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무인
황해도에 7월 12일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갔으며, 곡식이 손상되었다. 감사가 이를 아뢰었다.
홍서봉(洪瑞鳳)을 대제학으로,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박수홍(朴守弘)·임효달(任孝達)을 장령으로, 송희진(宋希進)을 정언으로, 김경여(金慶餘)를 교리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가 풍재(風災)를 치계했는데, 호조에서는 어째서 회계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에 호조에서 회계하기를,
"외방(外方)에 재해를 당한 곳이 있으면, 본도의 감사가 장계를 올려 재해에 대한 보상을 해 줄 것을 요청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전례(前例)입니다. 지금 풍재를 치계한 것은 6도가 모두 같으나 별도로 급재(給災)에 대한 요청이 없었으며, 또 원두표의 장계(狀啓) 끝 부분에 ‘비가 온 뒤에 햇빛이 나서 다시 소생할 희망이 없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곡식이 익기를 기다려 봐야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감히 회계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그 장계 중에 진달한 압사한 사람에 대해서는 휼전을 시행하기를 청했어야 할 듯한데 청하지 않았구나."
하였다. 살펴보건대 해조가 회계한 내용이 임금이 재앙을 소홀하게 여기는 마음을 열어 주고 생민에게 굶주리는 환난을 끼쳤으니, 그 애통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고상(故相) 정탁(鄭琢)에게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리고, 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에게 문단(文端)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탁은 사람됨이 공검(恭儉)하고 질직(質直)한데, 초야에서 일어나 재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정승이 되어서는 건백(建白)한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낮게 평가하였다. 송인은 중종의 부마(駙馬)로서 부귀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마치 포의(布衣)의 선비처럼 지냈다. 예서(隷書)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 으뜸이었으며, 시도 잘 지었으나 서예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그의 인품의 고매함은 서예나 시문보다 더 뛰어났다.
8월 2일 기묘
영남 유생(嶺南儒生) 조영문(趙英汶) 등이 상소를 올려 양전사(量田使) 임광(任絖)·신득연(申得淵)·정기광(鄭基廣)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광 등 3인이 명을 받아 양전을 할 때 빠진 결수를 남김없이 찾아내어 더욱 각박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다.
8월 3일 경진
부응교 심지원(沈之源), 교리 김경여(金慶餘), 부교리 박서(朴遾), 수찬 김익희(金益熙)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엄숙하고 공손하며 경건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지나치게 안락하지 않았으니, 향기로운 덕(德)이 하늘의 마음에 들 만한데, 상서로운 일은 이르지 않고 도리어 재앙만 생겨나고 있습니다. 수재와 한재가 극도로 심하고 별들은 궤도를 벗어나며, 음란한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우레가 궁궐을 치며, 심지어는 시냇물이 끊어지고 못물이 붉게 변하는 재앙과 능(陵)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는 변괴가 달마다 생겨나 사관(史官)의 기록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인애한 하늘이 우리 전하에게 경고하시는 까닭을 뚜렷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하늘에 호응할 참다운 방도를 다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다시 큰 바람으로 위엄을 보이어 돌을 날리고 집을 무너뜨리며 벼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망치며, 심지어는 종묘와 사직 안에 있는 백 년이나 된 교목(喬木)도 많이 꺾였으니, 보고 듣기에 참혹하여 중외가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그 마음을 크게 경계하여 애통한 마음으로 후회하고 깨달아 허물을 이끌어 스스로를 책망하시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달이 지나도록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전혀 듣지를 못했습니다. 전하의 생각으로는 성덕(聖德)에 부족한 바가 없고 정교(政敎)에 잘못이 없으며 강역(疆域)에 근심이 없으니, 우연한 천변이야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여겨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 전하의 뜻이 확립되지 않아서 모든 일이 다 좀스럽고 잗달아지는 것이며, 전하의 학문에 진보가 없어서 본원(本源)이 깨끗해지지 못하며, 기강(紀綱)은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사치스러운 풍속이 날로 심해져서 그 피해가 수재나 화재보다 심하며, 대신을 경시하여 예모가 점차 각박해지고, 직언을 듣기를 싫어하여 총명이 점차 가리워지며, 사로(仕路)가 혼탁해져서 공도(公道)가 시행되지 않고 사습(士習)이 투박해져서 지향하는 바가 바르지 않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탄식이 생겨나 국가의 근본이 무너지고, 군정(軍政)은 무너져서 변방의 방위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때를 당해서는 비록 경사스러운 구름, 경사스러운 별, 감로(甘露), 예천(醴泉) 등의 상서가 매일 나타나고 매달 이른다 해도 쇠란과 패망을 구제할 수가 없을 것인데, 하물며 이 비상하고 놀라운 재변이 거듭 나타나는 경우이겠습니까.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하늘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이렇게까지 한단 말입니까?
신 등이 삼가 살펴보니, 전하께서는 그 어짐이 족히 백성을 보호하실 만하고, 그 총명이 간사함을 분변할 만하며, 위무(威武)가 족히 일을 결단하여 처리하실 만합니다. 그러나 다만 성인이 되겠다는 뜻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바른 정치를 해 보겠다는 정성이 독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식(姑息)에만 힘쓰다 혹 먼 미래를 위해 경영(經營)하는 데는 소홀히 하며, 자잘한 일에만 세밀히 살피다 혹 그 대강(大綱)을 빠뜨리며, 그럭저럭 지내다 오늘에 이르러서 더욱 심해졌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자신을 정비하는 데 참다운 노력이 있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참다운 마음을 쓰면, 어진 인재를 찾아서 함께 정치를 할 수 있고 폐단을 개혁하여 한 시대를 구제할 수 있어서, 당(唐)·우(虞)와 하·은·주 삼대(三代)의 정치를 오늘날에도 다시 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려서 국가의 운명을 영원하게 할 수 있는 것과, 육체를 잘 길러서 오래 살 수 있는 것과, 배움을 통해서 성인(聖人)에 이를 수 있는 것 등 이 세 가지 일은, 분명히 사람의 힘으로 조화(造化)를 이길 수 있는 것이나, 사람들 자신이 하지 않을 따름이다.’ 하였으니, 이 말씀은 믿음직합니다. 그것을 위한 노력을 참답게 하고도 실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시어 지치(至治)를 흥기시킬 것을 기약하시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로 마음을 삼고 한(漢)·당(唐) 이후를 본뜨지 말며, 요·순·우·탕·문·무와 같은 경지로 나아가고 요·순·우·탕·문·무와 다른 점을 제거하소서. 그러면 시사(時事)를 바로잡을 수 있고 천재(天災)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아, 큰 뜻을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참다운 학문이 있어야 안팎이 서로 보탬이 되어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제왕(帝王)의 학문이 포의(布衣)의 선비와는 다른 점이 있고, 경륜(經綸)의 일이 장구(章句)의 학문과는 서로 같지 않으나, 그 본말의 순서는 서로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내면으로는 내 몸에 있는 이치를 궁구하고 외면으로는 사물에 있는 이치를 궁구하여 현우 사정(賢愚邪正)을 합당하게 분별하고 시비 득실(是非得失)을 합당하게 살피는 것에 이르기까지 학문이 아님이 없습니다. 조용히 있을 때 잡념을 일으키지 않아 맑고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을 지니며, 움직일 때 한결같은 모습을 지녀 조금의 잘못도 없으며, 몸가짐을 반드시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하며, 마음가짐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삼가는 것도 모두 학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기질(氣質)의 병통을 극기(克己)로써 다스리되, 지나치게 부드러운 병통은 강함으로 바로잡고 나약한 것은 굳은 의지로 바로잡으며, 사나운 병통은 온화한 것으로 구제하고 성급한 병통은 너그러움으로 구제하며, 욕심이 많으면 깨끗이 하여 청정(淸淨)한 데 이르게 하고 사심(私心)이 많으면 바로잡아서 대공(大公)에 이르게 하며, 쉬지 않고 스스로 힘써 밤낮으로 해이함이 없게 하는 것 역시 학문이 아님이 없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는 몸에 청명(淸明)한 기질이 있으셔서 물욕이 본디 적으시고 학문의 길에도 뜻을 두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사(政事)에 나타나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희노(喜怒)의 드러남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많고 호오(好惡)의 편벽됨이 혹 바름을 잃어버리며, 말할 때의 모습에는 항상 노여움이 잘못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행동을 하실 즈음에도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으니, 이 어찌 본원(本源)을 함양하는 공부에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간직하고 성찰함에 조금이라도 태만하심이 없게 하고, 천리(天理)가 드러나기 전에 확충하시고 인욕(人慾)이 싹트려고 할 때 막으시며, 희노는 반드시 절도에 맞게 하고 호오는 반드시 바르게 하시고, 말할 때 기상은 반드시 순하게 하시고 행동은 반드시 합당하게 하시며, 또한 반드시 어진 사대부를 자주 접하시되 부드러운 안색과 겸손한 기상으로 의리(義理)를 강론하고, 나아가 정치의 잘못과 백성의 고통을 모두 자문하소서. 그러면 성덕(盛德)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날로 닦아질 것이니, 큰 뿌리가 확립된 뒤에는 어느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스스로를 완성하고 사물을 완성함이 참으로 여기에 달렸으며,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돕는 경지에 이르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어 시사(時事)도 구제할 수 있고 천재(天災)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국가가 유지되는 것은 기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강이 확립되는 것은 오직 인군이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마음으로 위에서 살피어 출척(黜陟)과 형상(刑賞)을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부치고, 곧은 인재를 등용하고 곧지 못한 자는 내쳐서 사의(私意)가 끼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임금의 마음에 진실로 그 공정함을 다하지 못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편벽된 사심이 있게 되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일가붙이나 폐행(嬖幸)의 무리들이 형세를 엿보아 총명을 현혹(眩惑)시키지 않는 경우가 없어, 비록 충성스럽고 정직한 의론이 있더라도 들어갈 길이 없게 되며, 사기(士氣)는 손상되고 공도(公道)는 막혀서 기강이 이 때문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의 총명하신 예지(睿知)는 모든 군주에 우뚝 뛰어났지만 편벽되고 사사로운 한 생각이 혹 모두 제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궁가(宮家)에 관계되는 일은 곡진히 비호하시고 훈척(勳戚)에게 미치는 말은 일찍이 들어 주신 경우가 없으니, 이 어찌 큰 성인이 공평하게 대하고 널리 사랑하여 불편 부당하게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아, 근원이 맑지 않으면 하류가 깨끗할 수 없는 것이고, 모양이 단정하지 않으면 그림자가 바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정(朝廷)에서 공도(公道)가 떨쳐지지 못하면 선비들 사이에서는 사욕이 멋대로 횡행하며 뇌물이 성행하고 청탁이 앞다투게 되어, 죄가 있는 자는 모면할 길을 도모하고 공이 없는 자가 참람하게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택은 법도를 넘을 수 없는 것인데도 혹 규모가 구름에 이어질 듯이 커서 극도로 장려(壯麗)한 것이 있는가 하면, 전원(田園)도 제도를 지나칠 수 없는 것인데 혹 외람되게 받고 넓게 점령하여 풍요한 땅을 다 가진 자가 있으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은 백성과 함께 소유해야 하는 것인데 모두 떼어 받았다고 하면서 그 이익을 독점하며, 편비(褊裨)나 대졸(帶卒)은 본래 호위하기 위한 것인데 종으로 삼고 장원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심부름꾼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외에 매와 개를 부려 사냥하고 음악이나 여색을 밝히는 등의 행위를 거리낌없이 자행하는 모습들은 온 나라에 말이 자자하여 모두 들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기강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기강이 떨쳐지지 않음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가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겨우 한 터럭만큼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가짐을 공정하게 하시고 아랫사람에게 임하심을 바르게 하시어, 사의(私意)가 싹트는 것을 일체 극복하고 제거하소서. 분수에 맞지 않는 은총을 사사로이 친한 자에게 일체 미치게 하지 말고, 삼척(三尺)의 법034) 을 귀하고 가까운 자들에게 너그러이 쓰지 말아, 대소의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공도에 한결같지 않음이 없도록 하고 내외와 원근으로 하여금 감히 정도에 한결같지 않음이 없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면 모든 법도가 오직 한결같고 여러 업적이 모두 환하게 이루어져 시사(時事)를 구제할 수 있고 천재(天災)를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검소는 덕의 공손함이요, 사치는 덕의 도적이다.’ 하였습니다. 대저 임금이 맑은 마음으로 스스로 공손하며 검약(儉約)에 힘을 쓰면, 기욕(嗜慾)이 줄어들고 생각은 고요해지며 안으로는 깨끗하고 순수한 즐거움이 생겨나고 밖으로는 해끼치는 누가 없게 되어, 본성을 기르고 덕을 길러 자연 그 혜택이 사물에 미칠 수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임금된 사람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옛날부터 임금 중에는 항상 시작을 잘한 자는 많아도 끝을 삼간 자는 적었습니다. 대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기 때문에, 스스로 수신 제가(修身齊家)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치스럽고 방종한 데 흐르지 않는 경우가 드문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실 때에는 몸소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시어 화려하고 사치함을 일삼지 않았으며, 완호(玩好)하는 물건이나 아름다운 의복이나 거마(車馬)로써 무릇 마음을 고혹시키고 덕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물리치고 배척하셨으므로, 보고 듣는 모든 사람들이 숭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점차 처음과 같지 않아져서 저녁에 등불을 켜고 유연(遊宴)하는 일이나 후원에 못을 파고 누각을 짓는 일이 민간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의 입에 시끄럽게 오르내리고 있으니, 신 등은 잘 모르겠거니와 이런 말들이 어찌해서 이르게 된 것입니까. 만약 이것이 전하는 자들이 잘못 전한 것이라면 참으로 성덕(聖德)에 손상될 바가 없는 것이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비슷한 자취가 있다면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으며 여러 아랫사람들의 바람에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런 일이 있으시면 고치시고 없으시면 더욱 힘쓰시어, 무익한 일로 안일과 즐거움에 빠지는 조짐을 열어 놓지 마소서. 또한 임금께서만 스스로를 신칙하실 것이 아니라 궁중에도 마땅히 거듭 경계하시어, 대포(大布)·대련(大練)의 검소한 미덕035) 을 전대(前代)에서만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하시며, 고계 광수(高髻廣袖)036) 의 사치스러운 풍속을 혹시라도 오늘날 본받음이 없도록 하소서. 그러면 위에서 좋아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더 좋아하여 마치 바람이 불면 풀이 저절로 눕는 것처럼 사치스러운 풍속은 저절로 개혁되고 인륜을 어기는 사람이 없게 되어 시사를 구제할 수 있고 천재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대신의 직책은 모든 책임이 집중되는 곳입니다. 민심이 흔들리어 서로 부딪칠 땐 진정시키고자 하고, 맵고 달고 건조하고 습함이 고르지 못한 것은 조화롭게 하고자 하며, 이리저리 얽혀 어지럽게 맺힌 일은 풀어서 해결하고자 하고, 어둡고 더러운 것도 너그럽게 용납하고자 하니, 그 책임의 무거움이 이와 같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 임무를 전적으로 맡기지 않을 수 없고, 그들에게 예모를 갖추어 대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용(中庸)》에 ‘대신을 공경하면 일에 미혹됨이 없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후세에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살펴보니, 전하께서 대신을 진퇴시킬 즈음에 간혹 그 예를 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직위에 있을 때도 이미 의지하여 맡기는 정성이 없고 지위를 떠날 때도 역시 돌아보고 애석해 하는 뜻이 없으십니다. 김류는 세 번 사직하자 윤허하셨고 김상용(金尙容)은 일곱 번 사직하자 윤허하셨으니, 이는 비록 그들의 수고로움과 초췌함을 딱하게 여겨 휴식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는 의아하게 여겨져 모두 상의 뜻에 어긋나
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인의 대도(大度)를 소인들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만, 대신을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실로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노성한 사람에게 맡기고 예경(禮敬)을 극진히 하여, 그들로 하여금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그 온축한 것을 펼 수 있도록 하고 상하가 서로 믿어 정사를 토론할 때 의견을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러면 복심(腹心)을 의탁할 곳이 있게 되고 안위(安危)를 매어 둘 곳이 생겨 국가의 체통이 중해지고 조정이 존귀하게 되며, 모든 일이 평안해지고 치도(治道)가 이루어질 것이며, 따라서 시사를 구제할 수 있게 되고 천재를 해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조정에 진선(進善)의 깃발037) 과 비방(誹謗)의 나무038) 를 두었으니, 그 치도(治道)을 통하게 하고 간쟁을 유인함이 참으로 위대하지 않습니까. 대개 한 사람의 총명은 한계가 있고 만기(萬機)의 사무는 한량이 없기 때문에, 비록 성스럽고 지혜로운 임금이라 하더라도 널리 중론(衆論)을 받아들이고 크게 군언(群言)을 채집하여, 차이를 살피고 가부를 살펴서 알맞은 것을 취해 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아랫사람들을 경시하고 오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 하여 다른 사람의 총명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거나 다른 사람의 지혜를 자기보다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이는 마치 귀와 눈을 가리고서 총명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혼란과 패망에 이르지 않은 자는 드뭅니다.
신 등이 삼가 살펴보니, 전하께서 말을 듣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태만해져서 평범한 논핵조차도 윤허하시지 않으며, 조금만 뜻에 어긋나거나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갑자기 뜻을 꺾으려 하십니다. 혹은 과격하다고 의심하시고, 혹은 당파를 좋아한다고 의심하시며, 혹은 명예를 구한다고 의심하시어,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기색이 사람들을 천리 밖에서부터 막으시며, 매이고 집착하시는 병통이 말하는 사이에 지나치게 드러나십니다.
우선 요즈음의 일로 말해 보겠습니다. 유백증(兪伯曾)은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여 그 말이 비록 적절하지는 못하지만, 그 마음을 살펴보면 다름 아니라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셨습니다. 나만갑(羅萬甲)은 말솜씨가 너무나 질박하여 지나친 점이 없지 않으나 ‘궁궐이 엄숙하지 못하다.’는 말의 경우 민간에서 서로 전하는 말로써 다른 사람들은 말하지 못했는데 유독 만갑만이 극언하였을 뿐입니다. 군신(君臣)은 마치 부자(父子)와 같으므로 무릇 들은 일이 있으면 그 허실(虛實)을 따질 것이 없이 모두 군부(君父) 앞에 진달하는 것이 신자(臣子)된 사람은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입니다. 삼가 들으니, 지난번 경연 석상에서 미안스러운 하교까지 있었다 하니, 이 어찌 여러 신하들이 전하에게 기대하는 바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난 잘못을 통렬히 깨우치시고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서 여러 사람들이 들은 것을 모아서 자신의 총명으로 삼으시고 여러 사람들이 본 것을 모아 자신의 지혜로 삼으시며, 마음에 거슬리는 말이 있거든 바른 도리를 지적한 것이 아닌가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말이 있거든 부당한 것이 아닌가 살펴보소서. 그리하여 그 말이 옳으면 수용할 뿐만이 아니라 뒤이어 상을 주시며, 설령 그 말이 광망(狂妄)하여 시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고 벌을 주시지 마소서. 그러면 좋은 말은 숨겨지지 않고 여러 계책은 모두 시행되어 시사를 구제할 수 있고 천재를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의 치란(治亂)은 벼슬길의 청탁(淸濁)에 달려 있고, 벼슬길의 청탁은 공도(公道)가 시행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공도가 시행되면 중앙의 백료(百僚)로부터 외방의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적임자를 얻게 되고, 공도가 시행되지 않으면 중앙의 백료로부터 외방의 주현에 이르기까지 다 그 적임자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가진 임금이 공도를 널리 펴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의 현실은, 양전(兩銓)039) 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꼭 한결같이 공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청탁으로 벼슬을 얻기도 하고, 혹은 뇌물로 벼슬을 얻기도 하는 등, 요행을 바라는 길이 크게 열려서 관작의 기강이 잡되고 혼란합니다. 심지어 나덕헌(羅德憲)·이확(李廓)처럼 탐오죄를 범해 낭패를 당한 자나 이일원(李一元)·문희성(文希聖)·이민환(李民寏)처럼 적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되어 버림을 받은 자들까지도 아직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어 혹 변방의 장수나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牧民)의 책임을 맡기까지 하였으며, 시정(市井)의 무리나 천얼(賤孼)의 무리로 별로 남달리 빼어나거나 쓸 만한 재주가 없는 자들까지도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정직(正職)에 통용되어 혹은 금관자나 옥관자의 직질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벼슬길의 혼탁함이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은 없어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거듭 해조에 명을 내려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을 따르지 말고 반드시 공정하게 하도록 하시고, 출척(黜陟)의 법을 밝히고 천거의 법규를 엄격히 하여 어진 사람이 지위에 있고 능력있는 사람이 직책에 있게 하시며, 탐오한 무리는 영구히 서용하지 말고 용렬한 무리 역시 깨끗이 도태하소서. 그러면 벼슬길이 맑아져 명기(名器)가 중하게 되고 직사(職事)가 시행되어 공적이 이루어져, 시사를 구제할 수 있고 천재를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사습(士習)은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사습이 바르면 원기가 왕성하고, 사습이 투박하면 원기가 쇠퇴하는 법입니다.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가진 자가 유현(儒賢)을 남달리 드러내고 도덕(道德)을 존숭하여 사습을 바르게 하고 원기를 왕성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열성조께서 문(文)을 높이고 치교(治敎)를 크게 밝혀 거듭 빛나고 계속 젖어들게 하신 교화가 선조 대왕(宣祖大王) 때에 이르러 융성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해서 사람마다 절차 탁마하고 선비마다 바른 행실을 닦아서, 경전에 능통하고 옛것을 배우는 것을 능력으로 삼고 스승을 높이고 벗을 사귐을 직분으로 삼았기에, 나와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문질(文質)이 빈빈하게 갖추어져 볼 만한 인재가 수두룩이 일어나 국가를 편안히 한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교화가 점차 무너지고 의리가 어둡고 막혀서 사람들은 선(善)을 향하지 않고 선비들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아, 방탕하고 편벽된 습관이 하루하루 더욱 심해갑니다. 우선 지난번 관학(館學) 유생들의 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늘날의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막중한 의견을 제시했으니 진실로 성급함을 면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은 어진 이를 높이는 데 급급해서 생각에 부족한 것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 몇몇 다른 의논을 가진 선비들이 있었습니다만 어찌 실질적인 견해가 있어서였겠습니까. 서로 대립한 끝에 상소를 올려 반드시 상대방을 배격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사습(士習)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설령 양신(兩臣)040) 의 행위에 의논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그들을 높이는 자들은 지나치게 높인 잘못이 있을 뿐이지만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두 신하의 높은 도덕(道德)과 순수한 학문은 현재 종사(從祀)하고 있는 여러 현인들에 비교해 볼 때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데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옛 현인을 본받는 정성이 없으신 것은 아니나, 성전(盛典)을 가벼이 거행하실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시론(時論)이 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염려하시어 즉시 준허하지 않으신 것으로, 그 의도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답(批答)한 글 가운데 뚜렷이 싫어하는 빛을 보이시어 선비들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고 사문(斯文)으로 하여금 낙심하게 만들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한 시대의 선비들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게 하고 추향을 바르게 하기를 바라기란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평정한 마음으로 이치를 살피어 시비를 변별(辨別)하시고 유술(儒術)을 높이시어 교화를 돈독히 실행하시어, 사습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원기가 저절로 왕성하게 하소서. 그러면 인재가 배출되고 국가의 운명이 문명(文明)으로 나아가 시사를 구제할 수 있고 천재를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사람이 없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습니다. 대개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명하며, 가까이 해야 하고 하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백성입니다. ‘나를 잘 무마해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이다.’ 하니, 그 사이가 터럭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살펴보니, 요즈음 강역(疆域)의 일이 많아서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우며, 오랑캐에게 준 물건과 가도에 주는 양식 때문에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제사(諸司)에서 흥판(興販)하면서 자잘한 것까지 걷어내며, 경비에 속하지 않는 것까지도 백성에게 받아내 살을 벗기고 뼈를 추리는 것이 한량이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목민하는 관리가 적임자가 아니라서 백성의 고통은 돌아보지 않고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내어 멋대로 긁어모으며, 버젓이 뇌물을 써서 상관의 기쁨을 사고 별도로 군수(軍需)를 마련하여 상을 받고자 획책하고 있습니다. 또 조정에서 지방관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도 그 바른 방도를 잃어, 각박하게 세금을 걷는 자는 마음을 다한다고 하고 자상하게 백성을 대하는 자는 명예를 추구한다고 하여 국사(國事)와 민사(民事)가 갈라져 둘이 되었습니다. 민생의 고통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애통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민생이 보존되지 못함을 생각하시고 함께 다스릴 어진 인재를 생각하시어, 자상하고 개결한 자를 골라 등용하시고 각박하고 탐오한 자를 제거하소서. 또 시종(侍從)하는 신하들도 번갈아 파견하여 잔폐한 고을을 회생시키고 개혁하는 책임을 맡도록 하시고, 암행 어사를 자주 보내 민간을 드나들면서 장오(贓汚)를 범하는 관리를 살펴 무거운 벌로써 다스리소서. 그러면 탐관 오리들은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되고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은 소생되고 쉬는 바가 있게 되어, 시사를 구제할 수 있고 천재를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방의 극심한 근심은 오늘날보다 더한 때는 없고 군정(軍政)이 무너짐도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일이 없다면 국가의 복이지만, 혹시라도 급한 경보(警報)가 있게 되면, 장량(張良)·진평(陳平)의 지혜나 한신(韓信)·팽월(彭越)과 같은 재주가 있더라도 손을 쓸 곳이 없을 것이니, 어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군정을 닦음은 장수를 선발하는 데 달렸고, 군정의 근본은 인화에 달려 있습니다. 인심이 화목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들의 뜻이 미덥지 않으므로 백만의 병사가 있더라도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하였고, 오자(吳子)는 말하기를 ‘나라가 화목하지 못하면 군대를 출동시킬 수가 없고, 군대가 화목하지 못하면 승리를 성취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옛날에 나라의 병사를 견고하게 한 자들은 역시 인화를 근본으로 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스러운 혜택과 성스러운 교화가 아직 가로 막혀, 농촌과 민간에는 근심하고 원망하며 고통받는 소리가 많고 사민(士民)들은 충신(忠信)과 예양(禮讓)의 기풍이 없으니, 실로 이미 군정의 근본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장수는 막걸리를 시냇물에 풀어 은혜를 베푼 자041) 도 있었고 등창을 빨아 준 은혜를 베푼 자042) 도 있어서, 사졸(士卒)들을 마치 자제(子弟)처럼 아끼고 수족처럼 보았기 때문에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크게는 곤수(閫帥)에서 작게는 변장(邊將)에 이르기까지 세력으로 지위를 얻기도 하고 뇌물로 지위를 얻기도 하여, 국방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오직 사졸들을 침탈하는 것만을 양책(良策)으로 여깁니다. 이에 더러는 방역(防役)을 면제해 주고 베를 받기도 하고 군졸을 풀어 장사를 시키기도 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부역을 독촉하고 마련하기 어려운 물품을 책임지워,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이웃이나 일족에게까지 침탈을 해서 장차 백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니,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심복시켜 죽을 힘을 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정사를 시행하여 어루만지고 구휼하는 도리를 다하시고, 곤수의 적임자를 골라서 맡겨 방비 계획을 극진히 하도록 하시며, 피폐한 군정을 개혁하고 법제를 엄격히 확립하여 비록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곡식이라도 반드시 군졸들에게 거두지 않도록 하시며, 단지 군기(軍器)를 정밀하게 단련하고 기예(技藝)를 가르쳐 익히게 하소서. 그러면 여러 사람의 마음이 어우러져 군사들도 기뻐할 것이며 변방도 튼튼해지고 국세(國勢)도 강성해질 것이니, 따라서 시사를 구제할 수 있고 천재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지금 이 재이가 생겨난 것은 어떤 일에 대한 감응인지 알 수 없으나, 대개 아래에서 정사를 잘못하면 하늘에서 그 꾸지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앞에 든 몇 조목의 폐단은 얼기설기 뒤엉켜 서로 이어지고 이리저리 굴러서 함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도에 어긋난 징험이요 패망의 조짐이니, 보고 들으심을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하시는 하늘이 그 어찌 재이로써 경고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라 상하가 틈이 없는 것입니다. 6사(六事)로 자책하자 큰비가 내렸고,043) 한마디 말로써 화성을 물러가게 했으니,044) 하늘과 사람 사이에 옮겨가는 기미는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척연하게 두려워하시고 두려운 듯이 수성하셔서, 모든 동작과 행위가 반드시 천도에 합치되기를 힘써 추구하소서. 하늘의 마음은 지극히 인자하시니 전하께서도 역시 인(仁)으로 그것을 체득하시고, 하늘의 이치는 지극히 공정하시니 전하께서도 역시 공정함으로 그것을 체득하시며, 하늘의 도는 지극히 정성스러우니 전하께서도 역시 정성으로 그것을 체득하시고, 하늘의 운행은 지극히 굳세니 전하께서도 역시 굳셈으로 그것을 체득하소서. 전하의 덕이 하늘과 더불어 그 큼을 같이 하신다면, 중화 위육(中和位育)의 공이 이에 극진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성지(聖志)를 확립하셔서 성학(聖學)으로 나아가고, 이로써 퇴폐한 기강을 떨쳐서 검소한 덕을 밝히시며, 이로써 대신을 공경하여 일상의 말을 자세히 살피고, 이로써 벼슬길을 맑게 하여 선비들의 습속을 바르게 하며, 이로써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여 군정(軍政)을 닦으며, 고르고 가지런하고 방정히 하여 치세(治世)와 도(道)를 함께 하신다면, 하늘의 위엄과 노여움이 변하여 돌봄과 사랑이 될 것이며, 백성의 근심과 탄식은 변화하여 성덕(聖德)을 구가하게 될 것이니, 국가의 억만 년 기업(基業)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 중에 진달한 바가 지론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생각하여 채택해 쓰겠다."
하였다.
8월 4일 신사
이때 서울 안에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나 겁탈하였다. 연릉 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의 집도 일찍이 그 피해를 당하였는데, 포도청(捕盜廳)에서 비로소 붙잡아 법에 따라 효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5일 임오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김경여(金慶餘)를 헌납으로, 정치화(鄭致和)·성이성(成以性)를 지평으로, 윤집(尹集)을 정언으로, 임광(任絖)을 교리로, 홍주일(洪柱一)을 수찬으로 삼았다.
8월 6일 계미
헌부가 아뢰기를,
"증광 별시(增廣別試)에 관시(館試)가 있는 것은 2백 년 전부터 내려온 옛 규례입니다. 이제 성균관의 유사(儒士)들이 권점(圈點)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시를 그만두도록 명하셨습니다. 신 등이 성의(聖意)의 소재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네 가지 경사가 겹쳐서 증광시를 보이는 것은 실로 인재를 널리 취하기 위해 거행하는 것인데, 관시 80인의 액수를 제외시키고 복시(覆試) 40인의 액수만 그대로 둔다면, 비단 증광시의 모양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앙이 가벼워지고 외방이 중시되는 잘못이 있게 되므로, 여론이 모두 구차하고 간략하다고 합니다. 이제 이 증광 별시의 초시(初試)는 모두 파방(罷榜)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정치화가 아뢰기를,
"관시를 제거함은 흠전(欠典)이라고 하겠으나 서울과 지방에서 시취(試取)하고 나서 파방까지 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동료와 다르니, 체척하소서."
하니, 집의 심지원, 장령 박수홍(朴守弘)·임효달(任孝達)은 모두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양쪽을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집의 조경(趙絅) 등이 또 아뢰기를,
"감시(監試) 제이소에서 1등을 한 시권(試券)은 전체 문장을 상고하지 않았으니 격식(格式)에 어긋난 바가 있고, 호서(湖西)의 감시에서는 등급을 매기고 나서 봉함을 열어 취사(取舍)를 결정하였으니 역시 매우 공정하지 않습니다. 감시와 동당시(東堂試)를 모두 파방하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8일 을유
금(金)나라 사신 동덕귀(董德貴)가 평양에 도착하여 사람을 시켜 한(汗)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귀국의 백성이 왕의 국경을 벗어나 우리 땅에 들어와 우리 나라의 초병(哨兵)이 곳곳에서 만나니, 왕의 백성들은 크게 법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라 하겠소. 이는 모두 대신들이 탐욕스럽게 이익과 뇌물을 먹기 위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기 때문에 이처럼 소란을 부리는 것이오. 나는 들으니, 예로부터 무릇 신하로서 국권을 쥐고 사실(私室)을 강하게 하고 공가(公家)를 약화시키며 군주를 가볍게 보고 정사를 해치는 자치고 끝내 그 선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소. 내 정분이 형제와 같기에 요행히 본 바를 숨기지 않고 직언하는 것이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사찰을 이미 경건하게 지었으나, 채색할 물감이 모자라 곤란을 겪고 있소. 이는 부처를 공경하는 일이니, 지체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았으면 하오."
하였다.
추신사(秋信使) 박로(朴𥶇)가 금나라에 갔다.
조경을 집의로, 이경(李坰)·이시직(李時稷)을 장령으로, 유경집(柳景緝)을 지평으로, 오달제(吳達濟)를 정언으로, 심지원을 응교로, 오단(吳端)을 부교리로, 윤강(尹絳)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9일 병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영의정 윤방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의 풍재(風災)는 근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대개 신묘년045) 의 풍재가 올해와 같았는데, 임진년에 왜적의 침입이 있었으므로 인심이 이처럼 흉흉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 지방의 재이가 특히 심하다니, 진실로 걱정스럽다. 그러나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영웅이 아니면 반드시 잔인하고 포악한 자인데, 지금 듣기에는 관백(關白)은 본디 평범한 자라고 하니, 내 생각에는 두려워할 바가 못된다고 여겨진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남방의 수군이 매우 많이 손상되었다 하니 뜻밖의 환란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수군을 정비하기를 기다려 중신을 보내거나 어사를 보내 순시하면서 점검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보낸다면,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다. "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특별히 역적 이공(李珙)의 여러 아들을 석방하셨으니, 실로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그러나 불순한 무리들이 매양 이를 구실로 삼으니, 이들을 도성에 둘 수는 없습니다. 어찌하여 진도(珍島)로 이배(移配)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길(李佶) 등이 도성 아래 있으나 무슨 의심할 일이 있겠는가. 내 뜻으로는 그들을 다시 서울 안에 있는 옛집에 들어오게 하고 싶으나, 대신의 뜻이 그러하니, 내 마음은 간절하지만 역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다만 진도는 역시 섬이니, 육지에다 옮겨두도록 하라."
하였다. 방이 아뢰기를,
"지난번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로 연달아 상소하여 누차 호소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결점이 있다는 비방이 있다.’는 교서를 내리셨습니다. 대저 두 현인은 일대(一代)의 유종(儒宗)이요 백세(百世)의 사표(師表)인데, 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사림의 실망이 매우 큽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종사에 대해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방이 아뢰기를,
"예전에 종사하는 것은 혹 백 년이 지난 뒤에 종사를 결정한 경우도 있었고 혹 백 년이 되기 전에 종사를 결정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비록 두 신하를 알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그 종사의 합당함은 의심할 바가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8월 11일 무자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상이 특진관(特進官) 정온(鄭蘊)에게 이르기를,
"경은 충직한 사람이다. 무릇 빠지거나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직언하고 피하지 않아서 보탬이 되는 것이 많았다. 경이 비록 병이 있으나, 나를 멀리하거나 버리지 말고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영남(嶺南)은 예로부터 어진 인재가 많은데,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은 이미 다 병으로 죽었다. 장현광(張顯光)은 와서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는가? 내 마음에 잊지를 못하겠다. "
하니, 정온이 아뢰기를,
"현광은 나이가 이미 80이니, 어떻게 멀리 올 수 있겠습니까. "
하고, 또 아뢰기를,
"일찍이 들으니 국가에서 바야흐로 민역(民役)을 감해 준다고 하는데, 모르겠거니와 풍재로 인하여 다시 세금을 줄여 주는 일이 있습니까? "
하니, 상이 있다고 하였다. 지경연 최명길이 아뢰기를,
"영남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곡식은 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하니, 정온이 노하여 명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해서 이런 말을 하는가? 백성이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곡식인데, 손상되어 남은 것이 없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농사가 어찌 흉년이 들지 않겠는가? "
하였다. 명길이 말하기를,
"지난번의 바람을 변괴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재앙이라 한다면 불가하다. "
하니, 정온이 말하기를,
"모든 곡식이 다 손상되어 백성이 장차 기근을 겪게 되었는데, 이것이 재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다.
8월 13일 경인
홍명구(洪命耉)를 부제학으로, 김경여(金慶餘)를 이조 정랑으로, 김원립(金元立)을 헌납으로, 송희진(宋希進)을 지평으로, 윤계(尹棨)를 교리로, 홍명일(洪命一)을 부교리로 삼았다.
8월 14일 신묘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동지경연(同知經筵) 이성구(李聖求)가 나아가 아뢰기를,
"시종(侍從)으로 외직을 맡겼다가 곧바로 불러들이는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시종하던 신하가 외직으로 많이 나갔으나 한번 나가면 돌아오는 자가 적습니다. 해조가 주의할 때 매양 인재가 부족하다는 한탄을 하며, 또한 밖을 중시하고 안을 가볍게 여김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에 보임된 사람을 일찍이 소환하고자 하였지만, 양전(量田)이 끝나지 않은 곳이 있으니, 지금 만약 체직하여 바꾸면 백성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된다. "
하였다.
용만성(龍灣城)을 개축하였다.
8월 15일 임진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 등을 제주(濟州)에서 울진(蔚珍)으로 이배(移配)하였다. 상이 경유하는 제도의 감사에게 효유하기를,
"각 고을에서 만약 구호하지 않으면 반드시 중도에서 낭패를 볼 걱정이 있으니, 길 등과 일가 사람들에게 모두 말을 내려 주어 호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 본 고을이 잔폐(殘弊)하여 그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양양(襄陽)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8월 16일 계사
장씨(張氏)를 숙의(淑儀)로 삼았는데, 장류(張留)의 딸이다.
8월 17일 갑오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에게 명하여 명년 봄까지 계속 재임하도록 하였고, 삼남(三南)의 수령으로 임기가 찬 자도 모두 달을 한정하여 그대로 재임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양전하는 일이 겨우 끝나 일이 완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월 20일 정유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장차 철산(鐵山) 등지에서 사냥을 한다는 소문을 내고는 병사를 이끌고 왔다. 대개 세괴가 오랫동안 해도에 머물렀으나 이렇다 할 공로가 없었다. 그런데도 중국에서는 군량을 끊이지 않고 보내므로, 아무런 공도 없이 앉아서 후한 봉록만 받는 것이 부끄러워 군대를 이끌고 섬을 나와, 중국을 기만하고자 한 것이다.
8월 22일 기해
경기 감사 정백창(鄭百昌)이 죽었다. 백창은 경박한 자질로 왕비의 권세를 업은데다 성품이 또 술을 좋아하여 거리낌없이 사대부들을 무시하고 욕하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숙하고 시에는 더욱 뛰어났으며, 오랫동안 청요직(淸要職)에 있으면서도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비난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거자(擧子) 윤응빙(尹應聘)이 다른 사람이 시험본 것을 가져다 부당하게 1등을 차지하였다. 대간이 중죄를 줄 것을 청하니, 응빙에게 전가 사변(全家徙邊)을 명하였다.
8월 23일 경자
이때 헌부가 동당시(東堂試)와 감시(監試)의 파방(罷榜)을 요청하고, 간원도 또 아뢰기를,
"감시의 생원시(生員試)는 의례적으로 의(疑)와 의(義)로 시험을 보여 뽑습니다. 그런데 의(義)는 오경의(五經義)를 모두 출제하는 구법(舊法)이 있었으나, 몇 해 전 대제학 최명길의 차자로 인해 오경의 가운데 단지 일경의만 출제하기를, 진사시(進士試)에 부(賦)와 시(詩)만 출제하는 것처럼 하여 반만을 참작해 시취(試取)할 것을 항식(恒式)으로 결정하여 중외에 반포하고, 계유년046) 식년시부터 이미 그 규정에 따라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감시에 경중(京中)에서는 오경의를 모두 시험보이고 향시(鄕試)에서는 일경의만을 시험보여 더없이 중한 국가의 시험을 서울과 지방이 다르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이처럼 혼란하고도 파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조가 분명하게 알리지 못하여 규식에 어긋나게 하였으니, 그 불찰이 심합니다. 예조의 당상과 낭청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단지 낭관만을 추고하도록 하였다.
집의 조경(趙絅), 장령 이시직(李時稷)·이경(李坰), 지평 송희진(宋希進)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의 임금이 재이(災異)를 만났을 때 소복을 착용하고 검정색 수레를 사용하며 음악을 중지하고 정전(正殿)을 피해 교외로 나가는 것은 실로 어느 시기까지 한다는 제한이 있지만,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마음이야 어찌 시간의 제한이 있겠습니까. 공구 수성하는 마음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면 어느 겨를에 이목(耳目)과 심지(心志)에 즐거운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관등(觀燈)날 저녁에 후원에다 오색 비단으로 만든 등불 수백 개를 줄지어 걸어 놓고 즐기셨다고 하니,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이 사실입니까? 궁궐 내의 일은 은밀하여 사대부가 보아 알 수는 없으나, 외간(外間)에 이미 그 소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자하여 거의 헛소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건을 완호(玩好)하면 뜻을 상실한다.[玩物喪志] ’는 것은 소공(召公)의 교훈입니다. 천지(天地)의 기운이 화평하여 아름다운 징조가 모두 이르는 시대에도 음란하고 교묘한 일을 만들어 군주의 마음을 흔들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지금처럼 하늘의 노여움을 당하고 있는 때이겠습니까. 예전의 임금은 재이를 당했을 때 혹은 궁녀를 내보내어 수성(修省)의 방법을 삼기도 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재앙이 내린 때에 숙의(淑儀)를 선발하셨으니, 이는 한(漢)·당(唐) 때의 중등 정도의 임금과도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후사가 없어 서두르는 임금이라도 필시 가례(嘉禮)와 경척(警惕)을 동시에 시행하기를 꺼릴 것인데, 하물며 전하는 이러한 일이 없는데이겠습니까.
노(魯)나라 임금이 새로 남문(南門)을 만들었는데, 공자가 그것을 《춘추(春秋)》에 기록하였고, 전(傳)을 지은 자는 ‘어려운 때에 사치스러운 일을 했다.’ 하였습니다. 남문은 국문(國門)이고, 어려운 때는 천재(天災)와는 차이가 있는데도 오히려 기롱하였습니다. 지금 대군(大君)의 집을 짓는 역사로 장인(匠人)들의 연장 놀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치 천재와 더불어 서로 경쟁하는 듯합니다. 만약 국사(國史)에 이것을 써서 후인들이 기롱한다면, 어찌 새로 남문을 만든 것에 대한 기롱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예전에 송(宋)나라 신하인 구양수(歐陽修)가 수재(水災)로 인해 인종(仁宗)에게 상소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는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서, 재변을 부를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재변이 저절로 이른 적은 없으며 또한 이미 재변이 나타났는데 징험이 없는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재변이 큰 것일 경우는 그에 대한 근심 또한 깊기 때문에 자잘한 대응책으로는 이 큰 재변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재이 역시 반드시 그것을 부를만한 인사(人事)의 잘못이 있을 것이고 또 그 재변도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내쫓았던 두세 명의 신하들을 방환(放還)하고 민세(民稅)를 조금 감해 준 것을 가지고 이 큰 재이를 막을 수 있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심(聖心)에, ‘천재가 오는 것은 모두 하늘의 정해진 운수에 의한 것이므로 인력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성상의 밝으심으로 어찌 몸을 바르라 하고 일을 바르게 하는 도리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오락과 사치만 일삼으십니까.
아, 재이가 내리기 전에 전하께서는 덕을 경건히 닦음에 힘써서 황천(皇天)에 마주 대하시지는 못하고 오직 고식(姑息)과 구차함으로 나라를 다스렸기에, 재상들이 한 명의 어진 선비도 진출시키지 못했는데도 전하께서는 문책하지 않고, 선조(選曹)047) 에서 인재를 선별하지 못해도 전하께서는 살피지 않으며, 대간(臺諫)이 관리들의 잘못을 규핵하지 못해도 전하께서는 알지 못하며, 훈구(勳舊)들이 전택(田宅)을 넓히기를 힘써도 전하께서는 막지 않으며, 무부(武夫)들이 오로지 백성을 침학하는 것만을 일삼아도 전하께서는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에 기강이 이 때문에 떨치지 못하고 조정이 이 때문에 떨치지 못하고 조정이 이 때문에 높임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천 갈래 만 갈래 길은 사욕(私慾)으로 가득차서 어염(魚鹽)의 이익은 모두 사실(私室)로 돌아가고, 호강(豪强)과 세력 있는 자들의 해독이 나날이 내외를 병들게 하여 백성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과 국가가 양편으로 나뉘었다는 말까지 있어서, 백성에게 세금을 혹독하게 받는 자는 능력 있는 관리라 하고, 백성을 지극히 아끼는 자는 명예를 추구한다고 하여, 사방 팔로로 하여금 다시는 터럭만큼이라도 국가를 사랑하고 추대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보심은 우리 백성들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하늘의 들으심은 우리 백성들의 귀를 통해서 들으시는 것이니, 아마도 오늘의 인사(人事)가 과연 재앙을 부르지 않았나 합니다.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재이가 내린 뒤로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서관(庶官) 백집사(百執事)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지난날의 소행을 후회하고 있습니까? 전하께서 공구 수성을 못하시면 아랫사람을 책망하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전하께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성과 측은함에서 나온다면, 대신들 중 그 누가 감히 그 뜻을 받들려고 하지 않겠으며, 모든 집사(執事)들도 누가 감히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자기 직분을 다하지 못할까 생각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열복하면 하늘의 뜻 역시 돌이킬 수 있으니, 《역전(易傳)》에 이른바 ‘그 상(象)은 있더라도 그 감응은 없다.’고 한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서 진술한 일들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내 감히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경계하지 않겠는가. "
하였다.
8월 24일 신축
감시(監試)의 시관(試官) 심지원(沈之源)·이해창(李海昌)·김익희(金益熙)·윤전(尹烇)·조석윤(趙錫胤)·유황(兪榥)과 동당(東堂)의 시관 허계(許啓)·김휼(金霱)·서정연(徐挺然)·성여관(成汝寬)·황감(黃㦿)·민광훈(閔光勳)·윤세임(尹世任)·임선백(任善伯) 등을 파직하였다. 헌부가, 과거법(科擧法)은 지극히 엄격한 것으로 거자(擧子)들이 시험장을 나가는 데에는 다 정해진 격식이 있는데, 이번 감시와 동당에서 재차 과장을 설치할 때에 거자들을 내보내는데 더러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하여 크게 과거법을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모두 파직할 것을 청하니, 따른 것이다. 이는 조경(趙絅)의 논계였다. 그 뒤 조경과 장령 이시직(李時稷)·이경(李坰), 지평 송희진(宋希進)이 아뢰기를,
"감시 이소(二所)와 동당 두 곳은 과연 새벽닭이 울 때 과거장에서 내보냈으나, 감시 일소(一所)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 등이 이것을 구별하여 논박하지 못하였으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조경 등이 일을 논핵한 것이 사실과 다르니 체차하소서."
하였다. 일소의 고관(考官) 심지원·이해창·김익희·윤세임은 이 때문에 파직을 당하지 않았다.
8월 25일 임인
양사에서 파방의 일로 잇따라 아뢰기를,
"시관들이 이미 죄에 걸려 파직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시관을 파직하면서 그 방(榜)을 그대로 둘 수가 있겠습니까. "
하니, 답하기를,
"막중한 과거를 가볍게 파방할 수가 없다. 지난날의 사목에 의하여 일이 시관에게 있을 경우에는 시관을 문책하고, 일이 거자들에게 있을 경우에는 거자들을 삭탈하라."
하였다.
상이 형조의 죄수 명단을 보고 하교하기를,
"순빈(順嬪) 집에 자리[席子]를 바치는 것을 독촉하는 것이 사인(舍人)의 책임인가."
하였다. 이때 순빈의 손녀 사위인 이경증(李景曾)이 사인으로 있으면서, 순빈의 청으로 공조의 아전을 가두었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다음날 경증을 형조 정랑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김반(金槃)을 대사간으로, 강대수(姜大遂)를 사간으로, 정온(鄭蘊)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8월 26일 계묘
형조 판서 구굉(具宏)을 경기·경상·전라·공청도 주사(舟師) 담당 당상으로 삼았다. 풍변(風變)이 있은 뒤 삼남(三南)의 전선(戰船)들이 거의 전부 파괴되었고, 왜적의 정세 역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서 조야가 흉흉하였다. 구굉이 일찍이 통영(統營)을 관할한 일이 있어 남쪽의 일을 두루 잘 알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사도(四道)의 수군을 관장하게 한 것이다.
8월 27일 갑진
상이 28일에 문묘(文廟)에 배알하려 하였는데, 영의정 윤방,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 영돈녕 김상용(金尙容)이 모두 병이 들어 알성(謁聖)한 뒤 과거를 볼 때 명관(命官)을 담당할 사람이 없으므로 뒤로 물려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8월 28일 을사
강원도에 서리가 내렸다.
유성이 고기성(古旗星) 아래에서 나와 구국성(狗國星) 위로 들어갔다.
8월 29일 병오
민응형(閔應亨)을 사간으로, 박수홍(朴守弘)·임효달(任孝達)을 장령으로, 홍주일(洪柱一)·김집(金集)을 지평으로, 임광(任絖)을 집의로, 윤이지(尹履之)를 경기 감사로, 윤집(尹集)을 수찬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정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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