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9권, 인조 12년 1634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3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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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해

승지 조정호(趙廷虎)를 해주(海州)에 보내어 과거를 실시하였다. 유학(幼學) 김인(金寅)·유창신(柳昌辰), 진사 유진삼(柳晋三), 유학 김굉(金宏)·이비현(李丕顯) 등 5인을 뽑았는데,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고, 무과(武科)에서 거수(居首)한 보인(保人) 김득길(金得吉)은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였다.

 

3월 3일 기축

간원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위리시킨 곳에 잡물을 몰래 들여보낸 일이야말로 매우 흉악하고 은밀한 것으로서 그 당시 수직했던 관원을 신문 추국하게 한 이상 마땅히 엄하게 형벌하여 기어이 실정을 알아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별장(別將) 성대훈(成大勳)에 대해서 아직 실정을 다 말하기도 전에 특별히 형신을 정지하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시원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대훈의 첩은 바로 광해(光海)의 인척이라고 하는데, 그들 사이에 특별한 내용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엄하게 국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얼마 안되어 삭직하여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3월 4일 경인

달이 묘성(昴星)을 가렸다.

 

3월 5일 신묘

호조가 아뢰기를,
"신미년005)  조의 5도(道) 전세(田稅)와 양호(兩湖) 작미(作米)의 미수된 것이 6백여 석에 이르고, 5결포(五結布)와 노비 신공(奴婢身貢)의 미수분이 13만여 필에 이릅니다. 이러한 요역은 다른 복정(卜定)한 것에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추수가 끝난 뒤에 차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도에 이문하여 일일이 기록해서 보내게 하였더니 지금에야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조에서 미수분에 대해 뽑은 것과 아주 같지 않은데, 지금 이문하여 다시 조사하게 한다면 또 해를 넘기게 되어 마침내 끝마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낭청 한 사람을 양호에 보내어 받을 수 있는 실지 수량에 대해서 우선 독촉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6일 임진

도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종사관 윤명은(尹鳴殷)이 서계한 내용에, 수영 우후(水營虞候) 유하(柳遐), 서천 군수(舒川郡守) 이극화(李克華), 남포 현감(藍浦縣監) 손종로(孫宗老), 천안 군수(天安郡守) 조경기(趙慶起)는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이 있다고 하였으니 파직시키고, 홍주 목사(洪州牧使) 안복선(安復善), 한산 군수(韓山郡守) 심기주(沈器周), 아산 현감(牙山縣監) 박대화(朴大華)는 모두 정사를 잘한 성적이 있다고 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논상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운선(漕運船)이 경강(京江)에 도착하면 본조와 병조 당상, 전함사 제조(典艦司提調) 및 승지가 점검하고서 아뢰는 것이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으니, 조종조에서 전세(田稅)를 중시하고 간악한 짓을 방지하는 법이 지극히 엄밀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법이 폐지된 지 오래 되었으므로 조졸(遭卒)과 두 창고의 하인들이 아예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몰래 도적질하고 물을 뿌려 불리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대전》의 법에 따라 본조 및 승지, 병조 당상이 나아가 점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7일 계사

우의정 김류가 여러 능을 봉심하고서 들어와 아뢰기를,
"신이 배사하고 나갈 때 길에서 흰 옷을 입은 관원을 만났는데 말을 몰아 곧바로 앞서 가기에 사람을 시켜 물어보았더니 중관(中官)이라고 자칭하였습니다. 신들이 곧바로 모두 회피하였는데 그가 지나갈 때에 보니 앞에 가도(呵導)하는 사람이 없고 뒤에 별감(別監)도 없었으므로 봉명인(奉命人)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환관들이 교만스럽고 멋대로 행동하는 습관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당 내관을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3월 8일 갑오

헌부가 아뢰기를,
"내관이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이 날로 심해져 심지어 개인 사정으로 출입할 때에도 버젓이 벽제(辟除)하며 조금도 기탄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삼가 조보(朝報)를 보건대, 대신과 중신들도 이들에게 멸시를 받고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계하였는데도 전하께서 죄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이들이 더욱 기탄하는 것이 없게 되어 국가의 무너진 기강을 끝내 다시 진작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해당 내관을 나국하여 죄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추고하도록 하였으니 그의 함사(緘辭)를 보고 나서 처치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상평창이 아뢰기를,
"전날 계사에, 돈 가치를 면포(綿布)로 일정한 규례를 정하고 쌀값으로 정하지 않았던 것은 쌀은 봄 가을과 풍년 흉년에 따라 값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면포는 통화(通貨)이기 때문에 그 값이 다르지 않고 돈도 역시 통화이기 때문에 면포로 비준하여 값을 정한 것입니다. 쌀은 사람이 늘 먹어야 하는 것으로서 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민간에서 값이 수시로 변동하는 대로 따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와 같은 규례를 정해 놓으면 돈을 가진 자들이 멋대로 조종하지 못하게 되어 매우 편리할 듯하다."
하였다.

 

3월 9일 을미

강학년(姜鶴年)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10일 병신

도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종사관 박황(朴潢)의 치계에, 인동 부사(仁同府使) 안몽윤(安夢尹)은 한직에 있으면서 탐욕을 부렸고, 청도 군수(淸道郡守) 민여찬(閔汝纉)은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으며, 풍기 군수(豊基郡守) 김상윤(金相潤)은 군기(軍器)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종사관의 사체는 어사와 다르다. 수령들의 현부에 대해서 잇따라 치계하지 말게 하고,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일시에 처치하라."
하였다.

 

광주 목사 겸 토포사(廣州牧使兼討捕使) 이현달(李顯達)이 치계하기를,
"이천 부사(利川府使) 허휘(許徽)는 도둑을 잡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 전후 잡은 도둑이 무려 20여 인에 이르고,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행건(李行健)도 10여 인을 잡았으므로 각 고을에서 도적 떼가 날뛰는 걱정을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회계하기를,
"포학스럽고 사나운 도적이 경기 지방에 일어났는데 허휘·이행건이 이미 포획하였으니, 의당 전례에 따라 논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은명(恩命)에 관계되는 일이니, 상께서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허휘는 가자하고, 이행건은 승서하라."
하였다.

 

3월 11일 정유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도(江都)의 위리 안치시켰던 곳을 옮기는 것은 실로 환란을 염려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시종 보전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날 대신이 교동(喬桐)으로 옮기자고 품정한 일에 대해서 군정이 모두 교동으로 옮기는 일은 곤란하다고 여깁니다. 더구나 강화의 병졸을 더 들여보내어 수비하게 한다고 하니, 이는 더욱 온당치 않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른 편리한 곳에 대해서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밖에 다른 데는 적당한 곳이 없다."
하였다. 그 뒤 대신이 다시 의논하여 아뢰기를,
"교동보다 더 편리한 곳이 없는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3월 13일 기해

헌부가 아뢰기를,
"궁전 뜰에서 선비를 시험보이는 일은 사체가 극히 엄중합니다. 그러므로 전부터 그 일을 주관하는 사관(四館)이 반드시 미리 시권(試券)을 바쳐 정원에서 보인(寶印)을 찍고 숫자를 대조하여 이름을 기록하며, 입문(入門)시킬 때 점검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런데 그저께 전 봉사(奉事) 이분(李翂)은 애당초 시권에 보인을 찍지 않고 제멋대로 가지고 들어갔는데 사관이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해당 사관(四館)은 파직시키고 금란관(禁亂官)은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아울러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고(故)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와 박영신(朴榮臣)의 아들 박지병(朴之屛)·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 등 5인이 이수백(李守白)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대궐에 나와 상소하기를,
"신 등은 갑자년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 때 국사에 목숨바친 신(臣) 청홍군 이중로, 풍천 부사(豊川府使) 박영신의 아들입니다. 이수백은 신의 아비가 저탄(猪灘)에서 전사하던 날 쌓인 시체 속에서 신의 아비를 찾아내어 머리를 베어 가지고 역적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에게 가서 공을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 여러 장수의 머리를 원수(元帥)가 있는 곳에 보내어 그들이 사기를 잃게 하라.’고 하자, 이괄이 그의 계책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신의 아비 영신은 이가 부러지고 혀가 잘렸는데, 이는 모두가 수백이 한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그를 사지(死地)에서 특별히 용서하여 흉악한 자의 목숨이 아직도 살아 있으므로, 신들은 뼈가 저리고 가슴 아파하면서 11년 동안 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다행스럽게도 길에서 만나 쳐죽였는데, 비록 하늘에 사무치는 개인적인 원한을 씻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살인한 죄를 면하기는 어려우므로 신들은 감히 스스로 숨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형관에게 내려 신들의 죄를 다스리게 하여 신들로 하여금 지하에 가서 선신(先臣)을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소를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유사가 마땅히 법대로 처치해야 할 터인데 대신에게 미룬단 말인가. 금부로 하여금 나국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금부가 문웅·문위·지병·지원·지번 등을 안문(按問)하여 아뢰니,
답하기를,
"반신 적자(叛臣賊子)가 궁지에 몰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그와 원수진 사람이 감히 보복하지 못하는 것은 국법이 있기 때문이다. 원수진 사람이 임의대로 죽이기를 모두 문웅 등이 한 것처럼 한다면, 어찌 귀순하는 자가 있겠으며 또한 괴수의 머리를 베어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가 비록 하늘에 치솟는 죄악이 있더라도 조정에서 이미 공이 있다 하여 목숨을 살려주고 상을 베풀기까지 하였다면 원수진 사람으로서 함부로 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낮에 도성 안에서 떼를 지어 살육하고 머리를 베어 들고 대궐에 나왔으니 매우 놀라운 일일 뿐더러 뒷폐단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치하되, 사사로운 정에 동요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류가 의논드리기를,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천지 만고의 대법이니 피살자의 공과 죄는 논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수백이 죄는 있고 공은 없더라도 문웅 등의 죄를 감할 수 없고, 수백이 공은 있고 죄는 없더라도 문웅 등의 죄가 무거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비를 위하여 복수한 자들이 많았는가 하면 역대 제왕이 법을 굽혀 용서해 준 일도 많았습니다. 옛날 양(梁)나라 천감(天監) 연간에 회양(淮陽)사람 상응화(常應和)가 그 고을 태수 성안락(成安樂)을 죽이고 성을 바쳐 내부(內附)해 오자 무제(武帝)가 공이 있다고 여겨 상을 주었는데, 안락의 아들 성경준(成京寯)이 사람을 사서 찔러죽이고 그의 처자식까지 죽여 씨도 남기지 않았으나, 무제는 의롭다 하여 석방시켰습니다. 우리 광묘조(光廟朝)006)  에서도 신용개(申用漑)의 아버지가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로 있을 적에 이시애(李施愛)의 도당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 뒤 용개가 대낮에 도성 복판에서 아비의 원수를 칼로 베어 머리를 들고 대궐에 나아가 목숨을 빌자 성묘(成廟)께서 끝내 용서하였습니다. 공이 있는 자를 멋대로 죽인 것으로 말한다면 경준의 일이 근사하고, 도성에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한다면 용개의 일과 근사한데, 이 두 가지로 논하면 문웅의 죄가 어디에 해당되는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중로·박영신은 충신이고 이수백은 역적인데, 충신의 아들이 한 역적을 죽인 것을 법으로 다스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윤기(綸紀)를 부식하고 절의를 숭상하는 도리에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위로는 조정 신하로부터 아래로 여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소문을 듣고 손뼉을 치며 그 의리를 높게 여겨 말하기를 좋아하니, 인정이 같은 것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윤방은 의논드리기를,
"삼가 어제 판부하신 내용을 보건대, 국법을 엄하게 하고 후환을 염려하신 뜻이 지극하였습니다. 성인의 한 말씀이 바로 만세의 금방(禁防)을 세우는 것입니다. 수백의 죄에 대해서 이미 그의 죽음을 용서해 준 이상 멋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로 등이 국사를 위하여 죽었으니 그 아들이 복수한 일에 대해서도 상례로 논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복수의 한 가지 일은 윤기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경(經)에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의리를 말하였는가 하면 율(律)에는 일정한 조문(條文)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에는 그 의리를 분명하게 말하였는데 율에는 그 조문이 아예 없으니, 옛 성현이 의리를 말하고 율을 만드는 데 있어 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문웅 등의 죄를 특별히 용서해 줌으로써 자식들에게 효도를 권면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의논드리기를,
"수백을 베지 않는 것은 일시적으로 뒷일을 염려한 계책이고 아들로서 아비의 원수를 보복하는 것은 만고의 떳떳한 의리인데, 어떻게 일시의 뒷일을 염려하는 계책으로 만고의 떳떳한 의리를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문웅 등의 의열(義烈)에 대해서는 법을 굽혀 용서해 줌으로써 국가의 원기를 부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옛날에 장심소(張審素)는 장오죄를 범했다는 것으로 고발을 당했는데 어사 양왕(楊汪)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가서 안찰하여 죽였습니다. 그리고 심소의 두 아들인 장황(張瑝)·장수(張琇)도 연좌되어 영외(嶺外)로 유배갔었는데, 양왕이 억울하게 죽인 것에 대해 늘 통분해 하다가 몰래 도망쳐 돌아와 도성 안에서 양왕을 죽였습니다. 양왕이 심소를 죽인 것은 조서를 받들고 가서 안옥(按獄)한 것이고 황·수가 양왕을 죽인 것을 망명(亡命)하여 제멋대로 죽인 것이니, 법률로 논할 경우 죄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장구령(張九齡)이 그들을 살리려 하였지만 이임보(李林甫)·배요경(裵耀卿)이 법을 무너뜨렸다 하여 끝내 죽였는데, 당시 사민들이 가엾게 여겨 애뇌(哀誄)를 짓고 돈을 거두어 장사지냈으니, 인정의 소재를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유(先儒) 호치당(胡致堂)도 장구령이 살리려고 한 것은 옳다고 하였습니다. 수백이 역적 이괄의 척후였는데 이중로 등이 그에게 살해되었으니, 수백이 중로를 죽인 것은 양왕이 심소를 죽인 것과 다르고, 문웅이 아비 원수를 갚은 것은 황·수와 같이 망명한 것도 아니고 불공대천의 의리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자신이 필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원수진 사람을 찔러 죽였다면 어려운 일이라 하겠지만,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이런 일을 하였다면, 한 필부를 죽이는 것이 무엇이 어려웠겠는가. 대체로 이런 일은 제멋대로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해조가 지나치게 비호하니, 국가의 체모가 이럴 수는 없다. 살인자는 본시 정해진 법률이 있으니 실로 경솔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아비의 충의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가벼운 율에 따라 결장하고 정배시키라."
하였다. 이에 문웅을 전주에, 문위를 익산(益山)에, 지병을 창평(昌平)에, 지번을 비안(庇安)에, 지원을 의성(義城)에 유배시켰다.

 

3월 14일 경자

별시(別試)의 전시(殿試)를 실시하여 오달제(吳達濟) 등 12인에게 급제를 내렸다.

 

3월 15일 신축

춘신사(春信使) 이시영(李時英)이 돌아오는 길에 강을 건너와서 호서(胡書)를 베껴 보냈는데, 그 글에,
"매매(賣買)하는 일은 두 나라가 친애하는 좋은 뜻이고 물건을 사고 팔 때에는 공정한 도리로 교역하는 것이 좋은 것이오. 그런데 절반도 안되는 보화를 가지고 전량의 값을 받으려 하니, 왕은 지금 이후로 엄하게 금단하여 공정한 도리로 서로 교역하게 하시오."
하고, 또,
"신미년에 쇄환시키지 않기로 약조한 것은 바로 전진(戰陣)에서 포로가 되었던 조선 사람이 도망쳐 돌아간 자일 뿐이고, 우리 금(金)나라 사람이 도망해 간 자를 두고 한 말은 아니오. 지금 대인(大人) 한 사람을 보내어 회령(會寧)에 가서 응당 데려올 사람은 데려오고 데려오지 않을 사람은 머물게 할 것이니, 왕의 신하도 회령에 가서 명백히 결말을 짓게 해야 할 듯싶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황해 감사가 본조에 보내온 이문에 ‘강 천사(姜天使)의 비문(碑文)을 돌에 새겨 중국에 보내려 하는데, 대학사(大學士)가 지은 비문을 쓰게 된 이상 졸필의 글씨를 새길 수는 없다. 당대의 명필이 정서하여 새기게 해서 안목을 지닌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정 선비들 중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아 써서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6일 임인

경상도 안음(安陰)의 사인(士人) 신경직(愼景稷) 등이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정여창(鄭汝昌)이 후학(後學)을 계발하고 오도(吾道)를 부호한 공에 대해서는 신들의 몇 마디 말을 들어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창이 홍치(弘治)007) 갑인년008)  에 본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였는데, 5년 동안 재임하면서 인정(仁政)을 베풀고 문교(文敎)를 일으킨 것은 예사 수령들에게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에 비석과 사당을 세우고 용문 서원(龍門書院)이라 호칭하였는데, 그가 고을에 있을 때 소요하던 곳입니다. 그리고 고을 사람인 임훈(林薰)·임운(林芸) 형제는 여창의 학문을 사숙(私淑)한 자들로서 산림(山林)에서 수양을 쌓으며 성현을 흠모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일국의 선사(善士)였으므로 이들을 배향하였습니다. 함양(咸陽)은 바로 여창이 살던 고을이었는데, 그곳 남계 서원(藍溪書院)은 이미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화를 받은 신들의 고을이 여창에 대한 감회가 어찌 그곳과 다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액호를 내리시어 문교를 빛나게 해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한 사람의 서원에 대해서 있는 곳마다 사액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하다. 천천히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이척연(李惕然)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19일 을사

경상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치계하기를,
"안동부(安東府)에서 돈을 주조하게 한 명령은 실로 민심에 부합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안동은 외진 곳에 있으므로 돈을 주조한 뒤에 우도(右道)의 백성들이 오가며 교역하기에 형편상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한 고을에서 주조하는 것이 무려 8천여 근이나 되면 일을 쉽게 끝낼 수 없습니다. 대구(大丘)는 영남의 중심부인데다가 행상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주공(鑄工)도 그곳에 많습니다. 그리고 부사 홍이일(洪履一)은 매우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이니, 만일 이 부에서 반을 나누어 주조하게 한다면 원근의 백성들이 균등하게 이익을 받게 되고 조정에서 실시하는 법이 당장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3월 20일 병오

주청사(奏請使)가 치계한 내용에, 봉전(封典)을 이미 끝마쳤고 태감(太監) 노유령(盧維寧)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나온다고 하였다. 이에 명하여 김신국(金藎國)을 원접사로, 홍서봉(洪瑞鳳)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김수현(金壽賢)을 이조 참판으로, 김경징(金慶徵)을 대사간으로, 윤지경(尹知敬)을 승지로, 김집(金集)을 선공감 첨정으로 삼았다.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좌기성(左旗星) 위로 들어갔다.

 

대교(待敎) 유황(兪榥)이 포쇄(曝晒)하는 일로 봉화(奉化)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신이 태백산(太白山)에 가서 사고(史庫)의 지형을 살펴보니 과연 본도에서 보고한 것과 같았습니다. 사고를 높은 봉우리 두 언덕 사이에 설치했는데 물이 빠질 수 없는 움푹 들어간 수렁이므로 기둥과 중방이 무너졌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다가 짓는다면 공력만 들일 뿐입니다. 사고 아래 1리 쯤 되는 곳에 있는 서운암(棲雲庵)의 뒤에 지을 만한 곳이 있다고 하기에, 신이 현감과 사고의 참봉과 함께 두루 살펴보니 과연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마음대로 지휘할 수 없으니, 예조와 본관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사고의 옛터가 좋지 않다고 하니 옮겨 짓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춘추관이 아뢰기를,
"사고의 지형이 무너지는 곳이라면 유황이 치계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좋지 않으니 조사(詔使)가 돌아간 뒤에 다시 짓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애당초 깊고 험난한 곳에 사고를 건립한 것은 필시 그 뜻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3월 21일 정미

비국이 아뢰기를,
"조사의 행차가 국고가 바닥난 때에 나오는가 하면, 조사가 청렴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고 이번에 우리 나라에 나온 것도 뇌물을 쓰고 나왔다고 합니다. 신들이 호조와 상의하였더니 써야 할 여러 가지 물품의 숫자가 을축년 조사 때 비용의 반절 밖에 안된다고 하니, 별도로 마련하지 않으면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배시킨 죄인들에게 경중을 나누어 물건을 바치게 하고 사면시키자.’ 하고, 어떤 사람은 ‘삼명일 방물을 작포(作布)하여 보충해 쓰자.’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을축년의 전례에 따라 상직(賞職)·허통(許通)·증직(贈職) 등의 일을 거행하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아문에 비축되어 있는 은냥과 포목은 형편을 보아 가져다 쓰고 병조의 여정포(餘丁布)도 전부 호조에 넘겨 주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죄인들에게 물품을 바치게 하는 것과 상직 등의 일은 부당한 듯하다."
하였다.

 

3월 24일 경술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영조(迎詔)·영칙(迎勅)할 때와 천사(天使)를 접대할 때의 복색은 본래 정해진 규칙이 있으므로 열성(列聖)이 모두 이에 따라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선조(宣祖)께서는 무진년009)   조사가 나왔을 때 마침 명종 대왕의 상중에 계셨으므로 하마연(下馬宴) 때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병인년010)   조사 때에도 이에 따라 행하였습니다. 대체로 옛날에는 삼년상에 부득이한 경우 검은 상복을 입고 출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기(禮記)》에 ‘최복(縗服)을 대궐문에 들이지 않는다.’ 하였는데, 노(魯)나라 교고(蟜固)가 계무자(季武子)에게 말하기를 ‘사(士)는 대궐문[公門]에서만 상복을 벗는데 그것은 존경하는 자리에 상복을 입고 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흉복을 벗는 것이 그다지 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므로, 영조하고 나서 다례(茶禮)와 하마연 이후의 각종 연회의 의주(儀註)를 모두 병인년의 예에 따라 흑포(黑袍)를 착용하는 것으로 강정(講定)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인년에 영조한 뒤에 다례와 하마연 때에 천사가 길복을 입고 행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따랐다고 하는데, 천사를 접대하는 일은 조서나 칙서를 맞이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아주 길복을 입은 것도 미안할 듯하여 이번에 흑포를 착용하는 것으로 정하였는데, 천사가 길복을 입기를 강요하면 역시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연회를 베풀 때 왕세자가 둘째 잔을 올리고 세째 잔부터는 종재(宗宰)가 올립니다. 근시(近侍)와 시위 장사, 사옹원 제조는 모두 무늬가 없는 흑의(黑衣)를 입고, 천사 앞에 출입하는 관원은 모두 길복을 입으며, 왕세자와 잔을 올리는 종재도 모두 길복을 입으며, 풍악은 진열만 해 놓고 올리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조사를 접대할 때 상의 복색을 병인년의 예에 따라 흑포로 정하고 임시해서 천사가 길복을 착용하도록 강요하면 역시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인년의 등록(謄錄)을 가져와 살펴보니, 영조하고 나서 접견할 때 상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착용하자, 조사가 말하기를 ‘오늘 일은 온 천하가 다같이 경사롭게 여기는 날인데 소복으로 서로 만날 수 없다. 성천자의 예제가 이러하기 때문에 감히 길복을 입도록 청하는 것이다. 내일 이후로 소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당초에 소복으로 마련했다가 조사가 말을 한 뒤에야 고쳤습니다. 지금 상께서는 대상(大祥)이 멀지 않고 소상 때 이미 변복하셨는데, 조사가 필시 미안하게 여겨서 끝내 고치지 않을 수 없을 경우, 한결같이 병인년의 예에 따라 미리 마련하여 임시해서 뒤죽박죽되는 일이 없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그때 조사가 내일 이후로 소복을 입으라고 하였는데도 그 뒤 연회에 곤룡포를 입고 접견하였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다시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근시 이하 관원들은 모두 무늬가 없는 흑의를 입으라 하고 무슨 띠를 두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사옹원 제조가 모두 금대(金帶)를 띠었는데, 이번에 각대(角帶)를 착용할 경우 보기에 초라할 듯합니다. 그리고 병인년에는 근시, 사옹원 제조, 시위 장사들이 모두 무늬가 있는 옷을 입었고 배자(褙子)만을 입지 않았는데, 이번에 상께서 소복을 입으시고 여러 신하는 모두 무늬가 없는 옷을 입은 것도 미안한 일인 듯합니다. 모두 깊이 강론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원의 계사에 ‘변복의 절차에 대해서 깊이 강론하여 정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삼년상은 바로 인간 도리의 중대한 절차이니 영조·영칙할 때가 아니면 길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실로 천하의 일정한 도리입니다. 칙사가 아무리 천자의 사신일지라도 서로 접견할 때에는 바로 개인으로 만나보는 것인데, 어떻게 조서·칙서를 맞이할 때와 구별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번 천사는 병인년의 경우와 같지 않으니, 병인년에는 바로 중국에 경사가 있었으므로 천사도 ‘온 천하가 다같이 경사스럽게 여기는 날이므로 길복 입기를 청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은 본국의 일인데 첫날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길복으로 행례한다면 그 뒤 접대하는 연회에 모두 길복으로 행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너무도 미안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정원의 계사에 ‘병인년에는 모두 곤룡포를 입고 접견하였다.’고 하였는데, 당시 입참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첫날에는 모두 곤룡포를 입었고 그 뒤 접견할 때에는 모두 흑포를 입었다.’고 하니, 정원에서 기록한 것이 어찌하여 이처럼 같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길복으로 마련하는 것은 아마도 미안한 일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병인년에 근시, 사옹원 제조, 시위 장사들이 모두 무늬가 있는 흑의를 입고 배자만 입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대로 하는 것이 괜찮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전에 각 아문의 은자와 포목을 가져다 쓰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듣건대 연경(燕京)으로 가는 관원들이 으레 각 아문에서 은자를 받아가지고 넉넉히 쓸 수 있는 밑천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지금 사은사(謝恩使)가 이미 차출되었는데 각 아문에서 사신으로 가는 관원들에게 절대로 은자를 주지 말도록 하여 급할 때 가져다 쓸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주청사를 보낸 뒤에는 천사를 접대할 물품에 대해서 본조가 유념하여 마련해야 할 것인데 마치 모르는 것처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사신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서야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다만 다른 관아의 물건을 가져다 쓰는 것을 대단히 잘 하는 것으로 여기니, 본조가 하는 일이 몹시 해괴스럽다. 각 아문이 비축한 물건을 모두 가져다 쓰게 하여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면 본조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유념하지 아니하여 나중에도 그럴 것이다. 각 아문이 비축한 물건을 임의대로 처분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7일 계축

비국이 아뢰기를,
"해조의 경비가 탕진된 끝에 조사의 행차가 나오는데, 3결포(三結布)를 거두고 삼명일 방물을 작포하라는 명이 계셨으나 그 수입을 계산해 보면 5만여 냥(兩)의 은자 값에 지나지 않으니, 인삼·잡물(雜物) 등을 마련할 길이 없어 참으로 매우 우려됩니다. 오늘날 보충해 쓸 수 있는 것은 호남의 수군[舟師]들에게 포를 받고 입방(入防)을 면제시켜 주는 한 가지 방법뿐인데, 이러한 일이 실로 온당치 않은 것인 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남쪽 지방은 별다른 경보가 없는데다가 입방하는 군사들이 포를 바치고 면제 받는 것이 그들의 지극한 소원이므로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고도 국가 경비에 보충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이보다 편리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9일 을묘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회답사(回答使)라 칭하면서 부하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용천(龍川)에 와서 부사 정해(鄭楷)에게 묻기를,
"요즘 한인(漢人)의 사세가 어떠한가?"
하자, 모른다고 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섬 안에 많은 배가 서쪽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자, 또 모른다고 대답하니, 용골대가 화를 내면서
"내가 이미 사실을 자세히 듣고 왔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서로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이어 인삼 8백 근을 은자 1만여 냥과 교역하는 일을 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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