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신해
대사간 정온(鄭蘊)이 상소하기를,
"두 능이 무너진 변고가 천변(天變)이라고 한다면 두 대신의 계사가 그처럼 명확하고, 인사(人事)라고 한다면 당초 감독관이 정성들여 쌓지 않은 죄를 어찌 예사로 추고하고 말 수 있겠습니까. 경기 내에는 귀천(貴賤)의 분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비로 인하여 무너졌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두 능의 흙만이 하룻밤의 비에 모두 무너진단 말입니까. 어떤 이는 두 능의 형제(形制)가 여느 능침과 달라서 쉬 무너진 것이라고 하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역시 이상합니다. 국릉(國陵)의 형제란 나름대로 정해진 법규가 있습니다. 신으로서는 감히 알 수 없으나, 어떤 사람이 그런 새로운 형제를 창출하여 그처럼 쉬 허물어지도록 하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은데 그런 말을 만들어 내어 성상의 귀를 혼란시켜서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려는 마음을 해이해지게 한 것이라면, 그 불량한 행위는 막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날 천변으로 돌리지도 않고 인사로 돌리지도 않은 채, 어물어물하기만 하며 귀착시킬 곳이 없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선왕을 받들고 효도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수재와 화재가 무슨 다를 바가 있기에 능침이 화재를 입게 되면 망곡(望哭)하고 변복(變服)하는 예가 있는데 오늘날은 수재이기 때문에 유독 변복하는 의절이 없으니, 어째서입니까? 신은 듣건대, 예전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 영왕궁(榮王宮)에 불이 나서 그 앞에 있는 궁전까지 탔을 적에, 어떤 이가 이는 천재가 아니므로 불을 낸 사람을 옥에 가두고 화인(火因)을 캐어 물어야 한다고 청하니, 왕단(王旦)이 혼자 나서서 아뢰기를 ‘처음 불이 났을 적에 폐하께서는 자책(自責)하는 조칙을 천하에 내리셨고, 신들도 모두 글을 올리고 대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죄를 사람에게 돌린다면, 어떻게 믿음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불이 난 자취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늘의 꾸중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아, 사궁(私宮)의 화재를 선조의 능침의 수재에 비할 때 어느 쪽이 무겁고 어느 쪽이 가벼우며, 자책하는 조칙을 재변을 소홀히 한 뜻에 비할 때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겠습니까. 예전의 대신은 대죄하기 위하여 글을 올렸으나 오늘날의 대신은 대죄하고 나서도 금방 변명을 하며, 예전의 대신은 불을 낸 자취가 있는 화재를 가지고도 하늘의 꾸중으로 돌렸으나 오늘날의 대신은 인재(人災)라는 자취가 없는 수재를 예사롭게 보아넘기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길사와 흉사는 서로 뒤섞일 수 없다고 합니다. 성인이 곡(哭)을 한 날에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도 실로 하루 이내에는 남은 슬픔이 아직 다 가시지 않기 때문인데, 더구나 곡을 하여야 할 경우에 곡을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지 않아야 할 경우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선조 능침의 재변이 곡하여야 할 흉사가 아니며, 부묘(祔廟)의 예식이 노래불러야 할 경사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노래 부를 일과 곡할 일이 같이 겹쳐지고 길사와 흉사가 서로 뒤섞였을 경우에는 당연히 곡을 먼저 하고 노래를 뒤에 부르며, 흉사를 먼저 치르고 길사를 뒤에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예조가 날을 잡을 때 며칠만 물려 잡아서 부묘하는 길사를 능침을 보수하는 흉사보다 먼저 거행토록 한 처사는 무엇입니까.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아무리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해도 결국 선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전하를 잘못된 처사로 빠뜨린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예조의 당상과 낭청은 파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아, 능이 무너진 변고가 이 어떠한 재변입니까. 사유를 보고하기 전에는 당연히 흔적을 남겨두고 성상의 명을 기다렸어야 하는데, 신경진(申景禛)은 마음대로 사토(莎土)를 제거하여 그 흔적을 덮으려 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신경진은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신이 듣기로는 14일 천둥 번개친 소리가 안으로 도성에서부터 밖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까지 들리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합니다. 마침 그날 밤 능에 변고가 있었다면 능을 지키는 관원으로서 사실대로 첩보(牒報)한 것이 무슨 죄가 되기에 누차 형신(刑訊)하여 죄를 돌릴 소지를 만든단 말입니까. 이 뒤로는 불행히 태조 능침의 흙을 파 가는 자가 있더라도 전하께서 소식을 들을 길이 없게 될까 두려우니, 또한 서글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형조 참의 나만갑(羅萬甲)은 오랫동안 폐치되었다가 기용되어 서둘러 우직한 글을 올렸으니, 신이 아직 그 소를 다 보지 못하여 진언한 것이 과연 모두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파척(罷斥)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신은 개탄스럽습니다.
신은 듣건대 사람이 궁하면 본심으로 돌아가고 당기면 반드시 늦출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귀양간 여러 사람들이 사방에서 갖은 고생을 한 지가 이제 이미 십여 년이나 되었으니, 대사면을 내리는 오늘날을 당하여 양이(量移)하거나 석방한다면 실로 당겼다 늦추었다 하는 도리에 합당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양사(兩司)의 신하들이 다시 논핵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아,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런데, 더구나 가장 가까운 친척 사이이겠습니까.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 세 사람은 곧 선왕의 혈손으로서 섬으로 유배된 지 지금 여러 해가 됩니다. 당시 장성하던 자는 이미 노쇠해졌고 어리던 자는 이미 장성했는데, 남자는 장가를 들지 못하였고 여자는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남자는 그래도 괜찮으나 애처로운 저 과년한 여자는 끝내 섬에서 늙어 죽으라는 말입니까. 전하께서 위로 선왕의 지극하신 뜻을 본받고 아래로 골육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특별히 방면을 명하시어 친히 해야 할 사람을 친히 하는 도리를 다하였으니, 대신(臺臣)이 된 자는 의당 그것을 잘 받들어서 우리 임금님의 미덕을 완성시켜 드려야 합니다.
전 정언 조수익은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으므로 품고 있던 생각을 개진하였는데, 이를 공격하는 자가 사면에서 들고 일어나, 첫째로는 호역(護逆)한다 하고 둘째로는 입절(立節)한다 하여 기어코 삭직을 시키고야 말려 합니다. 아, 호역한다느니 입절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지난날 사람을 공격하고 모함하던 죄목인데, 이미 사라진 말들을 오늘날 다시 들추어 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일을 가지고 주상께서 구언(求言)하실 때 함부로 아뢰었으니, 한번 출사하여 직무를 본다면 반드시 수익과 죄가 똑같은 것입니다. 신이 어찌 그것을 헤아리지 않고 가벼이 출사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서둘러 신의 소장을 계하하시어 쓸 만하면 채용하시고 쓸 수 없으면 속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유념하여 채용하겠다."
하였다. 헌납 김수익이 아뢰기를,
"정온은 대신의 말은 믿지 않고 길에 떠도는 말만 믿습니다. 또 부묘례를 물려 거행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선왕의 은혜를 저버린 처사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해가 너무도 부족한 말이고, 무너져 내린 흙을 실어다 버린 것을 가지고 흔적을 덮어 없애려는 의도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정과 거리가 아주 먼 말입니다. 또 능관(陵官)의 첩보가 분명치 않으면 의당 죄를 들어 견책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사실대로 보고한 것이므로 죄를 줄 수 없다고 말하였고, 역적에게 빌붙은 대악(大惡)은 석방할 수 없음에도 도리어 양사의 논핵을 너무 심한 처사라고 하였으며, 역적 이공(李珙)의 모든 자녀들은 이미 속적(屬籍)이 끊어졌음에도 선왕의 혈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이 이상의 여섯 조항에서 절절이 서로 같지 않으므로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수익이 아뢰기를,
"길 등을 석방하지 말라고 하는 계청은 실로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하여서입니다. 그럼에도 정온은 버젓이 소를 올려 구제할 기반을 마련하였는가 하면, 또 집법관의 논핵을 지척하여 사람을 공격하고 모함하는 행위로 지목하였으니, 거침없이 법을 무시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김수익이 소견이 서로 같지 않다는 여섯 조항을 들어 인피한 것은 실로 영합하여 빌붙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충직한 신하를 함부로 논박한 것은 정인 군자(正人君子)를 해치려 한 죄를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상차하기를,
"신이 어둡고 망령되어 교외에 나가 대죄하고 있는데 누차 승지를 내려보내어 한결같이 재촉하시니, 신은 참으로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짤막한 소로 신의 심정을 대략 진술하여, 부끄럽고 불안하여 결코 무릅쓰고 있을 수 없는 형편을 밝히고 나서 천청(天聽)이 돌이켜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삼가 신에게 내리신 비답을 받드니 ‘흉패한 무리들이 선동하는 말은 언짢아할 것이 못 된다.’고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다 읽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성인의 마음은 화평하고 너그러워서 사람을 상대할 때 너무 심하게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임금과 신하 사이는 부자(父子)간과 같으니 나쁜 면이 있으면 가르쳐 경계하고 죄과가 있으면 꾸짖고 벌을 내려서 기어코 개과천선하여 선으로 돌아가게 하여 성스런 교화 속에서 잘 길러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 ‘흉패(兇悖)’란 두 자를 느닷없이 신하의 몸에 가하십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근래 말씀이 대부분 지나치시니, 이는 참으로 성학(聖學)을 닦음에 있어 마음 공부에 힘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본원(本源)이 올바름을 잃는 것을 면치 못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일에 따라 발로되어 문득 희노(喜怒)의 감정에 딸려가 기(氣)가 멋대로 하고 이(理)는 사라지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사이에 이처럼 박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폐해는 장차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너무도 두려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참으로 지나쳤다."
하였다. 윤겸이 정온의 상소에 자신을 비난한 말이 들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차자를 올려 변백을 하고, 또 아뢰기를,
"봉심하던 날 새 능의 제도가 건원릉의 제도와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들은 대로 서계하여 장래의 걱정을 막으려 하였던 것인데, 생각지 않게도 오늘날 그것이 도리어 죄안(罪案)이 되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온은 사리를 따져 보지도 않고 근거없는 망언을 모아 사람을 논박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그의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 것이다."
하였다.
금차(金差) 마부달(馬夫達)이 상호(商胡) 1백 60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왔다.
5월 3일 임자
상이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나서 지경연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홍유일(洪有一)의 죄가 비록 무겁기는 하나 천변이라고 망령되이 말한 것 때문에 국문하는 것은 미안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묘례(祔廟禮)를 물려 거행하지 않은 일이 지금에 와서 시끄럽게 떠들 문제는 아니나, 이 말을 주장한 자가 아직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따르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시끄럽게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또 부묘례를 거행하던 날 악기를 울리고 가무(歌舞)를 한 것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악기를 연주한 의절은 원종 대왕(元宗大王)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곧 열성(列聖)의 영혼께서 흠향하시도록 연주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명(幽明) 사이의 예절이 차이가 있는 듯하나 어버이를 위하는 정리에 있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자, 명길이 아뢰기를,
"임금에게 잘못이 없더라도 반드시 과격한 논핵을 펴는 것이 비록 저 자신에게 있어서는 알맞지 않겠지만, 임금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래도 아부하고 비위 맞추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주상께서는 좋은 말은 가려서 따르고 좋지 못한 말은 꾸짖어 뭇신하들을 너그럽게 포용하셔야 됩니다."
하였다.
강대수(姜大遂)를 집의로, 변시익(卞時益)을 지평으로, 박서(朴遾)·김종일(金宗一)을 정언으로, 김경여(金慶餘)를 이조 정랑으로, 김령(金坽)을 사간으로, 김덕함(金德諴)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종일은 경주 사람이다. 일찍이 이명준(李命俊)이 영덕(盈德)에 귀양가 있을 적에 그를 찾아가 글을 배우며 아버지처럼 섬긴 일이 있고, 발신함에 있어서도 명준이 힘껏 천거하여 청반(淸班)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배신하고 돌아서서 동료들에게 "내가 일찍이 아무개에게 글을 배웠지만 그의 행위를 볼 때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들 놀라워했다.
5월 6일 을묘
집의 강대수가 아뢰기를,
"이길(李佶) 등을 석방하라는 하교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덕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두 신하가 인화(仁化)에 젖어 전하의 뜻을 따르려 하는 것은 단연코 임금을 사랑하는 순수한 심정에서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구호하려 든다고 죄를 주려 하니, 이것이 어찌 실정에 맞는 죄목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이와 같으므로 감히 구차스럽게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장령 윤전(尹烇), 지평 송희진(宋希進), 헌납 김수익(金壽翼), 정언 박서(朴遾)가 다 같이 지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부교리 윤구(尹坵), 수찬 이시매(李時楳) 등이 처치하여, 양사 모두 출사시키되 강대수만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간원이, 대수는 왕법의 지엄함은 생각지 않고 감히 부추키는 꾀를 내었으니 파직시키라고 논계하고, 헌부 역시 이렇게 논계하니, 상이 답하기를,
"강대수가 인피한 사연은 언론이 매우 마땅하니 죄줄 만한 일이 없다. "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8일 정사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정태화(鄭太和)를 응교로, 조석윤(趙錫胤)을 교리로 삼았다.
5월 11일 경신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백 70여 명이 상소하기를,
"도학(道學)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선유(先儒)는 백대의 종사(宗師)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제왕 가운데 사문(斯文)에 뜻을 둔 사람치고 선유를 숭장(崇奬)하여 도학을 흥기시킬 바탕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문묘에 봉향하고부터 후세의 선비로서 사문에 공이 있는 자는 으레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신라에서는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 고려에서는 안유(安裕)·정몽주(鄭夢周), 본조에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다섯 사람이 모두 그러한 사람입니다. 명종·선조의 시대에 와서는 이황을 뒤이어 유림의 종사(宗師)가 된 이가 두 사람이 있으니, 바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입니다.
이이는 천품이 매우 뛰어나고 총명이 절륜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도(道)를 구할 뜻을 품고 비루한 속학(俗學)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백가(百家)를 섭렵하고 이교(異敎)를 드나들었으나, 이윽고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반성을 하였으니, 단 한 번의 변화로 깊은 경지에 도달한 그의 도학은 지(知)와 행(行)이 겸비하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도학으로 꽉 찼었습니다. 따라서 정미한 도체(道體)를 진작 의심없이 환히 꿰뚫어 보았음은 물론, 또한 그 규모가 굉원(宏遠)하고 체용(體用)이 완비되어, 임금을 선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전성(前聖)을 이어받아 후학을 계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 성인의 경지에 도달을 못할지언정 소성(小成)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정(程)·주(朱)의 진맥(眞脈)을 깊이 체득한 데가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저술에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배우는 자의 일용 공부에 더없이 절실하거니와, 《성학집람(聖學輯覽)》은 제왕이 닦아야 할 학문의 요점이 골고루 갖추어져서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또 《동호문답(東湖問答)》은 분명한 체(體)와 적절한 용(用)의 실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에 대한 여러 글들은 여러 선유(先儒)들이 아직 확정하지 못한 논리를 단정하기에 족합니다. 이러한 글들이 모두 남아 있으므로 이를 상고하여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들어온 이래 좀처럼 나오지 않고 늘 물러나 있기만 하다가 늦게서야 선조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서 계미년012) 변란 때 병조 판서를 위임받았습니다. 굉원한 계책이 치밀하고 동작마다 기의(機宜)에 들어맞아서 선조께서 거는 기대가 갈수록 커지니, 소인배들의 시기가 더욱 가중되어 보이지 않는 모함과 드러난 배척으로 기어코 헤아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성명의 통철한 지감을 힘입어 사(邪)와 정(正)은 저절로 판명되었으나, 불행히도 복이 없어서 배운 경륜을 다 펴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으니, 뜻있는 선비들은 오늘날까지도 통한스러워하는 바입니다.
신(臣) 성혼은 천품이 돈후하고 장중하여 독실히 배우고 힘써 실행하여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에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小學)》·《가례(家禮)》로 준칙을 삼았으며, 소신의 엄정함은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고 효제의 품행은 신명과도 통할 만하였으며, 덕기(德器)가 성취됨에 따라 표리가 한결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신 이이가 그의 독실한 면은 미칠 수 없다고 매번 말하였습니다. 일찍이 이이와 사귀며 절차 탁마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고 도가 통하였습니다. 그 뒤 이이는 벼슬에 진출하여 세도(世道)를 담당했고, 성혼은 시골에 묻혀 살면서 비록 은지(恩旨)에 쫓겨서 이따금 연하(輦下)에 나아오기는 하였으나, 그의 속마음은 늘 산야를 잊지 못하였습니다.
계미년에 이이가 소인들의 모함을 받았을 당시 성혼은 서울에 와 있으면서 글을 올려 이이를 변호했다가 드디어 한쪽편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를 입었고 나중에는 정인홍(鄭仁弘)의 추악한 비난을 받아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선왕의 거룩한 마음으로도 끝내 보존해 주지 못하여, 황천에서 원망을 품고 있는 지가 벌써 수십 년째입니다. 우리 성명께서 등극하시어 비로소 신원되었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이 흥성하느냐, 침체되느냐 하는 일대 기회로써 그 사이에 어찌 가로 막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 두 사람은 오현(五賢)을 뒤이어 태어나서 도학을 강명(講明)하여 오묘한 이치를 발휘하였습니다. 무릇 이기 이합(理氣離合)·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의 학설은 여러 선유들의 논리와 서로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반복하여 분석해 보면 귀추에 가서는 가려진 것을 밝히고 빠진 것을 보완하여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을 확충하고 아직 미치지 못한 곳을 바로잡았으므로 동방 이학(理學)의 근원이 여기에서 자못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으니, 참으로 거룩하다 할 만합니다.
대저 두 신이 우리 도학에 있어 그 공덕이 이와 같은데도 받들어 보답하는 은전은 여태 소식이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신들의 죄이자 또한 성세(盛世)의 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금 성화(聖化)가 다시 새로워지고 있음을 만물이 다 함께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참으로 사풍(士風)을 고무시켜서 도맥(道脈)을 배양할 일대 기회이기에, 신들이 감히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문(斯文)의 지중함을 깊이 생각하고 많은 선비들의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두 유신의 문묘 종사를 의정케 하신다면 그 다행스러움 이루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은 비록 착한 사람이기는 하나 도덕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고 있으니, 막중한 문묘 종사의 예전을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이는 도학이 고명하고 성혼은 품행이 독실하여 참으로 백대의 유종(儒宗)이라 할 만하니, 문묘 종사의 논의는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론으로 한번 알력이 생긴 뒤부터 훌륭한 사람을 시기하고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속속 일어나서 왕왕 유언 비어를 지어 내어 비방, 중상할 계책으로 삼았다. 상의 하교에서 이른바 도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는다는 말도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시형 등은 시세도 헤아려 보지 않고 노유(老儒)들에게 자문도 구하지 않은 채 부질없이 소회를 개진하였다가, 선대의 대현으로 하여금 도리어 소인배들의 추악한 헐뜯음을 받게 하였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9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역사-편사(編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012] 계미년 : 1583 선조 16년.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이이는 도학이 고명하고 성혼은 품행이 독실하여 참으로 백대의 유종(儒宗)이라 할 만하니, 문묘 종사의 논의는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론으로 한번 알력이 생긴 뒤부터 훌륭한 사람을 시기하고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속속 일어나서 왕왕 유언 비어를 지어 내어 비방, 중상할 계책으로 삼았다. 상의 하교에서 이른바 도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는다는 말도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시형 등은 시세도 헤아려 보지 않고 노유(老儒)들에게 자문도 구하지 않은 채 부질없이 소회를 개진하였다가, 선대의 대현으로 하여금 도리어 소인배들의 추악한 헐뜯음을 받게 하였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관학(館學)에서 소를 올릴 적에 시기하는 무리들이 명륜당에 모여 이의를 제기하고 이어 건복(巾服) 차림으로 대궐 앞을 걸어서 지나가면서, 성균관 유생에게 축출당하였다고 외쳐대며 상이 듣고서 놀라 노여워하도록 부추기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동학(東學)으로 가서 생원 채진후(蔡振後)를 소두(疏頭)로 세워 상소하기를,
"송시형(宋時瑩) 등이 고(故)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의 종사 문제를 가지고 유생들의 원점(圓點) 시간을 틈타 감히 진소(陳疏)할 계획을 내었는데, 이 말이 한번 발의되자 많은 유생들이 일제히 분개하였습니다. 신들이 비록 이이·성혼 두 신의 학술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이의 사직소 및 선조 대왕께서 성혼의 죄를 책한 전교로 볼 때 종사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이가 무진년013) 에 부교리를 사직하면서 올린 소에서 ‘소시적에 도학을 찾았으나 학문의 방향을 몰라서 제가(諸家)를 다 섭렵하여 보았지만 귀착지는 잡지 못하고, 신세가 불행하여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서 슬픔을 달래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에 드디어 불교에 빠져들어 산속으로 달려가 불교에 종사하였다가, 오장을 다 끌어내어 씻어도 가시지 않을 오점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끄러움과 격분에 북받친 나머지 죽을 길을 찾았습니다.’ 하였고, 또 ‘옛날부터 석씨(釋氏)의 해독에 빠진 사람치고 신과 같이 특별히 깊이 빠진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어서 나온 말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그가 처음 상사(上舍)에 선발되어 알성(謁聖)을 할 적에 그가 일찍이 이교(異敎)에 물들었었기 때문에 성묘(聖廟)의 통알(通謁)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하면, 묘정(廟庭)의 통알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데, 하물며 문묘의 종사이겠습니까. 이러고 보면 이이가 문묘 종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에 있어서는 임인년014) 선조 대왕께서, 성혼을 삭탈 관작하자고 한 양사(兩司)의 계청에 답하기를 ‘간흉(奸兇)과 무리를 짓고 군부(君父)를 저버린 죄만으로 정죄하라.’ 하였고, 그 전지 내에 또 이르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서울을 핍박하였는데,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하루거리 이내의 경기 지역에 있으면서도 변고를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가 그의 거처를 지나가던 날에도 배알하지 않았다. 그 뒤 왕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무르고 있을 적에 그가 멀지 않은 곳에 피란을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간곡히 불렀으나, 처음에는 말이 없다는 핑계를 대더니 말을 보내어 다시 불러도 끝까지 나오지 않다가, 성천(成川)으로 옮긴 뒤에야 비로소 왔다. 그러나 곧바로 북적(北賊)이 장치(獐峙)를 넘어오고 있고 왕세자는 용강(龍岡)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며 배행하지 않았다. 또 용강이 평양(平壤)의 적과 거리가 가깝자 의주(義州)로 질러 가서 보국(報國)은 잊고 자신을 보전할 계책만 세웠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군부를 버리고 국난(國難)에 달려오지 않고도 천토(天討)를 면하는 이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관작을 삭탈하고 난 뒤에 생원 한효상(韓孝祥)이 신원해 주라는 뜻을 상소로 개진하였는데, 그 비답에서 ‘너희들이 비록 성혼을 구제하려는 도당들을 따라 이처럼 소를 올리고 있으나, 그가 간흉과 결탁한 정상만은 덮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말은 공박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뜨려지고 덮으려 할수록 더 드러날 것이다. 심지어 성혼을 두고 큰 선비라고 하는데, 어찌 그처럼 선비를 모욕하는가. 선비의 명칭도 본디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설령 성혼이 글귀를 조금 익힌 것을 가지고 선비로 지목한다 해도, 이미 간흉과 일체가 되어 군부(君父) 버리기를 마치 헌신짝 버리듯 하였으니, 이는 바로 양주(楊朱)·묵적(墨翟)의 무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고 보면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한 이가 없는 만큼, 성혼이 문묘 종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들의 억견(臆見)으로 기어코 두 신에게 누를 씌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이의 출처는 자신이 다 말하였고, 성혼의 심적(心跡)은 성상의 비답이 엄존하는 만큼, 시비의 분간은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신들이 논계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대저 이이는 문장과 학문이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기에 족하니 현대부(賢大夫)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문묘에 종사하기에는 출처가 바르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습니다. 성혼은 또 이이에도 못 미쳐서 거리가 너무도 먼 데다 간흉과 무리를 지은 정상과 군부를 버린 행적은 수많은 눈이 본 바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 죄를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너그러운 성덕을 힘입어 복관(復官)의 은전을 입은 것만도 그 은혜가 작지 않은데, 도리어 관대한 은전을 믿고서 감히 문묘 종사의 의논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신들이 감히 구차스럽게 견해를 같이 하지 않고 기어코 전하 앞에서 분간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성균관에서 회의를 가질 당초에 재임(齋任) 윤유근(尹惟謹) 등이 얼굴을 붉히며 고함치기를 ‘소견이 이미 다른 이상 나가시오.’ 하였는데, 신들이 지적당하여 옆방으로 피신하여 나오자, 다시 사특한 말을 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마음대로 삭벌(削罰)하였습니다. 신들이 갈 곳이 없어서 동학(東學)으로 갔더니, 또 학관(學官)에게 단자를 올려서 몰아내도록 하였습니다. 아! 관학이란 바로 많은 선비들이 공부하는 집이지 어찌 저들이 독차지하는 곳이겠으며, 문묘란 곧 성현을 봉향하는 곳이지 어찌 사람마다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겠습니까. 뭇사람의 의논이 격앙되어 저절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국가 종사의 중대함을 아시고 신들의 공통된 논의를 살피소서. 그러면 사문(斯文)의 다행이겠습니다. "
하니, 답하기를,
"문성공 이이 등의 종사를 청하는 것은 너무도 참담되고 외람하다. 나도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였다.
5월 12일 신유
영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차자를 올리기를,
"유선(儒先)은 백세의 사표이고 공론은 국가의 원기인데, 유선이 모함을 당하면 사도(師道)가 없어지고 공론이 저지당하면 원기(元氣)가 병드는 법이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관학 유생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한 것은, 대개 선비들의 의논이 일제히 발의되어서 선현을 높이 받듦으로써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킬 기반을 마련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그 뜻이 또한 가상합니다. 앞뒤의 성비(聖批)를 살펴보건대, 하자가 있다는 비방이 있다느니, 너무도 참람하고 외람되다느니 하는 등의 하교는 신하들이 성상께 바라는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두 현신(賢臣)의 조예의 고하는 신들의 천루한 학색으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리학을 닦아서 동정과 언행을 반드시 성현(聖賢)으로 준칙을 삼아, 조정에서 임금을 섬길 때는 요(堯)·순(舜)과 주공(周公)·공자(孔子)의 도가 아니면 앞에서 개진하지를 않았고, 의리를 강명하여 후학을 계도한 것도 선유들이 밝히지 못한 점을 확충한 것이 많으니, 비록 백세의 종유(宗儒)라 하여도 될 것입니다. 문묘에 종사된 본조의 여러 선현과 비교하여 보아도 아마 부끄러울 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론이 비뚤어져 가고 시비가 뒤섞인 말세에 태어나 시속의 시기와 질투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고하를 단정짓는다면 이는 공통된 의논이 아닌 듯합니다.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중대한 일인 만큼, 만약 함부로 의논할 수 없다 하여 신중히 하는 뜻을 보이셨다면 큰 허물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하자가 있다느니, 참람하고 외람되다느니 하는 등의 말씀으로 하교하시어 많은 선비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공론이 온통 울분을 품고 있으니, 성현을 존숭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성상의 거룩한 뜻에 흠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신들은 또 하나의 개탄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당론(黨論)이 갈라지고부터 사람마다 각기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참으로 억지로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비들이 협의를 거쳐서 성현을 존숭하자는 소를 올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견해가 같지 않은 자가 있더라도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고 그 논의에 참가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심지어 따로 한 떼를 지어 맞서서 진소(陳疏)하여 못할 말이 없이 성현을 마구 헐뜯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어찌 선비의 좋은 풍습이겠습니까. 두 현신이 설령 문묘 종사에 걸맞지 않는다 해도 역시 선배 숙덕(宿德)이자 선생 장자(長者)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선비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어떻게 이토록 거침없이 함부로 모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버릇이 자라난다면 선비들이 어떻게 보합(保合)할 수 있겠으며, 공론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겠습니까. 인심과 세도가 날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드는 것이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심사 원려로 조속히 뉘우치는 뜻을 보이시어 사문이 진작되도록 하신다면 유림(儒林)의 다행이겠습니다. "
하니, 답하기를,
"채진후(蔡振後) 등이 국가의 처치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진소한 일은 너무도 경망한 행위이다. "
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지경연 이홍주(李弘胄)가 나아가 아뢰기를,
"어제 관학 유생에게 내리신 비답은 사연이 하도 준엄하여 선비들의 바람에 크게 어긋났습니다. 이는 포용하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자, 홍주가 아뢰기를,
"두 현신은 유림의 종장(宗匠)이자 후학의 모범이니, 문묘에 종사하자는 계청은 실로 현신을 존숭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습(士習)이 너무도 불미스럽다. 먼저 상소한 사람이 의견이 같지 않은 사람을 삭탈 관작하자고까지 청한 일은 마치 위협하는 듯하고, 나중에 상소한 사람이 조정의 처치도 기다려 보지 않은 채 지레 진소한 일은 너무 경망한 듯하니, 이 모두가 불미스러운 풍습이다. "
하였다. 검토관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당초 벌을 받은 사람은 두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몰아낸 일이 있었겠습니까. "
하였다.
5월 13일 임술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이 또 상소하기를,
"신들은 모두 몽매하고 비루한 자질로서 오랫동안 인재를 양성하는 덕화를 입었기에, 유현(儒賢)을 우러르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나머지 피를 토하며 글을 올려서 유현을 존숭하고 도학을 중요시하는 성조(聖朝)의 성전(盛典)을 이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약한 정성이 믿음을 받지 못한 까닭에 성상의 비답이 아득하기만 하였습니다. 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 경악할 뿐 아직 성상의 의도를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또 채진후 등의 상소 초본을 보니, 모함한 내용이나 비뚤어진 말이 하도 낭자하여 비록 정주(程朱)를 헐뜯던 범치허(范致虛)나 심계조(沈繼祖)의 모함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들은 늘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동이(同異)를 보합(保合)하여 다 같이 대도로 인도하고 있으니, 반드시 큰 잘못이나 어긋난 처사는 없을 줄만 알았지, 이렇게까지 인심이 나빠지고 사설(邪說)이 판을 칠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이 통탄스러움을 어떻게 가눌 수 있겠습니까.
그저께 신들이 진소하고자 성균관에서 발론하였는데, 생원 권귀중(權貴中)·박미(朴𥠦) 등 수십 인만이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사론(士論)이 일제히 발발한 뒤라 약간 명으로서는 버틸 수가 없자 곧바로 스스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의리를 들어 분명히 말해 주었는데, 그들이 물러가 동학에 모여 감히 추한 소를 올려서 저격할 계획을 달성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신들이 애당초 유선(儒先)을 표장(表章)하기 위하여 발의한 일이 도리어 횡역(橫逆)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신들로서는 눈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어 전하께 할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도덕의 고하란 나름대로 일정 불변의 논리가 있지만, 억눌리어 굽혀지기도 하고 드러나 펴지기도 하는 것은 모두가 인심의 선악과 세도의 오륭(汚隆)에 따라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같이 우뚝 선 공자께서도 양화(陽貨)와 환퇴(桓魋)의 훼방과 모욕을 받았고, 서하(西河)의 학자들이 자하(子夏)를 의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성인의 도덕과 존귀함도 역시 못 알아보는 사람은 있는 법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은 저서에서 맹자를 훼방하여 양웅(揚雄)에도 못 미친다고 하였고, 명 태조(明太祖)는 문묘에서 내치려고까지 하다가 유신(儒臣)들이 목숨을 걸고 간쟁(諫諍)한 뒤에야 그만두었고, 정(程)·주(朱)가 살아 있을 적에 정자를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혹 귀역(鬼蜮)이라 하고 혹 위학(僞學)이라 하면서 금지하는 등, 축출과 모욕을 마구 가하였습니다. 전고의 성현들을 꼽아볼 때 일시의 비방을 면한 분이 드물며, 세상을 마친 뒤에야 공론이 비로소 정하여졌습니다. 그런데도 맹자 같은 분은 천년을 두고 공격을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한 노릇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도를 담당한 자로서 거울삼아 살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이와 성혼의 어짊을 어떻게 감히 공·맹이나 정·주에 비기겠습니까마는, 그가 공·맹·정·주의 교훈을 심복하고 그 학문을 강명함으로 공·맹과 정·주의 한 가닥 도맥(道脈)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 역시 공·맹과 정·주의 무리입니다. 그러나 공·맹과 정·주도 이미 뜻밖의 모함을 면치 못하였고 보면, 이이와 성혼이 훼방을 당한 것쯤이야 참으로 괴이쩍어 할 만한 일이 못됩니다. 아, 이이의 어짊은 비록 채진후 무리로도 달리 지적할 만한 하자가 없어서 단지 소시적에 불교에 종사한 것을 들어 하자로 삼는데, 세속의 하찮은 소견을 가지고 더러 이 일을 논하는 자가 있으므로, 신들이 이를 한번 해명하여 보겠습니다.
선종(禪宗)의 그 법이 비록 이단이기는 하나, 심성에 대한 논설은 실로 정미하여 사람을 움직일 만한 데가 있습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참된 선비들이 구도(求道) 초기에 으레 그 속으로 흘러 들어갔으니, 장횡거(張橫渠)와 정명도(程明道)가 그 중 드러난 사람이고, 주자에 이르러서는 가장 심하였습니다. 주자는 나이 15, 16세에 곧바로 구도에 뜻이 있었으나 그 방향을 찾지 못하여 석씨(釋氏)에게서 이를 구한 나머지, 심지어 고승 도겸(道謙)을 스승으로 삼아 돌이킬 줄 모르고 깊이 빠진 지 십년이 넘어서 나이 24세에 이르러 비로소 연평(延平) 이 선생(李先生)을 찾아가 스승을 삼은 뒤에야 선학(禪學)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연평이 그의 벗 나박문(羅博文)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회(元晦)015) 가 처음에 겸개선(謙開善)에게서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모두 내면의 세계를 잘 체득하고 있다.’ 하였고, 주자의 문집 속에도 누차에 걸쳐 스스로 소시적에 선학에 종사한 일을 피력하여 배우는 자에게 경계를 하였습니다.
대저 유학이 정도이고 석씨가 사교라는 것은 세상에서 아무리 못난 자라도 알 수 있음에도 정·주 두 선현이 잘못 빠져들음을 면치 못한 것은 어째서겠습니까. 석씨의 학설이 나름대로 십분 이치에 가까운 데가 있기 때문에, 재질이 고명한 자가 구도하는 마음은 아주 간절하고 마음씀은 너무 예민한 나머지 쉽게 흘러드는 것은 형세가 진실로 그렇게 되어 있어서이니, 이이의 일도 역시 이러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이가 자신을 책망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의당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직 회개한 뒤의 높은 조예나 취하여 사법(師法)으로 삼으면 그만입니다. 어찌 초기에 범람히 드나든 잘못을 지적하여 그의 하자를 논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어코 이것을 가지고 하자로 삼으려 든다면, 앞으로 주자도 함께 공격하자는 것입니까.
채진후의 상소 속에 이른바, 이이가 알성할 적에 통알(通謁)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근거 없는 말입니다. 이이가 급제하기 전에는 동서(東西)가 아직 나뉘어지지 않고 청의(淸議)가 바야흐로 활발하여 생원 진사시의 장원을 유림이 더없이 선망하였습니다. 만약 이이의 출처가 좋지 못하다고 여겼다면 선뜻 장원을 허락하였겠으며, 또 장원을 허락하고 나서 알성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론이 나뉘어진 이후로 상대편의 하자를 찾기에 급급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이만은 도덕과 문장이 마치 푸른 하늘의 흰 해와 같아서 지적할 것이 없기 때문에 선학 한 가지만을 지적하여 구실로 삼고 있으니, 지각 있는 자가 들을 때 한번의 웃음거리도 못 됩니다.
성혼이 죄를 받은 전말은 이미 성상께서도 들으셨을 것입니다. 신묘년에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나면서 소위 일시의 명류라는 사람은 모두 유배의 화를 입었습니다. 성혼은 소인들의 미움을 가장 많이 받았으나 몸이 산야에 있고 또 본시부터 높은 명망이 있어서 그 죄를 꾸며 씌울 수가 없었습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 적들이 점점 죄어 왔는데, 성혼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산야에 있는 신하로서 현재 의죄(議罪) 중에 있으니, 국가에 비록 난리가 있다 해도 소명이 없는데 지레 궐하로 나아가는 일은 의리에 있어서 온당치 못하다. ’고 여겼습니다. 예전에 제(齊)나라가 병란을 당하였을 적에 왕촉(王蠋)이 산야에 물러나 밭을 갈고 있으면서 국난에 전혀 나오지 않다가, 연(燕)나라 군대가 죄어 오자 그제서야 비로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는 산야에 있는 신하는 조정에 있는 신하와 그 의리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을 할 경우에는 당연히 노차(路次)에 나와 성상을 뵙고 처분을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도성을 버릴 계획을 결정하여 그날로 곧장 임진(臨津) 나루를 건넜으므로, 도성 안의 사대부 중에도 미처 알지 못하고 있다가 새벽에 궁궐에 나아가서야 비로소 안 자도 있었습니다. 성혼은 파주(坡州)에 살고 있었는데, 관도(官道)에서의 거리가 20여 리나 되었습니다. 대가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황없이 달려가고자 하였으나, 강 나루는 이미 끊기고 군병들이 길을 막고 있는데, 대가는 벌써 멀리 가버렸습니다. 이에 산골짜기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광해군의 부름으로 인해서 곧장 행재소로 나아갔습니다. 대개 적이 침입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처음 받고 감히 궁궐로 달려가지 못한 것은, 진실로 성혼의 본뜻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긴 것이고, 도성을 버리던 날에 미처 마중을 나가지 못한 것은, 실로 사세가 어쩔 수 없어서이지 성혼의 죄는 아닙니다.
적신 이홍로(李弘老)는 본디부터 성혼을 미워하던 차에 선조께서 임진 나루에 이르렀을 때 성혼의 집과의 거리를 물으니, 홍로가 가까운 강뚝의 시골 집을 가리키면서 ‘바로 저 집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선조께서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 보지 않는가?’ 하고 물으시자, 홍로가 답하기를 ‘이런 때에 그가 어찌 선뜻 와 뵙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성혼이 광해군의 처소에서 행재소로 가자, 홍로가 또 참소하기를 ‘성혼이 온 것은 광해군을 위하여 내선(內禪)을 도모하러 온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아, 아들을 그처럼 믿던 증자(曾子)의 어머니도 증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헛말을 재차 듣고서는 들고 있던 북을 던져버렸습니다. 더구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야 참소를 누차 듣다 보면 어떻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후에 정인홍의 모함이 뒤이어 나와서 죄안이 성립되었습니다. 채진후가 상소 속에 삭탈 관작한 전지(傳旨)로 예를 든 것은, 결국 인홍의 참소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 예로부터 현인 군자가 현명한 군주를 만났다가도 마침내 참소와 이간을 당한 예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대의 일은 그만두고라도, 본조의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는 중종의 지우(知遇)를 받고 요(堯)·순(舜)의 정치를 기약하였다가 금방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하여 오늘날까지 유림의 애통한 일로 남아 있고,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은 세 조정을 거친 숙덕(宿德)이었는데도 먼 귀양지에서의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중종의 뜻이었겠습니까. 이는 간인의 모함에서 그렇게 된 데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한때 죄를 입은 일을 가지고 백세의 시비를 단정지어 ‘이 사람은 일찍이 선왕조에서 이 죄명을 입었었다.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만큼, 다시 현인이라 일컬을 수 없다.’고 한다면, 조광조나 이언적이 어떻게 사문(斯文)에 참여될 수 있겠습니까.
선왕 때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를 계청한 지 40여 년 동안에 선조께서 완강히 거부하면서 윤허하지 않고 미안스럽고 준엄한 비답을 내리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사대부와 선비들은 한 목소리로 선현을 위하여 변백(辨白)하였지, 언제 성상의 전교가 그렇다는 이유로 발의된 공론을 중지하였습니까. 오직 두 선현을 헐뜯는 정인홍의 무리만 들고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구실 거리로 삼았는데, 이것은 선비들이 다 같이 분노하는 바입니다.
아, 두 선현을 공박한 자도 인홍이고 성혼을 모함한 자도 역시 인홍입니다. 다 같이 군상의 준엄한 전지를 끼고 구실로 삼았으나, 지금 채진후의 무리는 인홍의 논리에서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을 취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그 마음의 소재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런데도 성명께서는 아직도 통찰을 못하시고 도리어 용서하는 기색을 보이시니, 이것이 신들로서 풀지 못할 의혹입니다.
아, 임금이란 조물주와 같아서 기쁨과 슬픔의 개폐를 시세에 맞추어 조정하는 법입니다. 바야흐로 성혼이 선조의 지우를 받고 있을 적에 높은 총애와 남다른 은수가 천고에 없던 바여서 심지어는 ‘나도 이이와 성혼의 무리에 들어가고 싶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필경에는 그 좋던 지우의 만남이 끝까지 온전히 유지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참소로 인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조광조의 일과 똑같은 일로서, 다만 성혼이 화를 당한 것이 조금 가볍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사문의 액운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두 선현의 일월과 같은 광명 정대함이야 언제 한 점의 가림이라도 받았겠습니까.
신들은 후생이어서 두 유신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를 외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도학 연원이 문묘에 종사된 선현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감히 가슴속의 진정을 진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도가 불행하여 빗나간 의논에 가로막힌데다, 또 성상의 하교를 본바, 성상께서도 아직 그 본말에 대해 환히 알지 못하시는 데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유감을 품고 선현을 경멸하는 무리들이 기회를 틈타 대들면서 사방에서 몰려올 것입니다. 하늘이 어찌하여 사도(斯道)를 도우려 들지 않는지, 신들은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비워 밝게 살피시고 사정(邪正)을 분별하시어 속히 신들의 소청을 윤허하시어, 도맥을 길이 보전하고 사설을 잠재우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문묘 종사의 예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고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시형 등이 다섯 차례나 소를 올리자, 답하기를,
"따르기 어렵다는 뜻은 이미 다 말하였으니 너희들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오윤겸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교외에서 병들어 있으면서 그저께 저보(邸報)를 보니, 관학 유생 송시형의 상소에 대한 답에 ‘하자가 있다는 비방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채진후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는 ‘너무도 참람하고 외람되다.’고 하였기에, 놀라움과 개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전하께서는 이이와 성혼의 학문과 도덕의 깊음과 선왕의 권우(眷遇)가 높았던 사실 및 말년에 참소와 모함을 입게 된 연유에 대해 경연 신하들이 진계나 또는 그의 논변과 저술을 통해서 반드시 깊이 살피고 밝게 변별하셨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모하고 존신(尊信)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온당치 않은 하교를 내리실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는바, 실로 성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본원이고 유현(儒賢)은 국가의 원기입니다.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갈림에 있어 참으로 알지 못하고 실제의 견해가 이와 같으시다면, 본원에 대한 우려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기의 손상과 국가의 불행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채진후가 두 신을 헐뜯고 모함한 상소를 뒤늦게 얻어 보니, 이이가 도학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진술한 글과 성혼이 모함을 입고 논죄받은 전지를 등사하여 증안(證案)으로 삼았는데, 모함하고 현란시킨 모양이 몹시 낭자하였는바, 인심의 불량함과 선비들의 습속의 잘못됨이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신은 성혼에게 사사받아 그의 심사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성혼에 대한 본말을 진술하고자 합니다.
계미년을 전후하여 선조의 이이에 대한 신임은 어수(魚水)의 만남과 같아서 천 년만에 단 한번 있을 관계였으나, 소인들의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어 헤아릴 수 없는 죄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혼이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글을 올려 이이의 충성과 어짊을 논하여 구제하고 당시 사람들의 심술을 공박하였는데, 성상께서 너그러이 비답하기를 ‘어진 이가 국가에 유익함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론으로 지목하게 된 시초입니다. 또 신묘년에 와서 사화가 크게 일어났을 때 이이는 이미 죽고 성혼만이 살아 있었으니, 그를 깊이 미워하며 죄를 씌우려 함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산야에 살고 있으면서 본시 세론(世論)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양길은 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간당으로 지목되어 죄명이 매우 무거웠습니다.
임진 왜란 때 마중을 나오지 않은 일은, 사세가 창황하여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가지고 간인들은 ‘행차가 집에서 지척인 곳으로 지나가는데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임금을 버렸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아, 군부가 파천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가지 않고 편안히 앉아 있을 사람이 하늘 아래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송시형 등의 상소 속에 이미 다 진술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인과 무리를 지었다는 말은, 바로 정철(鄭澈)과 사이가 좋았던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정철은 어려서부터 효우가 극진하고 성품이 개결하여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성혼은 그와 같은 곳에 살아서 정의가 매우 두터웠습니다. 정철이 만년에 주색에 빠지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큰 허물이 아니었으므로 교분을 끝까지 유지하였습니다. 기축 옥사 때 정철이 위관(委官)으로 있었는데, 성혼이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오로지 사대부의 화를 구제하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철이 이발(李潑)과 오랫동안 원수 사이로 지냈으나 이발이 처음 국문을 받을 적에 그를 극력 구제하였고, 정언신(鄭彦信)을 죽이라는 명이 내려졌을 적에도 또 극력 간쟁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논하는 자들이 최영경(崔永慶)이 죽게 된 것은 정철의 죄라고 하며 아울러 성혼까지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성혼이 최영경을 두고 늘 청수하고 효우롭다고 하였기 때문에 정철이 인대하던 날에도 이를 진달하였고, 추문하던 날에도 역시 이를 들어 변론하여 구제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정철도 최영경의 죽음에 대하여 죄가 없거늘, 더구나 성혼이겠습니까. 간인과 무리를 지었다는 지목은 모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선왕의 현명하심으로 그처럼 융숭히 대우하여 주다가도 끝까지 그 대우를 유지하지 못하였던 것은, 처음에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정인홍(鄭仁弘)에게 해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채진후(蔡振後) 등이 등사해 낸 성지(聖旨)는, 바로 증자의 어머니가 증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세 번 들은 뒤에 북을 내던지고 달아난 것과 같이 여러 차례의 참소로 인해 이루어진 성지인 것입니다.
이이에 이르러서는 순수한 도학과 뛰어난 조예로 높고 뛰어나게 성리의 근원을 통찰하였으며, 세도를 만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으니, 참으로 주자의 바른 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만하며, 이황(李滉) 이후로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채진후의 무리들은 선문(禪門)에 찾아간 일로 하자를 삼고 있으니, 그들의 무식함은 참으로 한번의 웃음거리도 안 되며, 또한 자꾸 따질 것도 못 됩니다.
그리고 성혼의 학문은 가정에서 전수받은 것으로, 엄정하고 돈독하며 장중하고 안온하였으며, 언어 동작이 하나같이 성현의 교훈을 준수하여 강명(講明)과 천리(踐履)에 모두 공부가 성숙되었고, 또 본원을 조존(操存)하는 데에 더더욱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이와는 도의로 사귀어 일찍이 사단(四端) 칠정(七情) 이기(理氣) 등의 학설로 수없이 편지를 왕복하였는데, 선유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혀낸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 사도가 오랫동안 끊어지면서 학술도 전승을 잃어서 세상에서 선비라고 하는 자들이 다만 글이나 읽는 것으로 업을 삼습니다. 이에 선유의 도학의 고하와 조예의 천심을 아는 자가 극히 드무니, 채진후 따위가 성현을 거침없이 마구 모욕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 망녕된 소자(小子)가 스스로 현자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애처로운 노릇이지, 이이와 성혼의 도덕에야 무슨 손상이 가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믿고 독실히 좋아하여 이론에 동요되지 마시어 저 음흉하고 사특한 말들이 밝은 해와 달 아래서 도망칠 길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유도가 저절로 존숭되고 사습이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두 사람의 장단점은 내가 안 지 오래이다. 부황한 논의에 동요되어 윤허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지사 조익(趙翼)이 상소하기를,
"신의 얕은 지식으로 비록 어진 이의 깊이를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구구한 심정만은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또 두 신하의 일에 있어서는 어른들에게 한두 가지 들은 바가 있기에 감히 전하께 진술하는 바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이이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뛰어나 말을 배울 적에 벌써 문자를 알았고, 다섯 살 적에 어머니가 병을 앓자 몰래 사당에 들어가서 빌고 있는 것을 그의 숙모가 보고 갸륵하게 여긴 나머지 안고 돌아왔으며, 일곱 살 적에 이웃에 살고 있는 진복창(陳復昌)의 간교함을 알고 전(傳)을 지어서 밝혔고, 아홉 살 적에 옛사람의 높은 행의(行義)를 사모한 나머지 벽에다 그 성명을 열서하여 흠모하는 뜻을 나타내었으며, 열두 살 적에 아버지가 병을 앓자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가며 기도하였으니, 그의 총명하고 정직하며 어질고 선을 좋아하는 성품은 아이 적부터 이미 이와 같았습니다.
그의 순수한 자품은 참으로 사람들을 초월하였거니와, 평생에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보지 않은 책이 없어서 천인(天人) 이기(理氣) 성정(性情)의 심오한 경지와 경전(經傳)의 정미한 뜻 및 성현의 은미한 지취에까지도 조예가 깊었으니, 그가 분석한 것은 모두가 참으로 알고 실제로 터득한 데서 나온 것이지, 이것저것 주워 모아 되는 대로 얽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견해의 경지는 진실로 얕은 공부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헤아려볼 때 바로 정자나 주자와 지취가 들어맞은 것이어서 후세의 선비로서는 미칠 수준이 아닌가 합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서모를 친모와 같이 섬겨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문안을 드렸습니다. 서모가 술을 즐기자 꼭 술을 따뜻하게 데워서 친히 올렸으며, 서모의 성미가 광포하여 이이가 벼슬이 높아진 뒤에도 비위에 조금만 맞지 않으면 역정을 내기가 일쑤였지만, 그때마다 반드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공손히 받들어 화를 풀어 주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친어머니에게도 이렇게 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서모에게이겠습니까.
집이 가난하여 형제가 모두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그의 처가는 재산이 조금 있어서 장인 노경린(盧景麟)이 서울에 집을 사 주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의 가난함을 차마 못 보아서 곧바로 그 집을 팔아 무명을 사다 나누어 주어 끝내 한 고랑의 터전도 없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나갈 수 없는 자는 모두 불러다 같이 살며 죽을 쑤어서 함께 먹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소시적부터 폐질을 앓았으나 죽을 때까지 예의와 공경을 다하고 죽은 뒤에는 삭망 때마다 자제들을 불러 모아 행례를 하였습니다. 집안에서의 행신이 이와 같았으니, 인륜을 다하였다고 말할 만합니다.
조정에 서서는 임금을 섬김에는 한결같이 고대 제왕으로 법을 삼고, 정치를 논함에는 반드시 삼대(三代)의 법으로 스승을 삼았으며, 간언을 할 적에는 임금의 뜻을 거슬려 가며 진실을 다 말하여 기어코 잘못을 바로잡고야 말았고, 사안을 논할 적이면 고금의 선례를 다 끌어대어 기어코 지당한 논리로 귀결시켰습니다. 또 사론의 분열을 걱정한 나머지 기어코 이쪽과 저쪽을 조종하여 조정의 화목을 도모하였고, 백성의 궁곤함을 걱정한 나머지 반드시 모든 폐단들을 바로잡아서 생령의 안녕을 계획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실로 당세의 치란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던 것입니다.
대저 우리 나라의 인사들은 어진 이라 할지라도 그저 자신의 수신(修身)에나 능할 따름입니다. 천하를 걱정하기를 사마광(司馬光) 이나 범중엄(范仲淹)처럼 한 사람으로는, 조광조와 이이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나아오고 물러날 즈음에 반드시 도의로 기준을 삼았기 때문에 나아옴은 언제나 어려웠고 물러남은 언제나 빨랐습니다. 만년에 선조로부터 그처럼 융숭한 지우를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하늘이 목숨을 앗아갔으니, 이것이 어찌 동방에 있어서 천년의 한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죽었을 적에 중외의 서민 아동 하인 할 것 없이 모두 안타까워 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가 하면, 도성에 들어왔던 나무 장수까지도 어이없어 하며 마치 무엇을 잃은 듯이 허탈감에 빠졌고, 유생·금군·의관·역관·구실아치와 거리의 시민, 관청의 하리들이 모두 달려와서 곡전(哭奠)하였는데 마치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습니다. 발인하던 날에는 도성 안의 온 백성이 다 몰려와서 영결하였는데, 그들이 든 횃불이 수십 리에 뻗쳤습니다. 이것은 국조 이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것이 호령으로 다그쳐서 될 일이겠습니까. 오직 어질고 착하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어서 공경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백성들이 저절로 공경하고, 슬퍼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백성들이 저절로 슬퍼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당시 상하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진정으로 복종하였는데, 오직 몇 명의 조정 진신(搢紳)들이 자신의 이해에 얽매여서 미워하며 배제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 헤아려 볼 때, 그의 학문과 인의는 동방이 생긴 이래로 아직 그만한 이가 없는 듯합니다.
아, 이이와 같은 대현에 대해서도 미워하는 소인이 있어서 오히려 하자를 찾는 것은, 바로 도를 찾고 있던 소시적에 이단에 흘러들었기 때문인데, 예로부터 현인이 도를 찾던 시초에 흔히 이러한 병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고 순수한 도학의 길을 택하였다면, 일월의 광명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군자의 높은 이상을 다시 한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초년에 범했던 실수를 가지고 뒷날의 큰 성취를 가리려 든다면, 이는 일월을 헐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성혼은, 그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이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뒤 소신을 지키고 은거하며 임금이 불러도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성혼은 이 처사(處士)의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니, 욕심 없고 이해에 담담한 것은 그의 가풍이 그러하여서입니다.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접어두고 옛사람의 학문에 전념하여 문밖을 나오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혀 학문 탐구만 한 결과, 소시적에서 노후에 이르기까지 심신과 언동이 한결같이 법도에 맞았습니다. 집안에서의 생활도 내외간의 구별과 장유간의 질서와 조상을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 모두 일정한 제도를 두되 하나같이 옛사람으로 법도를 삼았습니다.
이이와는 소시적부터 도의로 사귀었는데, 고매한 식견이라든가 탁월한 재능은 이이에 못 미치는 것 같았으나 소신의 확고함과 품행의 독실함은 이이가 늘 자신으로서는 미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이이는 말과 웃음이 부드럽고 평이하여 학자들이 갈수록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성혼은 비록 수십 년을 같이 생활하더라도 갈수록 더 두려운 면을 엿볼 수 있는데, 지켜보면 다 같이 덕이 성숙된 군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나아와서 진언한 것은 모두 성현의 좋은 계모와 당세의 절실한 사안 아닌 것이 없었고, 선조께서의 융숭한 대접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남다른 대우였으나 한결같이 사양하고 물러났으며, 절개는 돌과 같이 굳어서 한평생 동안 한 조정 생활이 한 해도 못 됩니다. 이것이 어찌 선비의 고상한 처신이 아니며, 성대의 일민(逸民)이 아니겠습니까. 불행스럽게도 참소하는 사람이 끝없이 시비를 현란시켜서 삭탈 관작의 벌이 죽은 뒤에 미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날조된 말 중에서도 간인과 무리를 지어 선비를 죽였다는 말 같은 것은, 사람들 모두가 그것이 부질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변백(辨白)할 것이 못 됩니다. 오직 임진 왜란 때 국난에 즉시 달려가지 않은 일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의 생각에서는 의혹이 있을 수 있기에 신이 변백하겠습니다.
대저 성혼은 본시 산야의 사람인데가 한평생 근신하는 것이 진퇴에 있었습니다. 이때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마침 죄율 적용이 거론되고 있던 중이었으니, 아무리 경황없는 때를 당하였더라도 진퇴의 절의야 어떻게 구차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조정에서 부르지 않는 한 스스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직 길가에 나가서 맞이하여 곡하는 것은 본래부터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가(大駕)의 의주 파천이 창졸간에 나왔기 때문에 미처 알지 못하였으니, 형세상 참으로 미치기 어려운 바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왕촉(王蠋)은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산야로 물러나 밭을 갈고 살았으나, 제(齊)나라가 망한 뒤 스스로 획읍(畫邑)에서 목을 찔러 자살하였고, 강만리(江萬里)는 송(宋)나라의 승상으로서 가사도(賈似道)와 뜻이 맞지 않아서 물러나 집에서 살았으나 송나라가 망하자 마침내 스스로 지수정(止水亭)에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이를 말미암아 본다면 예로부터 절의를 지키는 신하가 반드시 다 국난에 달려나간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성혼은 한평생 옛사람을 사모하고 사소한 일까지도 반드시 도의로써 처리하였습니다. 국가의 크나큰 사변과 군신간의 크나큰 의리에 있어 어찌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일부러 달려오지 않았겠습니까.
이번에 이 유생들은 모두가 두 사람의 사적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림에서 태산 북두처럼 우러러 온 지가 오래였기 때문에 문묘 종사의 소청(疏請)에 대해 모의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뜻을 같이하게 된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중 몇 명의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자는 바로 당시의 터무니없는 논의를 이어받아서 그랬던 것입니다.
아, 전현(前賢)이 한평생 선에 힘을 기울인 것은 후생으로서는 의당 사법(師法)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처럼 모함을 하고 나서니,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겠습니까, 나쁜 사람이겠습니까. 신이 두 사람을 흠모하고 있는 이상 이런 때에 와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로는 전하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공론을 저버릴 뿐 아니라, 안으로 저의 마음을 저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의하소서."
하였는데, 소를 아뢰었으나 회답이 없었다.
응교 심지원(沈之源), 교리 윤구(尹坵)·조석윤(趙錫胤) 등이 차자를 올려, 이이와 성혼의 어짊이라면 문묘 종사에 걸맞는다는 일 및 채진후 등이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는 내용을 개진하고, 시비를 분명히 변별하여 사론을 진정시킬 것을 청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조위한(趙緯韓)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5월 14일 계해
열성의 수용(睟容) 중 어느 왕인지 분간되지 않는 것이 있어서 강화도로 옮겨 모시려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강선(姜璿)이 상소하기를,
"신이 임진년에 종묘서 직장으로 있으면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영유(永柔)로 호종하여 가는데,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수용 한 위를 모시고 왔기에 신이 제조 최유원(崔有源)·윤자신(尹自新) 등과 살펴 보았더니, 용안은 완연히 의구하고 뒷면에 습기가 차서 썩기는 하였으나 ‘문종’ 두 글자는 자획이 분명하였습니다. 이에 계문하고 종이에 싸서 모셔 두었으나, 환도할 때 와서는 신이 본직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어느 감실에 봉안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어느 왕인지 분간되지 않는 수용을 강화도로 옮겨 모시는 조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뒷면이 마멸되어 분간할 길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신이 그 당시의 묘관(廟官)으로서 그것이 분명히 문종의 수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감히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윤방이 아뢰기를,
"강선이 이른바 수용 뒷면의 두 글자는 비록 햇수가 오래되어도 마멸될 리가 없을 듯합니다. 또 신이 지난 가을에 종묘를 봉심하고 나서 열어 본 바, 얇은 생초(生綃) 한 조각으로 되어 있는데, 길이와 너비는 한 자에 불과하고 뒷면의 표지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먼지가 끼었으며 색깔도 퇴색해 있었습니다. 정자(程子)의 말에 ‘영정이란 털끝 하나가 맞지 않아도 이는 딴사람이므로 털끝 하나도 착오가 없어야 영정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비록 문종의 수용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함부로 논의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종전 의논대로 강화도에 모시는 것만 같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6일 을축
유성증(兪省曾)을 동부승지로, 성여관(成汝寬)을 집의로, 이만(李曼)을 지평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정언으로, 장현광(張顯光)을 우참찬으로, 장유(張維)를 예조 판서로, 심지원(沈之源)을 부응교로 삼았다.
5월 19일 무진
간원이 아뢰기를,
"관학의 많은 유생들이 현재 항소를 올리고 궁문을 지키고 있는데도, 승문원 권지 김하량(金厦樑)·허박(許博) 등이 각기 이견을 내세워 시비는 변백하지 않고 서로 정거(停擧)하는 등 경망하게 일을 뒤헝클고 있으므로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그리고 유생들이 조정 관원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은 실로 잘못된 규례입니다. 김하량이 아무리 많은 유생을 정거시킨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의당 공론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제생들이 지레 김하량을 유적에서 삭제한 것은 너무도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명지(明旨)를 받들어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김하량 등은 추고하라."
하였다.
5월 20일 기사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5월 21일 경오
강원도 영월(寧越)·홍천(洪川)에 크게 우박이 떨어져서 곡식이 손상되었다.
김반(金槃)을 동부승지로, 이식(李植)을 부제학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수찬으로, 김신국(金藎國)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장유(張維)가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기 때문에 신국으로 대신한 것이다.
5월 23일 임신
동지사 송석경(宋錫慶)의 원역(員役)이 탄 배가 표류하여 요동 지방에 도착하였는데, 금한(金汗)이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통보해 왔다. 상이 승문원을 시켜 답하게 하였는데, 답서는 다음과 같다.
"혜서(惠書)를 받아보고 본국의 원역이 귀국의 국경에 표류하여 귀국의 구제를 받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통보하여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5월 25일 갑술
지평 이만(李曼)이 아뢰기를,
"요즈음 진신(搢紳)들 사이에 의논이 어긋나 마치 물과 불처럼 원수 사이가 되었으니, 너무도 두렵습니다. 대사간 정온(鄭蘊)은 본래부터 우직하기로 이름이 나 있고 아는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상소 중에 진술한 한 조항은 【 이길 등을 신구(伸救)한 말이다.】 대개 그의 의견이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착하지 못하다면 의당 보고한 다음 파직이나 시키고 말아야지, 어찌 올바르고 절의있는 사람을 성명의 시대에 다시 용납되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소견이 이같은 이상, 본부에서 아뢸 바가 아니라는 핑계로 침묵을 지키면서 구차스럽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면하여 주소서."
하였다. 집의 성여관(成汝寬)이 아뢰기를,
"역적을 두둔하는 사람이 잇달아 탄핵을 받고 있는데도 유독 정온에게만 탄핵이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본부가 그냥 두고 논박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너무도 기준이 없는 처사입니다. 때문에 어제 가까스로 통문을 돌렸으나 아직 귀결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만이 인피한 사연을 보니, 심지어 간원의 아룀까지도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헌 이현영(李顯英)은 아뢰기를,
"정온이 소를 올린 일은 중도를 잃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의 처사가 완전하지 못하였다는 논박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만은 ‘본부에서 논할 바가 아니라는 핑계로 침묵을 지키면서 구차스럽게 있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성여관은 ‘본부의 처사는 참으로 기준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 두 사람에게서 공히 지적을 받은 것입니다. 신의 직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부응교 심지원, 수찬 조석윤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오늘날 이의를 제기한 자를 탄핵하는 것은 시비를 바로잡고 국론을 정하자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물과 불처럼 원수 사이가 되었다.’고 한 이만의 말은 마땅함을 잃음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정온은 충직하고 강개한 사람이니 비록 한마디의 실언이 있더라도 깊이 문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성여관이 소급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도 온당치 않습니다. 이현영이 논사에 신중을 기한 것은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이만과 성여관은 체차하고 이현영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구봉서(具鳳瑞)를 동부승지로, 이경증(李景曾)을 사간으로, 이경(李坰)을 장령으로, 김원립(金元立)을 헌납으로, 유황(兪榥)을 정언으로, 김수익(金壽翼)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28일 정축
상평청(常平廳)을 혁파하였다.
이보다 앞서 호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경연 석상에서 상평청을 혁파하고 거기에 저장된 물화는 호조로 옮기자고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윤방이 아뢰기를,
"신은 국가의 재정은 한 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 본청에서 쓰다 남은 물화를 호조로 옮기자는 뜻으로 재차 계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경연 신하가 아뢴 말은 바로 신의 뜻입니다."
하고, 김상용(金尙容)도 아뢰기를,
"신의 소견도 최명길의 견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사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기민을 구호할 물화를 다른 용도에 쓰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본청의 물화로 쌀을 사 들여서 비축해 두었다가 뒷날 구호곡으로 쓰도록 하되, 그 수량을 서계한 다음 따로 쌓아 두도록 하고 절대 함부로 쓰지 말라."
하였다. 호조가 또 아뢰기를,
"많은 미곡을 창고를 설치하여 쌓아 두었으나 처리할 방도가 아직 서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수년 동안만 흉년이 들지 않아도 그 쌀은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전(大典)》을 살펴보건대, 호전(戶典)에 ‘서울과 지방에 상평창을 설치하여 곡식이 귀할 때는 값을 올려서 베를 사들이고 곡식이 흔할 때는 값을 낮추어서 베를 판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제도는 한(漢)나라 대사농(大司農) 경수창(耿壽昌)에게서 창출되어 당(唐)나라 유안(劉晏)이 뒤이어 시행한 제도로, 실로 백성에게 편리한 제도입니다. 조종조 때 이 제도에 따라 법령을 제정한바 창고의 터전이 아직 남아 있으나 중간에 폐지하여 시행되지 않았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다시 창고를 설치하여 본청에 쌓여 있는 은화로 쌀을 사 들여서 쌓아 두었다가 풍흉을 보아 그 값의 고하를 결정하여 백성에게 이익을 준다면, 영원한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국가가 이미 돈을 사용하는 규정을 정하였고 주점(酒店)과 전시(錢市)가 있으며, 또 수미(收米)와 결포(結布)를 수량에 따라 돈으로 대납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법령이 구비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아직도 돈이 귀한 줄을 몰라서 돈을 가지고 저자로 나갔다가 제값을 받지 못하기가 일쑤이니, 이것은 조정의 법령이 일정치 못하여 백성들이 법령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입니다. 지금 상평청에 쌓여 있는 은화는 모두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물화이므로, 이것을 전량 돈으로 만든다 해도 국가에는 손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돈 주조하는 일을 본청에 맡겨서 본청의 물화로 공인(工人)을 고용하여 돈을 주조하기도 하고 값을 주고 돈을 사들이기도 하는 한편, 미곡을 거두어들여서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에게 돈을 바치고 쌀을 사가도록 하되 쌀값에 비하여 3분의 1을 더 쳐주어서 백성을 구제하는 의도를 보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돈의 편리한 점을 알게 되어서 마침내는 반드시 널리 시행되어 구황(救荒)과 화폐의 사용이 둘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보다 더 편리한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9일 무인
상이 경연에 나아가려다가 강관이 나오지 않아서 강을 정지하였다. 수찬 윤구(尹坵)는 추고하고 부수찬 김수익(金壽翼)은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지성균관사 최명길이 아뢰기를,
"관학 유생이 소를 올린 뒤로 소동이 크게 일어나서, 동학에서 상소에 동참하였다가 정거(停擧)당한 자가 6인인데 동참하였던 50여 인이 모두 원점(圓點)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균관은 재임(齋任) 6인 및 상소에 동참한 자 3인이 잇따라 정거를 당하자, 제생들이 이 때문에 스스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차츰차츰 서로 이끌고 나가버려 몇 명의 재임만이 머물러 있을 뿐, 다시 원점을 받을 자가 없어서 며칠째 식당이 텅 비어 있습니다. 이에 앞으로 치를 대과(大科)가 모양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너무도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대저 두 신의 어짊은 본시부터 유림의 영수로 추대되어 와서 피차를 막론하고 선비로 자처하는 자라면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채진후 등이 문묘 종사를 과중하게 여긴다면 스스로 피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무엇하러 건복(巾服) 차림으로 대궐 앞을 지나면서 스스로 한 패를 만들고 동학에다 따로 소청을 설치하는 등 이처럼 전례에 어긋나는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의 상소 사연을 본바 안간힘을 다하여 유현(儒賢)을 모함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그가 경박하여 사리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맨 먼저 주장한 한두 사람 외에 그 나머지 동참자들은 깊이 다스릴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이 두 신의 학문을 강명하여 두 신의 도학이 저절로 존중되도록 할 생각은 않고 한갓 말로써 사론(士論)이 갈라져 있는 이 시점에 갑자기 공론을 정한 것도 시의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유현을 존중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므로 숭상할 만한 일이지 억제할 일은 아닙니다.
무릇 사관(四館)의 정거란 그 조치가 매우 중한 것입니다. 혹 그 자신에게 나쁜 행위가 있어서 일시에 버림을 받았거나 혹 지론이 잘못되어 사림에게 죄를 얻은 뒤에야 사관이 공론에 따라 정거를 결정하는데, 이는 모두가 악을 징계하여 선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수백 명의 선비들이 소장을 올려 어진이를 높이려 한 것이 무슨 버림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한두 명의 사관 관원이 한번의 회의도 거치지 않은 채 감히 자기네의 사견으로 6명이나 되는 재임을 마음대로 정거시킨단 말입니까. 그리고 영남 유생이 존현(尊賢)에 대한 연명소를 올린 것이 그 얼마나 경악스런 일입니까. 그런데도 사람을 골라서 정거시킨단 말입니까. 그들의 마음씀이 너무도 좋지 못합니다. 이런 버릇이 만약 자라난다면 세도가 걱정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사관의 많은 관원들로 하여금 준례에 따라 한번 모여서 정거가 옳은 처사인지의 여부를 논의하여 공론에 따라 처치하고, 이어 제생들을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하여 부디 화목을 도모하기에 힘쓰며, 다시는 소견이 다르다 하여 서로 배척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성균관 선비들의 빗나가고 분열된 논의를 일분이나마 걷잡을 수 있을 듯합니다. 대개 성균관 유생의 궐점(闕點)은 며칠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다시 돌아가게 한다면 구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학에서 상소한 유생은 폐점(廢點)한 지가 이미 20여 일이나 지났기 때문에 지금 이어 원점을 받는다 해도 과거 기일이 촉박하여 형세상 70점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형편에 따라 변통하여 점수를 감해 주어서라도 국가의 크나큰 경사인 과거에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다시 뒷말이 없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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