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9권, 인조 12년 1634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30. 10:17
반응형

6월 1일 을묘

예조가 아뢰기를,
"새 능의 정자각(丁字閣)을 지금 헐어내야 합니다. 낭청 한 명을 보내어 검찰하게 하소서. 그리고 욕석(褥席) 등의 여러 도구는 옛 정자각으로 옮겨 배설하게 하고 신로(神路)를 닦아 옛 정자각에 연결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정지문(鄭之問)의 죄는 참으로 천지간에 용서하기 어려우니, 멀리 유배보낸 것도 역시 말감(末減)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금부에서는 극변(極邊)에다 유배시켰어야 했는데도 지금 광양(光陽)에다 정배(定配)하였습니다. 호남은 풍토가 좋아서 사람들이 살고자 하는 곳입니다. 어찌 극도로 큰 죄를 지은 자로 하여금 이 지역에서 뛰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물정이 모두들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절도(絶島)로 고쳐 유배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절도로 유배보내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하고, 먼 변방으로 정배하게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담기(禫期)가 머지 않았으니, 지석(誌石)을 마땅히 고쳐 써야 합니다. 그런데 대신이 ‘지석을 넣어 둔 곳은 재궁(梓宮)과 아주 가까우니 결단코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일찍이 고쳐 쓴 적이 없었다.’고 하니, 이번에도 고쳐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추숭에 대한 책명(冊命)은 사책(史冊)에 기록되고 나라 안에서 두루 알고 있으니, 반드시 고쳐 쓴 뒤에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열성들의 지석은 봉릉(封陵)할 때 넣어 두는데, 중국에서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은 매번 장사를 지낸 뒤입니다. 그런데도 지석을 추후에 고쳐 썼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성종조의 《실록》을 고찰하여 정하라."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이조 판서 최명길이 일찍이 지난 임신년020)  에 직접 강화(江華)에 가서 성종조의 《실록》을 고찰해 보니, 그 당시에 능 주위의 석물(石物)을 수리한 일이 없었으며, 지석 역시 추가로 고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6월 5일 기미

원접사 김신국(金藎國)이 치계하였다.
"조사(詔使)가 숙천(肅川)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대청(大廳)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 기명(器皿) 및 포진(鋪陣) 등의 물건을 모두 배가 있는 곳으로 옮기고는 전석(氈席) 하나만 깔고 앉아 있습니다."

 

6월 6일 경신

좌승지 정백창(鄭百昌)이 아뢰기를,
"시각을 빨리 알리거나 늦게 알리는 데 대해서 예전에는 율을 적용함이 몹시 엄하여 일찍이 선조조에서는 조금이라도 착오가 나면 문득 붙잡아다 국문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천후(天候)를 관측하고 인시(人時)를 받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입니다. 요즈음 금루관(禁漏官)이 직무에 태만하여 오늘은 날이 막 밝으려는 때 비로소 파루(罷漏)를 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죄가 가볍지 않으니 해당 관원과 하인을 유사로 하여금 수금하고 중하게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온(鄭蘊)을 대사간으로, 강대수(姜大遂)를 사간으로 삼았다.

 

6월 8일 임술

영천 군수(永川郡守) 심지원(沈之源)이 상소하여, 정사년에 올린 흉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뜻을 스스로 밝혔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심지원은 혼조 때를 당하여 그의 종조(從祖)인 심종도(沈宗道)가 흉당들에게 붙어서 기세가 몹시 치성하여 온갖 방법을 다해 지원을 꾀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취를 끊은 채 문 닫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초연히 자신을 지켰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반정한 뒤에는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흉소 가운데 몰래 이름을 기록하였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횡역(橫逆)에 걸려 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개의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0일 갑자

중국 사신이 황주(黃州)에 들어왔다. 문안 승지(問安承旨) 송극인(宋克訒)과 별문안사(別問安使) 목서흠(睦敍欽)이 어첩(御帖)과 예단(禮單)을 바치니, 중국 사신이 예물이 몹시 적다는 이유로 물리치고 회첩(回帖)만 주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무릇 진하(陳賀)할 때에는 팔도의 전문(箋文)을 본조에 와서 바치는데, 진하하기 하루 전에 각도의 차사원(差使員)이 시복(時服)을 입고 전문을 받들어 본조에 나와서 바치면 본조의 당상관이 하나하나 검사해서 격식에 어긋나게 한 것은 추고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새벽에 본조의 정랑이 각도의 차사원을 거느리고 궐정에서 배행하여 올립니다. 이것은 고금에 통용되는 전례입니다. 혹 외방에서 전문을 진하하기 전에 미처 바치지 못할 경우에는, 본조에서 추가로 올리는 규례가 없으므로 정원에 직접 바치면 정원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규례입니다. 절일(節日)이나 탄일(誕日)은 날짜가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외방의 전문이 뒤늦게 오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사로 인하여 진하할 때에는 날짜가 일정하지 않아서 뒤늦게 오는 것이 자못 많습니다. 이번에 기한에 맞추어서 도착한 것을 정원에서 모두 직접 받아들이려 하자, 본조의 아전이 옛 규례로 대답하였는데, 즉시 그의 처를 수금하였습니다. 신들은 실로 정원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하가 지나기 전에 정원에서 직접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다.

 

6월 11일 을축

상이 영의정 윤방, 좌의정 오윤겸, 우의정 김류, 판중추부사 이정구(李廷龜), 판돈녕부사 김상용(金尙容), 관반 홍서봉(洪瑞鳳), 호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을 명소하였다. 입대(入對)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을 접대할 여러 물품을 이미 마련하였는가? 이처럼 청렴하지 못하니 어떻게 접대할 것인가?"
하니, 김시양이 아뢰기를,
"각 아문에 보관해 둔 것이 3만 5천 냥이고 본조에서 마련한 것도 4만 8천 냥이니, 이것으로 분배하여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세자의 접견례(接見禮) 때 줄 것과 개독례(開讀禮) 때 쓸 것이 몹시 많으니, 이것이 염려됩니다. 신이 원접사의 장계를 보니, 은으로 값을 쳐 준 일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 승지의 말을 들으니 ‘두목(頭目)들의 예단(禮單)과 물선(物膳)을 모두 은으로 값을 쳐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토산물을 버려두고 은으로 주었는데, 이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뒤 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예단을 은으로 값을 쳐 준 것도 근거가 없는 듯하다. 저들이 비록 화를 내더라도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6월 13일 정묘

원접사 김신국이 치계하기를,
"개독례 때 주는 물건에 대해 염등(冉登)이 사신으로 나왔을 때의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은이 7천 냥이고 인삼이 3백 근이라고 하였습니다. 개독례 한 조항에 대해서는 도중에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밤에 문하인(門下人)이 장예충(張禮忠)을 불러 말하기를 ‘개독례를 반드시 즉시 강정한 뒤에야 17일에 칙서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장예충이 답하기를 ‘본국에는 염등이 사신으로 나왔을 때의 전례가 있다. 염공이 나와서는 천교(天橋)의 무리한 말로써 갖가지로 억지를 부리자, 본국에서 부득이해서 그의 욕심대로 들어주었는데, 지금까지도 통분하게 여기고 있다. 지금 노야(老爺)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바로 염공이 전에 이미 행한 일이다. 개독례는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 것이 마땅하다. 어찌 다시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문하인이 끝까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욕심은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 두 천사에게 준 숫자를 다 받으려는 데 있습니다. 부득이해서 더 줄 것 같으면 은 2천 냥과 인삼 1백 근을 더 주려고 합니다. 을축년021)  에는 그 당시에 용사(用事)하던 자인 당지효(党志孝)에게 은 1천 냥을 별도로 주어 주선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의 적광요(翟光耀)는 바로 그때의 당지효로, 그 역시 이러한 전례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니, 역시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6월 14일 무진

예조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원접사의 장계를 보니 ‘천사가, 이번의 의주(儀註)에는 어찌하여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와 개독례가 없느냐고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즉시 《오례의(五禮儀)》와 《대명집례(大明集禮)》 및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대명집례》의 번국접조의(藩國接詔儀)의 주에 이르기를 ‘왕이 국문(國門) 밖에 나와 맞이하고 궁중 안으로 영접하여 도착한 다음에 사신이 조서를 선포하기를 「황제의 칙사 아무개는 인(印)을 가지고 너희 국왕에게 내린다…….」고 한다.’고만 하였지 개독하는 일은 없으며, 단지 사배(四拜)만 하지 오배하는 예는 없으니, 대략 《오례의》와 같았습니다. 오직 《대명회전》의 영접조사의(迎接詔赦儀)에 이르기를 ‘본처(本處)의 관원이 성 밖에 나와 영접하며 오배례를 행한다.’고 하였고 개독하는 일이 있었으며, 또 황제의 만안(萬安)을 묻는 예가 있었습니다. 또 ‘모든 사명(使命)을 받고 외방에 나가 있는 자들이 조사(詔赦)를 만났을 경우에는 교외에 나가 맞이하여, 본처의 관원과 함께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접칙부의(迎接勅符儀)에는 이르기를 ‘본처의 관사에서 영접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곧바로 아문(衙門)에 이르러 열어보되, 사자(使者)가 부(符)를 취하여 큰 소리로 읽으면 여러 관원들은 재배례(再拜禮)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외방 관리들이 조칙을 영접하는 데 관한 것으로, 외국에서 응당 행하여야 할 예는 아닙니다.
듣건대, 우리 나라의 의주에는 전부터 교외에서 영접할 때 오배삼고두의 예가 없었는데, 중간에 중국 사신의 말로 인하여 이 한 조목을 첨가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반드시 그 당시에 중국 사신이 중국의 외방 관원들이 예를 행함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 우리 나라에서도 이에 의거하여 행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의 의주에는 모두 이 한 조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조서를 맞이할 때에만 이 예가 있지, 칙서를 맞이할 때에는 중국 조정에서도 이러한 예가 없으며, 우리 나라의 영칙의주(迎勅儀註)에도 이 예가 없습니다. 개독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조칙을 맞이할 때에만 행하지 칙서를 맞이할 때에는 본래 이 예가 없습니다. 중국의 예제(禮制)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이상과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에 의거하여 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개 저들이 말하는 것은, 단지 예를 중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힐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나라에서는 오로지 전례에 의거해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지나친 예로 받들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문례관(問禮官)으로 하여금 《대명집례》와 《대명회전》 등의 책을 싸가지고 되도록 속히 떠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5일 기사

좌부승지 이덕수(李德洙)가 아뢰기를,
"대간이 전계(傳啓)할 때에는 으레 반드시 펴서 읽는데, 오늘 간원 성상소(諫院城上所)가 원래의 계초(啓草)를 읽지 않고 대강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이 무시당하여 그런 것이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김수익(金壽翼)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담증(痰症)이 있는데, 여름이 되면서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에 오늘 전계할 때 정신이 혼미하여 다 읽지 못하고 겨우 대강의 뜻만 말하고서 전계하였다가 승지의 지척(詆斥)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도록 명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태만해서가 아니라면 반드시 고의적으로 범한 것이다. 지금은 우선 파직하여 시비를 밝히라."
하였다.

 

6월 17일 신미

시강원이 아뢰기를,
"의주 가운데 왕세자가 황제의 만복함을 묻는 한 조항이 별연(別宴)할 때 문답하는 말 가운데 실려 있습니다. 신들이 다시 상의한 결과, 이 예는 처음 상견할 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칙서를 맞이하는 날 이미 재배례를 행하고, 또 하마연(下馬宴) 등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서로 접하였는데, 별연할 때 비로소 황제의 안부를 묻는 거조를 행하는 것은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재배례를 행할 때 이 예를 겸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재배례를 행한 후에는 이미 대화를 시작하였으니, 무단히 곧장 나오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물러나올 즈음에 절하고 읍하는 예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강정하여 의주에다 첨가해 넣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최연(崔葕)을 사간으로, 김광혁(金光爀)을 헌납으로, 이원진(李元鎭)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19일 계유

함경도 문천(文川)·덕원(德原)·영흥(永興)·삼수(三水) 등 네 고을에 황충(蝗虫)이 있었다.

 

칙사가 벽제(碧蹄)에 도착하였다. 은과 삼을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가 나왔을 때의 전례에 준해서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의적으로 이틀간을 머무르면서 전진하려는 뜻이 없었다. 경기 감사 이성구(李聖求)가 원접사와 더불어 상의하여 개독례 때 주는 은 1만 냥과 인삼 3백 근 외에 은 2천 냥과 삼 20근을 더 주는 것을 허락하자, 이에 비로소 들어왔다. 출발하려 하면서 첩(帖)을 보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국가를 열고 계승함에 있어서는 예(禮)보다 큰 것이 없고 예에 폐단이 없어서 바꿀 수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본감(本監)이 명을 받들어 책봉함에 있어서 앞서 귀국의 의주(儀註)를 살펴보니, 대략은 그다지 서로 어긋나지 않았으나, 영칙(迎勅)·선칙(宣勅)·문안(問安)·관복(冠服) 등 네 가지 절차는 실로 예전 규례와 맞지 않았습니다. 이에 본감은 하나하나 집어내어 귀국과 더불어 상의해 확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귀국으로 하여금 옛날 법을 따르게 하고자 하는 데 불과한 것이지, 실로 옛 규례에서 벗어나 다시 까다로운 법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귀국에서는 문득 염등(冉登)과 호양보(胡良輔) 두 사신을 끌어들여서 ‘자기의 소견을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염등과 호양보로써 본감을 지목하여서, 본감으로 하여금 귀국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입을 봉해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지번(朱之藩)과 양유년(梁有年) 두 천사가 귀국으로 하여금 오배삼고두의 예를 억지로 따르게 한 것을 인용하였는데, 예가 이미 그른데 어찌하여 억지로 따랐으며, 예라고 하여 이미 따르고서는 어찌하여 억지로 하였다고 합니까.
그리고 예가 고황제(高皇帝)께서 반포한 제도와 맞지 않으면 귀국에서는 처음에 곧바로 의논했어야 마땅합니다. 그 당시에는 따지지 않고서 주지번과 양유년이 이르자 행하고, 염등과 호양보가 이르자 또다시 행하여, 이미 신종 황제(神宗皇帝)와 희종 황제(熹宗皇帝) 두 황제의 흠정(欽定)을 거쳐 서로 이어져 온 지가 30여 년입니다. 그런데 본감이 전례대로 봉행하려 하자, 도리어 사사로운 뜻으로 바꾸고자 하여 시끄럽게 따지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지번·양유년·염등·호양보는 모두 귀국에게 전에 없었던 예를 행하게 할 수 있었으나, 본감에게는 도리어 귀국이 전에 이미 행하였던 예마저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주지번·양유년·염등·호양보는 중하게 보면서 유독 본감만은 깔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귀국에서 전례대로 따르지 않으면 본감 역시 억지로 하지는 않겠습니다. 억지로 하면 이는 또 하나의 주지번이나 양유년이 되는 것입니다. 귀국에서 전례대로 따르지 않으면 본감 역시 억지로 따르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억지로 따르게 하면 이는 또 하나의 염등과 호양보가 될 뿐입니다. 본감은 오로지 예만을 따를 것이고 예만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히 마음대로 설만하게 하여 죄를 짓지는 않겠습니다."

 

6월 20일 갑술

상이 새벽에 교외에 나가 칙서를 맞이하면서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칙서는 다음과 같다.
"짐은 생각건대, 국가를 이어받음에 미리 계승자를 정하여 성대한 예로 장자(長子)를 세워 백성들의 희망을 매어 두는 것은, 대개 그 일이 중해서 이다. 근래에 왕의 주문(奏聞)을 보건대, 조선의 시민들이 왕의 적장자(嫡長子)를 세워 세자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왕은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정에 명을 청하였다. 충성과 공경을 정성껏 지킴을 잘 알 수 있었는 바, 일을 해부(該部)에 내려 특별히 윤허를 내린다. 이에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노유령(盧惟寧)에게 명하여 칙서와 아울러 저사(紵絲)·사라(紗羅) 등 물품을 싸가지고 가서 조선국 왕세자를 책봉하게 하였다.
왕은 대대로 동번(東藩)이 되어 예를 지키고 의를 준수하였는 바, 공손하게 전함을 반드시 잘 이어받아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 일이 많으니 모름지기 속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제 세자를 책봉하였으니, 왕은 마땅히 이 훈계를 분명하게 알려 주어, 세자로 하여금 폐함이 없이 잘 따라 국가를 보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짐의 명을 어기지 말고 공경히 받들라. 이에 유시한다."

 

6월 21일 을해

반사(頒赦)하였다. 백관들에게 한 자급씩 가자하고 잡범(雜犯)의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용서하였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칙사의 하마연(下馬宴)을 행하였다.

 

6월 22일 병자

예조가 아뢰기를,
"듣건대, 칙사가 중궁전(中宮殿)과 왕세자빈궁(王世子嬪宮)에 예단을 바치려고 한다고 합니다. 만약 이 일을 행한다면 수응할 즈음에 예절이 실로 근거할 곳이 없습니다. 도감으로 하여금 사리에 의거하여 중지시키게 하되 ‘부인은 외사(外事)에 간여하지 않는 법이라 문안을 통하는 이치가 없다. 노야가 예단을 보내는 것은, 그것이 비록 후한 뜻이기는 하나, 예로 말한다면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내용으로 말을 하여 정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끝내 정지시킬 수 없을 경우에는, 듣건대 을축년에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가 자전과 중전에 예단을 바치려 하였는데, 저지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부득이 위에서 회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빈궁(嬪宮)의 경우에는 왕세자도 회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4일 무인

칙사가 성균관에 가서 알성(謁聖)하였다. 은 50냥을 제생(諸生)들에게 주어 필묵을 사는 데 쓰게 하였다.

 

6월 25일 기묘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오례의》를 살펴보건대, 혼전속절섭사의(魂殿俗節攝事儀)의 소주(小註)에 ‘만약 내상(內喪)이 앞에 있을 경우에는 15개월이 지나 담제(禫祭)를 지낸 후에는 음악을 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내상이 앞에 있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고 어머니가 죽은 경우의 제도를 써서 자최(齊衰) 기년복(朞年服)을 입으므로 15개월이 지난 후 담제를 지내고 3년이 지난 후 부묘하게 되니, 이것은 15개월이 지나 담제를 지낸 후 3년이 되어 부묘하기 전에 속절(俗節)을 만나 제사를 행하는 제도입니다.
또 부묘의(祔廟儀)를 살펴보건대 ‘담제를 지낸 후에 길제(吉祭)를 만나 부묘한다.’고 하고, 소주에 ‘길제는 바로 시향(時享)이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담제가 8월에 있으니 10월 동향 대제(冬享大祭) 때 부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담제를 지낸 후 부묘하기 전에 추석절이 있으니, 예문에 의거하여 음악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악기와 공인(工人)의 의복은 한 차례 쓰기 위하여 별도로 만들 수 없으니 종묘와 숭은전(崇恩殿)에 보관해 둔 것을 옮겨다 쓰고, 악장(樂章) 역시 종묘의 악장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6일 경진

비국이 아뢰기를,
"조금 전에 평안 병사의 장계를 보니 ‘호차(胡差)가 이미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는데, 삼가(蔘價)를 받기 위하여 왔다고 핑계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상경하고자 한다는 말은 반드시 우리를 위협하려는 데서 나온 말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상경하고자 할 경우에는 칙사가 관소에 머물고 있는 때여서 난처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두루 방비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칙사와 서로 만날 경우 갖가지로 곤란하다는 뜻으로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주(安州)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고 칙사를 호위하고 온 장관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국경에 있다고 말하면 그들 역시 꺼려서 감히 곧장 나올 계책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접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에 비해 후하게 대해 화를 내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7일 신사

상이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대상(大祥)을 지내기 위해 효사전(孝思殿)에 나아갔다. 다음날 새벽에 의례대로 제사를 지냈다.

 

예조가 아뢰기를,
"상제(祥祭)를 지낸 후 환궁할 때 수가(隨駕)하는 백관의 복색(服色)을 천담복(淺淡服)으로 강정한 것은, 대개 상께서도 오히려 참포(黲袍)를 착용하시므로 여러 신하들이 이날 거가를 따르면서 천담복을 바꿀 필요가 없어서 입니다. 그런데 외간의 논의를 듣건대 ‘대상 전에 여러 신하들이 천담복을 입고 수가하고 대상을 지낸 후에도 그대로 천담복을 입고 전혀 변동이 없게 하는 것은 실로 온당치 않은 듯하다.’고 합니다. 다음날 환궁할 때 백관들의 복색은 흑단령(黑團領)에 각대(角帶)를 차고 수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계미

수릉관(守陵官) 남이웅(南以雄)이 아뢰기를,
"신이 산릉(山陵)에 있을 때 함열(咸悅)에 사는 선비인 정상(鄭祥)이란 자가 최복(衰服)을 입고 발인(發靷)을 따라 산릉에 왔었는데, 초기일(初期日)에도 와서 곡하였으며, 재기(再期) 때에도 올라와서 상복을 벗고 갔습니다. 신이 그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그 사유을 물으니 ‘저의 아버지 정팽수(鄭彭壽)가 지난 유릉(裕陵)과 목릉(穆陵)의 상사 때 모두 삼년복을 입었는데, 그 당시의 수릉관의 장계로 인해 정표(旌表)를 받기까지 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극한 뜻을 저버릴까 염려하여 뒤이어서 행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비안(庇安)에 사는 내노(內奴) 이의연(李義延) 역시 최복을 입고 25일 산릉에 도착하였기에, 신이 그 사유를 물으니 ‘임신년 6월에 대비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지금 재기(再期)가 얼마 안 남았기에 한번 곡을 올리고자 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두 사람이 복상(服喪)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지극한 행실이 인멸되어 버릴까 염려되어 감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성이 몹시 가상하다. 해조에게 말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대상을 지낸 후 환궁할 때의 백관의 복색은 창졸간에 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관이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밤이 깊은 후에 비로소 의주를 고쳐 백관들로 하여금 반항(班行)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몹시 많게 하였습니다. 조정의 예의(禮儀)를 어찌 이와 같이 전도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예조 판서는 조익(趙翼)이다.】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5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왕실-의식(儀式)

ⓒ 한국고전번역원

 

6월 30일 갑신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에 간원의 계사 가운데 ‘학사(學士)에게 관(冠)을 하사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어느 해의 일인가? 그리고 그 당시 입직할 때에는 관을 착용하라는 분부가 있었는가? 또 검열(檢閱)도 학사의 부류인가? 승지는 반드시 듣고 본 것이 있을 것이니, 상세히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익희(金益熙)가 공공연히 관을 착용하였다."
고 전교하였었는데, 간원이 중관(中官) 오이공(吳以恭)을 논계할 때
"선조(先朝) 때에는 학사에게 관을 하사한 일이 있었으니 한림(翰林)이 관을 착용하는 것이 김익희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는 등의 말을 하였으므로 상의 이 전교가 있은 것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의 관원에게 관을 하사한 고사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어느 해의 일인지는 분명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학사란 호칭은 관호(官號)와 같은 것이 아니라 문학(文學)의 직책을 범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국 조정에는 한림 학사란 호칭이 있으니 검열을 학사라고 칭하는 것은 이것을 모방하여 전해온 것인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영부사(李領府事)  【 바로 이원익(李元翼)이다.】 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는 불시(不時)에 소대하는 거조가 있었으므로 옥당의 관원이 감히 단령(團領)을 벗고 있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관을 착용하는 것은 실로 옛 규례가 아닌 것으로, 반드시 근래에 비로소 창시된 것이다. 그리고 검열을 학사라고 통칭하는 것은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살펴 보건대, 우리 나라의 관직 제도는 중국 조정과는 같지 않으니, 검열은 학사가 아니다. 상의 전교가 마땅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