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인
목성이 여귀성(輿鬼星)을 경유하여 적시성(積尸星)을 범하였다.
상이 주강에 처음으로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여러 신하들을 풀어주기를 청하니, 차자의 뜻을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박황을 이조 참의로, 유백증을 대사간으로, 김신국을 병조 판서로, 윤구를 헌납으로, 이원진(李元鎭)을 교리로, 장유(張維)를 대사헌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김신국은 전에 폐모(廢母)하자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유백증과 박황은 태묘에 들이자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여 번갈아 간장(諫長)과 전관(銓官)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매도하였다. 그러므로 박황이 부끄러운 나머지 얼마 안되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9월 3일 병진
상이 금부에 명하여 윤명은(尹鳴殷)을 압송한 나장(羅將)을 형신(刑訊)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윤명은을 배소(配所)에 도착시킨 것이 이틀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윤명은이 하루에 백여 리를 가서 명천(明川)에 이르러서 비를 만나 이틀을 지내고 갔는데, 드디어 그 나장을 나추(拿推)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소식을 들은 자들이 모두 한심하게 여겼다.
종실의 소년들을 뽑아 종부시 낭청에게 수학하게 하였다. 국초(國初)부터 이러한 규례가 있었는데, 근년 이래로 폐지하고 행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옛 제도를 부활시킨 것이다.
9월 5일 무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비국에 나아가니, 상신(相臣)이 예조 판서 이홍주(李弘胄)와 의논하기를 ‘부묘하는 일은 초기(草記)가 한 번 들어간 뒤로 주상의 하교를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번 계사를 올렸는데 역시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답답하고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어버이를 높이는 예인데 조정의 신하들이 떼거리로 들고 일어나 다투어 논쟁하니 심히 부끄러웠다. 그 때문에 계하하지 않았다. 말세에는 만사가 모두 삼대(三代)에 미치지 못하는 법인데, 어버이를 높이는 예만은 유독 삼대와 같도록 요구하니, 한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삼대의 시대에도 존숭하는 전례(典例)가 있었으니, 주(周)나라는 3대(代)를 왕으로 추존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고조(漢高祖)가 태상왕을 추존한 일, 선제(宣帝)가 도고(悼考)를 추존한 일, 조비(曹丕)가 무제(武帝)를 추존한 일 등이 있었지만 그르다고 한 사가(史家)는 없었습니다. 주자(朱子) 당시에 제자들이 희묘(禧廟)를 추존하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기자, 주자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진정 부조(父祖)를 높이는 마음이 없을 수 있는가? 비록 주공이 다시 세상에 나와 예를 제정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 논의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도 희묘에 대하여 그렇게 여기지 않았는데, 더구나 그 아래에 속하는 사람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덕수(李德洙)가 강석기(姜碩期) 등을 문외 출송하라는 승전(承傳)을 받들지 않고 정원이 텅 비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갔다. 고금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밖에서도 이 일을 매우 그르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시독관 강대수(姜大遂)가 아뢰기를,
"일이 비록 과격한 점이 있으나 어찌 이것이 명을 거역한 뜻이겠습니까. 옛 사람 중에는 어지(御旨)를 봉환(封還)한 자도 있고 조서를 찢어버린 자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죄를 받은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9월 6일 기미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 태감(太監) 이문성(李文成)·하문록(何文祿), 총병(摠兵) 채유(蔡裕)가 군사 2만 명을 대동하고 왔고, 부총(副摠) 황비(黃蜚)가 군사 1만 명과 배 45척을 거느리고 와서 가도에 정박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李)·하(何) 두 태감이 앞서 온 마(馬)·장(張) 두 태감과 신분의 고하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보내줄 예단(禮單)을 똑같이 해야 됩니다. 다만 네 태감은 전날 하(何)·후(侯)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게다가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이 탕진되어 앞으로 허다한 장관(將官)들의 행차에 계속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습니다. 네 태감 이하의 예단을 다시 참작하여 써서 보내고, 우선 한명욱(韓明勗)으로 하여금 중도에서 머무르며 기다리다가 예단을 전달받게 한 뒤에 전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접대를 너무 소략하게 해서는 안될 듯하니, 다시 참작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9월 8일 신유
목성이 여귀성(輿鬼星)의 동남쪽 별을 범하였다.
9월 9일 임술
화성·토성·금성 세 별이 미수(尾宿)에 함께 머물렀다.
상이 어수당(魚水堂)에 술상을 차려 놓고 세자만 시종하도록 명하였다. 정묘년 변란으로 어수당이 거의 모두 퇴락하였는데, 상의 어소(御所)를 옮긴 뒤로 곧바로 개수토록 하였고, 또 열무정(閱武亭) 가에 못을 파고 화선(畫船)을 만들어 띄웠는데, 화선은 십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것이었다. 때로 뱃놀이를 하였는데 여러 궁가(宮家)의 여악(女樂)을 불러 노래하고 춤을 추게 하였으며 더러는 밤이 되어서 마치기도 하였다. 환관들에게 밖으로 소문이 나가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고성 현령(固城縣令) 김후기(金后虁)가 농사의 풍흉을 복심(覆審)하는 일로 토호들과 불화가 생겼는데, 토호 몇 명이 가동(家僮)을 많이 거느리고 가 멋대로 죄수들을 풀어주는가 하면 활을 끼고 연일 관아를 포위하였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변고입니다. 엄하게 다스려 그 여당들을 경계시키지 않으면, 앞으로 양전(量田)할 때 각 고을의 수령들이 필시 실제대로 측량하였다가 토호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먼저 창도한 자를 엄격하게 조사하고 율대로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유백증이 상소하기를,
"신이 멋대로 소견을 진술하여 물의가 매우 거셉니다. 네 신하의 유배도 실로 신에게서 기인했습니다. 양피(羊皮) 천 장이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 한 장만 못한 것처럼 신같은 사람 백 명이 있다 하더라고 어찌 네 신하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네 신하가 나라에서 떠나고부터 심신이 혼란하여 스스로 안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얼굴을 쳐들고 염치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은 더욱 마음에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보라."
하였다.
9월 11일 갑자
상이 영의정 윤방에게 복상(卜相)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김상용(金尙容)을 우의정으로,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황윤후(黃胤後)를 장령으로, 김시양(金時讓)을 병조 판서로, 유백증을 이조 참의로, 박황을 대사간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응교로, 조석윤(趙錫胤)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종묘서가 아뢰기를,
"태묘에서 어보(御寶)046) 를 보관하는 규정을 보건대, 갑(匣) 안에 석통(錫筒)이 있고 또 안팎 홍보(紅袱)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금보(金寶) 하나와 옥보(玉寶) 하나에는 모두 석통과 외보(外袱)가 없고 옥보 둘에는 외보가 없습니다. 부묘 도감(祔廟都監)에게 물으니 효사전(孝思殿)에서 갖고 나올 때부터 본래 이와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는 평소 대내에 있을 때 유실된 것으로 보이니, 해조로 하여금 이제라도 구비하게 하여 빠짐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3일 병인
호조가 경상 감사의 치계에 따라, 각 아문의 공사로 파직 대상이 된 수령들을 양전(量田)할 동안만은 모두 그대로 놔두고 적당히 다른 벌을 시행함으로써 양전하는 일을 중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4일 정묘
간원이 아뢰기를,
"탐라(耽羅)가 무부(武夫)들의 이익을 꾀하는 장소로 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부호군 이확(李廓)이 제주를 맡았을 때 재물을 긁어 모았는데 염가를 지불하고 좋은 말을 강제로 사들여 자신이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뇌물로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미 체직되었다는 이유로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니 그를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선묘조(宣廟朝)에 어사를 보내 수령들을 감찰하고 물정을 탐문케 하였는데, 근년 이래로는 그 제도를 폐지하고 쓰지 않았으니, 탐관오리들이 거리낌없이 멋대로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어사를 파견하여 수령을 감찰하고 물정을 탐문하는 기회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확은 추고하라."
하였다.
9월 15일 무진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이홍주(李弘冑)가 나아가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상고하건대, 임신년에 대신들이 의논을 모을 때 성묘(成廟)가 아직 소목(昭穆) 속에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이 감히 의논을 모으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입계하였습니다. 지금에 태묘에 들인다면 세실(世室)을 둘 것인지 조천(祧遷)을 할 것인지에 대해 명백하게 결정한 뒤라야 중외에 반포하여 신민들로 하여금 훤히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중들의 논의가 세실을 두어야 되고 조천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결정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홍주가 아뢰기를,
"그때 논의를 모은 것은 ‘4대(代)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니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규례로 말하면 응당 조천해야 될 듯하나 성묘는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 마음에 심어진 것이 깊어 가볍게 조천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미처 하지 못한 예를 감히 제멋대로 아뢸 수는 없으나 예는 두터운 쪽으로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높여서 세실로 만드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지금 갑자기 조천을 하게 되면 신민들이 성주의 덕을 잊지 못하여 모두 추숭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테니 내 마음에 실로 미안함이 있게 된다."
하였다. 상이 김자점(金自點)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중국 군사들이 관(關)을 나왔으니 변방의 일이 염려스럽다. 경은 원융(元戎)으로서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안주(安州)의 성지(城池)와 기계(器械)가 잘 갖춰져 있다고 하지만 청천강(淸川江) 이북은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적의 군사가 아침에 출발하면 이튿날이면 도착할 수 있으며, 안주를 지키지 못하면 황주(黃州)도 지킬 수 없게 되고, 또 불행하게 적이 황주를 넘고 나면 서울도 반드시 붕괴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백마성(白馬城)에다 전념하여 서문(西門)으로 삼고 정방성(正方城)을 다시 수리하여 기각(掎角)으로 삼고 평산성(平山城)을 수습하여 차단하는 보루로 삼는다면 비록 갑작스런 변고가 생기더라도 방비할 수 있을 것으로, 정방성은 황주의 보조 역할을 하고 평산성은 정방성을 돕는 구실을 하여 서울이 믿을 수 있는 형세를 갖게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백마성은 실로 국가의 서문(西門)이다. 그러나 정방성을 반드시 지킬 곳으로 삼는다면 한 고을 병사로 대충 대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무 모든 신하들이 회의하여 그곳을 중진(重鎭)으로 삼는 방안을 강구토록 하라."
하였다.
김신국을 겸 호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6일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되어 권세가가 날이 갈수록 더 방자해지고 있습니다. 지난번 삼명일(三名日)047) 에 진상할 말을 찾을 때에 병조의 해당 관리가 마침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의 말을 취하였는데, 신경진이 크게 노하여 그 관리를 묶어 놓고 장(杖)을 쳤고, 병조가 풀어 달라고 간청한 뒤에야 풀어 주었습니다. 그 방자한 형상은 이미 놀라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신경진이 포도청 마루 아래에 땅을 파서 감옥을 만들고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사람을 빠짐없이 가두었는데, 갇힌 사람들이 마치 죽을 곳으로 끌려간 듯하였으니 더욱 놀랐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9월 17일 경오
달이 오거성(五車星)을 범하였다. 금성이 남두(南斗) 둘째 별을 범하였다.
9월 21일 갑술
대사간 박황이 양전사(量田使)가 되어 사체(辭遞)되고, 전식(全湜)이 대신하였다.
9월 25일 무인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치계하기를,
"겨울 방비가 이미 임박하여 산성의 수비가 매우 긴급합니다. 백마 산성(白馬山城)은 8백 47첩(堞)이니, 1첩당 다섯 명으로 계산하면 4천 2백 35명이 되는데, 4영(營)의 유군(游軍) 각 1백 명과 중영(中營)의 유군 2백 명을 합치면 총 4천 8백 35명이 됩니다. 본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은 신구(新舊)의 수를 합쳐 겨우 2백 호에 남녀노소 모두 6백 명 뿐이니, 본성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형편인데, 청북(淸北)048) 의 열읍에 증원할 군사를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미리 지휘하여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일이 어렵게 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조정에 군사를 증원하여 견고하게 수비할 계책이 없지 않으나 군량이 바닥나고 게다가 끌어다 쓸 만한 군사가 없습니다. 각 성의 증원군은 우선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서 처치하고, 백마성에 나누어 보낸 군사 1천 3백 명은 둔전의 곡식을 다 거두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체류시켜 방비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6일 기묘
번개와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9월 27일 경진
비국이 제도(諸道)의 양전사들과 회의하여 조목별로 열거하여 아뢰었다. 그 내용은 첫째, 목장 안의 개간지는 측량하지 말고 그대로 태복시에 소속시킬 것, 둘째, 바닷가의 언전(堰田)049) 은 의당 정전(正田)으로 칭하되 만약 수재(水災)의 걱정이 있으면 혹 속전(續田)050) 이라고 칭할 것, 셋째, 모든 궁가(宮家)와 각 아문의 감면하는 세금을 본래의 숫자 외에 함부로 일컫는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조사해 내어 민전(民田)으로 소속시킬 것, 넷째, 제언(堤堰)은 농민들에게 크게 이로움을 주는 것인데 그 안에서 몰래 농사를 짓는 자가 많으니 양전사로 하여금 직접 조사하게 하여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곳은 경작하지 못하게 하고 물을 저장할 수 없는 곳은 정전(正田)으로 소속시킬 것, 다섯째, 차사원(差使員)을 차출하여 소속 읍을 검칙할 것, 여섯째, 사신의 반당(伴倘) 한 명에게 말을 주어 데리고 가게 할 것 등이었는데, 답하였다.
"목장 안에 개간된 곳을 특별히 누락시킬 수는 없으니 모두 측량하라. 제언 안에 물을 저장하기에 용이하지 않은 곳을 정전으로 소속시키는 것이 안될 것은 없을 듯하나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끝내 제언이 다 없어지고서야 말 것이니, 경작한 사람은 죄를 다스리고 다시는 경작하지 못하도록 금하라."
9월 28일 신사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29일 임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번 전화(錢貨)의 사용에 대하여 김신국은 꼭 행해야 한다고 하였고 심열(沈悅)은 절대로 행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김시양(金時讓)은 그 중간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신국이 지금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니, 어쩌면 행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사용하게 한 이상 중도에 폐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사용하여도 폐단이 없었는데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먼저 송도(松都)에 시행한 뒤에 확대하여 국중(國中)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이르라."
하였다. 상이 최명길에게 이르기를,
"용렬한 자가 참하(參下)에서 위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으니, 경이 입사(入仕)하는 길을 알맞게 줄인 것은 참으로 옳다. 지금 과거 급제를 우선으로 하고 음사(蔭仕)를 뒤로 하면 인재를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음사에는 두 가지 길이 있어서 관학(館學)에 출입한 자나 부형(父兄)의 자제가 들어가는데, 이들 중에는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자가 적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벼슬길에 나갔는데, 지금에는 아주 어린 사람들이 모두 음사로 벼슬을 하고 있다. 경은 대신들과 상의하여 무인을 등용하는 길을 활짝 열되 연소자가 음사에 의망되지 않게 하라."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의망할 때 문·무·음 세 글자를 기록하여 들이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음관은 나이를 제한하여 입사(入仕)를 허락하라."
하였다.
9월 30일 계미
경상도 봉화(奉化)·예천(醴泉) 등지에 8월에 서리가 내렸고, 경산(慶山)에 황충이 있고, 영천(榮川)·안동(安東)에 우박이 내렸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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