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31.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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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무신

판중추(判中樞) 정광적(鄭光績)이 소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니, 답하였다.
"경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의리상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이다. 비록 병이 있더라도 힘써 들어와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9월 3일 경술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미두(米豆) 3만 석을 무역하기를 요청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도중(島中)에서 쌀을 무역하자고 요청한 것은 해마다 있는 일이므로 지금 일체 허락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곡식을 실은 배가 잇달아 와서 도중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는 넉넉하니, 올해에는 단지 2, 3천 석만을 허락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4일 신해

상이 태학(太學)에 가서 공자를 배알하였다. 선비를 시험하여 문과(文科)에서 이만영(李晩榮) 등 8인, 무과(武科)에서 장응룡(張應龍) 등 4인을 선발하였다. 문과의 시권(試券)이 들어온 뒤에 상이 대신에게 묻기를,
"지금 선발한 사람이 너무 많은 듯하니, 한두 사람을 줄이는 데 대해 의논하라. "
하였는데,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먼 곳의 선비들까지 모두 모여 글을 완성한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선조(先朝) 경진년048)  에는 12인을 선발했고, 정축년049)  에는 16인을 선발하였으니, 선조에서 선발한 인원 역시 이처럼 많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과는 4인인데 문과는 8인이나 되어 문무과의 선발한 수가 배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두 사람은 줄이고자 한 것이다. 대신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줄일 필요는 없겠다."
하였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방방(放榜)하지 못했다.

 

대사헌 김상헌이 아뢰기를,
"지난 선조(先朝) 때 과거를 시행한 뒤에는 매번 파방(罷榜)의 의논이 있었고, 선비들의 습속이 나날이 잘못되어 폐단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에 부득이 예조의 건의로 중국의 예에 의해 ‘과거장에 비록 변고가 있더라도, 시관 가운데 파직해야 할 자가 있으면 파직하고, 거자 가운데 삭탈해야 할 자가 있으면 삭탈하되, 영구히 파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식으로 삼아 결단코 계속해서 격식을 고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 과거장의 변고가 비록 적지 않지만 모두 시관과 거자들의 잘못에 지나지 않으니, 마땅히 파직할 자는 파직하고 삭탈할 자는 삭탈할 따름입니다. 어찌 파방까지 하여 선왕께서 이미 정하신 명을 폐하고 훗날의 무궁한 폐단을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마침 사사로운 우환을 만나 동료들과 함께 얼굴을 맞대고 가부를 논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들으니, 먼 곳에서 온 거자들이 오래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행자(行資)가 이미 다 떨어졌다 합니다. 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비로소 의논을 타협한다면 선비들의 곤궁함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는 모두 신에게 유고가 있어서 빨리 선처하지 못한 데서 나온 잘못입니다. 빨리 신의 직을 갈아서, 관직에 연연하여 일을 그르친 잘못을 징계하소서. "
하니, 집의 임광, 장령 박수홍, 헌납 김원립(金元立)이 모두 의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교리 윤계(尹棨)가 아뢰기를,
"상헌은 사사로운 우환을 만나 집에 있다가 동료들과 의논하는 자리에 즉시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형세상 진실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니 무슨 관직을 탐내 연연한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임광 등은 국가 시험의 사체를 중히 하고자 하여, 그 격식에 어긋나고 간사한 짓을 한 흔적을 들어서 파방하기를 청한 것이므로 역시 잘못이 아닙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다. 광·수홍·원립 등은 자기의 견해를 지키자니 거듭 상헌의 의견과 어긋나게 되고, 그 처음 의견을 바꾸자니 또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배척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곧 다른 혐의를 끌어다 인피했는데, 모두 체직되었다.

 

9월 8일 을묘

완풍 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와 호조 판서 최명길을 파직하였다. 서와 명길은 일찍이 형조의 임무를 맡았을 때, 그 주인의 죄를 증명하기 위해 그 종을 가두어 증인으로 삼은 일이 있었으므로, 상이 하교하기를,
"자식을 아비에 대한, 종을 주인에 대한, 아내를 남편에 대한, 아우를 형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지 말라. "
하였었다. 이때 형조에서 아내를 가두어 남편의 죄를 증명하게 한 일이 있었다. 상이, 이 두 사람이 하교를 받고도 봉행하지 않아 뒷사람들의 폐단을 불러 일으켰으니 이미 체직되어 떠났으나 벌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을 파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두 사람이 다 중임(重任)을 맡고 있는데 그것을 대신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하여 끝내 파직하지 않았다. 이어 전교하기를,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명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고소하고 종이 주인을 고소하면, 풍속을 그르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무릇 아비에 대해 자식에게 주인에 대해 종에게 남편에 대해 아내에게 형에 대해 동생에게는 설사 물을 일이 있더라도 증인으로 삼거나 대질하지 말라. 이 일을 팔도에 하유하여 풍속을 돈독히 하고 교화를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9월 9일 병진

홍명구를 대사간으로, 조경을 집의로, 정기광을 좌부승지로, 안몽윤(安夢尹)을 전라좌도 수사로, 임광을 교리로, 윤집을 헌납으로, 김익희를 수찬으로 삼았다.

 

9월 11일 무오

집의 조경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들으니, 선조(宣祖) 때 양남(兩南)의 향시(鄕試)가 해마다 파방되자, 재상 이헌국(李憲國)이 의논드리기를 ‘지금부터는 비록 팔도가 파방되더라도 경사(京師)에 별다른 잘못이 없으면 파방하지 마소서. ’ 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파직하고 죄가 거자에게 있으면 거자를 삭탈하라.’는 것이 당시의 전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왕(先王)께서 이 명령을 만드신 본의는 오로지 외방의 고질적인 병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니, 만약 그 때에 서울 과거장의 불법이 오늘날과 같았다면, 선왕께서 바로잡는 방도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관(長官) 김상헌이 한 나라의 공론(公論)을 돌아보지 않고 이미 임명된 동료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은 채 멋대로 파방의 의논을 중지했으니, 이는 모두가 신이 무시당하여 그런 것입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
하였다. 조경이 전에 사간이 되었을 때 파방하자는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다가, 다른 일로 체직을 당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지난번의 의논을 펴서 상헌을 극력 비방하였다. 상헌이 이에 인피하기를,
"신의 본 뜻은 요즈음 대간이 일시의 구구한 사견(私見)으로 선왕이 이미 정한 명령을 폐하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국체(國體)가 무엇이 되겠는가 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거듭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고 물러나 여론을 기다렸으나, 옥당에서도 신의 말을 그르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사하던 날 바로 그 논계를 중지했던 것입니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졸렬하지만 어떻게 나이 어리고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에게 결정을 받아서 국론을 판단하겠습니까. 조경은 애초부터 반드시 파방시키고자 여러 가지로 사실이 아닌 말을 인용하여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고 여러 관원을 그릇 파직시킨 것이 드러나 체직을 당하였으니 조금은 자제를 해야 마땅한데 방자하게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거리낌 없는 중에서도 너무나 심한 자입니다. 또 선왕께서 일체 파방을 허락하지 말라는 전교가 분명히 법전에 실려 있는데, 조경이 나이 어린 후생으로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에 감히 선왕의 본의가 오로지 외방의 고질적 폐단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너무나 불순하지 않습니까. 신이 이미 무거운 탄핵을 받았으니, 파척하라 명하소서."
하고, 대사간 홍명구 역시 파방의 의논을 정지하자는 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부제학 정온이 처치하기를,
"파방을 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떤 사람은 옳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르다고 하여 결정된 바가 없습니다. 파방의 의논을 정지할 때에 서로 가부에 대한 의견을 교환해야 하는데, 동료들이 이미 임명되어 출사하기도 전에 갑자기 혼자 중지하였으니, 이는 자못 동료를 공경하고 논사(論事)를 중시하는 체통이 아니며, 이미 중지한 것을 다시 제기하여 거둥을 할 때 번거롭게 소요를 일으킨 것도 옳지 않습니다. 조경 등을 모두 체차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조경은 체직해도 좋으나, 김상헌 등이 정계(停啓)한 것은 법도를 지키고자 한 것에서 나온 일이니, 체직할 만한 잘못이 없다."
하였다. 이때 상이 다음날 목릉(穆陵)을 참배할 계획이었는데, 대간이 모두 인피(引避)하였고 날도 이미 저물자, 정원이 속히 처치하기를 청하니, 정온이 유문(留門)하고 들어가 상헌 등을 체직하라는 차자를 올렸으나, 상의 분부가 이와 같았다. 상헌 등이 거둥 때 배종(陪從)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사직하지 못하였다가, 뒤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9월 12일 기미

상이 목릉에 참배하였다. 세자(世子)가 아헌관(亞獻官)을 담당하고 김신국(金藎國)이 종헌관(終獻官)이 되어 격식대로 하였다. 능 밖에 있는 막차(幕次)에 나왔을 때, 대사헌 김상헌이 갑자기 병이 나니, 상이 어의(御醫) 최득룡(崔得龍)을 머물려 두어 구완하게 하였다. 중도에 두 번이나 돌아보고 물었으며,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또 묻기를,
"상헌의 겨레붙이가 행차 가운데 있는가? "
하니,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대답하기를,
"사관(史官) 남노성(南老星)이 그의 외종손입니다. "
하니, 상이 노성에게 명하여 역말을 타고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9월 14일 신유

윤지를 대사간으로, 임광을 집의로, 임효달·송국택(宋國澤)을 장령으로, 김령(金坽)을 사간으로 삼았다. 김령은 인품이 조용하고 지조가 있었다. 전후 징소할 때마다 모두 병들었다고 사양하고 나오지 않으니,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과거는 한결같이 선조조경인년050)  의 예에 따라 네 가지 큰 경사를 합쳐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시행하되, 식년시에 정해진 원래 인원 수 이외에 7인을 더 뽑도록 계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초시의 정원을 이미 80인이나 줄였으니, 마땅히 변통해서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증광시의 예에 따라 처음 정했던 40인 가운데 7인은 줄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정한 숫자는 줄일 필요가 없다."
하였다.

 

9월 15일 임술

주강(晝講)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지경연 최명길이 아뢰기를,
"돈을 사용하는 법은 널리 통용하지 않으면 시행되기 어렵습니다. 사사로운 주전을 금하는 것이 비록 고법(古法)이긴 하나, 만약 사사로운 주조를 막으면 돈은 통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사사롭게 주조하면 경중(輕重)이 차이가 나고 후박(厚薄)에 제한이 없어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폐단이 심하면 반드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사사롭게 주조하게 하여 그 쓰임이 널리 퍼진 뒤에 금해도 가할 듯합니다. 나라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을 백성들은 본래 바라지 않는데, 금지하는 법만을 먼저 만든다면 어찌 시행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6일 계해

조경을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삼았다. 조경이 파방의 일로 김상헌을 비평하고 꾸짖었는데, 상이 일 만들기를 좋아하고 당파를 비호한다고 여겨 특별히 외직에 임명한 것이다. 부제학 정온이 상소하기를,
"조경은 성품이 본래 강직하니 시종(侍從)에 두는 것이 적합합니다.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외직을 맡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유경집(柳景緝)을 헌납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교리로, 윤집(尹集)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18일 을축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이 나아가 아뢰기를,
"황주성(黃州城)은 물이 없고 또 성안을 엿볼 수 있는 산봉우리가 많아 지킬 수 없으나, 정방성(正方城)은 물맛이 좋고 풍토병이 없으며 삼면이 막혀 견고하니 실로 지킬 만한 땅입니다. 만약 정방으로 병영을 옮기도록 명하실 경우, 정방성은 곧 봉산(鳳山) 땅이니 군을 부(府)로 승격시켜 병사(兵使)로 하여금 부사(府使)를 겸임하여 진압하게 하고, 황주에는 단지 판관만을 두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도를 진정시키고 방어하는 곳은 오로지 한 성만 믿을 수는 없다. 그러니 감사로 하여금 또 다른 성을 지키어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감사가 진압할 곳도 의논해서 정해야겠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갑자기 정하기는 어렵다. 물러가서 의논하여 정하라. "
하였다. 뒤에 비국이 재령(載寧) 장수 산성(長壽山城)이 지키기에 적절하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9일 병인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는데, 강이 끝난 뒤에 승지 목서흠(睦敍欽)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조강(朝講)을 시행하도록 명을 내렸으나, 삼공이 유고(有故)하여 곧 중지한 적이 여러 차례입니다. 신이 옛일을 살펴보니, 선왕조의 경우 영사(領事)가 유고가 있으면 정부(政府)의 동서벽(東西壁)이 대신 들어왔고, 명종조(明宗朝)에는 더러 지사(知事)가 대신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재상이 유고가 있으면 옛일에 따라 시행하소서. "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 하고, 이어 이르기를,
"그때 대신들도 무슨 연고가 있어 이렇게 했는가? "
하니, 서흠이 아뢰기를,
"아마도 필시 병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
하고, 또 아뢰기를,
"명초(命招)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한데, 옥당이나 시강원에서 입직하는 일이나 혹 전원이 모이는 일 때문에 패초(牌招)하기를 계청하는 것은, 매우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중대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패초하지 않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대한 일이 아니면, 정원에서 애초에 받아들이지 말라. "
하였다.

 

9월 20일 정묘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백선남(白善男)이 스스로 군기(軍器)와 군량을 갖추어 비국에 첩보하였다. 비국이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회록(會錄)할 것을 청하니, 상이 특별히 가자(加資)하라고 하였다. 이에 간원이 아뢰기를,
"별도로 마련한 물량에 대해 상을 주는 것은 혼조(昏朝)의 폐정(弊政)이므로 오늘날 답습하여 시행할 수 없으니,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
하니, 상이 이에 따르고, 말 한 필을 내려 상으로 주게 하였다.

 

9월 21일 무진

좌부승지 신득연(申得淵)이 청사 안에서 벌주를 마시는 연희를 베풀고 환관 서후행(徐後行)을 맞아다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자리를 파한 뒤에 후행이 술에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자 그를 부축하여 궁안으로 들어가니, 보는 자들이 깜짝 놀랐다.

 

9월 24일 신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김상헌을 대사헌으로, 윤집을 이조 좌랑으로, 정광성을 도승지로, 윤강을 수찬으로, 김응조를 지평으로, 심액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9월 26일 계유

비국이 아뢰기를,
"지난번 탑전에서 공청도의 전선(戰船)을 추가로 배정하라는 하교를 받들고, 신 등이 서로 의논하여 마련하였습니다. 태안(泰安) 등 5개 고을은 각기 한 척씩 만들도록 하고, 그 나머지 보령(保寧)·결성(結城)과 같은 작은 고을은 두 고을이 합쳐 한 척을 만들게 하며, 남포(藍浦)는 비록 작지만 그 땅에서 배 만드는 재목이 나기 때문에 단독으로 한 척을 만들도록 하며, 서산(瑞山)은 본래 정해진 전선(戰船) 이외에 방패선(防牌船) 한 척을 더 만들도록 하며, 비인(庇仁)·당진(唐津)·해미(海美)는 각각 방패선 한 척씩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또 전라도 용안(龍安)·함열(咸悅)·임피(臨陂)·옥구(沃溝)는 한산(韓山)·서천(舒川) 등은 고을과 겨우 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왜란 이후에 모두 전선이 있었으나 중간에 혁파하였기 때문에, 이 네 고을에 다시 두 척을 두고, 나주(羅州)는 물력이 풍부한 곳인데도 단지 배 한 척만 있기에 다시 한 척을 더 배정하였습니다. "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양호(兩湖)에 새로 더 배정한 전선은 경상도의 예에 의해 매척마다 속오(束伍) 80인을 주어, 평상시에는 순서대로 교체하면서 배를 지키게 하고 유사시에는 이들을 격군(格軍)으로 쓰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
하니, 답하기를,
"양호 지방의 형세는 영남과 다르고 육군을 감축하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
하였다.

 

공청도의 유생 민여기(閔汝耆) 등이 또 상소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 종사를 청하니, 답하였다.
"소 가운데 진술한 일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도록 하라. "

 

9월 27일 갑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김자점이 아뢰기를,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주사(舟師)를 많이 갖고 있으니, 어찌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사포(宣沙浦)와 노강(老江)의 두 진(鎭)을 난리 때문에 혁파하였는데, 이제 이곳에 다시 진을 두어 전라도와 상호 견제하도록 하여 해적을 방어할 토대를 삼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통(變通)에 관계된 일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
하니, 상이 비국에다 말하라고 답하였다.

 

증광 별시에서 생원과 진사를 각각 1백 인씩 선발하였다. 생원시의 장원은 김익겸(金益謙)으로 김반(金槃)의 아들이며, 진사시의 장원은 홍중보(洪重普)로 홍명구(洪命耉)의 아들이다.

 

9월 28일 을해

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가 오래 조강(朝講)을 폐하여 빈사(賓師)를 접견하는 날이 드물어서 여론이 매우 미안하게 여깁니다. 빈객 4명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조강을 하라는 명을 내리신 뒤에도 그들의 유고(有故)로 인하여 중간에 그만둔 적이 여러 번입니다. 오늘 또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응당 시강에 참여해야 할 빈객을 추고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평안도 정주(定州)·구성(龜城)·용강(龍岡) 세 고을을 문관으로 교체해서 임명할 것을 계청하고,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도 육진(六鎭)의 수령을 문관과 무관으로 번갈아 임명하기를 청하니, 모두 따랐다.

 

9월 29일 병자

예관(禮官)을 보내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숭은전(崇恩殿)을 봉심하게 하였는데, 봄가을로 봉심하는 것은 구례(舊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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