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계미
양사가, 강학년(姜鶴年)을 율에 따라 죄를 정하자고 합계하니, 상이 그냥 놔두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였다.
이조에서 나만갑(羅萬甲)을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의망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어떤 당상이 나만갑을 목사에 의망하였는가?"
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지금 양전(量田)할 때인데 홍주는 번화한 곳이니 반드시 풍력(風力)이 있고 성실한 자가 다스려야겠기에 상의하여 의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처럼 거리낌 없는 자를 다시 큰 고을 수령으로 의망하여 변변찮은 무리들로 하여금 더욱 꺼릴 것이 없게 하였으니, 본조는 매우 잘못했다."
하였다. 이에 앞서 만갑이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어 춘분(春分)이 지난 뒤에 함부로 집식구들을 데리고 가 마침내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파직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김반(金槃)을 응교로, 이경의(李景義)를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삼았다. 경의는 이호민(李好閔)의 조카로서 원종(元宗)을 추숭하는 의논을 할 때 상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이때에 외직에 임명된 것이다.
12월 2일 갑신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렸다.
"신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탄핵하는 소장 중에 거론되었습니다. 대간의 발론은 비록 서로 규찰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갑자기 의논이 일어나 오래도록 계속되니, 이것은 서로 규찰하는 상례(常例)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외롭고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신은 괜스레 겁날 뿐 아니라 항간에서 나도는 말도 매우 의아하니, 훗날 지금보다 더 심하게 신을 나무라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12월 3일 을유
헌부가 아뢰기를,
"북청 판관(北靑判官) 임덕후(任德後)는 광해조 때에 총애받던 궁인의 족속으로 궁궐을 드나들면서 권세에 의지하여 못된 짓을 저질렀던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그와 같이 악한 짓을 했던 무리들은 반정이 일어난 뒤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갔는데 유독 그만 요행히 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다시 벼슬길에 나와 주부(州府)의 중임을 맡게 되니,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만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4일 병술
양사가 강학년의 일 때문에 연계하니, 답하였다.
"이 사람은 평소 독서하였으나 시비를 알지 못하고, 종일토록 이치를 연구하였으나 대의(大義)에 깜깜하니, 참으로 노할 필요도 없는 불쌍한 자이다. 또한 그의 소장 중에 있는 이른바 ‘중지(中智)’라는 말은 직언(直言)이며 어질기를 권면한 뜻 또한 충성스러운 것이니, 그의 어리석은 점을 용서해 주고 치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장신이 치계하기를,
"본도의 산군(山郡) 일대는 수재(水災)가 극심한데 성천부(成川府)의 재해를 입은 토지는 모두 5백 72결이니, 부역을 감면해 주소서."
하니, 상이 호조에 명하여 특별히 감면하라고 하였다.
12월 5일 정해
이의배(李義培)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이원진(李元鎭)을 교리로 삼았다.
12월 6일 무자
지평 이척연(李惕然)이 아뢰기를,
"신이 그릇된 소견으로 생각하기를 ‘강학년에 대해 이미 율에 따라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니 그렇다면 전관(銓官)이 잘못 천거한 책임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예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사람들의 말에 ‘신이 탄핵하여 논한 것은 비단 잘못 천거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하고, 또 최명길도 의아해 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고들 합니다.
신과 명길은 평소에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이기 때문에 저는 그의 집에 가 만나보고는 신의 본뜻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명길은 전에 의심했던 것을 완전히 풀고, 지난날 의심을 품게 됐던 연유를 일일이 들어가며 모두 말하고 이어 차자 중에 서로 의심한 몇 곳을 그대로 말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의아해 하던 생각이 차자 가운데에 언급되었으니 태연스레 그만둘 수 없다.’ 하였더니, 명길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피차간에 서로 의심을 확 풀었으니 나는 의당 출사할 것이다. 그러니 자네도 인피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하겠다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신을 의심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모두들 신이 즉시 인피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 하니, 신이 어떻게 끝내 입다물고 스스로 해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명길이 신을 의심했던 것은 단지 의논이 갑자기 나와 오랫동안 지속되던 것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갑자기 나왔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그는 전장(銓長)이 되어 인재 쓰는 것을 시종 관여했으므로 잘못 천거한 책임을 자연 그에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으니, 비록 총재(冢宰)의 반열에 있지만 굳이 여러 날을 계획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은 뒤에 의견을 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했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신은 생각하기를 ‘중신을 탄핵하는 것은 다른 일반 관원과 견줄 수 없으니, 의논이 나온 뒤 하루 이틀 만에 그만 둘 수 없다.’고 하여, 동료들이 모두 모인 뒤에야 비로소 간통(簡通)하여 정계(停啓)하였던 것입니다. 곡절의 전말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대개 최명길의 차자는 신과 서로 만나보기 전에 올린 것입니다. 신이 그와 한번 만나 얘기한 뒤로는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처신을 잘못하여 사람들에게 신임을 잃었고 한번 행동하는 사이에 뭇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이 쌓였는데도 일찍 스스로 인피하지 못했으니, 너무나도 염치없이 자리에 연연한 셈입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2월 7일 기축
지평 이해창(李海昌)이 아뢰기를,
"강학년을 율에 따라 처벌하자고 청하였으니, 그렇다면 그를 잘못 천거한 책임을 논하는 것은 자연 관례에 따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연계한 것도 사세가 마침 그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간이 일을 논하는 데에는 본디 정해진 법규가 없으니, 정계를 빨리 하거나 늦게 하는 것은 논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히 찾아가서 해명한 것은 언관의 체면을 손상한 것이니, 이척연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12월 8일 경인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홍망(李弘望)이 치계하기를,
"왜사(倭使) 등지승(藤智繩)이, 가지고 온 서계(書契)는 바로 내보이지 않고 단지 말로만 마상재(馬上才) 수십 인을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상경하게 해 달라고 하였는데, 그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등왜(藤倭)가 나온 뒤에 처음 말한 것이 마상재를 구하는 것뿐이었으니, 그렇다면 동래에 있으면서 조정에 아뢰어도 됩니다. 굳이 상경한 뒤에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만일 기용(器用)과 금수(禽獸) 따위의 물건일 것 같으면 편의에 따라 응해 주어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은 전에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결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서계의 내용을 자세히 안 뒤에야 말을 만들어 회답할 수 있을 것이니, 그들을 잘 타일러 속히 서계를 올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12월 9일 신묘
양사가 강학년의 일을 연계하니, 이때에 이르러서야 관작을 삭탈하라고 답하였다.
인평 대군(麟坪大君) 길례(吉禮) 때의 상격으로 주혼(主婚)인 봉림 대군(鳳林大君)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사자(使者) 풍해군(豐海君) 호(浩)와 가례청 당상(嘉禮廳堂上) 홍서봉(洪瑞鳳)·이경인(李景仁)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이홍주(李弘胄)·윤흔(尹昕)·이상길(李尙吉)과 도청(都廳) 이해창(李海昌)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당상 조익(趙翼), 감역관(監役官) 조유일(趙惟一)·김익진(金翊震)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도청 정뇌경(鄭雷卿)·김상빈(金尙賓), 감역관 김득종(金得宗)에게는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張)씩을, 집사(執事) 김정(金鼎) 등에게는 각각 부장궁(不粧弓) 1장씩을 하사하고, 도청 이성신(李省身), 봉례(奉禮) 채형(蔡衡)은 모두 가자(加資)하며, 감역관 이정관(李廷觀)은 승서(陞敍)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0일 임진
동래 부사 이홍망이 치계하기를,
"신이 관(館)에 가서 등왜를 보니, 등왜가 말하기를 ‘관백(關白)은 유희(遊戱)를 꽤나 일삼는데, 마상재(馬上才)를 보고 싶어서 도주(島主)로 하여금 귀국에서 구해 오게 하였다. 이에 도주는 감히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즉시 우리들을 보냈는데, 우리들은 직접 상경하여 아뢰고자 한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만약 허락할 만한 일이라면 당신이 이곳에 있더라도 조정에서는 허락할 것이고, 들어줄 만한 일이 아니라면 당신이 상경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등왜가 말하기를 ‘지금 직접 갈 수 없다면 홍희남(洪喜男)을 만나 곡절을 자세히 말하고 싶다.’ 하기에, 신이 다시 답하기를 ‘여러 장수들이 모였을 때에 관백이 그의 재주를 펴도록 해 구경하려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가 구하는 것은 필시 당신 나라에 없는 기술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은 우리 나라에서도 드무니 도주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된다. 그리고 관백은 잠시 동안만 보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계획인가?’ 하니, 등왜가 말하기를 ‘관백은 한두 번만 보려는 것일 뿐이다. 결코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리는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예조가 들여 보내자고 계청하자, 상이 따랐다.
일본에서 온 서계(書契)는 다음과 같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은 절하고 조선 예조 상국(相國) 합하(閤下)에게 아룁니다. 몇 해 동안 동쪽 일에 대해서 너그러이 잘 보아주셨는데 세선(歲船)이 갔다 돌아오는 편에 삼가 물어서 신의를 확인할 때마다 매번 위로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아룁니다.
우리 전하는 귀국의 기마술을 보고 싶어 신에게 귀국의 말 잘 모는 자 한두 명과 역관 1인을 보내달라고 청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제 등지승(藤智繩)을 보내 측근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게 하니, 바라건대 아끼지 말고 쾌히 승낙하여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기예를 먼 곳에 전파시킬 수 있는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나머지는 보낸 사신이 말씀드릴 것입니다. 살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무신 당상(武臣堂上)으로 초하루 시사(試射)에서 1등하여 자급이 올라간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비단 작상(爵賞)이 너무 남발될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사하는 날에 약간이라도 기세 있는 자가 한번 1등하여 분수(分數)를 얻었으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여 활쏘기를 끝마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계속 장원을 차지하여 관질(官秩)을 올릴 바탕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비록 활을 잘 쏘는 자가 있더라도 욕하고 비방하는 것을 피해 함께 경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라에 기강이 없어 폐습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통탄할 만합니다.
상격(賞格)에 있어서도 그때그때 아뢰어 정하는 것이 바로 법전(法典)으로 원래 일정하게 가자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선조(宣祖) 때에도 말과 활을 하사한 경우가 많았으니, 명기(名器)를 아끼고 중히 여긴 뜻을 오늘날 본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당하 무신(堂下武臣)의 강서(講書)에 대한 논상은 더욱 법전의 본뜻을 잃었습니다.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는 법제상 꼭 강해야만 하는 책이 아니고, ‘다섯 번 고과(考課)에서 상(上)을 받으면 가자하는 조항에 준한다.’는 말은 당상으로 올려준다는 말이 아닌데도 전연 자세히 살피지 않아 그릇된 규정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후로는 당상으로 시사를 해야 할 사람이 돌아가면서 활쏘기를 완료하지 않으면 적발해서 치죄하도록 하고, 세번 계속해서 1등한 자에게도 가자하지 마소서. 그리고 당하관이 강서할 때는 반드시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책으로 하도록 하고, 계속해서 다섯번 통(通)한 사람에게도 법문에 따라 5고에 가계(加階)하는 것에 준함으로써 외람스런 폐단이 없어지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시사와 강서의 상격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다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에 김상헌(金尙憲)이 자주 상의 뜻을 거슬렀는데 물러나 전리(田里)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겸하고 있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과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를 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조에 계하했는데 이때에 와서 이조의 회계로 인하여 체직을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산에 맹수가 있으면 나물을 캐러 가지 못하고 국가에 바른 선비가 있으면 간사한 무리들이 사라지는 것이니, 상헌과 같은 자는 바른 선비라 이를 만하다. 그가 물러가려 한 것은 꼭 세상을 잊으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의당 예로 부르고 정성껏 대우해야 하는데 소장 한번 올리자 바로 면직을 허락했으니, 애석하다. 전(傳)에 이르기를, "약석(藥石)과 같은 자가 떠나갔으니 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으니,066)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8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066] 전(傳)에 이르기를, "약석(藥石)과 같은 자가 떠나갔으니 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으니, : 춘추 노나라의 맹손(孟孫)은 장손(藏孫)을 미워하였고, 계손(季孫)은 그를 사랑하였다. 맹손이 죽자 장손이 슬피 울고 나서 "계손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에게 병이 되고, 맹손이 나를 미워한 것은 나에게 약이 되었다.…… 맹손이 이제 죽었으니 내가 망할 날도 멀지 않았구나." 하였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3년.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산에 맹수가 있으면 나물을 캐러 가지 못하고 국가에 바른 선비가 있으면 간사한 무리들이 사라지는 것이니, 상헌과 같은 자는 바른 선비라 이를 만하다. 그가 물러가려 한 것은 꼭 세상을 잊으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의당 예로 부르고 정성껏 대우해야 하는데 소장 한번 올리자 바로 면직을 허락했으니, 애석하다. 전(傳)에 이르기를, "약석(藥石)과 같은 자가 떠나갔으니 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으니,066)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다.
12월 11일 계사
춘추관 당상인 병조 판서 이홍주(李弘胄),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이 사관이 기록한 일기(日記)을 열람하고 전최(殿最)하기 시작했다.
살펴보건대, 사신은 임금의 잘잘못과 신하의 현사(賢邪) 그리고 시정(時政)의 옳고 그름을 모두 기록한다. 그러므로 역대의 임금이나 재상 중에 흉포해서 제멋대로 하는 자일지라도 사초(史草)를 가져다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간흉 유자광(柳子光)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싫어하여 사화(史禍)를 얽어 만들었는데, 김일손(金馹孫)·박은(朴誾)의 무리들이 모두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다.
중종 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비로소 그 폐단을 고쳤다. 계해년 초에 훈신 김류가 또 본관 당상으로서 사초를 보는 폐단을 열어놓자, 이홍주 등이 준례를 삼아 전최하는 날에 사관이 기록한 일기를 가져다가 점검하는 것처럼 일일이 살펴보았다. 이와 같고서 직필(直筆)하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12월 14일 병신
태백성이 나타났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일 우리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에 본국에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포로들의 사정이 불쌍했기 때문에 전후로 그들을 쇄환(刷還)하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이번 관백이 마상재(馬上才)를 보내 달라고 청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기호에서 비롯된 것이니, 약간의 사람들을 쇄환하는데 반드시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본국에 돌아오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적당히 잘 말하여 일시에 데리고 돌아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전강(殿講)은 신미년067) 에 비로소 신명(申明)해서 으레 봄가을 중월(仲月)에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해에는 10월 25일에 거행하였는데, 이는 중월이 아니었지만 상의 하교에 따라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후엔 국휼(國恤) 때문에 거행할 수 없었습니다. 금년 8월은 의당 거행해야 할 달이었는데 대례(大禮) 때문에 겨를이 없어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연소한 문관들이 평상시 강송(講誦)하는 것은 본조에서 감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당초 사목(事目) 가운데에 무신 전강일은 유생 전강의 예에 따라 정원에서 미리 아뢴다고 되어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제부터는 함께 검칙(檢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5일 정유
태백성이 나타났다.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 【 이서는 제조이고, 신경진은 대장이다.】 이 차자를 올렸다.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들로 훈국(訓局)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데, 비록 변방을 견고히 하여 나라를 지키는 책략은 없지만 병사를 뽑아 훈련시키는 일에 있어서는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겠습니까. 한 사람의 한정(閑丁)을 얻어 항오(行伍)에 편입시키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아주 용감하게 적진에 뛰어들 만한 자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건대, 항왜(降倭)의 자손으로서 일본에 쇄환할 자들은 기예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령만 내리면 죽기를 무릅쓰고 전쟁터로 나가고 은혜를 베풀면 윗사람을 친애하여 목숨을 바치니, 군중(軍中)에 두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일본은 인구가 매우 많다 하니, 그들이 있든 없든 큰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조정에서 글로 정성껏 청한다면 들어주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
지금 도주의 서계에 따라 사람을 보내게 되었고 묘당(廟堂)의 계사 또한 윤허를 받았으니,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우리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역관에게만 의지하는 것은 착실하지 않을 것 같으니, 전에 쇄환했던 사람 중 몇 사람을 뽑아 함께 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쇄환하려는 뜻을 서계 가운데에 간절히 언급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들어주어 많은 사람들을 쇄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근래 저 나라는 사치스런 것만 전념하고 병사(兵事)에는 뜻이 없으니, 혹 완호품(玩好品)을 도주에게 주어 이 일을 주선하도록 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6일 무술
유성증(兪省曾)을 집의로, 송몽석(宋夢錫)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경자
포도청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인심이 사나와 저주하는 변고가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포수(砲手) 박경춘(朴景春)이 와서 고하기를 ‘바로 전에 수구문(水口門) 밖에서, 두 여자가 성 밑에 버려진 시체의 머리를 칼로 잘라 포대에 감추는 것을 보았다.’ 하기에, 바로 쫓아가 잡을 것을 명하였는데, 한 사람은 재빨리 도망가서 못잡고 시체의 머리를 가지고 있던 자만 잡았습니다. 그를 추문(推問)하였더니, 그는 바로 맹인 박귀복(朴貴福)의 비(婢) 춘이(春伊)라는 자였습니다.
그는 공초하기를 ‘종루(鍾樓) 노변에 사는 자근(者斤)이라는 여인이, 그의 사위가 다른 여자를 얻은 것 때문에 저주하려고 나의 주인 박귀복에게 많은 뇌물을 갖다 주며 부탁하였다. 그러자 귀복이 나에게 두골(頭骨)을 구해 오라고 했기 때문에 자근의 비 언덕(彦德)과 함께 가서 일을 하다가 마침 적발되어 붙잡힌 것이다. 그리고 전날에도 양반·상인집 비복들이 귀복의 집을 왕래하면서 저주할 것을 은밀히 도모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여무(女巫) 가시(加屎)와 서리(書吏) 임의신(林義信)도 동참해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간사한 무리들이 원수를 갚으려고 흉악한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꺼리질 않습니다. 지금 공초한 것을 보건대, 박귀복과 가시가 수모자(首謀者)인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니, 끝까지 문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귀복과 자근 및 가시가 모두 곤장을 맞다 죽었습니다. 이는 필시 함께 나쁜 짓을 저지른 자들이 독약을 먹여 지레 죽인 것이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 외의 춘이·언덕·임의신 등은 모두 귀복의 지휘에 따라 저주하는 데 함께 모의한 자들로 그 정상이 극악하니, 해당 관사로 하여금 모두 잡아다가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귀복 등이 지레 죽은 것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당시의 옥졸을 찾아내 엄중히 조사하여 훗날의 폐단을 막도록 하라. 그리고 진고(進告)한 포수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시상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9일 신축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가 치계하기를,
"상평청(常平廳)에서는 일찍이 본도 각 고을의 공물(貢物)을 목면 1필을 쌀 10두로 작미(作米)하여 해빙된 후에 상납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과 여름에 한재가 너무 심해 망종(芒種)이 지난 뒤에야 겨우 파종하였으므로 농사때를 놓쳐 결실이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좌도(左道)의 산군(山郡)은 보통 목면 1필 가격이 쌀 7두이고 우도(右道)의 해변 고을은 5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양전(量田)의 실시로 민간의 곡식이 매우 많이 소모되고 있습니다.
신이 이르는 곳마다 노소의 곤궁한 백성들이 길에 가득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것은 모두 각 아문에게 공물을 쌀로 받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미 상의 뜻을 잘 이어받아 선포하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민심의 소재를 모두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호조가 회계하기를,
"각 아문에서 먼저 가목(價木)을 각사의 주인(主人)에게 주고 각 고을로 하여금 작미(作米)하여 올려보내게 한 것은 백성을 못살게 하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각 고을이 주인이나 혹은 방납(防納)하는 자에게 주는 가격은 각 아문에서 작미하는 수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한 것은 민간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국가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도 감사가 이미 치계하였으니, 도로 작미하는 것을 없애고 모두 목면으로 상납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익희(金益熙)를 봉교로, 조수익(趙壽益)을 대교로, 이현영(李顯英)을 부제학으로, 윤구(尹坵)를 부교리로 삼았다.
12월 20일 임인
김경여(金慶餘)를 헌납으로, 이행우(李行遇)를 대교로 삼았다.
12월 21일 계묘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청대(請對)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날씨가 추워 인견할 수 없으니 만일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서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근래 경기 동남 지경에 대도(大盜)의 침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침해를 그치게 하는 책략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일이 은밀한 것이기 때문에 감히 문자로 진달할 수 없습니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청대하겠습니다."
하니, 내일 들어오라고 답하였다.
12월 22일 갑진
헌부가 아뢰기를,
"양전(量田)을 시행하는 것은 경계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왕도 정치를 함에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합니다. 임진란 이후로 계묘년068) 에 와서야 비로소 거행하였는데, 계묘년부터 지금까지가 또 30년이 흘렀습니다. 그 당시의 측량이 이미 엉성한 데다가 그후 개간한 토지도 매우 많으니, 전결의 소밀(疏密)함이 전과 다르고 민역(民役)이 고르지 않은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한번 다시 측량하여 전결의 소밀한 차이가 없게 한다면 고르지 않은 민역도 이로부터 고르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이 한번의 양전을 실시하면 국가가 점차 잘 다스려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숨겨져 있는 땅을 지금 모두 찾아낸다면 전에 1결을 갖고 있던 자가 불어나 2결로 되기도 하고, 혹은 몇 배까지 될 것입니다. 근래 국가에 일이 많아 민역이 매우 무거웠는데 측량하여 숨겨진 땅을 모두 찾아낸 뒤에도 요역(徭役)의 수를 전보다 경감하지 않는다면 이미 지친 백성들이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삼남 지역의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원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이니, 이 점이 매우 염려됩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측량한 뒤에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공부(貢賦)의 수룰 세밀히 정해, 전보다 결수가 배나 많더라도 공부는 전보다 많이 내지 않게 한다면 전일 1결에 1석을 내던 자가 이제는 반석만 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전에 토지를 숨겼던 자들이 모두 역(役)을 피하지 않아 편파적으로 고생했던 자들의 힘이 좀 펴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변통을 하지 않아 민역이 전보다 배가 되게 한다면, 이는 거두어 들이기만을 일삼는 것으로 근본을 경시하고 말단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입니다.069) 변통을 하느냐 마느냐에 백성의 휴척(休戚)이 달려 있으니, 잘 살펴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세(貢稅)의 수는 본디 정해진 제도가 있으니 더하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습니다. 결(結) 수가 많아지면 세입이 자연 증가되니, 국가에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공물과 잡역에 있어서는 수시로 변통하여 국가에 들어오는 것은 전보다 감소시키지 않고 백성들에게는 내는 것을 줄여 준다면, 이것은 바로 맹자(孟子)의 한 가지만 쓰고 두 가지는 느슨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070) 그러니 지금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공부(貢賦)를 상세히 정하게 하였다가 측량하던 것이 끝나면 바로 시행하는 한편, 민간으로 하여금 국가의 본의가 역(役)을 고르게 하는 데 있지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면,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안정시키고 원망하고 괴로와하는 것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각 고을의 공부를 조정에서 더 정하지 않는다면 외방에서 바치는 것은 자연히 줄어들텐데 굳이 일정하게 정해진 것을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감하고자 한다면 양전하기 전에는 의거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8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농업-양전(量田)
[註 068] 계묘년 : 1603 선조 36년.[註 069] 근본을 경시하고 말단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 《대학(大學)》 전(傳) 구장(九章)에 "덕이란 근본이고 재물이란 말단이다. 그런데 근본인 덕을 경시하고 말단인 재물을 중시하면 이는 백성들에게 쟁탈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한 데서 나온 말임.[註 070] 맹자(孟子)의 한 가지만 쓰고 두 가지는 느슨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 《맹자(孟子)》 진심장 하(盡心章下)에 "국가가 거두는 조세의 종류에는 옷감의 징수, 곡물의 징수, 노동력의 징발이 있는데, 법도 있는 인군은 한 계절에 한 종류만 거두고 나머지 두 종류는 관대하게 해준다." 한 데서 나온 말임.
ⓒ 한국고전번역원
그러니 지금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공부(貢賦)를 상세히 정하게 하였다가 측량하던 것이 끝나면 바로 시행하는 한편, 민간으로 하여금 국가의 본의가 역(役)을 고르게 하는 데 있지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면,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안정시키고 원망하고 괴로와하는 것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각 고을의 공부를 조정에서 더 정하지 않는다면 외방에서 바치는 것은 자연히 줄어들텐데 굳이 일정하게 정해진 것을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감하고자 한다면 양전하기 전에는 의거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상이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을 불러 보니, 명길이 아뢰기를,
"전에 도적이 횡행하기 때문에 기전(畿甸)에 특별히 토포사(討捕使)를 설치하여 적발하고 잡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심상하게 보아 넘기고 제대로 거행하지 않아 오늘날에 와서는 무리가 불어 패거리를 모으며 거리낌 없이 횡행하는데도 감히 막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승지 서경우(徐景雨)가 들은 것도 신이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찮은 조무라기 도둑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다스리는 방책은 적격자인 수령을 구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지난번 남원(南原)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박정(朴炡)이 부사가 되어 70∼80인을 적발하여 죽인 덕택에 남원은 지금까지 무사합니다. 지금에 있어서는 별도의 조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수령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임기응변으로 힘껏 잡아들이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광주(廣州)·이천(利川)·충원(忠原)·여주(驪州) 같은 곳의 수령을 우선 가려 보내는 것이 급무일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였다. 서경우(徐景雨)가 아뢰기를,
"어떤 사람이 와서 전하기를, 충원에 사는 전 인의(引儀) 박홍업(朴弘業)의 사위가 우연히 기마적(騎馬賊) 수십 명을 보았는데 이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자 며칠 안되어 적도들이 그 집을 쳐들어가 홍업의 사위를 난자하였으며, 같은 마을의 5∼6가구 사람들은 이로 인해 성안으로 철수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거리낌 없는 방자한 행동을 이에 의거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놀랍다. 그런데 수령들은 무엇 때문에 잡아들이지 않아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는가?"
하였다. 경우가 아뢰기를,
"그때에 홍업이 관가에 고발해서 몇 사람을 잡아 죽였으나, 끝내 정범(正犯)은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고, 명길은 아뢰기를,
"도적들은 본래 근거지가 없고 조금이라도 혐의하거나 원망하면 반드시 바로 복수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히 말을 하지 않습니다. 수령도 태연스레 세월만 보내며 구차하게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혹 붙잡더라도 곧바로 석방해 줍니다. 지금 시기를 놓치고 다스리지 않으면 더욱 만연되어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중에는 반드시 위협 때문에 따른 자도 있을 것이다. 만약 풀을 베고 사냥하듯 잡아들이면 피해가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미칠 것이고, 반대로 그냥 놔둬 버리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양민에게 해를 끼칠 것이니, 참으로 작은 근심거리가 아니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이천 부사 허휘(許徽)는 성심껏 기찰(譏察)했기 때문에 도적이 있을 경우 모두 적발하였습니다. 만일 허휘 같은 자 몇 명을 구해 잡아들이게 한다면 기전(畿甸)은 근심할 것 없이 보전될 것입니다."
하고, 경우는 아뢰기를,
"허휘의 외모나 행동은 보통 사람만도 못한데 도적을 잡는 데 있어서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휘는 도적 잡는 일 뿐만 아니라 국사에도 마음을 다하고 있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여주·이천·충원 세 고을입니다. 전 목사 송흥주(宋興周)는 전에 충원 목사로 있었는데 그가 백성들에게 베푼 사랑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가 비록 식견은 없으나 재주와 국량은 취할 만합니다. 그리고 원주 목사(原州牧使) 이배원(李培元)은 재주와 기량이 모두 넉넉하니, 흥주를 충원에 있게 하고 배원을 여주로 옮겨 보낸다면 적임자를 얻게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흥주는 전에 죄를 받은 자가 아닌가? 비록 재간과 국량이 있더라도 재주만을 믿고 법령을 잘 받들지 않는다면 신중히 도모하여 일을 이루는 자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지금 만약 이렇게 전에 없던 규례를 열어 놓는다면 죄 있는 자가 요행히 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밖에 어찌 합당한 사람이 없겠는가. 대신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부묘(祔廟)에 대한 계사를 오랫동안 내려보내지 않으시므로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이 이미 내렸고 묘호(廟號)도 정해졌는데 단지 희로(喜怒)의 감정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모름지기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속히 거행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명길이 또 아뢰기를,
"처벌된 사람들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중외에서는 모두 임금이 잘못한 탓이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심이 흩어지고 재이가 계속 나타나니 속히 방환하여 찰방이나 수령으로 있게 하다가 점차 거두어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또 답하지 않았다.
12월 26일 무신
간원이 아뢰기를,
"장령 임효달(任孝達)은 고을을 두루 걸쳤는데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대각(臺閣)에 여러 번 있었는데도 볼 만한 점이 없었습니다. 충원(忠原)에 제수되었을 때는 양전(量田)의 일로 업무가 번잡한 때였는데, 일거리 많은 것을 싫어하여 고을에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정사(政事)에서 마침 계청으로 인하여 대관(臺官)으로 옮겨 제수하였습니다. 포상할 만한 일도 없는데 풍헌(風憲)의 직에 발탁되었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8일 경술
호차(胡差) 마부대(馬夫大) 등이 종호(從胡) 1백 13명을 데리고 입경하여 옛 병조를 관소로 정하고 머물렀다.
12월 29일 신해
구관청(勾管廳)이 아뢰기를,
"금(金)나라 차관(差官)이 신 등에게 말하기를 ‘가지고 온 은자(銀子) 9백여 냥으로 여러 색의 금단(錦段), 담비가죽, 종이, 각양 채색(彩色), 각종 약물(藥物)을 사고자 하니 반드시 미리 분부해 달라.’ 하기에, 신 등이 답하기를 ‘당초에 양국이 서로 약속하기를 「팔 물건이 있으면 허락하고 없으면 억지로 요구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 약조가 이미 굳게 정해졌으니, 지금은 이에 의거해서 해야 한다. 그리고 대단(大段)071) 과 채색은 토산품이 아니어서 전에 이미 구하기 어렵다는 뜻을 극진하게 말하였으니, 그대들도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나올 때에 한(汗)이 3만 개의 생리(生梨)와 2만 개의 홍시(紅柿)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전일 들여 보낸 수가 매우 약소하니, 수에 맞게 사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金)의 차사(差使)인 정명수(鄭命壽)가 작은 쪽지를 내보였는데, 바로 《삼국지(三國志)》·《춘추(春秋)》 및 필묵 등의 물건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필묵이나 책 중의 구하기 쉬운 물건은 구해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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