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인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합사(合司)한 계사(啓辭)와 대신의 장차(章箚)는 체모가 매우 중대한데, 요즈음 합사에 대한 비답을 매번 한밤중이 지나서 내리는가 하면 대신의 장차에 대한 비답도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코 성상께서 대신을 존경하고 대간을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어제 계사에 대한 비답 가운데에는 또한 ‘요새 사람들은 오활하고 괴이하다.’는 말씀이 있었으므로 신들은 지극히 두려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은 본래 예경(禮經)을 잘 알지 못하니 국가의 중대한 예(禮)에 대해 감히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신과 삼사가 서로 번갈아 가며 글을 올려 의견을 진술하였으니, 그 간쟁하는 것이야말로 한 국가의 공론으로서 성상을 과실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말씀이 이토록 매정하시니, 임금이 예로 신하를 대우하는 뜻에 크게 손상됩니다. 황공함을 무릎쓰고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지 않았다.
합사하여 연계(連啓)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우의정 김류가 상차하기를,
"추숭(追崇)하고 별묘(別廟)를 세운 뒤에 온 나라가 모두 말하기를 ‘성상의 효성이 이미 극진하게 되었고 성상의 뜻이 이미 신장되었다.’ 하였고 분분하던 논의도 이제 막 진정되면서 인심도 겨우 안정되었는데, 이번에 전혀 뜻밖에도 부묘(祔廟)하라는 명이 갑자기 내리자, 온 조정이 어쩔 줄을 모르고 의혹하며 허둥대고 있습니다. 또 예관의 계사에 대한 비답과 정원에 내린 분부에서 성비(聖批)가 매우 준엄하여 화평(和平)의 도리를 심히 해치고 있으니, 신은 마음속으로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상하의 뜻은 서로 화합하는 것이 귀하고 고금의 예는 알맞게 적용하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잘 살피고 받아들여 가장 온당한 귀결을 찾도록 하소서.
대저 예란 이치이니,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예라 할 수 없습니다. 우선 분명하게 드러난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에 대하여 종손·친손을 따질 것 없이 손자로서 조(祖)를 계승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선제는 여(戾)·도(悼) 두 원(圓)을 소목(昭穆)에 진열하지 않았고, 광무(光武)는 처음에 사친(四親)의 사당을 낙양(洛陽)에 세웠다가 끝내는 장순(張純)·주부(朱浮) 등의 ‘임금과 신하의 신주를 나란히 진열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좇아 용릉(舂陵)으로 옮겼습니다. 원(元)의 태정(泰定)031) 과 무종(武宗)은 각각 그의 사친(私親)을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는데, 이는 오랑캐의 일이라 심히 나무랄 것이 못되지만 명나라의 유학자 호수중(胡粹中)은 임금과 신하를 한 사당에 모신 것은 예경을 더럽히고 어지럽힌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득실이 어찌 오늘날의 분명한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명나라 세종 황제(世宗皇帝)는 흥헌제(興獻帝)를 추숭하고 별묘를 세워 제사하였는데, 하연(河淵)이 ‘태묘에 세실(世室)을 세워 예묘(禰廟)로 삼자.’고 하자, 석서(席書)·장총(張璁)·계악(桂萼) 등이 ‘헌황제는 천자가 못되었으므로 천통(天統)을 범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고금 천하에 바뀔 수 없는 정론(定論)입니다. 대저 은총을 바라고 앞장서서 추숭을 주장했던 석서·장총·계악의 마음으로야 무슨 생각을 못했겠습니까마는, 태묘에 들이는 것만은 시종 극력 반대하였습니다. 이 어찌 태묘에 들이는 일을 방조한 죄가 추숭보다 더 무거워 그 자신이 장차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가 아니었겠습니까. 태묘에 들이면 안된다는 것은 장총·계악 같은 사람도 아는 일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행하시겠습니까.
이른바 ‘예묘를 친묘(親廟)로 삼는다.’는 것은 대개 고조·증조·조(祖)·고(考)의 순서대로 부자가 서로 전할 때의 상법(常法)을 가리킨 것입니다. 가령 주 효황(周孝王)과 당 선종(唐宣宗)처럼 숙부로서 조카를 계승한 경우와 한 선제처럼 손자로서 조부를 계승한 경우와 진 간문제(晋簡文帝)처럼 종조(從祖)로서 종손을 계승한 경우에 어디 친묘로써 예묘를 삼은 적이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태묘에 예위(禰位)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신은 전하께서 미처 심사 숙고하지 않은 점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선유(先儒)가 ‘의도를 갖지 않고 하는 것이 공(公)이고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사(私)이다.’ 하였습니다. 성묘(成廟)를 불천위(不遷位)로 정한 것은 더욱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중묘는 성묘의 성자(聖子)이고 인묘·명묘·선묘는 성묘의 신손(神孫)인데, 어찌 그분들이라고 성묘의 우뚝하고 성대한 공렬은 백세토록 옮기지 않고 전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네 분 성군이 모두 행하지 않았는데, 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처음으로 이 일을 거행한다면, 송 휘종(宋徽宗)이 인종(仁宗)과 신종(神宗)을 추호(追號)한 일과는 역시 공사(公私)의 구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영혼만이 지하에서 편치 못할 뿐 아니라 네 성군의 영혼 또한 편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맹의자(孟懿子)가 효를 묻자 공자가 ‘어기지 않는 것이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삼으면 효라 말할수 있다.’ 하였습니다. 열성(列聖)의 마음이 편안한 뒤에야 원종 대왕의 마음이 편안하고 원종 대왕의 마음이 편안한 뒤에야 전하의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신(神)의 도와 사람의 뜻이 어찌 서로 멀겠습니까. 전하께서 치우치게 잘못된 설을 따라 마음내키는 대로 선뜻 행하고는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아 천하 후세의 비난을 취하게 될까봐 신은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삼사의 청을 쾌히 따라 태묘에 들이라고 한 명을 속히 거두심으로써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개과(改過)하는 법도를 우러러보게 하소서."
하니, 답하지 않았다.
신득연(申得淵)·임광(任絖)을 경상좌·우도 양전사로, 박황(朴潢)·한흥일(韓興一)을 전라도 양전사로, 이현(李𥙆)·정기광(鄭基廣)을 충청도 양전사로 삼았다. 이때 토지의 경계가 바르지 않아 공부(貢賦)가 균등하지 않고, 세력이 있거나 간사한 자들이 겸병하여 서민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호조가 양전을 하되 먼저 삼남(三南)에서 시험해 보자고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내렸다.
8월 2일 을묘
상이 하교하였다.
"중국에서 인정과 예법을 밝게 살피어 쾌히 봉전(封典)을 내렸으니, 원종 대왕이야말로 선조를 계승한 아들로서 모든 신료들이 존경해야 할 임금이시다. 이제 태묘에 들이면 선조 대왕은 후사가 없다가 후사를 얻게 되고 태묘는 예실(禰室)이 없다가 예실을 갖추게 되니, 인정과 예가 모두 마땅하고 유명(幽明)032) 이 모두 유감이 없어 조금도 참람됨이 없고 온당치 않은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일종의 해괴한 논으로 저토록 분노하여, 혹은 속이고 업신여기는 말로 감히 배척하는 바탕으로 삼고 혹은 당치 않은 말로 대중을 격노시키는 자료로 삼고 있으니, 불경스럽게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당초 명분이 정해지지 않고 대례(大禮)가 마무리 되지 않았을 때라면 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지고 더불어 논쟁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져 예에 조금도 미안함이 없어 분수상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인데도 함부로 일제히 들고 일어나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는 바가 없으니, 매우 통탄스럽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할 것이니, 강석기(姜碩期)·조정호(趙廷虎)·채유후(蔡𥙿後)·임련(林堜)·염우혁(廉友赫)·안시현(安時賢) 등은 우선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여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쫓아내라."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보건대, 전 대사헌 강석기와 전 대사간 조종호 등을 모두 삭탈 관작하여 내쫓으라고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경악하여 무슨 말을 해야 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양사의 논이야말로 한 나라의 공론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마음은 정성을 다하여 바로잡아 기필코 우리 임금을 과실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만 불경(不敬)이라는 죄안(罪案)을 만들어 이렇게 극단적으로 갑자기 위엄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성명의 시대에 이렇듯 전에 없던 처사가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들은 차라리 명령을 어긴 죄로 처벌을 받을지언정 전하로 하여금 이런 잘못된 처사를 행하여 성덕에 하자를 초래하게 하고는 싶지 않습니다.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가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도구로서 사람마다 제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군상을 무시하고 대간을 구해 주느라 이미 내린 명을 즉시 봉행하지 않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이런 습관을 징계하지 않으면 임금은 위에서 손을 묶어 놓고 있고 붕당들이 아래에서 권세를 마음대로 흔들어 마침내는 반드시 말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것이다. 색승지 【 색승지는 김남중(金南重)이다. 이때 승지는 이경헌(李景憲)·이덕수(李德洙)·신계영(辛啓榮)이었고, 도승지 김수현(金壽賢)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다.】 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몸으로 후설(喉舌)의 직임을 맡고 있기에 군상의 잘못된 처사를 목도하고 보잘것없는 생각이나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벽력같은 위엄을 누그러뜨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다시 엄한 분부를 내려 ‘임금은 무시하고 대간을 구해 주려 한다.’고 하시니, 신하가 이런 죄를 짊어지고서 어떻게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며 살겠습니까. 이는 색승지 혼자서 한 일이 아닌데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는 명이 유독 해방(該房)에만 내렸습니다. 신들이 결코 혼자서만 모면할 수 없으니, 똑같이 벌을 내려 신하로서 불충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지금 태묘에 들이는 일이 예에 합당하여 인심이 순응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히 논하고 고집하겠습니까. 오직 예에 합당치 않고 인심에 순응하지 않는 것인 만큼 조정의 신하로서 전하께 충성을 바치려는 자는 누구나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전하의 이목을 맡은 자이겠습니까. 강석기 등이 입이 닳도록 힘써 간쟁한 것이야말로 종통(宗統)을 중하게 여기고 군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이미 미안한 분부를 내리신데다가 처치하면서 출사(出仕)를 청했어도 특별히 체직을 명하였으며, 이어 삭출(削黜)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들이 전하에게 기대한 바이겠습니까.
신의 방금 영외(嶺外)에서 왔는데, 요역이 번다하고 가혹하여 백성들의 근심과 탄식은 실로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할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외적이 틈을 엿보고 변방의 수비는 엉성하며 재앙과 변괴가 계속 나타나 국가의 형세가 이미 극도의 위태로움에 달하였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성명께서 위에 계시고 훌륭한 신하들이 아래에 있어 큰 과실이 별로 없었던 점인데, 뜻하지 않게 이번에 상하가 불화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나랏일이 어떤 모양이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죄도 강석기 등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똑같이 벌을 내리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수찬 윤명은(尹鳴殷)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신이 지평으로서 이미 합사(合司)하여 올린 초계(初啓)에 참여하였는데 그때의 논의는 사실 신이 모두 주장하였으니, 신에게도 강석기 등과 똑같은 벌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윤명은이 이 논의를 주장했으면 그 죄가 강석기 등보다 더 심하니 삭탈 관직하여 먼 곳으로 유배하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이 상차하기를,
"연전에 추숭하고 태묘에 들이라는 명이 내렸을 때 신들이 불가하다는 뜻을 빠짐없이 개진하면서 여러 날을 간쟁하고 고집하여 온 힘을 기울였는데, 성상께서는 효성이 끝이 없어 신들의 천만 마디 말을 도무지 살펴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태묘에 들이는 일 하나만은 그래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분부하셨기에, 중외의 백성들이 성인의 효성이 인정에서 출발하여 예법에 알맞게 머무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미 건문(建文)과 광무(光武)의 제도를 따라 별묘(別廟)를 융숭하게 세우고 향사(享祀)와 의물(儀物)을 모두 태묘와 같이 하여 조금도 허술하거나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니, 이는 성상의 지긋한 뜻이 신장되고 신(神)과 사람이 함께 기뻐하게 된 바로서 변례(變禮)를 온당하게 처리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앞서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태묘에 들이라는 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논의가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대저 국가의 대사는 반드시 인심에 순하게 해야 하니, 인심이 순하면 국가가 편안해지고 인심이 순하지 않으면 국가가 불안해지게 됩니다. 어제 이미 양사의 여러 관리를 체직시켰는데, 오늘 또 듣건대 삭탈 관직하여 내쫓으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성상의 진노가 누그러지지 않아 원근이 모두 깜짝 놀라고 있는데, 이는 성상께서 인심에 순하게 하여 국가를 편안케 하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국가를 위하는 계책을 생각하여 먼저 태묘에 들이라고 한 명을 중지시키는 동시에 양사의 여러 신하를 삭출하라고 한 분부를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지금 태묘에 들이는 일은 예로 보아도 당연한 것이다. 전에 부묘(祔廟)하지 않았던 것은 황명(皇命)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석기 등은 불경스럽게 윗사람을 업신여긴 죄가 있기 때문에 약간의 벌책을 가하여 그 과실을 경계시킨 것이니, 경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대저 이 일은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033) 과 틈이 있으면서 지위가 높은 자가 시종 혐의를 품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형세에 편승하여 명예를 노리는 무리들이 그 뜻을 받들고는 공을 세우려고 앞을 다툰 것이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강석기 등을 삭출(削黜)하라는 전지(傳旨)를 여태까지 써서 들이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시종 명을 어기겠다면 그 곡절을 속히 써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강석기 등을 삭출하라는 전지를 봉입(捧入)하지 못하는 뜻은 이미 모두 진달하였기 때문에 새로 아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윤명은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감히 받들지 못하는 뜻도 전계(前啓)에서 아뢴 바와 다름없습니다.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만번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그대들의 처사는 무리하기 짝이 없다. 속히 써서 들이라."
하였는데, 정원이 여전히 명을 받들지 않자, 상이 노하여 하교하기를,
"전부터 미안한 일이 있으면 승지가 간혹 자신의 생각을 진달하는 때는 있었지만, 시종 거역하면서 거행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모든 일을 임의대로 따르거나 말거나 한다면 한 승지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리기에 충분할텐데 하필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고 대신이나 대관을 둘 까닭이 있겠는가. 지금 전지를 받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전고에 없던 변고이다. 색승지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당시 김남중(金南重)이 파직된 뒤로 우승지 이경헌(李景憲), 우부승지 이덕수(李德洙), 동부승지 신계영(辛啓榮)이 서로 의논하여 아뢰었는데,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리자 모두 금부에서 대죄하였으므로 정원이 텅 비었다. 사알(司謁)이 이 일을 아뢰니, 당시 아직 숙배하지 않았던 도승지 김수현(金壽賢)을 마침내 명초하였다. 김수현이 명을 받들고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경(二更)의 밤중이었다. 김수현이 아뢰기를,
"양사의 많은 관원을 삭출하라는 명과 윤명은을 멀리 유배시키라는 분부와 색승지를 잡아들여 추문하라는 전지가 모두 하루 사이에 내려져 모든 신료들이 경악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정원이 텅 빈 채 신 혼자만 있어 처치할 때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사의 관원이 입이 닳도록 극력 간쟁하고 후설(喉舌)의 신하가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군부를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시에 모두 죄책을 받았으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처사일 뿐 아니라 나아가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진노를 거두시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제 명을 어긴 승지는 부도(不道)의 죄를 저질렀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
하였다.
응교 김반(金槃), 교리 강대수(姜大遂)·이원진(李元鎭), 수찬 이시해(李時楷)·김수익(金壽翼) 등이 상소하여 양사와 똑같이 벌받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들은 사피하지 말라."
8월 3일 병진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받들지 않았던 전지를 모두 속히 써서 들이라."
하니, 김수현이 아뢰기를,
"오늘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좌승지 오숙(吳䎘)은 올라오지 않았고, 우부승지 이덕수는 색승지로서 금부에서 대죄하고 있으며, 신만이 혼자 정원에 있어 진참(進參)할 수 없으니, 우부승지 이경헌과 동부승지 신계영을 부르소서."
하자, 답하기를,
"아랫것들이 군상을 멸시하고 명령을 행하지 않았으니, 지금 정사를 한다 하더라도 할 만한 것이 조금도 없다. 정관(政官)은 자리를 파하고 돌려 보내라."
하였다. 이에 김수현이 크게 두려워하여 전지를 써서 들였다. 김수현이 또 아뢰기를,
"정원이 텅 비었으니, 우승지 이경헌과 동부승지 신계영을 패초(牌招)하여 일을 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신계영이 정원을 텅 비게 한 처사는 더없이 통탄스럽고 놀라우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김수현이 또 아뢰기를,
"우승지 이경헌이 ‘함께 벌을 받은 사람으로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다시 패초하소서."
하니, 상이 또 파직을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덕수를 잡아들여 추국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는데 금부가 곧바로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처사가 매우 태만스럽다. 해당 당상관은 추고하고 낭청은 잡아들여 추고하라."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양사가 태묘에 들이는 문제를 쟁론하자 잇따라 유배시키는 명이 내렸다 합니다. 신도 전에 우매하고 의혹된 소견으로 차자를 올려 진달하였고 보면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 혼자만 모면하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분명하게 벌책을 가하여 모든 신하들에게 징계의 법도를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황공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이정구(李廷龜)가 상차하기를,
"신이 전일 삼가 하교를 보건대, 원종 대왕을 태묘에 들이라는 명이 있었고, 이어 저보(邸報)를 접하건대 또 대각(臺閣)의 여러 신하들을 유배시키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신은 두렵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전에 상부(相府)에 재직하였을 때 별묘(別廟)를 세워 모시자는 논의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태묘에 들이지 말라는 명을 받들게 되어서는 인정에서 출발하여 예법에 알맞게 머무른 성상의 훌륭한 뜻을 흠앙하면서 차자를 올려 전하께서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너그러이 살피시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 차자에 대하여 답을 하시지는 않았으나 신이 구구한 뜻은 굽어 살피셨을 것으로 생각되니, 지금 새삼스럽게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례(典禮)가 완전해지고 실정과 형식이 갖추어졌으니, 어찌 별묘의 제도가 그 사이에 강등되거나 흠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의 마음은 미흡하게 여기고 뜻대로 다한 뒤에 그만두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수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새로 이런 분부를 내려 절박하게 말씀하시고 엄하고 급하게 조치를 내리셨으므로 대궐에 호소하던 신하들이 나란히 죄를 받아 하루 사이에 대간의 자리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에 상하가 불화하고 온 나라가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이 일이 어찌 큰 성인의 중정화평(中正和平)한 처사이겠습니까. 지극한 마음이 있는 곳에서는 비록 노여움이 일어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법이지만,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심사 숙고하신다면 마침내 회오(悔悟)의 단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한 대례(大禮)인데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고 위에서 독단하십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전후로 강론하여 정한 자세한 내용을 생각하여 태묘에 들이라는 명을 파기하고 대각을 예우하는 체모를 되살려 유배하라는 분부를 속히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추숭하고 태묘에 들이는 일은 본래 전례가 있는데, 당시 부묘하지 않는 것은 황제의 명이 내리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강석기 등은 모두 중죄를 지었으므로 가벼운 벌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8월 4일 정사
금부가 윤명은(尹鳴殷)을 영암(靈巖)에 정배시키도록 하였는데, 다시 북쪽 변방으로 고쳐 경성(鏡城)에 유배토록 명하고, 또 압송하는 나졸로 하여금 시한을 넘기지 말고 배소에 도착하도록 명하였다.
행 판돈녕부사 김상용(金尙容)이 상차하기를,
"전대에 임금이 추숭하여 태묘에 들인 일이 간혹 있긴 하였으나 이는 모두 예경(禮經)을 무시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행한 일이니, 어찌 성명께서 본받을 바이겠습니까. 태묘에 들여서는 안된다는 뜻은 이미 여러 대신들의 차자에서 다 말씀드렸기에 신이 새삼스럽게 논변하지 않아도 될 줄로 압니다. 금일 삼사가 청한 것이야말로 온 나라의 공론(公論)으로서 그 본심을 따져보면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지성에서 나와 우리 임금을 과실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 이겠습니까.
전하의 효성은 타고난 것이어서 부모를 높이고 드러내려는 도리에 극진함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만 지극한 마음에 가리운 나머지 예경을 위반하고서 기필코 태묘에 올려 모시려 하고 여러 신민들의 뜻을 헤아리지 않으신 채 ‘불경스럽게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명을 어겨 부도(不道)하다.’는 죄를 갑자기 가하였으니, 이러한 거조가 어찌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일일 뿐이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영혼도 저 세상에서 편치 못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다함이 없는 효성이 도리어 성덕에 흠과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온 나라가 너나없이 안타깝게 여기는 일로서 뭇 신하들이 응당 간쟁해야 될 바이니, 실로 속이거나 업신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신은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가까왔고 또 현직에 있지도 않지만,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들었기에 국가의 실례와 임금의 과실을 보고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조리도 없는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이치를 살펴 속히 태묘에 들이라는 명을 파기하고, 진노를 조금 누그러뜨려 여러 신하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지금 이 태묘에 들이는 일은 본래 전례가 있는데 재상 가운데 연평 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시종 혐의를 품고 분격하여 배척하였기 때문에 시세(時勢)에 붙좇는 자가 명분과 사체는 하나도 돌아보지 않고 있으니, 심히 통탄할 노릇이다."
하였다. 이때 대각의 신하로서 죄를 입은 자가 많았다. 그런데 임련(林堜)은 태묘에 들이는 논의를 실제로 주도하였으나 합사(合司)하여 아뢰게 되자 공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다른 체를 하지 못하였고, 염우혁(廉友赫)은 먼 외방 사람으로서 간관의 반열에 참여하여 모든 논의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만 하였다가 죄를 입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원통하다, 임련이여. 【 그 마음과 행동이 다름을 조롱한 것이다.】 영예롭다, 염우혁이여.’라고 하였다.
8월 5일 무오
양사가 모두 공석이 되어 아뢰는 바가 없자, 옥당이 차자를 올려 합사의 논의를 따를 것을 청하고, 또 강석기·조정호 등을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하라는 명과 윤명은을 멀리 유배보내라는 명과 이덕수를 잡아들여 추국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니, 답하지 않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간이 논계하지 않은 일을 옥당이 날마다 쟁론하고 있는데 전례가 있는가? 정원은 사사로운 뜻에 동요되지 말고 자세하게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신들은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옥당의 관직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전례의 유무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필시 옥당이 양사가 오랫동안 공석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차자를 올렸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옥당이 대간의 일을 대행하여 저토록 직책을 침범하니 매우 부당하다. 그대들은 하문한 일 외에 또 억견(臆見)을 진술하여 마치 신구(伸救)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대들의 소행도 심히 잘못되었다."
하였다.
이성구(李聖求)를 대사헌으로, 유백증(兪伯曾)을 대사간으로, 한필원(韓必遠)을 동부승지로, 이경석(李景奭)을 부제학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집의로, 강대수(姜大遂)를 사간으로, 정백형(鄭百亨)을 장령으로, 정태화(鄭太和)를 헌납으로, 심재(沈𪗆)·박수홍(朴守弘)을 지평으로, 성이성(成以性)을 정언으로,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삼았다.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신이 어제 외람되이 앞서의 소청을 되풀이 하여 태묘에 들이는 명을 거두시기를 바랐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받아들여지지는 못하고 도리어 미안한 비답만 있게 되었기에, 신은 지극히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오늘날 삼사의 논의는 곧 온 나라의 말이니 어찌 한두 사람이 한 바이겠습니까. ‘혐의를 품고 배척하였다.’는 등의 분부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조정에 함께 있는 신하들이 간혹 논의하는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는 없으나 공적(公的)인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틈이 있어서 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국가의 대례에 대해 어찌 혹시라도 혐의로 인하여 일을 망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신하가 말씀을 다 드리는 것은 전하의 무한한 도량을 믿고 신자(臣子)로서 품고 있는 생각은 꼭 말씀드려야 한다는 정성을 다한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경스럽게 윗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면 어찌 심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근일에 대간이 나란히 내쫓김을 당하여 이목(耳目)의 관직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고, 정원이 연이어 잡혀가고 파직되어 후설(喉舌)의 자리가 텅 비었는데, 천위(天威)는 날로 더 엄해지고 뭇사람의 생각은 날로 더 격앙되어 조정이 이미 괴리되고 붕괴되는 조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노신(老臣)이 밤을 지새우며 길게 탄식하고 잠시도 잊지 못하는 것은 다만 과실이 군상에게 돌아가고 국사는 다시 수습할 가망이 없게 될까 두려워해서 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밝게 살피시고 특별히 관용을 베풀어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뜻을 잘 알았다. 요즈음 일은 놀랍지 않은 것이 없는데 정원은 더욱 제멋대로 하고 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때가 있었던가. 옛말에 ‘꼬리가 커지면 움직이기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서인(西人)들이 집권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움직이기 어려운 것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다.
8월 6일 기미
사간 강대수(姜大遂)가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옥당에 재직할 때 태묘에 들이는 일이 예법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하며 합사(合司)의 공의를 받아들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당시 벌을 받은 대관은 모두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 뜻밖에 새로이 관직에 제수하는 명이 허물을 지고 있는 신에게 미쳤습니다. 그런데 대간의 일을 대행할 일을 어제 엄하게 분부하셨으니, 신의 죄과가 이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정태화(鄭太和)도 이 일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7일 경신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아뢰기를,
"신은 용렬하고 비루하기가 사람 중에 으뜸인데, 오직 타고난 자질이 우직하여 한갓 국가를 위하여 원망을 감수해야 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지난해 봄에 제멋대로 소견을 진술하여 기휘(忌諱)를 심히 저촉하였는데, 그 뒤에 과실을 반성하노라면 온 몸이 오싹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운 명이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나오니 한량없는 사은(私恩)에 감격하여 눈물이 절로 나옵니다.
다만 생각건대 천위(天威)가 중도를 잃어 쫓겨나거나 갇히는 자가 줄을 잇고 있으니, 성명의 시대에 이런 거조가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이토록 꺾고 벌을 가하십니다만, 잇따라 간쟁하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이때에 논쟁을 멈추면 봉영(逢迎)에 가깝고 사론(士論)에 죄를 얻는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분발하고 격려되어 정론(停論)할 기약이 없게 되면, 애당초 중지시키려고 한 것이 도리어 격동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럴 경우 죄를 주자니 이루 다 죄 줄 수가 없고 중지시키려 하자니 더욱 격동될 것으로, 전하의 조정이 필시 텅 비게 된 뒤에야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전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조정의 논이 한창 거세어지는 때를 당하여 어리석고 망령된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주선할 수 있겠습니까. 태연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옥당이 잇따라 상차한 일로 인하여 성지를 번거롭게 하였기에 부끄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태묘에 들이는 예가 비록 막중한 일이기는 하나 실제로 국가의 성패에 관계되는 정도는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상하가 서로 격앙된 나머지 차츰 이 지경까지 악화되어 군부의 지인(知仁)의 지나친 점을 구하려다 도리어 노여움이 중도를 잃는 과실만 이루게끔 해 드린 채 언관은 쫓겨나고 정사의 체모는 손상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 신하를 석방토록 요청하는 일이 도리어 급하지 않겠습니까.
아, 대각이 공석이 된 지 오래여서 진계할 사람도 없는데 대신이 항장(抗章)을 올려 서로 잇따라 구해주고 있으니, 논사(論思)를 맡고 있는 자로서 수수방관하며 의례적인 말 한 마디만 할 뿐이겠습니까. 신이 수석(首席)을 차지하고 앉아 대간의 일을 대행하였으니, 월권한 죄는 신이 지은 것입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백증과 이성구가 양사의 장관으로서 논의를 정지시키고 싶어도 공의(公議)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스스로 인피(引避)하여 물정을 시험하였으니, 아무리 성상의 뜻에 영합하였다는 비난을 모면하려 한들 어찌 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6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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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유백증과 이성구가 양사의 장관으로서 논의를 정지시키고 싶어도 공의(公議)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스스로 인피(引避)하여 물정을 시험하였으니, 아무리 성상의 뜻에 영합하였다는 비난을 모면하려 한들 어찌 될 수 있겠는가.
함경남도 영흥(永興) 등 여러 고을에 황충이 있었다.
8월 8일 신유
우의정 김류가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류가 엄한 분부를 받들고 그 자리에 있기가 불안하여 사장을 올렸다. 상신이 사장을 올리면 으레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는 법인데, 다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니, 이는 박대한 것이다.
합사하여 연계(連啓)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유백증이 간원의 장관으로서 속히 논의를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동료 중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연계한 것이다.
헌부가 강석기·조정호 등을 삭출하도록 한 명과 윤명은을 먼 곳에 유배하도록 한 명 및 이덕수를 잡아다 국문하도록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며, 한달이 넘도록 논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8월 9일 임술
합사하여 연계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남의 관직을 침범하여 당치 않다는 분부가 이미 내렸으며, 정원이 또 신구(伸救)하였다는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풍헌의 직책은 결코 죄과를 갖고 있으면서 공사를 행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8월 10일 계해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아뢰기를,
"추숭(追崇)의 논의는 전고(前古)에 근거할 만한 예가 없으니, 반드시 추숭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본래 의기(義起)034) 에서 나온 것이고 절대로 추숭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억측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우매하여 예문(禮文)을 잘 알지 못하나, 항상 막중한 예는 반드시 주공·공자와 같은 식견을 가지고서야 시비를 단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전부터 그 문제에 감히 무어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일은 전과 달라 묘호(廟號)가 이미 올려져 명위(名位)가 정해졌고, 봉하는 전례(典禮)가 이미 완결되어 황명(皇命)이 내렸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고명(誥命)에 ‘선조를 받들어 모시려는 효심에서 우러나와 아비의 업적을 앞에 드러내려는 청을 간곡히 하였다.’ 하였고, 또 예묘(禰廟)에 올려 영광되게 하려 함은 오로지 은혜를 갚으려는 생각이 깊어서 이다.’ 하였으니, 이는 황상(皇上)이 예묘를 명한 것입니다. 애당초 봉하기를 청하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천자에게서 명을 받은 이상 어찌 태묘에 들이지 않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봉하기를 청하던 날에 간쟁하지 않고 명을 받고 난 뒤에야 간쟁을 하려 하니, 신은 삼가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대하여 누차 이러한 뜻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본직에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평소에 한 말을 숨기고서 임금을 속이는 죄를 스스로 취하겠습니까.
신의 견해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연일 대청(臺廳)에서 정계(停啓)에 대한 말을 누차 하였는데, 곧바로 동석(同席)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신은 제 소견을 즉시 말하고 싶었으나 풍파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속으로 꾹 참고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음과 행적이 서로 다르고 피차 근거가 없어 스스로 그 마음을 돌아 보건대 부끄러움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또 정계해야 한다는 뜻을 헌부에 간통(簡通)하였는데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끝내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형편없기는 하나 평소 시세에 따라 처신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처사는 모호한 점을 면치 못하여 대관의 체면을 스스로 손상시켰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정백형(鄭百亨)이 아뢰기를,
"이번에 태묘에 들이는 일에 대해서 해조는 명을 받들지 않고 있고 대신은 차자를 올려 반대하며 삼사는 극력 간쟁하고 백성들은 모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니, 인심의 향방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대신에게 자문하거나 경사(卿士)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단정하여 기필코 행하려 하십니다. 이 일이 비록 어버이를 높이는 데 최대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뜻이 부합하지 않고 여러 논의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성덕에 누를 끼칠까 걱정됩니다. 그러므로 대사간 유백증이 여러 차례 정계(停啓)에 관한 논의를 꺼냈지만 신의 견해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아 애당초의 뜻을 변경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백증이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끝내 결정하지 못했다.’고 한 말은 바로 신을 지칭한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전에 추숭할 때 배척하고 허락하지 않은 무리들이 모두 속으로 노리던 헛된 영예를 얻어, 삼사와 양전(兩銓)을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그래서 후배들이 침을 흘리며 다투어 본받고 있으니, 그대들이 이런 논의를 고집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업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지평 심재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이성구·유백증을 체차시킬 것과 정백형·심재를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태묘에 들이는 명을 내린 뒤에 대신은 분분한 논의에 동요되고 소관(小官)은 명리에 이끌려 일의 체모를 생각하지 않은 채 서로 다투어 배척하였는데, 유독 유백증(兪伯曾)만은 바른 것을 고수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고 또 회피하기를 꾀하지도 않았으니, 부귀로도 흔들리게 할 수 없고 터무니없는 논의로도 동요시키지 못할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이런 강직하고 방정한 사람을 일종의 논의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직시킬 수는 없으니 체차하지 말라. 유백증을 일단 체차하지 않는다면 정백형 등은 형세상 그대로 자리에 있기 어려우니, 모두 먼저 체차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류가 두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8월 11일 갑자
응교 최연(崔葕)이 상소하기를,
"신은 숭봉(崇奉)하는 예에 대하여 처음부터 조정의 신하들과 의견이 달라 탄핵을 입기에 이르렀습니다. 근자에 태묘에 들이는 일을 중지시키자는 논의가 다시 삼사에서 나왔는데, 양사를 처치하는 일로 본관이 계청하여 신을 패초(牌招)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전후로 의견을 달리 할 수 없으며, 처치할 즈음에 자신의 견해를 편다는 것도 사세상 온당치 않으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는 사피하지 말고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3일 병인
대사간 유백증이 아뢰기를,
"신은 타고난 성품이 순진하고 어리석어 평생의 처신에 오직 남을 따라 부화뇌동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임금을 섬기면서 숨김이 없어야 된다는 마음을 가져, 진실로 군부의 과실을 보면 비록 옷깃을 잡거나 난간을 부러뜨리는 일035) 이라도 사양하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태묘에 들이는 예에 대해 신은 실제로 불가하다고 여기지 않는데,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무리를 따라 영합한다는 혐의를 피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고 임금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신은 감히 그렇게는 못하겠기에 우매함을 무릅쓰고 감히 그렇게 진달드렸던 것으로,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못하리란 것도 신이 본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규정 밖의 조치로서 ‘체차하지 말라.’고 하였을 뿐 아니라 ‘강직하고 방정하다.’는 등의 말씀을 형편없는 신에게 가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옥당이 체차를 청한 관원이 어찌 잠시인들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5일 무진
합사(合司)하여 연계(連啓)하며 태묘에 들이도록 한 명을 중지시키기를 청하고, 옥당도 상차하여 합사한 논을 쾌히 따르기를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성균관 생원 윤선거(尹宣擧)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유지되고 기강이 설 수 있는 것은 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기(禮記)》에 ‘예란 귀신에게 순응하고 인심에 부합되는 것이다.’ 하였고, 또 ‘예가 조묘(祖廟)에 행해지고서 천하가 효자(孝慈)의 도리를 행하게 된다.’ 하였고, 또 ‘효자가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그 예를 극진히 하되 지나치게 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성인이 후세에 문란하게 될까 예방한 것이 지극히 단호하고 엄격하니 붕괴시키거나 어겨서는 안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사당에 들이는 예야말로 옛날 제왕들이 행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효성이 지극하여 융숭한 전례(典禮)를 거행하려 한다 하더라도 예법을 상고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곧장 행한다면, 이는 융숭한 이름을 갖게 되지만 도리어 융숭한 실상을 잃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나라에 두 사당이 있다는 것과 사당에 예위가 없다는 이유로써 분부하였고, 또 중국 조정에서 내린 봉전(封典)을 중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라에 두 사당이 있는 것은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으로 예에는 합당치 않기 때문에 당시 여러 신하들이 간쟁하다가 죄를 얻었고, 재야의 선비들도 말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한두 신하들과 함께 독단하여 거행한 것으로서 여론이 다 옳게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실례(失禮)한 가운데 또한 경중의 차이가 있는 것이니, 한 선제(漢宣帝)가 도고(悼考)를 부묘(祔廟)하지 않고 광무제(光武帝)가 용릉(舂陵)에 별묘를 세운 것이 어찌 이보다 나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당에 예위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를 예경(禮經)에 상고해 보면 전하의 말씀과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조(祖)·부(父)·자(子)가 서로 전하는 것은 정상적으로 왕통의 차례를 잇는 것이고, 손자가 조부를 잇거나 숙부가 조카를 잇거나 혹은 종조가 종손을 잇는 것은 변칙적으로 왕통의 차례를 잇는 것입니다. 정상적일 경우에는 부가 당연히 예모가 되지만, 변칙적인 경우에는 조부가 예모가 되기도 하고 종손이 예모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주(周)·한(漢) 이후 수천 년 간의 역사에 실려 있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봉전(封典)을 중하게 여길 수 없다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에 노(魯)나라가 천자의 예악(禮樂)을 받아 주공(周公)을 제사하자 공자가 한탄하였는데, 이는 대개 예법에 합당치 않으면 비록 천자의 명일지라도 그것에 의거하여 행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이 성왕(成王)이 노나라에 천자의 예악을 내린 것과 백금(伯禽)036) 이 그것을 받은 것 모두를 잘못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부묘하느냐 않느냐의 여부는 예법에 합당한가의 여부만 따질 뿐이지, 어찌 봉전을 가지고 경중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왕위에 서지 않았으면 태묘에 들이지 않는 것이 고금의 떳떳한 법인데, 원종(元宗)은 이미 왕위에 선 적이 없으니, 이것이 태묘에 들여서는 안되는 첫째 이유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제사를 받으면 예경(禮經)을 어지럽히는 일이 된다는 것이 명유(名儒)들의 정론인데, 원종은 열성(列聖)들에 대하여 신하의 입장이니, 이것이 태묘에 들여서는 안되는 둘째 이유입니다. 제왕의 종통은 지극히 엄중한데, 지자(支子)의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하는 일이 되니, 이것이 태묘에 들여서는 안되는 세째 이유입니다. 종묘의 예는 소목(昭穆)의 차례를 일사불란하게 하는 것인데, 부묘해서는 안되는 신위를 부묘하여 소목의 순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이것이 태묘에 들여서는 안되는 네째 이유입니다. 성묘(成廟)는 조묘(祧廟)해서는 안되는데 조묘하는 것은 예에 맞지 않고, 천묘(遷廟)해서는 안되는데 천묘하는 것도 예에 맞지 않아, 모두 조종을 존경하는 의리에 미흡한 점이 생기니, 이것이 태묘에 들여서는 안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더구나 태묘는 조종의 태묘이고 전하의 태묘가 아닙니다. 원종 대왕이 아무리 전하를 낳아 길러준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조종에 대해서는 실제로 왕통을 잇고 작위를 이어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하 개인적으로 망극한 은혜가 있다고 하여 조종의 덕을 관찰하는 태묘에 마음대로 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이 예를 강구한 지 지금 몇년째입니까. 그 동안 뛰어난 선비와 학자들이 예경을 근거로 불가함을 쟁론하였고 무지한 백성들도 모두 마음에 불만을 품고 있으니, 이는 만구일사(萬口一辭)의 공론이라 할 것입니다. 어찌 온 나라 사람들은 전하께 충성하지 않고 한두 담당자만이 충성을 다하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쫓아내고 가두는 것으로 직언한 선비들을 벌주고, 칭찬하고 총애하는 말씀으로 영합한 무리들을 권면하시어, 찬성하지 않는 백성의 입을 틀어막고 가리기 어려운 공의를 제어하려 하십니다만, 후세의 시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성찰하시고 활짝 대오각성하시어 태묘에 들이라는 명을 중지시킴으로써 허물을 고치는 법도를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번에 태묘에 들이는 예는 조금도 안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는 그대들이 간여하여 논할 바가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에 열중하라."
하였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연전에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아들 신승(申昇)이 상소할 때 아동들을 다수 거느리고 왔었다고 하는데, 이번에 상소한 유생 중에도 아동이 있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상소한 유생이 아동을 거느리고 왔는지의 여부를 신들이 자세히 알 길이 없기에, 상소한 유생 윤선거(尹宣擧)를 불러 물으니, 그가 ‘상소에 참여한 유생은 모두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소속된 유생들이다. 어찌 아동들을 거느리고 올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미년에 성균관 유생 이지항(李之恒) 등이 추숭은 예에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쟁론하였는데 ‘무슨 괴물’이라는 분부를 내리자 많은 선비들이 모두 성균관을 비우고 나왔다. 그때 동양위 신익성의 아들 승이 상소하여 변명하자 상이 화를 내었는데, 그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렸다고 한다.
홍명구를 대사간으로, 유백증을 부제학으로, 남노성(南老星)을 검열로 삼았다.
8월 16일 기사
금나라 장수 마부대(馬夫大)가 종호(從胡) 30여 명을 이끌고 중강(中江) 건너편에 와 둔치고는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말을 전하기를,
"우리들은 화물을 수송하기 위하여 나왔는데, 5백 명은 구련성(九連城)에 주둔하고 있고 2천 명은 대장 한 명이 거느리고 오는데 내일이면 구련성까지 진군할 것이다."
하고, 이어 술과 고기 및 식량과 반찬 등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8월 17일 경오
관학 유생 윤선거 등이 재차 상소하여 태묘에 들이라는 명을 중지시키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나의 뜻은 이미 유시하였다."
8월 18일 신미
부제학 유백증이 상소하기를,
"선비가 몸가짐을 하는 데는 다만 염치로써 할 뿐이고 임금이 세상을 격려하는 데도 염치로써 할 뿐이니, 염치가 세도(世道)에 있어서 실로 중하지 않습니까. 신은 타고난 성품이 황당하고 어리석은 나머지 오직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꺼리지 않는 의리를 알 뿐 앞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보는 태도를 수치로 여겨, 군부의 잘못한 일과 그릇된 정사가 치도(治道)를 해친 일과 조정의 신하가 무사안일한 자세로 할 일을 기피하는 일과 국세의 위태로움이 조석에 임박한 일 등에 대하여 전후의 소장에서 남김없이 진술하였으니, 신이 영합하는 사람이 아님은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록 영합하였다고 말하지만 황당하고 어리석은 저의 영합이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합사(合司)의 논의에 부화뇌동하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고 신의 몸에 해가 없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고서 무리를 따라 진퇴하는 것은 신의 본의가 아닙니다. 신의 형적이 이런 상황에 이르러 일마다 대처하기가 어려운데, 전조(銓曹)는 헤아리지 않고 주의(注擬)하였고, 성명은 헤아리지 않고 발탁하였습니다. 신이 형편없기는 해도 조금이나마 염치는 갖고 있는데, 어찌 뻔뻔스러운 얼굴로 반열에 나아가 평소 지켜온 뜻을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이 무턱대고 나아갈 수 없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으니, 삼사가 논쟁하는 때를 당하여 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가지고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 그 첫째이고, 많은 선비들의 배척을 무겁게 당해 그들로부터 영합하는 무리라고 지목받은 것이 그 둘째이고, 2년을 한직에 있다가 하루 아침에 지나치게 칭찬을 받게 된 것은 신만이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야 될 일일 뿐 아니라 여론도 영합했다고 의심하는 것이 본래 당연하니 이것이 그 셋째이고, 신의 지병인 위장병이 근래에 더욱 악화되어 원기가 소진된 나머지 날이 갈수록 위독한 지경에 이르니 이것이 그 넷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처지가 외롭고 위태로운 점을 살피시어 즉시 개체(改遞)를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직신(直臣)을 귀중하게 여겼던 까닭은 발언하기 어려운 말을 과감히 발언하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겉으로 헛된 이름을 노리고 속으로 사욕을 채우려 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직(直)이라 하겠는가. 지금 그대가 일종의 시론(時論)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진술하다가 부박한 무리의 배척을 당하였으니, 자신을 돌보는 계책은 엉성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저들이 사람을 저지하는 논거는 영합이란 두 글자이니, 이 말에 동요되지 말고 속히 직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부묘한 뒤에 교서를 반포하는 것과 관련된 예조의 의주(儀註)를 가지고 하교하였다.
"진하(陳賀)하는 일을 이미 형세에 따라 정지하였으니, 교서를 반포하는 일도 거행하지 말라."
8월 19일 임신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도독(都督) 심지상(沈之祥)의 차관(差官) 심영충(沈永忠)을 접견하였는데, 연회를 마치고 심영충이 궁전 뜰 안에서 말을 타고 나갔다. 이에 정원이 차비 역관(差備譯官) 등이 주지시켜 금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두고 치죄하기를 청하고, 또 말을 타고 궁전 문을 들어올 때 병조가 호령하여 제지하지 못하고 또 와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해 당상과 낭청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낭청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고토록 명하였다.
지중추 김신국(金藎國)이 상차하기를,
"도독의 차관이 궁전 문 안에서 말을 탄 일은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조사(詔使)와 같이 높은 신분일지라도 오히려 궁전 문 밖에 나가 말을 타는 법인데, 임시로 도사(都司)의 직함을 띤 일개 군졸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한 데 대한 분노의 표시로 능멸하는 행동을 보인 것이니, 어리석고 무지하여 예를 알지 못하는 자와는 실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접대소로 하여금 무례하여 응당 거절해야 되는 연유를 알리고 접대하는 기물을 철거하며 전송례를 정지하게 하는 한편, 도독에게 자문을 보내어 그의 무례한 죄를 다스리게 하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조사(詔使)와 같이 존귀한 자도 반드시 모두 우리 나라에 대해 극진히 경의를 표시하여 접대할 즈음에 예모를 잘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심영충의 일은 매우 사리에 어긋나니, 만약 이들의 행동대로 맡겨 두고 억제를 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매우 난감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 차자의 말대로 도독부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무엄한 일을 답습하는 폐단이 없도록 예방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직(李景稷)을 도승지로, 박명부(朴明榑)를 동부승지로 삼았다.
8월 20일 계유
유성이 우림성(羽林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도승지 이경직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혼조(昏朝) 때 비방을 받고서도 진실을 밝히지 못하였고 우리 성명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말이 많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전하께서 밝게 살펴 많은 비방 속에서 발탁하여 갑자기 막중한 지위에 올려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외지로 나가서는 큰 고을을 맡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삼조(三曹)의 아경(亞卿)을 지내, 위로는 부모를 영예롭게 하고 아래로는 일신을 빛내었으니, 이는 제 분수에 이미 넘치고 영화와 행운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은대(銀臺)037) 의 장관 자리가 갑자기 신 같이 못난 자에게 내리리란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직책이 전하와 친밀하고 처지가 금중(禁中)인 자리로는 은대만한 곳이 없고, 한 시대의 청선(淸選)으로는 수장(首長)의 자리가 가장 높으니, 아무나 함부로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속히 체직을 명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온당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모두 보았다. 그러나 경의 재능은 실로 이 직책에 합당하니,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돌보라."
하였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사조(辭朝)038) 하였다.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경이 지금 중임을 받고 떠나려는 참이니 반드시 말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모두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성휘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재능이 부족한데도 누차 총애를 받아 발탁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중책을 맡으니 국은을 저버릴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는 조종조 이후로 백성과 물자가 풍부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매우 피폐해졌다. 어떻게 하면 옛 시절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휘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본도에 대해서는 전부터 조정의 돌보는 은전이 타도보다 배나 되었고 부역을 덜어 주었으며 우마(牛馬)도 많이 빌려 주었다고 합니다. 또 남쪽의 군사들이 입방(入防)하면 남은 미포(米布)로 서로 보탬을 주어 백성들이 그 덕택으로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휼하는 은전도 없고 방수에 입방하는 군사도 없기 때문에 백성들의 기반이 없어져 생활을 꾸려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찰방은 반드시 이명준(李命俊)과 같은 인물을 얻어야만 제어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인물을 가려서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찰방을 아무리 명관으로 보내더라도 직책에 충실하게 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수령의 현부(賢否)와도 상관이 없다. 오직 경이 그들의 출척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지난번에 함흥 판관 김수(金澃)의 상소를 보건대 군정(軍政)이 그토록 허술하여서는 비록 내지(內地)라 하더라도 지탱하지 못할텐데, 더구나 본도는 국경지대로서 변란을 대비해야 할 지역인데 이겠는가. 경은 부디 심력을 다하여 잘못됨이 없게 하라. 또한 국가가 쇄환(刷還)하는 일은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실적이 없으니 그 일도 명백히 검칙하여 낱낱이 치계(馳啓)하라."
하였다. 성휘가 아뢰기를,
"변읍(邊邑)에는 어교(魚膠)가 없어 활과 화살을 만드는 데 모두 아교(阿膠)를 쓰고 있으며 전죽(箭竹)도 북쪽 변방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있습니다. 해조가 저축해 둔 어교와 군기시가 소장하고 있는 전죽을 내려 주소서."
하니, 상이 모두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헌납 김경여(金慶餘)가, 헌부에 내린 비답 가운데 ‘배척하고 허락하지 않는 무리는 모두 스스로 노린 헛된 명예를 차지하고 삼사와 양전(兩銓)을 저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였으므로, 후배들이 침을 흘리며 서로 본받기에 바쁘다.’고 한 분부를 이유로 인피(引避)하고, 정언 성이성(成以性)·홍명일(洪命一), 지평 박수홍(朴守弘), 장령 김덕승(金德承) 등도 같은 이유로 인혐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가까운 날에 목릉(穆陵)을 참배해야겠으니, 해조에 이르라."
8월 21일 갑술
유성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우림성(羽林星) 위로 들어갔다.
8월 26일 기묘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상차하기를,
"신이 일찍이 듣건대, 송(宋)나라 조정에서 희조(禧祖)를 조천(祧遷)하는 일로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나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태조(太祖)가 4조(祖)를 추숭한 뒤로부터 치평(治平)039) 연간에 이르기까지는 희조의 조천을 의논하여 태조를 동향(東向)의 자리에 앉혔는데, 신종(神宗)이 다시 희조를 받들어 동향하게 하고 태조를 소목에 진열하였습니다. 그때 사마광(司馬光)과 한유(韓維)는 그 불가함을 극력 논하였으며 유독 왕안석(王安石)만이 가하다고 하였는데, 정이천(程伊川) 역시 왕안석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 뒤 1백여 년 동안 몇 번이나 조천하고 몇 번이나 회복시키면서 명현 석보(名賢碩輔)들이 제각기 자기 주장을 고집하였습니다. 영종조(寧宗朝)에 이르러 또다시 희조를 조천하자는 논의가 일자, 주자(朱子)가 조천함이 불가함을 극력 말하면서 차주(箚奏)와 의장(議狀)을 전후로 잇따라 올려 반복하여 자상하게 분변하였는데, 그 당시 승상이었던 조여우(趙汝愚)가 주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희조를 조천하였습니다. 사람들의 견해가 각각 다르고 논의가 일치되지 않는 것이 예로부터 이러하였으니, 오늘날 논의가 합일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윤서(倫序)를 중하게 여기시고 조정의 신하들은 종통(宗統)을 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윤서는 고조·증조·조·예(禰)의 차례를 따르는 상도(常道)이고 종통은 들어가서 왕통을 계승하는 왕가의 변례입니다. 원종 대왕이 비록 전하를 낳아 길러 기틀을 마련한 성덕(盛德)이 있다 하더라도 왕위에 올라 백성들에게 임한 임금과는 실로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의 논의가 이와 같은 것이지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경솔히 거행하여 과실을 지으실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성명께 죄를 짓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하의 위엄을 범하면서까지 서로 다투어 논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한다면 되겠지만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공경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절대로 그 본마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혐의를 품고서 배척하고 명예를 찾아 세력에 아부하였다는 분부는 모두 실정에 가깝지 않습니다.
아, 희조의 조천에 대한 논의와 태조를 소목에 강등하여 진열하는 일에 대한 논의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누구 하나 벌을 받은 신하가 있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지금은 무거운 벌이 잇따르니, 이 어찌 청명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신의 이 말이야말로 같은 죄를 지은 이를 구호한다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만, 신은 다만 한번 성덕(盛德)에 누를 끼치게 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될까 염려하여 구구하게 말씀드리는 것이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심기를 화평하게 갖고 이치를 살펴서 그 실정을 헤아려 주소서.
신의 어리석은 견해 역시 종통을 중하게 여기니, 따라서 전부터 전하의 뜻을 따르지 못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추숭하는 예가 이루어지고 봉전(封典)이 이미 내렸으니, 별묘(別廟)를 세워 받드는 일이야말로 인정과 예법이 이미 모두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전하께서 어버이를 높이고 드러내는 지극한 정성을 우러러 보았는데, 태묘에 들이는 일을 새로이 더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태묘에 들이면 조묘(祧廟)를 해야 됩니다. 전하께서 망극한 효성으로 힘을 다하여 주선하시어 끝내 태묘에 올리려 하시면서 성조(聖祖)를 조천(祧遷)하는 것까지도 돌아보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는 소목이 서로 계승하여 자연히 차례를 따르는 예와는 실정과 이치가 매우 다릅니다. 신은 이 점에 대하여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시종 마음에 불안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이 전에 주자가 조묘에 관하여 올린 차자를 읽은 적이 있는데, 공자가 문(文)·무(武)·주공(周公)의 효를 논한 것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천자의 자리에 올라서는 천자의 예를 행하고 천자의 음악을 행하며 그분이 친애한 분을 친애하고 존경한 분을 존경하는 법이다. 지금 천자께서 이미 태조(太祖)가 올랐던 자리에 올랐으니 태조가 행했던 예를 행하고 태조가 연주했던 음악을 연주하며 친애한 분을 친애하고 존경한 분을 존경해야 지극한 효도가 된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도 지금 전하께서 이미 선조(宣祖)가 올랐던 자리에 오르셨으니, 선조가 행했던 예를 행하고 선조가 연주했던 음악을 연주하며 친애한 분을 친애하고 존경한 분을 존경해야 지극한 효도가 된다고 여깁니다. 주자가 또 말하기를 ‘태조(太祖)를 높여서 동향(東向)하게 하는 것은 천하의 신자(臣子)들이 오늘날 원하는 바이고, 희조(禧祖)를 받들어 동향하게 하는 것은 태조 황제 당일의 마음이다.’ 하였는데, 신 또한 전하의 금일의 정(情)이 비록 지성에서 나왔지만 하늘에 계신 4대 열조(列祖)들의 마음 또한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새삼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전하의 뜻에 앞서 열조들의 뜻을 받들어 사은(私恩)을 굽히고 대의를 신장시켜 태묘에 혐의스러움이 없고 온 나라에 당당하게 할 말이 있게 하소서. 그러면 성상의 효도가 이에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괴상망칙하다 여기신다면 종묘의 예는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신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 죄를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의논할 만하다고 허용하신다면 신은 죽더라도 눈을 감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태묘에 들이는 일은 황상의 봉전(封典)을 받아 태묘의 궐실(闕室)에 부묘(祔廟)하는 것이니, 실로 중국 조정에서 직접 추숭하고 직접 부묘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고 또한 전대(前代)에 대하여 곤란하거나 난처한 일도 없다. 그리고 조천하는 일에 대해서도 의논할 만한 것이 없다. 만약 종묘의 칸 수로 말한다면 네 칸이 이미 차서 성묘(成廟)를 당연히 옮겨야 되는데, 고조·증조·조부·예묘로 말한다면 성종 대왕을 지금에 꼭 옮겨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실로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만약 불천위(不遷位)가 아닌 것을 그대로 종묘에 둔다면 그것은 또한 무슨 예이겠는가. 경은 분분한 논의에 동요되지 말고 차분히 성찰토록 하라."
하였다.
8월 27일 경진
예조가 아뢰기를,
"왕후의 고비(考妣) 묘를 봉심(奉審)케 하여 계문토록 하는 것은 실로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만, 관에서 수리한다는 조문은 없으니, 만약 관에서 수리하는 경우 전에 없던 일을 새롭게 만들어 후일의 관례가 될까 걱정됩니다. 혹시 본가에서 수리할 경우에는 본도에 특명을 내려 군인을 보내 일을 돕게 하되 훗날의 관례가 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대개 김제남(金悌男)·한준겸(韓浚謙)의 묘가 허물어져 본도로 하여금 수리하도록 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8월 28일 신사
전 군수 홍무적(洪茂績)이 상소하기를,
"추숭하는 대례(大禮)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논의가 하나로 일치되고 황상의 칙서가 이미 내렸으니, 비천한 신이 왈가왈부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태묘에 들이는 일만은 예경(禮經)에 상고하여도 근거가 없고 옛날의 사례를 찾아 보아도 증거가 없는데, 전하께서 독단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논의를 배격하시니 신은 삼가 의혹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진(秦)·한(漢) 이래로 번저(藩邸)에서 들어가 대통을 이은 자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러나 한나라의 선제(宣帝)·애제(哀帝)와 송(宋)나라의 복왕(濮王)의 경우에만 그 당시 명유(名儒)들의 논의가 제각기 시비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참고로 삼을 만하고 그 외에는 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일을 예에 합당하다고 여겨 행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옛날에도 그렇게 한 경우가 있다고 여겨 행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태묘에 들이라는 명이 갑자기 내렸는데, 대신이 언급하자 견책이 이어지고 대간이 간쟁하자 쫓아내는 벌이 뒤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전하께서 마음대로 하는 과실이 마음 속에서 굳어지고 독단하는 잘못이 날이 갈수록 밖으로 드러나 위망(危亡)의 징조가 한둘이 아니니, 2세(二世)040) 의 멸망과 혼조(昏朝)의 혼란이 모두 목전에 닥쳤으므로 신은 저으기 가슴이 아픕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뜻 마음을 돌려 독단하려는 뜻을 없애버리고 대신들을 다독거려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고 충직한 말을 받아들여 그 죄를 모두 풀어준 뒤 다시 의논하게 하여 예에 맞지 않는 예를 행하지 마소서. 그렇게 하면 국가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소를 올렸어도 답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홍무적이 지평으로 있을 때 어느 대간이 논핵을 하였는가? 정원은 살펴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유백증(兪伯曾)이 대사간이고 김남중(金南重)이 사간이고 이상질(李尙質)이 헌납이고 김덕승(金德承)·송국택(宋國澤)이 정언이었을 때 홍무적을 논핵하였습니다."
하였다.
8월 29일 임오
예조가 아뢰기를,
"목릉(穆陵)에 친히 제사지낼 때 건원릉(健元陵)과 현릉(顯陵)이 모두 같은 산 안에 있으므로 목릉만 제사지내는 것은 미안할 듯한데, 그렇다고 함께 제사를 지낸다면 시간이 절대 부족합니다. 삼가 갑자년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목릉은 주상께서 친히 제사를 지냈고 건원릉·현릉·유릉(裕陵)은 대신을 나누어 보내 제사를 지냈으니, 이 전례에 의거하여 건원릉·현릉은 대신을 나누어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옥책 도감(玉冊都監)이 아뢰기를,
"책함(冊函)에 지봉(紙封)이 있는데 거기에 ‘신근봉(臣謹封)’ 세 글자를 쓰고 신 자(字) 밑에 어압(御押)을 하여야 됩니다. 지금 이 지봉을 들이니, 어필(御筆)로 수결(手決)하신 뒤에 향실(香室)에 두었다가 책문(冊文)을 내는 날에 맞추어 함의 겉면을 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30일 계미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유백증(兪伯曾)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예경(禮經)》에 대하여 그 곡절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만, 신은 이미 이루어진 예를 굳이 간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공의가 이것을 인하여 대단하게 일어나니 신이 어찌 감히 버젓이 반열에 나아가겠습니까. 누차 인혐하였으나 체직을 윤허하지 않고 도리어 격려하는 말씀을 내리셨으므로, 신은 황송하고 감격하여 부득이 출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본의는 양사에 간통(簡通)하여 그 논의를 정지시키려 함인데, 동료들의 논의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대로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신의 처지가 실로 매우 낭패스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유생들의 상소에 동요된 것은 아닌가?"
하였다. 유백증이 아뢰기를,
"유생들의 상소에서 저를 영합하였다고 배척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외방에서의 비난도 마치 표적을 겨누는 화살과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많은 사람들의 논의가 분분한데 혼자서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였으니, 참으로 진미(盡美)하다고 할 만하다."
하자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유백증은 사람됨이 소박하고 정직한데 영합하였다고 지목한 것은 절대로 근사하지 않으니, 이는 연소배들의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근래에 주상께서 간혹 견벌(譴罰)을 내리시면 대신과 삼사가 일시에 번갈아 가면서 상소하여 마치 그를 구해 주는 것처럼 하였으므로, 신 역시 그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한번도 발언하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탑전에서 감히 저의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강(姜)·조(趙)의 무리는 모두 한 시대의 선랑한 사람들인데, 이 논의가 처음 나왔을 때 신과 상의를 하지 않았으므로 신은 알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임련(林堜)이 신을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견해가 유백증과 다름이 없어 이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공의 생각에는 어떤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다. 그대가 꼭 피하려면 분명 공론에 죄를 얻게 될텐데 그대가 외톨이로 어느 곳에 몸을 두겠는가.’ 하니, 알았다고 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들으니 임련이 휩쓸려 그 논에 참여하면서 별다른 의견을 내세운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추숭하여 태묘에 들이는 일은 계해년간에 논쟁했던 것과는 크게 성격이 다릅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봉전(封典)을 이미 내린 상황이니, 삼사가 논하는 것은 모두 근거가 없습니다. 삼대(三代) 이전에 대해서는 추숭하는 예가 전기(傳記)에 나타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명(明)나라 건문(建文) 때에 의문(懿文)을 추숭한 일에 대해, 그 당시 방효유(方孝孺)가 평생 학문에 힘쓴 사람으로서 주례(周禮)에 종사하였고 기절(氣節) 또한 무리들 중에서 특출하였는데 오히려 찬성하였으니, 이것이 분명한 증거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태정(泰定)041) 때와 같은 일은 오랑캐인 원(元)나라의 예였던 만큼 거론할 것이 없겠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한 선제(漢宣帝)가 조부의 후계가 된 것만을 잘못보고 종손(從孫)과 직손(直孫)은 현격하게 다른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예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예묘가 이미 정해진 상황이니 태묘에 들이거나 별묘를 세우거나 하는 것은 의문(儀文) 중의 소절(小節)에 불과합니다. 성상께서 만약 태묘에 들이는 예를 행하려 하신다면, 어찌하여 주청(奏請)한 글과 책봉한 칙서를 꺼내어 대신과 삼사를 불러 보여주고 차분히 일러주어 강정(講定)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그 일은 하지 않으신 채 강압적으로 해사로 하여금 봉행하게 하고 조정 신하들의 간쟁에 진노하여 준엄한 분부와 함께 견책을 뒤따라 내리고 있습니다. 임금이 하려 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지금은 그만 일의 순서가 전도되어 이처럼 전에 없던 지나친 행동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모두 정원을 비우고 나가고 궐문도 닫지 못하고 있는데, 과거에도 이런 때가 있었는가?"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승지가 정원을 비운 것은 참으로 매우 당치 않으니 벌을 내린 것 역시 가볍게 내린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무리들이 서용될 경우 바로 초탁(超擢)을 받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논의를 주도하는 사람들한테 잘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간에 진정한 시비를 아는 자가 적은데, 대간들이 다투어 허명(虛名)을 숭상한 나머지 시비를 살피지 않고 간쟁하니 더없이 놀랍다. 지난번 옥당의 차자 속에 ‘성묘(成廟)가 아직 4실(室) 안에 있다.’ 한 말이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검토관 이시해(李時楷)가 대답하기를,
"신이 지난번 동료들과 상의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국조(國朝)의 태묘 제도에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이 1세(世)가 되기 때문에 성묘가 그대로 4실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실(室)이란 칸수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고조·증조·조·예의 대수(代數)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 그 말은 매우 부당하다."
하였다. 이시해가 아뢰기를,
"예를 따지는 사람들을 취송(聚訟)한다고들 하는데, 더구나 이 중대한 예에 어찌 서로 다른 논의가 없겠습니까. 상의 분부에 ‘명예를 산다[沽名].’고 한 것은 실로 사실과 다릅니다. 종묘에 관한 일은 국가의 중대한 예인 만큼 털끝만치라도 착오가 생기면 과실이 적지 않습니다. 그 뜻은 단지 종통(宗統)을 중히 여기고 임금을 허물이 없는 쪽으로 인도하려 한 데서 나왔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간신이 권세를 제멋대로 하여 조정이 혼탁해지고 임금이 우매하여 국가가 망하게 된 뒤에야 초야의 상소가 있게 마련이었다. 지난번 유생들의 상소가 온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시해가 아뢰기를,
"근자에 선비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므로 신도 이 일에 대해 매우 좋지 않게 여깁니다. 제생(諸生)들이 안으로 훌륭한 부형이 없고 밖으로 훌륭한 사우(師友)가 없어 날이 갈수록 점점 투박해진 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학교에 대한 정책이 올바로 행해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 심하다. 선비들의 풍습이 이토록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도다. 상소한 수백 명의 유생 가운데 어찌 한두 명의 훌륭한 부형이 없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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