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9권, 인조 12년 1634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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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병진

호조가 아뢰기를,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이미 졸하였으니 월봉(月俸)의 쌀과 콩을 본 고을로 하여금 회록(會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장사 지내기 전에는 그대로 지급하고 장사 지낸 뒤에는 3년을 기한으로 하여 헤아려 줄여서 지급해 제사를 빠뜨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삼공이 아뢰기를,
"조사(詔使)가 나올 날이 박두하여 시사(時事)에 걱정이 많습니다. 계사나 차자로 아뢰면 혹 상하의 정을 완전히 통할 수 없을 듯합니다. 조섭하시는 여가에 한 차례 소대(召對)하여 신들로 하여금 직접 성상의 결정을 듣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왕세자가 행할 예의 절목은 신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사가 비록 존귀하기는 하지만 빈주(賓主)의 예를 써야 하는데, 그 예는 한 등급만 강등할 뿐입니다. 주(周)나라 제도에, 제후가 유고할 경우 세자로 하여금 대신 경사(京師)에 조회하게 하면, 공·후(公侯)의 세자는 백작과 같은 반열로 대우하고 백작의 세자는 자작이나 남작과 같은 반열로 대우합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왕의 조정에서 제후의 세자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단지 제후에 비해서 한 등급만 낮출 뿐, 배신(陪臣)들과는 같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본조의 문적 가운데 왕세자 행례 의주(王世子行禮儀註)는 3건이 있는데 모두 동서(東西)에서 마주 향하는 예로 되어 있고, 유독 경술년의 의주만은 본래 동서로 향하게 되어 있던 것을 고쳐서 북쪽으로 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부터 동서로 향하는 것이 정례였는데, 경술년에 중국 사신이 스스로를 높여서 억지로 북쪽으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북쪽으로 향하는 예는 너무 지나친 것 같으니, 전례대로 동서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중국 사신이 비록 그때 가서 말하더라도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전해 온 예식을 근거로 삼을 뿐, 먼저 스스로를 굽혀서 지나친 예를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왕세자의 책봉례(冊封禮)는 실로 국가의 큰 경사입니다. 경외에서 전문(箋文)과 방물(方物)을 올리는 것을 을축년011)   책봉례 때의 전례에 의해서 올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특별히 방물을 견감하여 군민들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제거하라."
하였다.

 

4월 3일 무오

상이 영의정 윤방, 좌의정 오윤겸, 우의정 김류, 관반 홍서봉(洪瑞鳳), 원접사 김신국(金藎國), 호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을 명소하였다. 입대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된 때 조사가 오게 되었다. 어떻게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조사가 나오는 것은 국사의 경사입니다. 그러나 현재 백성들의 힘이 고갈되었습니다. 3결포를 거두는 것은 형세상 부득이한 일이고, 왜공(倭貢)을 작목(作木)한 것 또한 일시에 독촉해 받아들여야 하니, 신은 답답하고 걱정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만약 우선 각 아문에 저장해 둔 것을 가져다 쓰고 추후에 갚는다면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조 판서는 임무를 맡은 지 오래 되지 않았으니 미처 주선하지 못한 것은 형세상 당연하다. 전 판서는 조사가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유의하지 않다가 지금 와서 전적으로 다른 관사에 책임을 떠맡기니, 일이 몹시 그르다."
하니, 김시양이 아뢰기를,
"본조의 일은 대신이 이미 다 계달하였으니, 신이 다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3결포 외에 또 삼명일 방물포(三名日方物布)가 3백여 동이 있으며, 여정포(餘丁布)·주사 제방포(舟師除防布)와 거두어 들이지 않은 왜공포(倭貢布)가 있는데, 합계하면 1천여 동이 됩니다. 그런데 조사가 청렴한지 탐학스러운지의 여부를 분명히 알지 못하여 이 때문에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이미 염등(冉登)이 나왔을 때의 전례를 말하고 있으니, 그때의 전례로 그와 따지는 것이 옳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염등과 왕민정(王敏政)·호양보(胡良輔)가 나왔을 때에 쓴 것이 각각 얼마나 되는가?"
하니, 김신국이 아뢰기를,
"염등이 나왔을 때 쓴 것이 4만 냥이고, 왕민정과 호양보가 나왔을 때는 10만여 냥을 썼습니다."
하였다.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세자 책봉의 경우에는 단지 칙서만 있고 조서는 없으므로 예조에서 흑단령(黑團領)을 입는 것으로 마련했습니다. 다만 듣건대, 염등이 나왔을 때는 조복(朝服)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재신들 중에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상세히 물어서 처리하라."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광해군을 옮겨서 안치하는 일은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조사가 간 후에 처리합니까?"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신들이 교동(喬桐)과 제주(濟州)로 상달했던 것은, 모두 환난을 염려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주는 바다 밖의 아주 먼 지역이고 잡인들이 출입할 걱정이 없습니다. 교동은 가까운 곳이지만 강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이 혹 진도(珍島)나 남해(南海)로 말하고 있으나, 신들의 뜻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먼 곳으로 할 경우에는 제주이고 가까운 곳으로 할 경우에는 교동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윤겸은 아뢰기를,
"만약 가까운 곳에 안치시킨다면 의외의 변란이 있더라도 방비할 수 있으나, 먼 곳일 경우에는 방비하기가 더욱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사가 장차 나오게 되어 백성들이 현재 분주해 하고 있다. 간 후에 의논해 처리하여도 늦지 않다. 내 뜻에도 먼 곳은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였다.

 

황윤후(黃胤後)를 장령으로, 서상리(徐祥履)·홍주일(洪柱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달(馬夫達) 등이 한(汗)의 글을 가지고 서울에 들어왔다.

 

4월 4일 기미

비국이 아뢰기를,
"한의 글을 보건대, 많은 말을 하였는데, 우리 나라를 통해서 중국에 화친을 청하고자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거짓인지 참인지, 중국 조정에서 허락할지의 여부를 모두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저들이 좋은 말로 보내 왔으니 우리로서는 거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변방의 정세를 모두 중국 조정에 알려 주는 것 역시 번국의 사체에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 앞으로 태감(太監)이 나왔을 때 한의 글 원본을 보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 중 조칙을 맞이하는 의절은,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이 억측해서 찬정(撰定)한 것이 아닙니다. 2백 년 동안 조칙을 내림에 있어서 맞이하는 절차를 한결같이 이 예에 의해서 하였지, 고친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대개 조서와 칙서가 모두 천자의 명령이기는 하나 나름대로 대소 경중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맞이하는 절차 역시 자연 같지 않은 점이 있는 것으로, 이는 실로 일정한 전례(典禮)인 것입니다. 비록 한때 사명을 받들고 나온 자가 자신을 높이려는 뜻이 있어서 억지로 고치게 하였더라도, 어찌 그것을 인용해서 정식으로 삼아 2백 년 동안 통행해 온 전례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본조에 염등이 나왔을 때 행한 의주가 있는데, 그 절목과 복색은 한결같이 《오례의》대로 하였습니다. 다만, 상께서 면복(冕服)을 입고 백관은 조복을 입으며, 찬례(贊禮)가 규(圭)를 잡기를 계청하는 한 조목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염등 때의 일일 뿐입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조종조에서 시행해 온 정례를 준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중국 사신이 고치게 한 다음에 고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5일 경신

상이 명정전에 나아가 금나라 차인을 불러보고 이어서 답서를 부쳐 보냈는데, 그 답서는 다음과 같다.
"얼마 전에 귀국의 글을 보았습니다. 종이 가득히 줄줄이 쓴 것이 모두가 진실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그것을 읽고는 길게 탄식하였습니다. 귀국의 속마음이 이와 같은데 일은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어서, 전쟁을 일으켜 서로 공격한 지 십 수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어찌 크게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내온 글의 내용이 이와 같이 정성스럽고 간절하니 즉시 피도(皮島)에 자문을 보내어 귀국의 마음을 알려 그들이 들어주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현재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다만 중국 조정은 사체가 엄하여서 위로는 천자가 있고 아래로는 대신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 나라만이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피도의 장령들의 말도 중국 조정에서 의논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이 이미 이런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하늘이 반드시 성사시켜 줄 것으로, 아마도 사람이 그 사이에서 조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4월 7일 임술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전부터 승지 한 사람이 정주(定州)에 가서 영위(迎慰)하고 가승지 한 사람이 평양에서 문안하였습니다. 지금 조사가 안주(安州)에다 행장을 풀 경우, 이미 정주는 지난 것입니다. 이를 이유로 근신(近臣)을 보내어 영위하는 예를 폐하는 것도 온당치 않은 듯하고, 지금 만약 평양과 황주(黃州) 사이에서 물려 행할 경우 앞길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승지가 영위할 곳과 가승지를 내려 보낼는지의 여부와 어느 곳에 이르러 문안할지에 대해서 미리 여쭈어서 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주에서 영위하려던 승지는 평양으로 보내고 가승지는 황주로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4월 8일 계해

예조가 아뢰기를,
"장릉(章陵)012)  에 배설할 석물(石物)을 희릉(禧陵)013)  과 경릉(敬陵)014)  의 석물에 비교해 보니, 혼유석(魂游石) 하나, 장명대(長明臺) 하나, 망주석(望柱石) 한 쌍, 문무석(文武石) 각 한 쌍은 희릉·경릉과 서로 비슷하였고, 없는 것은 석호(石虎)·석양(石羊)·석마(石馬) 및 난간석(欄干石) 뿐이었습니다. 경릉의 경우, 대왕릉(大王陵)은 석양·석호·석마·동서 난간석이 역시 없었으며, 왕후릉은 석양·석호·석마가 동서로 둘씩 있었고 난간석도 있었습니다. 병풍석(屛風石)의 경우는 국릉(國陵)에는 으레 있으나 희릉은 애당초 배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경릉의 예에 의하여 더 갖출 경우, 더해야 할 것은 석양·석호·석마·난간석입니다. 다만 경릉은 대왕릉과 왕후릉이 역시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만약 난간석을 추가로 배설한다면 현궁(玄宮)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땅을 다져 쌓아야만 하니, 온당치 않을 듯하다. 경릉의 예에 의하여 배설하지 말고 수석(獸石)을 각각 둘씩만 배설하라."
하였다.

 

4월 12일 정묘

저포(苧布)·혜(鞋)·선(扇) 등의 물품을 강화도의 위리 안치한 곳에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였다.

 

찬수청(纂修廳)이 아뢰기를,
"서역(書役)을 다 끝냈습니다. 전례를 고찰해 보니, 지침(紙砧)을 본청에다 두고 다듬이질해 장정하는 것을 감독하였습니다. 그런데 본국(本局)이 임시로 다른 아문에 붙어 있어서 사세가 불편합니다. 각방(各房)의 낭청으로 하여금 조지서에서 다듬이질하는 것을 감독하고서 이를 가져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심재(沈𪗆)를 지평으로, 강학년(姜鶴年)을 사업(司業)으로, 김광혁(金光爀)을 수찬으로 삼았다.

 

4월 19일 갑술

사간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어제 간통(簡通)한 신계(新啓) 내의 한 조목을 보니, 바로 박안효(朴安孝)·김효건(金孝建)·유창문(柳昌文) 등이 일찍이 폐모(廢母)할 것을 정청(庭請)할 때 참여하고서도 대간에 제수됨에 미쳐서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은 잘못에 관한 것이었는데, 끝 부분에 정창한 문서를 금부로 하여금 양사와 이조에 써서 보내도록 하기를 청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신은 ‘대론(大論)에 참여하였던 사람이 외람되이 대각(臺閣)에 들어가고서도 한 마디도 자신을 비판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그르다. 그러나 당초에 전하께서 하자를 깨끗이 씻어 준 뜻은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니다. 지금 와서 별건(別件)의 문서를 만들어 보내어 전조에서 정사할 때 참고하고 양사에서 임석하여 허물을 지적한다면, 크거나 작거나 그러한 자취가 있었던 자치고 누가 감히 스스로 마음에 편하겠는가. 그리고 성인이 황잡한 것까지 포용해 주는 덕은 아마도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 한 조목을 삭제하자는 뜻으로 여러 차례 동료들에게 상의하였으나,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였다. 헌납 이시해(李時楷)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무릇 국가가 국가다울 수 있는 것은 공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론이 행해지지 않으면 사사로운 정이 크게 승하고 시비가 분명해지지 않습니다. 요즈음 자신이 직접 폐모할 것을 정청하는 데 참여하였던 자가 대각에 출입하면서도 일찍이 한마디도 스스로를 비판하는 말이 없이 의기양양한 채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공론이 격발되는 것을 어찌 멈출 수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성상소(城上所)의 홍주일(洪柱一)과 상의하여 계초(啓草)를 작성하였는데, 바로 일찍이 정청에 참여하였던 자 몇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는 일과, 정청한 문서 몇 건을 베껴 내어 양사와 전조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동료들에게 간통한 결과, 죄주기를 청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동료들의 의논이 결정되었으나 유독 문서를 베껴 보내는 한 조항에 대해서만은 사간 이경증과 헌납 이시해가 끝까지 고집하였는데, 한 사람은 ‘정청한 문서를 베껴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고, 한 사람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제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일을 논하는 체모는 옳으냐 그르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늦고 빠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잘못된 견해는 시비를 밝히고 공론을 수립하자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에게 무시당하여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단코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정언 홍주일과 서상리(徐祥履)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대론(大論)에 참여한 것은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금 와서 이를 제기하여 별건의 문서를 만드는 것은 성인의 아량에 손상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이 조항을 삭제하려 한 것은 혹 소견이 없지는 않으나 직절(直截)한 기풍이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정청에 참여한 무리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있으니, 공의를 수립하고 시비를 분명히 하는 것은 간관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문서를 베껴내는 것은 비록 과격한 듯하나 역시 일을 논하는 체모를 얻었다고 할 만합니다. 정언 홍주일과 서상리, 대사간 김경징을 모두 출사하게 하고, 사간 이경증과 헌납 이시해는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경증 등은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이경증 등을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자 체직하였다.

 

4월 22일 정축

간원이 아뢰기를,
"청주 목사(淸州牧使) 박안효(朴安孝), 흥해 군수(興海郡守) 김효건(金孝建), 강령 현감(康翎縣監) 유창문(柳昌文) 등은 광해군이 폐모하던 때를 당하여 직접 정청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의 문서가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으니, 이들은 실로 윤기(倫紀)에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계해년 반정(反正)한 초엽에 청현직을 두루 거쳐 대각을 휘젓고 다니면서 한 마디도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흔적을 가리우는 것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겨 자신에게 아무런 하자가 없는 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그 당시의 일 중에 혹 이목이 미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근거로 삼을 만한 문서가 없으면 해조에서 어떻게 일일이 구별하여 주의할 수 있겠으며, 양사에서 어떻게 구별하여 논핵할 수 있겠습니까. 당초에 정청한 문서를 전조에 다 비치해 두고 진퇴시켰다면 박안효와 같은 무리가 청현직에 출입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청한 문서를 금부로 하여금 양사와 전조에 베껴 보내게 해서, 이름이 거기에 실려 있는 자는 삼사(三司)에 의망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청에 참여한 사람은 처음에 이미 정적을 살펴서 처리하였으니, 참으로 오늘날에 번거롭게 논할 것이 아니다. 문서를 베껴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공론이 모두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장관이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홀로 고집을 부려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울러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최연(崔葕)을 사간으로, 송시길(宋時吉)을 장령으로, 김집(金集)을 지평으로, 심동구(沈東龜)를 헌납으로, 이경증(李景曾)을 교리로 삼았다.

 

4월 24일 기묘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가 한인(漢人) 34인을 잡아 삭발시키고 두 손을 뒤로 묶어서 용천(龍川)으로 내몰았다. 감사가 이를 아뢰었다.

 

4월 30일 을유

비국이 아뢰기를,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 두 조사(詔使)의 송덕비(頌德碑)를 양서(兩西)에 세운다는 뜻을 조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에 비석을 세우는 일은 조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추가로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비석이 이미 갖추어 졌으니 서서히 세우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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