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3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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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임오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삼성(參星) 밑으로 들어갔다.

 

2월 2일 계미

이경여(李敬輿)를 부제학으로, 정뇌경(鄭雷卿)을 수찬으로 삼았다.

 

2월 3일 갑신

이때 양사가 막 강학년의 일을 논하고 있는 참인데, 수찬 유영(柳潁)이 상소하기를,
"강학년의 상소는 망발이라면 큰 망발이나, 이는 성상을 아낀 나머지 그 보답을 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데 불과합니다. 어찌 털끝 만큼이라도 배반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국조 2백 년 이래 한 명의 착한 이도 죽인 적이 없었으니, 학년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하였는데, 소가 주달되자 안에다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유성이 천시서원(天市西垣)에서 나와 진성(軫星) 속으로 들어갔다.

 

2월 4일 을유

예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왕세자를 책봉한 일 및 인목 왕후를 부묘한 일로 두 경사를 합해, 별시 육백관시(六百館試)를 서울과 지방에 나누어 설행할 것을 입계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이번 원종 대왕 부묘 및 성종 대왕 세실 봉안도 큰 경사가 겹친 것이니, 역시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아서 함께 경축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뭇 사람들의 의논이, 이미 정한 별시를 우선 설행하지 말고, 앞뒤 네 경사를 합쳐서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설행하여 선비 뽑는 길을 넓혀야 마땅하다고 하고, 대신 역시 그것이 옳다고 합니다. 감히 앙품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5일 병술

헌부가 아뢰기를,
"강학년이 부도한 말로 군부를 모욕하였으니, 집법관으로서는 논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수찬 유영이 경악의 신하로서 분수와 의리를 생각지 않고 감히 이론을 제기하여 학년을 구제하려 들었으니, 거리낌없이 방자한 그의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영을 삭탈 관작하소서."
하고, 간원 역시 이것을 논계하였는데,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여러 날 논계하자 이에 따랐다.

 

이조 참의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여 세 가지 일을 아뢰었다. 첫째는 큰 뜻을 세우는 일[立大志]이고, 둘째는 대신을 권면하는 일[勗大臣]이고, 세째는 언로를 여는 일[開言路]이었는데,
"인심이 원망하여 이반되고 백성이 극도로 고생을 겪는 것은 전하께서 안민(安民)에 뜻을 두지 않아서이도, 조정이 날로 격하되고 명기(名器)가 날로 문란하여 가고 있는 것은 전하께서 구현(求賢)에 뜻을 두지 않아서이고, 오랑캐에게 화친을 청하고 세폐(歲幣)가 날로 증가되고 있는 것은 전하께서 적을 방어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아서이고, 경연을 열어도 침묵만 지키는 것은 전하께서 묻기를 좋아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아서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획기적으로 분발하시어 기어코 안으로 선정을 닦고 밖으로 외침을 물리치겠다는 다짐을 하신다면 태평의 정치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이 모두 우유부단하고 고식적이어서, 임금에게 허물이 있어도 규간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나라의 형세가 망해가고 있는데도 구제할 방책 하나 내지 못합니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도 남의 비난을 들을까 염려하고, 한 마디 말을 하는 데도 남의 노여움이나 사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어렵고 위태한 상황을 구제하지도 못하면서 벼슬길에 나올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니, 사람됨의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데에 있어서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좋아하는 자는 어물어물하며 구차스럽게 구는 사람들이고 전하께서 싫어하는 자는 정직하고 과감히 간언하는 선비들이라면, 오늘날의 대신을 어떻게 심히 탓할 수 있겠습니까.
언로란 국가의 혈맥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고서 그 몸을 제대로 보존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반드시 일마다 다 시의(時宜)에 맞고 말마다 다 사리에 맞는 것은 아니나, 그 중에 어찌 쓸만한 계책, 충직한 간언이 전혀 없겠습니까. 한 마디의 말이 뜻을 거슬렸다 하여 드러나게 축출한다면, 곧다는 명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는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기대어 고굉(股肱)을 삼을 만한 자는 누구이며, 전하께서 의뢰하여 이목(耳目)을 삼을 만한 자는 누구입니까? 진심으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어느 한 쪽의 말만 치우쳐 듣지 말고 참소하는 말을 믿지 말며, 다른 길로 들어오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선입견을 주장하지 마소서. 마음을 평정하게 하여 사리를 살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규간(規諫)을 받아들이소서. 착한 것을 개진하고 나쁜 것을 막거든 귀를 기울여 들이시고 뜻을 앞질러 비위나 맞추거든 준엄히 꾸짖어 내치소서. 깊이 살피는 것을 사물을 잘 관찰하는 지혜로 여기지 말고, 자주 의심하는 것을 아랫사람을 잘 이끄는 술법으로 여기지 마소서."
하였다. 상소가 주달되자 안에 두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신은 임금이 존경하고 백관이 우러르는 존재이므로 사람마다 함부로 논할 바가 아닌데, 참의 유백증이 대신을 비난하고 경멸한 일은 너무도 놀라운 처사이다. 그 광망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전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죽었다. 박동량은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재간이 있었다. 임진 왜란 때 병조 낭관으로서 의주(義州)로 임금의 피난을 호종하여, 신료들이 다 흩어졌는데도 박동량은 늘 육조의 낭관 및 내승(內乘)과 비변사 낭청을 겸대하고서 조정의 계책을 도왔으므로, 선조(宣祖)가 크게 인정하였다. 25세에 이조 낭관에서 승지로 발탁되었고, 30세에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라 2등 공신에 책훈되었다. 광해군 때 판의금부사로 임자 옥사(壬子獄事)의 국문에 참여하여 평번(平反)하고자 힘쓰다가 당무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계축 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을 때에는, 무인(武人) 정협(鄭浹)이,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칠신(七臣)003)  들과 공모하여 영창 대군을 추대하려 든다고 무고하여, 함께 하옥되었다. 당초 선조의 병세가 위독할 적에 궁인이 무당의 요사스런 말을 듣고 유릉(裕陵)004)  에다 저주를 하였는데, 여러 박씨들이 그 흉계를 꾸민 자를 잡아다 죄를 다스리려 하자 김제남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박동량이 늘 분개했다. 이때 와서 박동량이 공술에다 그 일을 끌어 대어 평소에 김제남과 서로 사이가 나빴던 사실을 드러냈다. 이후 정사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흉도들이 박동량의 이 공술을 들추어 내어 자전(慈殿)에게 죄상을 씌울 근거를 삼았다. 반정이 되자, 말하는 자들이 이것으로 죄를 청하여 극변에 안치하였다. 오랜 뒤에 양이(量移)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풀려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죽었다.

 

2월 6일 정해

사직 대제(社稷大祭)를 거행하였다. 이날 희우(犧牛)가 뛰쳐나와 제관을 떠받았는데, 이우(貳牛)로 대신하니 또 뛰쳐나왔다. 가마솥에서는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2월 9일 경인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2월 11일 임진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참의 유백증의 상소를 보건대 대신들의 어리석고 용렬한 정상을 개진하였으니, 비록 원소(原疏)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해도 감히 태연히 이 관직을 띠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부당하게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여태 물러날 줄 모르고 있다가 이제 유백증으로부터 분명한 지척을 받고 말았습니다. 바라건대 어리석고 용렬한 신을 내치고 훌륭하고 덕망있는 사람을 다시 뽑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들은 모두가 근일에 임명된 사람이 아니고 유백증 역시 딴 나라에서 처음 와서 벼슬한 사람이 아닌데도, 오늘날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마 지난날 천망을 더했던 일을 빌미로 삼아서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불만에서 나온 올바르지 못한 상소는 개의할 것이 없으니, 부디 안심하고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도 상차하기를,
"지난날, 유백증의 상소 중에 이른바 ‘어물어물하며 구차스럽게 보신책이나 쓰고 한번 나오면 물러날 줄 모른다.’라는 말은 신의 실상에 아주 적중한 말입니다. 아무리 영화를 탐내어 이대로 무릅쓰고 있으려 해도, 맑은 조정의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체직하시어 사람들의 뜻에 따르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뜻한 말로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김상용이 또 차자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사연은 잘 알았다. 경들은 모두 충성스럽고 어질며 국가의 안위가 달린 사람들인데, 유백증이 갑자기 감정 섞인 말을 내뱉어 이처럼 동요시키고 있으니, 나로서도 의혹이 없을 수 없다. 현재 국사가 갈수록 더 위태로와지고 있으니 부디 속히 출사하여 성공을 기대하는 나의 성의에 부응하라."
하였다.

 

2월 13일 갑오

주강에 《시전(詩傳)》 백주편(柏舟篇)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지경연 홍서봉이 아뢰기를,
"올해 원일(元日)에서 인일(人日)까지 날씨가 늘 흐리고 햇무리가 졌으며 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습니다. 사직 대제 때에는 희생 소가 날뛰어 제관을 떠받기까지 하였는데, 지난 역사를 상고하여 볼 때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늘에 응답하는 실상은 그 방도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언로가 열리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도 큰 문제입니다. 근일 말로써 죄를 얻은 사람들이, 비록 그 말은 혹 광망하다 해도 그 마음만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데서 나온 것인데, 축출을 당하기까지 한다면 이것은 너무 심한 처사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말로써 죄를 얻은 사람은 없는 듯한데, 경은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인가?"
하니, 서봉이 다시 아뢰기를,
"축출을 당한 사람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위엄이란 우레보다도 더 무서운데, 한 몸의 사정을 변호하기 위하여 함부로 개진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명구(洪命耉)를 우승지로 삼았다.

 

2월 15일 병신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삼수(三水)·갑산(甲山)·단천(端川) 등지에 소속된 진보(鎭堡)들은 성지(城池)와 기계(器械)가 모두 무너지고 없어져서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 중 더욱 심한 곳은 변장을 모두 파출하고, 3월 1일에 가서 본도의 입방군(入防軍)을 독려하여 성지를 수축해 속히 완성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17일 무술

예조가 아뢰기를,
"성종 대왕 세실(世室)을 의정한 뒤에 반드시 응행 절목(應行節目)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상고해 내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실록》에서 상고해 낸 것을 삼가 보건대 다음과 같습니다.
김극뉴(金克忸)·이의무(李宜茂)·김일손(金馹孫)·한훈(韓訓)·이주(李胄) 등이 간원에서 헌의하기를 ‘한 경제(漢景帝) 원년에 승상 신도가(申屠嘉) 등이 상주하기를, 「공으로는 고황제(高皇帝)보다 더 큰 이가 없으니 고황제는 당연히 황제로서의 태조묘(太祖廟)를 세우고 덕으로는 문황제(文皇帝)보다 더 높은 이가 없으니 문황제는 당연히 황제로서의 태종묘(太宗廟)를 세워서 천자가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하니, 경제가 좋다고 하였고, 선제(宣帝) 본시(本始) 원년에 유사가, 효무제(孝武帝)의 세실을 세워서 천자가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고 청하니, 선제가 좋다고 하였으며, 송나라 태상경(太常卿) 성차중(盛次仲) 등이 인종(仁宗)과 신종(神宗)은 종묘에다 모셔서 천묘하지 않는 신주로 삼아 영원히 제사를 받들어야 된다고 하였는데, 삼성(三省)이 표문을 올려 외정에 분부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몇 임금은 당시에 모두 아직 대수(代數)가 다하지 않았는데도 한나라·송나라의 신하들이 옛 임금의 은택을 생각하고 새 임금의 효도를 넓히기 위하여 불천위(不遷位)의 규정을 미리 정한 것이었으니, 이는 만세를 두고 신하들이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와 태종의 공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종의 덕은 공손하고 검소한 한 문제(漢文帝)를 능가하고, 세조의 공은 사이(四夷)를 굴복시킨 효무제보다도 더 크며, 성종의 은덕은 실로 온 나라 신민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승하하시던 날에 심산 궁곡에서까지 죄다 달려 와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광경이 송 인종의 승하 때와 똑같았습니다. 신들은, 한나라·송나라 고사에 의거하여 예관(禮官)에게 선부(宣付)하여 끝없이 슬퍼하는 신민의 아픔을 달래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을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성종께서는 위엄과 덕망이 지대하였으므로, 불천위로 정하자는 것은 과연 옳은 말입니다. 하오나 삼가 살펴보건대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에 대한 불천위의 논의는 성왕(成王), 강왕(康王) 때에 정하여진 것이 아니고, 효왕(孝王), 의왕(懿王) 때에 와서 문왕, 무왕을 천조해야 되자 비로소 세실을 두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종의 덕은 절로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이므로 아직은 거행치 마소서.’ 하였습니다.
이상이 《실록》에서 상고한 내용입니다. 성종 대왕의 세실에 대한 논의가 이미 백년 전에 나왔는데 욕례(縟禮)를 오늘날에 거행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국가의 큰 경사입니다. 욕례를 거행하자면 당연히 응행 절목이 있어야 하는데 《실록》에서 널리 찾아보아도 따를 만한 전례(典禮)가 없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좌의정 오윤겸은 아뢰기를,
"이는 곧 태묘에 있어서 막대한 의례이자 신민에게는 막대한 경사로서 의당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절목이 있어야 하는데, 의거할 만한 조종조의 전례가 없으니, 홀로 새로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영의정과 우의정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서 의정하소서."
하고, 행 판부사 이정구는 아뢰기를,
"성종 대왕의 깊은 사랑과 넓은 은택은 이 세상 다하도록 잊을 수 없습니다. 세실에 대한 의논이 이미 백년 전에 나왔고 욕례를 오늘날에 거행하게 된 것은 실로 국가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응행 절목을 해조에서 당연히 품정하여 시행하여야 됩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2월 19일 경자

박서(朴遾)를 지평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정언으로, 이식(李植)을 부제학으로, 윤구(尹坵)를 수찬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응교로, 김경여(金慶餘)를 헌납으로 삼았다.

 

2월 20일 신축

헌부가 아뢰기를,
"남도의 진(鎭)들은 모두 외진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이전부터 남병사(南兵使)가 갑산(甲山)에 입방(入防)하여 늘 검칙하여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잊은 듯이 버려두어서 성지(城池)와 기계(器械)가 하나같이 퇴폐되어 있습니다. 계해년 이후 재임자로서 여섯 달이 지나도록 한번도 순검(巡檢)하지 않은 자를 조사해 내어 파직시키고, 이제부터는 선례에 따라 갑산에 입방케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앞뒤의 병사를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지경연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창 현감(新昌縣監) 이태선(李泰先)이 박지계(朴知誡)와 사이가 나빠서, 그가 전결(田結)을 숨기고 양전 감관(量田監官)을 죽였다고 무고하였습니다. 박지계가 어찌 사람을 죽일 자이겠습니까. 이는 현재 사람들이 모두 박지계를 간험한 사람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태선이 시의에 맞추려고 그처럼 모함을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2월 22일 계묘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이전에 전경 문신(專經文臣)에게 명하여 《예기》를 강습하게 하였다. 또 선비들에게도 하유하여 《예기》를 공부한 자가 있거든 《춘추》·《주례(周禮)》 상경(上經)005)  의 준례에 따라 원하는 대로 강하게 하였다.

 

2월 23일 갑진

보은현(報恩縣) 속리사(俗離寺)에 있는 6장(丈)이나 되는 부처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고 감사가 계문(啓聞)하였다.

 

2월 24일 을사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가 치계하기를,
"지금 삼례 찰방(參禮察訪) 민희안(閔希顔)의 첩보를 보건대, 생원 이기안(李基安)이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경(金坰)과 서로 모여서 농을 하다가, 기안이 험담 끝에, 성상의 잠저 때의 군호(君號)를 들어 하는 말이 ‘아무개 군은 믿을 수가 없다. 그가 오래 갈 수 있을까?’ 하였다고 합니다. 기안의 부도한 말은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의금부로 하여금 처치토록 하소서."
하니, 기안을 잡아다 추국하라고 명하였는데, 기안이 추국에서 이 사실을 자백하였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기안이 이미 자백하였습니다. 그의 공초에 나온 백이문(白以文)·김세연(金世淵)·김세렴(金世濂)·이민환(李民寏)·정온(鄭蘊)·최현(崔晛)·이준(李埈)·옥천(玉川)  【 이원엽(李元燁)의 종.】 ·유진(有眞)  【 이원엽의 아내.】 ·이영식(李英植)  【 이원엽의 아들이다.】  등도 모두 잡아와야 하겠는데, 그 중 이민성(李民宬)은 이미 죽었으니 나문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백이문·김세연·이민환·옥천·유진·영식 등은 우선 나문하고, 이기안은 그대로 가두어 두라."
하였다. 그 뒤에 기안은 처형되고 세연은 형장을 맞다가 죽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개 기안이 맨 먼저 ‘왜인에게 청하여 난을 일으킨다.’라는 말을 제창하여 서로 전파하여 조정 대신까지 끌어들이고 인심을 현혹시켰다. 정온까지도 연루되어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는데 상이 기안만을 죽이라고 명하였고, 정온·최현·이준은 애당초 잡혀오지 않았으며, 세렴은 잡혀 왔다가 곧장 석방되었고, 그밖의 다른 연루자들도 모두 용서를 받았다. 세연만은 무진 역옥(戊辰逆獄)에 동참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신문을 받다가 죽은 것이다.

 

2월 25일 병오

주강에 《시경》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시강관 심지원(沈之源)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영남에서 갓 왔으므로 영남 지방의 방어에 관한 일을 진술하겠습니다. 그 중 전선(戰船)이 무엇보다도 형편없습니다. 입방군(入防軍)은 으레 가포(價布)로 대납하고 병사·수사·변장의 무리들은 가포를 받는 것을 이롭게 여겨, 더러 입방을 자원하는 자가 있어도 들어주지 않아서 군졸은 없이 배만 포구에 매어 두고 있습니다. 행여라도 위급한 사태가 온다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방비책은 이렇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번방의 신하들을 신칙하여, 가포를 수납하지 못하게 하고, 항오 속에 투입시키도록 하여야 됩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에 말하라고 답하였다. 지원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유백증이 대신이 퇴로(退老)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잘못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위태로와지고 있는 것은 그 책임이 임금에게 있고 보면, 과격한 말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백증이 대신을 침범한 일이 비록 나쁘다 해도, 성상께서, 천망을 더한 것을 빌미로 삼았다고 전교하신 것은 역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2월 27일 무신

헌부가 직강 정두경(鄭斗卿)을 파직시키자고 논하였다.
두경은 문장에는 능하지만 사정에 어둡고 성격이 또 오활하고 엉성하였다. 진위(振威)의 유생들이 그 고을의 향교가 지은 지 오래되어 재목이 썩어서 장차 쓰러질 지경이라며 조정에 청하여 중건하고자 하므로, 두경이 당시 경기 도사로서 심사를 나갔는데, 술이 하도 취하여 소리를 지르고 말이 너무 조리가 없었다. 유생들이 모두
"도사(都事)가 선성(先聖)을 능멸하여 심지어는 ‘집이 무너지면 산 사람도 압사를 면키 어려운데, 위판(位版)이야 깔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을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탄핵을 받은 것이다.

 

최연(崔葕)을 우부승지로, 조석윤(趙錫胤)을 교리로 삼았다. 이상길(李尙吉)에게 가자하였는데, 노직(老膱)이었다.
선조 때 정여립(鄭汝立)의 변란에 최영경(崔永慶)이 무고를 당하여 체포된 것을 당시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으로 있으면서 그를 구제하여 석방시켰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선조가 하교하기를, "영경이 적의 입에서 거론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떻게 완전히 불문에 부칠 수 있겠는가." 하자, 상길이 당시 정언으로 있으면서 국문할 것을 발의한 바, 영경이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신묘 사화(辛卯士禍)가 일어나게 되니, 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 죄를 정철에게로 돌렸다. 상길도 연좌되어 귀양을 가서 폐기되었는데 금상(今上) 때에 이르러 다시 기용한 것이다.

 

2월 28일 기유

경상좌도 양전사(量田使)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평시 원장부에 올라 있는 전결은 16만 9천 5백 75결인데, 계묘년 양전 때에는 시기전(時起田)·잡탈전(雜頉田)을 합쳐서 6만 8천 5백 60결이었고, 금년에 새로 측량한 것은 진기전(陳起田)·잡탈전을 합쳐서 모두 15만 9천 5백 75결이며, 시기전은 10만 1천 4백여 결입니다."

 

2월 29일 경술

수원 지역에서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하나의 몸통에 머리·입·귀·눈이 둘이었다.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천진성(天津星) 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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