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31. 12:47
반응형

10월 1일 무인

조강에 《시전》 정풍(鄭風)의 유녀동거(有女同車)·산유부소(山有扶蘇)·탁혜(蘀兮)·교동(狡童)·건상(褰裳)·봉(丰) 등의 장을 강하였다. 참찬관 정온이 아뢰기를,
"이 시는 민간의 남녀들이 서로 희롱하는 글로 그 문의(文義)는 진강(進講)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의 시를 보는 법은, 혹 먼 곳에 나아가 가까운 것을 보기도 하고 혹 유(類)를 비교해서 반대로 보기도 하였으며, 또 옛말에 ‘어진 이를 여색처럼 좋아한다. ’ 하였습니다. 그러니 인군이 이 시의 여색을 좋아하는 뜻을 어진 이를 여색처럼 좋아하는 것으로 본다면 좋을 것이고, 산유부소의 ‘미남자(美男子)는 보지 못하고 이 미친 녀석을 만났네. ’라는 말을 현인은 만나지 못하고 미친 사람을 만났다는 것으로 돌려서 보면, 역시 좋을 것입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의 이외에 절실한 말로 경계하니, 모두가 좋은 말이다. "
하고, 또 이르기를,
"요·순 시대에도 역시 음탕한 여인이 있었는가? "
하니, 정온이 아뢰기를,
"요·순 시절에는 ‘집집마다 모두 봉후(封侯)를 할 만하다. ’ 하였으니, 반드시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풀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눕는다. ’ 했으니, 이 모두가 인군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
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영경연(領經筵) 윤방(尹昉)이 추천하는 법을 거듭 밝히되 추천된 사람이 적절하지 않을 경우에는 천거한 사람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 법을 시행하고자 한 지 오래되었다. 선조(先朝)에서도 그릇 추천한 자를 죄주었다고 들었다. "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진실로 인재를 얻어 조정에 가득 늘어 놓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이 젊고 재능이 있는 자 가운데 누가 걸출한 자인가? "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신이 나이 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드물어 그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합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며 능히 그 직분을 다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인재의 등용을 급선무로 하는 것인데, 이것이 삼공의 직분이다. "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내직(內職)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만 민성휘(閔聖徽)와 같은 무리는 역시 나랏 일에 마음을 다하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하였다.

 

10월 2일 기묘

헌부가 아뢰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두 가지 예절이 있을 수 없고 대소가 똑같이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황태자(皇太子)와 같은 존귀함으로도 황제가 다니는 길을 가로지를 수 없는 것이니, 옛날의 예법이 엄격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궐문 밖에 홍마목(紅馬木)을 설치한 것은 대궐 안으로 난입하는 것을 막고 방한(防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인데, 요즈음 존귀한 관원들은 혹 수레나 말을 타고 곧바로 대궐 아래에까지 오니, 실로 고례(古禮)가 아닙니다. 병조로 하여금 엄격히 금지하게 하고, 어기는 자들은 법에 의해서 논죄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이른바 존귀한 관리들이 이와 같으니, 대군(大君)은 홍마목 안에서 말을 내려도 안 될 것이 없을 것 같다. "
하였다. 영의정 윤방과 좌의정 오윤겸이 이 때문에 차자를 올려 대죄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하유하였다. 그 뒤에 헌부에서 여러 번 아뢰기를,
"대군은 진실로 등급을 뛰어 넘는 존귀한 신분이지만, 조정의 제도에 있어서는 한계를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극히 친애하는 사이는 더욱더 작은 일에 삼가고 예로써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
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10월 3일 경진

구봉서(具鳳瑞)를 우부승지로, 민응회(閔應恢)를 동부승지로, 성이성(成以性)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4일 신사

김상헌을 홍문 제학으로, 최연을 우부승지로, 윤계를 부응교로, 성이성을 부교리로, 박수홍을 정언으로, 이시직을 장령으로, 정뇌경을 교리로 삼았다.

 

10월 5일 임오

화성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의 제5성의 안으로 들어갔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참찬관 심액이 아뢰기를,
"경기의 바닷가 고을들이 지난해에는 해일(海溢)이 있었고 금년에는 또 풍재(風災)를 당해 해마다 수확을 망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내년 봄의 구황(救荒)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강화(江華)와 광주(廣州)에는 나라의 곡식이 많이 쌓여 있어 붉게 변질되어 썩기까지 하고 있으니, 빨리 백성들에게 빌려주어 구황의 밑천으로 삼으소서. "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10월 6일 계미

헌부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함경남도의 산 밖에 사는 호인(胡人)들이 때없이 출몰하였기 때문에 남병사(南兵使)로 하여금 갑산(甲山)에 머물면서 방어를 하게 하였고 갑산 부사 역시 무신을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산 밖을 방비하는 일이 지난날과 크게 다른데,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잔폐한 백성들이 무신들의 침탈하는 손에 곤욕을 치루어 원통함이 골수에 이르렀으니, 명망이 있는 문관을 파격적으로 골라 보내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7일 갑신

경상 우병사 유승서(柳承瑞)가, 구 관아에서 유순무(柳舜懋)가 사망하고 또 정충신(鄭忠信)이 병이 들어 면직되었다는 이유로 관사를 새로 지어서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감사 유백증(兪伯曾)이 아뢰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논죄하게 하였다. 비국이, 승서가 청렴 근신하다고 알려졌으나 감사에게 탄핵을 받았으니 파직해야 한다고 하니, 상이, 파직은 가볍다고 하여 관작을 삭탈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0월 8일 을유

창성(昌城)의 사인(士人) 정사룡(鄭士龍)에게 증직(贈職)하고 그의 다섯 아들 집도 복호(復戶)하였다. 사룡이 정묘 호란 때 적에게 붙잡혔는데, 적이 고을 백성들이 피란한 곳을 물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며 굴하지 않은 채 죽었다. 평안 감사 장신(張紳)이 그 사실을 아뢰니, 그에게 증직하고 복호하여 포상하라고 명한 것이다.

 

비국이 아뢰기를,
"남방의 우환이 서변(西邊)에 못지 않으므로 방비 대책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수군은 구관 당상(勾管堂上)이 있으므로 그들이 살피고 단속할 것입니다마는 이밖에 각처 산성은 편의에 따라 수축하고 군량이나 무기를 별도로 더 준비하여 불의의 환란에 대비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내용으로 하삼도(下三道)에 알리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암행 어사로, 조경(趙絅)을 전라도에, 강대수(姜大遂)를 공청도에, 윤계(尹棨)를 경상도에, 조수익(趙壽益)을 평안도에 나누어 보냈다.

 

10월 9일 병술

공청 병사(公淸兵使) 송영망(宋英望)이 안면곶(安眠串)의 경작을 금하는 법을 어긴 사람들을 적발하여, 그 이름을 써서 비국에 보내었다. 비국이 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명하기를 청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소나무를 기르는 곳에 대한 금령(禁令)이 매우 엄격한데, 이처럼 멋대로 경작을 하였으니 법대로 처리함이 마땅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국가의 기강이 엄격하지 못하여 주군(州郡)에서 소홀히 보아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금(犯禁)에 빠지게 한 자가 무려 35인이나 됩니다. 이제 만약 일시에 경옥(京獄)으로 그들을 잡아올 경우 도로의 고을에 폐단을 끼치고 보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만이 아니라 바닷가 고을의 마을도 반드시 놀라고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별도로 추관(推官)을 정해 엄격히 심문을 하여 사실을 밝힌 뒤에 등급을 나누어 처벌하는 것만 못합니다. "
하니, 상이 비국에 의논하도록 하였다. 비국이 정원의 말이 옳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시전》의 동문(東門)·야유만초(野有蔓草)·진유(溱洧) 장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들으니 중국의 유명한 사대부들은 감히 창녀(娼女)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그들과 어울려 묵은 자는 조정에서 내치고 등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그런가? "
하니, 참찬관 정온과 최연이 아뢰기를,
"요즈음의 사대부 가운데 창녀의 집에 다니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정온이 자기 고향 사람 임진부(林眞怤)가 문을 닫고 독서를 하여 나이가 거의 50인데, 만약 대군의 사부로 임명하면 그 직책을 잘할 것이라고 천거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자리가 비는 대로 제수하게 하라. "
하였다. 정온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도승지로 있었을 때는 매양 상께서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여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전만 못하므로 신은 민망스러워 한탄하고 있습니다. 또 소대(召對)는 여러 신하에게 널리 물을 수 있는 조강이나 주강만 못합니다. "
하니, 상이 마땅히 유념하겠다고 하였다.

 

김중일(金重鎰)을 정언으로, 민응형(閔應亨)을 교리로, 이석달(李碩達)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석달은 원수(元帥) 김자점(金自點)의 인척이다. 자점이 장차 정방 산성(正方山城)을 군영으로 삼아 석달과 함께 일을 하고자 하여 힘써 추천하였으므로 임명한 것이다.

 

10월 10일 정해

강원 감사 이민구(李敏求)가 치계하기를,
"재해를 살펴서 급재(給災)하는 것은 백성을 구휼하는 중요한 정사이지만, 본도는 산길이 멀고 촌락이 궁벽하여 더러 2, 3일 일정이나 되는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실정을 살피러 왕래할 때 오래 되는 곳은 3, 4일이 걸립니다. 감영의 관원이나 이서(吏胥) 등에게 제공하는 주식(酒食)의 비용은 모두 재변을 당한 고을에서 나오므로 나중에 급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혜택은 많지 않고 곤궁한 백성들의 생계만 먼저 바닥이 나기 때문에, 모두 재변을 당한 사실을 알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
하니, 호조에 계하하였다. 호조가 회계하기를,
"강원도는 풍재가 혹심하지만 스스로 남은 곡식을 모아 관청에 세금을 낼 수 있으며, 뿌리를 캐고 열매를 주워 흉년에 대비할 수 있으니, 감사의 소청이 옳습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1일 무자

헌부가 아뢰기를,
"요즈음 새로 과거에 급제한 생원·진사들이 대동하는 배우들이 금선립(金線笠)·전채화(剪綵花)·단견리의(段絹裏衣)가 아니면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부유하고 세력 있는 집에서는 멋대로 참람히 하고, 가난한 선비는 힘을 다해 흉내를 내다 가산을 기울여 파산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거나 후회할 줄 모릅니다. 풍속이 이와 같은데도 앉아서 쳐다만 보며 막지 않는 것은 유사의 잘못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폐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자가 있으면 그 가장을 일일이 처벌하고, 또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사실을 밝히고 살피어 단속하되, 그 중에서 특히 심한 자는 예조에 알려 입계해 처리하도록 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중국의 차인(差人) 곡승은(曲承恩)이 삭주 부사(朔州府使) 김익룡(金翼龍)의 아들 김태영(金泰英)을 살해하였다. 상이 도독부(都督府)에 자문을 보내 승은을 죽여 목숨으로 갚을 것을 청하였으나, 도독이 듣지 않았다. 이로부터 승은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그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마치 도적의 칼날을 피하듯이 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였다.

 

10월 14일 신묘

상이 소대를 명하여 《시전》을 강하였다.

 

10월 15일 임진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였다.
"벽동(碧潼) 등의 진에 사는 백성 30여 인이 국경을 넘어 삼(蔘)을 캐다가 끝내는 모두 사로잡혔습니다. 대개 금법이 엄하지만 경외(京外)의 상사(上司)가 물화(物貨)를 보내 삼으로 바꾸어 바치게 하면서 여러 곳에서 추궁하므로 수령들이 부득이 민간에 나누어 주고 바꾸어 바치기를 독촉하기 때문에 그 형세상 부득이 법을 무릅쓰고 죽음도 잊은 채 삼을 캐다가 포로로 잡히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

 

10월 16일 계사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참찬관 정온(鄭蘊)이 아뢰기를,
"요즈음 대간이 대군(大君)의 하마(下馬) 문제를 아뢰었으나, 상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신은 불가하게 여깁니다. 한(漢)나라 때 황태자가 사마문(司馬門)에서 하마하지 않은 것을 군자(君子)가 그르게 여겼으니, 지금 대군이 홍마목(紅馬木) 안에서 하마하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 대군은 교자를 타고 돈화문(敦化門)에 들어와 내렸었는데, 나는 문에 들어와 말에서 내리는 것은 잘못이라 여겨 문밖에서 내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이것을 그르다 하니, 나는 그것이 옳은 줄 모르겠다. "
하자, 정온이 아뢰기를,
"대군의 대접을 대신보다 더해서는 안 됩니다. "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요즈음 설치한 관청이 매우 많아서 갖가지로 물건을 사고 팔아, 백성과 다투어 침탈하기에 한량이 없으니,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남북으로 외침의 걱정이 있는데 백성의 곤궁함이 이와 같으니, 신은 근심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판(貿販)의 폐단은 참으로 경의 말과 같다. 이미 중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아직도 있다고 하니,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
하였다.

 

충주(忠州)에서 체포한 도적 14인에 대해, 형조가 효시하여 백성들을 경계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대신이 참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8일 을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특진관 김자점이 아뢰기를,
"남이흥(南以興)의 노모가 시골에서 죽었으니, 조상(吊喪)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흥이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을 내가 잊을 수 없다. 이제 그 어미가 죽었다고 하니, 내 실로 측은한 생각이 든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부의를 내리도록 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석회(石灰)와 조묘군(造墓軍)을 주도록 하라. "
하였다.

 

전 전주 부윤(全州府尹) 정세구(鄭世矩)가 죽었다. 세구는 명민하고 재주가 있어 지방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 직책을 대부분 잘 수행했다.

 

어영청(御營廳)이 아뢰기를,
"본청이 모집하여 들인 군사가 5천 2백 50여 인이고, 또 체부(體府)의 아병(衙兵)이 9백 20여 인입니다. 이들은 으레 10월부터 명년 2월까지 1백 50일을 두 번(番)으로 나누어 선후로 교체하게 하였습니다. 6초군(六哨軍) 및 서기(書記) 총 6백 72인과 중군(中軍)에 소속된 군뢰(軍牢)·기수(旗手)·취고수(吹鼓手) 또한 1백여 인인데, 전체를 한 번으로 하면 7백 80인에 이릅니다. 이들이 번 차례를 만날 때마다 으레 본청에서 이름을 써서 보내 번들게 하는데, 이에는 원래 일정한 격식이 없고 또 지방에도 일정하게 정해진 숫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평상시 번들 때 전도되고 착오되어 고르지 못하니, 만약에 다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징발해 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신구(新舊)를 따질 것 없이 각 고을의 실수(實數)에 따라 궁수(弓手)나 포기(砲技)로 대오를 만들어 충당하고 기총(旗總)을 미리 결정해 두어 그들로 하여금 서로 소속하도록 하여 번들 때마다 제 시기에 오게 하면, 대오가 서로 친하게 되고 또 조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결재를 바랍니다. "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대신이 그럴 듯하게 여기니, 상이 따랐다.

 

10월 19일 병신

이행우(李行遇)를 헌납으로, 유경집(柳景緝)을 장령으로, 홍익한(洪翼漢)을 정언으로, 민영(閔栐)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10월 20일 정유

무고(誣告)한 죄인 박천건(朴天建)을 사형에 처하였다. 천건이 도둑으로 홍주 병사(洪州兵使) 송영망(宋英望)에게 잡혔는데, 그를 문초하니, 천건이 말하기를,
"나는 도둑이 아니라, 장차 고변(告變)할 일이 있습니다. 경천감(慶川監) 조인섭(趙麟躡)이 일찍이 그의 일족인 조정회(趙廷檜), 정회의 아들 조서익(趙瑞翼), 안산인(安山人) 조정한(趙廷翰), 종실 영안감(永安監), 영안감의 아들 이세민(李世敏), 인천인(仁川人) 김선명(金善鳴)과 함께 모여 나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운이 병자년에 다한다. 남양인(南陽人) 조량(趙亮)에게 물으니, 그 역시 병자년이 길하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
하였는데, 영망이 이를 아뢰니, 드디어 인섭 등을 나포해 오도록 명하였다. 인섭이 공초하기를,
"신의 나이 겨우 17세라 아는 바가 없으며, 이제 처음 천건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
하고, 선명과 세민은 말하기를,
"천건과는 약간 안면이 있습니다. 천건이 비록 매우 우매하고 패악하지만 어찌 몇 차례 상면한 자와 함께 흉모(兇謀)를 꾀하겠습니까. "
하였다. 세민이 또 말하기를,
"신의 아비는 영원감(永原監)이지 영안감(永安監)이 아닙니다. 올해에 죽었는데, 천건이 그 모의에 함께 참여했다고 하니, 여기서도 그것이 무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하고, 조량이 공초하기를,
"박천건이란 이름과 경천감(慶川監)이란 명호는 다 전에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또 신의 이름은 양(湸)이란 글자를 쓰는데, 천건은 양(亮)이란 글자로 썼으니, 그와 대질을 요청합니다. "
하였다. 천건이 공초하기를,
"홍주인(洪州人) 한공(韓恭) 부자가 일찍이 대흥인(大興人) 양우춘(楊遇春)·양두춘(楊斗春)·양경춘(楊慶春)과 함께 흉모를 꾸미다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신이 듣고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자, 한공 등이 신이 고변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도리어 영장(營將)에게 신을 무고하였습니다. 영장이 신을 매를 쳐서 죽이려고 하므로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죽을까 걱정되어 고변의 말을 빙자하여 서울로 오려고 하였는데, 영장 또한 말을 잘하면 부원군(府院君)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
하였다. 상이 무고의 법으로 단죄할 것을 명하여, 천건은 드디어 죽임을 당하고 무고를 당한 사람은 모두 석방되었다. 양사가, 홍주 영장(洪州營將) 선세강(宣世綱)을 잡아다가 문초하여 그를 유인하고 협박한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오래도록 따르지 않았다. 부제학 정온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폐조 말년에 소와 말을 훔친 자가 스스로 역적(逆賊)이라 하면서 혐의진 사람들을 고소하여 구속된 사람들이 옥에 가득찼었으니, 이것이 멸망의 재앙을 부른 원인입니다. 성명께서 군림하여 지난날의 잘못과 폐단을 모두 혁파하셨으나, 그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고변의 옥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천건의 고변은 더욱 근거가 없는 것인데, 이 옥사를 조성한 자는 세강입니다. 그 교사하고 유인하여 끌어댄 실상과 공을 바라고 재앙을 즐기는 마음을 따져 죄를 정한다면 천건보다 더욱 큽니다. 양사가 잡아다가 국문하자는 요청은 진실로 간사함을 막고 조짐을 끊는 의의를 얻은 것인데, 여러 날을 논하였으나 아직도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아, 이로부터 고변의 길이 나날이 열려갈 것입니다. 고변의 문이 한번 열리면 국가의 기맥(氣脉)이 장차 나날이 손상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양사의 요청에 대해 어렵게 여기시는 것은, 신이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어찌 고변하는 문이 한번 닫히면 비록 불궤(不軌)의 무리들이 형적을 숨기고 있는데도 고발하는 사람이 없을까 걱정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위로 천명(天命)에 호응하시고 아래로 인심에 따라서 종사(宗社)와 신민(神民)의 주(主)가 되시었으니, 어찌 간사한 꾀를 품은 불순한 무리가 감히 하늘이 명하고 민심이 귀의하는 자리를 엿볼 마음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의심쩍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참소하는 적들의 입을 부르는 것이니, 만약 전하의 마음에 터럭만큼이라도 의심하는 단서가 없지 않아 양사의 청을 윤허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신이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며 국가도 평안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 진술한 일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
하고, 다음날 드디어 양사의 의견에 따랐다.

 

10월 21일 무술

호조가 경기 지방의 별수미(別收米)를 돈으로 대신 내도록 할 것을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들이 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베풀어 문과에 이이송(李爾松) 등 40인과 무과(武科)에 정영(鄭韺) 등 50인을 선발하였다.

 

10월 22일 기해

상이 소대를 명하여 《시전》을 강하였다.

 

10월 24일 신축

심 도독(沈都督)의 접반사인 강홍중(姜弘重)이 치계하였다.
"방금 도중(島中)에 머물러 있는 역관의 문서를 보니, 거기에 ‘도중의 차관(差官) 허천충(許天忠)이 군자금을 받아 가지고 북경(北京)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예부(禮部)에서 중서(中書) 호태(胡泰)에게 조선을 격려하고 회유하는 칙서(勅書)를 주어 보내려고 하자, 도중의 차관인 유격(遊擊) 강국정(江國正)이, 조선이 매우 피폐하여 사신을 접대하기 어렵다는 뜻을 진달하고 자신이 칙서를 받들고 가겠다고 자청하였는데, 이달 중으로 당도할 것이며, 도독도 도독 동지(都督同知)로 승진했다.」 라고 했다. ’ 하였습니다. 또 한인(漢人)들에게 들으니, 중원(中原)에 도적들이 남경(南京)에서 봉기하였는데, 병부 상서 범경문(范景文)과 조운 도어사(漕運都御史)가 홍미적(紅眉賊)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사인(舍人)에게 고발을 당해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대개 홍미적은 하남(河南)에서 병사를 일으켜 변량(汴梁)을 웅거하여 지키고 있으며, 병마(兵馬)가 매우 융성한데, 명(明)의 대총병(大摠兵) 등이 가서 토벌하다가 모두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

 

10월 25일 임인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김응조(金應祖)를 장령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사간으로, 홍전(洪瑑)을 지평으로, 오단(吳端)을 교리로 삼았다.

 

10월 26일 계묘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정온이 아뢰기를,
"삼남(三南)에 양전할 초기에는 ‘경기와 강원도의 양전이 끝나기를 기다려 동시에 시행하겠다. ’고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양전이 끝나는 대로 즉시 부역을 부과하고 있으니, 크게 신용을 잃었습니다. 한두 해 잠시 기다려서 시행한다고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인심을 얻느냐 잃느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고 보면, 어찌 수백 동(同)이나 수백 석(石)의 미포(米布)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
하니, 호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이미 양전을 다 마치고도 아직까지 옛 전안(田案)을 쓰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온이 아뢰기를,
"그러면 당초에는 왜 두 도의 양전을 마친 뒤에 함께 시행하겠다고 했습니까?"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기에는 양전을 한 뒤에 별로 큰 소요의 폐단이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정온이 명길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등대(登對)하였을 때 공은 풍재(風災)가 별로 손상을 준 바가 없다고 하더니, 이제는 또 양전으로 백성들이 별 소요가 없다고 하니, 이 무슨 말이오?"
하니, 명길이 말하기를,
"이번 양전은 본래 백성에게 세금을 걷어 위를 보태주거나 나라를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미 오결 수포(五結收布)를 줄여 주었고, 또 거두는 쌀도 줄였습니다. "
하자, 심액이 말하기를,
"경연의 사체(事體)는 각자의 의견을 말할 뿐이지 여기는 논난(論難)하는 곳이 아닙니다. "
하였다.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에 머무는 왜인에게 쌀 1백 석을 주었다. 이때 왜상(倭商)이 1년이 넘도록 관에 머물러 있었는데, 우리가 양식을 대주는 법규가 없고 또 대마도에서 대어 주는 일도 없었다. 쌀 2백 석을 무역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1백 석을 준 것이다.

 

10월 27일 갑진

공청 감사 박명부(朴明槫)가, 해변에 사는 백성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큰 바람을 만나 많이 빠져 죽었다는 장계를 올리니, 상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구휼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동부승지 구봉서(具鳳瑞)가 아뢰기를,
"사사로운 일로 죽은 자도 구휼하는 은전을 받는다면 훗날에 만일 공사(公事)로 죽은 사람이 있을 경우엔 장차 어떻게 구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
하니, 답하기를,
"나의 부덕으로 말미암아 죄없는 백성들이 바람을 만나 많이 죽었으니, 내 몹시 부끄럽다. 이들이 비록 사사로운 일로 빠져 죽었으나, 특별히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어 내 뜻을 표하도록 하라. "
하였다.

 

10월 28일 을사

헌부가 아뢰기를,
"요즈음 재이는 나날이 생겨나고 재용(財用)은 나날이 궁핍해 가는데, 집을 짓는 제도가 나날이 더욱 벗어나고 있어 훈척이나 권귀의 집은 한계도 없이 참람하고, 여염의 사람들도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호사스러운 집을 짓는 일이 있을 것이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일일이 적발하여 제도에 벗어나게 지었을 때는 그 가장(家長)을 처벌함과 동시에 즉시 철거하게 하되, 관리가 만약 이를 거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그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이미 지은 것은 철거할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는 그 법에 금하는 것을 거듭 밝혀 제도에 벗어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
하였다. 이때 김자점(金自點)이 새로 큰 집을 지었는데, 도성에서 으뜸이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있은 것이다.

 

경상도 암행 어사 윤계(尹棨)가 치계하기를,
"의성 현령(義城縣令) 최무(崔茂)가 그 고을 창고의 모곡(耗穀) 1천여 석을 사사로이 썼습니다. "
하니, 상이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중도에 정배(定配)하였다. 공청도 암행 어사 강대수(姜大遂)가 치계하기를,
"수사 유지경(柳持敬)이 사사로운 영리를 도모하여 군졸들을 침탈했습니다. "
하니, 상이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