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무자
강원 감사 강홍중(姜弘重)이 치계하기를,
"영서(嶺西)의 각 고을은 현재 경작하는 토지에 대해서 수세(收稅)하는데, 영동(嶺東)의 9개 고을은 양전(量田)한 이후의 원전안(元田案)을 기준으로 수세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경차관이 복심(覆審)할 때 더 일군 것으로 드러난 수량을 무리하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각 고을에서는 화속전(火粟田)을 수량에 보충하여 보고합니다. 화속전이란 나무를 베어 버리고 밭을 개간하여 1년만 경작하고 그대로 묵혀 버리는 땅인데, 한번 해조에 보고되면 전안(田案)에 기록된 것과 똑같이 수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전의 ‘현재 경작하는 것에 대해서 수세한다.’는 뜻에 어긋날 뿐더러 영동의 주민이 억울함을 품고도 신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탁지(度支)001) 로 하여금 다시 아뢰어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1월 2일 기축
해질 무렵에 기둥과 같은 황적색 기운이 해 위에 곧게 뻗쳤는데 길이는 1장(丈) 남짓하였다. 해가 지자 바로 사라졌다.
1월 3일 경인
상이 승지를 보내어 금천(衿川)에 가서 영부사 이원익(李元翼)을 위문하게 하였다.
1월 4일 신묘
경기 암행 어사 김수익(金壽翼)이 서계하기를,
"파주(坡州)·연천(漣川)·적성(積城) 이외에는 제멋대로 침학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전 현감(麻田縣監) 유계(柳稽), 죽산 현감(竹山縣監) 목성선(睦性善),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행건(李行健)의 치적이 으뜸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유계·목성선·이행건에게 표리(表裏) 한 벌씩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1월 5일 임진
햇무리가 지고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송시길(宋時吉)·윤효영(尹孝永)을 장령으로, 심동구(沈東龜)를 지평으로 삼았다.
1월 7일 갑오
조빈(趙贇) 등 48인을 찬수청 겸춘추(纂修廳兼春秋)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금 한성부의 검시 공문(檢屍公文)을 보건대, 이일(李𦨙)의 죽음은 독약을 먹은 것이 분명한 사실로, 그간의 정상이 참으로 흉악하고 처참합니다. 독약을 이일이 스스로 구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필시 오가며 구해 준 자가 있을 터이니, 그의 주인을 잡아다가 심문하소서. 강화(江華)의 위리(圍籬) 속에 몰래 들여보낸 물건이 매우 많아 교통한 행적이 이미 드러났으니 안에 있는 여종이 알지 못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잡아 와서 별장·내관 등과 똑같이 국문하여 기어이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8일 을미
호조가 아뢰기를,
"대체로 해유(解由)를 받지 못한 자들은 관직에 제수되지 못하고 녹봉도 받을 수 없으니, 이는 조종조의 금석 같은 법전입니다. 그런데 근래 이 법이 점차 무너지고 있어서, 친공신(親功臣)의 경우 해유에 구애받지 않고 으레 품록(品祿)을 지급하고 있는데, 이는 반정(反正)한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서 아무 근거가 없는 사례입니다.
대체로 친공신은 파직되었거나 산직에 있더라도 훈부(勳府)에서 그의 적장(嫡長)에게 체아(遞兒)로 군직(軍職)에 붙이고 녹봉을 지급하는데, 이는 훈신을 대우함에 있어 녹봉을 잃지 않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이미 관직을 제수받는 데 구애된다면 반드시 으레 품록을 받는 데도 구애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2품 중에 해유를 받지 못한 자가 으레 2품군(二品君)의 녹봉을 받고 있으니, 해유를 받지 못한 자가 녹봉을 받는 데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또 녹직을 제수받는 데 무슨 구애될 것이 있겠습니까. 이후로는 해유를 받지 못한 자는 적장에게 체아직의 녹봉을 지급하고 품록을 지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의당합니다.
그리고 거의(擧義)했을 당시 공로가 있으면서 훈적(勳籍)에 참여되지 못한 자에게 특별히 녹봉을 하사하였는데, 당초의 본의는 이들에게 모두 녹직을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빈 자리가 한정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특별한 거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벼슬길에 나온 뒤에는 이 규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그리고 근래 조정 관리들이 해유에 구애받고 있으니 역시 거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녹봉을 받는 것도 매우 부당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는 국가의 경비를 염려해서일 뿐만 아니라 해유법을 중시해서 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국서(國書)를 춘신사(春信使) 편에 보냈는데, 그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해 겨울 말에 귀국의 차관(差官)이 평양에 왔다가 돌아갈 때에 사의를 표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미 받아 보셨을 줄로 여겨집니다. 요사이 해가 바뀌어 봄 기운이 새로운데 모든 일이 다복하시고 기거(起居)가 만안하신지요. 춘신사가 가는 편에 삼가 문후(問候)의 예를 드리고 아울러 토산물을 보내어 작은 성의를 표합니다. 예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면주(紅綿紬) 2백 필, 초록면주 2백 필, 백면주 2백 필, 백저포(白紵布) 2백 필, 백포(白布) 4백 필, 홍목면(紅木綿) 3백 필, 남목면 4백 필, 백목면 1천 필, 정목면(正木綿) 5천 필, 표피(豹皮) 50장, 수달피(水獺皮) 2백 장, 청서피(靑黍皮) 1백 60장, 상화지(霜華紙) 5백 권, 백면지(白綿紙) 1천 권, 채화석(彩花席) 50장, 별화석(別花席) 50장, 세룡석(細龍席) 1장, 단목(丹木) 2백 근, 호도(好刀) 8병(柄), 소도(小刀) 8병, 호초(胡椒) 10두, 황률(黃栗) 10두, 대추[大棗] 10두, 은행(銀杏) 10두, 건시(乾柿) 50접, 전복(全鰒) 10접 등입니다."
1월 10일 정유
밤에 달이 오거동남성(五車東南星)을 가렸고, 목성(木星)이 천관성(天關星)을 범하였다.
1월 11일 무술
전 부호군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기를,
"삼가 지난해 겨울에 구언하시는 성지에 따라 감히 상중에 계신 전하께 번독스럽게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죄주지 않으시고 끝내 온화한 비답을 내리셨는가 하면 특별히 전교를 내리시어 은혜롭게 안부를 물어주시고 음식물을 많이 보내주셨으니, 이것은 하늘에서 비와 이슬이 쓸쓸한 거리의 시든 풀잎을 적셔준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촌초(寸草)의 마음이 어떻게 삼춘(三春)의 따스한 햇빛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넓으신 은혜를 입고 이번 원조(元朝)를 맞이하자 생기가 금세 솟아나고 마른 뼈에 정수(精髓)가 차려는 듯하므로 전하를 그리는 정이 그지없지만 성의를 바칠 길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은 바로 한 해의 첫날로서 여염의 어리석은 사람들도 모두가 서로 마주하여 자기들끼리 축원을 하는데, 더구나 노신(老臣)이 성상께 대해서 한마디 말씀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은명(殷銘)에 ‘참으로 어느날 새롭게 하였으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하였고 주시(周詩)에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그 명운은 지금에 새로워졌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성탕(成湯)이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날로 높아지는 공경이 쌓여서 한결같은 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양덕(陽德)이 자라나고 봄기운이 화창해지는 이때에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탕왕(湯王)·문왕(文王)의 마음을 지니시고 은(殷)·주(周)의 정치에 뜻을 두시어 힘써야 할 일에 대해서는 기어이 힘쓰시고 고쳐야 할 일은 반드시 고치시며, 선을 본받고 정도를 지키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는 덕을 닦아 나아가 천지와 함께 화평하고 일월과 같이 빛나게 하소서. 그러면 온갖 사악스러운 것이 절로 사라지고 모든 사나운 것이 덕으로 돌아와서 수복(壽福)이 산처럼 높고 국가가 반석처럼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소를 보고 지극한 뜻을 잘 알았다. 진달한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유념하여 스스로 힘쓸 것이다."
하였다.
1월 12일 기해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도(江都)는 보장(保障)이 되는 중요한 곳이고 서울에서 가까우므로 광해(光海)를 그곳에 오래 있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잡물을 몰래 들여보낸 변고가 뜻밖에 일어났고 간사스런 무리들이 서로 통한 행적이 환히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환란을 염려하는 계책에 있어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고 보전시키는 도리에 있어서도 극진히 해야 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결코 본부(本府)에 그대로 있게 해서는 안되고 다른 편리한 곳으로 속히 옮겨 훗날의 걱정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광해는 윤기(倫紀)에 죄를 졌고 오랫동안 인심을 잃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임의대로 행동하게 하더라도 조금도 우려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처럼 논계하였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 등이 아뢰기를,
"이치(移置)시키는 데 있어서 먼 곳으로는 제주도, 가까운 곳으로는 교동(喬桐)이 적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제주는 멀고 험난하니 편리하고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금부가 교동에 이치시키자는 뜻으로 아뢰니, 답하기를,
"지금은 담을 쌓기가 어려울 것이니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려 이치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밤에 달이 헌원대성(軒轅大星)을 범하였다.
1월 17일 갑진
상이 하교하기를,
"부호군 장현광은 학문을 쌓고 덕을 지닌 사람으로서 나이도 80세가 지났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재신(宰臣) 중에 나이 80세인 자들도 모두 서계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장현광에게 자헌 대부의 품계를 가하고, 진창군(晋昌君) 강인(姜絪),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과 황치중(黃致中)·이권(李勸) 등도 나이가 80세라는 것으로 모두 가자하였다.
1월 18일 을사
이조 좌랑 한흥일(韓興一)이 상소하여 17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그 조항은, 1. 전제(田制)를 바로잡을 것, 2. 공안(貢案)을 개정할 것, 3. 호적을 엄중히 할 것, 4. 군졸을 무휼할 것, 5. 군액을 보충시킬 것, 6. 도포(逃布)를 징수할 것, 7. 도성 백성들을 안집시킬 것, 8. 보장(保障)을 튼튼히 할 것, 9. 주사(舟師)를 증강시킬 것, 10. 번리(藩籬)를 견고히 할 것, 11. 봉수(烽燧)를 변경시킬 것, 12. 사기(史記)의 일을 분명히 할 것, 13. 선거(選擧)를 공정히 할 것, 14. 사로(仕路)를 균평하게 할 것, 15. 상례(喪禮)·제례(祭禮)를 바로잡을 것, 16. 경재소(京在所)를 회복시킬 것, 17. 나라의 화폐를 정할 것 등이었는데, 이것을 비국에 내렸다.
강진현(康津縣) 사람인 임득례(林得禮)가 원수를 보복하려고 살인하였는데, 형장을 치고 유배하였다. 득례는 본현의 정병이었는데, 그의 아비 임광민(林光民)이 이웃 고을에 사는 나미갑(羅美甲)과 사이가 좋지 못했으므로, 미갑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 당시 득례의 형제는 모두 어렸었는데, 장성하여서 그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밤에 미갑의 집에 들어가서 미갑과 그의 아들 나건(羅鍵)을 칼로 찔러 죽였다. 본현에서 득례 등의 소행인가 의심하여 잡아 가두고 문초하자, 득례가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아비의 원수를 갚았으니 상형(常刑)을 받고 싶다." 하였다. 이에 전후 방백인 송상인(宋象仁)·이경여(李敬輿) 등이 이 사실을 장계하여 아뢰자,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사형을 감하여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하여 전가 사변하도록 한 것이다.
김경징(金慶徵)을 대사간으로, 김광현(金光炫)을 부제학으로, 이경증(李景曾)을 사간으로, 김광혁(金光爀)을 헌납으로, 이시해(李時楷)를 정언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이조 정랑으로, 이안눌(李安訥)을 공청 감사(公淸監司)로 삼았다.
1월 21일 무신
황해도 암행 어사 오전(吳竱)의 장계에 따라 은율 현감(殷栗縣監) 김경항(金慶恒), 송화 현감(松禾縣監) 조후량(趙後亮) 등을 파출(罷黜)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갑자년 이후 전사한 자의 자손들을 이조로 하여금 녹봉하도록 하라."
1월 22일 기유
여이징(呂爾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3일 경술
예조 판서 조익(趙翼)이 상차하기를,
"신은 듣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인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비록 요·순 같은 성인도 지치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많은 현재가 반열에 있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옛날에는 선비를 교육시키는 법이 매우 갖추어져서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모두 학교에 나아가 배우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가르치는 것은 육덕(六德)·육행(六行)·육례(六禮)와 궁리(窮理)·정심(正心)·수기(修己)·치인(治人)하는 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선비들은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배운 자들은 모두가 의리에 대해서 환히 알고 있으며, 그 의리를 실행하는 데에 돈독하였습니다. 후세에는 선왕(先王)이 인재를 교육시키던 정사를 행하지 않았지만, 옛 성현이 교육시키고 학문하던 법이 그래도 남아 있으니, 바로 사서 오경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성현의 사업에 뜻을 갖는 자들은 의당 이것을 배워 성현의 마음과 의리의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한 반드시 자신에 돌이켜 실천의 효과를 구해야 합니다. 만일 그 문장만을 외우고 그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구하는 것이 단지 구두(口頭)일 뿐으로, 어떻게 의리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며 몸소 실행하는 데에 얻는 것이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선비를 뽑는 법에 있어서 사서 삼경으로 규정을 삼고 있어 선비로서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모두 힘껏 외워 익히고 있으니, 이 선발에 합격한 자들은 경서의 뜻에 대해서 환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강경(講經)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보건대, 대부분 용렬하고 비루하여 오히려 사장(詞章)으로 급제한 자들보다 못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과거 보일 때 강경하는 데 있어서 배강(背講)하는 것으로 규칙을 삼고 있는데, 외우는 자들이 한 자라도 잘못 외우거나 토와 해석이 현재의 인본(印本)과 틀리는 것이 있으면 모두 낙제시킵니다. 대체로 글이란 뜻이 중요한 것이고 글자는 중요치 않은 것으로서, 진정 그 뜻을 환히 알고 있으면 글자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더러 틀리는 데가 있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힘을 다하여 익히는 자들이 단지 음(音)이나 토만을 입에 익숙하게 하려고 할 뿐이어서 항상 글자 하나, 토 한 구절이 틀리는 데가 있을까 염려하고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 의미를 알 수 있겠습니까. 선비들이 익히고 있는 것이 이러하니 세상에 인재가 없는 것이 당연하고, 국가에서 인재를 뽑는 것이 이와 같으니 선치(善治)의 시대가 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 경술(經術)이 흥행되고 인재가 많이 나오게 하려면 이러한 과거의 법을 변경하여야 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대소과(大小科)의 시험에는 모두 강경하게 하고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 및 불시에 약간 명을 뽑는 경우에는 간혹 강경을 제외하며, 그 밖의 별시(別試)·증광시(增廣試) 같은 것은 모두 강경을 두고, 강하는 서책은 모두 임강(臨講)하되, 오로지 읽는 데에 서툴고 익숙한 것을 살피고 그 뜻의 소재를 물어보아 익숙하게 읽고 뜻을 환히 통한 자들을 뽑고, 토와 해석에 있어서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인본(印本)과 틀리는 것이 더러 있더라도 문리(文理)만 통하면 모두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하면 선비들이 모두가 경학(經學)으로 선비가 되고 경학을 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뜻을 알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의 서책으로는 《근사록(近思錄)》만이 가장 순수하고 바른 것으로서 초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의 방향을 알게 하는 것이 이 책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사서 삼경 이외에 이 책을 추가해서 시험보이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신은 전에도 우리 나라 인재들이 배강하는 법에 얽매여 경전의 뜻에 대해서 연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성현의 학문이 세상에 밝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탄식하며, 늘 변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관(禮官)의 자리에 있게 되었으므로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차자로 진달한 일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국조(國朝)에서 배강하는 법을 설치한 것이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서를 환히 알고 행실을 수련한 선비들도 대부분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법을 설치한 본의가 어찌 구두만을 외우고 문장의 뜻을 모르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조익이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여 임강(臨講)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했는데, 그가 선비를 조성하는 방도에 있어 그 요점을 깊이 알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임강하는 데 있어서는 정해진 법이 없고 또 정해진 형식도 없습니다. 더구나 말세에는 사사로움이 우세하고 말이 많은데, 유사들이 멋대로 생(栍)을 높이거나 낮추어서 자기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뽑는다면,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던 것이 다만 훗날의 끝없는 폐단을 열어놓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사서 삼경을 시험보이는 것도 과다하다고 염려되는데, 《근사록》을 추가해서 시험보이는 것은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배강하는 규례를 그대로 두고 문장의 뜻을 환히 통한 자들을 뽑는다면 오늘날의 폐단을 구제할 수 있고 선왕(先王)의 법에 위배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월 25일 임자
심재(沈𪗆)를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6일 계축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남한성(南漢城)에서 서울에 들어왔다.
도사(都司) 강신(江莘)이 가정(家丁) 16인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1월 27일 갑인
간원이 아뢰기를,
"나라에 있어서 지극히 엄중하고도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은 사책(史冊)으로, 사람마다 참여하여 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찬수관(纂修官)·등록관(謄錄官)을 계하(啓下)한 수가 무려 70명이나 되고 전후 교체될 즈음에 문관이란 자들은 모두 참여되었으니, 난잡하게 충당시켜 전혀 엄밀히 하는 뜻이 없습니다. 기일이 몇 달 간 지체되더라도 별로 대단히 방해로울 것이 없으니, 숫자를 줄여 정하게 뽑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들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총재관(摠裁官)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왕조 때 춘추관 당상으로 있었습니다. 갑진·을사 연간에 조종조의 《실록》을 등서, 인출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당상 10명, 겸춘추 50명을 더 뽑아 각방(各房)에 나누어 일을 맡겨서 기일을 앞당겨 일을 끝마쳤습니다.
이번 《광해일기(光海日記)》는 불에 타고 산실된 끝에 수습하다 보니 쉽게 일을 해나가지 못했고 중간에 변란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여 여러 해를 거쳐서야 겨우 끝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인출(印出)하기 어려우므로 선사(繕寫)할 것을 품정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전례에 의거하여 많은 관원을 뽑도록 청하여 몇 달 내에 완전히 끝마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원수가 많다 보니 과연 난잡하여 구차하게 충당시킨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비단 외부 의논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신의 마음에도 미안스럽게 여깁니다. 베껴 쓰는 기한이 몇 달 간 지체되더라도 전조(銓曹)로 하여금 숫자를 줄여 정하게 뽑도록 하고, 연로한 사람과 글씨체가 정하지 못한 자도 개차(改差)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8일 을묘
전라도 옥구현(沃溝縣)의 민가에서 개가 발이 8개인 새끼를 낳았다.
1월 29일 병진
전 의정부 영의정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졸하였다.
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치적(治績)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고, 관서(關西)에 두번 부임했었는데 서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선조조(宣祖朝)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臨海), 영창(永昌)의 옥사(獄事)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적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자, 원익이 광해에게 소장을 올려 자전께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君父)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홍천(洪川)으로 귀양 보냈는데, 대체로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상이 반정(反正)하고 나서 맨 먼저 그를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고 매우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가 연로하였으므로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편안하게 하였고 또 흰 요와 흰 옷을 하사하여 그의 검소한 것을 표창하였다. 갑자년002) 변란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공주(公州)까지 호가(扈駕)하였고, 정묘년003) 난리 때에는 총독 군문(摠督軍門)으로서 세자를 전주까지 배행하였는데, 조야가 모두 그를 믿었다. 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이때에 죽으니, 나이 87세였다. 상이 관(棺) 1부(部)를 하사하라 명하고 예조 낭청과 경기 감사를 보내어 금천에 가서 호상(護喪)하게 하였으며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 뒤에 종묘에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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