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3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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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정미

경상 감사 유백증(兪伯曾)이, 성산 현감(星山縣監) 윤선도(尹善道)가 탐욕을 부린 실정을 살펴 보고하니, 파직하여 내치게 하였다.

 

11월 2일 무신

민응회(閔應恢)를 동부승지로, 성이성(成以性)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3일 기유

우부승지 구봉서가 아뢰기를,
"계복(啓覆)은 막중한 일인데, 지난해에 일이 있어서 시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사형수가 많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만약 또 지연된다면 양절(陽節)051)  이 임박하게 될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서둘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계복은 주로 사형에 관한 일이므로 반드시 동절(冬節)에 한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6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14면
【분류】사법-재판(裁判)


[註 051] 양절(陽節) : 동지 이후의 절기를 말함.

ⓒ 한국고전번역원

 

황해도의 속오군(束伍軍) 2천 명을 안주(安州)에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11월 4일 경술

상이 소대를 명하여 《시전》의 원유도(園有桃) 장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정뇌경(鄭雷卿)이 아뢰기를,
"원유도 장은 나라가 작은데 바른 정치가 없는 것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무릇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니, 사람의 바르지 못함을 바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못하고 있는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정치가 있더라도 정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시를 지은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고 근심한 것입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온 나라 사람이 그 그릇됨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겠느냐?"
하니, 뇌경이 아뢰기를,
"한 사람도 깨닫는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자사(子思)052)  가 말한 ‘임금이 말을 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경대부(卿大夫)가 그 잘못을 감히 바로잡지 못하고, 경대부가 말을 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사서인(士庶人)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 ’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하였다.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그 잘못을 깨닫는다면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나라의 일은 날로 잘못되어 가는데도 오늘날처럼 나라를 걱정하는 신하가 없었던 것입니다. "
하였다.

 

금한(金汗)이 해마다 홍시(紅柿) 3만 개를 요구하니, 상이 주도록 명하였다.

 

11월 5일 신해

승문원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반포한 《홍무정운(洪武正韻)》은 음의(音義)와 자법(字法)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이는 본래 고황제(高皇帝)가 천하가 동일 문자를 쓰게 하기 위해 창제(創製)한 책입니다. 이제 이 책을 간행, 널리 배포하여, 사자관(寫字官) 등으로 하여금 익히게 함으로써 멋대로 써서 정자(正字)와 다른 폐단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
하니, 따랐다.

 

11월 6일 임자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집의 심지원(沈之源), 사간 민응형(閔應亨)이 대면을 요청하여 입시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가 흥성하려 할 때는 반드시 상서가 있고, 국가가 망하려 할 때는 반드시 요얼(妖孼)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벼락이 정전(正殿)에 떨어지고, 한성부의 못물이 붉게 변하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두 능이 갈라져 허물어짐은 더욱 절박한 재앙이며, 7월에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던 일 역시 병란의 조짐입니다. 풍재(風災)는 신묘년053)  과 흡사했는데, 신묘년에 큰 바람이 불고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했으니, 신묘년과 같은 재변이 오늘날 다시 나타났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예로부터 흥망이 언로에 달려 있었는데, 요즈음 언로가 막혔습니다. 반정(反正)의 초기에는 천변(天變)이 없어도 말을 다하게 하여 사람마다 의견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했었는데, 지금은 재이가 있더라도 구언(求言)을 하지 않고 있으며, 조금만 기휘에 저촉되면 문득 진노하시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혀를 감추고 말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성문이 닫히게 되었는데도 언로가 열리지 않으니, 신은 적이 민망하게 여깁니다. 혼조(昏朝) 때에 천변이 거듭 나타나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앞으로 무슨 변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반정의 거사가 있었습니다. 반정 뒤에는 사람들이 모두 지금부터는 태평할 것이라 하였으나 이괄(李适)의 변이 있었고, 이괄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다시 지금부터는 태평 무사(太平無事)함을 기약할 수 있겠다 하였으나 또 정묘년(丁卯年)의 변란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모두 먼저 조짐을 보여 준 재이가 있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신이 김상헌(金尙憲)을 방문하여 이런 일들을 이야기했더니, 상헌이 말하기를 ‘지금의 국사는 다시 어찌해 볼 수가 없다. ’ 하였습니다. 대저 상헌의 강직함으로도 말씀드릴 것이 없다는 것은 대개 국사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하니, 상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조정의 선비가 국사에 대해 다시 어찌해 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나약하고 게을러서 더불어 일을 해보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라면 몸이 병들 때까지 힘과 마음을 다해 보려고 해야지 국사를 어찌해 볼 수 없다고 버려둔 채 구제하지 않아서야 되갰는가. "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모두 형식적인 것입니다. 상이 신하를 대하실 때 형식만 갖추는 자세로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길 적에도 형식만 갖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갓 말만이 아니라 성실하게 실천하셨으면 합니다. "
하고, 응형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반정하기 이전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신다면,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사가 모두 내 과실을 말하여 내 마음을 바로잡으라. "
하니, 지원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궁궐 안에 용지(龍池)가 있다는데, 이것이 진실로 사실입니까? 비록 이런 일이 없더라도 항상 유람과 안일을 경계하소서. 또 초파일 관등하는 것도 오늘날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 들으니 금원(禁苑)에 토목 공사를 하고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제학 정온의 차자 가운데도 용지에 대해 말했는데, 일반 백성들은 반드시 ‘용을 잡아서 놓아 둔 연못이다. ’ 할 것이니, 어찌 사실과 다르지 않겠는가. "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으므로 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이니, 말한 것에 잘못이 있더라도 그르게 여기지 마소서.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네 말이 옳다. 내 어찌 그르게 여기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잘못한 바가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쓴다. ’ 하였으니, 이렇게 할 따름이다. "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금부터는 밝게 떨치고 분발하여 대신들을 신칙·격려하시고, 지난날처럼 세월을 허송하지 마소서. "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매우 추우니, 해조로 하여금 동옷을 만들어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주고, 각처에서 숙직하는 군사들에게는 빈 섬[空石]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

 

11월 7일 계축

상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는데 심지원과 민응형의 말에 따른 것이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어제 양사가 면대를 요청하여 ‘왜적이 걱정된다.’고 말하였는데,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윤방(尹昉)·오윤겸(吳允謙)은 모두 ‘왜인들이 아직 침범해 올 기세는 없다. ’고 하였고, 이홍주(李弘胄)와 신경진(申景禛)은 수군을 정비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백(關白)이 전쟁에 싫증이 나 총포(銃砲)를 쏘지 못하게 금지하였고, 또 사람들이 난리를 일으킬까 걱정하여 장수들의 처자들 모두 구금하여 인질로 삼았다 하니,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를 넘볼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근심할 단서가 없다고 여긴다."
하였다.

 

평안도의 삼수 장무대(三手壯武隊) 3천 2백 80인과 황해도의 출무 군병(出武軍兵) 3천 인을 안주로 들여보내 수비하게 하였다.

 

11월 10일 병진

비국이 아뢰기를,
"요즈음 삼상(蔘商)들이 세금은 적게 내면서 이익은 많이 보기 때문에 내지(內地)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고 있어서 몰래 월경하는 폐단을 끝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금을 더 거두어 장사의 이익을 약간 빼앗아 금령에 일조가 되게 하소서. "
하고, 또 아뢰기를,
"삼남의 감영과 병영의 아병(牙兵)·별대(別隊) 등의 명칭은 원래 법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 것이고, 난리 뒤에 새로 만든 법규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하고 있는 이때 감사와 병사의 수하에 있는 군사를 모두 줄일 수는 없으니, 이제 본영으로 하여금 정해진 숫자를 아뢰게 하고, 정해진 숫자 이외에 양민은 군역을 파하여 군보(軍保)로 삼고, 공사천(公私賤)은 속오군(束伍軍)에 편입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1월 11일 정사

이시직(李時稷)을 장령으로, 엄정구(嚴鼎耉)를 정언으로, 오달제(吳達濟)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대사헌 김상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들으니, 조정에서 특히 남쪽 변방의 근심에 진념하여 장차 구굉(具宏)을 보내 양남(兩南)의 방비를 신칙하도록 한다니, 미리 환란에 대비하는 계책이 참으로 깊다고 하겠습니다. 또 들으니, 구굉은 일찍이 통제사영(統制使營)을 맡았을 때 자못 청렴 근실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하니, 묘당(廟堂)에서 이 사람을 선발한 것도 사람을 잘못 고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순시하는 것으로는 끝내 실효가 없을 것이니, 반드시 장구한 계획을 강구해야만 길이 힘입을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국가가 서쪽 변경에 일이 있은 뒤로는 오로지 서쪽에만 뜻을 두느라 남쪽 변방의 방비는 전혀 수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른바 군병(軍兵)은 단지 속오군에 지나지 않고, 조련도 소홀한 데다 무기마저 엉성하며, 한 몸에 양역(兩役)을 지니고 있는 백성에게 주구와 독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여 근심과 원망이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하 내외가 희희 낙락하며 돌아보지 않고 있으면서 난리를 당하면 그들을 전쟁터로 몰아 자신을 잊고 죽기를 각오하게 하고자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에게 얕은 견해가 있어 시험삼아 진달해 보겠습니다. 이제 성실 근면 민첩하며 일을 알고 명망과 역량이 있는 문신(文臣) 세 사람을 감군 어사(監軍御史)라는 호칭을 붙여 통제사영과 경상 좌병영과 우병영에 나누어 보내 곤수와 함께 군무를 의논하게 하되, 봄 여름에는 모두 그들의 목적지에서 주둔하고 가을 겨울에는 각처에 나누어 주둔하여 오로지 훈련에 전념하게 하면서 수령이나 장수 등이 군졸들을 사역, 침탈만 하고 무휼(撫恤)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경중에 따라 처벌하며, 군병(軍兵) 가운데 노약자는 차례로 자세히 가려내며, 장수로서 부지런하거나 드러난 공로가 있는 자는 조정에 아뢰어 상을 주어 사기를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수군 어사(水軍御史)는 통제사영이 그의 주둔지지만 사시(四時)로 호남과 영남 연해에 있는 진영(鎭營)을 순시하면서 수군 조련을 육군에 비해 두 배로 하여야 합니다. 이는 대개 속오군은 다 정규군이 아니라 반은 농촌에서 농사를 짓지만, 수군은 당번(當番)하는 자가 항상 진영에 있기 때문에, 농사를 폐하고 오가는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용병(用兵)할 때에 반드시 재물을 관장하는 관원을 두어 군량과 호궤의 비용을 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도는 힘이 부치는데, 또 관원 하나를 내보내면 더욱 번거롭게 소요를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감사로 하여금 군량의 임무를 겸하게 하여, 만약 잘 처리한다면 그 비용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감사는 한 도의 사무를 모두 관장하고 있으니 군병을 훈련하는 것도 그의 직책인데 하필이면 별도로 쓸데없는 관원을 내고 다시 감사로 하여금 비용을 조달하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중국의 법제가 세밀하여 좌·우 포정사(布政使)를 두고도 특별히 순안 어사(巡按御史)와 순무 어사(巡撫御史)를 두어 군무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국가의 중대한 일은 군사(軍事)에 있는데, 포정사가 통괄하는 민사(民事)가 번다한데다 만약 무사(武事)까지 책임지우면 아무리 능력 있는 자라도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깊은 생각과 원대한 계책이 지난 시대보다 뛰어난 점입니다. 군량을 담당하는 관원을 두지 않는 것은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 한 것이지만, 도내의 병사를 육성하는 책임이야 어느 것인들 감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군병 등이 진관(鎭管)이나 영문(營門)에서 훈련을 받을 때 저마다 양식을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첫해에는 마땅히 각 고을의 관청의 곡식으로 훈련의 날수를 계산하여 지급하고, 그 다음해부터는 별도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어사를 만약 1년 만에 교체한다면 반드시 성과를 이루기 어려울 것으로, 3년 뒤에 교체하여야 성공을 책임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가족이 없으면 오래도록 견디지 못하는 법이니, 어사는 중국의 법에 따라 가족을 인솔하고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거느리는 노비는 간편하게 일정한 수를 정해 주고, 그가 머무는 고을의 전세(田稅)로 품계에 따라 녹을 줍니다. 그리하여 공적이 있으면 한(漢)나라 때 천자가 조서로 포상하고 직급을 올려 주며 금을 주던 고사와 같이 하고 임기가 차지 않으면 옮기거나 바꿀 수 없게 합니다. 우리 나라의 인심이 천박하고 오래 견디지를 못하며 또한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습속의 폐단은 위에서 어떻게 바꾸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또 어사가 도내에 머물고 있으면 영문이나 열읍(列邑)의 쓸데없는 비용도 반드시 줄 것이니, 한 명의 어사를 바라지한다 하더라도 그 이익은 열 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사가 대관의 직함을 갖게 하여 병사 이하의 관리들이 죄를 범하거나 군졸과 백성들의 고통을 듣는 대로 치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순무를 모두 당상 이상의 관원을 써서 도어사(都御史)를 겸임시키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직질에 너무 구애하지 말고 오직 인재를 얻는 데에 치중하는 것으로 제도화하여 이를 시행해 보아 효과가 있으면 모든 도에 두루 시험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저절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재를 얻어야 성공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니, 어사나 여러 장수에 그 인재를 얻지 못하고 법이 좋지 않음만을 허물한다면, 비록 성현이라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적이 오기도 전에 먼저 국가의 뿌리를 흔든다고 경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이 이른 뒤에 도모하면 미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조충국(趙充國)이 제안한 둔전(屯田)의 계책054)  을 한(漢)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편하다고 하였고, 우리 세종(世宗)이 김종서(金宗瑞)를 보내 육진(六鎭)을 개설하신 것을 한때의 의논들 역시 대부분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후세에서 본다면 분분한 말들을 과연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명주(明主)가 결단을 내려 힘써 실천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계책을 감히 스스로 옛사람에게 견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금의 일을 처리한 득실의 결과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가려 선택하소서.
또 오늘날 장수의 재목이 항상 부족하다고 걱정하여, 무릇 결원이 생기면 구차하게 충당함을 면하지 못하니, 마땅히 일상적으로 선발하는 것 이외에 여러 방면으로 인재를 찾아야 합니다. 먼저 문무관 가운데 일찍이 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무인 가운데서 장령(將領)의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자 1, 2인을 천거하게 한 다음 그 이름 아래다 사실을 표기해 놓고 각기 그들의 재능에 따라 시험하여 탁용(擢用)에 대비하되, 만약 일을 망친 자는 그 천거한 사람까지 처벌합니다.
양계(兩界)는 무사가 가장 많으니, 그 중에 쓸 만한 자가 한량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정에서 변방 멀리까지 수용한 적이 드물었으니 그들이 실망하고 원망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양계의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각기 10인씩을 고르게 하되, 계책이나 재력(材力)이 동류에서 빼어난 자에겐 노자를 주어 서울로 보내게 하여 우선 숙위(宿衛)에다 예속시켜 놓고 수시로 장기를 시험해 보아 명실이 서로 일치한 자에게는 품계에 따라 직책을 주어 차례로 수용합니다. 삼남(三南)과 해서(海西)의 감사 역시 각각 5인씩 추천하고 강원도는 3인을 추천하여, 그들에게 노자를 주어 서울로 보내게 하여 재주를 시험하여 적절히 등용하는 것을 모두 양계의 예와 같이 하되, 1년 간격으로 하며, 또한 억지로 숫자를 갖추도록 할 것은 없습니다. 삼남과 해서는 전조에서 선발하면서 주의(注擬)할 때에 항상 여기에서 나오고 있으며 관동(關東)은 무사가 타도에 비해 자못 적으니, 차별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무사들을 취할 때는 먼저 풍체가 좋고 말 잘하는 자를 취하고 다음에는 문필에 능한 자를 취하기 때문에, 겉만 화려하고 실속없는 무리가 매번 추천의 명예를 얻고 질직(質直)하고 침착 의연한 자는 진취함에 불리하니, 이를 공론(公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인재를 등용하는 권한을 쥔 사람은 개인의 장점에 따라 취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 더욱 뜻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지금은 말이 귀하여 전사(戰士)들 가운데 말이 있는 자가 적습니다. 전쟁터에서는 말발굽 사이에서 승리를 획득하는 것이니, 우리 나라는 산림(山林)이 험하고 막혀 보병에 맞는 땅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마병(馬兵)을 중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상을 줄 때에 말을 사용하는 숫자가 매우 많으니, 지금부터 문신에게 상을 줄 때는 말 아닌 다른 것으로 상을 주고, 일체 무사와 군사 가운데 기예를 시험한 자에게만 줍니다. 그리고 여염이나 외딴 마을에서 말을 잘 번식시키고 기르는 자에게는 별도로 권장하는 방법을 시행하여 목축을 성하게 하는 것 역시 병정(兵政)에 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
하였다.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어사 3인에게 군무(軍務)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중국의 순무(巡撫)와 순안(巡按)의 제도입니다. 진실로 인재를 얻어 오래 맡기면, 군정이 제대로 거행될 뿐만 아니라 아울러 탐욕스러운 관리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이익이 어찌 적겠습니까. 다만 우리 나라의 관제는 중국과 다르며, 무릇 새로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처음 시작할 때 뒤에 어떻게 될까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어사 3인이 일시에 가족을 거느리고 가서 함께 별도의 아문을 여는 일은 대단한 경장(更張)에 관계되므로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도리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경상도는 고을이 매우 많아 조종조에서 일찍이 좌우 감사(左右監司)를 보냈으며, 임진 왜란 이후에도 일찍이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만약 옛 격식에 비추어 나누어 보내면, 평시에 무사할 때는 좌우(左右)로 나누어 다스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혹 위급한 일이 있으면 역시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별도로 어사를 보내지 않더라도 그 효과가 있을 듯합니다.
문무 2품 이상이 각각 장수에 합당한 자를 추천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으로 계유년055)  과 정묘년056)  에도 거행하였고 지난해 비국에서도 이미 선택할 것을 의논해 아뢰어 윤허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일체 차자의 내용에 따라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인재를 간택하여 서울로 보내 재주를 시험해 적절히 등용하도록 하고, 잘못 추천한 사람은 가벼운 경우는 추고하고 무거운 경우는 율에 따라 파직하소서.
국가에서 상을 줄 때 쓰는 말이 너무 많으니, 문관만이 아니라 무신이라도 보통 예에 따라 상을 주는 경우에는 모두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무신 가운데 무공(武功)이 있는 자나 군사 중에 기예를 시험보여 상을 주는 경우에 쓰면 좋을 것입니다. 또 여염이나 외딴 마을에서 번식을 잘 시키고 말을 잘 기르는 자의 경우는, 갑자기 권장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병조로 하여금 적절히 헤아려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영남이 비록 넓으나 물력(物力)이 부족하니, 나누어 임명하는 일은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 말을 무사에게만 주는 것은 진실로 소견이 있는 것이나, 다만 반드시 무공에 대한 상이나 재능 있는 군사에게만 준다면, 그 길이 매우 좁아서 값이 더욱 비싸질 것이다. 이 점은 논할 것이 없다만 다른 상으로 대용할 물건을 미리 강구하여 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가부를 결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무오

박로(朴𥶇)가 심양(瀋陽)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금한(金汗)이 몽고(蒙古)의 여러 나라를 격파하여 영토를 천 리나 넓히었고, 또 옥새(玉璽)를 얻었는데 그 옥새를 종이에 찍어 우리 나라에 보여 주라고 하였다. "
하였는데, 찍힌 글에 ‘제고지문(制告之文)057)  ’이라 하였다.

 

금나라 사신 마부대(馬夫大)와 무이(武夷)가 말 3백 27필과 낙타 3필을 몰고 왔는데 박로의 사행(使行)에 대해 사례한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직강 홍주일(洪柱一)이 어린 나이에 중요한 관직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검칙하지 않고, 집에서 하는 일도 패악스러운 점이 많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승지 최연(崔葕)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의 비리를 적발하고 가벼운 죄를 진 죄인은 석방하게 하였다.

 

11월 14일 경신

이보다 앞서 부제학 정온이 임금 앞에서 진계하여, 우선 삼남의 신결(新結)을 쓰지 말고 천천히 모든 도가 양전을 끝내기를 기다려 함께 세금을 내도록 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어렵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정온이 ‘언론의 책임을 가진 자는 그 말이 쓰여지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고 하고는 드디어 소를 남기고 떠났다. 상이 답하였다.
"경이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은 혹 지나친 것 같다. 봄에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올라오라. "

 

11월 17일 계해

헌부가 아뢰기를,
"조종의 법제에 영토에 대한 구분이 분명하여 비록 큰 나라를 섬기고 우방을 맺기 위해 사신이 서로 왕래하더라도 한 사람도 사사롭게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대개 환난을 깊이 걱정해서 한 일입니다. 이제 박로가 사신으로 갈 때, 조정에서 이미 데리고 갈 상인의 숫자를 정해 주었는데,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감히 박로가 압록강을 건넌 뒤에 몰래 장사꾼을 보내 심양에 따라 들어가게 했으며, 박로는 조정에서 뽑아 보낸 뜻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경업과 함께 사사로이 서로 용납하고 비호하였는가 하면 서울에 온 지 이미 오래인데도 진달하지 않다가 비국에서 불러 묻자, 그제서야 말을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임경업과 박로를 함께 잡아다가 죄를 주고, 사상(私商)들도 모두 잡아다가 법률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우선 추고하라. 사상들의 죄는 다스릴 것이 없다."
하였다.

 

11월 18일 갑자

윤황(尹煌)을 대사간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동부승지로, 임광(任絖)을 사간으로, 유수증(兪守曾)을 장령으로, 박서(朴遾)를 지평으로, 이해창(李海昌)을 정언으로, 윤강(尹絳)을 부교리로, 심지한(沈之漢)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20일 병인

이보다 앞서, 위원(渭原)에 속한 추구비(楸仇非)·벽단(碧團) 두 보(堡)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가 삼을 캐다가 붙잡힌 자가 36인이었는데, 금인(金人)이 여러 번 글을 보내 이를 문책하였다. 이에 그 군수 허상(許詳), 첨사 이현기(李顯基), 만호 김진(金進) 등을 가두었는데, 상이 이 세 사람을 죽여서 후일의 징계로 삼으려 하자. 판의금(判義禁)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기를,
"국가에서 단죄하는 법률이 하나뿐이 아니지만, 국경을 넘어간 죄를 범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죄를 범한 사람만 처벌하고 관리에게는 처벌하지 않은 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강변에서 삼을 캐는 사목은 허상의 무리로 인하여 처음 만든 것이고 보면 이들이 죄를 범한 것은 이 명이 있기 이전의 일입니다. 죄를 범하기 이전에는 법이 가벼웠다가 죄를 범한 뒤에 법이 무거워진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무엇을 두려워하여 피할 바를 알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먼저 제정한 사목의 내용을 양계에 반포하여 모든 사람들이 뚜렷이 국법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하고 나서 ‘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법을 살펴 처리한다. ’고 하면,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仁)이나 법을 지키는 의(義)의 도리를 모두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니, 상이 싫어하는 안색으로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는 신하로서 사람에게 위엄을 휘두르고 복을 주는 일에 가까우므로 그 조짐이 좋지 않다. "
하고, 드디어 명길을 판의금에서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허상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11월 21일 정묘

상이 문정전(文政殿)에 나아가 사형수들을 심의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 좌참찬 한여직(韓汝溭), 대사헌 김상헌(金尙憲), 우윤(右尹) 안응형(安應亨), 예조 참판 홍명구(洪命耉)는 동쪽에 있고, 이조 참의 박황(朴潢), 호조 참의 신득연(申得淵), 정언 이해창(李海昌)은 동쪽 가까이에 서쪽을 상좌로 하여 있고, 형조 판서 구굉(具宏), 풍녕군(豊寧君) 홍보(洪靌),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 형조 참판 이시백(李時白)은 서쪽에 있고, 도정(都正) 심현(沈誢), 공조 참의 조국빈(趙國賓), 첨지중추부사 홍립(洪雴), 형조 참의 강선여(姜善餘), 교리 윤강(尹絳), 부수찬 홍명일(洪命一)은 서쪽 가까이에 동쪽을 상좌로 하여 있고, 도승지 정광성(鄭廣成), 좌승지 목서흠(睦敍欽), 우승지 심액(沈詻), 좌부승지 최연(崔葕), 우부승지 구봉서(具鳳瑞), 동부승지 민응형(閔應亨)은 기둥 앞에 있고, 기사관(記事官) 윤미(尹敉)·남노성(南老星)·양만용(梁曼容)·이회(李禬)는 기둥 밖에 있다가, 승지가 나아가 죄인의 추안(推案)을 읽으면, 상이 좌우에 두루 물어서 좌우가 다 "마땅히 사형해야 한다. " 하면, 상이 "마땅히 율에 따라야겠으나 잠시 후일을 기다리라. " 하고, 좌우가 만약 "죄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고 하면, "반복해서 다시 의논하라." 고 명하였다.

 

11월 23일 기사

경상도 상주 유생 송이진(宋以鎭) 등이 상소하여, 세금을 거둘 때 특별히 상등과 중등의 세금을 줄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호조에서 회계하기를,
"전지를 측향한 뒤로 각종 부역을 이미 많이 줄여 주었는데, 영남의 유생들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리고 있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성상께서 백성을 걱정하시는 뜻으로 말하자면 온 도를 다 ‘하지하(下之下)’로 줄여 준다 하더라도 오히려 줄여 줄 것이 적어서 걱정이겠지만, 국가의 경비를 계산해 보면 실로 경비를 잇댈 방안이 없으니 줄여주고 싶어도 형세상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본도는 양전으로 더 내야 하는 전세(田稅)가 다른 도에 비해 약간 많아 내는 세금이 더러는 지난날보다 몇배가 되기도 하는데, 백성들이 당초 결수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죄는 생각지 않고 새 세금이 많다고만 원망하고 있으니, 덧붙인 결수가 지나치게 많은 고을에는 헤아려 변통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4일 경오

이홍주(李弘胄)를 판의금으로, 홍명구를 대사간으로, 김경여(金慶餘)를 교리로, 윤집(尹集)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11월 27일 계유

상이 문정전(文政殿)에 나아가, 사형수를 재복(再覆)하였다.

 

대사헌 김상헌이 병으로 차자를 올려 체직을 요청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병중에 있으면서 또 느낀 바가 있습니다. 중년에 온갖 병이 들어 일신이 어렵고 위태로워 널리 명의(名醫)를 맞아오고 날마다 약방문을 찾았으나, 말하는 바가 각기 달라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동안 대략 여러 방법을 시험하였으나 의술로는 고질이 된 병을 고치지 못하였고, 효과를 너무 빨리 기대하다 보니 싫증이 뒤따르기도 하였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평소에 몸을 해치는 일을 적게 하여 동작을 좋아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서 편안히 정양하였더라면, 백 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니, 이렇다면 의사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좋은 시절은 쉽게 가고 노년은 날듯이 지나가 천금과 같은 귀한 몸이 아침 이슬처럼 허망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객기(客氣)와 사기(邪氣)가 번갈아 침입하여 귀신이 될 날이 점차 다가 와서야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있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때 신에게 신단 묘제(神丹妙劑)로 원기를 보존하고 오래 사는 방술을 권하던 자가 있었으나, 그 말을 듣지 않고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신은 매우 회한과 애처로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말을 광망(狂妄)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상의 몸을 보양(保養)하시는 방도에 극진히 힘쓰시고 하늘에 빌어 생명을 길게 하는 방법을 더욱 닦아서, 억만년토록 한없는 복의 터전을 마련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경은 고사하지 말고, 다시 조리를 더하여 직무를 보도록 하라. 또 차자 끝에 진술한 것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
하였다. 이 차자는 대개 몸의 병을 빌어 시사(時事)를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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