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경진
나만갑(羅萬甲)의 관직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의금부가 죄인을 소방(疏放)하는 일이 하루가 급하다고 아뢰었으나, 좌의정이 병을 칭탁하고 곧바로 문서를 심사하지 않았다. 이에 상이 하교하였다.
"참의 나만갑은 감히 형편없는 말을 발설하여 죄없는 대신으로 하여금 제 위치에서 안심하고 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속셈이 너무도 놀랍다. 우선 파직하라."
정온(鄭蘊)을 대사간으로, 성여관(成汝寬)을 헌납으로, 박수홍(朴守弘)을 장령으로, 이기발(李起浡)·홍주일(洪柱一)을 지평으로, 송몽석(宋夢錫)을 정언으로, 정뇌경(鄭雷卿)을 부교리로, 김수익(金壽翼)을 수찬으로 삼았다.
4월 2일 신사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리기를,
"듣건대 신 때문에 특별히 나만갑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하니, 신은 두려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두 능침의 사토(莎土)가 무너진 뒤로 사람들이 다 같이 천변(天變)이 아닌가 의심하며 입을 모아 말하기 때문에 만갑이 차분히 구명해 볼 겨를도 없이 그만 소를 올린 것이지, 애당초 신에게 불만을 갖고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전일 유백증(兪伯曾)의 상소에서 임금의 과실을 바로 지적한 것은 그 말은 비록 지나치다 하더라도 그 마음만은 나라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것인데도 외직으로 보임하도록 특명을 내리셨고, 이번에는 만갑이 이미 준엄한 배척을 받고 나서 또 엄중한 문책을 받았으니, 이는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위로 임금을 보필하지 못하였고 아래로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치 못한 데다 또 언관이 소를 올렸다가 견책을 받게 하였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른 이상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나만갑을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어 뒷날 진언할 길을 여소서."
하니, 답하기를,
"만갑의 죄범은 실로 파직에 그칠 죄가 아니지만, 언로에 관계되기 때문에 약식으로 가벼운 벌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질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세 번 소를 올려 극력 사직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4월 3일 임오
조강에 《시경》을 강독하였다. 끝나고 나서 집의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임금이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마땅히 천지의 넓디넓은 아량을 본받아야 합니다. 나만갑의 소 중에 말이 궁곤(宮壼)에 관계되었다 하여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사람마다 말하기를, 만갑이 바른말을 하다 죄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파직시키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만갑은 이전부터 말이 적절하지 못하였다. 내가 그냥 두려고 하였으나, 국가의 사체가 이러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약식으로 가벼운 벌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또 헌납 성여관(成汝寬)이 아뢰기를,
"능의 재변이 아무리 빗물 때문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큰 재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부묘(祔廟)를 이틀만 물렸습니다. 궁금(宮禁)의 일에 있어서는 만갑이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정백창(鄭百昌)에게는 실로 약석(藥石) 같은 말입니다.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필시 이로부터 언로가 막힐 것입니다. 파직시키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언로 때문에 가벼운 벌을 내린 것이니, 다시 거두어들이기는 어렵다."
하였다. 영경연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나만갑이 신 때문에 죄를 받게까지 되었으니 신으로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두 능이 무너진 것이 아무리 천재(天災)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임금이 공구 수성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그것은 죄줄만한 말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는 대신이 반드시 죄를 청하리라고 여겼었는데 이제는 파직조차 하지 않으려 드니 실로 그 의도를 모르겠다."
하였다. 윤겸이 또 아뢰기를,
"근래에 보건대 전하께서 말씀할 즈음에 자못 불평해 하시며 늘 분노를 발하십니다. 어제 정백창(鄭百昌)의 상소에 대한 비답만 해도 뭇신하들 중 그 누가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로(私路)를 막지 않으면 공도(公道)가 유행되지 않기 때문에, 공도를 크게 행해지게 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이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윤겸이 또 아뢰기를,
"신이 살고 있는 곳이 봉림 대군(鳳林大君)과 인평 대군(麟坪大君) 두 궁의 사이인데, 평상시 두 궁의 터전이 이제는 인평 대군의 궁으로 편입되어서, 오가며 볼 때 조종조 때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미 지난 일은 따라잡을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모름지기 잘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4월 4일 계미
정언 송몽석(宋夢錫)이 아뢰기를,
"이번의 두 능의 재변은 재랑(齋郞)의 보고 및 적간을 나갔던 사관들끼리 서로 전하는 말과 자자한 국가의 여론으로 본다면 천변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봉심을 나갔던 대신·예관 등의 서계로 본다면 인사(人事)의 소치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한편으로는 믿음이 가고 한편으로는 의심이 나서 허실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재랑도 역시 신하인데 만약 분명히 듣고 보지 못하였다면 차마 말하지 못할 변고를 어찌 감히 문득 선왕의 능에다 씌웠겠습니까. 그 사람의 지체가 하찮다 하여 부질없는 무고로만 밀어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봉심을 나갔던 여러 신하 역시 그 누가 선왕의 신하가 아니겠으며, 봉심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사실대로 계문하지 않고 성명을 속였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반드시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은 삼가 듣건대, 사관이 적간을 할 적에 중사(中使)를 지적하여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고 묻자, 중사의 말이 ‘천변이 아니라 하기는 과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어찌 감히 그렇게 서계할 수 있겠는가. 구두로 상달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재랑과 능지기가 똑같이 들은 바라 하며, 사관이 서계한 뒤에 또 옥당에 말하기를 ‘호미로 파낸 자국을 본 대로 상달하려 하였으나, 중사가 굳이 만류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산릉이 무너지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그 사유를 먼저 고유하고 날을 가려서 개수하는 법인데, 금번 봉심 때에는 선공 제조 신경진(申景禛)이 구규(舊規)를 따르지 않고 무너진 사토(莎土)를 편의대로 실어다 버리는 것을, 낭관이 선례를 들어 다투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재랑 및 여러 원역(員役)들이 다 같이 본 바라 합니다.
이번에 재랑의 보고대로 사관과 중사가 한 수작이 이와 같고, 호미로 파내었다는 말과 흙을 실어다 버렸다는 일이 또 이와 같은데도, 예조가 봉심을 하기도 전에 이미 인사(人事)의 잘못으로 귀결짓고 막중한 대례(大禮)를 서둘러 진행하자고 청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의혹과 비방을 불러일으킨 원인입니다. 아, 인심은 속일 수 없고 여론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니, 만약 천재인지 인사인지를 빨리 분간하지 않거나 결정이 분명치 않다면 일이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재랑의 보고가 옳다면 아무리 대신이라도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으며, 대신의 서계가 옳다면 어찌 재랑의 죄가 파직만 되고 말겠습니까. 만약 사관이 적간하여 서계를 할 적에 중사의 지시를 따르고 또 사사로이 호미로 파냈다는 말을 지어내어서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켰거나, 중사가 서계 작성에 가담하여 사관으로 하여금 사실대로 계문할 수 없도록 하였다면, 이 세 사람 모두가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이들을 모두 법사에 내려보내어 추문을 한다면 그 정상을 알아내어 그 죄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이처럼 소견이 양사(兩司)의 여러 동료들과 달라서 형편상 구차스레 용납받기 어렵습니다. 신의 관직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이에 집의 정태화(鄭太和), 장령 박수홍(朴守弘)·민광훈(閔光勳), 지평 이기발(李起浡)·홍주일(洪柱一), 헌납 성여관(成汝寬)이 송몽석의 비난과 지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기를,
"몽석이 허실(虛實)을 분간하려는 것은 자세하고도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의도에서였고, 태화 등은 중사와 사관이 수작한 말을 미처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장 거론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오윤겸이 상차하기를,
"두 능을 봉심한 뒤로 사람들의 의혹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가 하면 심지어 대각의 신하들이 연이어 인피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신이 늙고 병들어 어두워서 믿음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산릉의 막중한 일을 한결같이 의문으로만 남겨둘 수 없거니와, 더구나 재차 봉심을 하는 것이 참으로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삼가는 의리에도 나쁠 것이 없는 데이겠습니까. 다시 봉심하여 분명하고 미덥게 하는 도리를 다지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는 잘 보았다. 한 주서의 말은 태산보다도 무겁고 여러 재상의 견해는 터럭보다도 가벼워졌으니, 조정이 권위가 없음과 인심이 착하지 못함을 모두 알 만하다. 이번에 능이 무너진 재변을 천변(天變)으로 돌려야만 나만갑(羅萬甲)의 마음이 통쾌해질 것이다. 혹시라도 만갑의 무리가 적지 않다면 경을 헐뜯는 말이 또 분분해 마지않을 것이다. 참으로 마음 아픈 노릇이다. 재차 봉심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니 결코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이민구(李敏求)를 도승지로, 이준(李埈)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4월 5일 갑신
상이 하교하기를,
"목릉(穆陵)을 봉심할 적에 중관(中官)이 천변으로 단정하고서도 돌아온 뒤에는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면 이는 기만한 죄가 크고, 사관이 헛말을 꾸며 내어서 제 견해를 사실화하려 들었다면 이는 죄가 클 뿐만 아니라, 그 마음씀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사토(莎土)에 벼락의 흔적이 있는 것을 선공 제조 신경진(申景禛)이 그 흔적을 없애고자 하여 임의로 흙을 실어다 버렸다면 그 죄도 크며, 만약 별다른 정황이 없는 것을 참봉이 죄목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면 그 마음씀이 너무도 흉특하다. 이 세 사람을 모두 나문(拿問)하라. 내관 고견(高堅), 가주서 이상재(李尙載)는 초사(招辭)를 들은 뒤에 즉시 면질시켜 아뢰라."
하였다. 이에 신경진이 상소하기를,
"그저께 봉심을 마치고 나서 초둔(草芚)과 유둔(油芚)을 덮으려던 참에 무너진 사토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어서 역인(役人)들이 이를 밟고 다닐 판이기에 신이 미안스럽게 여긴 나머지 대신과 예관에게 말하고 제거하였습니다만, 그때 재랑이 만류한 일은 없었습니다. 이제 송몽석의 계사를 보니, 이는 반드시 헛말을 지어내 대간의 귀에 흘린 자가 있을 것입니다. 능관(陵官)과 한곳에서 면질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는 실로 나라를 걱정한 말인데도 누차에 걸쳐 실정과 다른 하교를 내리시는가 하면, 이어서 외직으로 전보하라는 명까지 있었고, 근일 나만갑(羅萬甲)의 상소 중 궁금(宮禁)이 엄격하지 못하다는 말은 곧 항간에서 서로 전하기는 하면서도 감히 상께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만갑만이 말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기는커녕 도리어 다른 일을 가지고 특별히 파직을 명하셨으며, 또 정백창(鄭百昌)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는 말씀이 화평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장차 우리 임금께서 이처럼 직언(直言)을 듣기 싫어하고 사닐(私昵)을 편애한다고 할 것이고, 유식한 사람들은 개탄하여 기상이 참담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스스로를 통렬히 꾸짖으시어 뉘우치는 뜻을 분명히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는 잘 보았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주강에 《시전(詩傳)》을 강독하였다. 마치고 나서 지사 홍서봉(洪瑞鳳)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능의 재변이 아무리 빗물 때문이라지만, 이것이 어찌 이상한 재변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갈수록 의혹이 쌓여서 국가의 난처한 일이 되었습니다. 비상한 재변을 만나면 당연히 비상한 조치가 있어야 하는 만큼, 모름지기 삼공·육경·양사(兩司)를 보내 일체 재심(再審)을 하여 허실(虛實)을 바로잡아야만 뭇사람의 의혹이 풀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결정하게 하였는데, 모두 재심을 하는 것은 일의 체모를 손상시킨다고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서봉이 또 차자를 올려서, 대신이 승지와 대간을 거느리고 가서 수리할 때 살펴보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신들이 또, 당초의 봉심에서 의문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와서 승지와 대간을 보낸다면 이는 헛소문에 동요되어 전일 대신의 말을 불신하는 결과가 되므로 결코 보낼 수 없다고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금부가, 내관 고견(高堅), 가주서 이상재(李尙載), 참봉 홍유일(洪有一) 등을 추문하고, 또 고견과 이상재를 면질시켰다. 고견이 공초(供招)하기를,
"봉심할 적에 사관이 신에게 소견이 어떠하냐고 묻기에 신이 본 대로 서계하라고 하니 사관 역시 그러겠다고 하였고, 참봉과 수복(守僕)에게 물으니 모두, 한밤에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봉심하니 이와 같았다고 하였는데, 별로 의심할 만한 말은 없었습니다."
하였고, 이상재는 공초하기를,
"능 위의 무너져 내린 곳이 과연 참봉의 첩보와 같기에 참봉과 수복에게 물어보니,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돌아와서 서계할 적에 무너져 내린 곳에 호미로 파낸 자국을 상달하려 하자, 중사(中使)가 ‘우리들은 참봉의 보고가 허위인지 사실인지만을 살필 따름인데, 어찌 딴말을 상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기에, 서계 중에 언급하지 않았는데, 옥당이 신에게 그 실상을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호미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중사가 이를 상달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감히 서계하지 않았다.’ 하였을 뿐, 이밖에는 털끝만큼도 천변(天變)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하였으며, 홍유일은 공초하기를,
"이날 한밤중에 비바람이 크게 일며 천둥 소리가 진동하고 번개가 번쩍여서 신과 수복이 모두 겁을 먹고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새벽녘에 정자각 수복이 와서 ‘두 능이 모두 무너졌는데, 대왕의 능이 더욱 심하다.’ 하였습니다. 천둥 번개 끝에 이처럼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과연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어두운 밤에 일어난 일이어서 분명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의 첩보에는 무너진 곳을 자로 잰 것과 천둥 번개가 친 상태만을 언급하였을 뿐, 천변이라는 말은 특별히 넣지 않았습니다. 무너져 내린 흙을 지레 제거한 일에 있어서는 사체(事體)상 미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즉시 수복을 시켜 알현(謁見)을 청하여 직접 개진하라고 하였으나, 수복이 재삼 아뢰려고 하다가 존엄한 자리여서 감히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신경진이 그 흔적을 덮으려 한 데 대하여서는 신이 아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세 사람의 공초가 이와 같고 고견과 이상재가 면질에서 한 말도 서로 틀리지 않습니다. 형추(刑推)하여 자백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모두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답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이제 그들의 공초 내용으로 본다면 고견은 천둥 친 일에 대하여 애당초 의심을 갖지 않았다고 하니 다시 물을 만한 것이 없으나, 이상재는 이미 고견과 서로 의논을 하고 호미로 파내었다는 말은 하찮은 것이라고 여겨 처음에는 계달하지 않았다가 다시 옥당에 말하여 품고 있던 생각을 다 상달하지 않은 듯이 하였으니 중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홍유일은 헛말이 생겨난 것이 비록 그가 전파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애당초 논보(論報)의 조어(措語)가 아리송함으로 해서 뭇사람의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니, 참으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송몽석(宋夢錫)이 인피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 많지만 그 핵심은 곧 두 건이니, 그 첫째는 고견이 천변이라고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재랑(齋郞)이 금지했다는 일이다. 고견이 천변이라고 했다는 말을 사관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중간에서 말을 지어낸 자가 있을 것이니, 이상재를 준엄히 국문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며, 중간에서 말을 지어낸 것이 분명하다면 그 언근의 출처를 조사해 내는 것이 좋겠다.
홍유일의 공초에, 수복을 시켜 알현을 청하도록 하여 수복이 재삼 아뢰려 하다가 준엄한 자리여서 감히 통하지 못하였다고 한 말은 변명에 가깝다. 이것은 재랑이 지어낸 것인 듯한데도, 본부 당상은 가증스런 인심과 풍속은 생각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연소배를 두려워한 나머지 끝내 분명히 회계를 하지 않으니, 오늘날의 일은 참으로 한심스럽다. 고견은 죄범이 없는 듯하니, 분간하여 석방하라."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세 사람의 공초 내용이 다 같이, 수재(水災)라고만 말하고 천변에 대해서는 애당초 의심을 갖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신들이 그들의 공술대로 상의하여 회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견이 천변이라고 한 말은 이상재가 이미 듣지 못하였으니, 그 언근은 이미 끊어진 것이므로, 중간에서 말을 지어낸 자가 반드시 있다 해도 조사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재랑이 흙 실어 가는 것을 금지하고자 하여, 수복을 시켜 알현을 청한바 수복이 준엄한 자리여서 감히 통하지 못하였다고 한 말이 변명에 가까운 점은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홍유일의 공초에는 흙을 지레 실어간 것이 미안하다고만 하였고, 천둥이 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들은 미처 적발하여 계품(啓稟)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엄지(嚴旨)를 받들고 보니 신들이 살피지 못한 잘못은 더더욱 피할 길이 없어 황공함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홍유일을 형추하여 자백을 받아내라."
하였는데, 그 뒤 헌부가 형추하라는 명을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며,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드디어 형추하여 중도(中道)에 정배(定配)하고, 또 이상재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4월 7일 병술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차자를 올려 판의금부사를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이번의 능의 재변은 실로 전고에 없었던 일이거니와, 헛소문이 나온 것은 또한 천재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만약 그 본원을 캐어 보면 그 죄는 말을 전한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애매한 일을 끝까지 다스린다면 도리어 대체를 손상시키게 될 것이고, 하나같이 너그럽게만 보아 준다면 무고(誣告)하는 행위를 다스릴 길이 없을 것이니, 오늘날 의율(擬律)을 올바르게 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으로 말한다면 애당초 봉심한 사람 중 하나인데, 어떻게 의논드리는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속히 파면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송몽석이 진술한 두어 마디의 긴요한 말을 사관이나 재랑이 다 같이 모른다고 하는데, 지금 만약 그 언근을 조사해 낸다면 사람들의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송몽석에게 말하여 그 말을 전한 자를 서계하여,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고 하라."
하였다. 몽석이 대답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두 능의 재변을 만나 대신이 이미 봉심하였으나 사람들의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으니, 만약 허실을 명확히 분간하여 뭇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불미스런 이름이 군상(君上)에게 돌아갈 뿐 아니라 선조의 능침에 대한 망측한 무고 역시 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걱정과 분노가 북받친 나머지 들은 대로 다 진술한 것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들은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만약 기어코 그 언근을 캐어 내겠다면 온 도로와 온 거리의 사람을 다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나그네는 길가에서 비방을 하고 장사치는 저자에서 수군거렸거니와, 현명한 군주가 그것이 근거 없는 비방이라 하여 문득 조사하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아무리 못났기로서니 어찌 겁을 먹고서 죄없는 사람을 끌어대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의 부질없는 말에 대한 죄만 다스리시면 그만이지, 어찌 기어코 언근을 조사해 내어서 사방의 이목을 놀라게 하여야겠습니까. 전하께서 기어코 조사를 하려 드신다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대저 신의 논열(論列)은 다만 들은 대로 진술하여 나라 사람의 의혹을 타파하고자 하였을 따름입니다. 어찌 감히 떠도는 말이 다 진실이라고 여겼겠습니까. 가령 신의 들은 바가 모두 사실이 아니고 또 사관과 재랑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두어 마디 긴요한 말 뿐이 아니라면 나라 사람들의 의혹은 반드시 이로 인하여 시원스럽게 풀어질 것이니, 신민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국가가 이 일을 처치하는 데 있어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나쁜 행위를 미워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지니고 있는 것인 만큼, 물러가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하라."
하였다. 이튿날 몽석이 인피하기를,
"신의 논열 중 두어 마디의 긴요한 말을 재랑이나 사관이 다 같이 모른다고 공초한 이상, 그 나머지의 일은 분간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렸습니다. 일을 말함에 있어 사실대로 논하지 못한 죄를 벌하소서."
하였는데, 본원이 처치하기를,
"능이 무너진 재변으로 인해 소문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의혹을 갖고 있으니, 그 허실을 분간하여 뭇사람들의 의혹을 타파하고자 한 것은 실로 국가를 위하여 할 말을 다한 것이지, 결코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상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기는커녕, 도리어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조사하게 하셨으니, 대간을 대접하는 도리에 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일이 선조의 능에 관계되는데 들은 바가 사실이 아니니, 형편상 관직에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감찰 민선(閔墡)이 소를 올려 능의 재변은 천재(天災)가 아닌 점을 밝혔다. 민선은 무인으로서 목릉 위안제의 감찰로 나갔다 돌아와서 이 소를 올렸는데, 이는 봉심갔던 여러 사람들에게 아첨하려는 의도에서 올린 것이다.
4월 8일 정해
헌부가 나만갑(羅萬甲)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이전부터 능이 무너지는 일이 있을 경우 반드시 고유제(告由祭)를 올린 뒤에 수축을 한 것은, 지극히 공경하여야 될 곳이라 감히 아무 때나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공감 제조 신경진(申景禛)이 지난날 봉심을 갔을 적에 조정에 아뢰지도 않고, 고유제도 올리기도 전에 무너져 내린 사토를 제거한 것은 함부로 처리한 죄가 큽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간원이 또 이 일을 논하였는데, 상이 다 따르지 않고 신경진을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4월 10일 기축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김수현(金壽賢)을 동지경연으로, 박서(朴遾)를 정언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응교로, 강대수(姜大遂)를 교리로 삼았다.
4월 11일 경인
간원이 아뢰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팔방에 은택을 베풀어서, 범죄의 경중을 논하지 않고 모두 석방하여 주었으니, 과거의 오점을 씻어 준 그 은택은 그지없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죄가 국가에 관계되어 사면할 수 없는 경우라면 결코 무분별하게 은택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은 역적 이공(李珙)006) 의 아들로서 다행히 완전히 석방되는 은택을 입었으나 당연히 먼 변방으로 내쫓아서 도성에 같이 살지 못하도록 하여야 되는데, 지금 석방하여 돌려보내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이욱(李澳)·이락(李洛)은 역적 이괄(李适)에게 빌붙어서 역적에 이름이 올라 있고, 정지문(鄭之問)은 상소 중에 차마 못할 말이 들어 있었으며, 강문익(康文翼)·이잠(李埁)·이모(李慕)·최응허(崔應虛)·임기지(任器之)·정석준(鄭碩儁)·황중윤(黃中允)·정양윤(鄭良胤)·홍경정(洪景艇)·윤성임(尹聖任)·곽천성(郭天成)·곽천호(郭天豪)·이담(李憺) 등은 역적 괴수의 도당으로서 더러는 삼사(三司)의 자리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흉역(兇逆)을 도와 주었고 더러는 잇따라 글발을 올려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는데도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역시 형정(刑政)이 잘못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유지(宥旨)가 내려지자 놀라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방송(放送)·양이(量移)·급첩(給牒)·서용(敍用)하라는 명을 모두 환수하소서."
하고, 헌부도 이 일을 논계하고, 또 논하기를,
"신칙(申恜)·심지청(沈之淸)·이원여(李元輿)·윤호(尹昈)·채유제(蔡有濟)·임건(林健)·최호(崔濩)·신서정(申瑞廷)·신경업(辛敬業)·이종영(李宗英)·박건갑(朴乾甲)·정급(鄭伋)·임원(任瑗)·전경(全璥)·이지호(李之皓)·유경갑(劉敬甲)·박홍유(朴弘猷)·이명(李明)·진호선(陳好善)·박규(朴規)·이청(李淸)·홍덕민(洪德民)·안전(安佺) 등은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더러는 주장하고, 더러는 부회(傅會)하였으니, 정지문·강문익 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 양이·급첩·서용을 하지 마소서."
하였다. 여러 달을 두고 논계하니, 정지문·이원여만을 석방하지 말라고 명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4월 13일 임진
주강에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시독관 정뇌경(鄭雷卿), 검토관 이시매(李時楳)가 나아가,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을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깊은 궁궐 안에서 생장한 자가 오랫동안 섬에 가 있으니, 맞지 않는 기후에 병을 얻게 될 것이 두렵다. 이번의 대사면에서 은택을 입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올 날이 없다. 옛말에도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따르고 나쁜 점을 바로잡는다.’고 하였으니, 받들어 따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뇌경 등이 또 아뢰기를,
"윤기(倫紀)에 죄를 얻은 사람까지도 대사면의 혜택을 입는다면 뭇사람들이 울분을 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죄의 경중에 따라서 참작, 처치한 것인 만큼 대신 역시 깊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4월 14일 계사
이때 목릉(穆陵)을 개수(改修)하는데, 건원릉(健元陵)의 제도에 의거하여 새 흙을 넣고 달구를 찧어서 봉분을 쌓도록 명하였는데, 어떤 이가 아뢰기를,
"원릉(園陵)을 처음 쌓을 경우에는 달구를 찧어서 쌓지만, 사토(莎土)를 개수할 때는 그냥 흙을 밟아서 봉분을 쌓는 것이 전례입니다. 지금은 달구를 찧어 쌓아서는 아니됩니다."
하였다. 대신과 예관이 아뢰기를,
"이번의 역사는 과거와 다른 점이 있으니 상규(常規)를 따를 수 없습니다. 달구를 쓰되 살짝살짝 찧어 쌓아서 진동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5일 갑오
춘신사(春信使) 이준(李浚)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서계하였다.
"봉황성(鳳凰城) 통원보(通遠堡)에서 산요(山拗)까지의 2백여 리 사이에는 촌락이 황폐하고 성첩이 퇴락되어 있었고, 십리보(十里堡)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국한(國汗)이 앉아 있는 마루를 보니 좌우의 호위군이 1백여 명에 불과했고, 문루에 올라서 성의 안팎을 두루 살펴보니 인가는 1만여 호쯤 되었으며 현존하는 인구의 수는 인가의 수에 못 미치는 듯하였는데, 그제야 비로소 선부(宣府)·대동(大同)의 패전에서 과반수 이상이 죽었다는 설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접대하는 즈음에 은근한 성의는 전보다 더 나았습니다."
4월 16일 을미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정언으로, 박명부(朴明榑)를 공청 감사(公淸監司)로, 김덕함(金德諴)을 우승지로 삼았다.
4월 17일 병신
헌부가 아뢰기를,
"공청 수사 이언척(李言惕)은 수졸(水卒)에게서 갈취하여다 권문(權門)에 뇌물을 쓰는가 하면, 금송(禁松)을 함부로 베어다 큰 배를 제조하여 그의 친지에게 주었다 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형조 정랑 권칭(權稱)은 역적 이기안(李基安)의 장인으로서, 기안이 베임을 당한 뒤에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버젓이 행공(行公)하였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도록 명하소서.
홍원 현감(洪原縣監) 이민환(李民寏)은 오랑캐의 궁정에서 무릎을 꿇어서 사대부의 대열에 들지 못한 지가 오래인데 갑자기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관직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정이 온통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누차 소를 올려 해직을 빌었는데, 이는 능의 재변으로 인해 봉심을 갔다 온 뒤로 말썽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이 출사(出仕)하라고 타이르자 윤겸이 더 불안하여 그만 정사(呈辭)하고 교외로 나가서 명을 기다렸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들어오라고 타이르자 윤겸이 또 늙고 병들어 사리에 어두움을 극구 개진하며 놓아 보내어 줄 것을 빌고, 이어 도성 문을 지레 나가버린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나만갑(羅萬甲)의 되잖은 말은 개의할 것이 못 된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지사 최명길이 아뢰기를,
"나만갑이 대신의 봉심을 불신하고 성급하게 엉뚱한 말을 하였으니, 가벼운 견책을 내리는 것은 불가하지 않으나, 정백창(鄭百昌)의 상소에 대한 비답만은 실로 미안한 데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 미안하다고 하는가?"
하자, 명길이 답하기를,
"예로부터 신하가 궁금(宮禁)을 경계하라고 하는 것은 임금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기 어려운 말을 하였으면 참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 언로를 열어야 하는데, 도리어 준엄한 비답을 내리셨으니, 이것이 어찌 최선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모를 그렇게 대접해서는 아니된다. 나만갑이 상소에서, 백창의 아내가 궁금에 드나들면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여염집 첩이 아양을 떠느라고 하는 짓이다. 지금 만갑은 이것으로 국모를 의심하였으니, 무슨 의도이겠는가. 설혹 이런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내가 먼저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모르는 일을 만갑이 알 수 있겠는가. 남들은 다 만갑이 파직된 것만 억울하게 여기고 국모가 무고를 입은 것은 보통으로 여기고 있다.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4월 19일 무술
황해 감사 남선(南銑),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에게 1년 더 유임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는 선과 두표가 모두 치적(治績)이 좋아서 최명길이 경연에서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4월 20일 기해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4월 21일 경자
과거에 양사(兩司)가 강학년(姜鶴年)의 죄를 논하면서 안율(按律)을 하라고 청하는 것을 상이 부처(付處)만 하라고 명한 일이 있었는데, 양사가 굳이 쟁집(爭執)하다가 이때 와서 드디어 정계(停啓)하고 은진(恩津)에 유배시켰다.
정언 조수익(趙壽益)이 아뢰기를,
"이길(李佶) 등이 처음에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애써 용서해 주신 성은(聖恩)을 힘입어서입니다. 이제 유배된 지가 이미 10년이나 되었고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데도 오히려 사면을 받지 못하고 배소(配所)에 그대로 있게 된다면, 끝내는 반드시 아들이 장가를 못 들고 딸이 시집을 못 가서 한을 품고 섬 안에서 죽고 말 것이니, 이것은 과연 성상으로서 차마 못 하실 일입니다. 예전에 한(漢)나라의 회남왕 장(淮南王長)이 모반을 하였는데도 문제(文帝)는 그의 네 아들을 모두 후(侯)에 봉하였더니, 그 당시 가의(賈誼)가 죄인의 아들을 높이 떠받드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논의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대사면을 내리는 날에 풀어 주어서 완전히 살려 준다면, 이는 실로 거룩한 미덕이 됩니다. 신은 소견이 동료들과 같지 않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에 장령 박수홍(朴守弘)·민광훈(閔光勳), 지평 홍주일(洪柱一)·이기발(李起浡)이 모두 논의가 서로 틀린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교리 김수익(金壽翼), 부교리 이시매(李時楳) 등이 처치하기를,
"국가의 법이 더없이 준엄하고 쟁집(爭執)의 내용이 대의(大義)를 위하여서인데도 이의를 제기하여 오로지 두둔만 하려고 들었으니, 그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수익은 체차하고, 수홍 등은 출사토록 하소서."
하니, 수익도 체차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수익이 다시 인피하기를,
"옥당이 신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했다고 지척하니, 이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홍 등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의 출사를 윤허하고 또 수익을 체차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양쪽이 다 옳다는 것인데, 한 일에 양쪽이 다 옳다는 것은 결코 구차스럽게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헌납 성여관(成汝寬), 정언 유황(兪榥)도 아뢰기를,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고 국강(國綱)이 진작되지 않아서 일종의 빗나간 논의가 임금의 미덕을 받들어 따른다는 명분을 가탁하여 잘못 비호하는 소지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한쪽이 옳다면 한쪽은 그른 법이지, 양립(兩立)이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모두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기를,
"일이란 양쪽이 다 옳을 수는 없으니, 구차스럽게 의견을 맞추려 들지 않는 것은 뜻이 가상합니다. 역적 무리를 두둔한 처사는 모두들 나쁘다고 하니, 수홍 등은 출사시키고 수익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4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역적의 자식은 법률상 놓아줄 수 없는 만큼 유배를 보내고 만 것만도 이미 법을 굽힐 대로 굽힌 것입니다. 성상의 마음이 하도 어지셔서 석방하여 돌려보내라는 명을 내리신다 해도, 나라의 법이 더없이 준엄한데 어떻게 집법자의 논의를 누그러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 정언 조수익은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여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따라야 한다는 명분을 가탁하여 문득 역적의 자식을 구호해야 한다는 말을 올렸으니, 이것을 만약 징계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반드시 임금은 임금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나라가 나라 꼴이 안 되는 데까지 가고 말 것입니다. 삭탈 관직하소서."
하고, 간원 역시 이렇게 논하였는데, 끝내 모두 따르지 않았다.
4월 25일 갑진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시전》 군자해로(君子偕老)·상중(桑中)장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衛)나라의 음란함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세족(世族) 재위(在位)자들이, 처첩을 서로 훔친다는 것은 너무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하니, 시독관 김수익(金壽翼)이 아뢰기를,
"이는 선강(宣姜)이라는 수악(首惡)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에서 하는 일을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 그림자보다도 더 빠르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악을 따르기는 쉽고 선을 따르기는 어렵단 말인가?"
하니, 검토관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선을 따르기는 마치 쌓아 올리는 것과 같고 악을 따르기는 마치 무너뜨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혼조(昏朝)의 일만 보더라도 중인 이하는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몇십 년도 안 되어 온 세상이 다 휩쓸렸으니, 악을 행하기 쉬움이 곧 이와 같다."
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을 호조 판서로,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윤전(尹烇)·황윤후(黃胤後)를 장령으로, 송희진(宋希進)을 지평으로, 이만(李曼)을 정언으로, 이성구(李聖求)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4월 26일 을사
금차(金差)007) 마부달(馬夫達)이 상호(商胡)를 거느리고 은 1만 7천 4백 75냥, 인삼 76근을 가지고 왔는데, 도독(都督)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를 시켜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장문(場門) 안에 진을 치고 무력으로 싸워 약탈하려다가 반신(伴臣)의 주선으로 군사를 철수하여 섬으로 들어갔다.
4월 28일 정미
김경여(金慶餘)를 헌납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심지원(沈之源)이 인피하기를,
"두 능이 무너진 일은 크나큰 이변인데, 개수(改修)도 하기 전에 부묘례(祔廟禮)를 앞질러 거행하였습니다. 그때 신은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잘못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였습니다. 또 근래 궁금(宮禁)이 근엄하지 못하고 기강이 날로 문란해져서 충성어린 곧은 말은 자취를 감추고 사기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서 통곡하며 눈물을 쏟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군덕(君德)을 도울 만한 한 마디의 말씀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백증(兪伯曾)·나만갑(羅萬甲)으로 하여금 위계를 넘어서 항론을 하다가 견책을 받게까지 하였으니, 신이 직분을 못다한 죄가 막심합니다. 어찌 감히 태연히 관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지평 이기발·송희진, 정언 심지한도 모두 인피하였는데, 그 사연은 지원의 것과 같았다. 대사헌 이현영(李顯英)만은 아뢰기를,
"부묘례의 경우는 태묘(太廟)에 고유(告由)했으면 달을 넘겨서 물려 거행할 수 없는 것으로, 예조 역시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교리 김수익(金壽翼), 수찬 이시매(李時楳) 등이 양사(兩司)를 처치하기를,
"현영·지한·희진은 출사시키소서. 지원은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은 과실을 범한 적이 있고, 기발(起浡)은 일찍이 차자를 올려 부묘례를 논하려다가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금방 그만두었다가 이제 와서 다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인피한 것은 처사가 뒤바뀌었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배(定配)한 죄인 한련(汗連)의 아들 명춘(命春)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아비 한련은 본시 횡성(橫城)에 살던 백성으로서 정묘년008) 9월에 일을 보러 원주(原州)로 가던 중 길에서 군병에게 붙잡혀서 묶여 왔습니다. 당시 그 이유를 물으니, 군병이 ‘목사가, 오늘 노상에서 만나는 사람은 상인이거나 행인이거나를 막론하고 모조리 묶어 오라고 군령(軍令)을 내렸다.’ 하였는데, 드디어 이인거(李仁居)의 역당(逆黨)으로 무함하여 의금부로 잡아가 마침내 정배시켰습니다. 억울한 사정을 하늘이 반드시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고, 또 죄인 막룡(莫龍)의 아들 응효(應孝)가 상언하기를,
"신의 아비 막룡은 횡성 원촌(遠村)에 살았는데, 정묘년 9월에 현리(縣吏)가 관가의 화속(火粟)을 수확한다며 불러모아 놓은 것을 원주(原州)의 군인이 그대로 붙잡아다 목사에게로 넘기더니, 다시 인거의 무리로 지목하여 의금부에서 공술을 받은 다음 먼 곳으로 정배하였습니다.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는데, 의금부에 계하(啓下)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조강(朝講)을 명하신 뒤에 간원의 두 사람이 마침 차출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진작 나와 사은(謝恩)했어야 하는데, 이번에 강관(講官)들이 다 모였다가 간원의 두 사람이 나오지 않음으로 해서 드디어 강(講)을 중지하게까지 하였습니다. 대간도 신하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신들도 미리 아뢰어 처리하지 못한 잘못이 없지 않으므로 황공한 나머지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참으로 놀랍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정언 심지한 등이 이 문제로 인피하였으나 체직시키지 않았다.
4월 29일 무신
전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졸(卒)하였다. 정귀의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인데, 만력(萬曆)009) 경인년010) 에 급제하여 선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무술년에 아경(亞卿)에 올랐고, 신축년에는 예조 판서가 되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니,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은 기간이 무려 40년이나 된다.
정귀는 기개가 뛰어나고 식견이 넓었으며,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이 늘 대체(大體)를 잡고 포용하기에만 힘썼다.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도 아무리 고문 대책(高文大冊)일지라도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하므로 마치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짓는 것 같았으나, 문장이 좋아서 사람들의 입에 널리 회자되었으니, 그의 민첩한 재주는 남들이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혼조(昏朝) 때 이이첨(李爾瞻)이 권병을 농락할 때 폐모론(廢母論)이 한창이었지만, 정귀는 끝까지 정청(庭請)에 참석하지 않았고, 대론(臺論)이 너무 준엄하여지자 교외로 나가서 명을 기다렸는데, 마침내 큰 화를 면하였다. 반정 후에 융숭한 은총을 받아서 드디어 정승에까지 올랐다가 이때 와서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정귀는 예조 판서를 아홉 번 지내고 문형(文衡)을 두 번 맡았으며, 자신은 정승에 오르고 두 아들과 한 사위도 모두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내외손이 모두 수십 명에 달하였다. 그가 졸하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조문(弔問)하였고 세자도 정귀를 사부(師傅)로 모신 적이 있어 몸소 조문을 가니, 그 집안을 모두들 영화롭게 여겼다. 그러나 어떤 이는 우유 부단한 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주강에 《시전》을 강독하였다. 강이 끝나고 동지사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전랑(銓郞)이란 예사로운 직임이 아닙니다. 전일 의망에 오른 사람이 모두 현재 기대를 받는 사람들임에도 더 천망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이는 정체(政體)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사체(事體)란 사람의 현부(賢否)를 가리는 것뿐인데, 만약 종전대로 의망하여 등록(謄錄)하듯이 한다면 이조는 어디다 쓰겠는가."
하였다. 성구가 또 아뢰기를,
"근래 대간이 조수익(趙壽益)을 논핵할 적에 ‘호역(護逆)’ 두 글자를 씌우고 있는데, 이는 바로 혼조(昏朝)의 흉인(兇人)들이 한 시대의 입을 틀어막던 말로 오늘날에 이런 말이 다시 들리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역’이라고 하지 않으면 죄를 씌울 만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성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형방 승지로서 국문에 참석하였는데, 흉모(兇謀)가 어지러워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공(李珙)011) 을 역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수익의 논핵은 성상의 미덕을 잘 받들어 따르고자 한 데 불과합니다."
하였다. 승지 홍명구(洪命耉)가 아뢰기를,
"주상께서 그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길(李佶) 등을 놓아 보내는 것이 비록 성덕이기는 하나, 일종의 논의가 기어코 그를 구호하여 입절(立節)의 바탕을 마련코자 하는 것이야 어찌 공심(公心)에서이겠습니까. 이 논의는 수익 한 사람 뿐만이 아니니, 나이 많고 벼슬 높은 사람까지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검토관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근래 공을 두고 역적이 아니라며 사죄(死罪)를 내리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고 하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니, 인심이나 세도(世道)가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하였다.
4월 30일 기유
목성(木星)이 여귀성(輿鬼星)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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