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계축
처음으로 전화(錢貨)를 사용했는데 유통되지 않아 전화를 사용한다는 명목만 있고 실효는 없었다.
김덕함(金德諴)을 좌승지로, 조석윤(趙錫胤)을 부교리로 삼았다. 최연(崔葕)을 응교에서 동부승지로 발탁했는데, 이는 입묘(入廟)의 예를 힘껏 도왔기 때문이었다.
11월 2일 갑인
접반사 오숙(吳䎘)이 주도에서 병으로 졸하였다. 상이 개성부(開城府)에서 관재(棺材)를 공급하고, 경기(京畿)에서는 호상(護喪)하도록 하였다.
숙은 약관에 등제(登第)하였는데 사람됨이 명민(明敏)하고 문재(文才)가 있었다. 그러나 광해조 때에 유희분(柳希奮)·박승종(朴承宗)과 가까이 지내어 최유해(崔有海)·박추(朴簉) 등의 무리와 더불어 팔학사(八學士)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청의(淸議)가 흠으로 여겼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 사람은 매우 총명하였는데 나랏일을 보다가 노상에서 죽었으니,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특별히 증직하여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11월 3일 을묘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상소하기를,
"《서경(書經)》에 ‘정치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제어하고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전에 보전하라.’ 하였는데,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차례 큰 난을 겪었는데도 조금도 허물을 반성하지 않고 고식책(姑息策)만을 써서 저절로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는 주(周)나라의 홀어미와 칠실(漆室)의 처녀가 깊이 걱정했던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055) 그런데 전하께서는 스스로 총명한 척하며 한결같이 간언 막기만을 힘쓰시니, 전하께서도 이것이 덕이 많은 임금의 일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옛날 난정(亂政)으로 나라를 전복시킨 자들과 거의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인데, 신은 그 종말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전하께서 반정한 거사는 세상에 드문, 변환을 적절히 대응한 조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이(伯夷)가 있었다면 반드시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는 비난을 했을 것이고, 엄연년(嚴延年)이 있었다면 반드시 곽광(霍光)을 탄핵하는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비상한 거조로 세상을 크게 감동시키고 탁월한 실적을 이룩하여 모든 행동이 옛 성현들과 합치된 뒤에야 천의(天意)를 따르고 인심을 복종시켜 전하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됨은 물론 국가의 복도 장구히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허물이 밖으로 드러나 간혹 대덕(大德)에 누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감히 낱낱이 들어 진달할 수 없으나 그 가운데서도 폐 동궁(廢東宮)에게 죽음을 내린 것은 은혜를 온전히 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인성군(仁城君) 공(珙)에게 죽음을 내린 것056) 에 대해서도 나라에 의논이 그치질 않으니, 이것들은 변을 처리한 것 중에 가장 불행한 것들입니다. 요즈음의 일로 말하면 추숭(追崇)한 것이 예에 맞지 않아 조야(朝野)가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떻게 천의(天意)를 따르고 인심을 복종시켜 전하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인심은 흩어졌고 백성들의 힘은 이미 고갈되었으며, 세금거두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국가의 저축은 거의 바닥이 났으며, 도적들은 노략질을 일삼고 기강은 문란하며, 국가의 원기(元氣)는 사라지고 국방은 허술하며, 강포한 외적은 쳐들어오려 하고 천재지변이 속출하고 있으니, 누구인들 이것이 위망의 조짐이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크게 염려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서경》에 ‘오직 먼저 임금을 바르게 하라.’ 하였듯이 신이 크게 걱정하는 것은 전하의 한 마음이 바로 잡아지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한 마음이 바로 잡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의(私意)가 가로막아 무슨 일을 할 때면 번번이 합당치 못하게 되는데, 모든 정사(政事)를 그르치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군신들 중 죽음을 각오하고 고언(苦言)을 진달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몰라서 말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알면서도 감히 아뢰지 못하는 자도 있고, 간혹 아뢰기는 하나 마음속의 생각을 다 털어놓지 않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공의(公議)에 격발되어 전례에 따라 아뢰는 자가 있을 경우 단호하게 거부하시는 말씀과 찬출(竄黜)하라는 형벌이 잇달아 나오므로 미천한 백성들도 모두 전하의 정치에 대해 비평하려고들 합니다. 아, 성명(聖明)의 세상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중지(中智)의 자질을 타고 나셔서 총명 재지가 큰 일을 할 수 있는데 일찍이 학문에 대한 노력과 기질을 바로 잡으려는 공력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가 늘 밝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참다운 덕이 부족하여, 명백하게 일깨워 주는 친신(親臣)과 진심을 다 털어놓는 직신(直臣)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의심이나 쌓고 자질구레한 일까지 살피는 것을 밝은 것이라 하여 유사(有司)들이 해야 할 지엽적인 일에만 몰두하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는 것은 깨닫지 못하므로, 나라가 위란의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너그러이 채납하신다면 신은 비록 천리밖에 있더라도 성상의 곁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논사(論思)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종사의 중함을 염두에 두시고 가운데로는 천위(天位)의 지키기 어려움을 생각하시며 아래로는 자손을 보존할 것을 헤아리셔서, 크게 뉘우치고 분발하여 용맹스럽게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지혜롭게 덕을 닦아 이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려는 뜻을 두소서. 그러면 일식과 월식이 사라짐에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것과 같이057) 위태함을 편케 만들 수 있을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하였다. 소장을 올리자, 상이 답하기를,
"소를 모두 보고 그대의 충직한 언론을 가상하게 여긴다. 아, 천하에 변할 수 없는 사람도 없으며 일을 할 수 없는 때도 없으니, 마땅히 고사(固辭)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나의 보고 싶어하는 정성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5일 정사
헌부가 아뢰기를,
"음란하고 잔학했던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종국(宗國)을 전복시켰을 뿐이었고, 미치광이 같은 창읍왕(昌邑王)058) 도 임금 자리에 마땅하지 않을 따름이었으니, 어찌 모비(母妃)를 폐한 못된 행위까지 한 광해군(光海君)과 같겠습니까. 우리 선후(先后)059) 께서는 어미로서 자식을 폐하였고 우리 전하께서는 성모(聖母)의 명에 따라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대의(大義)를 일으키고 윤기(倫紀)를 바로 잡으셨으니, 천명(天命)과 인심에 부합될 뿐만이 아닙니다. 가령 식견이 높은 백이(伯夷)와 하후승(夏侯勝)이 오늘날 다시 나와 의리의 경중을 따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들의 명예를 구하고 정직함을 내세우기 위해 멋대로 크게 떠들어대지는 않을 것입니다.
폐세자 지(祬)는 강도(江都)로 내쫓기만 하고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는데 땅굴을 파 달아나려고 하여 스스로 형벌을 불러들였습니다. 역적 인성군(仁城君) 공(珙)은 윤기에 죄를 짓고060) 여러 차례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나 곡진하게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였는데, 역모를 꾀한 정상이 탄로나 사람과 귀신이 함께 분노하자 성상께서도 끝내 법을 굽혀 은혜를 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형(正刑)을 적용하지 않아 처자를 살려 두었으니 이미 독독하게 우애를 하는 도에 극진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장령 강학년은 뻔뻔스럽게도 소장을 올려 ‘백이가 있었더라면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는 비난을 할 것이다.’는 말까지 하였는 바, 그 소장을 보니 저절로 머리털이 쭈뼛해졌습니다. 강학년은 의견이 본래 이와 같았다면 의당 백이가 서산(西山)에서 고사리 캐던 것을 본받아 꿋꿋한 절조를 우뚝이 세웠어야 할텐데, 그는 오랫동안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쳤고 말하는 것 또한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지금 조정이 그에게 심한 무고를 당했는데도 굽혀 부른다면 그는 도리어 기고만장하여 거리낌없이 지껄이며 군신의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망령된 의견을 마구 낼 것입니다. 그의 속셈은 정직하다는 명예를 구하려는 것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임금을 무시하고 세상을 속이는 무리에 대해서는 엄중히 조사하여 멋대로 논의하는 습성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학년은 자신의 의견이 그와 같기 때문에 곧바로 숨김없이 아뢰었을 뿐이다. 비록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이라 하더라도 무슨 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매우 차니 해조를 시켜 빈 섬[空石]을 숙직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11월 6일 무오
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장령 강학년의 소장을 보니 해괴한 말들이 매우 많아 가슴 아프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폐세자 지는 도망하려 했으니 스스로 국가의 법을 범한 것이고, 역적 인성군 공은 역모를 꾀하여 사람과 귀신이 함께 분노하였는데도 자결하도록만 하고 현륙(顯戮)하지 않았으니, 옛 성인이 변고를 처리한 방법도 이보다 더 관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반정(反正)한 일에 있어서도 인륜이 무너졌다가 이로 인해 다시 펴지게 되었고 종사가 위태로워졌다가 다시 안정되었으니, 천인(天人)이 함께 호응하여 공덕이 크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학년은 감히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는 말로 오늘날을 빗대었으니, 그가 마음속에 의도하고 있는 것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대저 백이(伯夷)의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는 말은 그가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던 때에 한 것으로, 만약 조금이라도 주(周)나라 녹을 받아 먹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학년은 처음부터 특별하게 발탁되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친 지 10년이나 되었으니 군신간의 분수와 의리를 모르지 않을텐데, 상께서 여러 번 간곡하게 부르자 스스로 방자해져 정직한 자라는 평판을 얻을 속셈으로 감히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을 지껄였습니다. 이러한 자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멋대로 의논하는 자들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니,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말이 합당치는 못했지만 반드시 다른 뜻은 없었을 것이니 그냥 놔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1월 7일 기미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양사가 강학년의 관작을 삭탈하려고 연계(連啓)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11월 10일 임술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위에서 나와 익성(翼星) 아래로 들어갔다.
지평 유진(柳袗)이 아뢰기를,
"신이 강학년의 상소에 대해 양사가 논한 것을 보니,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不道)하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학년의 사람됨에 대해 신이 아직 보지 못해서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나, 그의 소장만을 가지고 살펴보면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고 자상하며 온순한 태도는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산골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사체를 모른다 하더라도 임금에게 고한 말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이와 엄연년의 일은 더욱 인용해서는 안될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선모후(先母后)061) 의 명을 받고 난를 바로잡아 인륜이 다시 밝아졌고 종사가 다시 편안해져 해가 중천에 뜬 것과 같이 대의(大義)가 밝게 드러났습니다. 무왕(武王)과 곽광(霍光)은 처했던 시대가 각각 달라 오늘날에 빗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지경에 이르도록 멋대로 지껄여댔으니, 물의(物議)가 준엄하게 배척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의 본뜻을 헤아려 볼 것 같으면 어찌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상의 은혜를 받은 것에 감격해서 말을 다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재량할 줄 알지 못해서 이러한 데에까지 이른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를 정직하다는 명예를 구하는 자라고 하는 것도 그의 본의가 아닐 듯 싶은데, 더구나 신하에게 있어서 극도의 죄목인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不道)하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의 밝은 임금들은 말 때문에 죄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임어하신 이래로 초야의 선비가 한 말이 혹 지나치더라도 으레 너그럽게 용서했으므로, 한 사람도 말 때문에 죄를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금번 학년의 상소에 대해 매우 너그럽게 포용하셔서 도타운 비답을 내리셨고, 또 ‘반드시 다른 뜻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학년의 망령된 행동이 저와 같은데도 성덕(聖德)은 이와 같으시므로,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감복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신하의 도리란 지극하게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따르고 큰 덕을 찬양하여 온 세상 사람들과 후대인들로 하여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대성인의 넓은 도량을 우러르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만약 그의 실제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일체 법만 가지고 논한다면 일개 학년이야 애석할 것이 없겠지만 성세(聖世)에 있어서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소견이 동료들과 달라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이현영(李顯英) 등이 아뢰기를,
"삼가 지평 유진(柳袗)이 인피한 글을 보니, 전하께서 반정하신 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강학년에게 임금을 무시했다는 죄목으로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했습니다. 유진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만, 군부(君父)에 대해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하더라도 임금을 섬기는 예에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자(臣子)의 마음에 편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성은(聖恩)을 입은 것에 감격해서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다 진달할 것만 생각했다면,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논의의 가부에 대해서 성의껏 숨김없이 아뢰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감히 종사를 안정시키고 인륜을 바로잡은 성덕(聖德)과 대업(大業)을 헐뜯어 백이가 자기 임금을 끝까지 옹호했던 말까지 거론하면서 방자하게 비방하였습니다. 중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명분이 이미 정해진 자가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신들은 학년에 대해 임금을 무시한 자라 논하여도 오히려 만족스럽지 못한데, 유진은 말한 것 때문에 죄주어서는 안된다고 하고 이어 신하의 도는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따라야 한다고 하였으니, 전하에게는 매우 많이 기대하면서 신들에게는 매우 책망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이니, 자기 임금에게 무례한 짓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스스로 용서하여 대의의 소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의리를 분명히 분별하지 못해 이의(異議)가 마구 나오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들이 무력한 탓입니다. 신들의 직을 파하소서."
하였다. 정언 심지한(沈之漢)·이시만(李時萬)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시만은 ‘반드시 중하게 논죄하기는 해야 하나 임금을 무시했다[無君]는 두 글자는 지나친 것 같다.’고 하였다.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 한때의 명류들이기는 하나 과거로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좁은 듯해서 혹 초야의 어진 이를 빠뜨렸다는 탄식이 없지 않을까 염려되어, 성심껏 구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강학년은 신과 관학(館學)에서 교제했던 자인데, 그가 독서를 많이 하고 행실을 잘 닦아 위사(僞士)로 자처하지 않으며 사우들간에 칭송이 자자하다는 말을 자못 들었기 때문에, 이조(吏曹)의 직을 처음 맡았을 때 천거하여 대각(臺閣)에 의망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식견이 괴팍하고 편벽되며 의리에 전연 어두워 망령되게 소장을 올려 이렇게 조정을 욕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 옛적에도 어지러움을 수습하여 반정한 제왕이 한둘이 아니나, 명분이 바르고 사리에 합당하여 공덕이 전하같이 찬란하게 빛난 분은 없었습니다. 가령 이러한 때에 백이가 있었더라도 광해군의 녹은 사양하지 않고 전하의 녹은 사양하겠습니까. 그리고 소장 가운데에 있는 ‘중지(中智)’라는 두 글자는 매우 어리석고 망령된 것으로 말해서는 절대 안될 말입니다. ‘대불경(大不敬)’의 죄는 한(漢)나라 법에도 매우 엄하였으니, 강학년이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공은 속적(屬籍)이 이미 끊어졌는데도 왕자라고 일컬었으니, 또한 거의 국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삼가 성상께서 학년에게 내린 비답을 보니, 지나치게 관대히 답해 주셨습니다. 상께서는 횡포한 행동을 하는 자를 만났는데도 조금도 관계치 않으셨으니, 천지가 만물을 포용해 주는 것과 같은 도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학년은 장차 입을 다물고 죄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을 것으로, 어떻게 천명한 덕에 조금이나마 누를 끼치겠습니까.
다만 신은 경솔하게 남의 말을 믿고 괴상하게 행동하는 자를 추천하여 이와 같이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비록 다시 인재를 추천하고 싶으나 군부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또한 성명께서 유현(儒賢)을 우대하시던 것이 이로 인해 조금이라도 식어질까 염려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의 죄는 일개 학년을 잘못 천거한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인데, 어떻게 그대로 전관(銓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거듭 조야에 비웃음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빨리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모두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11월 11일 계해
헌납 김덕승(金德承)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유진이 인피한 글을 보니, 양사가 강학년을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不道)하다.’고 논한 것에 대해 지나치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보건대, 학년의 소장 중에 있는 몇 가지는 말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그냥 놔두더라도 괜찮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군부에 대해서 포악하다고 한 것은 신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학년이 백이처럼 신하가 아니라고 자처했다면 그만이려니와 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으니 그에게 ‘임금을 무시했고 부도하다.’고 하더라도 실로 지나친 의논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물의에 배척을 받았으니 체직해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에서 처치하기를,
"대사헌 이현영(李顯英), 집의 유성증(兪省曾), 장령 김휼(金霱), 지평 변시익(卞時益), 정언 심지한(沈之漢), 헌납 김덕승(金德承)이 관직을 삭탈하자고 청한 것은 실로 원정(原情)을 참작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모두 출사할 것을 명하소서.
정언 이시만(李時萬)은 먼저 중히 논죄하자고 했다가 다시 그 과도함을 염려하여 앞뒤가 서로 달랐으며, 지평 유진은 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시비를 변론하여 공론과 의견을 달리했으니,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2일 갑자
추신사(秋信使) 나덕헌(羅德憲)이 오랑캐 땅에 갔는데, 한(汗)이 패해서 돌아온 뒤로 우리 나라가 그 일을 알까 두려워하여 지레 공갈치기를 ‘예단(禮單)의 수효를 줄였고 우리가 원정(遠征)한 것에 대해 위로하지 않았다.’ 하고는, 끝내 덕헌을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는 글을 보내 꾸짖었는데, 그 글 중에는 패려하고 거만한 말들이 많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선전관 이정현(李廷顯)에게 답서를 주어 보냈다.
이기발(李起浡)을 정언으로, 성여관(成汝寬)을 장령으로, 이척연(李惕然)을 지평으로, 이준(李埈)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3일 을축
대사헌 이현영, 집의 유성증, 장령 김휼, 지평 변시익 등이 아뢰기를,
"강학년의 상소 가운데에 흉악하고 패려한 말들이 많았으니, 법에 의거하여 죄를 청한다면 관직을 삭탈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 등은 의리를 확연히 깨닫지 못하고 약하게 논의하여 단지 말감(末減)으로 청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죄는 중한데 율은 가볍게 했으니 잘못이다.’는 물의가 있고, 묘당(廟堂)의 회의에서는 사의(辭意)가 준엄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신들은 모두 변변찮은 자들로 통렬하게 배척하지 못했으니, 그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지금이라도 법에 의거하여 다시 논할 수 있으니, 양사의 관원들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6일 무진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학년(姜鶴年)은 본디 어리석고 용렬한 자로 마음씨와 행실에 특별히 볼 만한 점이 없는데 지나치게 허명(虛名)을 얻어 조정을 크게 속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초빙하는 횟수가 빈번하여 작위가 점차 높아지자 거리낌없이 말하는 처사(處士)처럼 행동하면서 괴상하고 망령된 소장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올렸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폐 동궁 지는 강도(江都)로 내쫓아 사형시킬 것을 용서하였는데 땅굴을 파고 도망쳐 스스로 천형(天刑)을 불러들였습니다. 종사(宗社)는 중한 것이니 전하께서 아무리 사은(私恩)을 베풀어주고 싶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역적 인성군 공은 이인준(李仁俊)의 상소에 부회하여 앞장서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고, 여러 번 역적들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도저히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가볍게 찬출(竄黜)만 하고 중사(中使)로 하여금 옥교(屋轎)를 태워 배소까지 호위하게 하였으니, 혹시라도 도중에 병이 날까 염려해 주신 마음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몰래 유효립(柳孝立)과 통하며 흉모를 서로 주창하여 은(銀)을 뿌려 군사를 모으고 비밀리 무기를 준비하는 한편 선후(先后)의 밀지라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끌어들였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법대로 처벌하지 않으신 덕택에 엄히 국문하라는 선후의 명이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람과 귀신이 함께 분노하고 국법에 있어 용서해 줄 수 없는 것이니, 전하께선들 어떻게 정신(廷臣)들의 간절한 청을 막고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용서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학년이 말한 ‘나라 사람들이 계속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보고 듣고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정형(正刑)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속적(屬籍)은 이미 끊어졌는데도 폐 동궁이니 왕자 공이니 하여 죄없이 죽은 자처럼 말하였으니, 그 마음이 참으로 참혹합니다.
백이(伯夷)가 말고삐를 잡고 간한 것과 엄연년(嚴延年)이 곽광을 탄핵한 사실은 전하에게 빗대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학년은 군신간의 의리를 망각하고 멋대로 비방하였으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한 죄는 참으로 크다 하겠습니다. 그를 절도에 안치하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공청 감사(公淸監司)의 장계를 보건대, 신창현(新昌縣)의 양전 감관(量田監官)이 피살되었다고 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백성들이 전결(田結)을 속이고 숨겨 오랫동안 요역(徭役)과 부세를 면해 오다가 갑자기 양전을 하니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감히 공차(公差)에 손을 댔는데도 수령이 된 자는 즉시 쫓아가 체포하지 않고 태연스레 있었으니, 크게 직무를 유기한 것입니다. 신창 현감 이태선(李泰先)을 파직하소서.
감사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소서. 그리고 그에게 다방면으로 뒤를 밟아 범인을 체포하는 즉시 효시하도록 하여 뒷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태선을 지레 파직하면 뒤를 밟아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니, 우선 추고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신창현의 감관(監官)인 안일(安佾)은 서산군(瑞山郡)에서 고을을 바꾸어 온 자로 나이는 적으나 명찰(明察)하여 한결같이 사목(事目)대로 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여 죽였는데, 감사가 아뢴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공청 감사(公淸監司)의 장계를 보건대, 신창현(新昌縣)의 양전 감관(量田監官)이 피살되었다고 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백성들이 전결(田結)을 속이고 숨겨 오랫동안 요역(徭役)과 부세를 면해 오다가 갑자기 양전을 하니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감히 공차(公差)에 손을 댔는데도 수령이 된 자는 즉시 쫓아가 체포하지 않고 태연스레 있었으니, 크게 직무를 유기한 것입니다. 신창 현감 이태선(李泰先)을 파직하소서.
감사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소서. 그리고 그에게 다방면으로 뒤를 밟아 범인을 체포하는 즉시 효시하도록 하여 뒷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태선을 지레 파직하면 뒤를 밟아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니, 우선 추고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신창현의 감관(監官)인 안일(安佾)은 서산군(瑞山郡)에서 고을을 바꾸어 온 자로 나이는 적으나 명찰(明察)하여 한결같이 사목(事目)대로 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여 죽였는데, 감사가 아뢴 것이다.
11월 18일 경오
부응교 정태화(鄭太和), 교리 조석윤(趙錫胤), 수찬 정뇌경(鄭雷卿)·윤구(尹坵)가 차자를 올리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오직 어진 자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 하였는데, 어진 사람의 마음은 사심없이 공평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미워함에 정도(正道)가 있어 죄가 있는 자는 벌을 주고 불선(不善)한 짓을 한 자는 멀리 내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과 임금을 속이고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가 있는데도 너그러이 용납하여 용서해 주고 깊이 미워하여 통렬히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시비가 분명해지지 않고 선악의 구별이 없어져 사설(邪說)이 횡행하고 왕법(王法)은 날로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삼가 강학년이 올린 소장을 보니, 그 가운데에 이치에 어긋나고 오만 불손한 말이 많았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치고 어느 누구인들 깜짝 놀라며 깊이 미워하지 않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몸소 의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심으로써 선후(先后)의 대명(大命)과 성조(聖祖)의 대통을 이어 의리가 밝아지고 공덕이 크게 이루어졌으니, 무왕(武王)이나 곽광의 일을 어떻게 오늘날에 비겨 논할 수 있겠습니까. 백이(伯夷)가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말한 것은 은(殷)나라가 망한 것을 애통스럽게 여겨 주(周)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며, 엄연년(嚴延年)이 곽광을 탄핵한 것은 신하가 자기 마음대로 임금을 폐하고 세운 죄를 바로잡으려는 의도에서 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이와 연년이 지금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광해(光海)을 위하여 전하의 녹을 받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찌 국가를 중흥시킨 위대한 공렬을 그르다 하며 감히 탄핵하려 하겠습니까. 학년은 일세의 이목을 완전히 속여 과분하게 성상의 초탁(超擢)하는 은전을 입어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산야에 은둔하여 신하가 되지 않은 자와는 의리가 다릅니다. 그런데도 감히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기탄없이 지껄여대어 군부(君父)를 비방하였으니, 국법을 적용시킨다면 어떻게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不道)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폐 동궁 지는 강도(江都)로 추방만 하였으니, 보전해 주신 도가 극진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불측한 뜻을 품고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 했으니, 전하께서 비록 끝까지 잘 보전해 주고자 하셨으나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역적 인성군 공은 폐모론(廢母論)을 앞서 주창하였고 자신이 역적의 괴수가 되었는데, 무진년의 변062) 에는 역모를 주장하여 정상이 탄로된 뒤에야 할 수 없이 종사의 대계를 깊이 생각하여 신하들의 간절한 청을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상형(常刑)을 가하여 처자식까지 죽이지 않았으니, 옛 성인이 골육의 변을 당하여 은의(恩義)를 온전히 한 방법도 이보다 더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은 감히 멋대로 지껄여대어 ‘은혜를 온전하게 하지 못하였다.’고도 하고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말하고 있다.’고도 하였으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닙니까.
양사에서 연일 합사(合辭)하여 논열(論列)하는데도 성상께서는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신들은 전하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도가 바르지 않아 그 폐해가 장차 시비가 불분명해져 사설(邪說)이 판을 치고 선악의 구별이 없어져 왕법(王法)이 무너지는 데까지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이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속히 공론을 따라 윤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처벌했으니 더 심히 다스릴 필요가 없다."
하였다.
11월 19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지평 이척연(李惕然)이 아뢰기를,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한 강학년의 죄에 대해서는 본디 해당되는 율이 있어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 처음에는 삭탈하자고 청하였다가 다시 안치시키자고 청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관대한 덕을 본받은 것이기는 하나 전후로 말감(末減)하자고 청한 것은 모두 율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묘당에서 그르다고 한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니, 대사헌 이하를 모두 체차하소서.
이조 판서 최명길은 자신이 전장(銓長)으로서 인재를 등용할 때에 의당 십분 신중하게 살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갓 현자를 천거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만 알고 명실이 각기 다른 것은 알지 못한 채 학년의 허명만을 그릇되이 믿어 여러 차례 대각(臺閣)에 의망함으로써 끝내 그로 하여금 부도한 소장을 군부(君父)의 앞에 올리게 했으니, 매우 잘못 천거한 것입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식견이 밝지 못한 자를 심하게 꾸짖을 것 없으니 지나치게 논하지 말라. 그리고 학년은 거짓 명예를 도둑질하여 세상 속이기만을 힘썼으니, 최명길이 속은 것도 나라를 위하여 현자를 구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제 잘못 천거했다는 이유로 전관(銓官)을 죄준다면 초야에 참다운 군자가 있더라도 해조에서는 반드시 쓰려 하지 않을 것이니, 뒷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헌부의 관원들은 체직시킬 만한 잘못이 없는 듯하니 체직시키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이현영(李顯英), 집의 유성증(兪省曾), 장령 김휼(金霱)을 패초(牌招)하였는데도 나오지 않자, 상이 집의 이하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0일 임신
대사헌 이현영이 소장을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강대수(姜大遂)를 집의로, 윤전(尹烇)·박수홍(朴守弘)을 장령으로, 조석윤(趙錫胤)을 헌납으로, 이해창(李海昌)을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22일 갑술
양사가 합계하여 강학년을 율에 의거하여 죄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이 사람은 말을 함부로 지껄여 높은 명예를 구하려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리어 무례하고 무식한 지경에 빠졌으니, 그 위인이 참으로 가소롭다. 내가 헤아려 보건대, 이 밖에 딴 생각은 없는 듯하니 지금은 우선 내버려 두고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호조가 아뢰기를,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을해년063) 부터는 전(錢)으로 대납케 하여, 전화(錢貨)의 길을 넓히소서."
하니, 따랐다.
부사용(副司勇) 홍진례(洪振禮)가 상소하기를,
"삼가 양사가 강학년을 죄주자고 청한 계사를 보건대, 변설(辨說)한 것이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더러 대의(大義)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대의로써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반복해서 간하여도 들어주지 않으면 교체시킨다.’ 하였는데, 임금을 교체시키는 것은 큰 변고입니다. 임금의 악이 걸왕(桀王)·주왕(紂王)과 같지 않고 신하의 덕이 탕왕(湯王)·무왕(武王)과 같지 않다면 이것을 어떻게 쉽사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탕왕·무왕의 덕은 걸왕·주왕을 치기에 충분하였음에도 백이는 비난하였고, 곽광의 일은 이윤(伊尹)에게 비할 수 있는데도 엄연년(嚴延年)은 탄핵하였으니, 군신의 분수는 참으로 엄한 것입니다.
탕왕·무왕은 성인으로 후세에 버금갈 자가 없었는데 전하만이 그보다 뛰어나신 것은 무엇입니까? 전하께서 생민들이 도탄에 빠진 것 때문에 일어나신 것은 탕왕·무왕과 같지만 시역(弑逆)한 것과 모후가 유폐된 것과 종사를 위해서 일어난 것은 탕왕·무왕에게는 없는데 전하에게만 있는 것이니, 이것이 전하가 크게 뛰어나신 이유입니다.
아, 전하께서 거의(擧義)하신 것은 어떠한 일입니까? 무신년의 독약사건064) 은 더없이 큰 변고였고, 10년간의 유폐로 흉모(兇謀)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충신과 의사들이 생명을 걸고 기어코 전하를 받들고자 한 것이 어찌 종사와 생민만을 위해서 였겠습니까. 당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전하께서 선후(先后)를 모시고 정전에 앉아 광해(光海)를 뜰 아래에 꿇리고 그의 죄를 성토하여 베고 위(位)를 바로잡았다고 종묘에 고한 뒤에, 중국에 아뢰고 팔도에 고하여 모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광해가 시역한 죄를 알게 한다면, 대의가 밝아지고 인심이 쾌하게 여겨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도 조금 위안되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계책으로는 이것이 최선이었는데 시역한 자를 강도(江都)로 추방만 하여 천지간에 버젓이 살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민들이 다 함께 가슴 아파하는 점입니다.
신이 삼가 강학년의 상소를 보건대, 그 뜻은 무왕을 전하에 견주고 곽광을 원훈들에게 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무왕과 곽광의 일은 참으로 옳았는데도 백이와 엄연년이 있었으니, 백이와 엄연년 또한 옳았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양시론(兩是論)입니다. 학년은 둘 다 옳다는 것만을 알았지 전하의 일이 무왕이나 곽광의 일과는 크게 다르며, 백이와 엄연년 같은 행동이 오늘날에 있어서는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참으로 망령된 자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양사에서는 선후(先后)에게서 명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너무 구차하지 않습니까. 신은 훈가(勳家)의 자제이므로 당시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는데, 전하께서 언제 선후에게 명을 받으셨습니까. 전하께서는 강상(綱常)이 이미 없어지고 종사가 무너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역적을 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하며 유폐당한 선후를 모셨으니, 이 어찌 광명 정대하며 명분도 바르고 사리에도 합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양사에서는 이렇게 당당한 대의를 젖혀 두고 굳이 구차하게 허언을 하여 일세를 속이려 하니, 선후에게 명을 받을 경우에는 옳고 받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른 것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생각에 양사의 의논은 학년으로 학년을 공격한 꼴이라고 여겨집니다.
아, 전하는 성주(聖主)이십니다. 비상한 자질을 타고 나셔서 비상한 변고를 당하셨으니 의당 비상한 행동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즉위하신 뒤로 변변찮은 자들만 등용하고 선류(善類)들은 등용하지 않았으며, 잘못을 고치지 않고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정사하는 사이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앞으로 얼마나 잘 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스스로 생각하기에 탕왕이나 무왕과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신은 삼가 이 점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이 듣건대, 수 양제(隋煬帝)가 시역(弑逆)의 죄를 범하자 당 태종(唐太宗)이 정벌했다고 합니다. 그 일은 참으로 옳은 것이었으나 당나라의 대강(大綱)이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선유들은 ‘당나라가 천하를 얻은 것이 바르지 않다.’ 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이 공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마음속에 지닌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밖에 나타난다.’ 하였는데, 신은 후세에 전하의 사적을 고찰하는 자가 과연 전하의 마음은 어떻다고 평가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이 점을 두렵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선 큰 원수를 갚지 못한 점을 생각하시고, 다음으로는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셔서 극진하게 조치하시어 대의가 우주에 환히 빛나도록 하소서. 그러면 종사가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하였는데, 아뢴 소장을 정원이 물리쳤다.
사신은 논한다. 유폐된 광해가 10년 동안 아무 탈이 없었으니, 성대한 덕을 지닌 임금의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홍진례는 원수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7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왕실-국왕(國王)
[註 064] 무신년의 독약사건 : 선조(宣祖)의 후궁으로 있다가 뒤에 광해군(光海君)의 사랑을 받게 된 김 상궁이 무신년 선조 승하 당시 약밥에다 독약을 넣어 독살했다는 설이 있음. 《인조실록(仁祖實錄)》 권3 원년 9월 신축조(辛丑條). 무신년은 1608 선조 41년.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유폐된 광해가 10년 동안 아무 탈이 없었으니, 성대한 덕을 지닌 임금의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홍진례는 원수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11월 24일 병자
부사용 홍진례가, 자신의 상소를 정원이 받들어 올리지 않은 것 때문에 다시 상소하여 정원이 중간에서 가로막은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정원이 전후의 소장을 바치고, 인하여 아뢰기를,
"일전에 홍진례가 와서 소장 한 통을 바쳤습니다. 신들이 그 소장을 보니, 대의는 10년 전에 이미 의논하여 조처한 일이었으며 심지어는 부정한 당 태종(唐太宗)의 일까지 인용하였으므로 신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강학년은 무왕과 곽광을 오늘날에 빗대어 논의했는데도 패만한 죄를 면치 못했는데, 홍진례는 무슨 의견이 있길래 감히 형제를 죽이고 규방(閨房)의 불미스러운 사실이 있는 당 태종을 성명에게 비긴단 말입니까. 그의 말은 너무나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상의하고 물리쳤던 것입니다. 지금 진례가 소장을 올려 비난하는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태연스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감히 이 문제로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소장이 들어갔으나 내리지 않았다.
11월 25일 정축
양만용(梁曼容)을 검열로, 정태화(鄭太和)를 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6일 무인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오례의(五禮儀)》의 왕자 혼례시 친영(親迎)에 대한 조항을 보니, 그 내용에 ‘전안례(奠鴈禮)를 행한 뒤 대군(大君)은 서계(西階)로 내려가고 주인은 내려가지 않는다. 모부(姆婦)가 부인을 인도하고 어머니 왼편으로 나오면 아버지가 나아가 명하기를 「공경하고 조심하여 항시 명을 어기지 말라.」 하고, 어머니는 서계 위에 이르러 명하기를 「힘쓰고 공경하여 항시 어기지 말라.」 한다.’ 하였습니다.
금번에 심액(沈詻)이 부인의 외조부로서 주인을 대행하고 있으니 의당 이에 따라 예를 행해야지 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군이 부인의 부모을 뵙는 조항에 ‘넷째 날 대군이 부인의 부모를 찾아가 뵙는다. 부인의 아버지는 맞이하고 보내며 읍하고 사양함에 있어 객례(客禮)와 같이 하고, 대군이 절하면 무릎을 꿇고 붙든다. 부인의 어머니는 왼쪽 문짝을 닫고 문안에 서 있으면 대군은 문밖에서 절을 한다.’ 하였는데, 이는 길례(吉禮)를 지난 3일 뒤에 대군이 처음 부인의 부모를 뵙는 예입니다.
외조부로서 부모의 예를 그대로 행해서는 안될 듯하니, 그 한 가지 절차에 대해서는 지금 우선 권정례(權停例)로 하고 오단(吳端)이 상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혼례가 이미 이루어졌다면, 그 처의 부모를 뵙지 않을 수 없다. 오단이 상복을 입은 채 만나도 무방하다."
하였다.
11월 30일 임오
추신사(秋信使) 나덕헌(羅德憲)이 치계하였다.
"용호(龍胡)065) 가 부하 30여 명을 데리고 신이 머무른 곳에 와서 묻기를 ‘중국의 대장이 섬에 주둔하고 있다고 하는데, 데리고 있는 병력이 몇 천 명이나 되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중국 장수가 어느 정도의 병력을 데리고 있는지는 우리 나라에서 알 바가 아니다. 그리고 중국 장수는 철수하여 돌아가려 한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용호가 말하기를 ‘섬에서 도망쳐 온 한인(漢人)이, 중국 장수가 그 곳에 머물러 있는데 명년 봄에 조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협공하려 한다고 상세히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속이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병력을 보내 협공한다는 말은 한인이 속여서 한 말이니, 믿어서는 안된다.’ 하였더니, 용호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데리고 있는 종들의 부모 형제도 오랑캐의 소굴에 잡혀가 있는 자들이 매우 많아 그들은 날마다 문밖에 모여 친척들과 함께 서로 바라보며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틈을 타 그들의 정황을 몰래 탐문하도록 하였더니, 말하기를 ‘이 적들이 금년 선(宣)·대(大)의 전쟁에서 곤경에 처하여 소도리(所道里) 이하 제장 중 전사한 자가 7∼8명 혹은 수십 명이 된다고 하며, 전사한 군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환군한 날에는 어두울 때에 들어와서 성(城) 내외의 몽고(蒙古) 및 한인들이 그 허실을 알지 못하게 했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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