5일 계미
찬수청이 아뢰기를,
"《일기(日記)》041) 의 중초(中草)를 지금 이미 찬정해서 다 써 놓았으니, 의당 전대로 책을 찍어 내야겠습니다. 다만 활자를 배열하여 판을 짜는 공역(工役)이 매우 큰데 나누어 소장할 수효가 원래 다섯 건에 불과합니다. 전에 한달 동안 인쇄한 것이 무신년042) 두어 달의 일기뿐으로 힘만 소모되고 일은 더디었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의논은 모두 ‘국조 실록이 죄다 활자로 인쇄한 본만은 아니고 대부분 활자에 쓰는 체로 또박또박 써서 간직해 두었다.’고 합니다. 지금 역시 이에 따라 두세 건을 베껴 쓴다면 물자와 노력을 덜 수 있고 국청의 일도 쉽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니, 등록관(謄錄官)으로 참하·참상을 막론하고 50여 명의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네 방(房)으로 나누어 일을 독려케 하면, 두서너 달 안에 정서(正書)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요사이 국가 경비의 모자람이 이미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는데 호중(胡中)에 보내 줄 물건은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호조로 하여금 준비케 하자니 국가 경비가 벌써 죄다 없어졌고, 외방에 나누어 배정하자니 세금을 더 걷는 인상을 주게 될 터이니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이에 생각건대, 서로(西路) 군량의 작미를 약간 풍년이 든 해에는 1결마다 한 말 닷 되를 징수하였고 흉년에는 단지 한 말만 거두는 것이 벌써 근래의 규례가 되었습니다. 금년에 모든 도가 다 태풍과 큰물의 재해를 입었으니, 전례를 참고해 보면 1결에 한 말만 거두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호조의 경비의 부족이 서로의 군량 부족보다 더욱 심하니, 금년의 서로 군량은 전에 약간 풍년 든 때의 예에 따라 1결마다 한 말 닷 되를 거두어 한 말은 전례를 참조하여 서쪽 변경으로 들여 보내고, 닷 되는 해조에서 거두어 들여 호중에 줄 물건을 마련하는 데 돕게 한다면, 외방에 있어서는 별도로 세금을 추가 징수할 일이 없어질 것이요 해조에 있어서도 경비를 이어 쓸 길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풍년이나 흉년을 막론하고 1결마다 한 말 닷 되로 규식을 정해 받게 하여 앞으로 준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황해·평안 두 도에서 노비 신공으로 받는 명주를 향신(餉臣)에게 전부 소속시켰었는데, 정묘년043) 의 변란 이후로 평안 감영이 저축한 것을 탕진하였고 중국에 보낼 예단(禮單) 역시 준비하지 못하므로 본도의 노비 신공을 절반 나누어 평안 감영에 소속시켰었습니다. 지금은 변란을 겪은 지 벌써 오래되어 본영에서 저축한 바로 족히 예단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으니, 의당 전에 소속시킨 노비 신공으로 바친 명주는 호조에 다시 귀속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세미(稅米)를 거두는 한 가지의 일은 만일 흉년이 들어도 감면해 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필시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해마다 닷 되씩을 덜어낸다면 군량도 필시 부족할 것이니, 세금을 거두는 수량을 때에 따라 보태거나 감하게 하라. 예단을 준비하는 수요는 산간 고을에서 내는 포목을 덜어 내어 주라."
하였다.
12월 26일 갑신
강화 위리 별장(江華圍籬別將) 성대훈(成大勳)과 수직 내관(守直內官) 우준원(禹濬源) 등을 잡아다 국문하라고 분부하였는데, 위리 안치(圍籬安置)한 유배 장소에 잡다한 물품을 몰래 들여보냈기 때문이었다.
이경(李坰)을 장령으로, 이명웅(李命雄)을 헌납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2월 28일 병술
도독 심세괴의 접반사 정지우(鄭之羽)가 치계하였다.
"심 도독의 아문에 있는 서씨(徐氏) 성을 가진 자가 말하기를 ‘도망쳐 온 중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번 11월에 노적이 군사 7개 부대를 일으켜 3개 부대는 즉시 영원위(寧遠衛)로 향해 떠났고 4개 부대는 장성(張城) 밖 서달(西㺚)의 지경으로 향해 떠났는데,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 두 적도 따라갔다.」 했다.’고 하였습니다."
강원도 원주(原州)에 뇌성이 크게 울리고 우박이 내렸는데, 감사가 이 사실을 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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