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신
밤에 유성이 낭위성(郞位星) 아래에서 나와 각성(角星) 위로 들어갔다.
10월 2일 을유
태백성이 나타났다.
상이 이조에 하교하기를,
"조종조에서 음관의 처음 입사는 으레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하였는데, 근래에는 세족(世族)의 자제로서 나이가 어린 사람이 사적(仕籍)에 오르기 때문에 무사(武事)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무관에 항상 인재가 부족한 탄식이 일고 있다. 앞으로는 처음 입사할 때 나이 제한을 정하고 의망할 때 나이를 각 사람들의 이름 아래에 기록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다. 비국이 개좌(開坐)할 때 대신들과 상의한 뒤 계품하여 처리하라."
하였는데, 이조가 회계하기를,
"대신에게 물으니 ‘연소자가 음사로 들어가는 것이 무사(武事)를 권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주상께서 염려하신 것이 사실 마땅하다. 생원 진사는 30세, 학생은 35세가 된 뒤에 비로소 음사(蔭仕)에 의망해야 할 것이다. 이름 밑에 기록하는 일은 새로운 관례를 만드는 셈이니, 단지 해조로 하여금 음사에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먼저 나이의 다소를 물어보고 반드시 연한에 합당한 뒤에 의망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사정(私情)에 따라 함부로 의망한 자가 있으면 대간이 듣는 대로 바로잡아 탄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학생은 40세로 한정하라."
하였다.
10월 3일 병술
간원이 아뢰기를,
"빈청에서 글을 강하여 연이어 다섯 번 통(通)을 받은 자에게 가계(加階)하는 제도가 법전에 실려 있긴 합니다. 그러나 연이어 다섯 번 통(通)을 받는다는 것은 차례를 연이어 들어가 강을 하여 중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부호군 정빈(鄭賓)이 네 차례 강에 응한 뒤에 두 차례 강을 베풀었는데 파산(罷散) 중에 있는 바람에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고, 금년 7월에 와서 다시 강에 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앞뒤의 결과를 통계하여 연이어 다섯 번 통(通)을 얻었다 하고 자급을 올려주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법전에 실린 연이어 받는다는 본의가 아닙니다. 법이 한번 무너지면 나중의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바르게 고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조경이 아뢰기를,
"지난해 재이(災異)가 있었을 때 전하께서 구언(求言)하였으나 신은 한 마디 말도 드리지 못하였고 올해 예를 논의하는 과정에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신은 또 입을 닫고 물러 나왔습니다. 대우(大禹)의 훈계를 지금에 적용한다면 먼저 묵형(墨刑)을 받을 자가 신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주자가 소식(蘇軾)을 인용하여 ‘새로운 은혜를 바랄 만하나 오래 된 학문은 끝내 버리기 어렵네[新恩雖可冀 舊學終難棄]’라고 한 시의 내용을 음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문을 감히 함부로 논할 수는 없지만 미혹된 견해는 실상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이 거론한 바입니다. 신이 그때 마침 언관의 지위에 있지 않았는데 금일에 와서 좋은 곳으로 올려졌고, 여러 신하들은 그 때에 언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금일에 와서 나쁜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저들은 유폐(幽閉)되고 저는 천양(闡揚)된 것을 신은 실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여러 신하들은 다른 죄가 없고 전하의 성명(聖明)을 믿은 것이 죄였다고 여깁니다. 광해군이 공빈(恭嬪)을 추존하여 태묘에 들이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 당시에 오늘날처럼 간절하게 간쟁한 신하가 있었습니까? 성명께서는 왜 여기에서 크게 귀감을 삼아 여러 신하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정온(鄭蘊)은 오늘날의 직신(直臣)으로 평생 외롭게 서서 세속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상소에서도 여러 신하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신하들이 평소 당쟁을 한다는 지적을 면치 못하였으나, 오늘날 논한 바는 편당(偏黨)을 한 사사로움이 아니고 군자가 덕으로 임금을 사랑하는 뜻이었음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나라를 흥하게 하는 왕은 간언한 사람을 상주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임금은 간언한 사람을 죽인다.’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죄를 가한 것이 너무 심합니다. 그 누가 전하의 지나친 효성이 도리어 난망(亂亡)의 조짐을 이루어 이 지경에 이를 것이라 여겼겠습니까. 영화와 총애는 사람이 다 같이 좋아하고 죄와 유배는 사람이 다 같이 싫어합니다. 말이 전하에게 순하게 받아들여지면 영화와 총애가 따르고 말이 전하에게 거슬리면 죄와 유배가 미치니, 아첨은 횡행하고 충언(忠言)은 숨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 선비들의 기운이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대각(臺閣)에 있으면서는 강직하게 하지 못하고 굽신거리다가 호창(呼唱)을 하고 행인을 비키게 하므로, 저자 거리의 아동들도 그 소극적인 태도를 비웃고 있습니다. 신처럼 나약한 자는 결코 대간의 풍채를 분발시켜 퇴락하는 풍조를 격동시킬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10월 5일 무자
태백이 나타났다.
10월 8일 신묘
상이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숭은전(崇恩殿)에서 거행하였다.
10월 9일 임진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10월 10일 계사
태백성이 나타났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김신국에게 하문하기를,
"세상의 모든 나라가 화폐를 사용하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이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김신국이 대답하기를,
"과거의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공민왕(恭愍王) 때에 저화(楮貨)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 법이 통행된 뒤로 전화(錢貨)의 사용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화를 쓰지 못한다고 하는 그 폐단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지경연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대개 우리 나라는 오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다른 이유가 없고 법이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니, 이홍주가 아뢰기를,
"신이 개성 유수가 되었을 때 전화(錢貨)를 쓰는 이로움에 대하여 서민들에게 설명하자 서민들은 모두 편리하여 좋다 하였는데, 소위 사대부라는 사람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대개 송경(松京)은 본래 동철(銅鐵)을 사용하였으니, 이 지역에 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용이합니다."
하고, 김신국이 아뢰기를,
"고려 시대에는 화폐를 사용할 때 종묘에 고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그 일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홍주 【 이홍주가 이때 예조 판서였다.】 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유생(儒生)들의 사우(師友) 사이의 도의가 싹 없어졌다. 모든 교회(敎誨)하는 등의 일을 해조가 제대로 거행하고 있는가?"
하니, 홍주가 대답하기를,
"아동들을 훈도하는 일은 모두 규례에 따라 시행하고 있습니다. 유학(幼學)은 《소학(小學)》·《사서(四書)》와 경(經) 하나로 강(講)을 통과한 뒤에 입학시키는데, 근래에는 국가에 일이 많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사우의 연원이 있어야 선비가 될 수 있다. 경은 특별히 권장시키라."
하니, 대답하기를,
"근래에 아동들도 《소학》을 읽는 자가 없고 부형도 가르치는 자가 없으며, 단지 과거 공부만 일삼기 때문에 이런 형편입니다."
하였다. 홍주가 또 아뢰기를,
"집경전(集慶殿)의 영정이 불에 타버린 뒤에 경주 사민(士民)들의 상소에 따라 이미 경주에다 봉안하기로 정하였는데, 지금까지 4년이 지나도록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년 봄이 되면 건물을 지어 봉안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으라고 하였다. 그 뒤에 윤방·김상용(金尙容) 등이 양전(量田)이 끝나는 때를 기다려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1일 갑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강학년(姜鶴年)·김휼(金霱)을 장령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사인으로, 변시익(卞時益)·민응협(閔應協)을 지평으로, 김덕승(金德承)을 헌납으로, 윤구(尹坵)를 수찬으로, 심지한(沈之漢)·이시만(李時萬)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12일 을미
이조가 아뢰기를,
"신이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의 장권조(奬勸條)를 취하여 상고해 보건대 ‘여러 해 관(館)에 거하여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조행(操行)이 특이하며 만 오십 세가 된 자 중에서 본관의 일강(日講)과 순과(旬課)051) 및 본조의 월강(月講)을 통틀어 상고하여 분수(分數)가 우등인 자와, 여러 해 관시(館試)와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일곱 번 합격하고 나이가 만 오십 세가 된 자을 계문하여 서용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경국대전》의 본의는 대개 예조와 본관으로 하여금 함께 상의하여 천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일강과 월강의 규정이 폐지되고 행해지지 않아 근거로 삼아 의논하여 천거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지 본관의 생원·진사로 하여금 각각 권점(圈點)을 찍게 하고 그 권점의 숫자가 가장 많는 자 세 명을 취하여 본조에 이문(移文)하여 입계해서 의망케 하였으니, 이것을 공천(公薦)이라 합니다.
조종조의 인심이 순박하고 사론(士論)이 공평하던 때에는 권점을 찍는 제도가 모두 당시의 기대에 합치하여 비록 《경국대전》의 본의와는 조금 다르지만 또한 많은 선비들의 공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도(世道)가 쇠미해지고 사정(私情)이 크게 기승을 부리면서는 음사(蔭仕)를 차지하려고 꾀하는 자가 분주하게 청탁하여 권점을 구하니 너무나도 구차합니다. 공천은 이미 《경국대전》의 본의가 아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큰 폐단이 되었습니다. 조종조에서 유생을 권장한 법을 일시에 모두 거행할 수는 없으나 통독(通讀)·순제(旬製) 등의 일은 아직 전폐되지 않았으니 사유(師儒)가 된 자가 실로 더욱 정밀하게 가린다면 천거된 사람이 분주하게 권점을 구하는 무리보다는 반드시 낫고 《경국대전》의 본의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대사성으로 하여금 대략 법의 본의를 본떠 혹은 제술(製述)을 하고 혹은 통독을 하고 혹은 합격 횟수를 상고하고 혹은 재능과 행실이 취할 만한 자를 수소문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도목(都目) 때마다 본조에 이문을 하되 연령이 만 오십 세가 못되었더라도 너무 구애받지 말고 후보자 세 사람이 차지 않더라도 구차하게 채우지 말고 오직 합당한 자만이 선발에 참여토록 하면 실질적인 효과가 생길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재능과 행실이 취할 만한 자를 수소문하자는 것과 연령에 구애받지 말자는 등의 말은 타당하지 않은 듯하니, 이 두 조항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5일 무술
공청도 수사 송영망(宋英望)이 치계하기를,
"태안군(泰安郡) 서해포(西海浦)에 당선(唐船) 한 척이 표류하여 도착하였는데, 한인(漢人) 네 사람이 와서 봉서(封書) 한 통을 바쳤습니다. 본군의 군수가 뜯어 보니, 도사(都司) 풍보국(酆報國)이 피도(皮島)에서 배를 타고 나왔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였으며 돛이 부서져 배를 운행할 수 없어 공장(工匠)을 빌려 수선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그들의 간청에 부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황 감군(黃監軍)이 청구한 배는 명년 봄이 되어야 보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군이 보낸 은(銀)은 4천 냥(兩)인데, 그들이 50냥으로 배 한 척을 사려 하나 그 값이 너무 헐해 결코 부응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배의 대소에 따라 그 값을 조정하더라도 대체로 1백 냥으로 한 척을 매입할 경우 40척을 보내면 맞습니다. 경강(京江)에 살 만한 배가 있기는 하나 격군(格軍)을 구비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반드시 외방에 나누어 정하여 배를 사고 격군을 구비한 뒤에야 보낼 수 있습니다. 마땅히 배 값으로 보내온 은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 형편에 따라 매입토록 하되 경상도 10척, 전라도 15척, 공청도 10척, 경기 5척으로 하면 됩니다. 그리고 배 한 척 값인 은 1백냥 중에 약간을 덜어내어 격군을 사는 값으로 쓰고 차사원(差使員)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해주(海州) 결성창(結城倉)의 배를 정박시키는 곳에 교부하게 하였다가 이어 황해도로 하여금 나란히 띄워 가도(椵島)로 들여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배 40척에 격군을 구비하여 보내는 일은 민폐가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일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10척에 해당하는 값의 은은 사유를 적어 돌려 보내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안주(安州)의 군사에게 방출하는 군량이 1년에 5만 석인데 내 생각에는 많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전에 관향사(管餉使)가 되었던 자는 은화(銀貨)를 많이 축적하였는데, 지금 관향사가 된 자는 늘 부족하다고 해사에 보고하고 있다. 전후 관향사의 허실을 조사하여 벌을 가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일찍이 관향사 김광욱(金光煜)의 치계를 보건대, 안주의 한 성에 1년 동안 방출하는 수량이 미태(米太)는 4만여 석이고 피곡(皮穀)은 1만 2천여 석이었습니다. 기타 각 성에서 응당 사용해야 될 수량은 이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입방(入防)한 군사가 많지 않은데 방출량이 이처럼 많으니 신들도 자못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의 분부를 받들고 해조에 보관된 관향사가 보낸 계유년 4계절의 회계문서를 취하여 상고해 보건대, 안주에 1년 동안 방출된 미태는 4만 7백 47석이고 피곡은 7천 9백 89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색(色)의 군사 몇 명에게 지출하였는지의 사유를 알 수 없으니 치밀하지 못한 듯합니다. 마땅히 이러한 뜻으로 관향사에게 묻고, 앞으로는 각 성에 방출된 수량에 대하여 어떤 색의 군사 몇 명에게 미두(米豆) 몇 석을 지출하였다는 내용을 매 계절 초하루에 작성하여 책자를 만들어 본사로 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관향한 물화(物貨)는 성준구가 박추(朴簉)에게 인계하고 박추는 김광욱(金光煜)에게 인계하였는데, 모두 중기(重記)052) 가 있으니 고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물화는 대다수 유명무실하며 전매하여 이윤을 내어 중국과 호인의 요구에 응하고 있는데, 사용한 수량을 계산할 것 같으면 이미 본래 전해 받은 것보다 더 많습니다. 김광욱이 근래에 부족하다고 보고한 것은 필시 이번에 칙사(勅使)가 왔을 때 은(銀)과 삼(蔘)이 많았기 때문에 앞으로 부족할 것을 걱정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매하여 취한 이익으로 용도를 충당하고 번거롭게 조정에 요청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관향사의 책임이니, 이런 뜻으로 신칙하소서."
하자,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지출한 군량의 수량은 관향사가 장황하게 계문하지 않았다면 이는 필시 병사(兵使)가 함부로 보고한 결과일 것이다. 1년 간 방출한 군량의 수량을 다시 병사가 있는 곳에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10월 16일 기해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최명길이 아뢰기를,
"처음 입사(入仕)할 때의 연령 제한은 이미 정하였으나 의망 단자(擬望單子)에 연령을 기재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외간의 논의들이 대다수 온당치 않게 여기고 선비들도 대부분 싫어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비가 연령의 기재를 싫어하면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매우 가당치 않다. 정말 싫어한다면 더욱 기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청백리와 선현(先賢)의 자손 및 공신의 자제들도 모두 40세로 제한해야 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삼가 과거의 역사를 보건대 공신의 자손으로서 어린 나이에 벼슬한 자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신의 자손을 우대하는 도리가 없지 않으니 마땅히 생원·진사와 연한(年限)을 똑같이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선현과 청백리의 자손을 공신의 자제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합니까? 청백리는 지금 의거할 만한 자료가 없고 단지 견문을 근거로 삼는데 매우 자세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악을 판별함은 중대한 일이니 보고 들은 것만으로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널리 물어 벼슬을 감당할 만한 자를 취하여 임용하라."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대개 청백리는 한때 격동시키고 권장하는 일에 불과한데 그 자손까지 임용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백리의 경우는 선현의 자손들과 동등하게 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혼조(昏朝) 때에는 혹 이로써 가자(加資)하기까지 하고 혹은 곧바로 6품직에 출사시키는 등 매우 문란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청렴결백한 기풍을 권장하는 제도인데 어찌하여 탐오(貪汚)하는 자가 많은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퇴폐한 풍속이 그러하니 실로 한심합니다. 전사자(戰死者)의 자손은 공신의 자손과 다름이 없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선비로서 효행과 학식이 있는 자는 어떻게 처우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출한 자가 있으면 계품하여 처리하되 명실이 상부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인하여 남발하여 시행하여서는 안된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에는 변통(變通)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대간의 피혐이 근래에 너무 분분한데, 전하께서 관대하게 용납하는 뜻은 아름답지만 아랫사람으로서 그와 같이 번거롭고 소란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뜻인가?"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옛날에 사면(辭免)할 때 사은(謝恩)을 지체하는 식의 피혐은 양사의 장관만이 하였는데, 대사간의 경우에는 행직(行職)이 아니면 또한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옛 규례를 회복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으로서 상피(相避)해야 될 경우에는 응당 체직될 하위자가 인피하면 되고 체직되지 않을 자까지 형식적으로 인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대간 전원이 인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동료로서 병으로 집에 있거나 일 때문에 고향에 내려갔던 자가 올라오고 출사함에 이르러 동료가 이미 한 똑같은 일을 들어서 새삼스럽게 번거롭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더라도 굳이 뒤이어서 인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간혹 그 점을 모르고 인피하는 자가 있더라도 정원이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왕명으로 부르는데도 핑계를 대고 나오지 않는 것은 불경(不敬)에 해당될 듯합니다. 더구나 대간은 남을 규찰하여 바로잡아야 되는데 오늘 병을 핑계대고 이튿날 곧바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무단히 나오지 않는 자는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관(大官)도 그렇게 해서는 안될 터인데, 하물며 낮은 관리이겠는가. 죄주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참찬관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사대부의 진퇴는 염치를 중하게 여기니, 일의 형편이 부득이할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옛날에는 과실이 있거나 죄를 지으면 여러 해 동안 폐기되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꺼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명관(名官)이 과실이 있어도 곧바로 삼사의 청망(淸望)에 주의(注擬)하는 경우가 있다. 정사의 체모상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지난날 채유후(蔡𥙿後)의 상소 속에 ‘파직을 당하면 사람들이 모두 축하한다.’ 하였는데 이는 부박(浮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전하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다만 전하께서 그르다고 하는 것을 공의는 그르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전조(銓曹)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예를 논의하는 일로 자못 분분하게 되었던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신하들이 예를 따지는 일을 기화로 삼았는데, 지금은 필시 무료할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근래 서원의 폐단이 엄청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원의 폐단이 이러하기 때문에 사액(賜額)을 청하는 경우가 있어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바른 정치를 구하는 정성이 시들지 않았으니 나라 일을 잘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마침 변방에 우환이 많이 생겨 구차하게 시일만을 보냄을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전날 정사(政事)에서 강학년(姜鶴年)을 장령의 부망(副望)으로 올려 비점(批點)을 받았는데, 이는 전하께서 의도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김집(金集)·유진(柳袗)을 함께 의망하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 시대에 훌륭한 선비로서 이들보다 앞설 자가 없으니, 불러서 쓰기만 한다면 필시 많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덕이 박하기 때문에 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불러 올 수 있겠는가?"
하자, 명길이 아뢰기를,
"선왕조에게는 염퇴(恬退)할 줄 아는 선비들이 모두 조정에 늘어섰기 때문에 시속이 크게 변화되고 풍화(風化)가 저절로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만약 영영 가버린 채 돌아오지 않는다면 장차 현사(賢士)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속이 부박하여 순박하고 착실한 인물은 아예 없다. 이런 사람들을 조정의 사이에 두면 반드시 귀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 지난번에 보니, 장현광(張顯光)의 용모와 관복(冠服)이 옛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여 지금까지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사람들은 훌륭한 스승이 없어 오직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장난과 농담을 일삼고 있는데, 이 때문에 풍속이 날이 갈수록 더 투박해 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10월 17일 경자
황 감군(黃監軍)의 문안사(問安使) 한명욱(韓明勗)이 돌아왔다. 황 감군 【 이름은 손무(孫茂)이다.】 이 회첩(回帖)하기를,
"마침 저보(邸報)를 보건대 ‘노유령(盧維寧)이 외번(外藩)으로 사신나가 선물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국가의 체모을 크게 손상하였다. 따라서 본래 엄중하게 다스려야 마땅하나 먼 길에 노고가 많았던 점을 생각하여 우선 죄를 면해 준다. 그가 가져온 은을 찾아내어 잠시 창고에 두었다가 해번(該藩)의 공사(貢使)가 당도했을 때에 되돌려 보내어 조정에서 먼 변방을 회유하는 뜻을 보이라.’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으로 긍휼을 밑바탕으로 한 사랑과 엄숙한 법이 있음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대개 노유령이 사신으로 나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탐욕을 부렸기 때문에 돌아와서 탄핵을 받은 것이다.
10월 18일 신축
선혜청이 아뢰기를,
"본청에서 거두는 쌀의 십분의 일을 동전(銅錢)으로 대신 받아들이는 것은 대개 경기 지방이 서울과 멀지 않아 민간에서 간혹 나무·고기·채소 등을 가져다가 동전으로 바꿔 결부(結負)를 납부할 때의 용도로 삼고 있기 때문인데, 다만 동전이 널리 퍼져 있지 않아 강압적으로 납부하게 할 경우 그 값이 치솟기 때문에 소원대로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경기 지방의 수령들 중에는 혹 으레껏 쌀로 거두면서 방납(防納)하는 사람을 허락해 주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법을 만든 초기에 이런 간사한 일이 있게 되면 아무리 좋은 법에 아름다운 뜻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각읍의 문서에 모두 쌀 몇 석으로 동전 몇 문(文)을 대납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본청이 들은 바는 있지만 적발할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폐단이 다시 있을 경우 장률(贓律)로 수령을 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9일 임인
이홍주(李弘胄)를 병조 판서로, 홍서봉(洪瑞鳳)을 예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부응교로 삼았다. 홍서봉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며 내삼청(內三廳)에 사일(仕日)이 많은 자가 천전(遷轉)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무사들이 대부분 분개하였다. 하루는 무부(武夫) 한 사람이 곧장 정청(政廳)으로 달려가 직접 면전에서 홍서봉의 탐욕스러운 실상을 질책하니, 아연실색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급히 해직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된 것이다.
10월 20일 계묘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전날 성균관 유생의 공천(公薦)은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50세 이상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다만 옛날에는 도사(都事)와 별좌(別坐)가 6품이었고 재랑(齋郞)이 처음 입사하였는데, 인원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6품으로 진출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여러 재랑의 숫자가 또한 너무 많아 차례차례 천전하여 6품으로 진출하려면 8∼9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걸립니다. 50세로 제한하는 것은 나이가 너무 많으니 40세로 제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만 법전의 본의와 서로 위배된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국법에 65세가 되면 수령이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50세가 되어야 비로소 벼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40세로 제한하라."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전날 음관에 관한 사목에서 유학(幼學)을 40세로 제한하였는데 밖에서 모두 지나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연소자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테니 신은 오히려 편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전날 한흥일(韓興一)이 내직과 외직을 돌아가며 차견하여 1년이 지난 뒤에 불러서 쓰자고 청하였는데, 신도 그런 뜻으로 계품하여 처치하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제부터 문관 수령과 도사·찰방으로서 명성과 치적이 있는 자는 계청할 필요 없이 때때로 내직으로 의망하여 권장하는 방법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연소자가 반드시 관리의 사무를 익힐 수 있어 정치하는 도리에 이로움이 없지 않게 됩니다. 요즈음 보건대 연소한 명관(名官)들이 젊어서 요직에 출입하여 말단 행정에 대한 경력이 없기 때문에 일에 닥치면 매우 생소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혹 지위가 낭묘(廊廟)에 이르러도 민간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우 안될 일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붕당이 있고부터 친한 사람을 끌어다 청요직(淸要職)에 앉히고 외지의 고을로 내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직·외직에 상관없이 균등하게 차출하여 출입시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도사(都事)의 소임이 전보다 더욱 중대합니다. 그런데 주의(注擬)할 때마다 인재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는데, 명관(名官)은 외직으로 나간 자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명관을 차출하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사의 소임이 중대하니, 반드시 한 도를 제압할 만한 자를 차출하여 보내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혼인은 중대한 예이니 시작을 바르게 하는 도리로서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소종가(小宗家)에서 자녀를 시집 장가보낼 때에 아루런 일이 없더라도 감히 자기 멋대로 주관하지 않고 반드시 문중의 어른이 주관하게 하는 것은 종통을 중하게 여기고 중대한 혼사를 신중하게 행하려는 의도에서 입니다. 지금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혼사를 인천 부사 심액(沈詻)이 부인의 외조부로서 혼례를 주관하는데, 일이 매우 구차하고 소략합니다. 더구나 오씨(吳氏)의 큰 문중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있을텐데 이를 놔두고 다른 데서 찾는다면 예문(禮文)의 본의를 어기는 일입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1일 갑진
이조가 음관(蔭官)이 처음 입사(入仕)할 때의 사목(事目)을 기록하여 입계하기를,
"관천(館薦)053) 과 모든 도(道)의 향천(鄕薦)은 관직의 유무를 막론하고 반드시 나이와 재능과 행실을 써서 보고하게 했습니다. 선현과 청백리의 자손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제도가 비록 법전에 있기는 하나 제한이 없어 함부로 참여하는 자가 많으므로 본조와 예조의 당상관이 상의한 결과, 선현은 아무개 청백리는 아무개라고 차례로 써서 계문한 뒤에 반드시 제사를 받들고 자손 중에서 나이 만 40세가 되고 벼슬길에 합당한 자를 단자(單子)로 계하(啓下)받도록 했습니다. 전사자의 친자와 공신의 자(子)·서(婿)·질(姪)·제(弟) 중에서 응당 제수해야 될 한 사람은 생원·진사의 관례에 의거하여 30세를 한정으로 하고 먼저 본조에서 입계한 뒤에 의망하도록 했습니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의논해 천거할 때에도 반드시 나이와 행실을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음자제(蔭子弟)를 취재(取才)할 때에는 먼저 종족의 계보를 살펴 터무니없이 음사(蔭仕)하는 폐단을 막고, 다음에 나이를 상고하여 나이를 속이는 걱정이 없도록 했습니다. 경서를 강하는 일도 관례대로 대충 넘어가지 말고 반드시 문장의 의미를 밝게 통한 자를 취하여 합격한 뒤에 모두 이름을 차례로 써서 계하받도록 했습니다. 나이를 제한하는 법은 관례대로 의망하는 사람에게 시행하는 것이니, 만약 효행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은 자가 있으면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않고 각기 특별히 계품합니다. 그러나 의망 단자(擬望單子) 가운데 나이를 기재하지 않으면 시일이 오래 지난 뒤에는 중도에서 쉽게 폐지될 걱정이 있으니, 전하의 분부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유성이 북두성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10월 22일 을사
예조가 학교를 권장하는 조목을 가지고 입계하기를,
"첫째, 효우(孝友)와 절의(節義)의 실제 행적이 두드러진 자의 경우, 서울은 오부(五部)에서 지방은 본도 관찰사가 오로지 공론에 따라 연말에 초계(抄啓)하게 함으로써 등급을 정해 논상하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둘째, 사우(師友)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는 일이 끊어졌습니다. 나이 어린 초학자들이 오직 과거 공부만을 먼저 힘쓰고 《소학(小學)》은 아예 높은 시렁 위에 얹어 놓은 채 읽는 자가 없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학업을 받는 아동으로서 문리(文理)를 조금 터득한 자에게는 먼저 《소학》을 가르치고 뒤이어 경사(經史)와 제술(製述)도 차례차례 공부하도록 권장하며, 1년 안에 네 차례 강(講)를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자는 분수(分數)054) 를 통계하소서. 그리고 실교관(實敎官)은 근무 일수에 관계없이 규정을 초월하여 승진시키고 사교관(私敎官)은 법전에 의거하여 임용함으로써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를 보이소서.
셋째, 관학(館學)의 유생이 통독(通讀)과 제술을 하도록 한 규정이 전폐되지는 않았지만 가끔 중지되고 계속되지 못하니 일이 착실하지 못합니다. 이제 다시 밝혀 거행하소서.
넷째, 유생이 입학할 때 고강(考講)하는 제도가 없어져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년 식년(式年)부터는 옛 규정에 의거하여 《소학》과 《사서(四書)》 등의 책을 고강하고 합격한 자에게는 공문(公文)을 발급하여 과거에서 녹명(錄名)할 때 대조하고 참고하여 응시를 허가함으로써 함부로 들어오는 폐단을 막으소서.
다섯째, 외방의 훈도를 감원한 뒤 제독관(提督官)을 약간의 주(州)와 부(府)에 차출하여 보냈으나 남아도는 관원과 마찬가지가 되어 직책을 잘 수행한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교생(校生)도 유생의 명부에다 적(籍)을 두고 역(役)을 도피하는 바탕으로 삼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선택하여 보내 관할하는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착실하게 직무를 거행하게 하고, 뚜렷하게 성과를 거둔 자가 있으면 감사가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게 하소서.
여섯째, 여씨 향약(呂氏鄕約)은 그 제도가 매우 아름다운데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백성들의 풍습이 날이 갈수록 더 투박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약장(約長)이라고 불리는 자가 모두 고을의 비천한 부류이고 관가(官家)의 징발과 독촉에 관한 일이 이들에게 맡겨져 있어 천역(賤役)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고을에서 명망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풍속을 규찰하고 바로 잡는 일을 전임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조익(趙翼)을 부제학으로, 유성증(兪省曾)을 집의로, 유진(柳袗)을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5일 무신
간원이 아뢰기를,
"옛날 정치를 잘한 임금으로서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하고 내외(內外)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으로 왕가의 법도를 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근래에 궁위(宮闈)가 엄격하지 않아 바깥 사람의 출입이 제멋대로이고 심지어는 음식그릇까지 요란하게 이어지고 있으니, 금단하지 않을 경우 궁내의 말이 밖으로 나가고 밖의 말이 궁안으로 들어오는 걱정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참으로 매우 한심하니 특별히 금지하고 경계하여 내외를 엄숙하게 단속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아 외척의 무식한 무리들이 안팎으로 교통하는 조짐이 꽤나 있었기 때문에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10월 26일 기유
목성이 물러가 여귀성(輿鬼星)으로 들어갔다. 유성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위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였다.
"양전(量田)하는 옛날 자[舊尺]가 없으면 호조가 마땅히 한 가지로 통일하여 판각(板刻)하여야 될텐데, 옛 제도를 따르지 않고 별달리 의견을 내어 2백 년 동안 전래되어 온 옛 규정을 하루아침에 폐기하게 하니, 일이 매우 잘못되었다. 판서는 추고하고 색낭청은 파직하라."
10월 29일 임자
양전하는 데 쓸 신구(新舊)의 자에 대하여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윤방은
"새로운 자를 이미 내려 보냈는데 조금 긴 것을 혐의하여 쓰지 않는 것은 사리상 타당치 못하다."
하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이왕에 옛 자가 있었으니 새로운 것과 옛것을 섞어서 쓸 수 없다. 각도에 현재 있는 옛 자를 가져다가 장단을 비교하여 한결같이 책(冊) 제도대로 준수하여 새로운 자를 만들어 각도에 나누어 보내줌으로써 길이가 똑같지 않게 되는 걱정이 없도록 해야 된다."
하였는데, 상이 윤방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날 권세와 총애를 믿고 혼탁한 꼴을 보였던 무리들이 외방에 전지와 주택을 광범위하게 소유하였으므로 아무개 진(陣), 아무개 진이라 하면서 백성들이 마치 시랑이나 범의 굴처럼 보았습니다. 계해년 이후로 그런 폐단을 모두 혁파하였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기강이 차츰 해이해져 여러 궁가(宮家)들의 전원이 여러 곳에 퍼져 있고 어량(魚梁)과 바다에 대한 세금을 온통 점유하여 수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나이 어린 대군(大君)이 전택(田宅)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사나운 종들이 성세(聲勢)를 빙자하여 전날의 일을 답습하여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군진(大君陣)’ 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외방에 숱하게 있는데, 백성들이야 이 무리들이 중간에서 저지르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국가에 원망이 돌아오고 대군에게 누가 끼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준엄하게 금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여러 궁가의 세금을 면제한 전지(田地)에 대해서도 해조로 하여금 한계를 정하여 결재를 받아 외방에 행회(行會)하여 여러 고을에서 중복하여 시행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혼조(昏朝) 10여 년 사이에 윤리가 모조리 없어지고 풍속이 퇴폐해져 형편없이 금수와 같은 상태로 변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반정(反正)한 뒤로 눈부시게 달라진 변화에 사람들이 모두 눈을 닦고 다시 볼 정도였는데, 불행히도 난리가 끊임없이 일어나 치교(治敎)를 베풀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윗사람이 경계하는 것이나 아랫사람이 힘쓰는 것 모두가 오직 성지(城池)·기계(器械)와 군량을 모으는 일 뿐이었고 세상을 교화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예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살피지도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민심과 풍속이 날이 갈수록 더 야박해지고 있으니, 신 등은 천재와 반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 꼭 이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지난해 대신이 《소학》으로 교육을 시키자고 청하였는데, 그 뒤로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으니 실로 매우 안타깝습니다. 성지와 기계는 신 등도 급선무로 여깁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효제 충신의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비록 금성탕지(金城湯池)에다 곡식을 산처럼 쌓아놓았다 하더라도 장차 누구와 함께 지킬 것입니까. 향약의 여러 조목을 갑자기 다시 행할 수는 없겠지만 그 가운데 효우 경순(孝友敬順)의 도리에 가장 절실한 것을 해조로 하여금 사목을 정하여 감사에게 선포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 감사가 수령을 엄하게 경계하고 수령은 부로(父老)들을 모아놓고 되풀이 경계한다면 자연 보고 감동하는 성과는 거두게 될 것이니, 또한 해조로 하여금 계품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대군의 전장(田庄)은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라. 그리고 세금을 면제하는 일은, 한계를 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폐단이 불어나지 않도록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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