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8월 1일 갑신
중국 장수 심지상(沈之祥) 등 11인이 도병(島兵)을 거느리고 천가장(千家庄)에 이르러 곧 오랑캐 소굴을 습격한다고 호언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가서 심지상을 만나보니, 그가 말하기를
"병부(兵部)가 차관을 보내 도병을 재촉하여 오랑캐 소굴을 무찌르게 하였는데, 이는 오랑캐들이 현재 선(宣)·대(大)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조익(趙翼)을 동지경연으로, 이상질(李尙質)을 교리로, 신민일(申敏一)을 사간으로 삼았다.
윤8월 2일 을유
이때 양사의 관원 거의 모두가 유고(有故) 중이었는데, 사간 신민일(申敏一)이 태묘에 들이라는 명을 빨리 중지하라는 내용으로 독계(獨啓)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해조에 명하여 부묘하고 나서 교서를 반포할 때 진하례(陳賀禮)를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한 뒤에 채붕(彩綳)042) ·결채(結綵)043) ·가요(歌謠)·방물(方物)과 같은 것을 정지하라는 명은 실로 겸손하고 검소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진하하는 의식이야말로 신하들의 송축(頌祝)하는 지극한 정성이니, 결코 전부 없애서는 안됩니다. 진하례와 교서를 반포하는 일을 일시에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8월 4일 정해
금부가 이덕수(李德洙)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입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덕수는 죄가 매우 무거워 형추(刑推)해야 마땅하겠지만, 우선 삭직(削職)하고 멀리 내쫓아 북쪽 변방으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응당 삼대(三代) 이전을 기약하고 삼대 이하는 논하지 않습니다. 지금 신하들이 기탄없이 말을 다한 것도 성명의 무한한 도량을 믿고 삼대 이하로써 바라지 않으려 한 것이니, 그 또한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송나라 신하 소식(蘇軾)의 말에 ‘본조가 인후(仁厚)한 덕으로 나라를 세웠고 인종 황제(仁宗皇帝)가 즉위한 40년 동안 한번도 언관을 죄준 적이 없으니, 사직의 무궁한 장래가 끝내 그것을 힘입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재삼 이 말을 반복하면서 구구하게 성명께 바라는 뜻은 전후 차자에서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쫓아낸 여러 신하들의 죄를 용서하고 관대하게 포용하도록 힘쓰소서. 그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어제 삼가 듣건대 이덕수가 다시 멀리 유배시키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인신 가운데에는 천자가 재상과 의논하지도 않고 내린 조서를 도로 봉입(封入)한 자044) 가 있었는가 하면, 촛불을 당겨 조서를 태운 자045) 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윗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공경하지 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스스로 지나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덕수가 그런 이유로 죄를 받게 된다면 듣고 보는 원근의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할 것입니다. 관용을 베풀어 화평한 도량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덕수의 죄는 헤아려 감하겠다."
하고, 이어 이덕수를 연산현(連山縣)에 이배(移配)토록 명하였다.
임광(任絖)을 집의로, 이경(李坰)을 장령으로, 김광현(金光炫)을 부제학으로, 김광혁(金光爀)을 수찬으로 삼았다.
대신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부묘한 뒤에 진하하는 의식과 교서를 베푸는 일을 멈추거나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여쭈었는데, 윤허를 받지 못하여 섭섭한 심정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3년 동안이나 몸이 불편하시던 끝에 담제(禫祭)와 부묘하는 예를 차례로 거행하게 되었으니, 신민들의 송축(頌祝)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교서를 반포하는 일도 부묘의 예가 이루어진 뜻을 중외에 알려 경사를 함께 누리려는 것입니다. 모두 아랫사람들의 지극한 뜻과 관련된 것인 만큼 참으로 모두 정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듣건대 음복(飮福) 날짜가 고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천장일(遷葬日)과 맞물려 14일로 바꾸어 잡았다고 하였습니다. ‘제사지내고 제육은 밤을 넘기지 않고 나누어 주니 이는 신의 은혜를 지체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설이 분명히 옛말에 있으니, 음복례를 3일을 넘겨서 행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더구나 이귀의 천장은 초상(初喪)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공자 손(公子遜)이 초상을 당했다는 부고가 임금의 제삿날에 당도했다는 《춘추(春秋)》의 예와는 같지 않으니, 예관이 참작하여 정해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상신(相臣)의 계사가 사리에 합당하니,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제사를 마친 뒤에 때에 따라 거행하고, 음복연은 앞서 정한 날짜에 따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윤8월 8일 신묘
달이 기성(箕星) 서쪽 첫째 별을 범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하니, 음복연 때에 왕세자 이하가 다만 한 잔을 올릴 뿐이고 연이어 올리는 것과 스스로 마신다는 조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어전에서 연이어 두 잔을 올리는 것과 끝에 스스로 마시는 것을 합쳐 석 잔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오례의》가 지어진 뒤에 근래 행하고 있는 제도인 것으로, 전례(前例)가 이와 같다고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례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음복한 뒤에 곧바로 배례(拜禮)를 행하고 왕세자 이하가 전내(殿內)에 들어와 앉은 뒤에 술잔을 올리는 것이 편리할 듯하다. 다시 예관에게 물으라."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지금의 의주(儀註)는 모두 《오례의》를 근거로 하였는데, 성교가 이와 같으니 개정하여 올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음복연에 대한 의주를 가지고 하교하기를,
"이 의주 가운데 음복한 뒤에 배례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술잔 올리는 것을 전에는 두 잔으로 하였는데 왜 한 잔으로 정하였는가?"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오례의》에는 ‘음복한 뒤에 둘째 잔을 올리고 네 번 절을 한 뒤에 왕세자 이하가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위를 부묘한 데 따라 음복한 뒤에 곧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이상 자리로 나아가기 전에 당연히 배례를 행해야 되는데, 개정할 때 착오로 배례에 관한 한 조목을 빠뜨렸습니다. 잔을 올리는 절차는 《오례의》에는 다만 한 잔을 올리도록 되어 있는데, 중간에 예를 거행하면서 간혹 연이어 두 잔을 올리고 마지막 잔을 스스로 마시는 때가 있기 때문에 감히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의 비답에 전례대로 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비답에서 전례대로 하라고 한 것은 필시 중간에 연이어 올리는 규정을 가리킨 것이라고 여겼는데, 어떤 이는 ‘틀림없이 《오례의》에 실려 있는 「한 잔을 올린다.」는 규정을 가리킨 것이다.’ 하였습니다. 견해가 이처럼 달랐기 때문에 감히 자신의 견해를 확신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성교를 받들었으므로 석 잔으로 개정하여 들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윤8월 9일 임진
달이 남괴(南魁)로 들어가 다섯째 별을 범하였다. 상이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부묘제를 거행하려고 종묘로 나아가면서 망묘례(望廟禮)를 거행하였다. 신주를 실은 가마가 효사전(孝思殿)으로부터 도착하자 상이 자리에 나가 경건히 맞이하였다. 이튿날 부묘제를 거행하고 환궁하여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태묘에 나아가 부묘의 의식을 마치고 온 나라에 알리려고 이어 교서를 반포한다. 아직 가시지 않은 슬픔을 잊지 못하는데, 어찌 하례받을 생각을 갖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성후(聖后)의 정숙한 자태는 일찍부터 왕비의 아름다운 법도를 드러내셨다. 황천(皇天)의 도움을 받아 다시 윤기(倫紀)가 밝아짐에 소자가 감당할 수 없는 종사의 책임을 외람되이 맡게 되었다. 생전에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였는데, 돌아가신 뒤 추숭하기도 쉽지 않았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어느덧 상제(祥制)·담제(禫制)가 모두 지나, 종묘의 예에 따라 의당 소목(昭穆)의 반열에 올려야 하겠기에, 갑술년 윤8월 10일에 삼가 황조비(皇祖妣) 소성정의 명렬광숙 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를 받들어 태묘에 모셨다. 이제부터는 신(神)으로서 섬기고 예는 길례(吉禮)로 바꾸어 겨울의 증(蒸) 제사와 여름의 약(禴) 제사는 물론 사시의 제사를 모두 이곳에서 지낼 것인데, 이실동당(異室同堂)의 제도로 열성(列聖)의 자리가 모두 가지런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행적은 사필(史筆)에 빛나고 혼백은 이제 종묘에서 편안함을 얻게 되셨다. 이번에 큰 일을 마쳤으나 끝내 사모하는 정은 어찌하겠는가. 아, 서리 내리는 싸늘한 계절에 처창(悽愴)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만지고, 엄숙한 묘우(廟宇)를 바라보니 일기(一氣)가 집산(集散)하는 뜻을 다시금 느끼겠다."
합사(合司)하여 태묘에 들이는 일을 연계(連啓)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호군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기를,
"시골에 있으면서 삼가 듣건대, 국가가 별묘(別廟)를 받드는 일과 태묘에 들이는 일로 상하가 견해를 달리하고 조정의 논의가 화합하지 못하여 전하께서 진노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위와 아래가 통하지 못하고 조정의 논의가 화합되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하의 심기가 이로부터 크게 손상될까 걱정됩니다.
정명도(程明道)의 정성서(定性書)에 ‘사람의 정(情) 가운데 쉽게 일어나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성냄이다.’ 하였습니다. 대저 천지의 역량으로서 우레로 나타나는 것은 잠시에 불과하고 그 때를 넘긴 적이 없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우레를 치면 반드시 원화(元和)를 손상시키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인군의 역량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지만 오랫동안 노기를 가져 한쪽으로 치우치면 심기를 손상시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사자(子思子)가 말하기를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현되고서 알맞게 조절된 것을 화(和)라 한다.’ 하였는데, 이는 마음의 본체와 작용을 나누어서 말한 것입니다. 작용이 화가 되면 그 본체는 반드시 중이 되고 본체가 중이 되면 그 작용은 반드시 화가 되니, 작용이 화가 되지 않고서 본체가 중을 얻거나 본체가 중이 못되면서 작용이 화하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전하의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어찌 중화(中和)의 도를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오늘의 이 일을 인하여 앞으로 큰 사업을 그르칠까 염려됩니다. 마음이 만약 화를 잃으면 이치를 반드시 정밀하게 보지 못하고 일에 반드시 바르게 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치가 정밀하지 않거나 일이 바르지 않게 되면 그로 인하여 성덕의 해가 됨이 어찌 다만 지금의 한 가지 일뿐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오늘의 이 일에 대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쳐 차분히 헤아려 그 양단(兩端)을 잡고서 중도를 가려서 쓴 뒤에야 일이 마땅한 쪽으로 귀착되고 먼 후세에도 이의가 없게 될 것이라 여깁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의 본의는 오직 낳아준 부모에게 지성을 바쳐 존봉(尊奉)의 도를 다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의 그 마음은 사덕(四德)의 으뜸인 인(仁)이며 백행(百行)의 첫째인 효(孝)입니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인보다 큰 것이 없고 사람이 극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효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금일 신민들이 전하께 누구인들 인과 효로써 표준을 세우는 근본으로 삼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다만 살피건대 주 문왕(周文王)이 《역(易)》 무망괘(旡妄卦) 괘사(卦辭)에서 ‘무망은 크게 형(亨)하고 정(貞)함이 이로우니, 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생기며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지 않다.’ 하였고, 공자는 단전(彖傳)에서 ‘무망의 감[往]이 어디를 가겠는가. 천명(天命)이 이롭지 않은데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주공은 상구 효사(上九爻辭)에서 ‘무망은 행하면 재앙이 생기고 이로움이 없다.’ 하였고, 공자가 다시 소상전(小象傳)에서 ‘무망으로서 행하는 것은 궁(窮)한 재앙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천하의 이치는 일단 무망이 되면 끝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시 가는 바가 있으면 도리어 바른 것이 못되고 이치를 해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仁)이야말로 무망의 이치인데, 일에 닥쳐 어느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포괄할 때 모두가 자연히 온당한 법칙을 얻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을 행하는 자가 혹 사의(私意)에 구속됨을 면치 못하여 털끝 만큼의 지나침이라도 있어 온당한 법칙을 잃게 되면, 그 일이 비록 좋더라도 인이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주역》 괘사의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지 않다.’는 뜻과 상구 효사의 ‘재앙이 생기고 이로움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 공자가 맹무자(孟武子)의 효에 대한 질문에 답한 말을 보건대 ‘효는 어김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였는데, 그것은 예를 어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이어서 번지(樊遲)에게 이르기를 ‘살았을 때 예로 섬기고 죽었을 때 예로 장례를 치르면 효(孝)라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예가 지나치면 도리어 효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친부모에게 효도를 바친 것이 이미 극진합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다고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데, 더구나 다시 태묘에 올려 모시는 일이겠습니까. 이는 옛날에 근거가 없는 도리로서 그야말로 무망에서 다시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효도를 하려 했다가 도리어 효도에 해를 끼치고 일을 행하려 했다가 도리어 인에 해를 끼치게 되니, 이는 마땅히 정밀하고 전일하게 따져 보아야 될 중요한 부분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엄밀히 살피소서.
신이 듣건대, 별묘와 태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인정상 미안한 점이 있다고 하는데, 신도(神道)도 이치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태묘 근처로 옮겨 배치해서 봉안하면 열성(列聖)들이 두텁게 비호할 것이고 별묘도 가까이에서 의지하게 되는 편암함이 있을 것이어서, 우리가 보고 듣지 못하는 중에 왔다갔다 하고 오르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제사를 지낼 때 같은 길일을 택하면 일의 형편이 편의하고 인정과 이치가 모두 온당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숭봉(崇奉)의 극치입니다. 이 정도로 그쳐 ‘무망은 가는 바가 있으면 이롭지 않다.’고 한 경계를 지키면, 천지의 상경(常經)이 온전해지고 고금의 통의(通宜)가 변함이 없게 될 것이며, 전하의 지극한 뜻이 신장되고 온 조정의 논쟁이 정하여질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원종 대왕의 혼령도 이것을 편안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곧 오늘날 중도(中道)를 쓰는 도리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이 내가 심기를 상할까 염려하여 천리 먼 곳에서 소를 올렸는데,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은 다른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진술한 바 태묘에 들이는 일에 대한 시비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는가. 전대의 추숭은 모두 두 고위(考位)가 있게 되는 혐의가 있는 만큼 태묘에 들이는 것을 미안하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오늘날의 일은 두 고위의 혐의가 없고 또 종묘에 예위(禰位)가 비어 있다. 고금천하에 어찌 예위가 없는 종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의 별묘는 후세에 가면 더욱 불편하게 되니, 이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황조에서 인정과 예법을 밝게 살펴 흔쾌히 은봉(恩封)을 내렸고 예위도 비어 있어 천자의 명에 따라 태묘에 들이는 것이니, 조금도 미안할 것이 없다. 오늘날 태묘에 들이면 선조 대왕은 사자(嗣子)가 없다가 사자가 생기고 태묘는 예실이 없다가 예실이 생기니, 인정과 예법이 모두 마땅하고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유감이 없다. 경은 범범히 논하지 말고 다시 정밀하게 살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윤8월 11일 갑오
정원이 아뢰었다.
"조금 전에 유생 두 사람이 본원에 소를 올렸는데, 하나는 태묘에 들이지 말기를 청한 것이고 하나는 태묘에 들이기를 청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미년 하교에 의거하여 모두 올리지 않았습니다."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교리 이상질(李尙質), 수찬 이시해(李時楷) 등이 상차하기를,
"세상의 일은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는데, 저쪽이 옳으면 이쪽은 그르고 이쪽이 옳으면 저쪽은 그른 것이 자연의 이치여서 둘 다 존립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태묘에 들이는 일은 온 나라가 모두 예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 위로는 대신에서부터 아래로는 초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번갈아 가면서 상소하여 극력 간쟁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큰 시비이고 큰 논의라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설사 의견이 다른 한두 사람이 있더라도 제각기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고 부화뇌동하지 않으면 될 것이고 자신의 편견을 가지고 공론을 억제하여서는 안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조 참의 유백증(兪伯曾)은 전에 간원의 장관으로서 합사(合司)한 공의(公議)가 한창 일어날 즈음에 자신의 사견(私見)을 옳게 여겨 공의를 저지할 목적으로 동료들의 출사(出仕)를 기다리지도 않고 혼자서 정계(停啓)하는 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옥당으로 옮겨 임명되었을 때 물의가 떠들썩한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출사하였으니, 너무나도 조정을 경시하고 남의 말을 거들떠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혹 공론을 맡은 지위에 있으면서 이런 연이어 상소하는 사태를 만났는데도 배회하고 곁눈질이나 하면서 진퇴를 분명히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행신과 처사가 구차하고도 근거가 없는 만큼 모두 공의가 용납하기 어려워, 형세상 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끝내 그 잘못됨을 거론하여 바루는 자가 없으니, 이것만으로도 세도(世道)를 보기에 충분합니다.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양사의 관료들이 함께 용납할 수 없다는 뜻으로 논의를 꺼내고 인피하였다가 이미 출사한 뒤에는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으니, 언관의 일을 논하는 체모가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너무 기가 꺾여 사기가 저상된 탓이기는 하지만 대각의 풍채가 이토록 미약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유백증은 파직시키고, 대사간 홍명구(洪命耉), 헌납 김경여(金慶餘), 정언 홍명일(洪命一)·성이성(成以性), 장령 김덕승(金德承), 지평 박수홍(朴守弘)은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차자를 들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수찬 김광혁(金光爀)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신이 지난 신미년 사이에 본관의 반열에 있으면서 마침 추숭에 관한 논의를 하게 되어 감히 여타 동료들과 함께 예에 의거하여 논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차자의 글은 사실 신의 손으로 지었는데, 그 광망한 내용이 천위(天威)를 심히 건드려 잡아들여 국문하고 멀리 유배보내라는 명이 잇따라 내렸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풀려나는 은혜를 입어 죄를 면하였으며, 수년 사이에 거듭 등용되어 여러번 중요한 직책을 받았습니다. 지난번에 헌부의 여러 신하에게 내린 비답을 삼가 보건대 ‘삼사와 양전(兩銓)을 저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신은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 무슨 말을 해야 될 지 몰랐습니다.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시 못할 짓이 없는 곳까지 이를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왜 분명히 그 사람을 지적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지 않고, 조정의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십니까. 신이 실제로 청요직(淸要職)에 재직한 적이 많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반열에 나아가겠습니까. 더구나 삼사가 이제 막 양시론(兩是論)을 꺼내고 있습니다. 신은 학술이 정밀하지 못하여 비록 예경(禮經)에 어둡지만 미혹된 견해를 아직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소 국가에 신명을 바치려 한 뜻은 몸을 편안히 하고 녹봉을 구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니, 결단코 억지로 본정(本情)을 굽히고 대중들을 따라 처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계자(啓字)를 찍어 내렸다.
상이 하교하였다.
"헌관(獻官) 지중추 김신국(金藎國), 풍해군(豐海君) 호(浩), 순흥군(順興君) 김경징(金慶徵)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내리고, 천조관(薦俎官) 이소한(李昭漢), 집례(執禮) 변삼근(卞三近)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내리라. 대축(大祝) 한흥일(韓興一)에게는 준직(准職)을 제수하고, 전사관(典祀官) 유인량(柳寅亮), 전사(殿司) 심헌(沈櫶), 축사(祝史) 최후헌(崔後憲), 재랑(齋郞) 윤점(尹坫), 봉조관(奉俎官) 윤홍보(尹弘輔) 등 3인과 전의(典儀) 이림(李琳)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내리고, 협률랑(協律郞) 심달(沈闥), 장생령(掌牲令) 정효준(鄭孝俊), 찬자(贊者) 이준(李浚), 알자(謁者) 이인남(李仁男), 찬인(贊引) 이규남(李奎男), 감찰 이후석(李後奭) 등에게는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張)씩을 내리라.
또 진책관(進冊官) 영의정 윤방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압책관(押冊官) 지돈령 이현영(李顯英)에게는 숙마 1필을, 독책관(讀冊官) 이경의(李景義), 봉책관(奉冊官) 이지화(李之華)·이정규(李廷圭), 대치사관(代致詞官) 신준(申埈)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씩을 내리라. 거책안자(擧冊案者) 송치중(宋致中) 등 2인과 전의(典儀) 유풍형(柳豐亨)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리고, 거독안자(擧讀案者) 이위(李椲) 등 두 사람에게는 각각 상현궁 1장씩을 내리라.
옥책 도감 제조(玉冊都監提調)인 공조 판서 심기원(沈器遠)과 예조 판서 조익(趙翼), 옥책문 제술관 이조 판서 최명길, 서사관(書寫官)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도청(都廳) 김반(金槃)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내리고, 낭청 조계원(趙啓遠) 등 3인과 감조관(監造官) 심관(沈慣) 등 2인에게는 관직을 올려 주라. 공장(工匠)과 원역(員役)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등급에 따라 주게 하고, 궁위령(宮闈令) 최충적(崔忠績)에게는 반숙마 1필을 내리라. 또 옥책을 배진한 승지 이경직(李景稷)·정세구(鄭世矩)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검열 조수익(趙壽益), 주서 이상일(李尙逸)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리라.
장릉(章陵)을 개수할 때의 당상관인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 공조 참판 최내길(崔來吉), 예조 참의 이경인(李景仁)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내리고, 낭청 윤정지(尹挺之)·김상빈(金尙賓)과 감조관(監造官) 이휘조(李徽祚)·조유일(趙惟一) 등에게는 모두 관직을 올려주고, 공장과 원역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미포를 등급별로 나누어 주게 하라."
윤8월 12일 을미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음복연을 거행하였다. 어갱(御羹)을 거두고 여러 재상들과 승지들에게 술을 내려 여섯 잔을 돌렸다. 도승지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3년 동안 건강이 좋지 못하시다가 옥후(玉候)가 평안을 되찾고 이런 성대한 예를 갖게 되니 신민들의 경사가 더없이 큽니다. 다만 해가 이미 저물고 날씨가 쌀쌀하여 옥체를 상할까 두려우니, 자리를 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반(東班)의 재신(宰臣)들에게 미처 술을 주지 못하였으니, 한 차례 술을 돌린 뒤에 마치도록 하라."
하였다.
윤8월 13일 병신
상이 하교하였다.
"정고(呈告) 세 차례에 휴가를 준 것은 특별한 은택이니 신하된 도리로서 나와서 사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 의견이 같지 않으면 직간(直諫)하고 숨김이 없는 것이 곧 군자가 할 일이며, 권세에 아부하여 구차하게 잘 보이려 하고 이리저리 살피면서 회피하기를 꾀하는 일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다.
참의 유백증은 전에 대간으로 있을 때 자신이 그토록 심한 수모를 당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면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니, 그 지조와 절개가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장관이 되고 나서 논의를 정지하자는 발언을 한 것은 그가 맡은 책임인 만큼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닌데도 김광현(金光炫)의 무리는 자기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파직하는 율로 결단하였고, 간원이 피혐된 뒤에 유백증이 다른 자리로 옮긴 것은 실로 논할 것이 없는 일인데도 김광현의 무리는 자신들과 달리 하는 사람을 공박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아 체차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무슨 마음에서인가.
대저 시비를 가리는 본성은 사람마다 갖고 있는데, 어찌 세력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는가. 조고(趙高)의 맹렬한 세력 앞에서도 오히려 사실대로 사슴이라 지칭한 자가 있었는데, 김광현 무리의 권세가 아무리 중하다 하더라도 어찌 그들이 논죄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백증은 애당초 자기들과 다른 부류가 아니었는데 한 마디 말이 맞지 않은 것 때문에 이토록 미워하고 있다. 김수현(金壽賢)과 이성구(李聖求) 같은 용렬한 무리가 한 짓은 꾸짖을 것도 없다. 애당초 강석기(姜碩期) 등이 치밀한 계획 아래 논의를 꺼내어 국시를 혼란시켰는데, 죄를 받은 것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그 무리가 더욱 드세어져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는 모두 내가 엄하게 다스리지 않은 소치이다. 저 김광현의 무리가 감히 이견을 가진 자를 치자는 논의를 꺼내어 정직한 선비들의 기를 꺾었으니, 일이 매우 해괴할 뿐만 아니라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된다. 김광현·이상질(李尙質)·이시해(李時楷) 등을 삭탈 관작하여 북쪽 변방으로 찬출(竄黜)하라."
정원 【 정세구(鄭世矩)·한필원(韓必遠)이다.】 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하의 하교를 보니, 김광현·이상질·이시해 등을 모두 삭탈 관작하여 북쪽 변방으로 유배하라고 하였으므로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삼사의 논의는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고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는데, 전후의 엄한 견책이 이런 정도에 이르니, 성명의 시대에 전에 없던 이런 지나친 처사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우레같은 노여움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세 신하를 찬출하라고 한 명을 거두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앞뒤로 여러 신하들이 죄를 입을 때마다 정원이 아뢰어 간쟁하였는데, 김광현 등이 찬출되는 명을 받던 날 정세구·한필원 두 사람이 마침 입직하였다가 두려워 어쩔 줄을 모른 나머지 전날의 계사를 베끼면서 긴요한 말을 모두 빼버린 채 겨우 책임을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의 겁먹고 나약함을 비웃었다. 그런데 한필원이 나와서 대중들에게 큰소리 치기를 ‘어제 계사 속에 주상의 뜻을 저촉하는 말이 많았으니 나는 필시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다. 그저 외지에 보임되기만 하더라도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웃었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67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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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앞뒤로 여러 신하들이 죄를 입을 때마다 정원이 아뢰어 간쟁하였는데, 김광현 등이 찬출되는 명을 받던 날 정세구·한필원 두 사람이 마침 입직하였다가 두려워 어쩔 줄을 모른 나머지 전날의 계사를 베끼면서 긴요한 말을 모두 빼버린 채 겨우 책임을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의 겁먹고 나약함을 비웃었다. 그런데 한필원이 나와서 대중들에게 큰소리 치기를 ‘어제 계사 속에 주상의 뜻을 저촉하는 말이 많았으니 나는 필시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다. 그저 외지에 보임되기만 하더라도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웃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를 호위 대장에서 체차하고 그가 거느리던 군관은 모두 다른 장수 휘하로 소속시키라."
하였다. 김류가 부묘하는 논을 극력 배척하여 상의 뜻을 크게 어긴 결과, 두 번의 정사(呈辭)에 본직과 겸직을 모두 체차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김광현 등의 일로 인하여 이러한 명이 내린 것이다.
윤8월 14일 정유
의금부가 김광현을 회령(會寧)에, 이상질을 종성(鍾城)에, 이시해를 부령(富寧)에 유배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김광현의 배소(配所)를 삼수군(三水郡)으로 개정하도록 명하였다. 삼수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토굴을 집으로 삼았으며, 염장(鹽醬)을 얻지 못하고 나무뿌리를 캐서 먹고 살았다. 김광현에게는 80세의 늙은 아비가 있었는데, 직언한 것 때문에 죄를 받아 그런 지역에 유배되니, 사람들이 모두 슬프게 여겼다. 상이 금부에 하교하였다.
"김광현을 압송하여 가는 도사(都事)가 혹시라도 도중에 지체하여 기한 안에 닿지 못하거든 잡아다가 엄중히 다스리라."
행 판중추부사 이정구(李廷龜)가 상차하기를,
"신이 몇 년 동안 고질병으로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이번에 옥당의 세 신하를 북쪽 변방에 유배시킨 명이야말로 근자의 처사 중에서도 더욱 미안한 것입니다. 엄명이 이미 내려 지금 나란히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떠나고 난 뒤에는 말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병이 들어 일을 살필 수는 없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 온당하지 않음을 알고도 진언하지 않는다면 이는 성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구구한 충성과 사랑의 정성을 끝내 감히 천지 부모의 앞에서 벗어나게 못하겠습니다.
세 신하의 죄의 유무와 일의 시비는 우선 접어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경악(經幄)에서 논사(論思)하는 신하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하였는데 관대한 포용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가시덩굴이 뒤덮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인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조종조에서 학사(學士)를 예우한 뜻이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놀랍고 민망스러워 저도 모르게 베개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혹시 성상께서 노여움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세 신하를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신다면, 신은 죽는 날 눈을 감고 성은에 감복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그들의 일은 더없이 해괴하니, 지금 엄중히 다스리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끝없는 우환이 생길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신이 능소(陵所)에서 돌아와서야 비로소 옥당의 세 신하를 삭탈 관작하여 유배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은 듣자마자 몸이 오싹해지면서 성명의 지나친 처사가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러 국사가 장차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까 깊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태묘에 들이는 일은 매우 중대하여, 과거에서 사례를 찾아보려 해도 비슷한 예(禮)가 없습니다. 시종 불가하다고 한 자들이 모두 다 예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겠으나 실로 덕(德)으로 임금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과격한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심한 죄를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 혹 행하여도 된다고 하는 자들도 어찌 확실하게 보고 체득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전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죄를 받는 때를 당하여 혼자서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으니, 그에게 비록 볼 만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후하게 장려하는 것은 또한 부당합니다.
김광현 등은 논사(論思)하는 직책을 가졌고 그들이 논척(論斥)한 것은 서로 바로잡는 의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 본정을 헤아려 보면 결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지금 삭탈 관작하여 유배하라는 분부가 어찌 보고 듣는 이들의 이목을 놀라게 함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는 둘 다 옳은 논의는 없습니다. 삼사가 함께 발론(發論)한 이상 이는 한 나라 전체의 말에 해당됩니다. 그러고 보면 그 사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논의가 정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형세상 병립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예전에도 규핵(糾劾)했던 때가 있었으니, 이는 사실 대각의 규례(規例)이지 김광현 등이 오늘에 와서 창시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일찍이 성묘(成廟) 때의 《일기(日記)》를 보건대, 태묘에 들일 때에 논쟁한 신하가 많이 있었으나 말한 것 때문에 죄를 받은 자는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신은 성조의 포용하는 도량이 어느 임금보다 우뚝하여 태평한 정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상하의 뜻이 막혀 기상이 참담하며 삼사가 전후로 잇따라 죄를 받아 조금 배양된 인재들이 하나하나 없어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텅 비게 되었다는 탄식과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으므로 사림은 실망하고 조야는 서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뒷일을 잘 처리하시겠습니까.
이런 시점에 이르고 보니 대신과 대간들이 일찌감치 태묘에 들이는 논의를 정하지 못하여 국사가 결국 이토록 혼탁함에 이르게 된 것이 도리어 한스럽기만 합니다. 신이 자주 차자를 올리는 것이 미안한 일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곧바고 물러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나이가 거의 80이 되고 여생이 많지 않으니, 어찌 조정의 신하를 구제하여 편당(偏黨)을 할 계책을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진노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김광현 등을 삭탈 관작하여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김광현 등이 기탄없이 제멋대로 한 정상은 놀랍기 짝이 없다. 지금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김원립(金元立)을 지평으로, 이경의(李景義)를 교리로, 윤구(尹坵)를 수찬으로, 김덕함(金德諴)을 부제학으로, 이명한(李明漢)을 대사성으로, 남노성(南老星)을 검열로 삼았다.
윤8월 16일 기해
헌부가 아뢰기를,
"부묘(祔廟)에 대한 논의가 있고부터 한 마디 말이 맞으면 곧 세상에 드문 포상을 받고 한 마디 말이 거슬리게 되면 모두 쫓겨나는 벌을 받습니다. 영총(榮寵)을 버리고 위기를 당하는 것이 어찌 인정(人情)이 기꺼이 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마는, 차라리 말을 다하고서 죄를 받을지언정 말을 않고서 은혜를 저버리지는 차마 못하겠기에 김광현 등이 한 몸을 돌보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바로잡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갑자기 벽력처럼 진노하여 유배의 벌을 가함으로써 공의가 제대로 신장되지 못하게 함이 이런 정도까지 이르게 하신단 말입니까. 아, 근래에 언론을 맡은 신하들이 잇따라 벌을 받아 조정의 기상이 형편없이 위축되고 대소 관료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으며, 온 나라가 경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융성한 시대의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논의가 서로 다르거나 같은 사이에서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진언하는 태도가 공손하거나 거역하는 즈음에서 명철하게 살피신다면, 세 신하가 결코 다른 뜻이 없었음을 자연히 통촉할 수 있으며, 전하께서 전후로 지나쳤던 처사도 선뜻 회오(悔悟)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광현·이상질·이시해 등을 삭탈 관작하여 유배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조 참의 유백증이 전에 대사간이 되어서 동료들의 논의가 하나로 귀일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논의를 정지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당으로 옮겨가서는 물의가 시끄럽게 일어났는데도 곧바로 행공(行公)하였고, 심지어 경연에서는 비유해서는 안될 비유를 들어 멋대로 진술하여 천청(天聽)을 더럽혔습니다. 그가 조정을 경시하고 공론을 능멸한 죄를 징계하지 않으면 안되니, 파직을 명하소서.
김광현 등은 공론을 맡은 직책에 있으면서 예에 맞지 않는 처사를 보고 심혈을 기울여 차자를 올렸지 결코 다른 뜻은 없었는데, 전하께서 본정(本情)을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진노하여 멀고 험악한 땅으로 유배하시니, 이것이 어찌 평소 성명께 기대했던 바이겠습니까. 김광현 등이 한번 전하의 뜻을 거역하면 반드시 엄한 벌이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기탄없이 말을 다한 것은 실상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사의(私意)에 가리어 상하가 믿지 못하여 도리어 실정에 가깝지 않은 분부를 내리셨고 나아가 전에 없던 처사를 하셨으니, 신료들만 실망할 뿐 아니라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노여움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김광현·이상질·이시해 등을 유배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군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광현만을 중하게 여기고 있으며 나아가 유백증을 파직하도록 청하니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제학 김덕함(金德諴)이, 당하관이 권점(圈點)한 홍문록(弘文錄)에 끼지 못하였으므로 갑자기 수석(首席)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상소하니, 답하였다.
"번거롭게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며 일을 살피라."
옥당이 상차하기를,
"세 신하를 유배토록 명한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일이니, 보고 듣는 이들이 누구인들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 본뜻을 헤아려 보건대, 생각하는 바를 숨김없이 말하고 예(例)에 따라 서로 바로잡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어찌 큰 죄가 되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조정에서 일어났던 복왕(濮王)에 대한 논의도 시비가 둘로 갈라져 그때 말하는 자가 간사한 말로 한기(韓琦)·구양수(歐陽脩) 등을 공격하고 배척하였지만, 어디 저 세 신하처럼 유배를 당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김광현 등이 성명께 신임을 받고 대각에서 몸을 바쳐 재직하면서 일에 따라 바로잡는 것을 은혜에 보답하는 바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한 마디 말을 하자마자 곧장 변방으로 유배하고 말았습니다. 옛날 성왕들이 진언하는 자를 관대하게 용납한 도가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노여움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김광현·이상질·이시해 등을 삭탈 관작하여 유배하라고 한 명을 속히 중지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온(鄭蘊)을 도승지로, 이성구(李聖求)를 대사헌으로, 강학년(姜鶴年)을 지평으로, 이원진(李元鎭)을 부교리로, 이현영(李顯英)을 동지경연으로, 박로(朴𥶇)를 강원 감사로 삼았다.
윤8월 17일 경자
사간 신민일(申敏一)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성비(聖批)를 보건대 지극히 준엄하였습니다. 신은 참으로 황공하니, 백번 죽어야 마땅합니다. 신은 다만 다행스럽게 분수에 맞지 않는 언책을 맡아 시비를 분별하려 하였던 것뿐이고 털끝 만큼도 다른 뜻은 없었는데, 전하의 분부가 그러하니 어찌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석기(姜碩期) 등에게 무거운 죄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들의 방자한 행실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기필코 유배자가 더욱 많아지고 임금의 덕이 크게 상한 뒤에야 그대들 마음이 쾌하게 되고 분주히 배척하는 자가 조금이라도 그 분노를 풀겠는가."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의 부인을 오단(吳端)의 딸로 정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윤명은(尹鳴殷)을 압송해 간 나장(羅將)이 아직까지 오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잡아 가두었다는 보고가 없는가. 만약 오지 않았다면 잡아다가 국문하라."
윤8월 18일 신축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 수위성(水位星) 아래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서인(西人)이 권세를 잡은 뒤로 어려운 일을 잘 구제하는 인재는 없고, 오직 동류를 편당하고 이류(異類)를 배척하면서 군상에게 잘못을 돌리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기 때문에, 편당하는 풍습이 날로 이루어지고 백성들의 삶이 날로 궁핍해지고 있다.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는가. 유백증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이류를 논박한 차자는 사람들이 모두 좋게 여겨 구제하기를 마지 않았는데, 금일의 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분노하여 무거운 죄를 가하려 하니, 전후의 좋아함과 싫어함이 모두 국가를 위한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광현 등이 죄를 받은 뒤로 그 뜻을 이어받아 또 파직을 청하니, 그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정상은 김광현보다 더 심하여 일이 지극히 놀랍다. 전 사간 신민일을 삭탈 관작하여 먼 곳에 유배하라."
하였다. 금부가 처음에 영암(靈巖)에 유배하였는데, 곧바로 강계(江界)에 정배토록 명하였다.
윤8월 19일 임인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윤전(尹烇)을 장령으로, 이홍주(李弘胄)를 예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헌납으로, 박서(朴遾)를 지평으로, 심지한(沈之漢)·성여관(成汝寬)을 정언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유성증(兪省曾)을 교리로, 김수익(金壽翼)을 수찬으로, 이성구(李聖求)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유성이 천원성(天苑星) 위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윤8월 21일 갑진
부묘례가 이루어진 것을 인하여 종헌관(終獻官)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진폐 찬작관(進幣瓚爵官) 이민구(李敏求), 천조관(薦俎官) 정광성(鄭廣成), 수폐 찬작관(受幣瓚爵官) 이명한(李明漢), 예의사(禮儀使) 조익(趙翼), 당상 집례(堂上執禮) 박황(朴潢) 등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내리고, 당하 집례(堂下執禮) 강대수(姜大遂), 대축(大祝) 김광혁(金光爀)·성이성(成以性)·홍명일(洪命一)·정태화(鄭太和)·서상리(徐祥履)·윤구(尹坵)·이상질(李尙質)·구봉서(具鳳瑞)·한흥일(韓興一)·임광(任絖) 등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씩을 내리고, 전사관(典祀官) 유질(柳秩), 묘사(廟司) 남석(南錫) 등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리고, 집준(執樽) 이하 모든 집사와 감찰 등에게는 각각 한 등급씩 가자(加資)하되 자궁(資窮)인 자는 대가(代加)하도록 명하였다.
또 도승지 이경직(李景稷), 좌승지 서경우(徐景雨), 우승지 정세구(鄭世矩), 좌부승지 목서흠(睦敍欽), 우부승지 한필원(韓必遠), 겸보덕 김반(金槃), 필선 황윤후(黃胤後), 문학 이척연(李惕然), 사서 심지한(沈之漢), 설서 양만용(梁曼容) 등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씩을 내리고, 주서 이상일(李尙逸)·이상재(李尙載), 봉교 유황(兪榥), 검열 조수익(趙壽益)·이행우(李行遇) 등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리고, 궁위령(宮闈令) 한신(韓信)은 가자하고, 신련 시위(神輦侍衛) 고견(高堅)에게는 숙마 1필을 내리고, 궁위령 장의충(張義忠)·남궁식(南宮拭), 고명 차비(誥命差備) 백몽호(白夢虎) 등 2인과 명복 차비(命服差備) 유대춘(柳大春) 등 2인, 옥책 차비(玉冊差備) 최응남(崔應南) 등 8인, 보 차비(寶差備) 최언진(崔彦津) 등 6인, 신련 차비 안극충(安克忠) 등 6인, 양산 차비(陽傘差備) 김계(金繼), 봉선 차비(奉扇差備) 권득성(權得聖) 등 2인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리고, 고명안 차비(誥命案差備) 최대립(崔大立) 이하 모든 집사들에게는 한 등급씩 가자하되 자궁인 자는 대가(代加)하도록 명하였다. 또 제시 내관(祭侍內官) 나업(羅業)·한여기(韓汝琦)·오이공(吳以恭)·서후행(徐後行) 등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씩을 내리고, 김언겸(金彦謙)·정홍연(鄭弘衍)·현덕성(玄德成)·유여관(劉汝寬) 등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내리도록 명령하였다.
또 부묘 도감 도제조인 영의정 윤방에게는 안구마 1필을 내리고, 제조인 병조 판서 홍서봉(洪瑞鳳)과 예조 판서 조익(趙翼), 도청(都廳) 최연(崔葕) 등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내리고, 섭통례(攝通禮) 오행민(吳行敏)·나위소(羅緯素), 봉고명 집사(捧誥命執事) 이정규(李廷圭) 등 2인, 봉책 집사(捧冊執事) 심노(沈𢋡) 등 10인, 봉보 집사(捧寶執事) 변복일(邊復一) 등 6인에게는 각각 아마 1필을 내리고, 낭청 송희진(宋希進)·윤겸(尹㻩), 감조관(監造官) 김한(金瀚)·이명인(李命寅)·홍처준(洪處濬) 등은 모두 올려서 제수하고, 거안자(擧案者) 이수훈(李守訓) 이하에게는 각각 한 등급씩 가자하되 자궁인 자는 대가하고, 제색(諸色) 공장(工匠)과 원역(員役) 등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미포를 주도록 명하였다.
도승지 정온이 상소하기를,
"《예기》에 ‘아버지를 여의고 갑자기 존귀해졌을 때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짓지 않는다.’ 하였고, 선유(先儒) 여중(呂中)은 ‘아버지의 벼슬이 낮을 경우 자신의 벼슬을 기준으로 시호를 지으면 안되고 그 당사자에게 합당한 시호를 만들어야 하니, 이는 자신의 벼슬로써 그 아버지에게 가할 경우 높이려 했으나 도리어 낮추는 꼴이 되어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가 못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전하께서 시호를 추증하는 일도 이미 지당한 도리가 못되는데, 곧장 열성(列聖)의 지위에 올리려 하신다면 그것은 예경(禮經)의 본의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친부모에게 시호를 추증하여 ‘도고(悼考)’·‘도후(悼后)’라 하고 원읍(圓邑)을 두었으나 태묘에 들이는 일은 하지 않았고, 애제(哀帝)가 조서를 내려 친부모를 ‘공황(恭皇)’ 이라 하고 ‘정도(定陶)’라는 호는 제거하게 하면서 경사에 사당을 세웠으나 또한 태묘에 들이자는 의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광무제(光武帝)가 사친(四親)의 묘(廟)를 장릉(章陵)에 옮겼으나 시호를 더해 준 적이 없었는데, 언제 또 태묘에 들이자는 의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에 대해 선유 호씨(胡氏)가 논하기를 ‘왕망(王莾)이 찬탈하였을 때 한나라 왕통이 이미 끊어졌는데, 광무가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우뚝 일어났다. 따라서 고조를 조(祖)로 삼고 사친(四親)을 황제로 만든다 하더라도 애제 때에 번통(藩統)을 높인 것과는 같지 않아 의리에 크게 안될 것이 없었는데, 한번 장순(張純) 등의 건의를 듣고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따랐다. 그리고 장릉의 네 사당에 특별한 예우를 베풀지 않았는데도 은전을 적게 하였다는 질책이 당시에 들리지 않았고 예를 어겼다는 비난이 후세에 일어나지 않았다.’ 하였으니, 선제·애제의 지나친 처사가 이를 통하여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마땅히 본받아야 될 광무를 따르지 않고 선제·애제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려 하시니, 신이 천지와 같이 위대한 전하께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구양수가 황제 사친(私親)의 칭호에 대한 논의를 맨먼저 꺼내자, 여회(呂誨) 등이 사론(邪論)으로 지목하고 법부(法府)에 내려 다스리도록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왕통의 차례를 중시하고 조종을 존중한 옛사람들의 의리가 얼마나 준엄합니까. 신이 삼가 근일의 조보(朝報)를 보건대, 전하께서 늘 예위(禰位)가 비어 있는 것을 염려하셨는데,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제와 광무제는 모두 손자로서 조(祖)를 계승한 자들인데, 《강목(綱目)》에서도 예묘로 삼지 않았다고 폄하하는 말을 가하지 않았고, 선유들도 특별한 예우를 하지 않은 것을 아름다운 일로 여겼습니다. 이 어찌 제왕가(帝王家)의 일이란 종통을 중히 여겨 사은(私恩) 때문에 정위(正位)를 범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일이 과연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삼사는 이목을 맡은 관직인데 거의 다 쫓아내었고, 정원은 후설(喉舌)을 맡은 자리인데 오래 전에 가두어 버렸으며, 대신은 고굉(股肱)을 맡은 직책인데 내팽개치듯이 버렸습니다. 바르게 논하는 자들을 근거 없는 논의를 한다 하고, 아첨하여 영합하는 자들을 정직하다 하여, 시비가 전도되고 사정(邪正)이 구분되지 않고 있으니, 이른바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행실이 자취를 감추고 아첨과 간사함이 풍미하고 있다.’는 상황과 불행히도 가깝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뜻 깨닫고 서슴없이 길을 바꾸어 예경(禮經)의 지극한 가르침을 따르고 역대의 득실을 귀감으로 삼아 속히 예에 맞지 않는 예를 중지시키고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안에 두고 답하지 않았다.
윤8월 22일 을사
대사간 박황(朴潢)이 아뢰기를,
"지금의 전례(典禮)는 추숭하기 전의 예와 비교하면 크게 서로 다릅니다. 호(號)를 올리는 것을 주청하던 때에 따지지 못하고 오늘에 와서 따지려 하니, 이는 근본을 막지 못하고 말단을 따지는 격입니다. 지금 논의하는 자들이 ‘태묘에 들이지 않으면 대통이 계승되지 않으니, 종호(宗號)를 올렸다 하더라도 전하의 사친(私親)의 별묘이다.’고 합니다만, 신의 견해로는, 왕통의 자리에 올리고 존호(尊號)를 올려 선조(宣祖)의 뒤를 잇게 하면 고조·증조·조·예(禰)의 위차가 정해지는데도 대통을 잇지 못하였다 하고 사묘(私廟)라고 한다면 그것이 맞는 말인지 실로 모르겠습니다.
근자에 상소나 차자에서 인용하여 비유한 말은 모두 추숭하기 전의 일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금에 와서 말한다면 애당초 말한 것에 비하여 어찌 차이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묘호(廟號)는 정해졌다 하더라도 원종 대왕께서는 직접 보위(寶位)에 오르지 않으셨고 추숭 또한 삼대(三代)의 예가 아니며 게다가 태묘에 들이는 한 예절을 더하려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 하여 이런 논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황제의 명이 내려 봉전(封典)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원종 대왕께서 일단 선조(宣祖)로부터 명을 받지 못한 이상 추숭하여 봉하기를 청한 것은 나 자신의 입장에서 한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태묘에 함께 모시기까지 하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여기시어 대중의 뜻을 따라 별묘(別廟)를 세우고 의례 절목을 한결같이 태묘와 동등하게 하신다면, 이는 태묘 속의 하나의 묘(廟)와 다름없는 것으로서 이른바 두 개의 사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전하의 겸손의 덕이 더욱 빛나고 추숭하는 효성에도 어찌 털끝 만큼이라도 하자가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여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지극한 정에 이끌리신 나머지 조정의 논의를 거부한 채 오늘 말한 자를 죄주고 내일 말할 자를 죄준다면, 장차 조정이 텅 비는 지경까지 이르러 기상이 참담하고 인정이 울분을 터뜨리며 임금의 과실이 날로 드러나고 국가의 운명이 점차 손상될 테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오늘의 일이 더없이 중대한데, 한번 시행한 뒤에는 다시 고칠 수 없으니, 반드시 만분 신중을 기하여야 후회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시비를 말하는 자는 대간이지만, 시비를 정하는 것은 대신이며, 육경의 신하로 또한 함께 참여하여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왜 대신·삼사·육경을 탑전으로 불러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강구하여 명쾌히 대의(大義)를 정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또 삼가 듣건대 국조의 옛 규례(規例)에 ‘합사(合司)의 논계는 반드시 공의(公議)를 인하여 발하며 합사의 논계가 발하면 대신은 빈청에서 진계(陳啓)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빈청의 진계가 10일 동안 나오지 않으면 합사한 논의는 정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공의가 있는 바에 대해서는 대신과 대간이 일체가 되어 가부를 서로 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합사의 논계가 발한 지 몇 달이 되어 가는데도 빈청의 진계가 대신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들에게 필시 일정한 견해가 있을 것인데, 차분히 강론할 때 어찌 그 시비를 진술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이 임금의 덕이 날로 손상되는 것을 목도하였으니, 바로잡는 데에 마음을 쏟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죄를 짓고 파직되어 있던 중에 특별히 사신으로 나가는 일 때문에 혼자서 다시 임명되었는데, 같이 죄를 받은 사람은 지금 산지(散地)에 있으니, 형세상 뻔뻔스러운 얼굴로 대석(臺席)에 있기가 곤란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박황이 최명길과 유백증 두 사람의 뜻을 조술(祖述)하여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먼저 물의의 가부를 시험하려고 인피하였다. 그런데 그의 말은 이성구(李聖求)가 합사했을 때의 글과 최명길이 탑전에서 아뢴 말이 서로 표리의 관계를 이루어 제멋대로 비위를 맞추고 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6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박황이 최명길과 유백증 두 사람의 뜻을 조술(祖述)하여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먼저 물의의 가부를 시험하려고 인피하였다. 그런데 그의 말은 이성구(李聖求)가 합사했을 때의 글과 최명길이 탑전에서 아뢴 말이 서로 표리의 관계를 이루어 제멋대로 비위를 맞추고 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헌납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신은 선산이 과천(果川)에 있는데 지난번에 급히 가서 살필 일이 있어 휴가도 청하지 않고 사사로이 갔다가 왔습니다. 군직(軍職)이 한산한 관직이라고는 하나 마음대로 외방으로 나가 국법을 함부로 범하였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살펴보건대 정태화는 박황 등의 정계(停啓)하자는 논의에서 빠져 나오려고 갑자기 이 일로 인피한 것이다. 그가 말한 바 선산은 서울에서 겨우 10리 밖에 있으니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조금도 안될 것이 없는 만큼 회피하기를 꾀한 흔적을 모면하기 어렵다.
박지계(朴知誡)를 집의로 삼았다. 박지계는 계해년 초에 맨먼저 추숭하자는 논의를 제창한 자이다.
윤8월 23일 병오
대사헌 이성구, 대사간 박황이 합사의 계(啓)를 정지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합사의 계는 곧 온 나라의 공의(公議)이다. 양사의 관원 중에 어떤 이는 외방에 있고 어떤 이는 서울에 있으면서 숙배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성구·박황·정태화 등 3인이 대중들의 공의를 배격하고 중대한 논의를 정지시켰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박황은 이조 참의가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69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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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합사의 계는 곧 온 나라의 공의(公議)이다. 양사의 관원 중에 어떤 이는 외방에 있고 어떤 이는 서울에 있으면서 숙배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성구·박황·정태화 등 3인이 대중들의 공의를 배격하고 중대한 논의를 정지시켰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박황은 이조 참의가 되었다.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지난 계해년 예를 의논하던 초기에 모든 신하들이 직손(直孫)이 왕통을 계승한 사례에서 찾아보지 않고 종손이 들어가 계승한 사례로 잘못 비유하였습니다. 이는 곧 후계자가 없는 부모를 지자(支子)와 연결시킨 것이고 보면 사친(四親)에게서 예위(禰位)가 빠지고 삼강(三綱)에서 한 가지가 흠이 생기는 것이니, 참으로 예를 잃은 것 중에 큰 것입니다. 그때 신이 청했던 것은 따로 예모를 세워 제후의 예에 맞추어 제사를 올리자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임신년에 재차 논의할 때 신이 예관으로 있었는데, 그때는 상께서 이미 추숭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어서 주청(奏請)하라는 분부가 있었던 때였습니다. 신이 앞서의 내용을 고수할 줄 모른 것은 아니나 해관의 신분으로서 봉행(奉行)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추숭(追崇)하는 일이 삼대(三代)의 예는 아니라 하더라도 조위(曹魏) 이후로 당(唐)·송(宋)에 이르기까지 역대로 답습하여 이미 관례로 굳어졌는데, 주자처럼 훌륭한 이도 희조(僖祖)를 추숭한 것을 그르게 여기지 않았고 방효유(方孝孺) 같은 학자도 의문(懿文)을 태묘에 들이는 일을 막지 않았습니다. 이 어찌 예악을 만드는 것은 시대에 따르는 것으로, 고례(古禮)라 해서 꼭 따라야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지손(支孫)으로서 들어가 계승한 임금은 이미 계승해야 될 대상이 있는 만큼 또 사친(私親)을 높이면 두 고위(考位)가 생기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만, 이는 오늘의 상황에 적용될 것이 아닙니다. 대개 걸핏하면 삼대를 끌어들이는 것이 신하가 임금에게 고할 때의 상도(常道)이긴 합니다만, 관례에 따라 존경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전하께서 어버이를 높이는 지극한 뜻이 되니, 일에 혐의가 없고 이치상으로도 따라야 옳습니다. 더구나 번왕(藩王)으로 추봉(追封)된 경우이겠습니까. 황제가 이미 윤허하여 봉전(封典)이 내렸고 신하된 자의 분수와 도리도 유명(幽明)에 차이가 없고 보면, 금일의 부묘하라는 명에 대하여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다만 추봉(追封)된 임금은 왕위에 오른 사실이 없고 대를 이은 임금은 창업한 임금의 예와는 달라, 일이 의기(義起)에 해당되어 원칙적인 견해만 고수하며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 못할 바가 있으니, 조정의 의논이 어렵게 여기는 것도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종묘의 제도는 역대의 많은 학자들의 의논이 제각기 다릅니다. 형제는 소목(昭穆)을 함께 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세(世)를 이어 조(祖)와 예(禰)가 되어야 한다는 설에 대해서는 정자나 주자 같은 큰 학자도 일치된 논의를 갖지 못하였으니, 학식과 견문이 부족한 신으로서는 실로 경솔히 그 시비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조에서 이루어진 전례(典禮)로 말하건대 인종과 명종을 합하여 1세로 한 이상 세를 이어 조와 예가 된다는 말은 행할 수 없고, 오늘날의 사체로 말한다면 이미 명을 받아 왕이 된 이상 세워야 된다느니 세워서는 안된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가 주자에게 묻기를 ‘노(魯)나라의 교체(郊禘)는 성왕(成王)이 준 것과 백금(伯禽)이 받은 것이 다 잘못되었는데, 후에 자손으로서는 어떻게 고쳤어야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시왕(時王)의 명을 어떻게 감히 고치겠는가.’ 하였고, ‘직접 고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천왕(天王)에게 명을 청하여 고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주자가 그렇다고 수긍하였습니다. 대저 제후가 교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참례(僣禮)로서 공자도 비난한 것입니다. 따라서 상정(常情)으로 말한다면 누구인들 마땅히 고쳐야 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자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은 따로 중하게 여긴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考)를 높이고 조를 계승함은 차례가 매우 순하니, 지금의 추숭은 결단코 노나라의 체제사의 참람한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또 황상이 국왕으로 삼아 예묘를 허락하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시왕의 명이라는 것이니, 만약 이를 옳지 않다고 여긴다면 형세상 반드시 명을 청하여 고쳐야 하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 이 예를 따지는 자들이 대다수 조묘(祧廟)하는 것을 의아해 하는데, 이는 사실 옳습니다. 그러나 왕자(王者)가 선조를 받드는 도리는 그 정(情)이야 무궁하다 하더라도 예는 절도가 있는 법이니, 제후는 오묘(五廟)로서 태조와 사친(四親)이 바로 그것입니다. 친진(親盡)이 되면 복(服)이 끊어지고 복이 끊어지면 조묘를 하는 것이야말로 고금을 통하여 행해진 불변의 전례입니다. 따라서 지금 논해야 할 것은 태묘에 들이는 일의 당부(當否)에 있고 조묘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 성종 대왕은 태평정치를 이룩한 성주(聖主)로서 백성들에게 공덕을 끼쳤으니, 조묘하는 것은 본래 당치 않습니다. 그 때문에 신이 일찍이 예관으로 있으면서 감히 세실(世室)을 두자는 청을 꺼내었는데, 대신들의 논의가 일치되지 못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으므로 속으로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만약 열성(列聖)들도 미처 하지 못한 일이라 하여 곤란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선제(漢宣帝)의 세실은 원제(元帝)·성제(成帝)·애제(哀帝)·평제(平帝)를 지나 광무제(光武帝)에 이르러 비로소 정하여졌고, 송 인종(宋仁宗)의 세실은 영종(英宗)·신종(神宗)을 지나 철종(哲宗)에 이르러서 비로소 정하여졌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찍이 연대의 원근으로 구애받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이 일을 의도가 있다고 혐의한다면 근사하기는 하나 또한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가령 성묘(成廟)에게 일컬을 만한 공덕이 없다면 지금 이미 친진이 되어 마땅히 조천(祧遷)을 해야 된다는 주장에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다만 성묘가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승하한 뒤까지 마음에 잊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모두 차마 조묘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차마 못하는 마음을 인하여 불천위(不遷位)로 정한다고 해서 안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은 성묘에게 공덕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물어야 되고 다른 것은 논할 바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논의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세실을 만들려면 높임을 더하는 예가 있어야 된다.’ 하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古禮)로 말하건대, 세실에는 묘호(廟號)가 있는데 성묘는 이미 종(宗)을 칭하고 있고, 본조의 일로 말하건대 태종·세종도 모두 세실로서 단지 여덟 글자의 호가 가해졌는데 성묘는 이미 여섯 글자의 호를 갖고 있으니, 무슨 예를 더하겠습니까. 그저 예관이 결정을 내린 뒤 축문(祝文)으로 종묘에 고하고 사책(四冊)에 써서 밝게 후세에 보여주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신이 사대부들의 여담을 들어 보건대 그들이 집안에서 사사로이 말할 때에 이 예는 굳이 논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좌상도 처음 차자를 올릴 때에는 오로지 조묘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는데, 남들에게 한 말을 들어보건대 ‘만약 성묘의 세실을 만들면 다시 논쟁할 일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조익(趙翼)의 회계(回啓)에도 어렵게 여긴 뜻이 조금 있었으나 이윽고 후회하고 사사로이 입묘의(入廟議)를 지어 사체상 그만둘 수 없는 점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장현광(張顯光)의 상소를 보아도 태묘에 들이자는 논의와 차이가 매우 적었고, 기타 명류(名流) 중에도 유백증과 서로 비슷한 견해를 가진 자가 비일비재한데, 아랫사람들의 소견은 오히려 서로 다름을 면치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버이를 높이려는 전하의 마음이 두터운 쪽을 좇아 처치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정리(情理)에서 나온 것인 만큼 예에 합당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또한 인(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의 당부(當否)와 일의 시비는 가볍게 논의하기 어려우나 황제의 명은 어길 수 없으며 분의(分義)는 논쟁할 수 없는 것이니, 분명해서 쉽게 알 수 있는 데이겠습니까.
일을 논하는 책임은 오로지 삼사에 있습니다. 그러나 삼사의 관원은 대다수 후배 명류(名流)로서 나이는 적고 기(氣)는 예리하여 오로지 명절(名節)을 숭상하나 나라의 큰 예를 잘 알지 못하니, 형세상 참으로 그들의 의견이 모두 같기를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원로 대신이 그 사이에서 잘 조화시키고 진정시키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은 대신·예관·삼사 장관 등을 명초하여 빈청에 모이게 한 뒤 신의 이 차자를 내려 한 곳에서 의논하여 정하게 하거나, 혹은 편전으로 불러 들여 직접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하나로 귀결되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안에 머물러 두고 답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공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나라를 전복시키게 됨을 미워하였다. 최명길은 추존의 논의를 맨 먼저 제창하고서 다시 태묘에 들이는 예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이성구·박황 등을 유도하여 논의를 정지시키게 하였으며, 또 이 차자를 올려 임금의 귀를 현혹시켰으니, 무엇이라도 기탄없이 하는 소인이라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69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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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공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나라를 전복시키게 됨을 미워하였다. 최명길은 추존의 논의를 맨 먼저 제창하고서 다시 태묘에 들이는 예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이성구·박황 등을 유도하여 논의를 정지시키게 하였으며, 또 이 차자를 올려 임금의 귀를 현혹시켰으니, 무엇이라도 기탄없이 하는 소인이라 이를 만하다.
윤8월 24일 정미
간원이 신민일(申敏一)을 멀리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윤8월 25일 무신
홍주일(洪柱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윤8월 26일 기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윤8월 27일 경술
이성구(李聖求)를 도승지로, 박지계(朴知誡)를 동부승지로,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이경여(李敬輿)를 부제학으로, 최연(崔葕)을 부응교로, 강대수(姜大遂)를 부교리로, 조석윤(趙錫胤)을 수찬으로, 이성신(李省身)을 집의로 삼았다.
경상좌도 양전사 이현(李𥙆)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해조의 사목(事目) 가운데 시행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기필코 평시의 결부(結負)대로 채우려 하는 것이고, 하나는 고을끼리 바꾸어서 측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평시에는 호구가 해마다 증가하여 땅은 좁은데 사람이 많아 거름을 주는 것이 백배나 많아지니 척박한 땅도 모두 기름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땅의 등급이 아무리 높더라도 한 결(結)의 역(役)은 세(稅)·공(貢)·부(賦) 외에는 징수하는 것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백성은 안정되고 나라는 넉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토호(土豪)는 물론 소민(小民)들까지도 모두 너른 토지를 두게 되었습니다만 수확은 평시에 비하여 반감되었습니다. 더구나 임진년 이후로 국가에 일이 많아 세·공·부 이외에 삼수량(三手粮)·별수미(別收米)·오결포(五結布)·당량미(唐粮米) 및 잡색(雜色)의 역(役)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평시에는 없었던 것들입니다. 요역의 번고(煩苦)함이 이와 같은데, 백성들이 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결부가 헐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평시의 결부를 모두 채우려면 등급을 모두 평시 정한 바대로 따라야 그 수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서우도 10여 고을과 영남좌도 8∼9 고을은 아직 평시의 전안(田案)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떠나가고 토지가 대다수 황폐해졌습니다. 이것이 결부를 꼭 평시와 같이 해서는 안되는 분명한 점입니다.
지금 우선 현재의 토질의 비옥하거나 척박한 정도에 따라 곡물 산출량의 다소를 묻고 등급을 정하면서 구례(舊例)에 구애받지 말고 현실에 맞게 등급을 계랑한다면 백성들도 원망하지 않고 얻게 되는 결부 또한 배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팔도를 모두 측량한 뒤에 결부에서 나올 세미(稅米)을 헤아려 오늘날 1년에 응당 납부할 석수(石數)와 비교해보면 혹은 한 배 혹은 두 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난리 이후의 잡역을 모두 감면시키고 오직 정세(正稅) 이외에 공물가(貢物價)만 평시와 같이 징수하면, 토지제도가 모두 정립되어 백성들이 모두 즐겁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행하고서 또 50년이나 60년쯤 지나 평시와 같이 사람이 많아져서 농토는 부족하며 땅은 기름지고 곡식이 많이 생산된 뒤에야 결부를 비로소 완전히 차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을을 바꾸어 타량하는 것은 곧 조종조에서 도(道)를 바꾼 일이나 마찬가지 일입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선조(先朝)에서 도를 바꿔 타량하였을 때 타도의 사람은 토질을 분변하지 못해 억측으로 등급을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뇌물을 구하면서 임의대로 올리고 내렸다 합니다. 예컨대 이산(尼山)의 들은 늘 침수를 당하는데도 1등으로 만들었고 안동(安東)의 토지는 모두 척박한데도 1등으로 만들었으므로 당시 이산의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고 안동의 백성들이 여태까지 그 우환을 입고 있다 하니, 고을을 바꾸어서 하는 무익함은 이미 오래 전에 입증되었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세도(世道)가 더욱 땅에 떨어지고 인심이 더욱 간사하여 고을을 격하고 있는 백성들이 서로 알지 못하면서도 뇌물이 행해짐은 모르는 사람이나 익히 아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농간을 막는 계획이 정말 허술하다 할 것입니다. 고을을 바꿔 양전하는 것의 공평하지 못함이 도리어 바꾸지 않는 것보다 더 심하고 폐단 또한 적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꼭 백성을 동요시켜가면서 백해무익한 일을 굳이 해야 된단 말입니다.
해조가 측량하는 일을 염려하여, 시일을 끌면 인심이 해이되어 쉽게 이루기 어렵고, 기한을 급박하게 잡아 일을 마치기를 독촉하여 도를 좌우로 나누어 심사하는 것을 편하게 하더라도 고을이 매우 많아 형세상 정해진 기안 안에 모두 조사할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자로 재는 데에 증감이 생기고 등급에 착오가 생기더라도 분명하게 살펴 그 농간과 속임을 규찰할 수 없을 것이니, 양전하는 도리에는 참으로 이미 부합되지 않게 됩니다.
대저 양전하는 일의 어려움은 자로 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등급을 매기는 일이 가장 어려운데, 토질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살피고 등급을 평등하게 하는 것은 실로 훌륭한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깁니다. 수령을 신중하게 가려 양전을 전담시키고, 각 고을 토지의 대소(大小)를 계산하여 조사 기간을 산출하되 그 기한을 넉넉하게 잡습니다. 그리고는 그 수령으로 하여금 본 고을의 감관(監官)과 그 일에 밝은 색리(色吏)를 직접 인솔하고 이랑마다 다니면서 측량하여 고을 경계까지 다하여 한 곳도 직접 측량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며, 토질에 있어서도 각 촌리(村里)의 유식한 품관(品官)이나 점잖은 고로(故老)들을 가려 산출되는 곡식의 다소를 물어 등급의 고하를 매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토호로서 무단(武斷)하는 자나 간사한 백성으로서 뇌물을 바치는 자나 교활한 관리로서 조종하는 자가 그 음모를 행할 수 없게 될 테니, 감관과 색리의 손에 맡겨두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 뒤에 양전사(量田使)가 또 뒤이어 혹은 한 면(面)을 모두 측량하거나 혹은 한 고을을 다 측량하고 혹은 각 고을을 추첨해 두루 조사하여 측량에 착오가 있거나 등급이 실제에 합당하지 않을 경우 하나 하나 바로잡고 하나 하나 벌을 가하면, 토지는 균등하게 되고 백성은 편안케 되어 반드시 일을 그르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케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이미 정해진 일을 중지할 수 없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윤8월 28일 신해
연릉 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이 죽었다. 이호민은 호가 오봉(五峯)이다. 그는 영특하고 총명하였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과거에 급제할 때는 선묘(宣廟)가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이윽고 뽑혀서 독서당에 들어갔다. 임진년에는 임금을 호종하여 용만(龍灣)에 갔으며, 당시 자문(咨文)·주문(奏文)·게첩(揭帖)·격문(檄文)이 대다수 그의 손으로 지어졌다. 이 일로 선묘가 더욱 가상하게 여겼다. 환도하여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고, 청요직을 두루 거쳐 마침내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혼조(昏朝)에 이르러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거의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이에 도성 남쪽에 은거하면서 시와 술로 생활을 즐겼다. 이때 죽으니 나이 82세였다.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출사하였다. 대궐에 나아가 계를 올려 사면을 청하고, 또 한번 어전에서 뵙고 직접 말씀을 듣게 해주기를 원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출사하니 내가 매우 기쁘다. 경이 비록 몸이 아프다 하더라도 대궐에 누워 도를 논하고 부디 다시는 사양하지 말라. 머지않아 인견할 테니 영상과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성묘조(成廟朝)에 추숭할 때는 논쟁한 일이 없었으나, 태묘에 들일 때에 이르러 부제학 임사홍(任士洪), 대사헌 윤계훈(尹繼勳), 대사간 정활(鄭佸)이 차자를 올려 중지시키기를 요청하니, 성묘가 하교하기를 ‘일이 이미 정해져서 그만둘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삼사의 신하 중에 한 사람도 체직된 이가 없었고, 곧바로 태묘에 들이는 예에 동참하였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보건대 국가가 언제 언관을 죄준 적이 있었으며 말한 자도 언제 혐의받을 형적이 있었습니까. 첫머리의 말은 중대한 예를 신중하게 하자는 뜻에 불과합니다. 어찌 상하가 서로 버티어 불화를 초래할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그 당시 국가의 원기(元氣)가 튼튼하고 군신 사이가 화기 애애하며, 서로 협의하며 가부를 결정하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바른 것을 함께 지향함으로써 먼 후세에 이르러서도 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 우상 김류는 평소 기절(氣節)이 있어 말을 하면 꼭 격렬하였으나 모두 임금의 과실을 보충하는 정성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준체(准遞)할 즈음에 통상적인 규정을 어겼기에 신은 나름대로 미안하게 여깁니다. 삼사의 신하는 나이가 젊고 기개가 날카로와 오직 곧고 준엄하기만을 힘씁니다. 언론이 비록 과도하기는 하나 그 또한 성인이 용납할 바입니다. 지금은 국가의 위기가 진정되지 못하고 변경의 일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여 도독(都督)이 의주에 나와서 주둔하고 있고 태감(太監)이 또 장차 바다를 건너오게 됩니다. 앞으로 그들을 응접할 일이 말할 수 없이 많은데 재상 자리는 차 있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은 흩어져 국사를 서로 나몰라라 하는 지경에 방치하였으며, 마침내는 유배하는 벌이 잇달고 임금의 덕이 크게 손상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노신의 죄입니다.
지금은 합사의 요청이 정지되었고 중대한 예가 완전하게 갖추어지게 되었으니, 관용의 태도를 보여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을 모두 송환하고, 화평을 이룩하는 일에 힘써 인심을 편안케 하소서.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잘 수습하지 못한 신의 죄를 다스려 특별히 파직하는 명을 내리고 빨리 덕이 깊은 인물을 뽑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의 뜻을 잘 알았다. 지금 태묘에 들이는 일은 황제의 명이 이미 내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우리 나라에 모두 전례가 있으니 아랫사람이 감히 막을 일이 아니다. 강석기 등이 분수와 도리를 돌아보지 않고 다투어 배척하여 겉으로는 헛된 명예를 노리고 속으로는 사욕을 채운 죄는 결코 쉽사리 용서할 수 없다. 경은 잘못한 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윤8월 29일 임자
평안 병사 유림(柳琳)이 치계하기를,
"당선(唐船) 30여 척이 가도(椵島)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였기에 물으니 ‘장(張)·마(馬) 태감(太監)과 두 장수가 배를 거느리고 왔으며 한 태감은 서울로 갈 것이고 한 태감은 전마(戰馬)를 사려고 왔다. 또 두 태감이 뒤이어 당도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태감 한 사람이 서울로 온다는 말은 확실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해조로 하여금 접반사와 문안사를 차출하여 기다리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이조 참의 유백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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