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기미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가 물러갔다.
황해도 암행 어사 오전(吳竱)이 수안 군수(遂安郡守) 이귀달(李貴達)의 탐학스런 정상과, 풍천 부사(豊川府使) 정익(鄭榏), 장련 현감(長連縣監) 정사명(鄭嗣明), 옹진 현감(甕津縣監) 이급(李伋), 봉산 군수(鳳山郡守) 도경유(都慶兪), 해주 목사(海州牧使) 남선(南銑), 신계 현령(新溪縣令) 정언황(丁彦璜), 곡산 군수(谷山郡守) 이위국(李緯國), 우봉 현령(牛峯縣令) 조종선(趙宗善) 등의 치적(治績)에 대해서 서계하였는데, 상이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처치하도록 하였다.
대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우리 나라 사람에게서 받은 시편(詩篇)의 첫머리에 쓰려고 서문(序文)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데, 그의 뜻은 상국(上國)에 가서 과시하려는 것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필시 능숙한 솜씨를 가진 사람이 지어야 나라에 광영이 있을 것인데, 장유(張維)는 병이 있는데다가 그의 임무가 아니라고 핑계를 대고 있고 신은 평소에 고문(古文)을 익히지 못했으므로 창졸간에 지어내기란 실로 잘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핑계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정입니다. 제학 김상헌(金尙憲)은 외지에 나아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는 재주와 생각이 풍족하고 영민한데다가 고문을 잘하니, 서문을 이 사람에게 짓도록 시키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로 하여금 속히 짓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6일 계해
유성(流星)이 진현성(進賢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으로 들어갔다.
부총 정룡이 떠나 돌아갔다.
2월 9일 병인
김수현(金壽賢)을 대사간으로, 정온(鄭蘊)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체부(體府) 종사관 박황(朴潢)의 치계를 보니, 경주 부윤(慶州府尹) 박홍미(朴弘美), 흥해 군수(興海郡守) 이식립(李植立)은 모두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이 있습니다. 그들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0일 정묘
평안 감사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영유 현령(永柔縣令) 정인수(鄭麟壽)는 파직되어 돌아갈 적에 관곡(官穀)을 많이 가져가 장오죄를 범했습니다. 조정에서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2월 12일 기사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병으로 사임하자 비국이 공조 판서 구굉(具宏)에게 대임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鄭忠信)에게 대신 맡기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총융사는 기보(畿輔)의 군사를 통솔하여 도성이 위급할 때 대비해야 합니다. 구굉은 너그럽고 공정한 사람인데다가 대중을 통솔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이때 이런 임무를 맡기는 데 있어 그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 감사 오숙(吳䎘)이 치계하기를,
"신이 부총(副摠) 정룡(程龍)을 전송하고서 역참(驛站)을 순행하다가 도중에서 총병(摠兵) 심세괴(沈世魁)의 차관(差官) 하상진(夏尙進)을 만났는데, 아마도 초도(椒島)에 다시 설비하려고 온 것인 듯합니다. 전에 상진이 초도에 숨어 있으면서 변방 백성을 침해하자 조정에서 그 사실을 통촉하고 잡아 주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는 하였는데, 그 때 기회를 놓쳐 법망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지금 가정(家丁) 30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의물(儀物)을 성대히 갖추고 대단한 기세를 보였습니다. 그가 말한 바는, 섬에 들어가서 숯을 굽고 철물을 주조하고 남겨 둔 물건을 찾아가는 등의 몇 가지 일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정을 모두 진술하여 심 총병에게 이자하여서 그를 되돌아가게 하여 변방 백성을 구제하여야 합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상진은 등주(登州) 반적(叛賊)의 일가 사람으로서 우리가 의심해 온 지 오래입니다. 지금 그가 다시 초도에 들어가게 하여 훗날의 걱정을 남겨서는 안됩니다. 준엄한 말로 배척하여 즉시 돌아가게 하고 한편으로는 도독(都督)에게 이자하여 거절한 이유를 알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3일 경오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은 선조(先朝)의 원로인데다가 청렴 결백한 덕이 비교할 수 없으므로 내가 마음으로 열복하여 귀서(龜筮)처럼 신임하고 종정(鍾鼎)처럼 중시하였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갑자기 어진 사부(師傅)를 잃었으니 생각하면 비통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부음을 듣던 그날에 즉시 거애(擧哀)하고 싶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시행하지 못했으니, 이것 역시 나의 지극한 한이다.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는 데 있어 일반적인 규례로 거행할 수 없으니,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여 나의 경모(敬慕)하는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승지 이민구(李敏求)를 금천(衿川)에 보내어 치제하였다.
2월 15일 임신
개기월식(皆旣月食)이 있었다.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2월 16일 계유
정원이 아뢰기를,
"일식이나 월식을 수습하는 것[日月收食]이 망매한 일인 듯하지만, 선왕(先王)이 제도를 만든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 사이에 개기월식의 변고가 있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는데, 길거리와 관부에서 끝내 징을 울리며 월식을 구제하지 않았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의 해당 관원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도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종사관 이경의(李景義)의 치계에 부안 현감(扶安縣監) 허색(許穡), 장수 현감(長水縣監) 정운(鄭沄)은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이 있다고 하였으니 파직시키고,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현(李𥙆), 함열 현감(咸悅縣監) 이위(李偉), 광양 현감(光陽縣監) 이대근(李大根)은 치적이 매우 현저하다고 하였으니 논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7일 갑술
달이 처음 떠오를 적에 붉은 기운이 있었는데 모양은 횃불 같았다.
2월 18일 을해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이경여(李敬輿)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정두원(鄭斗源)은 전에 강원도 방백으로 있을 때 화주(化主)라 자칭하고 거대한 사찰을 창건함에 있어 토목의 역사로 온 도에 해를 끼쳤습니다. 그가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받으려 한 죄에 대하여 응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9일 병자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평양의 무열사(武烈祠)는 바로 임진년에 동정(東征)한 중국 장수 5명을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정묘년 변란에 사당은 아무 탈이 없었으나 다섯 장수의 화상(畫像) 중에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화상만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이여백(李汝栢)의 화상은 허리 윗부분만 남아 있고 그밖의 세 장수의 화상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조만간에 조사가 나올 것이고 지금도 중국 장수들이 왕래하는 자가 많은데 그들이 보고 매몰스럽게 여길 듯싶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석 상서는 본 화상 그대로 두고 이여백의 화상은 다시 그리든지 아니면 수보(修補)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리고 세 장수는 어쩔 수 없이 위판(位版)을 설치해야 하니, 관작과 성명은 임진년에 접반관(接伴官)이었던 현재의 노재신(老宰臣)과 본지방의 노인들에게 물어서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왕세자(王世子)가 궁관(宮官)을 보내어 고상(故相) 이원익(李元翼)에게 치제하였다.
관향사(管餉使) 김광욱(金光煜)이 치계하기를,
"요즈음 복호(復戶)의 폐단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군량의 감모(減耗)가 실제로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입니다. 평양 한 부(府)로 말하더라도 계유년004) 조의 개간된 토지 수의 총계는 8천 3백 64결(結) 51부(負)입니다. 그런데 복호시킨 것은 4천 3백 82결 43부이고 실역(實役)의 수는 3천 9백 81결 8부입니다. 그리고 감영(監營)의 관속, 부(府)의 관속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복호시키고 어호(漁戶)라고 핑계대고 면세된 것도 2천 7백 70여 결입니다. 양서(兩西) 각 고을 중 본부가 가장 지나치게 복호하였으니 한두 차례 조사하여 정해야 하지만, 소요스런 걱정이 없지 않을 듯하므로 우선 그대로 두고 따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영숭전(永崇殿)의 수복(守僕)은 무려 69인인데 한 사람마다 2결씩 급복(給復)하여 합계가 1백여 결입니다. 지금은 영정(影幀)을 서울에 옮겨 봉안하여 수복들의 일이 전날과 아주 다르니, 시종 급복하는 것은 부당한 일인 듯합니다. 지금부터는 법전에 따라 단지 가호의 잡역만 견감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0일 정축
접반사 신계영(辛啓榮)이 치계하기를,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행리(行李)에 지니고 있는 비단으로 대소미(大小米) 50석과 교환하여 바다를 건너가는 데 노자로 쓰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값을 받고 양곡을 바꾸어 주는 것은 미안한 일인 듯합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일일이 지휘할 수 없는 것이니, 본도의 감사와 관향사가 편리한 대로 선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가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두표는 전후 관직을 역임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이나 치적이 없었다. 방백에 제수되어서는 위력으로 한 도(道)를 탄압하려 하자 수령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 미워하였으므로 마침내 상소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한 것이다.
상평청(常平廳)이 아뢰기를,
"돈이란 것은 쓸모 없는 기물로서 추워도 입을 수 없고 굶주려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재화(財貨)를 유통시킬 수 있기 때문에 ‘화천(貨泉)’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물이 근원이 있음으로써 유포될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평창에서 주조한 돈으로 삼수군(三手軍)의 요(料) 중 10분의 1을 돈으로 주고 있는데, 애초에 백성들에게 받으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돈을 받은 삼수군이 모두 상평창으로 옵니다. 상평창의 쌀은 한계가 있어 이들의 돈을 다 사들이지 못하자, 사람들이 모두가 ‘돈을 쓸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국가에서 돈을 받는 제도를 설치하지 않고 단지 민간에게 전매(轉賣)하게만 하니 우매한 백성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경기 여러 고을에서 지난해 미수분의 쌀을 돈으로 대신 받는다는 말을 듣고 이미 돈을 가지고 와서 바친 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서울에서 가까우므로 돈을 바꾸기에 쉬웠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돈을 받는 제도를 만들어 놓고서 지방에서 주조하지 않고 단지 서울의 돈을 지방에 유포시키려 하면, 돈을 가지고 지방으로 간 자들이 필시 그 값을 멋대로 조종하여 지방에서 그 폐단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1년에 왜인이 바치는 3만 근의 동(銅)을 안동(安東)·전주(全州)·공주(公州) 등지에 나누어 보내어 주조하게 하되, 그 값을 서울보다 조금 높게 하여 백성들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응당 바쳐야 할 쌀에 대해서 몇 섬의 값이 얼마의 돈과 서로 맞먹게 하여 돈으로 백성들에게 받아들이면, 백성들이 값 이외로 더 바치는 폐단이 없고 관가의 쌀은 그대로 있게 됩니다. 돈을 관에서 받아들이면 백성들이 돈을 구하여 관에 바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돈이 유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에 바칠 때 목필(木匹)의 길고 짧은 것, 미곡의 정하고 추한 것에 대해 받아들이고 물리치는 걱정이 없게 되어 백성들이 필시 좋아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서울과 지방의 돈 값이 다르게 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깊이 생각하지 못한 말입니다. 돈 가치가 서울이 낮고 시골이 높을 경우 돈을 가진 자들은 시골에 가서 곡식을 사오고 곡식을 가진 사람은 서울에 와서 돈을 바꾸어 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미곡이 서울에 모이고 돈이 시골에 내려가게 되어 백성들이 돈을 받아들여서 관에 바칠 수 있고 관에서 받아들여서 백성들에게 지급할 수 있어서 유통되어 막히는 데가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돈을 받아들이는 제도를 세우지 않고 돈이 쓰여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물의 근원을 막아놓고 물이 흐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렇게 하고 돈이 쓰여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곧바로 그만두어 버린다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화폐를 유통시키는 데 이해(利害)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중이 달려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돈을 받아들이는 제도와 지방에서 주조하는 일을 제때에 거행하여 꼭 시행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지만 돈 가치가 서울과 지방이 다르게 하면 나라에서 시행하기에 곤란할 듯싶다. 다시 잘 살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시장의 물가[市價]를 다르게 하지 않는 것이 왕정의 중대한 것으로서 성상께서 생각하신 것이 실로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셨습니다. 서울이나 지방의 값이 같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안동 백성들이 모두 국(局)을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기를 바란다고 하니, 민정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지방에서 돈을 주조하면 송경(松京)에서 원래 사용하던 동화(銅貨)도 다시 주조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안동의 예에 따라 그곳에서도 주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2일 기묘
장신(張紳)이 상소하기를,
"도내 여러 고을이 변란을 겪지 않은 곳이 없지만 청천강 이북이 가장 심한데, 청북에서도 용천(龍川)·의주(義州)·철산(鐵山) 세 고을이 또 심합니다. 지난해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의 변란이 농사철에 일어나서 한 이랑의 토지도 경작하지 못했으므로 굶어 죽기만을 기다릴 형편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조정에서 진념하여 관향사(管餉使)에게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큰 혜택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오늘날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만일 피곡(皮穀)을 잇따라 나누어 줄 경우 사망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착실히 경작시키려 한다면, 죽으로 겨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데 밭에 나아가 힘써 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난해처럼 농사철을 넘긴다면 조정에서 구제해 주어야 할 근심이 언제나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1천 석의 쌀을 특별히 풀어서 고을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한편으로는 죽음에 임박한 처지를 구제해 주고 한편으로는 경작하는 데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리하여 몇 달만 넘기면 보리가 익게 되니, 그후부터는 살아갈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장신의 말에 따라 부근 고을에 저축한 쌀 수천 석을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 평양에 사는 진사 양점형(楊漸亨) 등이 상소하기를,
"고(故) 내자시 정(內資寺正) 한우신(韓禹臣)은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등과하였으나 의리의 학문에만 전심하고 과거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미를 위하여 과거에 응시하여서 급제하였지만 더욱 겸손하였고, 어미를 섬기는 데 있어 매우 효성스러웠으며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을 먹었는데, 선조(宣祖) 때에 특명으로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 때 고원 군수(高原郡守)가 되어 좌석 곁에 독주(毒酒)를 비치해 놓고 죽음으로 자신의 분의를 지키려 하다가 적이 패한 뒤에야 그만두었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는데도 어떠한 포상을 받지 못한다면 선행과 훌륭한 덕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관작을 추증하여 표창하도록 하였다.
2월 23일 경진
선혜청(宣惠廳)이 아뢰기를,
"본청에서 봄 가을 두 차례에 8두씩 받아들이는 곡식에 대해서 10분의 1을 돈으로 바치게 하면 경기 지방의 백성들이 땔나무, 숯, 짐승, 물고기 등을 팔아 관에 바치고 농사지은 곡식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한 해를 보내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니, 이보다 더 큰 혜택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물(貢物) 값을 받을 각사(各司)의 주인(主人)들이 이 돈을 얻게 되면 경기 지방의 백성들에게 쉽게 팔 수 있어서 안팎으로 유통될 것이니, 돈을 사용하기에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본도 감사에게 유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4일 신사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임련(林堜)을 장령으로 삼았다.
제주(濟州)에 표류한 중국인 이여과(李如果) 등 10인을 가도로 보냈다.
2월 25일 임오
호조가 공물을 바치지 않은 각 고을을 파면 추고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황해도 어사 오전(吳竱)이 양서(兩西) 역로(驛路)의 잔폐된 상황에 대해서 극언하였습니다. 지금 하삼도와 강원도의 각역에서 베를 거두어 양서로 나누어 보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도의 감사들에게 여러 역의 풍요롭고 잔폐된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등급을 나누어 베를 거두게 해서 초겨울 이전까지 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회복될 때까지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6일 계미
헌부가 아뢰기를,
"삼명일에 진상하는 말에 대해서 방납하는 폐단이 날로 더해지고 있어서 서울과 지방에 막대한 걱정이 되고 있는데, 해당 관사에서도 자유로이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 폐단을 제거시키지 않으면 백성들의 피해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방납하는 자들을 적발하여 중한 죄로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것이 옳다. 그러나 지방의 마주(馬主)들은 모두 세력이 없고 서울의 사대부 중에는 이익을 탐내는 자들이 많다. 그러니 염치의 마음을 먼저 깨우쳐 주지 않으면 이 폐단을 제거시킬 날이 없을 듯싶다."
하였다.
2월 27일 갑신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의 민가에서 소가 세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는데, 숫컷이 둘, 암컷이 하나였다.
2월 28일 을유
함경 감사 이명(李溟)이 치계하기를,
"차호(差胡)가 상호(商胡) 78인을 데리고 회령(會寧)에 와서 말하기를 ‘두 나라가 특별히 대관(大官)을 보내어 모두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접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날마다 소 한 마리씩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들의 뜻은 호종(胡種)들을 쇄환하려는 것인데, 가지고 온 서신을 등서하여 올려 보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한(汗)의 서신이 이미 회령에 당도했으면 조정에서 답서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여 글을 만들어 답하게 하는 것이 체모일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오단(吳端)을 수찬으로, 이행우(李行遇)를 검열로 삼았다.
2월 29일 병술
접응사(接應使) 김대건(金大乾)이 치계하였다.
"호차 대송아랑혁(大宋阿郞革) 등이 말하기를 ‘지난해 번호(藩胡)들을 모두 본고장으로 들여보낼 때 더러는 빠져 그대로 있는 자도 있고 혹은 낙후되어 있다가 곧바로 돌아온 자도 있다. 이들이 모두 조선에 살면서 장가들고 시집가서 아들 손자를 낳았지만 원래 번호의 종족인 것으로서 귀국과 관계가 없으므로 쇄환시키기를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아직 말한 대로 따르지 않았으므로 지금 대관을 보내어 결말을 지으려 한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번호들이 철거하여 돌아갈 때 유기된 아이들이 없지 않았다.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어린 아이가 죽게 된 것을 애처롭게 여겨 간혹 거두어 기르면서 아버지라 부르고 아들이라 부르며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 지금와서 결단코 부응할 리가 없다. 전 병사(兵使) 김준룡(金俊龍), 전 부사(府使) 신경호(申景琥)가 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가부를 아뢰지 않은 채 허실을 구분하지 않고서 멋대로 잡아 보낸 것이 무려 10명에 이르렀으므로 모두 이 때문에 나포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대호(大胡)가 대답하기를 ‘만일 끝내 조사하여 보내주지 않으면 해를 넘기더라고 결코 돌아갈 수 없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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