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3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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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경술

간원이 아뢰기를,
"증광시(增廣試)에 관시(館試)가 있는 것은 2백 년 동안 내려 온 법례이니, 그것을 하루아침에 폐지해서는 안 됨이 분명합니다. 이제 국가에 큰 경사가 있어 널리 인재를 취하는 과거를 베풀었는데, 상께서 갑자기 관시를 그만두게 했으니, 한때의 불편한 일 때문에 가볍게 조종조의 과제(科制)를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가부를 결정하게 하소서."
하고, 헌부도 이에 대해 논하니, 답하기를,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김상용(金尙容)을 영돈녕부사로, 남노성(南老星)을 봉교로 삼았다.

 

7월 5일 계축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보낸 자문에,
"우리 나라가 섬 가운데 진(鎭)을 설치한 것은 오랑캐를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근래 귀국은 오랑캐와 관계를 단절하지 못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안주(安州)·정주(定州) 사이에 오랑캐 사신의 왕래가 빈번합니다. 본진(本鎭)과 청천강 이북 지방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오랑캐가 향해 가는 것을 엿보아서 경기(輕騎)로 습격하여 한 명의 오랑캐라도 죽인다면, 이 역시 국가를 위해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노적(奴賊)으로 하여금 왕래하게 놓아 두고 막지 않는다면, 변신(邊臣)의 직분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조정에서 글을 내려 오랑캐를 제압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랑캐를 놓아 둔 것을 책망하면,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사사로운 마음으로 헤아려 보건대, 귀국은 이미 오랑캐를 단절하기 어렵고, 본진은 오랑캐를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평양 이서는 곳곳에 섬 사람들이 목축을 하고 있는데, 오랑캐들이 마치 무인지경처럼 출입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귀국이 저들을 깨우쳐, 혹 창성(昌城)·만포(滿浦) 쪽으로 따로 왕래하는 길을 잡도록 하여, 인마(人馬)의 종적이 본진과 멀리 떨어져 서로 인접하지 않도록 한다면, 본진 역시 조정의 위령을 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도독의 자문 내용으로 볼 때 그 자신을 위한 방법으로서는 실로 소견이 있는 것이지만, 멀고 궁벽한 곳으로 길을 바꾸는 것은 호인(胡人)들이 들어 줄 리가 전혀 없으니, 우선 ‘오랑캐에게 타일러 보겠다.’는 뜻으로 승문원에게 글을 짓게 하여 회답해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대사간 정온(鄭蘊)이 녹을 미처 받지 못했다고 하여, 쌀과 찬거리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7월 8일 병진

상이 하교하기를,
"양전(量田)할 때에 민간에서 허비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백성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몹시 애처롭게 여긴다. 해조로 하여금 삼남(三南) 지방에서 더 내는 전세(田稅)를 3년을 한하여 반으로 감하도록 하라."
하니, 호조가 회계하기를,
"이번에 세금을 더 내도록 한 전결(田結)은 모두가 간민(奸民)들이 여러 해 동안 속이고 숨긴 땅으로 이제 비로소 발각된 것인데, 또 세금을 줄여 주면, 간민들은 비록 다행으로 여기겠지만 전부터 출역(出役)하던 자들은 도리어 일방적으로 고통으로 당한다고 탄식할 것입니다. 또 지난번의 전교로 인하여 본조(本曹)에서 바야흐로 별역(別役)을 계산하여 줄여 주자는 의논이 있었던 것은, 대개 새로 내게 한 세금이 전에 비해 약간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만약 세금을 줄인다면 비록 별역을 헤아려서 줄여 주고 싶어도 형세상 어렵습니다. 별역을 감해 주면 그 혜택을 서민이 고루 받게 되지만, 세금을 줄여 주는 혜택은 간세한 자들만 편벽되게 받게 되니, 이를 헤아려 보면 득실(得失)이 분명합니다. 우선 전라우도(全羅右道)의 전안(田案)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 마땅히 들어올 세입의 실수(實數)를 계산해 본 뒤에 아뢰어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속이고 숨긴 무리들은 비록 매우 간사하고 완악한 자들이나, 그 어려움과 고통은 진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전라도 전주(全州) 땅에 크게 번개가 치고 비가 왔는데, 세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홍방(洪霶)을 부제학으로, 박수홍(朴守弘)·김휼(金霱)을 장령으로, 심지원(沈之源)을 부응교로, 이회(李禬)를 검열로 삼았다.

 

부수찬 홍주일(洪柱一)이 그의 아버지 홍방이 옥당(玉堂)의 장(長)으로 있기 때문에, 체직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친혐(親嫌)을 피하려 하니, 상이 이조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조가 법례(法例)가 아니라 하여, 체직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슬프다. 용렬하기는 홍방과 같은 자가 없고, 방종하고 패악하기는 주일과 같은 자가 없는데, 경악에서는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부자가 일시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니, 또한 족히 세도(世道)가 어떤가를 알겠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03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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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슬프다. 용렬하기는 홍방과 같은 자가 없고, 방종하고 패악하기는 주일과 같은 자가 없는데, 경악에서는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부자가 일시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니, 또한 족히 세도(世道)가 어떤가를 알겠다.

 

7월 11일 기미

헌부가 아뢰기를,
"진주(晋州) 한 고을은 영남(嶺南)의 문명(文明)한 고을인데, 병영(兵營)을 설치한 뒤로 오로지 무사(武事)에만 뜻을 두어, 현송(絃誦)이 끊인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재가 흥기하지 않고 풍교(風敎)가 날로 무너지고 있으니 실로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좌병영(左兵營)의 예에 의거해 영문(營門)을 별도로 설치하여 수어(守禦)의 도구를 다스리게 하고, 다시 목사(牧使)를 두되 품질(品秩)이 높고 명망이 있는 사람을 골라 보내어, 한편으로는 백성을 교화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정치를 책임지우고, 한편으로는 세금을 거두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임무를 맡기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3일 신유

헌부가 아뢰기를,
"영남의 바닷가 지방은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사치스럽고 참람하여 적폐(積弊)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통영(統營)과 같은 곳의 경우는 둔전군(屯田軍)을 빙자하여 고성(固城)에서 1백 40인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세금을 받는 것이 미(米)로 1석, 조(租)로 3석이며, 그 호(戶)에서 해야 할 잡역(雜役)을 다른 백성에게 옮겨 징구(徵求)합니다. 또 웅천(熊川) 등지에서는 주인이 있는 민전(民田)을 점거하여 빼앗고 둔전(屯田)이라 빙자하여, 그 전지에 해당된 세금을 다른 전지에다 옮겨서 징구합니다. 우병영(右兵營)이 멋대로 징발하고 부당하게 거두는 것 역시 통영과 같으니, 일이 매우 부당합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금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보다 앞서 충청 감사 박명부(朴明榑)가 도내의 유생들로 하여금 구례(舊例)에 의해 순제(旬製)021)  를 한 뒤라야 감시(監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는데, 유생들 가운데 한결같이 짓지 않은 자가 3백여 인이었다. 명부가 이를 아뢰니, 상이, 도주(道主)022)  의 명을 따르지 않은 자는 모두 정거(停擧)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아뢰기를,
"순제의 거행은 임진년023)   이후 모든 도에서 다 폐지하였습니다. 이제 박명부가 특별히 앞장서서 옛일을 다시 시행하였으니 그 뜻이 진실로 아름답고, 처음 배우는 무리들이 고례(故例)를 모르고 글을 짓지 않음은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실정은 금법(禁法)을 범한 자와는 같지 않으니, 우선 너그럽게 용서하여 이번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여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열어줌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국가의 사체는 이처럼 구차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큰 바람이 아침부터 종일토록 불다가 다음날에야 그쳤다.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사직(社稷)과 종묘(宗廟) 안에 있는 고목(古木)이 꺾이고 뽑힌 것이 60∼70그루이며, 여러 능의 나무가 부러지고 뽑힌 것도 일일이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삭이 팬 벼는 남김없이 손상되었고, 목화(木花) 열매도 거의 전부가 떨어졌다. 전라도의 나주(羅州)·전주(全州)·여산(礪山)·임피(臨陂)·고부(古阜)·무장(茂長)·순창(淳昌)·옥과(玉果)·낙안(樂安)·장흥(長興) 등 고을에는 큰 비바람이 쳐서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져 사람과 가축들이 깔려 죽었다. 함경도와 경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도(三道)의 감사가 서로 잇달아 치계하여 아뢰었다.

 

7월 14일 임술

상이 하교하였다.
"재변이 거듭되어 어려움과 걱정이 날로 더해진다. 오윤겸(吳允謙)·김류가 있는 곳에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여 그들을 들어오게 해서 나의 부족한 바를 보충하게 하라. 또 김류가 일찍이 전에 데리고 있던 군관은 모두 다시 그에게 소속하도록 하고, 김광현(金光炫)·윤명은(尹鳴殷)·이상질(李尙質)·신민일(申敏一)·이시해(李時楷) 등 5인도 모두 석방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요즈음 습속이 자못 뇌물을 숭상하여, 무릇 무슨 일을 꾸미려면 서로 청탁을 하고 있는데, 이익을 도모하는 자는 이로써 이익을 취하고, 죄를 범한 자는 이로써 요행히 벌을 면합니다. 심지어는 시정(市井)의 서도(胥徒)들까지 사대부들과 교결하여 걸핏하면 서찰을 받아내어, 유사(有司)로 하여금 자기의 견해대로 일을 거행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온 세상이 모두 이러하니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릇된 풍조를 통렬히 혁파하여, 경외(京外)의 대소 인원으로 하여금 뇌물을 서로 주고받지 못하게 하고, 만약 고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부로 하여금 듣는 대로 적발, 입계하여 죄를 다스리어 경계하는 본보기로 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합당하니,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평청(常平廳)이 아뢰기를,
"돈을 사용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통행하는 법입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2백년 이래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인정이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또 종전에는 국법이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를테면 대동법(大同法)이나 호패법(號牌法) 등의 일이 금방 설치되었다가 금방 혁파되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돈을 사용하면 유익하다는 점을 아는 자일지라도 그것이 끝내는 시행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반신 반의합니다. 이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곧 명대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고려조에서 종묘(宗廟)에 돈의 사용을 고했던 까닭024)  도 실로 백성에게 신의를 보이기 위한 뜻이었으니, 지금도 마땅히 뜻을 굳게 결정하고 힘써 실행하여 반드시 실행한다는 뜻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만약 이를 거역하는 쓸데없는 의논을 하는 자가 있으면, 법을 어지럽힌 율로써 단죄를 해야만 거의 실행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신 등이 감히 마땅히 실천해야 할 몇 조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으니, 이를 중외에 포고(布告)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조목은 6조로 되어 있다. 첫째, 무릇 물화(物貨)는 근본이 되는 곳이 있어야 쉽게 통행하는 것이니, 시정인(市井人) 가운데 자원하는 자는 별도로 전시(錢市)025)  를 설치하는 것을 들어준다. 둘째, 각사(各司)와 각 아문(各衙門) 가운데 속전(贖錢)을 받는 곳은 그 수수료를 당초부터 반드시 돈으로 받도록 할 것을 계하(啓下)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다. 백성들이 법을 믿지 않음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제부터는 다시 착실히 거행하도록 한다. 셋째, 돈의 사용은 반드시 저자의 자잘한 물건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땔감이나 숯·야채 등의 물건을 반드시 돈으로 사고 팔게 하도록 오부(五部)와 평시(平市)에 착실히 분부한다. 넷째, 도성과 외방에 점포를 사사로이 내려는 자는 그 원에 따라 들어준다. 다섯째, 나라에서 매일 매매하는 것으로는 우마(牛馬)만한 것이 없으니 도성에서 소를 매매할 때 그 값은 절대로 다른 물건을 쓰지 말고 오로지 돈만을 쓰게 한다. 만약 사사로이 다른 물건으로 값을 따지는 자는 본청에서 때때로 금령(禁令)을 내어 적발하되 법을 어기는 자는 돈으로 징속(徵贖)한다. 여섯째, 경성에서 팔도에 이르는 길 주변에 있는 각 관아에서는 반드시 점포를 설치하여 돈을 사용할 곳으로 삼게 하였는데, 수령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즉시 착실하게 거행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국법을 믿지 않게 만들었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이 뒤로는 느슨히 하지 말고 착실히 거행하도록 한다.

 

대사간 정온이 상소하여, 이미 탄핵을 받아 공무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서경우(徐景雨)를 대사간으로, 홍주일(洪柱一)을 정언으로, 윤집(尹集)을 수찬으로, 정뇌경(鄭雷卿)을 부수찬으로, 이민구(李敏求)를 강원 감사로 삼았다.
민구가 일찍이 채진후(蔡振後) 등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게 정지시킨 것을 풀어주도록 아뢰면서 지관사(知館事) 최명길(崔鳴吉)로 하여금 다시 변통하게 하도록 요청하였는데, 명길이 소를 올려 변론하다가 상의 뜻을 어기어 문형(文衡)에서 체직되었다. 이 때문에 민구가 스스로 불안하여 드디어 외직을 구해 나간 것이다.

 

7월 15일 계해

주강에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부제학 홍방의 언어가 모호하고 문의(文義)가 애매하여, 입시한 여러 신하가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강이 끝난 뒤에, 홍방과 승지 조위한(趙緯韓), 지경연(知經筵) 홍서봉(洪瑞鳳)이 모두 아뢰기를,
"전일의 큰 바람은 지난 신묘년026)  의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때에는 열달이 되지 않아 임진년의 난리가 났으니, 일에 앞서 나타나는 조짐이 매우 두렵습니다."
하고, 위한이 아뢰기를,
"서소문(西小門)이 열린 뒤에 바람에 의해 닫혔으니, 이는 신묘년에도 없었던 이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풍재(風災)는 예전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병란을 미리 헤아릴 수는 없으나, 목전에 민생이 기근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걱정이 병란보다 더 심하다."
하였다.

 

7월 17일 을축

이때 양사(兩司)가 관시(館試)를 그만두지 말 것을 청하고, 또 시험보이는 시기를 약간 뒤로 늦추어 다시 가부를 결정짓기를 요청하였으나, 상이 오랫동안 듣지 않았다. 과거 시기가 임박하자, 대사헌 이현영, 집의 임광(任絖), 지평 윤강(尹絳)·유경집(柳景緝) 등은 정계(停啓)하고자 하고, 장령 김휼(金霱)·박수홍(朴守弘)은 의논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이에 대해 옥당(玉堂)이 처치하기를,
"과거 보이는 시기가 이미 임박하였으니, 정계하자는 의논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장령 김휼·박수홍은 체직하고, 대사헌 이하는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18일 병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지경연(知經筵) 최명길이 아뢰기를,
"전폐(錢幣)는 갑자기 통용해서는 안 되니, 먼저 긴요하지 않은 곳에서 시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리(下吏)들이 죄를 범했을 때 돈으로 속전을 거두고, 사대부들을 추고할 때도 돈으로 속전을 받는 것이 돈을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9일 정묘

서경우(徐景雨)를 이조 참판으로, 윤지(尹墀)를 대사간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김원립(金元立)을 헌납으로, 이시직(李時稷)·윤전(尹烇)을 장령으로, 유황(兪榥)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22일 경오

전 승지 박지계(朴知誡)가 죽었다. 상이 그가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냈다 하여 별도로 부의를 보내고, 본도로 하여금 조묘군(造墓軍)을 내려 주도록 하였다.
지계는 옛날 서적을 읽고 조행(操行)이 있었으나, 학문이 자못 편벽되고 자신(自信)이 너무 지나쳤다. 계해년027)  에 징사(徵士)로 지평에 임명되어 사묘(私廟)를 추숭(追崇)하라는 상소028)  를 가장 먼저 올렸는데, 이귀(李貴)·최명길과 일치하였다. 추숭하는 예가 이루어지자 명길 등이 번갈아 추천하였고, 상이 역시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 승지로 발탁하여 임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7월 24일 임신

하삼도(下三道)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다. 전라좌도는 12만 4천 2백 62결 2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8만 2천 5백 1결 28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전라우도는 21만 1천 43결 28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1만 9천 9백 27결 92부 9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좌도는 15만 9천 1백 80결 65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1천 8백 48결 8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우도는 14만 2천 5백 44결 7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5천 6백 76결 2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좌도(公淸左道)는 11만 7천 7백 34결 13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5만 8천 7백 69결 1부 2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우도는 14만 7백 26결 65부 2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7만 2천 2백 39결 3부 6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다.

 

이행우(李行遇)를 정언으로, 홍명일(洪命一)을 부교리로, 김익희(金益熙)를 수찬으로, 정세구(鄭世矩)를 전라 감사로, 허완(許完)을 경상 병사(慶尙兵使), 유지경(柳持敬)을 공청 수사(公淸水使)로 삼았다.

 

7월 25일 계유

예조 참판 정온이 상소하기를,
"전일의 풍재(風災)는 근고에 없었던 일로,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아름드리 나무의 뿌리가 뽑혔습니다. 심지어는 종묘 안과 사직 가운데에도 넘어진 것이 많으니, 아, 이 무슨 광경입니까. 굳세고 무거우며 뿌리가 튼튼히 뒤얽힌 물체들도 모두 이처럼 되었는데, 하물며 논밭에 있는 곡식이나 연약한 목화이겠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경기 지방 안에 있는 벼 가운데 이삭이 패고 결실한 것은 남김없이 떨어졌고, 이삭이 패지 않은 것도 줄기가 꺾여 말라 비틀어졌으며, 목화는 열매를 맺은 것이나 맺지 않은 것 모두가 거의 전부 손상되었다 합니다.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백성들은 무엇을 의지하여 입고 먹을 것이며, 나라는 무엇을 믿고 공부(貢賦)를 내라고 하겠습니까. 백성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국가는 재정이 비어 고갈되었으니, 그 눈앞의 참상이 어찌 다만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정전(正殿)에 벼락이 치는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경기 지방의 경우 이런 사실을 아뢰었지만, 모르겠거니와 여러 도 역시 이런 재변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영남과 호서에서 온 자들이 다 그곳의 재변은 경기보다 더 참혹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나머지 5도인들 무사하리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금세에 와서는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듣는 자들도 보통 있는 일로 여기어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고 있으니, 수령들이 버려두고 보고하지 않거나 감사들이 소홀히 여겨 아뢰지 않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하늘의 경계를 깊이 두려워하여 더욱 조심하는 마음을 더하여, 대신을 소환하고 일을 말했던 신하들을 모두 석방하셨으니, 송 경공(宋景公)의 세마디 좋은 말029)  인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근래 호령(號令)을 시행하는 즈음에 하늘에 부응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유독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삼가 들으니, 외간에 시끄럽게 전파되는 말에 ‘금원(禁苑)에는 용지(龍池)라는 경승이 있고 대궐 안에 유연(游宴)의 조짐이 있다.’ 합니다. 궁궐 안의 일은 누설을 금하고 있기에 꼭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과연 이런 일이 있다면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재앙이요, 더할 수 없는 변괴입니다. 어찌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지붕이 날아가야만 재변이라고 하겠습니까. 성왕(成王)이 한 생각을 잘못한 것이 바람과 우레의 재변을 불렀고 보면030)   오늘의 풍재도 전하의 한 생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스스로를 반성해 보았을 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나는 이런 일이 없는데 이 말이 어찌해서 이르렀는가.’라고 하시면서 곧바로 신을 벌하시는 것도 가하며 신을 내쫓아도 가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반성해 보았을 때 터럭만큼이라도 유사한 자취가 있다면 ‘저 은미함을 가리울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시면서 폐지할 것은 폐지하고 멈출 것은 멈추어 더욱 마음을 간직하고 살피는 노력을 더하시어 사욕(私慾)과 안락의 조짐을 통렬히 끊어 버리소서. 그러면 천변을 멎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히 멎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하늘에 호응하시는 참다운 방법입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서민의 상징은 별이니, 별에 좋은 바람이 있고, 별에 좋은 비가 있다.031)  ’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반 백성이 그 삶의 자리를 얻으면 기풍(箕風)과 필우(畢雨)가 절도가 있어 상서가 되고, 일반 백성들이 삶의 자리를 잃으면 기풍과 필우가 절도를 잃어서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초췌함이 오늘날보다 심한 때는 없었으니, 그 무리에 감응함이 어찌 대풍과 홍수의 재변을 부르기에 부족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전하께서 빨리 유사에게 명하여 팔도의 감사에게 교유(敎諭)를 내려, 재변을 당한 경중을 자세히 살피고 공부(貢賦)의 수를 헤아려서 감해 주게 하여 백성을 너그럽게 구휼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비록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쌀이라도 덜어 주면 백성은 그것을 덕으로 여기고, 더하면 백성은 그것을 원망하는 것이 상정(常情)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백성들에게 덕을 모으시기를 바라지 원망을 모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 덜어 주는 것은 구우 일모(九牛一毛)이나 얻는 것은 억조의 민심이니, 그 이해와 득실의 갈림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전하께서 백성을 구휼하는 참다운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신이 들으니, 경기와 강원도에서 양전(量田)을 올해 시작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이는 비록 부득이한 일이지만, 이처럼 큰 흉년이 든 해를 당해서 이처럼 막중한 일을 거행한다면, 허비되는 비용이 적지 않고 갖가지 소란이 일어날 것이니, 백성들이 무엇을 믿고서 원망하거나 흩어지는 데 이르지 않겠습니까. 경기는 근본이 되는 곳이요, 강원도는 궁벽한 지방이므로 더욱 위안하고 무마하여 곤궁한 백성들을 보호해야지, 기한 안에 기필코 거행하여 원망과 비방을 불러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약간 풍년이 드는 해를 기다렸다가 시행해도 늦지 않다고 여깁니다.
신이 탄핵을 받자마자 갑자기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풍병이 들었다고 할 것이고 스스로도 심질(心疾)이 걸렸다는 것을 알지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성심(誠心)은 천부적으로 타고났기에 마음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어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하늘에 호응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참다운 일에 터럭만큼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 있다면, 신이 비록 전리(田里)로 물러가 죽더라도 또한 헛되이 한 세상을 산 것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하찮은 사람의 말이라고 하여 조심하는 생각을 더하시지 않는다면, 신이 서울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봉록을 탐하여 구차히 용납되기를 바라는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신은 이러한 일이야말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보고 경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말은 마땅히 유념하고 의논해 처리하여 수신(修身)하고 보민(保民)하는 약석(藥石)으로 삼겠다. 경은 물러나 돌아가지 말고, 일에 따라 바른 말을 해 주어 내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성(歲星)032)  과 금성이 서로 침범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근래에 국서(國書)는 오로지 대제학에게 맡겼는데, 대제학이 체직된 뒤로는 승문원 부제조 이식(李植)에게 주관하여 짓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식이 사명(詞命)에 능하지만, 본사의 문서 작성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이번 국서에는 의당 써 넣어야 할 말이 자못 빠졌기에 다시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선조조(宣祖朝) 때 이호민(李好閔)·이정귀(李廷龜) 등을 본사의 부제조로 임명하여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을 관장하도록 한 예가 있었으니, 지금도 이식을 부제조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사정을 익숙히 살피어 국서를 찬수(撰修)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고, 또 정원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대제학에 합당한 사람을 권점(圈點)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식이 소를 올려 부제조를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7월 28일 병자

정언 이행우(李行遇)가, 부제학 홍방은 본디 인망이 없어 여론이 쾌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여겨 논박하고자 하였는데, 대사간 윤지, 헌납 김원립(金元立), 정언 유황(兪榥)이 모두 잠시 훗날을 기다리자고 답하였다. 행우가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드디어 인피하니, 윤지 등도 모두 자신들의 잘못을 들어 체직해 주기를 청하였다. 응교 심지원(沈之源), 부교리 박서(朴遾), 수찬 김익희(金益熙) 등이 처치하기를,
"행우는 말하는 책임을 지고 있으니 자연 일에 따라 논박해야 할 것이고, 윤지 등이 오가면서 신중히 한 것 역시 일을 논하는 사체를 얻은 것입니다. 모두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행우는 장관이 의논하여 처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스스로 인피하였으니, 매우 부당하다. 체차하라."
하였다.

 

7월 29일 정축

사직(司直) 김시양(金時讓)이 차자를 올리기를,
"양전(量田)하는 것은 오로지 전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고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호서(湖西)는 2만여 결이고 호남(湖南)은 6만여 결이고 영남(嶺南)은 거의 10여 만 결이라고 하니, 평상시의 전결(田結)로 논한다면, 양호(兩湖)는 겨우 그 반을 얻었지만, 영남은 3분의 2를 얻었습니다. 전야(田野)를 살펴보면, 영남은 양호 지방에 비하여 애초부터 더 많이 개간한 것이 아닌데도, 결수(結數)의 다소가 이처럼 서로 균등하지 않습니다. 이제 각도의 공부(貢賦)를 전결의 숫자에 따라 서로 융통하여 분정(分定)한다면, 형세상 편리하지 못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호서의 요역(徭役)은 6분인데 1분은 호남으로 돌리고 2분은 영남으로 돌리면 호서는 자연 3분이 되고, 호남의 요역은 5분인데 1분을 영남으로 돌리면 호남은 자연 4분이 되니, 양호의 백성들에게는 진실로 다행이지만 영남의 백성들은 무슨 죄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세미(稅米) 이외 각종의 요역은 각도에서 갑술년에 납부하던 숫자에 의해 그대로 각도에 배당시켜서 각기 신결(新結)에 고루 나누어 부과하고, 서로 융통하여 나누어 배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럴 경우 우선 오결포(五結布)와 삼수량(三手糧)으로 미루어 보건대, 호서는 6결에 여포미(餘布米)가 매결당 10승(升) 남짓 되고, 호남은 7결에 여포미가 매결당 8승 남짓 되고 영남은 9결에 여포미가 매결당 7승 남짓 됩니다. 대략 이와 같이 된다면, 양호와 영남의 백성들이 한쪽만 고통을 받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에서 진술한 일이 소견이 없지 않으니, 마땅히 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당초에 상이 삼남 지방에서 새로 양전한 결(結)에 대해서는 삼년 동안 세금을 반으로 줄여 주도록 명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에 양전을 한 뒤에, 처음에는 오결포(五結布)·별설미(別設米)·조례가미(皂隷價米)를 모두 감해 주라는 명이 있었고, 이어 새로 더한 세금은 3년 동안 반으로 줄여 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해조와 함께 신결(新結)에서 받는 세금과 3종의 요역을 감해 주는 숫자를 비교해 보니, 새로 얻는 양으로 줄어든 양을 보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3종의 요역은 참으로 감해 주기 어려운데, 또 새로 더한 세금까지 감해 준다면, 국가의 수입이 전에 비해 오히려 줄어듭니다. 해조에서 어렵게 여기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신 등의 뜻으로는, 새로 세금을 더하는 결에 대해서는 하교하신 대로 반을 감해 주고 3종의 요역은 전날의 사목(事目)대로 그 원래 숫자로 결수를 따져 고루 나누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며, 오결포·조례미는 하교하신 대로 전부 감해주고 전세(田稅)는 예에 따라 받아들이며, 삼별수미(三別收米)와 서변 군량[西糧] 등 각종의 요역은 결수를 따져 고루 분정(分定)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결포를 감해 주는 것은 그 은혜가 오래 지속되고 누구나 혜택을 입게 되지만 새로 부과한 세금을 줄여 주는 것은 그 혜택이 3년에 그치고 혜택을 받는 자가 적으니, 명분 없는 별역(別役)은 그대로 두고 의례적으로 받는 상세(常稅)를 줄여 주는 것은 역시 옳지 않은 듯합니다. 요역을 감하는 것과 세금을 감하는 것을 병행하지 못할 바에야 별포(別布)를 완전히 감해 주는 것이 더 편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더 내게 되는 전세(田稅)는 반으로 줄여 주지 말라. 그리고 3종의 요역은 줄여 주지 않을 수 없고, 서변 군량은 사직 김시양의 차자 내용대로 분정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영남의 좌도와 우도에서 얻은 결수(結數)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평상시에 비해서 삼분의 일이 줄었습니다. 공청 좌도와 우도에서 새로 얻은 결수는 비록 전라 좌도와 우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지만 평상시의 결수로 말하면 전라도는 반으로 준 것이고, 공청도는 반이 넘는 것입니다. 대개 공청도는 갑술년 당시 경작하던 전지가 이미 전라도보다 많았으니, 이제 신결(新結)의 숫자가 적다고 하여 전라도와 차등을 두어 볼 수가 없습니다. 또 외방의 결수가 간혹 고르지 못하지만, 조정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자연 결수에 근거하여 고루 분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하나 양을 비교하여 숫자를 나누고 장소에 따라 가감(加減)한다면 실행하기 어려울까 걱정됩니다. 오직 서변 군량은 일반 조세에 비교할 바가 아니니, 상께서 비국의 계사에 근거하여 특별히 가감하여 분정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경상도의 신결이 특히 많으니 본도의 서변 군량은 타도의 양과 비교해서 줄여서 정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호조가 또 아뢰기를,
"하삼도(下三道)는 갑술년 당시 경작하던 전지 33만 7천 47결에서 매결마다 내는 쌀이 1두 5승으로, 총 3만 3천 7백 4석인데, 신결(新結) 18만 2천 7백 19결을 합산하여 고루 나누면, 매결당 1말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경상도는 신결이 8만 2천 9백여 결이고, 공청도와 전라도는 신결을 합계해야 겨우 9만 9천 7백여 결로, 결수가 이미 현격하게 다릅니다. 공청도의 신결은 평상시의 구결(舊結)과 비교하면 겨우 반이 넘고, 전라도의 신결은 평상시의 구결과 비교하면 절반이 되지 못하는데, 경상도의 신결은 평상시의 구결과 비교하면 겨우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양호 지방의 신결은 비록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평상시의 구결에 대한 비율로 논하면 더하고 덜함이 고른 것이요, 경상도의 신결은 양도에 비해서 숫자는 많지만 평상시에 덜어 준 것에 비하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삼수량(三手糧)·서변 군량을 모두 감해서 결정하게 해야겠으나, 갑진년에 공물(貢物)을 상정(詳定)할 때에 경상도는 적이 물러간 지 오래되지 않았다 하여 정해진 숫자가 양호 지방에 비하여 가장 적었습니다. 이제 이 두 요역을 모두 감해서 결정하게 한다면 양호 지방에서 반드시 원통하다고 할 것입니다. 다만 서변 군량은 매결당 1두 안에서 특별히 두 되를 감해 주어 양호 지방으로 옮긴다면, 3만여 석의 숫자를 채울 수 있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덜어 주는 것이 너무 적은 듯하니, 적절하게 헤아려서 다시 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생각건대 국가에 일이 많아서 경비가 매우 크니, 비록 세금을 줄여 주고자 하나 어찌할 수가 없다. 경포수(京砲手)·어영군(御營軍)·사대장(四大將)의 군관에 이르러서는 비록 모두 없앨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아 먹일 자가 많으니, 세금을 줄이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비록 인심(仁心)과 인문(仁聞)이 있으나 백성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한다.033)  ’고 하였는데, 오늘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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