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9권, 인조 12년 1634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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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을유

교서관이 아뢰기를,
"칙사가 사서(四書)와 《시경》을 각 2부씩 요구하는데, 본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은 단지 《대학》·《논어》·《맹자》만 있을 뿐, 《시전》·《중용》은 한 질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균관과 장서각(藏書閣)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자못 많으니, 뽑아서 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칙사가 늑정(勒定)한 물화가 7천여 냥이나 되는데, 비단과 명주 등은 그래도 쓸 수 있는 물화입니다. 1등 두목(頭目)들의 물화에 이르러서는, 절은(折銀)한 것이 8만 5천 1백여 냥이나 되는데 비단과 명주는 단지 51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잡물입니다. 구워 만든 석불(石佛)을 옥선(玉仙)이라 칭하고 절은한 것이 2백 냥이고 중들의 염주(念珠)를 절은한 것이 50냥이며, 돌 구슬을 호박(琥珀)이라 이름하고 절은한 것이 5냥입니다. 이러한 물건들은 비록 1냥을 주고 취한다 해도 오히려 돈만 주고 마는 것인데, 더구나 수만 냥이나 되는 데이겠습니까. 도감으로 하여금 역관들을 엄히 신책해서 그들로 하여금 힘껏 따지게 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끝내 칙사가 따르지 않았다. 그후에 무역할 즈음에 작은 것으로 큰 것과 바꾸고 천한 것으로 귀한 것과 무역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어서 시장 백성들이 모두 궤산하게 되었다. 이에 칙사가 연회를 파하고 관소로 돌아갈 때 백성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한꺼번에 통곡하여 답답한 상황을 표시하였다. 칙사가 이를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통역관에게 묻자, 통역관이 사실대로 답하니 칙사가 더욱더 화를 내었다. 이에 상이 앞장서서 주창한 자를 옥에 가두고 평시서의 관원을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런 다음 역관을 시켜 이런 뜻으로 중국 사신에게 고하게 하였다.

 

7월 2일 병술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조정호(趙廷虎)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유성이 좌기성(左旗星) 아래에서 나와 기성(箕星) 위로 들어갔다.

 

7월 3일 정해

평안 감사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총병 심지상(沈志祥)이 섬에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해안에 상륙한 거조가 처음에는 책임을 메우기 위해 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점차 내지(內地)로 들어오고 있으니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머물고 있던 세 장수 역시 병기를 정돈하고 있는 바, 드러나게 불시에 출동할 형세가 있습니다. 중국 사신이 만약 별도로 분부를 내린다면 이쪽과 저쪽의 두 군사가 한꺼번에 안주(安州)로 진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속히 호차(胡差)로 하여금 물건을 팔고 철수해 돌아가게 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섬에 있던 군사들이 직로(直路)를 가로막고 있으며 호차는 샛길로 경유해 가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 해안에 군사가 머물러 있음이 과연 호인들이 말한 것과 같으니, 신미년에 창졸간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변란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심 도독에게 정문(呈文)하여 그로 하여금 철병하게 하고자 하나, 그의 뜻이 현재 중국 사신에게 과장하는 데 있으므로 반드시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섬의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거동이 있을 경우 성문을 닫고 들여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오랑캐들과 함께 중국 군사를 막는다.’고 할 것이고, 호인들이 나가서 싸우려고 할 경우 형세상 금지시킬 수 없으며, 금지시키고자 하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한인들을 의지해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한다.’고 할 것이므로 이 두 가지 조항이 가장 난처합니다."
하였는데,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수가 비록 적으나 각자 건마(健馬)를 가지고 있어서 한인들이 쉽사리 상대할 바가 아니니, 경솔히 행동할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호차에게 사잇길을 따라 속히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들이 만약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다방면으로 후대해서 그들이 감동해서 따르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입니다. 그리고 북쪽 해안에 군사를 머물러 두었다가 말이 만약 거짓이 아닐 경우, 갑자기 강을 건너와서 한인들과 서로 대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참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달려가 중국 장수를 만나서 이 사이의 이해관계를 갖추어 말한다면 들어줄 리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행이(行移)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칙사가 만약 이러한 사정에 대해 듣게 되면 반드시 경솔하게 흔단을 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칙사의 한 마디 말을 얻어서 달려가 중국 장수를 효유해서 그로 하여금 금나라 사람들이 돌아갈 길을 열게 한다면, 저절로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한인들이 육지로 나온 것은, 그 뜻이 오랑캐들로 하여금 속히 돌아가게 하려는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속히 물건을 팔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샛길을 경유해 가려고 하지 않을 경우에는, 많은 군사를 내어 직로로 출발시키되, 한편으로는 중국 장수에게 회계의 내용대로 개유하라."
하였다.

 

7월 4일 무자

부원수 윤숙(尹璛), 평안 병사 유림(柳琳)이 치계하였다.
"심지상(沈志祥)에게 신들이 재차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줄 뜻이 없었습니다. 신들이 상의한 결과, 호차로 하여금 태천(泰川)의 샛길을 경유해 의주로 들어가게 하면 일이 몹시 좋을 것 같기에, 마부달(馬夫達)의 일행 가운데 믿을 만한 자 세 사람에게 이러한 내용을 몰래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제 저녁에 세 사람이 회보하였는데, 두 장수의 뜻도 역시 그러하여 오늘 물화(物貨)를 받고 내일 샛길로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공조 판서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여 새로 제수받은 직명을 사양하고, 이어 소회를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순임금이 크게 지혜롭게 된 이유는 모두가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에서 살피기를 좋아하며, 남의 악한 점을 숨겨 주고 선한 점을 드러내며, 양단을 잡아서 백성들에게 그 중도를 쓴 데 있습니다. 순임금은 본래 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묻기를 좋아한 것은 부족한 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러고서도 오히려 모자라서 또 평범한 말에서 살피기를 좋아했습니다. 평범한 말에서 살폈던 것은 부족한 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러고서도 또 부족해서 남의 악한 점을 숨겨 주고 선한 점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때문에 크게 지혜롭게 되어 중화(重華)022)  가 제왕의 덕에 잘 맞게 된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다스리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한 나라이겠습니까. 선이란 것은 참으로 만복의 근원입니다. 이치에 있어서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은 다음에야 선을 보는 것이 분명하고, 마음에 진실이 아닌 것이 없은 연후에야 선을 함이 독실한 것입니다. 선을 봄이 분명하고 선을 행함이 독실한데도 하늘이 돕지 않고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진달한 훈계하는 말은 모두가 아름다운 말이고 지극한 말이다. 내 마땅히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겠다. 경이 올라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다. 경은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고서 올라와 지극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7월 5일 기축

평안 병사 유림(柳琳)이 치계하였다.
"신이 9백 근의 삼가(蔘價)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마부달(馬夫達)에게 말하니, 마부달이 화를 내면서 곧바로 평양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부득이하여 향신(餉臣)과 상의하고서 숫자대로 다 환급(換給)하겠다고 허락하자, 답하기를 ‘다 받은 후에 출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압록진(鴨綠津)의 배가 이미 다 표몰되었고 북쪽 지역에는 한인들이 나와 쏘다니고 있습니다. 마부달이 비록 무사히 의주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으며, 심지상이 아직도 가산(嘉山)에 있으니, 뜻밖의 난처한 걱정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중국 사신의 상마연(上馬宴)을 행하였다. 다음날 또 모화관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7월 7일 신묘

예조가 수릉관(守陵官) 남이웅(南以雄)의 계사로써 아뢰기를,
"정상(鄭祥)과 이의연(李義延)은 포상하는 상전(賞典)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쌀과 포목을 제급하게 하고, 연호군(烟戶軍)의 역(役)을 줄여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담제 사목(禫祭事目)에 대해 배제(陪祭)할 때 세자 이하가 길복(吉服)을 입고 들어가 곡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도 전교하였습니다. 신들이 《오례의》를 상고해 보니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담복(禫服)을 입고 들어가 곡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 ‘짙게 물들인 옥색 단령(團領)에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며, 내상(內喪)의 경우에는 길복을 입는다. 아헌관(亞獻官) 이하 제집사(諸執事)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백관이 삼년상을 행할 경우 담제일에는 마땅히 담복을 입고 들어가 곡하고 길복으로 바꾸어 입고 제사지내야 하나, 내상(內喪)일 경우에는 군신들이 이미 복(服)이 없으므로 들어가 곡할 때에도 역시 길복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기》 주소(注疏)에는 ‘담제 때에는 현관(玄冠)에 황상(黃裳)을 착용한다.’ 하였고, 또 ‘담제 때에는 현관에 조복(朝服)을 착용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삼년상의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삼년상에도 오히려 길복을 입고 제사지내니, 이미 복을 벗은 경우에는 길복을 입고 들어가 곡하는 것이 의심이 없는 듯합니다. 《가례(家禮)》 담제조(禫祭條)에 이르기를 ‘그 다음날의 행사는 모두 대상(大祥)의 의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담복을 입고 들어가 곡하고 길복을 입고 제사를 지냄이 대상에 연복(練服)을 입고 들어가 곡하고 담복을 입고 제사를 지냄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년상의 경우을 말한 것이지, 이미 복을 벗은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소상조(小祥條)에는 말하기를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 자는 길복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주인(主人)과 기년복의 친족은 각각 해당되는 복을 입고 들어가 곡하고, 이미 복을 벗은 자의 경우에는 제사지내는 곳에 와서는 역시 화려한 복식을 제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상에 들어가 곡할 때에는 대공친(大功親) 이하 이미 복을 벗은 자는 길복을 착용하되, 다만 화려한 복식만 제거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담제와 소상은 길흉이 크게 차이가 나니, 길복을 입고 들어가 곡하는 것이 마땅함이 더욱 분명합니다.
왕세자 이하가 들어가 곡할 때 입는 복색은 고금의 예제(禮制)가 모두 이와 같으니, 아마도 고칠 수 없을 듯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상께서 제사지낼 때 입는 길복이 현포(玄袍)에 오서대(烏犀帶)이니, 여러 신하들의 길복도 화려한 색의 옷은 입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길복을 입되 흉배(胸褙)를 제거하고서 들어가 곡하고 제사를 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8일 임진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천강성(天罡星)으로 들어갔다.

 

7월 9일 계사

행 판중추부사 이정구(李廷龜)가 차자를 올리기를,
"《대학》은 한 질의 경문(經文)이 단지 2백 5자이나, 옛 성인들이 전수한 심법(心法)과 천하의 대경(大經) 대법(大法)과 3강령 8조목이 찬연히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정이천(程伊川)이 《예경(禮經)》에서 한 편을 뽑아내었고, 주 회암(朱晦庵)023)  이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대학혹문(大學或問)》을 만들었으며, 서산 진씨(西山眞氏)024)  가 그 요지를 미루어 해석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 43편을 만들었는데, 사서 오경의 글을 널리 인용하고 여러 역사서와 백가(百家)의 설을 찬집하여 역대의 치란 흥망과 인사(人事)의 시비 선악을 분류해 찬집해 빠뜨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정사를 함에 있어서 율령(律令)과 격례(格例)가 된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신의 4대조인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碩亨)이 세종 대왕께서 문치(文治)를 숭상하시는 때를 만나서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과 함께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수하였습니다. 그후 성종조에 이르러 몇 명의 노숙한 유학자들과 더불어 학궁(學宮)에 둘러앉아 경사(經史)를 강독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항상 《대학연의》를 존신(尊信)하여 깊이 연구하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다만 책의 권수가 지나치게 많고 논설이 이것저것 많아서 많은 업무를 처리하면서 다 읽기가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이에 경연 석상에서 건의하여 번잡하고 중복된 것을 삭제하고, 고려조 5백 년간의 사적을 뽑아 대문(大文)의 아래에다 편입해 넣고는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전문(箋文)을 붙여서 올리니 성종께서 몹시 칭찬하고는 즉시 인간하여 널리 반포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후 임진 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없어지고 단지 한 질만이 남아 있기에 감히 올립니다. 모두 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생각건대, 성상께서 현재 석강에서 《대학연의》를 진강하고 계신데, 이 책을 겸하여 펼쳐보신다면, 다스리는 방도에 조금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조에서 경전에 뜻을 두신 성대한 뜻을 잘 인식하고, 선신(先臣)이 깊이 생각해 찬집한 지극한 정성을 생각하시어 진부한 말이라고 하면서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그리고 생각건대, 신하가 임금에게 책을 올리면서 한 마디 말도 올리지 않는다면, 일이 있을 경우 반드시 진언한다는 뜻이 전혀 아닌 듯합니다. 이에 감히 이 책 속에 있는 삼가고 두려워함을 숭상하고[崇敬畏] 방종과 욕심을 경계하고[戒逸欲] 내치를 엄하게 하고[嚴內治] 민정을 살피라[察民情]는 네 가지 조목으로 진계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원하건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에 공력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신은 나이가 70이 지났는데, 성대한 시대를 만났으나 하찮은 정성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천재(天灾)가 여러 차례 경고를 보이었고 오랑캐의 정세가 심상치 않으며, 태감(太監)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습니다.
이에 구구한 걱정과 고민으로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있으나, 정신이 혼미하여 제대로 다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를 보았다. 늙을수록 더욱 돈독해지는 경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그리고 진헌한 《대학연의집략》은, 내가 일찍이 그 이름을 들었으나 그 책은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 다행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실로 자신과 나라를 닦고 다스리는 요체이며, 사사로움과 욕심을 막고 경계하는 밝은 거울이다. 차자 중에 진달한 네 조목 역시 모두 현재에 약석(藥石)이 되는 말이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마땅히 유념하여 힘써 실행해 경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겠다."
하고, 이어서 표피 담요 1부를 하사하였다.

 

7월 12일 병신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심동구(沈東龜)를 청하 현감(淸河縣監)으로 삼았는데,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동구가 일찍이 헌납으로 있을 때 상의 뜻을 거슬렸으므로 외직에 보임한 것으로,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다.
이상질(李尙質)을 헌납으로, 김광혁(金光爀)을 교리로, 이기조(李基祚)를 경상 감사로, 정백창(鄭百昌)을 도승지로 삼았다. 이민구(李敏求)를 특별히 제수하여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중국 사신이 나왔을 때 도승지였기 때문이다.

 

7월 13일 정유

성균관이 아뢰기를,
"유생 조한영(曺漢英) 등이 글을 바치기를 ‘중국 사신이 알성(謁聖)할 때 유생들에게 은[白金] 50냥을 내려주었는데, 일이 고례(古例)가 아니어서 재물을 취하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물리치고 받지 않으면 그가 화를 낼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고사하지 못하였다. 본관의 계사로 인하여 필묵(筆墨) 등을 사서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분부가 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만약 시행한다면, 이것은 선비들에게 이익을 나누는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반궁(泮宮)이 금을 파는 시장터가 되는 것이니, 역시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전교를 받았더라도 결단코 감히 받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중국 사신이 은을 내려준 거조는 실로 유생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상의 전교에 필묵을 사서 나누어 주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임금이 내려주는 것으로, 받아서 나누어 쓴다 하더라도 의리에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도 반궁의 유생들은 오히려 재물을 취하는 것을 혐의롭게 여기면서 다방면으로 개유해도 끝내 듣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사양하고 받는 의리에 삼가고자 하는 것 역시 가상한 일입니다. 그 은은 유생들이 말한 대로 해조에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4일 무술

예조가 아뢰기를,
"담제(禫祭) 날짜가 멀지 않아 책보 도감(冊寶都監)이 장차 역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다만 종묘(宗廟)의 등록과 종묘를 봉심한 치부(置簿)를 상고해 보니, 열성들의 보(寶)는 모두 하나이고, 오직 세조 대왕과 덕종 대왕이 둘씩이고 선조 대왕의 보는 넷이었습니다. 대개 열성들의 보 하나는 모두 시호 보(諡號寶)이며, 더 있는 것은 존호를 올린 데 대한 것과 추가로 존호를 올린 데 대한 보입니다. 덕종 대왕의 책보(冊寶)는 성종조 성화(成化)025)   7년 신묘년026)  에 존호를 추숭한 책과 보가 각각 하나씩이고, 12년인 병신년에 묘호를 올린 데 대해서는 단지 옥책만 1부가 있고 보는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묘호를 올릴 때에는 단지 책만 있고 보는 없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이번에 원종 대왕의 묘호를 올릴 때에도 책만 있고 보는 없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은 책과 보를 아울러 들이라는 명이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합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윤방 등이 아뢰기를,
"열성들의 보는 모두 하나이며, 묘호를 올릴 때는 특별히 보를 올리는 규례가 없다고 합니다. 조종조의 규례대로 옥책 1부만 만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옥책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드문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이미 특별한 칭호를 올렸고, 열성조의 옛법을 그대로 따라 거듭 현호(顯號)를 올립니다. 마음과 형식이 이에 갖추어지고 이름과 직명이 참으로 부합되게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대왕께서는 겸허하고 온화한 자질을 타고나시었고, 공손하고 조용한 도를 지니셨습니다. 암울한 시대를 만나서는 충근(忠勤)을 다해 훈명(勳名)이 맹서한 글에 실렸고, 광해군의 폭정을 만나서는 곧음을 보존하여 덕이 번저(藩邸)에 숨었습니다. 하찮은 이 몸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선행을 많이 쌓은 징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이 길러주는 하늘의 뜻을 체득한 어짐은 비록 백성들에게 미치지는 못했지만, 자손에게 훈계한 너그러움을 드리운 공렬은 실로 조종들보다 빛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덕(大德)의 이름을 얻었으니, 하물며 후왕이 아버지를 존숭하는 일이겠습니까.
10년간 예문(禮文)을 강구하고 마지막으로 경전에서 절충하여 여덟 글자의 융성한 이름을 올려 드디어 보책(寶冊)에다 빛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묘악(廟樂)에다 맞추지 않으면 어찌 축사(祝辭)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없겠습니까.
황제의 칙서가 반포되니 은혜로운 봉작(封爵)이 중국에서 완료되었고, 화려한 의식을 거행할 날짜가 잡혀 길일(吉日)이 윤8월에 있게 되었습니다. 아, 새로운 임금을 탄생시킨 분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절혜(節惠)로 시호(諡號)를 올렸습니다. 이에 신은 삼가 신 영의정 윤방을 파견하여 ‘원종(元宗)’으로 존호를 올리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분명히 강림하시어 지극한 정을 굽어 살피소서. 금가루로 쓴 옥책(玉冊)이 백대토록 아름다운 향기를 전할 것이니 현찬(玄瓚)에 담긴 울창주로 천년토록 깨끗한 제사를 흠향하소서."

 

상이 하교하기를,
"경술년027)  의 능전(陵殿)의 상격(賞格)에 대한 전례를 등서하여 들이라."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본조에 소장하고 있던 경술년 상격에 대한 문안이 갑자년과 정묘년의 변란에 모두 산실되어 등출하여 들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듣건대, 전례에 수릉관과 시릉관은 가자하고 참봉은 6품으로 천전(遷轉)하고 진지 충의위(進止忠義衛)는 제직(除職)하였으며, 혼궁(魂宮)에 입번한 종실은 가자하고 참봉은 7품직을 제수하고 기타 원역(員役)의 상격은 각각 차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은 입으로 전해진 것이어서 믿기가 곤란합니다. 《실록》을 상고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5일 기해

이민구(李敏求)를 대사간으로, 조경(趙絅)을 사간으로, 윤명은(尹鳴殷)·심재(沈𪗆)를 지평으로, 염우혁(廉友赫)·변시익(卞時益)을 정언으로, 임련(林堜)·황윤후(黃胤後)를 장령으로 삼았다.

 

호조가 아뢰었다.
"천사가 나왔을 때 분정한 3결포(三結布)가 2천 3백 9동 19필이고, 삼명일 방물(三名日方物)을 작포(作布)한 것이 3백 3동 6필이며, 주사에게 방수를 면제해 주고 거둔 포가 1백 51동 33필이고, 비국에서 이송해 온 여정포(餘丁布)가 2백 동이며, 본조가 계청한 경오년과 신미년·임신년 3년간 거두어 들이지 못한 노비 신공포(奴婢身貢布)를 보충해 쓴 것이 4백 2동 18필이고, 강원도와 하삼도의 감사들이 부조한 포가 38동으로, 모두 합하여 3천 4백 4동 26필입니다. 그런데 인삼을 무역한 것이 8백 58동 8필이고, 면주(綿紬)를 무역한 것이 1백 58동 6필이며, 백저포(白苧布)를 무역한 것이 23동 16필이고, 왜도(倭刀)를 무역한 것이 6동 36필이며, 우롱(雨籠)·선자(扇子)·대절묵(大節墨)·수달피(水獺皮) 등을 무역한 것이 95동 39필로, 이를 모두 제하면 남은 포가 2천 2백 62동입니다. 이 남은 포로 모두 7만여 냥의 은을 사들였으므로 원포(元布)가 부족해서 본조에 보관하고 있던 포 3백 67동을 가져다가 썼습니다."

 

7월 17일 신축

책보 도감(冊寶都監)을 개칭해서 옥책 도감(玉冊都監)이라 하였다.

 

7월 18일 임인

안시현(安時賢)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20일 갑진

예조가 아뢰기를,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부묘(祔廟)를 《오례의》에 의하여 동향 대제(冬享大祭) 때 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전례에는 시향(時享)을 기다리지 않고 부묘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신들은 문견이 고루해 국조(國朝)의 고사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본부의 아전이 옛 문서 중에서 등사한 것 한 책을 찾아내었는데, 선조에서 상제(祥祭)·담제(禫祭)·부묘의 예를 시행한 절목이 대략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인종 대왕의 담제는 9월 정사일에 있었는데 그달 을축일에 부묘제를 지냈고,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담제는 6월 정해일에 있었는데 그달 을미일에 부묘제를 지냈습니다. 이 경우는 모두 담제가 든 달에 즉시 부묘제를 지냈는데, 그 달은 시향을 지내는 달이 아니어서 《오례의》와는 부합되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경술년028)  에 부묘한 등록을 찾아 상고해 보니 ‘4월 11일에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는데, 하향 대제를 겸하여 지냈다.’고 하였습니다. 대제는 으레 그달 10일 이전에 있는데 부묘제를 겸하여 지냈기 때문에 10일 이후로 물려서 지낸 것으로, 이 경우는 《오례의》의 제도를 준행한 것입니다.
지금 《오례의》의 제도를 준행한다면 전에 정한 날짜대로 동향 대제를 지낼 때에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문정 왕후를 부묘할 때의 전례에 의해서 지낸다면 8월 안에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땅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기》를 상고해 보니, 상대기(喪大記)에 이를기를 ‘길제(吉祭)를 지내고서 침소(寢所)를 회복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 ‘길제는 사시의 상제(常祭)이다. 담제 후에 길제가 같은 달에 있으면 길제를 마치고서 침소를 회복한다. 만약 담제가 길제를 지낼 달과 다를 경우에는 달을 넘겨서 길제를 지내고서 침소를 회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옛사람들은 담제를 지낸 후에 시제(時祭)가 멀었을 경우에는 시제날을 기다리지 않고 별도로 길제를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에 의거하여 동향 대제 전에 별도로 길제를 지내고서 부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역시 《오례의》의 제도와 다르게 되니,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부묘한 길일을 이미 택정하였지만 국조의 전례가 서로 다름이 이와 같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상 윤방과 우상 김류가 아뢰기를,
"은(殷)나라에서는 연제(練祭)를 지내고서 부묘하였고 주나라에서는 졸곡을 지내고서 부묘하였습니다. 천자와 제후의 예가 비록 대부나 사(士)의 예와는 다르나 부묘는 되도록 빨리 해야지 늦게 해서는 안됩니다. 상제를 지낸 후에 달을 넘겨서 담제를 지내면 담제를 지낸 후 3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부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옛 예의 본의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아마도 효자가 신령을 편안하게 해 주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삼가 인종 대왕과 문정 왕후를 부묘한 예를 고찰해 보건대, 날짜를 분명히 근거로 삼을 수가 있으며, 정묘년029)  은 지금과 기간이 얼마 안되어 오늘날의 신하 중에도 본 자가 있습니다. 그때 상신으로는 이준경(李浚慶)이 있었고 그 아래로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시종의 반열에 있었으니, 막대한 예에 대해서 반드시 깊이 강구해서 처리했을 것입니다. 어찌 예가 아닌데 이와 같이 행하였겠습니까. 반드시 근거로 삼은 것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례의》의 글과 조종조에서 행한 전례로 보건대, 부묘례를 담제를 지낸 후 길제날을 만나면 그대로 행하였고, 길제날이 멀었을 경우에는 별도로 날을 가려 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2일 병오

사은 상사(謝恩上使) 송석경(宋錫慶)과 부사 홍명형(洪命亨)이 사조(辭朝)하였다. 상이 정원에 묻기를,
"상사 송석경은 나이가 몇인가? 어찌 그리도 머리가 세었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송석경은 경오생으로 65세라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백발 노인이 만리 먼 길을 가게 되었으니 애처로움을 금치 못하겠다. 조정 재신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이번 임무가 노인에게 돌아갔으니, 이것은 반드시 공도가 행해지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전조의 처사가 몹시 부당하다. 그 당시의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60세 이상의 사람은 차견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묘(廟)에 예위(禰位)가 없고 나라에 묘가 둘이니, 예에 있어서 온당치 않고 법에 있어서 근거할 바가 없다. 그리고 중국 조정에서 봉전(封典)이 이미 내렸으니 묘에 들이는 것은 더욱더 의논할 것이 없다. 예관으로 하여금 전례를 고찰해 거행하여 나로 하여금 다시 후세에 비웃음 거리가 되지 않게 하라."

 

7월 23일 정미

이민구(李敏求)를 이조 참판으로, 조정호(趙廷虎)를 대사간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사간으로, 심기원(沈器遠)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7월 24일 무신

상이 하교하였다.
"수릉관 남이웅(南以雄)은 가자하고 안장을 갖춘 내구마(內廐馬) 1필, 노비 6구, 전 50결을 내려 주라. 시릉관 김인(金仁)은 가자하고 안장을 갖춘 내구마 1필, 노비 4구, 전 30결을 내려 주라. 참봉 남두창(南斗昌)·조창서(曺昌緖)는 모두 6품직에 천전시키고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려 주라. 진지 충의위(進止忠義衛) 이정립(李挺立)은 동반직에 승진시켜 제수하고 아마 1필을 내려 주라. 효사전(孝思殿)에 입번한 종친인 풍해군(豊海君) 호(浩)·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금림군(錦林君) 개윤(愷胤)·회의군(懷義君) 철남(哲男)·진원 부정(珍原副正) 세완(世完)·창원 정(昌原正) 준(儁)은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고, 참봉 이자(李澬)·강첨경(姜添慶)은 모두 직장(直長)에 제수하고, 진지 충의위 이박(李𦨙)·유무증(兪懋曾)·이효침(李孝忱)·유경신(柳敬身)은 모두 동반에 서용하라."

 

황해 감사 오숙(吳䎘)이, 해주 목사(海州牧使) 남선(南銑)의 치적이 온 도에서 최고라고 치계하니, 상이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7월 25일 기유

상이 하교하기를,
"빈객(賓客) 최명길(崔鳴吉)·강석기(姜碩期)에게는 각각 대표피(大豹皮) 1장을 하사하고, 보덕 박황(朴潢), 상례(相禮) 최유연(崔有淵)은 아울러 가자하라. 필선 정유성(鄭維城)은 준직에 제수하라. 전후로 거동할 때 배종(陪從)한 시강원의 실관(實官)과 겸관 및 동궁 장번 내관(東宮長番內官) 등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려 주라. 익위사의 관원과 임시 장번 내관 등에게는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씩 내려 주라."
하였다. 왕세자를 책봉할 때 수고한 데 대한 상전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례를 행할 길일을 일관(日官)에게 택일하게 하니, 윤8월 10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부묘한 전례에 대해 듣건대, 혹 도감을 설치하기도 하고 혹 부묘청(祔廟廳)을 설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어떻게 처리합니까. 그리고 《오례의》에 ‘부묘하고 환궁할 때에는 의금부와 군기시에서 나례(儺禮)를 올리고 기로(耆老)와 유생과 교방(敎坊)이 각각 가요(歌謠)를 올리며, 가항(街巷)에서는 결채(結彩)하고 대궐문 밖 좌우에는 채붕(彩棚)을 설치한다.’고 하였습니다. 채붕과 나례는 선조(先朝)에서 모두 정지하도록 명하였으며, 교방 역시 이미 혁파하여 지금은 모두 할 수 없습니다. 기로와 유생의 가요와 가항에서의 결채는 선조에서 베풀었으니, 이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오례의》에는 ‘부묘한 후에 수하(受賀)하고 교서를 반포하며, 제도에서 전문(箋文)을 올린다.’고 하였으며, 또 음복연(飮福宴)과 정친연(停親宴)을 모두 예문에 의거해서 거행하고 제도에서 방물 물선(方物物膳)을 진상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경술년의 전례에 의거해서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진하하는 것과 방물을 진상하는 것은 임시로 정지하라. 유생과 기로의 가요 역시 올리지 말라. 그리고 부묘청이라고 칭하는 것은 중하지 않은 듯하니, 도감은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7월 26일 경술

정언 변시익(卞時益)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돌아가서 병든 아비를 돌볼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말미를 주고 말을 줄 것을 명하였다. 이때 양사에서 원종 대왕을 태묘에 들이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내용으로 복합하여 간쟁하려고 하였는데, 외부 사람들이 모두들
"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 논계를 하면 반드시 중한 죄를 받을 것이다."
고 하였다. 이에 변시익이 아비의 병을 핑계로 떠나가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스러움을 타고나시어 추숭하는 예가 이루어진 뒤로는 명호(名號)와 의물(儀物)이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으니, 높이 받드는 도리가 지극하다고 할 만하며, 성상의 정에 있어서도 이미 극진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일에 대해서는 해조에게 오로지 봉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태묘에 들이라는 분부가 또 내림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실로 더할 수 없는 중대한 거조로, 반드시 널리 의논해서 처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해조에서 어찌 감히 혼자서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뜻으로는, 별묘(別廟)에서 주사(主祀)하는 것도 추모하는 효성이 지극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태묘에 들이는 일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가볍게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대개 나라의 큰 일은 반드시 대신에게 의논해 정하여야 합니다. 더구나 막중하고도 막대한 이 예에 있어서겠습니까.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명분이 이미 정해졌고 은혜로운 봉전(封典)도 내려졌다. 그런데도 태묘에 들이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실로 불경한 것이다. 본조는 괴이한 논의에 겁먹어 대신들에게 미루니, 일이 몹시 놀랍다. 막중하고도 막대한 일을 몽롱한 몇 마디 말로 막을 수는 없다. 황제의 명이 비록 내렸더라도 부묘하는 것은 불가하며, 예위(禰位)가 비어 있더라도 정과 예에 흠이 없는 이유를 일일이 서계하라. 그리고 저 괴상한 논의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아서 본조로 하여금 이와 같이 겁먹게 하니, 그 무리들이 하는 짓이 몹시 한심스럽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정원에 내린 전교를 보고는, 신들은, 전하께서 사친(私親)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성이 날이 갈수록 더 독실해져 온갖 방도를 다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예조의 회계에 대한 비답에, 심지어는 ‘저 괴상한 논의에 겁을 먹고 대신에게 미룬다.’는 등의 말로 전교하셨습니다. 무릇 해조에서 회계한 뜻은 십분 신중하게 하여 전하로 하여금 허물이 없게 하고자 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문득 엄한 분부를 내리시니, 신들은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후설의 직에 있기에 구구한 소회를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이 태묘에 들이는 일은 예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부묘하지 않을 경우 잘못이 있음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즉시 추숭하지 않으면 천하가 그르다고 한다. 그런데도 저 무리들은 두렵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또 태묘에 들일 때 절개를 세워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고 있으니, 이미 지나칠 뿐만 아니라 그 뜻이 아름답지 않다."
하였다.

 

7월 27일 신해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사간 채유후(蔡𥙿後), 장령 임련(林堜), 지평 안시현(安時賢)·윤명은(尹鳴殷), 정언 염우혁(廉友赫) 등이 합사하여 복합해 아뢰기를,
"제왕의 효(孝)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성인(聖人)이 어기지 말라고 한 경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성효(誠孝)를 타고나시었으니, 낳아주신 부모에 대해 융성하게 대하고자 함에 있어서 온갖 방도를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전례(典禮)에 관계된 일에 있어서는 지극한 정에 가리워져서 차질이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추숭하는 대례에 대해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 또 태묘에 들이라는 명을 내렸으니, 보고 듣는 사람치고 그 누가 놀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종묘의 소목(昭穆) 제도는 엄하고도 중한 것입니다. 임금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종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여서 바꿀 수 없는 상경(常經)입니다. 원종 대왕께서는 성상을 낳아 기르시어 복을 내리고 경사스러움을 연 성대함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몸소 보위에 오르지 않았으니, 어찌 열성들과 태묘에서 함께 제사를 받으면서 계통을 이은 임금인 것처럼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나라에 두 개의 묘(廟)가 있고 묘에 예위(禰位)가 없는 것은 실로 오늘날의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잃은 가운데서도 경중이 있는 것으로, 권도에 따라 별묘를 세운 제도가 크게 예에 어긋나면서 태묘에 들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조천(祧遷)하는 한 조목 역시 몹시 난처한 바, 인정과 예문으로 헤아려 볼 때 역시 몹시 온당치 않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역사에서 살펴보아도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고 예경(禮經)에 비추어 보아도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한갓 지극한 정만을 따라 갑자기 그른 예를 시행해 거듭 천하 후세에 비난을 받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한 명을 정지시키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합사한 계사는 바로 대사간 조정호가 지은 것이다. 오후에 입계하였는데, 밤 2경이 되어서야 비답이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회계하면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대략 저희들의 견해를 진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엄한 비답이 갑자기 내렸는 바, 말이 몹시 준렬하니, 신들은 참으로 황공합니다. 신 조익(趙翼)은 당초 의논해 정할 때 소견이 같지 않아서 시비를 논란해 따지면서 조금도 숨김 없이 다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체는 전과 아주 달라졌습니다. 대개 논의가 처음 발론되었을 때에는 신하가 각자의 소견을 진술해 그 득실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명호가 이미 정해지고 봉전(封典)이 이미 내려졌으니, 신하로서 누가 감히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태묘에 들이는 한 조목에 있어서는 역시 의논할 만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대개 별묘(別廟)에 봉안한다 하더라도, 예수(禮數)와 의물(儀物)을 한결같이 태묘와 같이 하여 조금도 강등한 것이 없게 한다면, 숭봉하는 도리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태묘에 들인 다음에야 숭봉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며, 태묘에 들일 경우에는 또 조천(祧遷)하여야 하는 난처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의 묘제는 궁을 달리 하였으며, 당(堂)을 같이 하고 실(室)을 달리 하는 제도는 바로 후세에서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묘가 비록 태묘와 다른 곳에 있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함을 얻은 변례인 듯합니다. 가령 명나라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흥헌제(興獻帝)를 추숭할 때에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연(河淵)의 태묘에 들이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장총과 계악 역시 그르게 여기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흥헌제를 높여 황고(皇考)라고 하고 그 묘를 예모라고 칭하면서도 태묘에 들이는 것은 오히려 불가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별묘에다 봉안하는 것이 태묘에 들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좋을 듯하였습니다. 신들의 구구한 생각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막중한 일이어서 해관(該官)이 감히 마음대로 정할 바가 아니라, 모름지기 대신과 함께 의논해서 정해야 하는 것이기에, 감히 저희들의 견해를 다 진달하지 않고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서계하라는 전교를 받들고는 감히 소회를 숨기지 못하고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봉전이 이미 내려졌고 예위가 비어 있으니, 예에 있어서 태묘에 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에서는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것은 폄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응당 부묘해야 하는데 부묘하지 않으면 실례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어찌 해가 없을 리가 있겠는가. 대수(代數)가 이미 다했으면 비록 주공(周公)의 효성으로도 감히 더 향사(享祀)하지 못하는 법이다. 어찌 조천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 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성종은 이미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어 고조라고 칭하지 않고 있으니 예위를 부묘하더라도 조천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중국 조정의 일은 지금과는 크게 서로 다르다. 그런데도 본조는 사리를 살피지 못하고 이를 들어 증거로 삼고 있으며, 또 장총과 계악을 예를 아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니, 몹시 가소롭다."
하였다.

 

이경여(李敬輿)를 이조 참의로, 김반(金槃)을 부응교로, 이식(李植)을 부제학으로, 이원진(李元鎭)을 부교리로, 윤명은(尹鳴殷)을 수찬으로, 유경집(柳景緝)을 지평으로, 남선(南銑)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7월 28일 임자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사간 채유후(蔡𥙿後), 장령 임련(林堜), 지평 안시현(安時賢), 정언 염우혁(廉友赫)이 아뢰기를,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이 예는 강구한 지 10여 년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끝내는 완전히 결정되어 신주(神主)를 봉안함과 예전(禮典)과 의물(儀物)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상의 친아버지를 드러내려는 정에 있어서 극진하게 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태묘에 들이는 한 조목에 있어서만은 단연코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원종 대왕께서는 비록 성상을 낳아 기르시어 복을 내리고 경사를 연 성대함이 있기는 하지만, 일찍이 백성들에게 임어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특별히 사사로운 은혜로써 위로 올려 열성들과 함께 태묘에서 함께 흠향하도록 하시니, 사리로 헤아려 볼 때 어찌 크게 미안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한 위(位)를 올려 부묘하면 한 위를 조천해야 됩니다. 지금 만약 새로 부묘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 경솔히 조천하는 일이 있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전하께서 조종을 받들어 공경하는 도리에 있어서 미진한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춘추곡량전》에 이르기를 ‘군자는 어버이를 친애하여 존경해야 할 대상을 깎아 내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로 마땅히 오늘날 깊이 경계하여야 할 말입니다. 더구나 당초에 이 예를 의논할 때 어찌 반드시 봉전이 내려질 것이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대신에게 내린 비답 가운데 태묘에 들이지 않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국론이 이로 인해서 정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봉전이 내려졌다는 이유로 지금에 와서 중간에 고쳐 인심이 승복하지 않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에 묘가 두 개 있는 것이 비록 떳떳한 법은 아니나, 권도의 제도에 있어서는 본디 혐의스러운 잘못이 없습니다. 그리고 묘에 예위가 없는 것은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이나 예문에 있어서 역시 결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융성하게 대우하려는 정성을 펴고자 하여 갑자기 옳지 않은 예를 시행한다면, 전하께서 효성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거조가 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성상께서 어찌 그런 일을 하시겠습니까.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는 명을 정지시키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제학 이식(李植)이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간원의 장관으로 있을 때 마침 추숭하라는 첫 명을 받고서 논변하는 즈음에 참람되이 종묘의 소목(昭穆)의 예에 대해 말하였다가 엄한 분부를 받고 물러났습니다. 다행히도 성상의 드넓은 도량에 힘입어 곧바고 다시 등용되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료들을 둘러보건대, 아직 관직이 회복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신이 비록 얼굴을 쳐들고 행공(行公)하더라도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지금 부묘(祔廟)하라는 명을 특별히 해조에 내리자 태묘에 들이지 말라는 논의가 다시 대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목의 의리는 익숙히 강구하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신의 하찮은 의견은 지금에 와서도 변함이 없는데, 성상께서 배척하시는 전지는 전에 비해 더욱 엄준합니다. 이에 심지어는 ‘저 무리들의 괴상한 논의’라는 말 등으로 전에 이론을 제기한 자들을 지목하였습니다.
아, 신하로서 괴이한 논의를 마구 펴 임금으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기롱을 받게 하는 것이, 이 얼마나 좋지 못한 죄인데, 이에 감히 어깨를 쭉 펴고 반열에 나아가 잘못이 없는 신하들과 함께 있으면서, 전에 이미 진달한 논의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속히 신의 직을 체직하여 이론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상소를 들이니, 계자(啓字)를 찍어 내렸다.

 

홍문관 부교리 강대수(姜大遂), 수찬 김수익(金壽翼), 부수찬 윤명은(尹鳴殷) 등이 상차하기를,
"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나신 효성 때문에 친아버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정성이 돈독하여, 사랑에 지나쳐 잘못되는 것도 사양치 않으시며, 융성하게 대우하는 전례(典禮)를 극도로 다하고 있습니다. 이에 욕례(縟禮)를 이미 거행하였고 봉전(封典)이 계속해 내렸으며,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고 의물(儀物)이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니 지극한 정에 있어서 이미 유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또 태묘에 들이라는 명이 내려져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무궁한 효사(孝思)에 대해 감정대로 행하면서 끝내 예로 절제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아, 천자에게는 천자의 묘(廟)가 있고 제후에게는 제후의 묘가 있는 법입니다. 천하에 군림한 다음에야 천자의 묘에 들어가며 한 나라에 군림한 다음에야 제후의 묘에 들어가는 법입니다. 실제로 임금이 되었어야 태묘에 들어갈 수 있으며 실제로 임금이 되지 않았으면 태묘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실로 고금 천하에 바꿀 수 없는 상경(常經)인 것입니다.
원종 대왕께서는 성상을 낳으시어 억만년토록 다함이 없을 경사를 열었으며, 크고도 성대한 아름다운 덕은 참으로 말로는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임금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니,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태묘에 들여서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이 실제로 임금 자리에 올랐던 열성들과 함께 소목을 함께 하는 것은, 아마도 전하께서 위로 조종들을 높여서 종묘를 공손히 받드는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사황손(史皇孫)에 대해서 원(園)을 인하여 침묘(寢廟)를 만들었으며, 광무제(光武帝)는 남돈군(南頓君)에 대해서 낙양(洛陽)에 묘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비록 예경(禮經)에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지만 태묘에 들이는 것과 비교해 보면 예에 어긋나는 정도가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명나라 조정에서 흥헌제(興獻帝)를 추숭하자는 논의는, 장총(張璁)·계악(桂萼)·석서(席書) 등의 무리가 실질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연(河淵)이 태묘에 들이자는 논의를 내놓자 오히려 그 불가한 점에 대해 힘껏 말하면서 ‘천통(天統)은 간범(干犯)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태묘에 들이는 일이 대단히 예에 어긋난다는 것이 분명하고도 명백하기가 해와 별처럼 밝지 않았다면 이들이 어찌 이와 같이 힘껏 간쟁하려 하였겠습니까.
엄한 분부를 여러 차례 내려 뭇 신하들을 꽁꽁 묶으므로 시름에 잠기고 위축되어 생기가 없으니, 나라의 복이 전혀 아닙니다. 양사의 공론을 속시원하게 윤허하신다면 조정이 몹시 다행이겠고 군덕(君德)에 있어서도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평안도 산군(山郡) 일대의 강가 여러 고을에 홍수가 졌다. 맹산현(孟山縣)에서는 남녀 36인이 물에 빠져 죽었고 절의 중 1백여 인이 산사태로 압사하였으며, 개천(价川)·덕천(德川)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자가 40여 인이었다. 감사가 이런 내용을 아뢰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7월 29일 계축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상차하기를,
"종묘의 위패의 수에 있어서는, 예에 정해진 제도가 있어서 한 위패를 올려 부묘하면 한 위패를 조천하는 것이 소(昭)와 목(穆)이 서로 계승하는 자연적인 순서입니다. 효성스러운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있어서 추호도 손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새로 부묘하고 옛 위패를 조천하는 예가 각 대(代)마다 없었던 적이 없지만,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양쪽 다 조금도 유감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일은 예전의 상례(常禮)와 다릅니다. 전하께서는 소종손(小宗孫)으로 윤리를 밝혀 반정(反正)을 일으켜 들어와 선조(宣祖)의 대통을 계승하였습니다. 이에 친아버지를 드러나게 하려는 효성에서 중국 조정에 봉전(封典)을 청하였고, 친아버지를 높이는 도리에서 별묘(別廟)에다 숭봉하였으니, 정과 예가 극도로 갖추어져 더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태묘에 들이는 거조를 하면, 성조(聖祖)이신 성종 대왕의 신주가 갑자기 조천당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 조상을 추모하는 효성에 있어서 미진한 점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원종 대왕의 신령께서도 아득한 가운데서 불안해 하실 것입니다.
신은 신미년 봄 무렵에 경연 석상에서 하문하였을 때 조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뜻으로 반복해서 논계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초에 최명길(崔鳴吉)이 별묘의 의견을 내었을 때 신의 생각 역시 그렇게 여겼으나, 한 나라에 두 개의 묘가 있는 것이 의심스러워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볼 때, 두 개의 묘를 세우는 것이 혐의롭기는 하지만, 오히려 태묘에 들여서 조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계서(繼序)의 상도(常道)와 변도(變道)가 다름을 생각하시고, 또한 종통(宗統)의 누르고 굽히는 이치를 생각하시어, 태묘에 들이는 일을 중지하고 별묘의 제도를 그대로 보존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뜻을 다 알았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성종 대왕은 이미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었으니, 예묘(禰廟)를 부묘하더라도 조천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대간들이 저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고집을 부릴 만한 일이 없어서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면서 고의적으로 이 일을 가지고 배척하는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인가? 지금 이 태묘에 들이는 일로 해서 온 나라가 놀라고 탄식하고 있다면, 여러 승지들 역시 놀라고 탄식하고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일 터이니, 나를 위해서 상세히 말해 주어 의혹을 깨우치게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성종 대왕이 이미 불천지위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간들이 그것을 알고서 논계하는지의 여부는 신들 역시 상세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태묘에 들이는 한 가지 일은, 막중한 일이기에 바르게 처리하기에 급급해서 정성을 다해 논계할 뿐입니다. 어찌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면서 배척하는 바탕으로 삼을 리가 있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심하고 막힘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불행입니다. 성상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하자, 답하기를,
"예전에 추숭한 일은 모두 오늘날보다 더 그른 일이었는데도 모두 태묘에 들여 열성과 같이 향사하였다. 실제로 임금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끝내 태묘에 들이지 않았다고는 듣지 못하였다. 애당초 태묘에 들이지 않았던 것은 황제의 명이 내리지 않아서 였다. 어찌 끝까지 부묘하지 않을 리가 있었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조금도 논할 만한 점이 없다. 그런데도 삼사가 한꺼번에 일어나 천고에 없었던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오활하고 괴이함이 심하다."
하였다.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사간 채유후(蔡𥙿後), 정언 염우혁(廉友赫)이 아뢰기를,
"정원에 내린 전교를 보건대, ‘성종 대왕은 이미 불천지위가 되었는데, 대간들이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면서 고의적으로 이 일을 가지고 배척하는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인가?’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에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랍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들이 국가의 전례(典禮)에 대해서 혹 모르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 대왕이 불천지위가 되는 것은 막중한 예입니다. 대소의 신민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들이 논계하는 말이 매번 조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는 데 미치는 것은, 어찌 감히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면서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죄에 빠지고자 해서 이겠습니까. 신들이 예조의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임신년030)   여름에 본조가 고(故) 상신 이귀(李貴)의 차자로 해서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여 그해 하향 대제(夏享大祭)부터 세실(世室)의 예(例)에 의하여 ‘고조(高祖)’ 두 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논의한 바는 대개 두 고조가 혐의스러워서였지 높여서 세실을 만들어 불천지위로 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참으로 오늘날 부묘하는 일이 크게 온당치 않다는 것을 알고서 잘못된 거조를 고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외(情外)의 전교가 엄하기가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하로서 이러한 죄를 지고서는 실로 천지간에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속히 신들의 죄를 바루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고조라고 쓰지 않고 그대로 태묘에서 향사한다면, 이는 바로 불천지위이다. 이미 세실(世室)의 예로 높여 받든다면 예묘를 부묘하고 안하고는 조금도 세실에 관계되지 않는다. 그런데 더구나 그 때의 차자 가운데 성종 대왕의 공덕을 성대히 칭하고서 이렇게 의논해 정하였으니, 범연히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약 ‘강정(講定)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임신년 이후의 묘향(廟享)은 무슨 예에 의해서 한 것인가. 내가 배우지 못하고 또 사리에 어두워 예에 대해 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추측한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예위(禰位)를 태묘에 들이는 것이 성종 대왕에게 해가 된다는 것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지평 유경집(柳景緝)·안시현(安時賢), 장령 임련(林堜)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심지원(沈之源)과 헌납 윤구(尹坵) 등이 출사시키기를 계청하니, 상이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합사하여 연계(連啓)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도승지로, 이성구(李聖求)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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