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3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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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신사

집의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역적 이공(李珙)016)  의 세 아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이 아무리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집법관의 우려하는 도리로서는 미리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온(鄭蘊)·조수익(趙壽益)·강대수(姜大遂) 등이 그들의 소견을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논의가 한창 활발할 때에는 법을 고집하면서 논열하는 것이 혹 옳습니다. 그러나 논한 지가 달이 넘어서 공론이 이미 행해졌으면 참작하여 정론(停論)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동료들의 의논은 매우 준엄하여 신의 소견과 전혀 다릅니다. 아, 수익과 대수는 청직과 현직을 두루 거친 사람인데, 다시 무슨 바람이 있어서 역적붙이를 두둔하고 나서서 스스로 죄에 빠져들겠습니까. 이번에 대간이 그들을 횡의(橫議)를 편 자로 지목하여 관작을 삭탈하여 사람의 입에 재갈을 채우려 하니, 너무도 두려운 일입니다. 신이 아무리 나약하여도 구차스럽게 행동을 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직하소서."
하니, 장령 박수홍(朴守弘), 지평 서상리(徐祥履)가 소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사간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의논을 달리하는 사람과는 한번쯤 서로 바로잡아 주어서 시비를 밝히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논열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한 채 서로 버티기만 하고 있는 것은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는 도리에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그만 정론하려고 하였으나, 아직 여론을 자세히 몰라서 이처럼 연이어 논계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한흥일이 인피한 사연을 보건대, 사람의 입에 재갈을 채우려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처치하겠습니까."
하고, 헌납 김휼(金霱), 정언 유황(兪榥)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교리 정뇌경(鄭雷卿), 수찬 조석윤(趙錫胤)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탄핵의 논란이 이미 오래되어 공론이 시행되었으니, 정론을 강구해 보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견만 고집하고 동료들의 논의를 완강히 뿌리쳐서 온 나라의 공론을 두고 사람의 입에 재갈을 채우려는 의도라고 한 것은, 흥일의 잘못입니다. 박수홍과 서상리가 한 사람의 말에 견제되어 막중한 논의를 서둘러 정지하려 들겠습니까. 경증 등이 분란이 우려되어 차라리 정론하고자 하다가 여론을 자세히 몰라서 우선 연이어 논계한 것은, 좋은 뜻입니다. 양사는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고 한흥일은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뒤에 대간이 흥일을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남 지방은 양전(量田)이 이미 끝나서 새 양안(量案)이 작성되었습니다. 전의 양안을 그대로 쓴다면 문서에 반드시 착란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도는 미처 양전을 못하였더라도 삼남 지방은 새 양안으로 조세를 매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양전은 그 의도가 균역(均役)에 있는 만큼, 금년부터는 별수미(別收米)·조례미(皂隷米) 및 양서(兩西)에서 옮겨 정한 결포(結布)를 모두 견감하고 그 밖에도 견감할 만한 물건이 있으면 적당히 견감하여야 한다. 공안(貢案)의 경우는 가감하지 말고 각 고을에 지시하여 가미(價米)를 줄여서 바치도록 하여, 불쌍한 백성으로 하여금 고르지 못하다는 한탄이 영원히 나오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삼남 지방에만 먼저 시행하면 원망이 없지 않을 것이다. 다른 도도 타량한 뒤에 한꺼번에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4일 임오

홍문관 신록(新錄)017)  은 성이성(成以性)·민광훈(閔光勳)·김경여(金慶餘)·허계(許啓)·홍집(洪)·홍주일(洪柱一)·민응협(閔應協)·이도(李禂)·송몽석(宋夢錫)·권우(權堣)·심지한(沈之漢)·박서(朴遾)·김휼(金霱)·이상형(李尙馨)·홍처후(洪處厚)·윤강(尹絳)·이지항(李之恒)·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성여관(成汝寬)·홍명일(洪命一)·김익희(金益熙)·이만(李曼) 등 23명이다.

 

동지사 송석경(宋錫慶), 부사 홍명형(洪命亨), 서장관 원해일(元海一) 등이 북경에서 돌아와, 산서(山西) 지방의 유적(流賊)이 무리 20여 만을 거느리고 자칭 혼천팔 대왕(混天八大王)이라 하며 봉양부(鳳陽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중도(中都)의 능침을 불질렀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비변사가 아뢰기를,
"섬서(陝西) 지방의 유적이 능침을 침범하였다는 말은 비록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듣고 보니 너무도 한심스럽습니다. 중국 조정에서 아직 통보가 없어서 길에서 들은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신하의 도리로서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신으로 하여금 정탐하여 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6일 갑신

대사헌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글을 올려 이이·성혼 두 현신의 덕행을 진술한 것은, 단지 성상께서 그들에게는 공경하고 사모할 만한 실행이 있어서 옛 현인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소인들이 비방하는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를 바라서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전혀 생각지 않으시어 여태까지 한 말씀의 비답도 없으시니, 신이 어떻게 감히 풍헌(風憲)의 자리에 무릅쓰고 앉아서 한 시대의 비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진사 권적(權蹟) 등이 상소하기를,
"문묘 종사는 도학을 전수한 것만 가지고 논하여야 됩니다. 비록 학문에 힘쓰고 소신을 꿋꿋이 지켰다 해도, 만약 성현의 도를 이어받아서 후학을 계도한 공적이 없다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이가 산속에 들어갈 때 15세가 넘었었으니 어린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안 가서 깨우쳐 마침내 훌륭한 사대부라는 칭찬을 받았으니, 자질이 남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전혀 허물이 없는 군자는 못 됩니다.
선왕조의 전지 중 성혼에 대한 죄명을 신들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이른바 간흉과 무리를 지었다는 말은 곧 기축 옥사 때의 일이고, 임금을 버렸다는 말은 곧 임진 왜란 때의 일입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성혼은 한 시대의 명신으로서 조정이 믿었던 만큼, 그 당시에 신원시키자는 말을 조금이라도 하였다면 선조께서 후회를 하고 많은 사람을 신원하여 주던 날에 반드시 ‘내가 성혼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런 실수를 범하였다.’고 하셨을 것인데, 도리어 꾸중을 가하신 그 유명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인들이 성혼에 대해 의혹을 갖는 이유입니다. 왜적이 서울을 핍박하여 대가가 파천하는데도 국난에 달려나가는 충성을 다하지 않았고, 의주(義州)로 몽진(蒙塵)을 갔을 적에는 상황이 극도로 고립되어 있었는데도 달려와 문안하는 의리가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인들이 성혼에게 의혹을 갖는 이유입니다. 신들이 두 신의 도학의 수준은 모릅니다. 그러나 도학의 실상은 충효에서 벗어나지 않는 바, 출처와 거취에 미진한 데가 있으면 문묘에 종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생각건대, 공자 제자들의 훌륭함은 후세의 사람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지만 증자의 학문만이 그 전통을 이어받았으니 도통(道統)의 전수란 참으로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논하는 자들이 이이와 성혼을 두고 공(孔)·맹(孟)·정(程)·주(朱)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는데, 신들의 의혹은 더욱 심합니다. 동국의 유종(儒宗)으로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만한 이가 없는데, 이이의 이기(理氣)에 대한 학설은 이황과 차이가 있고, 나정암(羅整庵)018)  의 선학(禪學)에 대한 과오는 유종이 배척한 바인데도 이이는 그것을 두고 자득(自得)한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이의 학문은 아마도 지난날 선학에 물들었던 그 견해를 다 버리지 못한 듯합니다. 그리고 성혼의 자질과 학문은 또 이이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신들이 굳이 다 논박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들이 본시 학문의 공부에 어두워서 두 신의 조예의 깊고 얕음을 알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모르거니와, 이홍로와 정인홍의 말을 주워 모은 말이라고 한다면 신들과 거리가 먼 그 비방은 굳이 따질 것도 못 됩니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선조같이 명철하고 신성한 임금께서는 반드시 이홍로와 정인홍에게 그다지 현혹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몹시 두려운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추앙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신 선조의 현명함에 손상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의 심정이란 사사로운 생각에 치우치다 보면 그 말이 중정(中正)을 얻지 못하여 마침내 시비를 전도시키고 뭇사람의 귀를 현혹시키는 법으로, 이 점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신들이 크나큰 시비에 대해서 따지지 않을 수도 없거니와, 또 의리상 채진후 등과 같이 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절박한 심정을 기를 쓰고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근일 유생의 상소에 대한 일을 조정에서 가까스로 진정시켰는데, 지금 또다시 소를 올려 채진후 등과 같이 죄를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으나, 다만 분노에 북받쳐서 안간힘을 다하여 장황하게 공격한 것은 일이 매우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20 명의 연명소를 물리치고 받지 않는 것도 미안할 듯합니다.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봉입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민구가 또 아뢰기를,
"채진후 등 세 사람이 정거(停擧)당하였으니, 같이 상소하고서 견벌(譴罰)을 면한 자들이 감히 원점(圓點)을 받아 과거에 응하지 못하는 것은 사리와 형세상 당연한 법입니다. 그러나 50여 명이나 정거를 당한다는 것은 과거를 보여 사람을 널리 취하는 도리에 너무도 어긋납니다. 다시 지관사(知館事)로 하여금 참작하여 선처해서 진정시키는 방도로 삼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을 듯합니다. 신이 출납의 관직에 있는데다 또 사유(師儒)의 자리에 있기에 【 당시 민구가 동지성균관사였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지관사 최명길이 상소하기를,
"이민구가 딴 의논을 제기하여 다시 선처토록 하자고 청한 일에 대해서 신으로서는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무릇 처사하는 도리는 시비의 판단이 제대로 들어맞아야만 인심이 승복하고 부황한 논의가 자연히 그치는 법입니다. 시비와 가부에 대해 전혀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구제하기만 일삼으면, 진정시키자는 것이 도리어 분란을 더 일으키게 됩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더구나 공론이 나오는 태학이겠습니까.
대저 두 신이 사문(斯文)에 공이 있다는 점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관학 유생의 문묘 종사에 대한 주청은 너무 서두른 감은 있으나 나름대로 좋은 생각에서 나온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죄를 줄 것이 있겠습니까. 이론을 제기한 나이 젊은 무리들이 의견이 같지 않다 하여 동참하지 않으려 한 일은 괴이할 것이 없으나, 다만 지난날 간신이 선현을 모함한 말을 주워 모아 거침없이 유종(儒宗)을 비방한 것은 합당치 않은 것으로, 이미 다 썩은 뼈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처럼 공박한단 말입니까. 설령 문묘 종사는 과중하다 하더라도 두 신의 어짊으로도 덕 있는 사람이 못 된단 말입니까. 나이 젊은 무리더라도 현인을 높이고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만 있다면 말투가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균관에서 동학으로 가는 데는 직로가 있는데도 그 길을 놔두고 건복(巾服) 차림으로 걸어서 궐문 밖을 둘러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니, 선비의 행실로서 비루하고 수치스럽기가 이보다 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도학이 밝혀지지 않고 사도(師道)가 확립되지 않은 소치인데, 사유(師儒)로 있으면서 어떻게 앉아서 보기만 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은 본시 몇몇 사람의 주창과 부추김에서 나온 것으로,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선동과 기습(氣習)에 몰려서 참여하였을 뿐이므로 깊이 허물할 것은 못 됩니다. 신이 전일 계사에서 주창자 한두 사람 외에는 반드시 깊이 다스릴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관의 관원 십여 명이 한 곳에 모여서 회의를 하여 그 중 극렬한 자 세 사람만 정거하였는데, 이것 역시 영원히 앞길을 막자는 뜻이 아니라 다만 약간의 견책을 보여서 스스로 그 잘못을 알도록 하자는 것으로, 이 모두가 가르치고 훈계하는 방도입니다. 그 밖에 그냥 따라 참여한 사람도 또 원점(圓點)을 줄여서 과거에 응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으니, 벌을 내리려는 뜻은 가볍고 선도시키려는 길은 매우 넓은 것입니다. 그러니 유생이 된 자로서는 생각을 가다듬고 뉘우쳐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도모하여야 하며, 부모가 된 자 역시 다시 경계하고 신칙하여 경박한 버릇을 완전히 고치고 대공 지정한 길로 같이 돌아가도록 하여야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잘못에 깊이 빠져들지 않고 되돌아와서 잘못을 잘 보강하는 것으로,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런 생각은 내지 않고 다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여 조정의 처치를 아침에 지시하였다가 저녁에 고쳐서 마치 어린아이 장난처럼 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국시가 이 때문에 확립되지 않고 이론이 이 때문에 날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신으로서는 실로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본관의 계사를 신이 쓰기는 하였으나 이미 동료들의 의논을 하나로 귀결시킨 다음에 아뢴 것이니, 이는 역시 신 혼자만의 견해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민구의 계사가 지금 이와 같으니, 체면으로 헤아려 볼 때 실로 온당치 못합니다. 이는 모두가 신이 못난 소치입니다. 더구나 이밖의 선처하는 길 역시 신으로서는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닌 데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겸대하고 있는 대제학과 지성균관사 등의 직을 체직하고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옮겨주어, 사유(師儒)의 선발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민구가 계청한 일에 대해 다시 선처할 길이 없다면 소견이나 개진하면 그만이지, 까닭없이 사직하여 불평스런 기색을 보이는 것은 실로 옳지 못한 듯하다. 그리고 직로를 놔두고 궐문 앞으로 지나간 선비들도 잘못이지만,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여 많은 선비들을 몰아낸 유생들의 행위는 옳은 처사인가."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이의 이기설은 제자(諸子)를 초월하였으므로, 퇴계(退溪)가 살아 있다 해도 반드시 인정하였을 것이다. 나정암(羅整庵)이 선학(禪學)에 흘러든 잘못에 대하여 변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기를 논한 데 미쳐서는 실로 뛰어나게 자득한 견해가 있으니, 언론의 좋은 면까지도 싸잡아서 폐치하여서는 안 된다. 권적(權蹟)이 이것을 꼬투리로 삼아서 선현을 공박하는 효시로 삼았는데, 도를 어지럽히는 잗단 말은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지사 최혜길(崔惠吉) 등이 표문을 받들고 연경으로 갔다.

 

6월 7일 을유

김상헌(金尙憲)을 대사성으로, 목서흠(睦敍欽)을 좌승지로, 조경(趙絅)을 집의로, 조석윤(趙錫胤)을 교리로, 정윤(鄭沇)을 지평으로, 성이성(成以性)·박서(朴遾)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8일 병술

정언 김종일(金宗一)이 아뢰기를,
"예전에 회남왕(淮南王) 장(長)이 모반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니, 장의 네 아들은 바로 오늘날의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 등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한 문제(漢文帝)는 장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그 네 아들을 모두 후(侯)에 봉하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길 등을 특별히 용서한 일은 한 문제의 후덕한 조치와 저절로 들어맞으니, 이는 매우 덕스런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덕으로 임금을 아껴 그 덕을 잘 조성시키려고만 들고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을 경우, 법을 집행하는 관리의 입장에서는 일을 염려함이 치밀하지 못하고 뭇사람의 뜻을 어겨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가합니다만, 역적을 두둔하며 절개를 세우려 하였다고 하는 것은 역시 실정 밖의 죄안이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견해는 본래 이러한데, 여론에 거슬릴 것이 두려워서 참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자리를 탐내어 제 마음을 속이는 처사입니다.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대사헌 조익(趙翼), 장령 이경(李坰)·박수홍(朴守弘), 지평 서상리(徐祥履), 사간 이경증(李景曾), 정언 유황(兪榥) 등이 모두 인피하기를,
"종일이 이론을 주워 모아서 장황한 말로 버젓이 비난하고 배척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는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교리 정뇌경(鄭雷卿), 수찬 박서 등이 처치하기를,
"양사의 많은 관원의 엄정한 지론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것을 보니 국시도 정립될 수 있겠습니다. 당파에 치우친 망령된 이론은 따질 것도 없습니다. 양사는 모두 출사토록 명하고 김종일은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그 뒤에 간원이 종일을 파직시키자고 누차에 걸쳐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그저께 등대(登對)한 자리에서 ‘오늘날 역적을 두둔한다는 말은 바로 폐조 당시에 남의 입에 재갈을 채우던 제목이다.’고 하였으므로, 듣는 자 모두가 놀라워하고 괴이쩍어 하였습니다. 대저 역적을 두둔한다는 말이, 말은 같아도 그 허실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폐조 때의 역옥(逆獄)은 모두가 모함인 것으로, 임해군·영창군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그런 사실이 있었겠습니까. 그때에 나온 전은론(全恩論)은 다만 아무 죄도 없는 왕자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역적 이공(李珙)019)  은 흉역의 자취가 온 나라 사람에게 환히 알려져 있는데도 그의 아들이 모두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것만도 은혜를 온전히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어코 완전히 석방하여 평인과 같이 살도록 하려고 드니, 이것이 역적을 두둔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구가 지엄한 경연 석상에서 그처럼 망언을 하였으니, 추고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들이 남의 입에 재갈을 채우려는 실상을 면하고 싶다면, 정온(鄭蘊)·이성구 등을 죄주기를 청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같이 논하면서 ‘나는 남의 입에 재갈을 채우려는 뜻이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헌부가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9일 정해

상이 하교하였다.
"강석기(姜碩期)·조정호(趙廷虎) 등을 석방하여 마음대로 가서 살도록 하라."

 

6월 12일 경인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정사(呈辭)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불윤 비답을 내리라고 명하고, 이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일곱 차례나 정사하니, 상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6월 13일 신묘

간원이 아뢰기를,
"연경에 가는 사신의 행차에 사적인 물품은 많고 공적인 물품은 적습니다. 그런데 역관들이 반드시 상방(尙方)과 각 아문 및 여러 궁가의 무역이라고 핑계대면서 구실로 삼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포장을 검사할 즈음에도 또한 의심을 하니, 수치스럽기가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후로는 상방을 위시한 모든 무역을 일체 정파(停罷)하고, 동지사에게 하유하여 배가 뜨기 전에 일행을 검속하도록 하여 지난날의 폐습을 답습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무역 등에 관한 일은 묘당이 이미 의정(議定)하였다. 자세히 살피고서 논계하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서 왜인이 마상재군(馬上才軍)을 강호(江戶)에 들여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와서 역관        홍희남(洪喜男)이 일본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4월에 강호에 들어가 도주(島主)의 집에서 접견하고 예조의 서계(書啓)를 올리고 상견례를 행하였는데, 도주가 사례하여 마지 않으면서 곧바로 관백(關白)에게 고하였습니다. 관백 역시 기뻐하며 쌀 2백 석을 도주의 집에 주며 잘 공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색을 살펴보니, 우리 나라에 대한 조흥(調興)의 참소와 훼방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기 때문에, 관백이 도주를 시켜서 마상재군을 요구하여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의 교린의 진실과 허위를 떠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주가 주선한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를 정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쟁송을 하였는데 도주가 이겼다고 합니다." 하였다.

 

6월 14일 임진

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대남(大男)이 종호(從胡)에게 투속하여 강을 건너려는 것을 다행히 평양부에서 체포하였습니다. 《대명률(大明律)》 모반조(謀反條)에 ‘본국을 배반한 자는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모두 목을 벤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죄율로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배반한 행위가 너무도 괘씸하니, 율대로 처단하여도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의 부자간의 정의 또한 매우 불쌍하다. 사형을 감하여서 조율하라."
하였다. 대개 대남의 아버지가 호중(胡中)에 사로잡혀 가 있어서 대남이 아버지를 만나보기 위하여 몰래 들어가려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6월 16일 갑오

태학의 유생이 공관(空館)하고 물러갔다. 이에 앞서 상이 최명길이 올린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관학의 많은 유생을 몰아내었다."라고 전교하였기 때문에 제생들이 성균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온당치 않다며 모두 물러간 것이다. 최명길이 또 상차하기를,
"생각건대 성균관의 사체(事體)는 재임이 주인이고 유생은 객이므로, 의논을 하다가 더러 의논이 일치되지 않는 때가 있으면 가부의 다과(多寡)를 감안하여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정하는 것이 바로 옛 규정입니다. 지난번의 선현을 추존하자는 논의는 이미 수백 명의 제생에게서 나왔고, 또 재임과 색장 모두가 그 설을 주장하였으니, 이론자가 용납되지 않은 것은 사세가 그런 것이지, 몰아내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 설사 다소 과격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허다한 나이 젊은 유생들을 어떻게 일일이 얌전히 도에 맞게 하라고 책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내세우는 주장의 공사(公私)와 곡직(曲直)을 지켜볼 뿐입니다.
성상께서 애당초 그 주청을 어렵게 여겨 전례(典禮)를 중하게 하고, 또 정거(停擧) 조치를 풀어서 사론을 붙잡아 주었으므로, 처치가 제대로 되어 들뜬 의논이 저절로 가라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선비를 몰아내었다는 하교를 오늘날 갑자기 내렸으므로, 성균관 제생들이, 이대로 원점(圓點)을 받는다면 과거를 탐내어 연연한다는 혐의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여긴 나머지 서로 이끌고 나가버렸습니다. 이에 단지 몇명의 재임이 그대로 성균관에 남아 있기는 하나, 식당이 재차 텅빈 지가 이미 이틀째입니다. 비록 다시 들어오도록 개유한다 해도 형세상 불가능합니다. 신의 당초 계사는 위협을 받고 이론을 좇은 자들을 아울러 용납하려고 한 것인데, 갈수록 뒤틀려져서 드디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무슨 얼굴로 사유의 직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대제학과 지성균관사의 직을 체면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명길의 앞뒤의 차자 내용은 모두가 사론을 붙잡고 들뜬 의논을 진정시키자는 데서 나온 것이었지만, 상이 사설(邪說)에 물든 선입견에 가리워져서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의 관직을 체면한 것이다. 이에 이민구(李敏求)가 또 상소하기를,
"근일의 일은 처음에는 피차간에 대단한 문제도 아니었는데, 경솔히 진계한 잘못으로 인하여 최명길이 그 난처한 실상을 밝히고 이어 사직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이로 말미암아 점차 확대되어 제생들이 성균관에 있기를 불안해 하던 중, 최명길이 차자를 올림에 미치어 지관사와 대제학의 직임을 체면하는 조처가 있자, 중외의 인정이 의혹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제생들이 이미 나가버려 다시 돌아올 기약이 없으며, 앞으로 있을 대과(大科) 역시 반드시 난처하게 될 것이니, 너무나도 불행스런 일입니다. 지관사가 이미 체직된 이상 신은 애당초 잘못된 견해를 제시한 사람으로서 결코 혼자만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겸대한 동지성균관사를 체면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살펴보고는 하교하기를,
"지관사 최명길은 외람되어서 체직된 것이다. 이민구에 있어서는 별로 미안스러운 일이 없는데도 이처럼 사직하니, 그 의도를 모르겠다. 이와 같이 직임을 맡고 싶지 않다면 겸직은 우선 체면하라."
하였다.

 

6월 18일 병신

이조가 수령 및 상피 인원을 아울러 옥당에 의망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수령 중에서도 이경증(李景曾)같이 미리 와서 기다린 자가 있거든 의망하지 말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증이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아들 혼인 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때맞추어 사간을 제수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전교가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비단 경증 때문만이 아니라, 이때 인천 부사(仁川府使) 심액(沈詻)이 경상 감사(慶尙監司)에 제수되기를 도모해 몰래 이조 판서에게 부탁하고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있는 사실을 상이 알았기 때문에 이처럼 하교한 것이다. 심액이 비록 의망에는 들었으나 수의(首擬)에 오르지 못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심액은 인평 대군의 처 외조부이다.

 

이상길(李尙吉)을 공조 판서로, 홍서봉(洪瑞鳳)을 좌참찬으로, 김덕함(金德諴)을 대사성으로, 성여관(成汝寬)을 사간으로, 윤전(尹烇)을 장령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응교로, 홍명일(洪命一)·정치화(鄭致和)를 수찬으로, 박서(朴遾)를 부교리로, 정백창(鄭百昌)을 경기 감사로, 유백증(兪伯曾)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6월 19일 정유

황해도 생원 윤홍민(尹弘敏) 등 48인, 파주(坡州) 유생 유응태(兪應台) 등 36인, 경기 유생 신희도(辛喜道) 등 33인이 모두 소를 올려 양현(兩賢)의 문묘 종사를 청하고, 또 성혼이 모함을 입은 실상을 개진하였는데, 상이 홍민 등에게 답하기를,
"두 신이 아무리 어질다 해도 문묘 종사란 그 예가 매우 중대하다. 함부로 논할 수 없다."
하고, 응태 등에게는 답하기를,
"신원과 증직이란 곧 포숭(褒崇)의 은전이다. 문묘 종사의 예는 함부로 논할 수 없다."
하고, 희도 등에게는 답하기를,
"나의 생각은 이미 관학 유생들에게 하유하였다."
하였다. 그 뒤에 평안도 유생 홍선(洪僎) 등 33인도 소를 올려 청하니, 답하기를,
"몸을 수양하고 글을 읽는 일이 곧 너희들의 업이다. 알지도 못하는 일을 굳이 논하여 남의 비웃음을 사는 일은 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지방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관학 유생들이 선동하여 꾄 것이라고 하는 유언 비어가 있었기 때문에 상의 비답이 이와 같았다. 사학 유생 윤숙거(尹叔擧) 등 1백 40여 인이 상소하기를,
"채진후(蔡振後) 등이 이론을 내세우고 나가버린 일은 관학 유생이 아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몰아내었다는 말씀으로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권적(權蹟)의 상소는 오로지 모함하기만 일삼고 있으니,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도 개성 유생 고형(高逈) 등 50인, 풍덕(豊德) 유생 최시달(崔時達) 등 15인, 전라도 유생 김시길(金時) 등 1백 95인, 충청도 유생 민여기(閔汝耆) 등 50인이 잇달아 소를 올렸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6월 21일 기해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이시직(李時稷)을 장령으로, 이경(李坰)을 헌납으로, 윤강(尹絳)을 지평으로, 오달제(吳達濟)를 정언으로, 임광(任絖)을 교리로, 홍주일(洪柱一)을 부수찬으로, 김경징(金慶徵)을 도승지로, 유경집(柳景緝)을 지평으로, 김덕함(金德諴)을 부제학으로, 이시만(李時萬)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22일 경자

겸동지성균관사 조익(趙翼)이 상차하기를,
"유림이 불행하여 처음에 관학에서 발단된 분쟁이 나중에는 괴리된 논란으로 조정에 번져 가서 이로 인하여 대제학이 체직당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이 성균관사의 직을 띠고 있으면서 어찌 감히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관학 유생의 상소는 본시 선현을 높이자는 진심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곧 이성을 갖고 덕을 좋아하는 이 사람들의 양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는 의논이 나와서 서로가 겨루어서 그 형세가 양립할 수 없게 된 이상, 반드시 저쪽을 억누르고 나서야 이쪽의 설이 시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그들의 말을 배척하여 이쪽의 바른 의논을 해치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들을 몰아내어 성균관에 머물지 못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론을 제기한 사람들이 스스로 나간 것인데 몰아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저 두 신하의 도덕의 고하는 참으로 사람마다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옛것을 배우고 도를 닦은 사람이라는 점은 실로 온 나라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론을 제기한 자들이 ‘그들이 문묘 종사에 꼭 합당한지 나로서는 모르겠다.’고 한다면, 이는 그들의 소견이 못 미쳐서 그러한 것인데, 무슨 나무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을 함해(陷害)하려고 든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참으로 좋지 못한 논의입니다. 사관이 다 같이 들고 일어나서 서로 정거(停擧)한 결과, 한편에서는 선현을 함해한 자를 정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현을 높인 자를 정거하여, 양쪽의 유생이 다 같이 원점(圓點)을 거부함으로써 식당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유(師儒)의 직임을 맡은 자로서 어떻게 처치할 방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올린 본관의 계사는 지관사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사관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정거하거나 풀어 주되, 그 중 옳은 자는 모두 풀어 주고 그른 자 역시 경중을 가려서 스스로 새로워져 과거에 같이 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으로, 그 처치는 아주 적절한 처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이론을 제기한 유생들이 재차 상소한 일로 인해서 본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이 유생들의 소를 보니 너무도 패만하여 조금도 개전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람들이 설령 과거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도승지의 생각이 아무리 사람들을 모두 과거에 응시시켜서 치도(治道)를 장식하려는 것이라지만, 어찌 선악과 시비를 전혀 분간하지 않고 모두 응시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최명길이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 것은 사리상 당연한 말입니다. 다만 말하는 투가 화평하지 못하였고, 또다시 사직함으로써 전하를 격노케 하여 몰아내었다는 하교를 내리게까지 하였으니, 이는 명길의 속이 좁은 탓입니다. 그러나 성상의 하교 역시 유생들의 마음을 깊이 심복시킬 수는 없을 듯합니다.
대저 유생들은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현을 높이는 도의를 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미 선현을 높이는 도의를 행하려 한 이상, 이론을 제기하여 이를 방해하려 드는 자를 어떻게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많은 선비를 몰아 낸 것이 아니라, 선현을 높이는 데 방해되는 자를 배척한 것으로, 이 일을 가지고 유생들에게 죄를 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유생들이 두려워서 감히 성균관에 남아 있지 못하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야 있지만, 태학이 텅 빈 일은 역시 한때의 이변입니다. 명길이 어찌 감히 스스로 마음을 편히 먹고 사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직임은 한때의 문사(文事)를 주관하고 유림 사석(師席)의 장이니,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내 작은 잘못을 이유로 갑자기 체직을 명하셨으니, 전하께서 중대한 직임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신이 처음에 명길과 같이 일을 보다가 이 지경에 오고 보니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굽어살피소서."
하니, 상이 7일 동안이나 안에 두었다가 계하하였는데, 비답은 없었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요즈음 유생들의 일은 모두가 공심(公心)이 아니므로 다 같이 잘못이 있다. 재상이 된 자로서는 의당 사심을 버리고 국가를 위하여 진정시켜야 함에도, 이런 생각은 갖지 않고 한갓 일시의 분한 마음만 품고서 나이 젊은 경망한 무리들과 시비를 따지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판서 최명길이 재차 사직하는 차자를 올린 것은 실로 외람된 처사로 국가의 체모상 한결같이 강권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조익은 분수와 의리의 지엄함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체직한 것을 허물로 삼으니 매우 괴이하다. 그리고 관학 유생을 두둔하고 나선 것 역시 매우 부당한 처사이다. 의당 추고하여 그 잘못을 문책하여야 되지만, 아직은 그냥 둔다. 정원은 알아두라."
하였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거관 유생(居館儒生)이 흩어져 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다시 돌아올 뜻이 없습니다. 앞으로 과거 보일 기일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관시(館試)를 설행하지 못하게 될까 몹시 우려스럽습니다. 예조로 하여금 속히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대과(大科)를 설행하는 것은 온 나라가 다 같이 경사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중간에 선비들의 분규로 해서 원점(圓點)의 수를 줄여서 다 같이 관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지극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또 기꺼이 응시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관시는 없애고 관시에서 뽑을 숫자를 한성시(漢城試)에 나누어 배속해서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모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도일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누어 배속하는 일도 구차스러운 듯하다. 관시는 없애고 나누어 배속하지도 말라."
하였다.

 

6월 23일 신축

임광(任絖)을 집의로, 이식(李植)을 대사성으로, 송몽석(宋夢錫)을 영광 현감(靈光縣監)으로 삼았다. 몽석이 능침의 변고에 대해 말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전보한 것이다.

 

유성(流星)이 낭위성(郞位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6월 24일 임인

옥당이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양사의 소청을 받아들여서 이길(李佶) 등을 석방하라고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들이 오랫동안 섬 안에 있는 일이 나로서는 매우 부끄럽다. 번거로이 논하지 말라."
하였다.
살펴 보건대, 성상의 하교가 간절하고 측달하여 이를 읽으매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도 삼사가 따르지 않으면서 달을 넘겨 가며 쟁집(爭執)하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에서인가.

 

상이 하교하였다.
"농사철인데도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니, 억울한 일이 있는가 내가 매우 염려된다.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억울한 죄수를 잘 심리하게 하라."

 

홍방(洪霶)을 대사헌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교리로 삼았다.

 

유성이 천시 서원(天市西垣) 안에서 나와 방성(房星) 아래로 들어갔다.

 

6월 25일 계묘

승지를 보내어 좌의정 오윤겸에게 하유하기를,
"부디 굳이 사양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어 들어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이때 윤겸이 교외에 나가서 대명(待命)을 하며 20여 차례나 정사(呈辭)하였다. 상이 들어오도록 하유하자, 윤겸이 소를 올려 늙고 병들어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아뢰니, 답하기를,
"경의 기력이 아무리 그렇다 하나 정청(政廳)에 누워서 치도를 논하여도 진실로 안 될 것이 없다. 경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억지로라도 출사하라."
하였다.

 

유성이 벽성(璧星) 아래에서 나와 우림성(羽林星) 아래로 들어갔다.

 

6월 26일 갑진

유성이 위성(危星) 위에서 나와 우성(牛星) 아래로 들어갔다.

 

6월 28일 병오

호조가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의 미곡과 포백을 관장하는 관원이 체임될 적에는 반드시 중기(重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조의 낭청은 사체가 소각사(小各司)와 다르기 때문에 출납을 기록하여 사무를 인계하는 규정이 따로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모든 수납과 용하(用下)020)   및 남아 있는 수를 상세히 기록하여 그것을 모아 책자를 만들어서 교대하는 관원에게 전달하게 해서 출납의 행정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정미

부교리 박서 등이 상차하기를,
"대사간 정온(鄭蘊)은 본성이 우직하여 혼조(昏朝) 때 절의를 세웠다가 좋은 때를 만나서는 누차 총애를 입어 발탁되었습니다. 평상시에 일을 논할 때 비록 고집스런 병폐는 있지만, 그의 단점을 따지지 않아 그에게 완전무결하기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관의 자리에 있고부터는 논의가 잘못되었어도 기어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합니다. 그러니 일시적으로 서로간에 규계(規戒)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자는 논의는 비록 정지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염치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각(臺閣)의 윗자리에 태연히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간관의 직은 아주 중대한데, 수석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가 여러 달째이니, 어찌 너무도 미안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는 삼사(三司)가 함께 발론할 일이 아니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을 예조 판서로, 정치화(鄭致和)를 부교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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