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갑인
윤지(尹墀)를 이조 참판으로, 박황(朴潢)을 이조 참의로, 유성증(兪省曾)을 집의로 삼고, 유백증(兪伯曾)을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특명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그의 말이 대신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다.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세실의 제도란 조종의 공덕을 높여서 이 세상 영원히 전하자는 것이므로 구차스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한사(漢史)》를 상고하여 본 바, 경제(景帝)가 문제(文帝)를 칭송하는 데는 ‘비방을 없앴고 육형(肉刑)을 없앴고, 장로에게 상을 내렸으며, 불쌍한 사람을 보살펴 주었고, 죄인의 자손을 연루시키지 않았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하여 이에 태종으로 높여서 소덕무(昭德舞)를 연주하였고, 선제(宣帝)가 무제(武帝)를 칭송하는 데는 ‘인의를 몸소 행하였고, 반란자를 토벌하였고,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교사(郊祀)를 지냈고, 정삭(正朔)을 제정하였고, 음률을 조정하였다.’ 하여 이에 세종(世宗)으로 높여서 성덕(盛德)·문시(文始)·오행무(五行舞)를 연주하였으니, 이는 참고할 만한 미더운 역사입니다.
우리 성종 대왕의 거룩하신 덕과 위대하신 공 가운데 비사(祕史)에 실려 있는 것은 비록 볼 수 없으나, 우선 항간의 노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세조 대왕께서는 왕업을 광복시킨 공로는 창업과 맞먹지만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예종께서는 재위하신 기간이 오래지 않아서 정치와 교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성종 때 와서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닦고 신하들을 예우하고 직언을 잘 수용하고 인재를 잘 양성하고 개가(改嫁)를 금지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재위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뜻을 이루고 풍속이 순후해져서 백년 뒤인 오늘날까지도 태평 성대를 말할 적에는 반드시 성종을 말합니다. 《대전(大典)》·《오례의(五禮儀)》 등의 책들은 비록 전대에 시작하였으나 성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책으로 완성되었으니, 이른바 아버지가 시작하고 아들이 완성하였다 하겠습니다. 공으로는 태조·태종·세조보다 더 큰 분이 없고 덕으로는 세종보다 더 훌륭한 분이 없으나, 이 분들은 연대가 너무 멀어서 이목이 서로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그 제도와 문물을 볼 수 있고 유풍과 은택이 남아 있어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마지않는 분으로서는 오직 성종 뿐인 만큼, 오늘날까지 잊지 못하는 그 인정으로 볼 때 당시 신민의 심정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세실 논의 때만 해도 사람들이 더러 열성(列聖)들이 성종의 세실을 설치할 겨를이 없었을까 하는 것을 의심하였는데, 국사를 상고하여 본 뒤에 비로소 당초에 이미 정론(定論)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론의 소재와 인정의 공통성에 있어서야 어찌 고금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성종께서 갑인년에 승하하셨고 간원의 세실 논의가 을묘년에 나왔으니, 이들은 모두 성종의 구신(舊臣)으로서 성화(聖化)에 흠뻑 젖어 있었으므로 그 칭술(稱述)도 다 직접 보고 들은 것에서 나왔을 뿐더러, 김일손(金馹孫)·이주(李胄)는 문장과 학술이 한 시대에 우뚝 뛰어나서 오늘날까지 사람의 칭송을 받고 있으니, 그들의 말은 참으로 백세토록 바뀌지 않을 공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관(禮官)이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세실에 대한 고사를 끌어대어 대수가 다할 때까지 보류해 두려고 한 것은, 당시 선비들의 마음에 수긍받지 못하게 될까 염려한 것이었는데 몇 년 못가서 사화가 크게 일어나 당시의 명사들이 모두 귀양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 두 대신은 이름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화를 더 참혹하게 당했고 그 말은 끝내 당시에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천고의 유한(遺恨)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조종의 공덕이 아무리 서술할 만한 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훌륭한 후왕을 둔 뒤에야 그 공덕이 선양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문제의 세실이 경제 때에 와서 이루어지고, 무제의 세실이 선제 때에 와서 시작되고, 선제의 세실이 광무제 때에 와서 결정된 일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담입니다. 우리 성종의 세실 논의가 연산군 때에 와서 정지당하였다가 성상의 시대에 와서 결정된 일은 광무제가 선제를 추존한 것과 꼭 들어맞습니다.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조정에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어제 유신(儒臣)이 지은 축문을 구하여다 본 즉, 몇 구의 문자로 너무 소략하게 하여서 퍽 한스러웠습니다. 이는 아마 해조의 계목에서 전례만 따라서 하나의 축문을 가지고 각실에 통용하자고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그렇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가 결정한 이 행사는 곧 시대마다 있을 수 없는 거룩한 행사이므로, 신명에게 고유하는 글 역시 이치상 상세히 서술하여야 됩니다. 어떻게 보통 때의 고축(告祝)처럼 전례만 따라서 초라하게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각실의 으레 하는 고축 외에 오실(五室)은 따로 축문을 짓되, 제사를 받들게 된 사유를 자세히 서술하여 성조(聖祖)께 고유하고 또 사책에도 써 두어서, 한 시대의 높여 받드는 정성을 다하는 한편, 만고에 전해 줄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아주 타당할 듯합니다.
만약 종묘에 고할 기한이 이미 박두하여 미처 주선할 도리가 없다고 한다면, 비록 하루 이틀의 날짜를 물리더라도 괜찮을 듯합니다. 이는 종묘에 관련되는 일인 데다 또 품은 생각이 있어서 감히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해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예조에 계하하였다.
3월 5일 을묘
송희진(宋希進)·김원립(金元立)을 지평으로, 이척연(李惕然)을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삼았다. 척연은 일찍이 지평으로 있을 적에 이조 판서 최명길이 강학년을 잘못 추천한 과실을 논박하고서 다시 그의 문정에 가서 구걸을 하므로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는데, 이때 와서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3월 6일 병진
성종 대왕 세실을 결정하고 고제(告祭)를 먼저 지냈다. 제문에,
"넓디 넓으신 성덕(聖德)이여, 조선 중엽을 태평성대로 이끄셨도다. 지난날 세조께서 크나큰 훈업을 막 이루어 놓았는데, 우리 임금께서 이를 물려받으시어 불안한 정국을 고이 안정시켰도다. 사랑으로 보살펴 주고 의리로 무마하시어, 정치는 공평하고 형벌은 간촐하였도다. 안팎이 모두 안정되고 평화로왔으며, 예의가 갖추어지고 음악이 완성되었도다. 우리 유학 또한 크게 진작시켰으니, 참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하셨도다. 사방이 온통 태평가를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올바른 길을 찾았도다. 이승을 버리고 승하하시던 날, 산도 울고 물도 슬퍼하였도다. 깊은 그 은택과 높은 그 공적은, 어린아이까지도 사모하고 있도다. 종묘 사직이 그 은공을 힘입어, 형세가 확립되고 기반이 다져졌도다. 중국을 살펴 보아도 덕과 공이 있는 임금은 세실로 하였어라. 세실로 모시는 예절을 결정함에 논의의 시작부터 의견이 일치하였도다. 소자는 외람되이 이 지위를 이어받았기에 유업을 잘 계승할 것을 골똘히 생각하였네. 처음 부묘(祔廟)하는 때를 당해서 세실에 모시기로 결정을 보았어라. 백세토록 조천(祧遷)을 하지 않고 영원히 정갈한 제사를 받들리라. 아름다운 이 예식은 모두 공론을 따른 것입니다. 추모하며 감격한 나머지 이에 삼가 고유를 하옵니다."
하였는데, 부제학 이식(李植)이 지은 것이다.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교서에,
"종묘에 소목(昭穆)이 정리되었기에 부향(祔饗)의 기일을 이미 정하였노라. 공덕이 있는 성왕(聖王)을 추존하고자 그에 보답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노라. 이는 곧 백성들의 불타는 소원에서이지 어찌 나의 사사로운 득실에서 이겠는가. 내가 보건대 역대 이래 모든 제왕들이 다 같이 세실의 제도를 중시하여 왔다. 삼종(三宗), 이조(二祧)라는 이름은 대개 상(商)·주(周)에서 시발되었고, 공이 높으면 대수를 따지지 않는다는 논의는 한(漢)·송(宋)에서 나왔다. 이는 모두가 성현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다가 조종(祖宗) 때 만들어진 규례가 있음에겠는가. 우리 성종 대왕께서는 덕은 생성의 이치에 합치되고 도는 화육하는 천지의 도에 합치하셨다. 세조의 위업을 이어받아서 오직 그 유업을 잘 계승할 방도만 생각하셨으며, 세종의 옛 제도를 따라서 다시 문명의 운기를 여셨다. 천지의 이치를 본받아서 교화를 베푸심에 그 은혜가 모든 생령에게 흡족하였고, 효제를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침에 교육은 궁곤(宮閫)에서부터 모범을 보이셨다. 풍류(風流)를 돈독히 함에는 서경(西京)을 초월하고도 남고, 현준(賢俊)을 등용함에는 경력(慶曆) 때보다도 더 융성하였다. 일시의 예악을 부흥시키고 백왕(百王)의 규모를 제정하였어라. 세상은 이미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풍속은 집집마다 표창할 만하였다. 팔짱을 끼고 군림한 지 30년 가까이에 동방 2천리를 고무 진작시켰어라. 깊은 사랑과 넓은 은택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잊히지 않고, 거룩한 업적과 위대한 계획은 자손 대대로 영원히 힘입었다. 마침 질천(迭遷)에 대한 논의를 듣고 나서, 몰세(沒世)하신 데 대한 정회가 간절하더니, 조정 신하와 뭇백성들의 뜻을 물어 본 바, 오늘날의 심정들을 읽을 수 있었고, 비첩(秘牒)과 공론을 상고하여 본 바, 당시에 이미 확정된 일이었다. 국론이 일치하기 때문에 묘악(廟樂)의 명칭을 강정하였다. 열 글자의 시호는 삼성(三聖)에 비기어 더할 바가 없고, 백세의 제사는 오실(五室)에 받들어 폐지하지 않으리라. 국가적인 거룩한 행사이기에, 이처럼 사방에 고유(告由)하는 바이다."
하였는데, 대제학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3월 7일 정사
전라좌도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치계하였다.
"신이 관장하고 있는 좌도 25개 고을의 타량(打量) 총수는 묵는 토지나 경작하는 토지를 모두 합쳐서 도합 12만 3천 2백 60결로서, 평상시의 총수에는 3만 7천 40여 결이 모자라고, 계묘년 양전 때의 총수보다는 5만 3천 2백 20여 결이 더 많은데, 여기에서 면세전 5천 결을 제하고 나면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실수(實數)는 7만 6천여 결입니다."
3월 8일 무오
상이 하교하기를,
"원종 대왕의 부묘(祔廟) 축문에 어찌하여 ‘사왕(嗣王)’이라 쓰지 않았는가?"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종묘의 각실 축문 의궤(儀軌)에 모두 ‘사왕’으로 쓰여져 있으나, 유독 덕종의 축문만은 ‘국왕’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는 성종께서 이미 예종의 후사가 되었기 때문에 계통을 중시한 나머지 나름대로의 구별을 주지 않을 수 없어서였을 듯합니다. 이번의 원종 부묘는 그 일 자체가 덕종과는 다른 데가 있는 만큼 축문의 칭호를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행 판부사 이정구(李廷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다 같이 "원종 대왕은 예위(禰位)로 태묘(太廟)에 승부(陞祔)하여 덕종 때와는 그 체례(體例)가 같지 않은 만큼, 의당 ‘사왕’으로 고쳐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3월 10일 경신
큰 비가 내려서 원종 대왕 부묘 친제를 물려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3월 11일 신유
예조에게 숙의(淑儀) 간택을 명하였다.
윤전(尹烇)을 장령으로 삼았다.
3월 14일 갑자
헌부가 아뢰기를,
"우리 태종 대왕 때는 겨울에 우레가 치고 나무에 서리가 내려 눈같이 되자 예조 참의 이지강(李之綱) 등을 모든 도에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보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였습니다. 세종 대왕 때에는 우레가 연생전(延生殿)을 올리자, 부당한 요역(徭役)과 급하지 않는 부렴(賦斂)을 일체 정지하거나 혁파하였습니다. 경계하고 삼가하며 하늘에 응답하는 뜻이 그 얼마나 좋았습니까. 현재 천재(天災) 시변(時變)이 달마다 발생하고 있으니, 근신을 모든 도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 그 병폐를 제거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근신을 보내는 것은 폐단이 뒤따를 듯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케 하라."
하였다.
목릉(穆陵)·혜릉(惠陵)이 무너졌다. 이날 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우레소리가 지축을 뒤흔들며 두 능 사이에 불빛이 하늘로 치솟아서 능을 지키고 있던 종이 놀라서 엉겁결에 참봉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는데, 이른 아침에 내다보니 대왕 능은 무너진 곳이 유지(酉地)는 길이와 넓이가 4척(尺)이고, 자지(子地)에서 인지(寅地)까지는 길이 19척, 넓이 5척에 깊이가 1척 남짓하였고, 왕후 능은 서쪽에서 북쪽까지 길이와 넓이가 30여 척에 깊이가 다 같이 1척이 넘었으며, 계단 밑도 30여 척이나 무너져 있었다. 능 참봉이 이 사실을 예조에 보고해 오자, 예조가 위안제를 설행하고 대신을 보내어 봉심(奉審)한 다음 날짜를 가려서 무너진 곳을 개수하되, 개수할 때까지는 우선 초둔(草芚)과 유둔(油芚)으로 무너진 곳을 덮어서 비바람을 막자고 계청하였는데, 따랐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강대수(姜大遂)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3월 15일 을축
좌의정 오윤겸, 우의정 김상용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금방 예조의 전보(傳報)를 보고서 비로소 목릉·혜릉에 내려진 재변이 그토록 참혹하였음을 알았거니와, 신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그토록 지극한 효사(孝思)로서 지금의 심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이전부터 능침(陵寢)이 불에 타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망곡(望哭)하고 옷을 갈아 입는 절차가 있어 왔습니다. 이번에 능침에 내려진 재변은 실로 전고에 없었던 일인 만큼, 당연히 재변에 대처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으니, 해조의 뜻을 참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대례(大禮)가 이미 박두해 옴에 따라 감히 또 물려서 거행하자고 청할 수 없어서인 듯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에는 경중이 있고, 이승과 저승에는 차이가 없는 법입니다. 능침은 곧 선왕과 선후의 체백(體魄)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서 천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원종 대왕께서 살아 계셨다면 반드시 간장이 찢어지도록 슬피 울 뿐, 부묘의 지속(遲速)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서둘러 해조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재변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주상께서도 당연히 자신을 죄책하는 말씀을 내리고 경외하는 마음을 한층 더 하여 진하연이나 음복연 등의 예절을 모두 우선 중지하도록 명하고, 신들처럼 못난 대신을 내쫓아서 하늘의 꾸중에 사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이번에 능침이 무너진 변은 실로 경들이 부른 것이 아니다.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설사 능침의 재변이 빗물 때문이고 천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만큼 크게 무너졌다면 진실로 평상시 사토(莎土)가 무너져 내린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상신(相臣)이 차자를 올린 것은 상이 경외하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그저 상례적인 비답만 내릴 뿐 애통, 박절해 하는 뜻이 없으니, 개탄스럽기 이를 데 없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87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과학-천기(天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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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설사 능침의 재변이 빗물 때문이고 천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만큼 크게 무너졌다면 진실로 평상시 사토(莎土)가 무너져 내린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상신(相臣)이 차자를 올린 것은 상이 경외하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그저 상례적인 비답만 내릴 뿐 애통, 박절해 하는 뜻이 없으니, 개탄스럽기 이를 데 없다.
3월 16일 병인
헌부가 아뢰기를,
"불행스럽게도 능침의 재변이 마침 부묘(祔廟)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혼령의 마음인들 사람의 마음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진하연(陳賀宴)과 음복연(飮福宴) 등의 예절은 무엇보다도 거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부묘 때에 음악을 울리지 말고 또 진하례와 음복연도 거행하지 말아서, 재변을 당하여 근신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부묘의 예절을 뒤로 물려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간원에서 또 이 일을 진계(陳啓)하고자 하였다. 정언 홍명일(洪命一)은, 두 능이 애당초 흙을 잘 쌓지 않아서 매번 무너지는 것이므로, 공사를 감독한 모든 신하에게 준 자급을 개정하여야 된다고 하였다가, 각료들의 의견이 하나로 귀결되지 않자 스스로 인피하였는데, 헌부가 체직시키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부묘 예식을 물려 거행하자고 청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어제 목릉에 대한 첩보를 받은 바 ‘본월 14일 밤 우레와 함께 큰 비가 내렸는데, 새벽에 능을 살펴보니 대왕 능 및 혜릉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무너졌다.’라는 말이 있을 뿐, 분명히 우레가 쳐서 였다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대례가 임박하기도 해서 다만 무너진 곳을 보수할 방도만 개진하고 재변에 대처하자는 말은 감히 거론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상신(相臣)의 차자를 보니 사연이 아주 간곡합니다. 해조의 입장에서는 의당 받들어 거행하기에 바빠야 하나, 다만 망곡(望哭)하고 옷을 갈아 입는 절차는 반드시 능침이 손상된 실상을 분명히 알고 나서야 바야흐로 재변에 대처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대신이 봉심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논해 처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 두 능은 봉분을 한 지 얼마 안 된데다 밤 비가 미친듯이 쏟아부었기 때문에 틈서리로 스며든 물이 이내 봉분을 무너뜨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대신들은 천변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나로서 심히 괴이쩍다. 만일 불행하게도 그처럼 우레치는 변고가 있었다면 능 위의 석물들도 기어코 다 온전할 리가 없다. 대신들이 저처럼 말하는 것은 경솔한 처사인 듯하다."
하였다. 그때의 판서는 바로 홍서봉(洪瑞鳳)이었다.
3월 18일 무진
햇무리가 겹으로 졌는데, 속 무리에는 양이가 있었고, 흰 기운이 양이에서 나왔다.
좌의정 오윤겸, 예조 판서 홍서봉, 선공감 제조 신경진(申景禛)이 두 능을 봉심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대왕 능의 무너진 곳은 자지(子地)에서 인지(寅地)까지는 포백척(布帛尺)으로 재어본 바 길이 15척, 넓이 4척에 구덩이진 곳으로 깊은 경우 1척 남짓하고 얕은 곳은 4촌(寸) 남짓하며, 유지(酉地)는 길이와 넓이가 4척에 깊이는 8촌 내지 6촌 남짓하고, 술지(戌地) 사초(莎草)가 5촌 남짓 물이 새어 나오고 오지(午地)는 아래쪽에 젖어 있는 곳이 3척이며, 인지(寅地)는 아래쪽에 수렁진 곳의 깊이가 6촌인데 역시 무너져 있으며, 오지(午地)·미지(未地)·묘지(卯地) 등의 곳은 만석(漫石)과 병석(屛石) 사이에 다 같이 물이 새어 젖은 곳이 있었습니다.
왕후 능은 능 위의 사초가 무너져 쌓인 것이 유지에서 인지까지 길이가 23척이고, 축대 전면 서편의 보토(補土)가 무너진 곳이 길이 33척에 너비 32척이었습니다.
대개 두 능이 무너진 것은 갓 입힌 사초가 아직 뿌리가 내리지 않고 갓 돋운 흙이 아직 굳어지지 않아서 물이 그 틈서리를 타고 들어가므로 사초가 벌어지면서 흙이 파여 나온 뒤에 빗물이 쏟아져 들어가서 점차 구덩이가 진 것으로, 형편상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들이 본 바로는 분명히 수재로 해서 무너진 것이지 달리 의심할 만한 단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근대의 능침 제도가 옛날의 제도와 같지 않아서 윗머리는 펑퍼짐하면서도 넓고 아랫머리는 조금씩 줄어든데다 중간허리는 크기 때문에 상두에는 물이 고일 우려가 있고 하두에는 물이 흘러 내릴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재변이 이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수리 때에는 건원릉(健元陵)의 제도를 본받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선왕의 능침 제도를 본받아서 다시는 이러한 문제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참봉이 당초 능의 재변을 보고해 왔을 적에는 온 나라가 온통 놀라와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만약 이러한 때에 사안에 따라서 진계(陳啓)한다면 노한 하늘을 혹시 돌이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간관은 인사가 잘못된 탓으로 돌리고 예관은 수환(水患) 탓으로 돌려서 다만 부묘(祔廟)의 대례(大禮)를 며칠 물려 거행하고만 말아 길흉을 뒤헝클어 놓았으며, 봉심한 서계마저도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그저 능의 제도가 옛날과 같지 않아서라고 함으로써 임금에게 하늘을 경멸하고 재변을 숨기는 마음을 더 주었으니, 마음 아프기 그지 없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87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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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참봉이 당초 능의 재변을 보고해 왔을 적에는 온 나라가 온통 놀라와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만약 이러한 때에 사안에 따라서 진계(陳啓)한다면 노한 하늘을 혹시 돌이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간관은 인사가 잘못된 탓으로 돌리고 예관은 수환(水患) 탓으로 돌려서 다만 부묘(祔廟)의 대례(大禮)를 며칠 물려 거행하고만 말아 길흉을 뒤헝클어 놓았으며, 봉심한 서계마저도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그저 능의 제도가 옛날과 같지 않아서라고 함으로써 임금에게 하늘을 경멸하고 재변을 숨기는 마음을 더 주었으니, 마음 아프기 그지 없다.
우의정 김상용이 상차하기를,
"금방 좌의정 오윤겸 등의 봉심 계사를 본 즉 ‘두 능이 붕괴된 것은 분명히 수환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애당초 예조의 전보(傳報)에 말한 ‘한밤에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우레와 번개가 진동하였다.’라는 등의 말에만 의거하여 지나친 의혹을 한 나머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부질없이 품은 생각을 개진하느라, 초고하는 즈음에 그만 자신도 몰래 말이 과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제 삼가 예조에 내리신 비답을 본 바 ‘대신의 말이 경솔한 듯하다.’라고 하교하셨으니, 신은 참으로 황공한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보고한 말이 매우 분명치 않았으니 경들이 지나친 의혹을 낸 것은 형편상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이다.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부묘(祔廟) 행례는 이미 물려 거행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만, 날짜가 너무 촉박합니다. 천하의 일은 제각기 경중과 완급이 있는 법인데, 부묘의 예절과 능침의 보수는, 예절로 두고 논한다면 부묘가 능침보다 더 무겁고, 선후를 논한다면 능침이 부묘보다 더 급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는 아무 차등도 없어야 한다고 본다면, 우선 부묘의 행례를 중지하여 능침의 보수가 마무리된 뒤에 따로 좋은 날을 받아서 예절을 갖추어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종묘와 능침을 존중하는 두 도리가 다 같이 완벽하여 아무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니, 차자를 안에 두고서 내려보내지 않았다. 대사간 김덕함(金德諴)도 소를 올려 우선 산릉(山陵)의 보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묘의 행례를 치르자고 청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김덕함이 반드시 보수의 날짜가 8월이라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서 이런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전부터 능침을 수리할 적에는 그날만 시사(視事)를 정지하였습니다. 오늘날 사초(莎草)가 허물어진 일은 이전에 비하여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 오늘의 대례는 정지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않은 일이다. 속히 날을 받아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기사
상이 숭은전(崇恩殿)에 나가 신련(神輦)을 모시고 태묘(太廟)로 들어갔다.
이튿날 부묘례(祔廟禮)를 거행한 다음, 대사령을 내리고 모든 관원에게 가자하거나 상품을 내렸다. 종헌관 윤신지(尹新之), 진폐찬작관(進幣瓚爵官) 이성구(李聖求), 천조관(薦俎官) 정광경(鄭廣敬), 전폐찬작관(奠幣瓚爵官) 이식(李植), 예의사(禮儀使) 윤이지(尹履之), 당상 집례(堂上執禮) 나만갑(羅萬甲)에게는 숙마 한 필씩을 내리고, 당하 집례(堂下執禮) 민광훈(閔光勳), 대축(大祝) 심지원(沈之源)·송희진(宋希進)·심지한(沈之漢)·강대수(姜大遂)·김원립(金元立)·송시길(宋時吉)·이기발(李起浡)·정뇌경(鄭雷卿)·김경여(金慶餘)에게는 반숙마 한 필씩을 내리고, 전사관(典祀官) 유질(柳秩), 묘사(廟司) 김수남(金秀南)에게는 아마 한 필씩을 내리고, 도감 도제조 좌의정 오윤겸에게는 안구마 한 필을 내리고, 제조 김신국(金藎國)에게는 숙마 한 필을 내리고, 제조 홍서봉(洪瑞鳳)·최명길(崔鳴吉), 봉고명 집사(捧誥命執事) 이정남(李井男) 등 네 사람, 봉시책 집사(捧諡冊執事) 홍관(洪) 등 네 사람, 봉옥책 집사(捧玉冊執事) 윤여징(尹汝徵) 등 네 사람, 봉보 집사(捧寶執事) 홍찬서(洪纉緖) 등 네 사람, 섭통례(攝通禮) 변삼근(卞三近) 등 네 사람, 전의(典儀) 이림(李琳) 등에게는 아마 한 필씩을 내리고, 11실(室)의 대축(大祝) 구봉서(具鳳瑞), 도청(都廳) 유성증(兪省曾)·김반(金槃)에게는 한 자급씩 더해주고, 낭청(郞廳) 이진철(李晋哲) 및 감조관(監造官) 임선백(任善伯) 등에게는 승서(陞敍)를 명하고, 숭은전 참봉(崇恩殿叅奉) 이형(李蘅)·정수창(鄭壽昌)에게는 6품직으로 천전(遷轉)하고, 상탁(床卓)을 들어 나른 김식(金埴) 이하에게는 한 자급씩 더해 주되 자궁자는 대가(代加)를 하였으며, 제색(諸色)의 공장(工匠) 및 원역(員役) 등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쌀과 베를 차등을 두어 마련해 주도록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두 능이 무너진 재변이 비록 갑자기 쏟아진 비가 틈서리로 스며들어서 무너진 것이라 하지만, 애당초 감독을 할 적에 튼튼히 쌓지 못하여서 그러한 사태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두 도감 제조 이하의 모든 관원을 파직하소서. 능침의 일이란 십분 근신하여야 됨에도 능관(陵官)의 첩보(牒報)가 내용이 분명치 못함으로 해서 뭇 사람의 의혹을 자아내었습니다. 능관을 파직하소서."
하고, 간원에서도 또 이 일을 가지고 논계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제조 이하의 관원들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양사가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경상 감사 이기조(李基祚)가 상소하기를,
"본도의 좌·우도 중 토지의 넓이와 주군(州郡)의 다소는 우도가 좌도에 못 미치나, 현재 기전(起田)의 결수(結數)는 우도가 좌도보다 많습니다. 경주(慶州)는 좌도의 웅부(雄府)이지만 기전이 겨우 1만 결이고, 우도는 상주(尙州)·성산(星山)·진주(晋州)가 모두 1만 결을 넘고 있으니, 두 도의 불균형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우도 중에서도 진주가 가장 많고 성산이 그 다음이며, 선산(善山)·고령(高靈)·고성(固城)·사천(泗川)이 또 그 다음입니다. 나라에서 만약 수삼천 결을 줄여 고을의 대소를 참작, 견감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면, 실결(失結)도 많지 않을 것이고 민심도 크게 얻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양전(量田)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에 계하하니, 호조가 회계하기를,
"우도의 원결(元結)이 비록 평상시보다 줄어들었다 해도 현재의 기전 수는 실로 좌도보다 더 많습니다. 본도의 감사가 아마 좌·우도에 있어서 피차의 구별이 없이 공평하게만 살핀 나머지 이처럼 소를 올린 것인 듯합니다. 양전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다시 조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그 뒤에 상이 승지 박명부(朴明榑)에게 묻기를,
"그대의 집이 영남에 있는데, 좌·우도 부역의 경중이 어떠한가?"
하니, 명부가 답하기를,
"도내에서도 평상시의 전안(田案)이 없는 고을인 경우 좌·우도의 차이가 없으나, 평상시의 전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면 똑같이 매우 번다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좌도의 부역이 더 무겁다고 들었으나, 근래 이기조의 상소를 보니, 이전에 들은 바와 다르다. 기조의 생각은 아마 우도는 땅은 좁지만 전결이 많고 좌도는 땅은 넓으나 전결이 적기 때문에 고르지 못한 데 대한 인민의 원망이 있다는 뜻일 것이나, 나의 생각으로는 좌도의 부역은 이전부터 매우 무거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백성들이 괴이쩍어 하지 않는 것이고, 우도인 즉 이전에는 가볍다가 지금에 와서 무거워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순시하는 사람의 보고는 저와 같으니 너무도 괴이쩍은 노릇이다."
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유황(兪榥)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21일 신미
영의정 윤방(尹昉)이 차자를 올려 김상헌을 자신의 대임에 추천하고, 또 아뢰기를,
"대례(大禮)가 이미 완결되어 만물이 모두 우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예제(禮制)를 의논하다가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은 아직도 돌아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번의 크디큰 은택을 계기로 특별히 광대무변한 은전을 베푸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막 죄인을 석방하려 하고 있으나 다만 찬출(竄黜)된 지가 아직 오래지 않기 때문에 경의 뜻을 따르지 못하겠다. 경은 이를 허물삼지 말라."
하였다.
3월 23일 계유
형조 참의 나만갑(羅萬甲)이 상소하기를,
"조정은 사방의 기강(紀綱)임에도 청의(淸議)는 날로 사라져 가고 비론(卑論)만 날로 일어나서, 차라리 국가를 저버릴지언정 작록(爵祿)이야 잃을소냐 하며, 임금에게 잘못이 있어도 말할 줄 모르고, 정사에 하자가 있어도 바로잡을 줄 모르고, 사특하고 아첨하는 사람이 있어도 배척할 줄 모르고, 일이 억울하고 잘못된 데가 있어도 따질 줄 모르니,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여 볼 때 참으로 한심스러운 노릇입니다."
하고, 또,
"임금이란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란 백성에 의지하는 법인데, 무식한 무리들이 이를 둘로 나누어서, 백성을 아끼는 자를 명예를 노려서라 말하고 토색질을 하는 자를 국자를 위하여서라 말합니다. 신은 애당초 민간 세속배의 말로만 여겼지, 진신(搢紳) 사이에 또 다시 이런 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민심을 잃고서 국가을 위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대신은 전하의 주석(柱石)인 데도 국가의 위란을 예사롭게 보아넘기고 국가의 휴척을 생각지 않습니다. 저번 유백증의 상소만 해도 그것은 상신(相臣)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신이란 여느 관원과 달라서 대신에 대한 말을 할 즈음에는 참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백증이 충분(忠憤)에 북받친 나머지 말투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이것이 백증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대신된 자로서 그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스스로 조언으로 삼고 상신의 소임에 더욱더 힘써서 국사를 담당하였다면, 백증은 쟁신(爭臣)의 도리를 잃지 않고 대신은 현상(賢相)의 도리를 잃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투장(投章)하고 또 어떤 이는 정고(呈告)하여, 마침내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그를 외직으로 전보시키게 하였습니다. 아, 자신이 대신으로서 스스로 마음을 비워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어떻게 임금이 간언을 잘 받아들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대간이란 전하의 이목인데도 입을 다문 채 말을 조심하면서 소관(小官)의 잘못이나 들추어다 책임을 다하였다는 근거로 삼고, 참으로 자신에게 이해 관계가 없어야만 팔을 걷어붙이고 극력 말하여서 대각(臺閣)의 풍채를 살리려 합니다. 간혹 말하는 자가 있어도 그 말이 임금에게 미치게 되면 임금의 진노가 자꾸 내려져서 금방 귀양을 가고, 말이 대신에게 미치게 되면 분노가 뒤따라서 몰래 피해를 받는 판이니, 그 누가 선뜻 곧고 강직한 말을 하여 애꿎은 화를 자초하려 하겠습니까."
하고, 또,
"궁중의 일이란 비밀스러워서 외간 사람으로서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귀넘어 듣자니 궁내가 근엄하지 못하여 사특한 길이 이미 열려졌다 합니다. 정백창(鄭百昌)·여이징(呂爾徵)의 아내가 내정(內庭)을 드나들면서 틈을 엿보아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외간의 말이 이들을 통하여 궁내로 들어간다는 말이 자자하여 원근에 퍼지고 있습니다. 무지한 부인네의 일은 말할 것도 없으나, 가장이 된 자는 명색이 사대부인데 그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제집에 있으면서 몰랐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모른다고 한다면, 나라 사람들은 다 아는데 전하만 살피지 못하는 바가 혹시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또,
"반정한 신하들만 해도 의거할 당초에야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부귀를 도모하려는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공을 이룸에 미쳐서는 사패전(賜牌田) 외에 또 많은 전민(田民)을 거느리고서 넓은 제택(第宅)을 점령하는 등, 방자함이 날로 심하여 민원이 날로 더해 가고 있으니, 예로부터 공신의 끝이 좋지 않았던 원인도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단속을 하지 않는다면 전하께 뒷날의 후회를 끼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근년 이래 화기가 손상되고 재변이 연이어 일어나서 곤충 초목의 이변과 인물 산천의 괴변을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종묘·정전·능침의 나무가 벼락을 맞은 일은 참으로 고금을 통틀어 드물게 있는 재변이었습니다. 그때는 전하께서 비록 덕을 닦고 반성하는 실상은 없었다 해도 두려워하는 생각만은 그래도 품고 있었습니다. 그뒤 남산의 나무가 또 벼락을 맞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았기 때문에 덮어둘 수가 없어서 한성 판윤이 진계하여 부관(部官)을 파직시켰습니다. 두 능의 재변이 또 하루 밤 사이에 일어났는데, 능 참봉의 보고가 분명하지 않기는 하나, 비로 인하여 무너졌다 해도 이것 역시 큰 재변입니다. 이는 참으로 전하께서 크게 두려워하셔서 죄를 자신에게로 돌리고 개혁을 도모하여 하늘의 꾸중에 답하기가 바빠야 할 터임에도, 도리어 허물을 인사 탓으로 돌리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주상의 뜻에 영합한 나머지 상신(相臣)은 대죄하고 양사가 발론하여 참봉을 파직하는 것으로 사태를 진정시킬 계획을 삼았습니다. 그러고는 대례를 그대로 거행하는가 하면, 묘정에는 음악을 벌이고, 진하례(陳賀禮)를 이미 정지하였는데도 도리어 산호(山呼)를 불렀습니다. 하루 이틀 사이에 국론이 들끓어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개탄하며 나서고 있으니, 하늘이 굽어 보고 있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위아래가 서로 덮어 주며 재변을 숨기고 있으니, 이것은 이른바 사람의 말도 개의할 것 없고 하늘의 재변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신은 이 뒤로부터 사랑하고 아끼던 하늘이 다시는 경계를 보이지 않고 마침내 뒤엎어 없애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소를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3월 24일 갑술
대사헌 김덕함(金德諴), 헌납 김경여(金慶餘), 정언 심지한(沈之漢), 집의 유성증(兪省曾), 장령 송시길(宋時吉), 지평 김원립(金元立), 송희진(宋希進) 등이, 나만갑의 상소 중에 ‘양사가 발론하여 참봉을 파직시켰다.’느니, ‘재변을 숨겼다.’느니 하는 등의 말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옥당 【 옥당은 부제학 이식(李植), 응교 심지원(沈之源), 교리 조석윤(趙錫胤), 수찬 강대수(姜大遂)였다.】 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두 능의 재변이 아무리 빗물이 새어든 때문이라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그 지경으로 무너졌다는 것은 역시 전에 없었던 재변입니다. 참봉의 보고가 비록 분명치 않은 듯하다 해도 이는 문서상의 작은 잘못에 지나지 않는데, 양사가 일제히 발론하여 파직을 논하기까지 하여 마치 잘못을 전적으로 그에게 돌리는 듯이 한 것은, 재변을 숨기려는 뜻은 없었다 해도, 너무 지나친 잘못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선왕의 능에 벼락이 떨어졌다면 이것이 바로 망극한 일이다. 신하된 자로서는 변고의 소식을 듣고 나서는 경황없이 울부짖어야 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나서는 의당 서로 기뻐하며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럼에도 나만갑은 혼자만이 언짢아 하며 대신의 봉심하고 와서 보고한 말을 놓고 대신들이 서로 덮어주며 재변을 숨기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그리고 본능 참봉의 첩보가 자세하지 않은데도 그 참혹한 재변의 가설을 선왕의 능침에다 함부로 끌어다 붙인 것은 그 죄가 매우 무겁다. 그럼에도 옥당은 그것은 하찮은 실수라고 말하는가 하면, 양사(兩司)가 참봉을 논핵한 것은 재변을 참봉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뜻이 조금도 없었음에도 잘못을 전부 참봉에게 돌리려 한다고 말하니, 그 뜻은 만갑의 말을 믿고 대신의 견해를 의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옥당의 처지는 너무도 어이없으니, 부제학 이식(李植) 이하를 모두 추고하여 한편으로는 부화뇌동하는 작태를 끊고 한편으로는 대신을 동요시키는 버릇을 막으라."
하였는데, 양사가 관직에 나온 뒤, 이미 옥당으로부터 양사를 체직시키라는 계청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출사하라는 명을 받았다 해도 관직에는 있을 수 없다며,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고, 옥당 역시 처치를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글발을 올려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3월 25일 을해
공청우도(公淸右道) 양전사(量田使) 이현(李𥙆)이 치계하기를,
"난리 이후 전지에 대한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방치하여 두는 것이 관습이 된 나머지 백성들이 모두 사사로이 전답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경계를 정리하려 든다면 으레 백성들이 시비를 떠나서 우선 타량(打量)에 대한 원망을 하고 나설 것이므로, 오늘날에 있어 민원도 가라앉히고 국가에 손실도 없게 하려면, 묵은 전답에 대해서는 연한을 두고 조세를 견감해 주어서 백성들이 갈아 먹도록 하는 일뿐입니다. 이를테면 새로 타량한 현재의 기전(起田)으로 해마다 수세(收稅)의 수량을 삼고 묵은 전답의 경우 10년까지 백성들이 그냥 갈아 먹도록 한다면, 민심이 모두 기뻐서 결부(結負)가 늘어나는 것을 잊은 채 너그러운 정책에 만족해 하며 앞다투어 개간을 할 것이므로, 10년 후에는 세입이 저절로 갑절로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백성들이 장차 이미 개간된 전답으로는 납세의 터전을 삼고 새로 개간한 전답으로는 생계의 기반을 삼아서, 국가의 입장에서는 손해 없는 시혜가 되고 민생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혜택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호조에 계하한 바, 호조가 아니 된다고 하자, 상이 호조의 말을 따랐다.
3월 26일 병자
도승지 정백창(鄭百昌)에게 금관자 한 쌍을 하사하였다.
백창은 좌승지 서경우(徐景雨)와 함께 부묘(祔廟) 친제(親祭) 때 집사로서 가선에 올랐는데, 백창에게만 이렇게 하사를 한 것은, 나만갑의 상소에서 척리(戚里)를 극력 공박하였기 때문에 버젓이 상을 내려서 만갑을 억누르자는 의도에서였다.
대사헌 김상헌이 상소하기를,
"신이 풍헌(風憲)과 경연(經筵)의 관직을 이중으로 띠고 있는데도 또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신이 아무리 어리석고 미련하여도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은총도 생각지 않고 견책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군신간의 대의를 저버리고 제 한 몸의 편의만 따라서 성명(聖明)의 세상에 스스로 소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의 형 김상용(金尙容)이 현재 경연 영사로 있는데, 당(唐)·송(宋)의 고사에 대신의 자제는 대각(臺閣)에 나란히 있을 수 없거니와, 간혹 있다 해도 스스로 소를 올려 체면(遞免)을 빌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 중종 때만 해도 김정국(金正國)이 세자 좌부 빈객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형 김안국(金安國)이 먼저 빈객이 되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체면을 청하였습니다. 더구나 경연은 빈객보다 더 중요한 자리임에겠습니까. 엎드려 빌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가냘픈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신의 본직 및 겸대하고 있는 동지경연을 체면하소서.
신이 삼가 생각건대 선왕께서는 위로 하늘의 도를 본받고 아래로 신하의 심정을 인식한 나머지 이것으로 예제(禮制)를 정하여, 나이가 되면 그만두게 하고 질병을 앓으면 물러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지금 국사가 어렵고 불안하기 때문에 아무리 늙고 병들었다 해도 역시 물러나기는 어렵다고 하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 송나라가 남경(南京)으로 천도를 한 뒤 어렵고 불안한 상황이 오늘날에 비하여 어떠하였습니까. 그럼에도 벼슬을 그만둔 신하가 사서에 잇따라 보입니다. 지금 신은 일흔의 나이가 눈앞에 닥친데다 질병의 상태가 또한 이와 같으니, 장안에 걸어다니는 한 송장에 불과합니다. 오직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명께서는 민망히 생각하고 불쌍히 보살피시어, 해골을 내어 주어서 고향에 돌아가 목숨을 마칠 수 있도록 한다면, 비록 저승에 가 있더라도 이 은혜에 보답할 길을 두고두고 도모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은 사피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정태화(鄭太和)를 집의로,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민광훈(閔光勳)을 장령으로, 이원진(李元鎭)을 부교리로, 이시매(李時楳)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3월 28일 무인
도승지 정백창이 나만갑의 상소에서 지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가 아무리 넓어도 몸 둘 곳이 없으니, 차라리 바닷속으로나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할 노릇입니다. 이런데도 어떻게 다시 얼굴을 들고 이 청결한 조정에 다시 부끄럼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근래에 명분이 엄하지 못하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법을 멸시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제 과실을 듣기 싫어하고, 제 무리를 두둔하고 다른 무리를 공박하는 자는 그 자취를 덮기 위하여 의심두지 않아야 할 자리에 의심을 하는가 하면, 누(累)를 씌우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누를 씌우는 판이니, 이것이 참으로 너무도 놀라운 노릇이다. 이 뒤로는 경들에게 전병(銓柄)을 잡게 하고 풍헌(風憲)을 맡기어, 기탄없이 법을 범하고 탐욕을 부리는 무리들이 두려워하는 데가 있도록 하여야 되겠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행공하라."
하고, 이어 백창을 패초하니, 백창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또 소를 올려 체면을 빌자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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