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9권, 인조 12년 1634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3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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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술

원접사 김신국(金藎國)이, 일찍이 폐모하라는 정청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일을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조정에서 죄를 논할 때는 먼저 본정(本情)을 살피고, 왕자(王者)가 사람을 쓸 때는 재기(才器)가 합당하도록 힘써야 하는 바, 죄는 중하나 정상이 가벼울 경우에는 정상을 용서하여 죄를 가볍게 하는 법이고, 재주가 있어서 버리기 어려울 경우에는 허물을 씻어 주고 그 재주를 쓰는 법입니다. 무오년015)  에 정청할 때를 당해서는 비록 평소에 자중 자애하는 자라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동요되지 않는 자가 드물어,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참여한 자까지 있었습니다. 반정한 초기에 공의가 크게 행해져 절조를 지킨 자는 표창하여 발탁하였고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형벌을 내려 복주하였으며, 바깥에서 참여하였던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씻어 주고 불문에 붙여 재주에 따라 임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정청에 대해 공격하는 논의가 계해년에 비해 한층 더 심하니, 국가의 체통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박안효 등이 일찌감치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고 오래도록 언관으로 있었던 것은, 눈치를 살핀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본조에서 외방에 보임하고 간원에서 죄를 청한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김신국처첨 업무에 익숙하고 사리에 통달한 사람도 드뭅니다. 성상께서 새로 정사를 펴는 초기에 발탁되어, 변란이 일어났을 때 온 마음을 다 쏟았고 어렵던 시절에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번의 관반(館伴)의 임무를 그 누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간원의 논의에 대해 공의가 온당치 않다고 하고 있으니, 김신국은 아마도 피혐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조사가 이미 묘도(廟島)에 도착했으므로 관계되는 일을 하루가 급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니 한때의 지나친 논의를 이유로 중임에서 벗어나기를 도모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회계한 말이 매우 마땅하다. 그로 하여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신국이 비록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폐모하는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실로 허물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조에서 회계하면서 단지 그의 재주를 버릴 수 없다는 뜻만 진술하면 그만이다. 대각의 논의가 한창일 때 감히 공의가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말이다.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4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변란-정변(政變)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註 015]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김신국이 비록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폐모하는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실로 허물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조에서 회계하면서 단지 그의 재주를 버릴 수 없다는 뜻만 진술하면 그만이다. 대각의 논의가 한창일 때 감히 공의가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말이다.

 

부제학 이경여(李敬輿)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기미(幾微)의 즈음에는 반드시 일찌감치 판별하고, 공사(公私)의 구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살펴서 선택해야만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구멍으로 흐르는 물이 점차 불어나 하늘까지 넘실대게 되고, 허공에 떠가는 구름이 혹 해를 가리는 법입니다. 이 때문에 한 음(陰)이 다섯 양(陽)의 아래에 있는데도 금니(金柅)와 이시(羸豕)의 경계가 있으며016)  , 인심이 호리의 차이 만큼만 잘못되어도 천리나 멀게 서로 어긋나는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액정(掖庭)에 있는 신하가 감히 대신과 대등하려고 하였습니다. 환관이 조정 신하를 경시하는 조짐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법관이 논집하는데도 따르지 않고 상신이 차자를 올리는데도 살피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발용(發用)하는 마음을 완전히 공적인 데서 내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음한 기운이 처음 뭉치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언다는 상이 드러났고, 기미가 처음 통하자 반성하고 검속하는 데에 절도를 잃었으니, 식자들이 깊이 우려하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명석하심으로는 소멸되고 자라나는 이치에 대해서 반드시 기미를 궁구함이 깊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한가지 일에 대해서만은 도에 맞는가를 따져 보지 않고 공의(公議)를 억지로 떨쳐 버리십니다.
전하의 생각은 반드시 ‘사람은 귀천이 없고 명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다.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억지로 죄를 가할 수는 없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이에 선입견을 가지고서 오히려 처음의 견해를 고집하고 계시므로, 말하는 자가 힘껏 말할수록 듣는 것은 더욱 막연하기만 합니다. 명을 받은 것은 비록 같으나 이미 공과 사의 다름이 있으며, 상신(相臣)과 환관은 경중의 구별이 있습니다. 가령 똑같이 잘못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성인(聖人)이 양기를 부추겨 주고 음기를 억누르는 도리는 저울대를 잡듯이 살펴야만 합니다. 더구나 수레를 돌려 피한 것은 공경하는 마음을 더욱 넓힌 것이고, 무례하게 곧바로 나간 것은 임금의 위세를 빙자한 태도가 현저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쪽을 잘못했다고 하고 저쪽을 곡진히 용서하여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막혀 통하지 못하게 하고 내관들로 하여금 점점 기승을 부리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이 사방에 전파되고 역사책에 쓰여질 경우, 누가 성상의 뜻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아서 성상의 사사로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말할 만한 일이 많이 있는데도 신들은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 상신이 그 자리에 불안해 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도 신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공의를 따르지 않고 특별히 언관을 체직한 것은 언로에 관계되는 일인데도 신들은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는 것은, 참으로 천심(天心)이 발용(發用)하는 기미와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기미는 실로 치란과 안위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깊이 성찰하시고 과단성 있게 결단을 내리시어, 공사의 나뉨을 살피시고 기미의 판별을 엄하게 하시며, 조정의 체모를 중하게 하고 음사한 길을 막으시며, 궁중 안의 정사를 가지런히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뜻을 모두 알았다. 명을 받은 사람이 재상을 만나서 피해 달아나는 것은 사체에 손상이 있으므로 피하여 숨는 규정이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서로 마주쳤을 경우, 이를 이유로 허물을 돌리고 죄를 논하지 않았다. 한 늙은 환관이 옛 규정을 준수한 일인데, 이로 인해 나라가 위태롭게 될 리는 조금도 없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일 정해

헌부가 아뢰기를,
"옥당의 관원이 차자나 혹 초기(草記)를 바칠 때에는, 반드시 정원의 영내(楹內)에서 절하며 바치고, 승지가 친히 받는 것이 전례입니다. 지난번에 양사를 처치하던 날 옥당의 하번(下番)이 초기를 가지고 정원에 갔는데, 승지가 한 사람도 자리에 없었으며, 한참 지난 뒤에야 하인으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그리고 정원은 바로 후설(喉舌)의 자리로 왕명을 출납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해가 지기 전에 청 안이 텅 빈 것은 모두가 제대로 검칙하지 못한 잘못입니다. 도승지 이민구(李敏求) 역시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5일 경인

충청 감사가 치계하기를,
"제천(堤川) 등 세 고을에 4월 9일에 천지가 어두웠으며, 비바람이 심하게 불고 우박이 번갈아 내려 새들이 많이 죽었으며 여러 곡식들이 모두 손상되었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웅진(熊津)·계룡산(鷄龍山)·죽령(竹嶺)·양진(楊津) 등처에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지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8일 계사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동궁(東宮)의 책봉에 대한 조서가 내려진 것은 실로 종묘 사직의 큰 경사로, 신하들이 진하하는 예를 단연코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단지 반교(頒敎)만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성상의 효성은 타고나신 것이어서 상(喪)을 당해 슬픔에 잠겨 있는 중에 하례를 받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진하는 일반적인 일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상께서 비록 친림하지 않으시더라도 백관들이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행한다면, 신하들의 경하하는 정성을 펼 수가 있고 또한 상께서 상을 당해 근신하는 도에도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염우혁(廉友赫)을 지평으로, 최연(崔葕)을 교리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가뭄이 심하니 해조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게 하라."

 

5월 13일 무술

지평 염우혁이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본부에 들어올 때에 여러 감찰(監察)들이 중문(中門) 밖에서 나와 맞이하고, 대관이 도착하면 읍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신이 오늘 본부에서 상회례(相會禮)를 행하려고 하였는데, 감찰 중에 한 사람도 나와 기다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의 지위와 명망이 가벼운 소치이니, 얼굴을 들고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헌부가, 염우혁은 출사시키고 나가 맞이하지 않은 감찰을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병조의 낭관(郞官) 천망(薦望)은 청망(淸望)의 첫길인데 이번의 새 천망은 18인이나 될 정도로 많으니, 이는 전에 없던 일입니다. 이유달(李惟達) 이하 7인은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논의를 주도한 낭관은 사정(私情)을 따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역시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전적(典籍) 원급(元汲)은 유생이었을 때 흉도들에게 붙어 자신이 폐모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반정(反正)한 후에 요행히 법망을 벗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사대부들 사이에 끼어들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해 합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조사(詔使)가 나왔을 때 품은(品銀)과 품포(品布)017)  를 외방에 분정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라 우수사 안영남(安穎男)은 자신이 마련해 내야 할 은과 포를 각포(各浦)의 첨사와 만호에게 징수하였습니다. 공무를 빙자해 횡령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병조의 낭관과 안영남은 추고하라. 원급은 체차하라."
하였다.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 우집법성(右執法星)을 범하였다.

 

5월 14일 기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 부사 김영조(金榮祖), 서장관 심지명(沈之溟)에게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고, 한인급에게는 노비 4구와 전(田) 15결을, 김영조에게는 노비 3구와 전 10결을, 심지명에게는 노비 2구와 전 7결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도감의 삼수군(三手軍)은 모두가 보병(步兵)으로, 말을 가지고 있는 자는 몇명의 별무사(別武士)뿐이므로 단지 별무사장(別武士將) 한 사람만 뽑아 그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었습니다. 몇년 이래로 도감에서 말을 마련하고, 또 역(役)이 없는 사람을 모집하고 본군 가운데서 포수와 살수(殺手)의 기예에 뛰어나지 못한 자를 마병으로 옮겨 정한 자가 5백여 인이나 되는데, 장령은 단지 이 한 사람뿐입니다. 《연병실기(鍊兵實紀)》의 기병과 보병을 참작해 쓰는 법에 의하여 장관(將官)을 더 뽑아 분수(分數)를 명백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6일 신축

예조 정랑 정백형(鄭百亨)이 상소하기를,
"요즈음 듣건대, 신의 이름이 정사년018)  에 올린 생원과 진사의 흉소(兇疏)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허둥지둥 놀라 의금부의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과연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정사년 겨울에 요행히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그 당시에 적신(賊臣)들이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도당을 불러 모았습니다. 생원 이영구(李榮久) 등이 사은(謝恩)한 다음날 즉시 흉소를 바치고 스스로 대비전(大妃殿)에 절하지 않은 것을 자랑하면서 같이 입격한 자들을 위협하여 함께 모이게 하였는데, 신은 한번도 소를 올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침내 삭적(削籍)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들은 일로, 흉도들이 몰래 신의 이름을 써 넣었을 줄은 실로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다행히 밝은 시대를 만나 청현직을 역임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부의 문서를 본 것이 지나치게 늦어 악명을 뒤집어 쓰고도 즉시 드러내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먼저 신의 직을 삭직한 다음, 엄하게 조사해서 애매하고도 망극한 원통함을 풀어 주소서."
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정백형이 한번도 흉한 소를 올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하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의 아비인 정효성(鄭孝成)이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자식이 도리어 흉소에 참여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 자취를 참작해 보면 분명하게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안심하고 행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7일 임인

찬수청(纂修廳)이 아뢰기를,
"《광해일기(光海日記)》를 정사(正寫)한 것 1백 86편을 39책으로 장정하여 2건(件)을 만들었고, 또 중초(中草)를 가져다 장정하여 총 64책으로 1건을 만들어 모두 합하여 3건을 만들었습니다.019)   이미 공역을 끝내고서 1건을 강화(江華)로 먼저 보냈습니다. 1건은 마땅히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내고 1건은 적상산(赤裳山)으로 보내야 하는데, 마침 일이 많은 때를 만났으니, 우선은 춘추관에 보관해 두었다가 가을 추수 뒤에 사관(史官)을 보내 나누어 보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8일 계묘

예조가 아뢰기를,
"대상(大祥)을 지낸 후 혼궁(魂宮)과 산릉(山陵)의 조석 상식(朝夕上食)과 산릉의 삭망제(朔望祭)를 모두 정지하였습니다. 혼궁에 입번하였던 종실과 산릉의 수릉관·시릉관 및 참봉 두 사람을 이조로 하여금 전례를 참조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9일 갑진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요즈음 정백형(鄭百亨)이, 이름이 정사년에 올린 흉소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스스로를 밝혔는데, 일이 무고에 관계되고 인정상 아주 박절한 듯하므로 본원에서 봉입(捧入)하고 또 해조에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러니 흉소에 이름이 잘목 들어가 있는 다른 자들도 저절로 안심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헌징(安獻徵)과 최욱(崔煜)이 지금 또 정소하였습니다. 이후로 소를 올려 밝히고자 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으로, 일시 몹시 시끄럽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따위의 소장을 봉입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혼조(昏朝) 때 수의(收議)하면서 나온 흉패한 말들로 지금까지 문서 가운데 전파되는 것이 매우 많으니, 일일이 뒤늦게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병사(南兵使) 허완(許完), 황해 병사 이숭원(李崇元), 의주 부윤 황박(黃珀)은 곤수(閫帥)의 중임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물정이 모두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치종 교수(治腫敎授) 정지문(鄭之問)은 본래 천인으로서 일찍이 혼조 때 여러 차례 폐모의 상소를 올렸는데, 몹시 흉악하고 참혹하여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됩니다. 전에 찬축당한 것은 단지 궁인의 친족으로서 작폐한 죄 때문이라 곧바로 석방되었는데, 흉소를 올린 자취가 지금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이와 같은 자는 이미 지난 일이라 하여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속히 멀리 유배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3부(府)에 이름을 기록해 두는 일은 이미 정계(停啓)하였는데도 스스로 발명하는 소가 분분하게 들어오고 간원에서 논하는 바가 또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금부에 물으라."
하니, 금부가 회계하기를,
"이조에서 정백형의 상소에 대해 회계하는 일로 이영구(李榮久) 등이 올린 상소 한 장을 가져 갔고, 또 오늘 간원에서 무오년에 올린 흉소의 등록 1권을 가지고 갔습니다. 양사가 상고할 일이 있을 경우에 이문(移文)하여 가지고 가는 것은 전례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요즈음 김경징(金慶徵)의 새로운 논의로 인하여 몹시 소란스럽다. 이러한 문서는 이후로는 내어주지 말라."
하였다.

 

5월 22일 정미

찬수청의 여러 관원들이 조지서에 모여 《광해일기》를 세초(洗草)한 후에 호조로 실어 보냈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대전》 예전(禮典) 장권조(奬勸條)에 ‘사학(四學) 유생 각 20인을 매년 6월에 남학(南學)에 모이게 한 다음 3품 이하 문신 3원이 강론(講論)을 시키기도 하고 제술(製述)을 시키기도 해서 우등자 10인은 생원 진사시 복시(覆試)에 직부하게 한다. 외방의 경우에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는 각각 5인이고, 그 나머지 다른 도는 각각 3인으로 한다.’고 하였으니, 조종조에서 경외의 인재를 기르는 법이 두루 갖추어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임진 왜란‘‘이후로 삼남과 양계 5도에는 오히려 6월에 제술하는 규정이 남아 있으나, 서울 바깥과 다른 3도에는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지금부터는 조종조의 옛 법도에 의거해서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4일 기유

원접사 김신국(金藎國)이 치계하였다.
"향도 역관(嚮導譯官) 김응시(金應時)가 와서 말하기를 ‘천사가 배 위에서 묻기를 「너는 나를 어느 길로 인도해 갈 것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안주(安州)에 도착해서 상륙할 것입니다.」 하자, 천사가 말하기를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 두 천사는 철산(鐵山)에 상륙하였는데, 나는 어찌하여 안주에서 짐을 풀어야 하는가?」 하였다. 이에 답하기를 「현재 우리 나라가 병화를 당하여 지금은 청천강(淸川江) 이북이 모두 텅 비었고 또 오랑캐의 국경과 가까와서 이것이 염려되어서 입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큰 강이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하기에, 답하기를 「비록 압록강이 있기는 하나 얕은 여울이 많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조사가 말하기를 「안주는 변경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2백여 리 되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하루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자, 조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안주에서 대기하라. 내가 너희 나라 일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왔는데, 연해변의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지어 호송하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해서 되겠는가. 너는 즉시 돌아가서 원접사에게 말하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대개 그의 뜻은 달자(㺚子)와 오랑캐들을 몹시 두려워해서 이러한 겁먹은 듯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호위하는 일을 간략하게 해서는 안되겠기에, 이미 병사로 하여금 잘 검칙해서 정제하게 하였습니다."

 

5월 26일 신해

이조가 아뢰기를,
"전최(殿最)의 법은 무능한 자를 내치고 유능한 자를 승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예로부터 왕자(王者)의 정치에 있어서 이것을 중하게 여기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수령의 전최는 관계됨이 더욱 중하여, 구차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방백(方伯)이 전최를 계문할 때 상·중·하로 등급을 매긴 아래에다 각각 선악과 능부(能否)를 써서 출척한 사유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은 몹시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런데 외방에서는 혹 시행하는 경우도 있고 시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일이 몹시 타당하지 않습니다. 팔도로 하여금 일체로 준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정지문(鄭之問)을 멀리 유배 보내는 일로 연계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정지문의 흉소가 지금 비로소 발각되었으니, 대론(臺論)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에 따라 광양(光陽)에 유배하였다.

 

5월 27일 임자

부제학 이경여(李敬輿) 등이 상차하기를,
"보건대, 예로부터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로서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들이 원망하는데도 망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우선 전 시대는 놓아 두고라도 은감(殷鑑)이 멀지 않습니다. 지난날에 하늘이 큰 재앙을 내리고 백성들이 이심을 품고 있었는데도 예사롭게 보고 생각하지 않아 저절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으며, 하늘이 성덕(聖德)을 돌보아 주어 백성들의 임금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어하신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다스림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져, 재변이 한꺼번에 닥치고 원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곤충과 초목의 재앙과 산천과 수한(水旱)의 재변 및 기타의 인요(人妖)와 물괴가 생기지 않는 해가 없습니다. 종묘와 능침의 나무에 벼락이 친 변괴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공구수성하는 실제가 없었습니다. 정침(正寢)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정전(正殿)에 벼락이 쳤는데도 전하께서는 역시 척연히 경계하여 두렵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왕의 위치를 나타내는 자미원(紫微垣)에 형혹성(熒惑星)이 침범하고,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삼남 지방이 온통 황폐해졌습니다. 하늘과 조종께서 시종 경고를 보여 보전해 주려는 뜻을 보임이 여기에 이르러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아, 하늘이 위에서 노여워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원망하면 비록 태평스럽고 편안한 시대와 진나라나 초나라 같은 부유함이 있더라도 위태로움이 곧바로 닥치는 법입니다. 지금 강한 오랑캐들이 변경을 위협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으르렁거리고 있고, 백성들이 이미 꺼꾸러져 거꾸로 매달린 듯이 위태롭습니다. 궁위(宮闈)가 엄하지 못하여 사특한 길이 점차 열리고 있으며, 언로가 통하지 않아 상하가 꽉 막혀 있습니다. 사치 풍조가 만연되어 공사간에 모두 텅 비었고, 음한 기운이 자라나고 양기가 쇄약해져 위란의 조짐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긁어들이기를 힘쓰는 것을 충성스럽다 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의롭다 하며, 온갖 법도가 모두 무너졌고 기강이 모두 풀어졌습니다. 이상의 것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있을 경우, 위란을 불러오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앞뒤로 서로 이어져 점차 확대되어 한꺼번에 발생하는 데이겠습니까.
나라의 존망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 악질(惡疾)이 발생하여 죽는 자도 있고, 혹 풍병(風病)이 들어 죽는 자도 있습니다. 원기(元氣)가 이미 쇠약해졌는데 조섭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육기(六氣)가 침범하면서 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날에 있었던 강상(綱常)의 변은 악질과 같은 것입니다. 토목공사와 뇌물을 받아들인 것은 풍병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원기가 전보다 쇠약해졌는데 육기가 틈을 타 침범하는 것은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나에게는 악질과 풍병이 들지 않았다고 핑계대고 주색에 빠져들어 위태로운 지경으로 힘껏 달려나가면서, 도리어 장수하는 복이 있기를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궁실이 장대하고 화려하며, 노대(露臺)를 별도로 세우는 것은 역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풍병의 조짐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강한 오랑캐가 변경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한습(寒濕)이 바깥에서 쳐들어 오는 것이고, 백성들이 이미 꺼꾸러진 것은 원기가 안에서 상한 것입니다. 궁위가 엄하지 못한 것은 바깥에서 사특함이 틈을 타 들어오는 것이고, 언로가 통하지 않는 것은 혈기가 꽉 막힌 것입니다. 사치 풍조가 만연된 것은 정신이 피로해진 것이고, 긁어들이기만 주력하는 정사는 살갗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음한 기운이 자라나고 양기가 쇠약해지는 것은 종기가 생겨난 것이고, 기강이 문란해진 것은 맥박이 어지러운 것입니다.
원기가 이미 쇠약해진 사람에게 또 풍병의 조짐마저 있는데, 한습이 공격해 오고, 바깥의 사특함이 틈을 타 들어오며, 혈기가 막혔고 정신이 피곤하며, 피부가 벗겨지고 맥박이 어지러우며, 음양이 거꾸로 되고 수족이 뒤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병이 없다고 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물리치면서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만을 추구할 경우, 곧바로 죽을 것임은 유부(兪跗)나 편작(扁鵲) 같은 명의(名醫)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의 밝고 거룩하심으로서는 예전의 사실을 두루 보시어 천년간의 흥폐에 대해서도 오히려 경계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10년은 오랜 옛날이 아닌데고 거울로 삼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척족(戚族)들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말이 거리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지름길로 현명한 임금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서리가 내리면 굳은 얼음이 얼 징조라는 것을 일찌감치 판별하시어, 내외를 엄히 신칙해서 그들로 하여금 분명히 한계를 짓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마디 말도 궁중 안으로 유입시키지 않은 자는 특별한 은총을 내리고, 외간의 일을 내정(內庭)에서 아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드러나는 대로 내쫓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내쳐야 합니다. 그러면 음흉하고 사특한 길이 이로부터 영원히 막힐 것입니다.
잘난 체하면서 남을 깔보는 것은 예전의 어진 이들이 경계한 바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덕이 너무 굳세어 너그러운 기상이 드러나지 않고, 허물을 듣기 싫어하시어 혹 옳지 않은 일을 하시기도 하며, 조금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문득 엄하게 내치시고, 좋아함과 싫어함의 편벽된 점이 반드시 제수하는 사이에 드러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전하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서 말하는 것을 경계로 여겨, 충직한 것을 광망하다고 하고 아무 말없이 있는 것을 순후하고 신중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하의 조정을 둘러 보건대, 강대하고 직절하여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이 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상하간에 서로 통하지 않아 정의(情意)가 미덥지 못한 것이야말로 참으로 현재의 위급한 병이어서 잠시도 늦춰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복심(腹心)은 재상들에게 내맡겼고, 이목(耳目)은 대각에 의탁하였습니다. 전하의 대신들이 비록 옛날 사람들만은 못하지만 역시 한 시대 사람들 가운데 가리고 가려서 뽑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고굉(股肱)의 의탁을 어찌 다른 사람을 구해 맡기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성심으로 위임하고 공경하는 예로 존중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어진 인재를 두루 모아서 여러 직책에 배치하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강직한 선비를 권장하고 바른 논의를 살펴서 받아들이며, 말로 인해 죄를 받은 자가 혹 외방에 나가 있을 경우에는 소환하여 거두어 써서 대각에 다 놓아 두소서. 그러면 정직하고 성실한 자가 기운을 떨칠 것이고 아첨하고 아부하는 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치의 화는 천재보다도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을 상하게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다스림을 도모하는 임금치고 검약을 숭상하는 것을 먼저하지 않은 임금이 없으며, 위란을 불러온 임금치고 역시 사치를 극도로 하여 자신을 망치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앞장서서 이끌어서 만회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반정한 처음에는 여련(輿輦)과 의복의 꾸밈에 있어서 오히려 지난날의 제도를 보존하였으며, 중년 이래로는 완호(玩好)하는 물건과 기교한 기예에 대해서도 자못 뜻을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국혼(國婚)의 사치스러움과 제택의 화려함은 이미 의로운 방도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선왕의 법제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으나 오는 것은 경계할 수 있습니다. 금옥(金玉)과 금수(錦繡)의 꾸밈은 궁중에서 금지시키고 검은 명주와 베 휘장의 검소함을 먼저 성상께서 시행하여 모범을 보이시면, 백성들을 교화시켜 따르게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적과 보루를 마주 대하고 있으니, 전곡과 갑병(甲兵)이 참으로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거두어들이기만 하는 해로움은 도신(盜臣)보다도 더 심하며, 이익만 추구하는 폐단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법입니다. 민사(民事)와 국사를 둘로 나누어서 명목을 대립시키고 경중을 뒤바꿔 시행하고 있으니, 폐단의 근원을 완전히 막지 못하고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어깨를 펼 날이 없을 것입니다.
기미(幾微)의 경계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올린 차자에서 진술하였으므로 지금 감히 다시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양(陽)을 부추키고 음을 억제하는 의리를 지나친 염려라고 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번에 있었던 사관(史官)의 일 역시 근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사관이 비록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환관이 감히 스스로 달려가 호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신이 자리에 불안해 하고 있는데 사관이 또 능멸을 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멀리 옛사실을 살펴보고서 은미한 조짐을 막지 않으면 뒷날에 점차 퍼져나갈 걱정이 아마도 조정이 수모를 받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기강이 통제하고 있어서 입니다. 지금 위에서는 능멸하고 아래에서는 폐기하여, 기강이 진작되지 않아 명령하여도 행해지지 않고 금지하여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금과옥조(金科玉條)가 한갓 빈 껍데기가 되어 귀척들과 세가(勢家)에서는 누가 막을 것인가 하면서 마음내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선왕의 법을 준수하여 미덥기가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 같고 견고하기가 돌이나 쇠와 같이 하여, 일호의 사사로운 뜻도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면, 기강이 다시 진작되게 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쉬울 것입니다.
무릇 이상의 몇 가지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휘감겨 있어서 거센 물결이 역류하여 막을 수 없고 커다란 집이 무너지려 하는데 지탱할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전혀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온 나라 사람들만 아래에서 걱정하며 상심하고 있겠습니까. 아마도 하늘에 계신 조종들의 영령도 아득한 가운데서 통탄하고 계실 것입니다.
지난해 편찮으실 때에는 경연을 열어 강독하지는 않았으나 자주 근신들을 접견하여 경전을 토론하였습니다. 이에 좌우에서 인도하면서 일에 따라 바로잡았으니, 반드시 덕성을 훈도하는 데 보탬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속적(屬籍)이 끊어진 공족(公族)의 딸로 나이가 지났는데도 시집가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가 비록 죄인의 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왕의 혈족입니다. 30이 다 되어 가는데도 배우자가 없어서 시집을 가지 못해 각자 배우자가 있는 궁벽한 시골의 하천(下賤)들보다도 못하게 홀로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방 모퉁이를 향해 울고 있어도 화기를 손상시키기에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왕가의 가까운 친족이겠습니까. 국가에서 비록 시집가는 것을 허락해도 죄인의 딸과 누가 기꺼이 혼인을 맺으려 하겠습니까. 반드시 관청에서 배필을 정해 주고 혼수를 마련해 주어 착실하게 거행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성상의 덕만 빛날 뿐 아니라, 재변을 늦추는 방도에 있어서도 일조가 될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습니다. 이에 눈으로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극심해 위망의 화란이 장차 다가오려는 것을 보고는, 충심을 다하여 외람되이 전하께 아뢰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마음을 맑게 가져 반성하시고 받아들이소서."
하니, 계자(啓字)를 찍어 해조에 내렸다.

 

5월 28일 계축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동궁의 책봉에 대한 봉전(封典)이 내린 것은 실로 온 나라의 경사입니다. 그리고 국휼(國恤) 3년에 이미 태묘(太廟)에 부묘하였으니 상께서의 상제(喪制) 역시 끝났습니다. 이것 역시 신민들이 함께 경사스러워할 것으로, 모두 별시(別試)의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부터 여러 경사를 합하여 한 과거로 한 때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 과거로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종장(終場)에서는 으레 책문(策問)으로 출제하는데, 초장에서는 어떤 글로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서울과 외방을 나눌 것인지 합할 것인지와 강경 시험을 보이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아울러 성상의 분부를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초장에서는 논(論)과 부(賦)를 제술하게 하고 서울과 외방을 나누어서 시취(試取)하라. 그리고 강경은 폐할 수 없을 듯하다."
하였다.

 

5월 29일 갑인

신계영(辛啓榮)을 동부 승지로, 구굉(具宏)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장현광(張顯光)을 공조 판서로 삼아 가교(駕轎)를 타고 올라오도록 명하고 각도로 하여금 말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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