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3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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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계축

대사간 이준(李埈)이 상소하기를,
"이번에 예제(禮制)를 의논함에 있어, 전하께서 인정에 가리워져 훈구 대신의 말에까지도 노여워하며 거절하셨으니, 삼사(三司)가 잇달아 폄척을 당하면서도 논쟁을 하는 것은, 오직 상께서 잘못된 예를 거행하여 뒷날 기롱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이지 참으로 털끝 만큼도 그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해와 달이 새로 밝아지듯이 진노를 푸시고, 일을 논하다가 외직으로 밀려난 자 및 변방으로 쫓겨난 자를 속히 용서하시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언로가 트이고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에 복이 됨이 그 얼마나 크겠습니까.
신이 근간에 강학년(姜鶴年)의 상소를 본 바, 너무도 잘못되었습니다. 우리 전하의 거룩한 덕업과 신성한 공적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뛰어나시어, 참으로 천지(天地)와 합치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이런 괴이한 의논을 내어 마치 성덕(聖德)에 무슨 누(累)라도 있는 양 말하고 있으니, 양사(兩司)가 죄주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옛날에 순(舜)은 비방목(誹謗木)을 세워서 자기의 잘못을 들어 보았고 한 문제(漢文帝)는 요언(妖言)을 금지하기 위하여 죄율을 무겁게 했었으니, 성상께서 대간의 논의를 따르지 않은 것은 실로 훌륭한 일입니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도량을 더욱 넓혀 거친 의논도 용납하기를 힘쓰소서. 이것이 신이 성상께 바라는 바입니다.
신이 길을 오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선유(先儒)는 이것을 아랫사람들의 의사가 막힌 데에 대한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날씨가 너무 따스하기만 하여 겨우내 얼음이 얼지 않고 서쪽 오랑캐가 더욱 날뛰고 재변이 거듭 일어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각오를 더한층 단단히 하소서. 신이 가마에 실려서 길을 나섰다가 30리를 채 못와서 기력이 다하여 다시 더 전진할 계책이 없기에, 감히 평소에 떠올랐던 생각 한두 가지를 대충 진술함과 동시에 체직시켜 주기를 빌어서 남은 목숨을 보존할까 합니다."
하였는데, 이조에 계하하였다.

 

1월 3일 갑인

간원이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여쭈는 도리는 공적인 일이라면 공적으로 말하는 것이 옳고 군사 기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대신에게 의논하여 함께 입대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난번 이조 판서 최명길이 혼자서 입대를 청한 것은, 일의 체모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혼자 입대하여 비밀히 아뢰는 길이 이 일로 인해서 열리게 된다면 그 해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최명길이 도목정(都目政)이 끝난 뒤에 구례를 따르지 않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 경솔히 입대를 청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작은 잘못이니 추고까지 할 것은 없다."
하였다.

 

홍명구(洪命耉)를 대사간으로, 김덕승(金德承)을 장령으로, 구봉서(具鳳瑞)를 부응교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쌓은 뜻은 본시 유민을 보호하여 의주(義州)를 수습할 터전을 마련해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근래 다시 모여든 유민이 이미 1천여 호에 이르는데 새로 옮겨 와 의지할 것이 없어서 살 길이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올해의 의주 둔전 곡식 2만여 석은 실로 예상 밖에 생긴 물건인데, 백성들이 참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곡식은 쌓아 두어 무엇하겠습니까. 수천 석만 인출하여 새로 입주한 백성들을 보호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월 6일 정사

상이 인정전에 나가서 금(金)나라 사신 마부대(馬夫大) 등을 불러 보았다.

 

1월 7일 무오

예안현(禮安縣) 월명담(月明潭)에 이틀 동안 물줄기가 끊겼는데, 월명담은 곧 낙동강의 상류로서 경상도 내의 큰 강이다.

 

1월 8일 기미

이조 판서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신이 못난 사람으로서 이조의 관직에 있은 지 4년이 되어, 천도(天道)로 보나 인사(人事)로 보나 영광이 극에 달하였기에, 남다른 은수(恩數)가 또 내려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병상에 엎드렸던 몸을 벌떡 일으켰고 다시 황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대저 은총을 탐내는 것은 소인의 상정(常情)이고 몸을 다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는 것은 미신(微臣)의 지원(至願)인데, 신이 이 관직을 전담하고 있은 지가 이미 오래지만 일은 대개가 잘못되고 정치는 볼 만한 것이 없어서, 세도(世道)에는 아무 보탬이 없이 비방의 소리만 더 높아 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데도 어떻게 감히 전형의 자리를 사유물로 알고 한결같이 무릅쓰고 머물러 있어서, 스스로 나라를 저버리고 몸을 그르치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완전히 쌓은 지가 이미 오래인데 소속된 경기 다섯 고을의 군병이 한번도 연습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산성의 방향과 지킬 곳이 어딘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뒷날 만약 위급한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봄갈이가 시작되기 이전에 미리 소속된 군병을 날짜별로 소집하여 성첩에 배치시켜서 수비하는 방도를 알게 하소서. 신도 나가서 사열을 하고 이어 호궤하겠습니다."
하니, 가을이 되거든 거행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황 감군(黃監軍)이 청구하는 배는 의당 힘을 다하여 뒷받침해 주어야 하나, 물력이 모자라서 겨우 40척을 충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배가 튼튼하지 않다면 반드시 그들의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도로 하여금 아주 완전한 배로 선정한 다음, 집기를 잘 갖추어서 들여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경상도에 10척, 전라도에 15척, 공청도에 10척, 경기에 5척을 배정하였으며, 배 한 척의 가포(價布) 각 2백 필 중 약간을 덜어 내어 격군(格軍)의 삯을 주되, 차사원을 정하여 해주(海州)의 선소(船所)에 교부하게 한 다음, 황해도로 하여금 차례차례 가도로 들여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다시 생각해보니, 배가 40척이라면 격군을 5백여 명은 써야 하는데, 황해도의 힘만으로 이 군병을 다 조발하여 일제히 들여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경상·전라 두 도로 하여금 배의 대소에 따라 수수(水手)와 격군을 13명 또는 14∼15명을 배정하여 한 명당 가포 네 필을 징수한 다음 해주 감영으로 수송하여, 이것으로 그 지방에 사는 백성을 모집하여 대신 가도에 보내는 방법을 쓰도록 하고, 공청·경기 두 도는 길이 조금 가까우니 그 도의 수수와 격군을 가도에 도착시켜도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양전(量田)으로 해서 일이 많은 이때에 또 민간에 징수를 한다면 민원이 적지 않을 것이니, 해서(海西) 지방에서 징수한 물자를 적당히 내주어서 삯을 주고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0일 신유

헌부가 아뢰기를,
"십수년 이래 중외에서 계문한 충신·효자·절부가 그 수효가 적지 않았는데 국가에 일이 많은 까닭에 여태 정표(旌表)를 못하여, 선행을 닦은 사람이 포상의 은택을 입지 못하고 일반 백성들이 보고 본받을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중외에서 전후하여 계문한 것을 가져다 경중에 따라 초록하여 거행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지난해에 내린 시상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처 시행치 못한 것도 더러 없지 않을 것이니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포상에 해당한 사람을 이전대로 정문·상직(賞職)·증직(贈職)·복호(復戶)·면역(免役)·상물(賞物) 순으로 등급을 나누어 감정하여 즉시 정부에 첩보(牒報)하여, 품재(稟裁)를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폐조 때 간행한 《삼강행실(三綱行實)》은 대개가 적신(賊臣)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때 부당하게 기록된 무리는 삭제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행실이 뛰어난 사람까지 일체 몰아서 매몰시킬 수는 없으니, 원 책을 가져다 그중 포상하기에 합당한 자를 초출해 내어 계품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월 11일 임술

정언 송몽석(宋夢錫)이 아뢰기를,
"양사가 강학년(姜鶴年)의 일을 합계한 뒤에 옥당에서 한 번의 진차(陳箚)가 있고는 다시 아무 말이 없으므로 의당 서로 바로잡아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되겠기에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였더니, 동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한 탓입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홍문관 【 응교 심지원(沈之源), 부응교 구봉서(具鳳瑞), 부교리 윤구(尹坵), 수찬 정뇌경(鄭雷卿), 부수찬 이일상(李一相)이다.】 이 이에 상차하기를,
"본관에서도 강학년에 대한 안율(按律) 논의를 가지고 진작 차자를 진달하였지만 오랫동안 유음(兪音)이 없어서 막 다시 차자를 올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저께 헌부의 많은 관원이 본관의 관리를 불러다 놓고 차자를 올릴 것인지의 여부를 캐어 물어보았는데, 대저 삼사는 똑같은 격의 관서이므로 서로 공경을 하여야 됨에도 마치 상사가 해조(該曹)에 분부를 하듯이 하였습니다. 본관으로서는 이 때문에 즉시 차자를 올린다면 마치 본래 아무 의견도 없다가 한갓 헌부의 명령이나 받드는 것처럼 되겠고, 이 때문에 멈춘다면 역시 서로 겨루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공론을 크게 저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금방 회의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송몽석의 피혐 사연을 얻어 본 즉 ‘책임만 메우고 어물어물하며 할 말을 다 하지 않는 것은 숨김없이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강학년의 죄는 왕법으로서 꼭 목을 베어야 할 일이자, 신하로서 다 같이 분개해야 될 일입니다. 신들이 아무리 모자라기로서니 시비와 호오를 분간하는 판단이야 어찌 송몽석만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드러나게 비난을 받았으니 신들을 삭직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즉각 이것을 가지고 옥당을 탄핵하자, 답하기를,
"그저께의 소차(疏箚) 중에 호원(胡元)에 비유한 내용도 있고 【 김류의 차자.】 이세(二世)에 비유한 내용도 있었는데도 【 홍무적(洪茂績)의 상소.】  양사가 모두 이를 그르다고 하지 않더니, 유독 강학년의 ‘포악함을 바꾼다[易暴]’는 말에는 이처럼 분개하고 나서니, 내가 실로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강학년의 말이 설혹 조금 더 심하기로서니, 저들이 아무 죄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사람만이 중죄를 받아야 되겠는가. 말이 비록 차서는 없더라도 말로 가지고 죄를 얻게 된다는 것은 실로 좋은 일이 아니다. 옥당이 연계(連啓)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보도(輔導)하는 직임에 합당함에도, 너희들이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논핵하기까지 하니, 너무도 부당한 처사이다."
하였다. 그 이튿날의 합계에 대해서 답하기를,
"이세와 호원의 죄가 걸(桀)·주(紂)보다 더 무거운데도 이를 임금에게 비유하는 것이 모두 과격한 논리가 아니라면 무왕에게 비유한 사람은 더더욱 죄될 게 없을 것이다."
하였다.

 

1월 12일 계해

정언 홍주일(洪柱一)이 인피하기를,
"옥당이 강학년의 일에 대하여 이미 한 차례 차자를 올렸으므로 전혀 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옥당을 탄핵한다면 모르는 자는 반드시 양사가 강학년을 공격하자 옥당이 강학년을 구제하고 나섰기 때문에 양사가 다시 옥당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므로, 시비가 혼란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신의 소견은 이러할 뿐입니다. 동료들이 무시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신이 어찌 감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간 홍명구(洪命耉)가 인피하기를,
"그저께 동료들이 ‘합계를 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옥당이 아직 연차(連箚)를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서로 바로잡아 주는 것은 도리에 합당한 일이다.’라고 합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당연히 연차해야 될 때 연차를 하지 않은 처사는 스스로 그 체모를 잃은 것이지만 공론에는 실로 손상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헌부가 일찍이 간통(簡通)을 하여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간통을 하여서 마치 강제로 정하듯이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동료들이 소견이 서로 다르다 하여 인피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못난 신이 부당하게 수석에 앉아 있기 때문에 빚어진 사태입니다."
하고, 사간 정태화(鄭太和)는 인피하기를,
"신이 질병으로 해서 궐내에 나오지 못하고 헌부의 관리를 시켜서 전계(傳啓)하였습니다만, 신도 죄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헌 조익(趙翼), 집의 유성증(兪省曾), 장령 윤전(尹烇), 지평 홍명일(洪命一)·이해창(李海昌)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의 옥당 계사를 본 바, 신들이 홍문관의 관리를 불러다 문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합계를 한 지가 이미 석 달이 되었는데도 옥당이 한 번 진차한 뒤로 다시 한 마디의 말도 없는 것이 마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인 듯하기에, 신들이 일찍이 이러한 내용으로 간통을 하고 또 홍문관의 관리를 불러서 진차 여부를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홍문관 관리를 불러다 문초하여 마치 상사(上司)가 해사(該司)에 분부라도 하듯이 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니, 신들이 적이 괴이쩍습니다. 그리고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은 바, 미안스런 하교가 많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진언하는 신하는 인증 또는 비유를 함에 있어 비록 과격한 데가 있더라도, 그 뜻이 간쟁에 있어서 였다면 죄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년의 말은 참으로 너무도 패악스러웠으니, 어떻게 과감히 직간하는 무리로 볼 수 있겠습니까. 옥당은 신들을 두고 서로 공경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성상의 비답에서도 또 부당한 의논을 한다고 물리치셨습니다. 신들이 어떻게 감히 이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장령 김덕승(金德承)이 처치하기를,
"송몽석·홍명구는 출사토록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송몽석도 체차하라."
하였다.

 

1월 16일 정묘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상차하기를,
"강학년의 상소 속의 말들은 놀랍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이폭역폭(以暴易暴)’이라는 말은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혈기가 있는 자라면 의리상 다 같이 분개하고 미워하여야 됨에도, 어떤 이는 자신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버젓이 구제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공론을 담당하고 있는 옥당까지도 애당초 시비를 모르지는 않았을 터임에도 서둘러 분변해 배척하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전(傳)에 ‘임금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가 있거든, 마치 새매가 새를 쫓듯이 몰아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로서 이 말에 부끄러움이 없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삼가 근일의 앞뒤 성비(聖批)를 볼 때, 한갓 허명(虛名)만 숭상하고 실화(實禍)는 생각하시지 않기 때문에, 공론은 펴지지 않고 이의만 만발하여 흉패한 무리들이 더더욱 꺼리는 바가 없다고 봅니다. 신은 삼가 안타까와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강학년의 말이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나는 말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싶지는 않다.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고서 분개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라."
하였다. 이리하여 대사간 홍명구, 정언 유황 등이 함께 인피하였는데, 본원이 출사시킬 것을 청한 바, 출사를 하고 나서 곧장 아뢰기를,
"강학년이 부도한 말을 조금도 서슴지 않고 군부를 폄욕(貶辱)한 만큼, 신자로서 의리상 같은 말로 물리쳐야 함에도, 전 지평 유진(柳袗)은 이내 ‘그가 경솔히 말하였다.’고 하고, 또 ‘오직 할 말을 다 하려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학년의 말이 경솔한 데서나 또는 할 말을 다 하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면 이는 학년을 죄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곧다는 명예를 구하려고 했다는 말은 그의 본뜻이 아닌 듯하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강학년의 말이 곧다는 명예를 구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과연 실제로 보고 얻은 바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진은 유식한 사람으로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대의를 모르지 않을 것인데도 공론이 한창 일어나던 때에 감히 스스로 이의를 제기하여 애써 두둔하였으니, 만약 그냥 두고 죄를 주지 않는다면 멋대로 논의하는 무리들이 앞으로 징계받을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삭탈 관작하소서. 그리고 전 정언 이시만(李時萬)은 일찍이 학년에 대한 논계에서 ‘부도(不道)’ 두 글자를 지우고 고쳤으니, 시만의 생각에는 학년의 일을 말에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고 여겼단 말입니까. 소견이 그처럼 혼몽하여 시비를 전도시켰으니, 파직을 시켜 다시 서용치 말아야 합니다."
하니, 모두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이성구(李聖求)를 이조 판서로, 정백창(鄭百昌)을 도승지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사헌으로, 강대수(姜大遂)를 집의로, 송시길(宋時吉)을 장령으로, 정태화(鄭太和)·유성증(兪省曾)을 교리로, 송희진(宋希進)·이기발(李起浡)을 지평으로, 심지한(沈之漢)·유황(兪榥)을 정언으로, 김령(金坽)을 사간으로 삼았다.
이성구는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인데, 행신과 처사는 다른 사람에 미치지 못하나 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일찍이 병조 판서에 발탁되었다가 유백증(兪伯曾)의 논박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 와서 이조 판서의 자리가 비었는데, 상이 특별히 명하여 종2품 중의 사람을 더 천망하라고 하므로,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성구 및 그의 아우 민구(敏求)를 갖추어 의망한 바, 성구가 이 관직에 제배되니, 여론이 좋지 않게 보았다.

 

황해 감사 남선(南銑)이 해주(海州)에서 돈을 주조토록 할 것을 청하고, 수원 부사 윤지(尹墀)도 민간에게 돈 주조를 허락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1월 18일 기사

정세구(鄭世矩)를 우승지로, 박수홍(朴守弘)을 장령으로, 성여관(成汝寬)을 헌납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성구가 세 차례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이민구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전형(銓衡)하는 자리에 참여하여 강학년을 주의한 잘못은 실로 판서 최명길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유독 신만 대간의 비평을 면하였기에 마음속으로 늘 부끄럽습니다. 하찮은 학년의 패망스러운 말은 당연히 준엄한 국법으로 다스려야 함에도 성상의 도량이 하도 넓으셔서 심지어 선비를 죽이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셨으니, 학년이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혀를 물고 죽었을 것입니다. 합계한 논의의 사연이 너무도 준엄한데, 신은 학년을 발탁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여느 사람과 같이 얼굴을 들고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관직에서 내치소서."
하였는데, 본부가 처치하기를,
"진퇴를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장관에게 달려 있는 만큼, 민구에게는 조금도 혐의가 없습니다.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이민구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전형(銓衡)하는 자리에 참여하여 강학년을 주의한 잘못은 실로 판서 최명길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유독 신만 대간의 비평을 면하였기에 마음속으로 늘 부끄럽습니다. 하찮은 학년의 패망스러운 말은 당연히 준엄한 국법으로 다스려야 함에도 성상의 도량이 하도 넓으셔서 심지어 선비를 죽이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셨으니, 학년이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혀를 물고 죽었을 것입니다. 합계한 논의의 사연이 너무도 준엄한데, 신은 학년을 발탁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여느 사람과 같이 얼굴을 들고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관직에서 내치소서."
하였는데, 본부가 처치하기를,
"진퇴를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장관에게 달려 있는 만큼, 민구에게는 조금도 혐의가 없습니다.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2일 계유

달이 심후성(心後星)을 가렸다.

 

1월 26일 정축

대신·육경·관각 당상·삼사 장관에게 명하여, 빈청에 모여서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입묘 의절(入廟儀節) 및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세차 속호(世次屬號)를 의정케 하였다. 전에 예조가 부묘 도감을 설치하고 또 성종 대왕의 속호를 정하였는데, 상이 삼사가 오랫동안 정론(停論)하지 않은 데 분노를 품고 결정하지 않다가 이때에 와서 도감 관원을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좌참찬 한여직(韓汝溭), 우참찬 박동선(朴東善),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 병조 판서 이홍주(李弘胄), 공조 판서 심기원(沈器遠), 대제학 최명길(崔鳴吉), 제학 조익(趙翼), 대사헌 이민구(李敏求), 대사간 전식(全湜) 등이 회의하고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기(傳記)를 상고하여 본 바, 왕이 사친(四親)의 사당을 세운다는 것은 곧 고조·증조·조·부의 사당을 말하고, 여기에다 영원히 조천(祧遷)하지 않는 시조의 사당을 보태어 오묘(五廟)가 되는 것이며, 아무리 대수가 다하여 조천을 하여야 될 대상이더라도 참으로 훌륭한 공덕이 있어서 더 받들 만하다면 또한 조천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와 선제(宣帝)에 대해서는 다 같이 대수가 대하여 조천할 즈음에 가서 뭇 신하들에게 의논하여 세실(世室)에다 함께 받들었으니, 이는 증거가 될 만한 고사입니다. 성종 대왕께서는 왕위를 누리신 지 30년에 몸소 태평성대를 이루시어 제도와 문물이 화려하게 빛났고, 깊은 사랑과 넓은 은택이 사람의 살속에 젖어들었기에 백년 뒤인 오늘날에까지도 그 은덕의 칭송소리가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 유흠(劉歆)이 이른 바, 후덕한 자의 빛나는 광명이라 하겠습니다. 불천위로 받들어서 세실에 모신 열성(列聖)과 함께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나란히 하는 일은 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합당한 일입니다. 뭇 사람의 의논이 다 이같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온(鄭蘊)을 이조 참판으로,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최혜길(崔惠吉)을 승지로, 윤구(尹坵)를 헌납으로, 유영(柳潁)을 수찬으로, 김시양(金時讓)을 강도 유수(江都留守)로 삼았다.

 

1월 27일 무인

대사간 전식이 아뢰기를,
"일찍이 짤막한 소를 올린 바, 말 표현이 잘못 되어서 의논이 파다하였는데, 어찌 감히 외람되이 언관의 자리를 맡아 남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본원이 처치하기를,
"언관을 차지하고 있으면, 품고 있는 생각을 곧고 분명하게 아뢰어, 숨김이 없어야 하는데도 이전에 올린 소는 말뜻이 흐릿하여 마치 떠보는 듯하였으니, 물의의 공격을 받아 마땅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보다 앞서 상이 하교하기를,
"옛말에, 꼬리가 크면 흔들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서인(西人)이 집권한 지가 오래니 당연히 흔들기가 어렵겠지."
하였다. 이 때문에 전식이 ‘잠소 묵탈(潛消嘿奪)’ 등의 말로 상의 뜻을 떠보려 하였는데, 공론이 들끓어 서로 시새우고 겨루는 작태가 보인다고 하자, 전식이 어쩔 수 없이 인피하여 체직된 것이다.

 

1월 29일 경진

김덕함(金德諴)을 대사간으로, 이식(李植)을 부제학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부교리로 삼았다.

 

1월 30일 신사

예조가 아뢰기를,
"국조 이래로 태조(太祖)의 영정은 외방 다섯 곳에 나누어 봉안하여 한(漢)나라가 군국(郡國)에다 각기 사당을 세웠던 제도를 따르고, 다른 열성(列聖)의 수용(睟容)은 별도로 문소전(文昭殿)에 봉안해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 원종 대왕의 영정은 임신년에 별묘(別廟)를 세울 적에 비로소 숭은전(崇恩殿)에 봉안한 것인 바, 이제 부묘(祔廟)를 하게 되었으니, 영정을 태묘(太廟)에 함께 둘 수는 없습니다. 만약 숭은전에 그대로 봉안한다면 제사를 받드는 예절과 수직(守直)의 제도는 해조가 감히 함부로 논할 바가 아닙니다. 대신에게 의논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윤방·김상용 등이 아뢰기를,
"원종의 수용은 이조(二祖)의 선례에 따라 강도로 옮겨 모셔야 하지만, 아직은 별다른 사변이 없으니, 구전(舊殿)에 그대로 봉안하고 향사와 수직은 일체 열성 영전(影殿)의 선례에 따름이 좋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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