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무인
김신국(金藎國)을 판의금으로, 김경징(金慶徵)을 도승지로, 윤황(尹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징이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하니,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한성부가 헌부의 계사로 인하여 제도에 벗어난 집들을 적발하여 처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의지할 곳 없는 고아나 과부 서민들이었고 김류나 홍서봉(洪瑞鳳)과 같은 집들은 한 동네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니, 사람들이 다 그르게 여겼다.
12월 4일 경진
접반사(接伴使) 강홍중(姜弘重)이 치계하였다.
"철산 부사(鐵山府使) 이인립(李仁立)의 첩보(牒報)에 ‘금(金)나라 사신 마부달(馬夫達)이 선천(宣川)에 이르러 수하 호인을 거느리고 사포(蛇浦)에 들이닥쳐 한인(漢人) 7명을 사로잡고, 소 4마리, 말 12필, 노새 1필, 청포(靑布) 1천필, 화사주(花絲紬) 3백필, 노주주(潞州紬) 40필을 빼앗았다. 그리고 5인은 머리를 베고, 1인은 두 귀와 코를 벤 다음 돌려 보내 도독부에 알리게 하고, 한 사람은 머리를 깎아 데려갔다. ’ 하였습니다. "
12월 5일 신사
대군(大君)이 태어났는데, 그날로 죽었다. 예조가 조회를 정지하고 철시하여 예로 장사를 치르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거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2월 6일 임오
이현영(李顯英)을 형조 판서로, 최유연(崔有淵)을 우부승지로, 윤구(尹坵)를 헌납으로, 김덕함(金德諴)을 대사간으로, 김수익(金壽翼)을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8일 갑신
교동(喬桐)의 유학(幼學) 황홍(黃泓)이 상언하기를,
"갑자년058)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 때 신의 아비 선전관(宣傳官) 황경례(黃景禮)가 경기 순찰사 이서(李曙)에게 명을 전하러 송경(松京)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흉적의 예봉을 만나 절개를 지켜 굴하지 않고 죽었으나, 아직도 정포(旌褒)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기에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
하니, 상이 관작을 내려 포상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황홍에게 걸맞는 직책을 주라고 명하였다.
정언 이해창이 아뢰기를,
"박동량(朴東亮)의 죄는 신이 낱낱이 들고 싶지도 않습니다마는 대체로 큰 죄인입니다. 반정(反正)의 초기에 선후(先后)059) 가 살아 있고 여러 재상들이 살아 있었으니 어찌하여 죄를 논의하여 유배하던 그때 일제히 나서서 사실을 변명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 선후가 돌아가시고 죄인이 이미 죽은 뒤에 와서야 그 아들의 상언으로 인하여 사실을 밝혀 주자는 뭇의논이 있게 된 것입니까.
병조 판서 이홍주는 젊어서부터 노년까지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지켜 오다가 기혈(氣血)이 쇠퇴한 뒤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서자 안방(安邦)이 아비의 총명을 가리고 사사롭게 정권을 농락하여 인재 의망과 출세의 지속(遲速)이 다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직접 본 것으로 말하면, 신의 일가(一家)에 서족 2인이 있었는데, 그들이 항상 관직을 얻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다가 안방과 사귀어 결국 변방의 장수 자리를 얻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보면, 안방에게 뇌물을 주고 관직을 얻은 자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홍주는 작위(爵位)가 높지마는 무너져 가는 집 몇 칸뿐인데, 안방은 창기(娼妓)를 끼고 첩을 두었으며, 또 그 옆에 큰 집을 지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언관의 직책에 있어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곧 동량과 홍주의 일을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여 함께 그들의 죄목을 들추어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가부를 표시하지 않다가 간통의 내용을 동량과 혼인한 집에 급히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신이 못나서 이와 같은 일을 초래했으니, 빨리 체면해 주소서. "
하였다. 사간 임광(任絖), 헌납 윤구는 모두 배척을 받았다고 하여 피혐하고, 정언 김중일(金重鎰)은 간통에다 이미 ‘삼가 잘 알았다[謹悉]’고 썼으나 결국 의논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피혐하였다. 대사간 김덕함(金德諴)이 처치하기를,
"동량은 선조(宣祖) 때의 충신입니다. 그가 살았을 때 이미 사면의 은전을 받아 서울로 돌아옴을 허락받았으니, 그가 죽어서 사실을 밝혀 주는 것도 물론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묘당에서 의논을 드린 것이 현재 결정이 나지 않았고 보면 더구나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홍주는 조정에 나온 지 40년 동안에 마음은 물과 같고 몸은 하자가 없습니다. 지난 혼조(昏朝) 때에도 그가 이기적이고 사랑에 빠졌다고 감히 지목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오늘에 있어서야 어찌 서자를 사랑하여 성명(聖明)을 저버리려고 했겠습니까.
해창이 젊은 나이로 과감히 말한 것은 가상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경솔하게 발언한 것은 신중히 하는 뜻이 없으며, 김중일 역시 그 의론에 삼가 잘 알았다는 말을 썼으니, 해창과 중일은 모두 체차시키고 임광·윤구는 모두 출사하라 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9일 을유
중전(中殿)이 대군의 죽음으로 인해 병이 위독해져, 신시(申時)에 산실청(産室廳)에서 승하하였다. 대신과 예관을 불러 하교하기를,
"뜻밖에 상을 당하였다. 각사로 하여금 염습(斂襲)할 여러 도구를 준비하도록 하라. "
하였다. 후(后)의 성은 한씨이고, 고려 태위(太尉) 한난(韓蘭)의 후손이며,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13년 동안 외정(外政)을 궁내에 들리게 하지 않았고, 내정(內政)을 궁밖에 들리게 하지 않았다. 상이 항상 복주도(覆舟圖)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후가 진언하기를,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를 보시면서 위태로움과 두려운 바를 생각하시고, 애완하는 물건으로만 여기지 말으소서. "
하였다. 상이 간혹 정원을 정비하려 하면, 후가 그때마다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역사를 중단하였는데 상을 보필하여 내치를 한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다. 또 정사(靖社)의 거사를 할 때 후가 실로 대모(大謀)에 참여하여 도움을 준 바가 매우 많았다. 후가 기절하자, 세자가 손가락을 끊으려 하였으나, 상이 막았다. 백관이 거애(擧哀)를 하고 복장을 바꾸었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는 모두 관(冠)과 상복(上服)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흰장화·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었으며, 내명부(內命婦)의 빈(嬪) 이하와 왕세자빈 이하, 외명부(外命婦) 및 부부인(府夫人) 이하는 모두 관과 상복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흰신발·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었다.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오각대(烏角帶)·오사모(烏紗帽)를 착용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내상(內喪)을 당하셨으니 옷을 바꿔 입는 예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명회전(大明會典)》과 《오례의(五禮儀)》에는 모두 뚜렷한 예문(禮文)이 없었기 때문에 경자년060) 의인 왕후(懿仁王后) 국상 때의 등록을 가져다 살펴보니, 그때 본조에서는 단지 《오례의》 복제조(服制條) 주에 ‘전하가 복이 다하기 전, 복이 다한 뒤’ 등의 말을 취하여 옷을 바꿔 입고 거애하는 제도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바꿔 입은 옷의 색에 대해서는 별도로 나타난 곳이 없어서 평상시 거애할 때 절목인 흰 도표·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시행하였으니, 지금도 이 예(例)에 따름이 합당하겠습니다.
성복(成服)은 상께서 기년복(朞年服)을 갖추셨다가 12일 만에 벗고, 성복과 제복(除服)할 때도 모두 직접 임하셨습니다. 12일 전에는 항상 백두면(白頭冕)·흰옷·흰띠를 착용하시고, 제복을 한 뒤에는 흰 무명으로 만든 단령(團領), 생마포(生麻布)로 만든 띠, 흰신을 착용하여 앞의 12일까지 합쳐 30일만에 벗었습니다. 관(冠)의 제도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 근거해 볼 길이 없었으나, 한 계사(啓辭)를 보면 졸곡(卒哭) 전에는 항상 흑두면(黑頭冕)·흰옷·흰 띠를 착용하자는 데 윤허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흑두면을 착용하고, 일체 선조(宣祖) 때 이미 이루어진 예에 따라 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그 가운데 바꿔 입은 옷의 색깔은 온당하지 못한 듯하다. "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례의》 중에는 전혀 내상(內喪)을 위해 옷을 바꿔 입는 조목이 없고, 오직 외조 부모(外祖父母)를 위해 옷을 바꿔 입는 조목에 소복(素服)·오사모·오서대를 갖추게 되어 있으며, 왕비의 부모 및 왕자·부인·공주·옹주·내명부 등을 위해 입는 경우에는 단지 흰옷으로 갈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옷을 바꿔 입는 한 조목은 대략 외조부모를 위해 거애하는 예문(禮文)을 모방하여 강정한 것인데, 이제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시니 천담복(淺淡服)으로 예를 거행해야겠습니다. 또 경자년 등록에는 옷을 바꿔 입고 거애하는 장소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외조부모 및 기타를 위해 거애하는 것은 모두 별전(別殿)에서 시행한다고 예경(禮經)에 실려 있습니다. 이번 일의 거행은 안에서 설치하여 행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庭)에서 예를 거행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되므로 통례(通禮)로 하여금 인도하게 할 수는 없으니, 내시로 대신하게 함이 또한 적절한 듯합니다. 모두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
하였다. 대신이 해조의 계사에 따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다음날 염습을 한 뒤 전(奠)을 드리고, 백관이 봉위례(奉慰禮)를 거행하였다.
홍보(洪靌)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았다.
훈련·어영 두 대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하게 하였다가 3일이 지나서 파하였다.
12월 10일 병술
예조가 아뢰기를,
"임신년061)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태묘(太廟)에 새로 나온 음식물을 드릴 때에 어육(魚肉)을 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에 따라 시행하소서. "
하고, 또 아뢰기를,
"중전께서 이달 초 9일에 승하하셨습니다. 제도(諸道)의 대소 사신(使臣) 및 외관은 문서가 도착하는 날 정청(正廳)에 향탁(香卓)을 설치하고 소복·오사모·오각대의 차림으로 뜰에 들어가 사신은 동쪽에다 자리를 잡고 외관은 서쪽에다 자리를 잡되, 겹줄을 지어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았다가 집사가 향을 피우면 사신과 외관은 엎드려 슬프게 곡을 한 다음 사배례(四拜禮)를 거행합니다. 부고를 들은 지 6일째 되는 날 성복을 하는데, 그날 이른 아침에 정청에다 향탁을 설치하고 소복을 벗고 자최복(齊衰服)으로 갈아 입고 나서 뜰에 들어가 꿇어앉았다가 집사가 향을 피우면 사신과 외관은 엎드려 슬프게 곡한 다음에 4배례를 거행합니다. 졸곡(卒哭) 뒤에 옷을 갈아 입는 것이나 연제(練祭)·상제(祥祭)·담제(禫祭) 뒤에 옷을 갈아 입는 절차는 모두 경관(京官)과 같습니다.
제도 관찰사·절도사 및 목사는 모두 사람을 보내 전문(箋文)을 올려 위로를 드리고, 또 글을 올려 거듭 동궁(東宮)에도 위로를 드리며, 2품 이상 역시 글을 올리는데, 연변(沿邊)의 관원만은 거애를 하지 않습니다. 이 절목(節目)을 급히 개성부·강화부 및 각도에 역마로 전달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옥체가 건강하셨는데, 분만하신 지 7일도 채 못되어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여러 의원과 약물 시중을 드는 자들의 무상(無狀)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실청에 입직한 의관 등을 모두 잡아다 문초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1일 정해
부사(府使) 홍진도(洪振道), 군수 한회일(韓會一), 부사과 한흥일(韓興一), 전 군수 홍진문(洪振文) 등에게 명하여 소렴(小斂)에 들어와 참여하도록 하였다. 소렴을 끝낸 뒤에 전을 올리고, 백관이 모두 곡하고 4배를 드렸다. 이 뒤로 성복할 때까지 백관이 조석의 전에 참여하였다.
대행 왕비의 승하를 종묘와 사직에 고하였다.
12월 12일 무자
예조가 아뢰기를,
"예문을 살펴보니, 국휼(國恤) 때에는 초상(初喪)부터 졸곡까지는 백관이 모두 복제(服制)·식가(式暇)·사전(謝前)·잡고(雜故)를 제거하며, 졸곡 뒤의 정조(正朝)·동지(冬至)·삭망(朔望)·속절(俗節)·사시(四時) 및 납제(臘祭)·연제(練祭)·상제(祥祭)·담제(禫祭) 때는 잡고를 제거하고 나아가 참여하고, 또 봉상시(奉常寺)·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가 돌려가면서 음식을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모두 이에 따라 시행하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3일 기축
예조에서 전하의 복제를 자최 기년복(齊衰期年服)으로 하여, 12일을 채운 뒤 제13일째 되는 날 복을 벗도록 하였으며, 12일 이내에는 항상 흑두면·흰옷·흰 띠·흰 가죽신을 착용하고, 신하들을 만날 때는 익선관·흰웃옷·오서대·흰 가죽신을 착용하며, 무릇 상사에 관계되는 경우는 최마복을 입고, 복을 벗을 때는 몸소 임하며, 최복을 벗은 뒤에는 흑두면·흰베로 만든 단령, 생마포로 만든 띠, 흰가죽신을 착용하고, 복을 벗을 때 몸소 임하는 절차가 없으며, 제30일에 복을 벗은 뒤에 베 띠를 띤 채로 그날을 모두 보내고, 다음날 처음으로 길복(吉服)을 올리며, 무릇 상사와 연관된 일에는 익선관·흰 띠·흰웃옷·흰가죽신을 졸곡 때까지 계속 착용하며, 각 아문은 초상 때부터 27일까지 형벌을 쓰지 않는 것으로 강정하였다.
재궁의 덮개에 틈이 있었다. 장생전 제조(長生殿提調) 판서 이상길(李尙吉), 참판 윤흔(尹昕)을 잡아다 추문하도록 명하였다.
대렴(大斂)을 하였다. 세자가 비로소 풀었던 머리를 다시 묶었다.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삼끈으로 상투를 묶는 한 절차는 마땅히 소렴의주(小斂儀註)에 들어가야 하는데, 바쁜 가운데 미처 아뢰지를 못하여 세자로 하여금 제때에 예를 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2월 14일 경인
성복하였다. 백관이 대전(大殿)과 세자궁(世子宮)에 위안을 드렸다.
상이 복제 가운데 지팡이를 짚는 예가 없는 것을 예조에 물으니, 예조가 아뢰기를,
"아내의 상에 지팡이를 짚는 것은 주자(朱子)가 정한 예절입니다. 그러나 선조께서 경자년062) 에 내상(內喪)을 당하여 예를 의논할 때 일을 담당한 신하가 품재(稟裁)한 적이 없었으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옛문서를 가만히 상고해 보니, 소헌 왕후(昭憲王后) 상에도 이 예(例)를 따랐기 때문에, 신 등이 감히 지팡이 짚는 의절을 의주(儀註) 가운데 넣지 못했습니다. 삼가 상의 하교를 기다립니다. "
하니, 답하기를,
"그때의 내관(內官)에게 물으니, 선왕께서도 지팡이를 짚는 의절을 거행했다고 한다. "
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가례(家禮)》 장기(杖期) 조목에 ‘남편이 아내를 위해 지팡이를 짚는데, 부모가 계시면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 ’ 하였으니, 이는 주자가 정한 예입니다. 선왕 때 등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상께서부터 단연코 실행하시어 훗날의 법이 되게 하시면, 매우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 뒤쫓아 행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5일 신묘
예조가 아뢰기를,
"전하의 복이 끝나기 전, 백관이 궁궐을 출입할 때 착용할 복색은 백의·오사모·오각대로 할 것을 이미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참고하여 상량해 보니, 상께서 바야흐로 최질을 입고 계신데 백관이 오사모와 흰옷 차림으로 궁궐 안을 출입하는 것은, 예제(禮制)로 헤아려 볼 때 정말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전하께서 12일 최복을 벗기 이전에는 백관도 그대로 최복을 착용하고, 12일 뒤에 비로소 오사모와 흰옷을 착용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 듯합니다. 이것이 《오례의》에 실려 있다고는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모두 변통의 도리가 없을 수 없겠다고 하니, 이로써 준행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이와 같으나, 《오례의》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
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실려 있는 것은 상께서 백단령(白團領), 생마포로 만든 띠로 성복을 하셨기에 백관의 복색도 오사모·흰띠로 정해 시행한 것입니다. 지금은 상께서 선왕이 경자년063) 에 최복을 입으신 예에 따르고 계신데, 군신들만 《오례의》에 따라 거행하고 있습니다. 고금의 제도가 다르고 경중(輕重)이 서로 어긋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더욱 민망스럽고 답답하여 감히 번독스럽게 다시 아룁니다. "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12월 16일 임진
예조가 아뢰기를,
"성절(聖節) 망궐례(望闕禮)가 상이 복을 벗기 전에 있습니다. 그 권도(權道)와 경상(經常) 사이에 반드시 적절한 예가 있을 듯하나 쉽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례의》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시호를 받거나 조문을 받거나 부의(賻儀)를 받으려 마중할 때 악기를 모두 진설하지만 연주는 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에 근거해 예를 시행함이 합당할 듯한데, 어떤 사람은 시호나 조문이나 부의는 모두 상사(喪事)에 관계되는 것이니, 악기를 연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번 만수절(萬壽節)에 축하하는 예는 상께서 중국을 받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만두고 거행하지 않는 것도 온당하지 못할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
하였다. 윤방과 오윤겸 등이 의논드리기를,
"《세종실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원경 왕후(元敬王后) 기년 중에 무릇 망궐례를 행하거나 진하할 때 춤을 제거하고, 악기는 진열만 해 놓고 연주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내상은 선후(先后)의 상과는 다르나 12일 전이라 전하께서 아직 최복을 입고 계시니, 이번에 춤을 제거하고 악기는 진열만 해 놓고 연주는 하지 않는 것이 인정과 예절에 합당할 듯합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7일 계사
대사헌 김상헌(金尙憲), 지평 박서(朴遾)·송희진(宋希進) 등이 아뢰기를,
"외척의 신하가 궁궐에 드나들면서 내상의 염습을 하는 데 참여한 일은 예에 합당하지 않으며, 또 후세에 보여 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을 논계하려 하였으나, 일이 급해서 감히 요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론을 듣건대 대부분 대신(臺臣)들이 논계하지 않은 것을 그르다고 합니다. 체척하라 명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무릇 일에는 경상과 권도가 있으니, 친족들이 들어와 염을 한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
하였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설사 시비와 당부(當否)를 논하는 사람이 있어도, 경상과 권도로 참작해 볼 때 그 잘못이 보이지 않으니, 출사하라 명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이홍주가 이해창의 비방을 받았다고 상소하여 스스로 자신의 일을 열거하고, 해창이 말한 서자의 신분으로 변방의 장수가 된 2인과 한곳에서 사실을 조사 규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자세히 알았다. 실정과 다른 말을 마음 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으니, 경은 마땅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
하였다. 홍주가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신 및 육조의 판서·참판, 관각 당상(館閣堂上)을 명초(命招)하여 대행 왕비의 시호·능호(陵號)·전호(殿號)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시호를 인열(仁烈)이라 하였는데,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施仁服義]을 인(仁)이라 하고,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有功安民]을 열(烈)이라 한다. 능호는 장릉(長陵), 전호는 숙령(肅寧)이라 하였다. 애초에 상이 명헌(明憲)을 왕후의 시호로 하고자 하여 대신에게 물으니, 대신들이 모두 상의 분부와 같이 하기를 청하였다. 뒤에 대사헌 김상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시호를 짓는 것은 담당 관원의 일이므로 군주의 의향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국장 도감(國葬都監)이 아뢰기를,
"《오례의》에는 죽안마(竹鞍馬)·청수 안마(靑繡鞍馬)·홍수 안마(紅繡鞍馬)가 각 10필씩인데, 경자년064) 과 임신년065) 상에는 모두 줄여서 4필을 썼습니다. 이제 이에 따라 거행해야겠습니다마는 《오례의》와 다소 차이가 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
하니, 상이 경자년의 예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일본과 우리 나라 문서에는 으레 명(明)의 연호를 썼고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예조를 ‘합하(閤下)’라고 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관백(關白)이 승려 인서당(璘書堂)을 대마도에 보내 문서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그가 명의 연호를 쓰지 않으면서 ‘일본은 명나라의 신하가 아니니, 그 연호를 쓸 수가 없다. ’ 하고 이어 서식을 바꾸었으며, 예조를 ‘족하(足下)’라 부르면서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나라이므로 대마도 역시 예조와 동등하니 합하라고 할 수가 없다. ’ 하였다. 상이 예(例)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그 문서를 받지 않으려 하자, 묘당의 신하들이 틈이 생길까 염려하여 멀리 있는 오랑캐와 자잘한 예절을 다툴 것이 없다고 힘써 말하여, 끝내 그것을 받았다. 다만 도주에게 족하라는 두 글자는 쓰지 않도록 하였다.
12월 18일 갑오
예조가 아뢰기를,
"앞으로 있을 병자년 식년시는 비록 대비과(大比科)이지만, 그 초시를 국휼의 졸곡이 끝나기도 전에 보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날을 골라서 거행하소서. "
하고, 또 아뢰기를,
"국휼 때 제도의 감사들은 모두 향을 올리고, 발인할 때는 또 회장(會葬)을 하는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방백의 무거운 책임을 오래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 전부터 국휼 때에는 단지 경기 감사와 개성 유수만 와서 참여하게 하고 제도와 강화는 모두 도사(都事)나 또는 품계가 높은 수령 및 차관(次官)이 대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이에 따라 알려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상이 정원·홍문관·예문관에 꿩·멧돼지 등의 물건을 내렸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 등이 방금 초상을 당해 최복을 입고 있는데, 예(例)에 따라 받는 것은 마음과 예에 있어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납일(臘日)의 약물(藥物)이니,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
하였다.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면서 성중의 민가에 벼락이 쳤다.
경상도 산음현(山陰縣)에 크게 천둥이 치고 많은 비가 내렸다. 그리고 고목과 민가에 벼락이 쳤다.
12월 20일 병신
헌부가 아뢰기를,
"3년상은 처음 죽은 날부터 계산하여 27개월에 이르러 복을 벗기 때문에 후세에 1일을 1개월로 쳐서 복을 입는 제도를 만들면서도 처음 죽은 날로부터 계산하여 27일이 된 뒤에 복을 벗습니다. 삼가 예조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상이 자최복을 벗는 날이 이달 26일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성복(成服)한 날부터 계산한 것 같은데 이미 고례(古禮)가 아니고 또 오늘날의 제도와도 어긋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신 등이 삼가 듣건대, 대행 왕비 초상에 소렴을 한 뒤에 왕세자가 해야 할 예절이 있었는데, 해조가 의주(儀註)를 올리지 않아 시기를 놓쳐 거행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예조 당상을 추고하고, 해당 낭청은 파직하소서. 시강원의 관원들 역시 불찰의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추고하소서.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중국에서는 가정(嘉靖)066) 27년 효열 황후(孝烈皇后)의 상에, 성복한 날 상이 비로소 흰관과 흰옷을 착용했다가 12일만에 복을 벗었다는 것이 《회전(會典)》 가운데 있으니, 경자년067) 국상 때 위에서 복을 벗으신 것을 성복한 날로부터 계산한 것도 필시 여기에 근거한 것이지 한때 억견으로 정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신의 부서에서는 다만 성헌(成憲)을 준수해야겠습니다만 대간이 계사한 뜻도 범연한 것은 아닌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
하였는데, 영의정 윤방(尹昉)이 예조의 회계가 옳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1일 정유
사서(司書) 김익희(金益熙)가 상소하기를,
"삼가 들으니, 오늘 대행 왕비의 상례(喪禮)는 예관들이 한결같이 경자년 등록에 따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그때의 등록을 살펴보니, 자못 널리 전례(典禮)를 근거하여 내용과 형식을 다하지 않고 단지 사의(私意)와 억견(臆見)으로 근거 없이 뜯어 맞춘 것이라, 그 뒤집히고 구차한 잘못은 오랫동안 식자들이 한탄하고 애석해 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한때의 잘못된 예(例)를 원용하여 선왕이 정한 예라 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예관들이 감정한 의주(儀註)를 신이 일일이 논변할 틈이 없으나, 그중에 가장 의심스러운 바는 전하의 복제입니다. 무릇 복제는 뚜렷이 일정한 격식이 있어 일호라도 덧붙일 수도 줄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번 최복을 13일간 입고 백의를 30일간 입는 제도는 이미 고례(古禮)가 아니며 또 《오례의》에 실려 있는 바도 아니니, 신은 무엇을 근거로 정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경자년 국상은 창졸간에 생긴 일인 데다가 또 상고할 만한 근례(近例)가 없어서, 예관들이 망연히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오례의》의 ‘복전 복후(服前服後)’라는 말을 보고서야 비로소 전하도 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복을 어떻게 입어야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외람되게 자기의 견해로 13일 복의 제도를 새로 결정한 것이니, 이미 예경(禮經)의 큰 근본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그 뒤에 곧 향산(香山)의 《실록》에 최복 한 조목은 빠지고 단지 흰옷을 13일동안 입는 제도만이 있는 것을 보고는, 신료들이 기복(期服)의 상을 당했을 때 휴가를 주는 규정을 인용하여, 이를 끌어다가 보태고 망령되게 꾸며서, 두 가지를 근거없이 가져다 한 조각으로 만들어 마땅히 시행할 전례를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또 그 잘못을 답습하였으니, 그 부당함이 심합니다.
하물며 최복을 벗는 것은 성복한 날로부터 계산하고 흰옷을 벗는 것은 죽은 날로부터 계산하는데, 예에는 단지 ‘산 사람이 성복이나 기타 의절을 행할 때는 사람이 죽은 그 다음날부터 계산하고 죽은 사람을 빈렴하거나 기타 일을 치를 때는 죽은 날로부터 계산한다. ’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어디에 최복과 흰옷을 벗고 입는 데 각기 다른 날로부터 계산한다는 것이 있습니까. 이는 13일은 너무 가깝기 때문에 늘이고 30일은 약간 멀기 때문에 줄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신은 잠시 전하의 복제에 대하여 경전의 문자 가운데 근거할 만한 것을 몇 조목 취하여 밝혀 보고자 합니다. 《의례(儀禮)》 상복(喪服) 처장기(妻杖期) 조목의 자하(子夏)의 전(傳)에 이르기를 ‘어째서 기년복을 입는가? 아내는 지극히 가깝기 때문이다.’ 하였고, 예문(禮文)에 ‘제후(諸侯)는 방친(旁親)의 기년복은 입어 주지 않지만 그들의 존귀함이 제후와 같으면 복을 낮추어 입지는 않는 것이니, 예를 들면 고모나 자매가 한 나라의 임금에게 시집갔을 때에는 복을 낮추어 입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고모나 자매가 임금에게 시집갔을 때에도 오히려 존귀함이 같다고 하여 복을 낮추어 입지 않는데, 하물며 우리 대행 왕비는 전하와 같이 일체로 함께 종묘 사직을 받들었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남전 여씨(藍田呂氏)068) 의 말에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어머니나 아내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지만, 본래는 3년상으로 다만 아버지와 남편을 위해서 줄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최 기년복이 다른 상과 다른 점이 세 가지가 있으니, 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는 점이 첫째이고, 11개월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만에 상제(祥祭)를 지내고 15개월만에 담제(禫祭)를 지내는 점이 둘째이고, 남편이 반드시 3년이 지난 뒤에 아내를 취하는 것이 세째이니, 이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주 목후(周穆后)가 죽었는데, 숙향(叔向)이 ‘왕이 3년상 중에 있다. ’ 하였습니다. 대개 지팡이를 짚고 상차(喪次)에 나아가며 상제가 있고 담제가 있으니, 이름은 기년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3년상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선왕의 법도가 세밀하게 갖추어져 있어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13일의 복이 강복한 것이 아니라 상기(喪期)를 줄이기 위해 일수를 달수로 대체한 제도일 뿐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복을 낮추어 입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실은 복을 낮추어 입는 것보다 심한 것입니다. 대저 3천 3백의 예가 어느 것이나 하늘이 펴서 정한 윤리나 하늘이 규정한 질서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선왕의 신중하신 뜻은 특히 상례(喪禮)에 더욱 조심스럽게 하셨으니, 대개 사상(死喪)의 변은 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있어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박(厚薄)의 등급과 증감(增減)의 절차는 마치 천지의 경위(經緯)와 같아서 어지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상기(喪期)를 줄인 뒤로 선왕의 제도가 일체 무너졌으니, 천하와 후세에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본조의 상례는 가장 잘 삼대(三代)가 남긴 뜻을 얻어 오랫동안 구차하게 얽매였던 폐단을 뛰어넘고 백왕(百王)의 쇠박한 기풍을 혁신하여, 심지어는 외조 부모(外祖父母)나 왕비 부모(王妃父母)의 상에까지도 정의와 예절을 펴게 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독 내상(內喪)에만 근거도 없는 잘못된 후세의 예(例)를 답습하여 선왕의 바꿀 수 없는 정전(正典)을 버리고 있으니, 신은 저으기 애석하게 여깁니다.
대체로 아내의 상과 부모의 상은 자연 구별이 있으나, 상기를 줄이면 은의(恩義)에 각박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고 능소(陵所)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13일 뒤에 갑자기 최복을 벗고 30일 뒤에는 문득 길복(吉服)을 입는다면, 이른바 지친의 의리는 어디에 있으며, 또 전하의 동반하신 정리에도 매우 미안스러운 점이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신이 또 경자년 등록을 상고해 보니, 무릇 상사나 제사에 관계된 일은 세자가 모두 주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전하가 상주가 되고 세자가 대신 행한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세자가 상주가 되고 전하는 참여하지 않으신다면 이 또한 대단히 미안한 일입니다. 주자(朱子)의 말에 ‘무릇 제사에 아버지가 있으면 아버지가 상주가 된다.’ 하였으니, 자식이 상사를 주관하는 예는 없습니다. 복문(服問)에 ‘임금이 주관하는 상사는 부인처(夫人妻)·태자(太子)·적부(適婦)이다.’ 하였는데, 해석하기를 ‘부인이란 임금의 적처(適妻)이기 때문에 부인처라 한다. 세 사람은 모두 정통이기 때문에 임금이 그들의 상을 주관한다.’ 하였습니다. 이를 근거해 보건대, 어떻게 전하께서 오늘의 상을 주관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세자 또한 어떻게 감히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자하의 전(傳)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를 위해서 왜 기년복만 입는가? 굽힌 것이다.’ 하였으니, 지극히 높은 분이 있으면 감히 그 사사로운 높임을 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도 오히려 제대로 펴지 못하는데, 하물며 감히 그 상을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大夫)나 사(士)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가문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임금의 존귀함이 있고 아버지의 엄하심이 있으니, 그에 눌려 사정을 굽히는 뜻이 어찌 사대부 집안과 만만배의 차이만 나겠습니까.
아, 예경(禮經)을 강론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세상에 예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경자년에 한번 잘못되자 드디어 구례(舊例)로 인식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다시 잘못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선조(先朝)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상 때, 졸곡 뒤의 복색은 《오례의》에 근거하여 현관(玄冠)·오대(烏帶)의 제도를 썼었습니다. 그런데 지평 민순(閔純)이 상소하여 송 효종(宋孝宗)이 흰 의관(衣冠)을 착용하고 정사를 보았던 예에 따르기를 청하고, 그때 재상 박순(朴淳)·노수신(盧守愼)과 부제학 이이(李珥) 및 신의 증조부인 대사헌 김계휘(金繼輝)도 이 의논에 일치되자, 선조 대왕이 즉시 윤허하고 따르셨는데, 지금까지 미담이 되고 있습니다.
대저 《오례의》에 실려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로 변통해야 할 것이라면 또한 그 당시 왕자(王者)가 정한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경자년에 예관들이 근거 없이 주워 모은 등록이겠습니까. 무릇 예는 한번 정해진 뒤에는 다시 고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아 이미 입고 있는 최복에다 날수나 달수만 늘이는 것에 불과하여 심력이 들지 않는데다가 처음에 잘못되었던 것을 나중에 좋게 하는 아름다움 또한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 성복하시던 날 예관이 지팡이를 짚는 한 절목을 빠뜨리자, 전하께서 의심하시고 대신과 의논하여 추가로 지팡이를 짚는 의절을 시행하였다 하니, 신은 이에 전하께서 예를 좋아하고 옛날을 좋아하시는 성대한 뜻을 우러러 흠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인하여 예(禮)의 전체(全體)를 추구하여 모두 선왕의 제도를 따르고 한번 전대(前代)의 비루함을 씻어서 후대 성인의 성헌(成憲)을 만들지 않으십니까?
신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거듭 예관에게 명하여 널리 여러 의견을 모아서 상제(喪祭) 가운데 개정해야 할 것은 속히 처리하시고, 상을 주관하는 한 조목에 이르러서는 과연 신이 의심한 바와 같다면 역시 변통함으로써 극진하지 못했다는 기롱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본래 학문에 미숙하고 예경(禮經)에도 어두운 사람으로 큰일을 시작할 때 마침 궁료(宮僚)의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들으니, 왕세자가 웃옷의 왼쪽 소매를 벗고 머리를 묶는 예에 다 그 절차를 잃었는데도 미처 바로잡지 못하여 안으로는 본심에 부끄럽고 밖으로는 여론의 비난을 초래했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야 마땅합니다. "
하니, 답하기를,
"소의 글은 마땅히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
하였다.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경자년 등록은 선왕께서 이미 시행하신 예이므로 지금 고칠 수가 없습니다. "
하니, 상이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 역시 예관의 말을 옳게 여겼으므로, 드디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12월 23일 기해
국상으로 인하여 연례 행사인 춘첩 영상시(春帖迎祥詩)를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5일 신축
대사헌 김상헌, 지평 박서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하늘이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의지할 바를 잃고 대소 관원이 낙심을 하고 있는데, 천변의 위세가 그치지 않고 갈수록 견고(譴告)가 더욱 심해져 우레가 갑자기 일어나고 사특한 무지개가 해를 범하고 어두운 안개가 한낮에도 자욱하므로 유언 비어가 자주 난무하고 있으니,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이 조석에 닥칠 것 같습니다. 신 등이 언론을 맡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관직을 광폐(曠廢)하여 우리 전하로 하여금 아랫백성들의 실정을 통하지 못하게 하고 과실을 듣지 못하게 하여, 정령(政令)이 많이 어긋나고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여 하늘의 노여움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 등이 잘못한 것이니, 죽음인들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신들의 죄를 바로잡아 신하로서 말하지 않고 녹만 축내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도 척연히 경계하시어 실덕을 힘써 닦아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대저 하늘을 감동시키는 도리는 비록 경덕(敬德)으로 근본을 삼고 있으나, 한마디 말과 한가지 일이 천리(天理)에 합하고 민심에 순응하는 것 역시 다 그 방법입니다. 신 등이 삼가 들으니, 대상(大喪)에 쓰는 옷가지·이불·묶는 띠 등의 물건을 모두 시정 백성에게서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런 예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국가에서 상방원(尙方院)을 두어 궁내의 길흉사(吉凶事)에 비용을 대게 했으니 마땅히 대비해 둔 도구가 있을 터인데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시정 백성만 실망하는 데 그치겠습니까. 왕제(王制)의 본의와 크게 다른 것입니다. 하물며 평소에 올리는 의복은 모두 토산품인 주포(紬布)를 쓰고 있는데, 염습할 때 옷가지는 어째서 유독 구하기 어려운 중국 물건으로 모두 사용하는 것입니까?
현재 국사가 혼란하여 백성의 힘이 이미 고갈되었으니, 변통하는 조치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간소함을 따르기에 힘쓰도록 하고, 또 상방원에 명하여 불시에 쓸 것을 미리 갖추게 하여 길이 훗날의 법도로 남겨 주면, 성덕(盛德)도 더욱 빛날 것이고 실로 소대(昭代)를 이을 만한 좋은 법이 될 것입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장릉(章陵)069) 의 봉분을 다시 만들고 목릉(穆陵)070) 을 옮기고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신주를 겨우 종묘에다 모셨는데, 이번 상이 잇달아 생겨나 백성들의 역역(力役)과 세금을 내는 수가 한량이 없습니다. 비록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을 알지만, 불쌍하게도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지 못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감히 우러러 청할 수 없는 점이 있지만, 상께서 특별히 측은한 분부를 내리셔서 국장(國葬)과 산릉(山陵)을 담당한 두 기구의 여러 일들을 힘써 적절히 하고 사치스럽고 거창하게 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게 하여 한 푼이라도 줄여서 절약하면 은혜를 입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외의 곤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더욱 우리 전하께서 진휼(軫恤)하시는 성덕(盛德)에 감격하게 하시면, 이 어찌 천의(天意)에 합하고 민심에 따라서 재변을 그치게 하는 데 일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요즈음 말하는 사람마다 남쪽 왜국과 서쪽 오랑캐가 걱정된다고 하지만, 예로부터 변고는 뜻밖의 곳에서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임금이 두려운 것은 백성의 소리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국가에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받들어 시행하는 신하들이 잘 처리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속으로 원망과 노여움을 품고서도 감히 드러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난리가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분분히 일어나 괴이한 일을 들으면 과장하여 서로 선동하고 있으니, 민심의 동요는 적국보다 더 무섭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경계하고 경계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서 진술한 말들은 마땅히 두렵게 생각하고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
하였다.
평안도 강서(江西)·용강(龍岡) 등의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아 건물의 기와가 흔들렸다. 예조가 해괴제(解怪祭)를 도내에서 지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서(李曙)를 병조 판서로, 한형길(韓亨吉)을 동부승지로, 김경여(金慶餘)를 이조 정랑으로, 홍익한(洪翼漢)·송희진(宋希進)을 장령으로, 박종부(朴宗阜)·채충원(蔡忠元)을 정언으로, 정태화(鄭太和)를 부응교로, 김수익(金壽翼)을 부교리로, 심즙(沈諿)을 공조 판서로, 이행우(李行遇)를 지평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수찬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부수찬으로, 홍명구(洪命耉)를 평안 감사로 삼았다.
12월 26일 임인
상이 최복을 벗었는데, 성복한 후 12일이었다. 백관이 봉위례(奉慰禮)를 거행하였다. 이로부터 백관이 백의·오사모·흑각대를 착용하고 궁궐을 출입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산릉의 역군(役軍) 숫자는 일체 등록에 따라야겠으나, 다만 제도(諸道)의 수군(水軍) 7백 인 역시 선발된 인원 가운데 끼어 있습니다. 수군의 일은 그 고통이 만 배나 되는데, 또 때없이 뽑아서 쓰는 것이 잘못된 사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물며 봄이 되어 해안의 방비를 해야 할 날이 닥쳤으니, 더욱 이것을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군 7백 인 가운데 4백 인은 각도의 연호군(烟戶軍)으로 대체하여 정하고, 3백 인은 각도의 승군(僧軍)으로 첨가하여 정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
하고, 또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석물(石物)을 건원릉(健元陵)071) 의 예에 의해 만들면 역군(役軍)을 많이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산릉 도감(山陵都監)으로 하여금 다시 참작하여 줄이도록 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7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동부승지 한형길(韓亨吉)은 본래 인망이 없고 또 이력도 부족하니, 체직하라 명하소서. "
하였는데, 재차 아뢰자 따랐다.
봉보 부인(奉保夫人) 응옥(應玉)을 강령(康翎)에 유배하였다. 응옥은 상의 보모(保母)이다. 대군이 처음 태어났을 때 보호를 잘하지 못하여 끝내 죽게 하였고 이로 인해 대행 왕비가 놀라 죽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본 고을로 하여금 양식과 반찬을 매달 내려주게 하였다.
12월 30일 병오
상이 승지 최연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를 적간하여 가벼운 죄인 10인을 석방하게 하였는데, 신정(新正)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전라도 함열현(咸悅縣)에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고목에 벼락이 쳤는데, 불이 저절로 일어나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병조 판서 이서(李曙)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무신이 병조의 장관이 된 것은 근래에 없던 일이며, 신과 같이 못난 사람은 결단코 외람되이 있을 수 없습니다. "
하니, 답하기를,
"경의 재능으로 이제서야 이 직책을 받은 것은 역시 늦었다고 할 것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빨리 직무를 살피라. "
하였다.
금나라 차인 마부대(馬夫大)가 왔으나, 상이 새로 내상(內喪)을 당했다는 이유로 불러 보지 않았다. 마부대가 올린 국서(國書)에,
"왕이 보낸 편지를 보니, 하늘을 두고 맹서한다고 말하였소. 그러나 내 생각에는 우리 두 나라가 우호를 맺은 이래 귀국(貴國)에서 백성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 우리 국경에 들어와 해를 주었지, 우리 백성이 언제 지난 약속을 어기고 귀국 땅에 들어가 해를 끼친 적이 있었소? 귀국의 백성들이 또 우리 동쪽 변방에 도피하여 사는 백성들과 사사로이 모피를 무역했지, 우리 백성 중에 일찍이 이처럼 사사로이 장사를 하는 자가 있었소? 하늘을 두고 맹서한다는 말은 내가 말한다면 괜찮지만 왕이 말해서는 안 되오.
정리(情理)로 논한다면, 왕은 ‘형(兄)인 한(汗)이 하늘의 돌보심을 받아 출병(出兵)할 때마다 적들이 흩어져 달아나고 이르는 곳마다 이기지 못한 적이 없구나.’ 하고 여겨야 할 것이오. 공(孔)·경(耿)·상(尙) 세 장수가 바다를 건너 귀부해 왔고, 또 동북 바닷가의 국가도 항복하여 병사 만여 인이 늘었으며, 몽고 삽한(揷漢)072) 의 한(汗)의 태후(太后)가 태자(太子) 공아라(空俄羅) 및 온 나라의 병사와 백성을 모두 이끌고 귀의해 왔소. 그래서 서북 천하의 반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여 위력이 더해 날로 융성하니, 바야흐로 경사를 기뻐하고 축하하여 극진히 공경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어째서 왕은 지난날 보내던 글에서는 모두 ‘봉(奉)’자를 쓰더니, 근년에는 봉자를 쓰지 않고 단지 ‘치(致)’자만을 쓰는 것이오? 이는 나를 미미하게 여겨서 왕이 나를 가볍게 여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오?
왕이 보낸 글에 또 ‘당초 형제의 의리를 맺어 하늘에 맹서하고 우호를 다짐할 때에는 원래 폐백을 주는 것으로 중히 여기지 않기로 하였는데,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으나, 예물에 관한 일은 귀국 사신이 왔을 때 이미 여러 번 말하였고, 지난번 편지에서도 누차 말하였는데, 왜 내가 지금 갑자기 이 말을 끄집어냈다고 하는 것이오? 인삼(人蔘) 값을 처음에는 한 근에 16냥으로 쳤는데, 왕이 거짓으로 명나라에서는 쓰지 않는다고 속여 값을 9냥까지 깎았소. 또 ‘해마다 보내는 물품이 약소한 것 같으나, 우리 나라로서는 이미 남은 힘이 없다. ’ 하였는데, 지난번 철산(鐵山)의 한인(漢人)을 잡아서 물어보니 ‘평도(平島)에 주둔하는 병사들에게 왕이 요선(遼船) 50척을 주고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쌀 2만 6천 포를 보조하며, 근당 삼 값은 20냥이다. ’ 하였소. 왕이 보낸 글에 또 ‘흑운룡(黑雲龍)이 참소를 한 뒤로 매번 시장에 좋은 재화(財貨)를 반출하는 것을 막고 있다. ’ 하였는데, 지난번 왕이 명나라에 보낸 배가 바다에서 우리 나라 국경에 표류하였을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물에 빠진 비단을 건져서 살펴보니, 물에 젖어서 썩었으나 모두 좋은 재화였소. 왕의 말이 마음과 다르고 마음이 행동과 달라서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오. 이 점을 왕은 알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무역에 관한 일은 모두 사신이 구두로 전할 것이오. "
하였다. 또 별지(別紙)에,
"명나라의 신하들이 임금을 속인 일에 대해 내가 대략 왕을 위해 말하겠소. 지난해 우리 병사가 선부(宣府)·대동(大同)를 침입하여 성을 공격하고 고을을 도륙해서 들판이 텅 비었는데도, 명나라 장수가 일찍이 한 사람도 감히 나와서 싸우는 자가 없었소. 내가 일찍이 명나라를 공격하여 한인(漢人)을 사로잡아 모두 머리를 깎게 했는데, 그 한인들이 집이 그리워 도망쳐 돌아갈 때마다 명나라 관리가 도리어 사람을 시켜 그들의 목을 베고 공을 세웠다고 보고하였소. 이와 같이 죄 없는 사람의 머리를 베어 임금을 속이는데도 임금은 그것을 믿고서 좋아하니, 나는 이런 나쁜 자를 누가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소. 이는 임금은 속이는 것 중에서도 큰 것이니, 나머지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소? 왕은 명나라의 국운(國運)이 쇠퇴하지 않고 길이 바뀌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명나라가 기울어 무너질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하오. 단지 보이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속이고 임금은 신하를 의심하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왕래하고 참소와 간사함이 성하며, 도적이 봉기하여 여기저기에서 소요가 일고 있으나 숭정제(崇禎帝)가 탕평(蕩平)하지 못하고 매번 군대가 패하고 장수를 잃고 있소. 우리 병사가 또 이 틈을 타서 서쪽으로 가고 있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도와서 명나라를 뒤엎고 있는 것이오. "
하였다. 우리 나라가 보낸 답서(答書)에,
"행인(行人)이 재차 와서 멀리서나마 근황이 좋으시다는 것을 살피고 나니 매우 위안이 됩니다. 보낸 글의 말뜻은 모두 옳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실정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계신 것이 있기에 대략 말하고자 합니다.
귀국이 백전 백승(百戰百勝)하는 군사를 철수하고 양국의 우호를 열었으니, 우리 나라의 군신이 어찌 귀국의 큰 은혜를 모르겠습니까. 하물며 귀국은 요즈음 병세(兵勢)가 더욱 떨쳐 가는 곳마다 적이 없고, 몽고의 여러 종족을 통일하여 하나로 만들어 위세가 대막(大漠) 밖에까지 떨치고 있다는 점은 우리 나라도 아는 바이니, 감히 터럭만큼이라도 귀국을 경시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위에서 하늘이 실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치(致)’자와 ‘봉(奉)’자는 모두 이웃 나라끼리 서로 존경하는 데 쓰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앞뒤로 보낸 편지를 점검해 보니, 귀국의 글에도 봉자를 쓴 때가 있었고 보면 우리 나라가 어찌 이 한 글자를 아끼겠습니까. 요즈음 이렇게 쓴 것은 무심히 하다가 그렇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을 보니 참으로 매우 두렵습니다.
인삼값의 다소는 단지 두 나라 사람들이 값어치를 따져 사고 파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억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아는 일도 아닙니다. 대개 상거래의 도리는 이익을 남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피도(皮島)와 귀국에서 그 값이 서로 비슷하다면, 상인 가운데 누가 기꺼이 가져다가 팔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말씀하신 판매하는 값이 20냥이라는 것은 결단코 이럴 리가 없습니다. 피도는 우리 나라 국경 부근에 있어서 우리 변방 백성들이 적지 않게 괴로움을 받고 있으며, 곡식을 실은 배가 그들에게 팔기를 강요당한 일에 있어서는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2만 포를 보조했다느니 50척을 주었다는 것은 본래 이런 일이 없으니, 중국 사람들의 황당한 말이야 한이 있겠습니까. 귀국에서는 어찌하여 일개 무뢰한의 종잡을 수 없는 말로 인하여 갑자기 형제의 나라를 의심하는 것입니까.
중국에서 좋은 재화를 반출하는 것을 막는 법이 요즈음 더욱 엄밀해졌는데, 그 사이에 혹 간사한 상인들이 몰래 가져다가 파는 자가 있고, 또 혹 귀국에다가 파는 자도 있습니다. 보낸 글에 이 일로 우리 나라가 좋은 재화를 인색하게 아낀다고 의심한 것 같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당초 하늘에 고하고 맹세할 때는 오로지 신의(信義)를 소중히 여기고 전혀 예폐(禮幣)의 다소는 따지지 않기로 하였는데, 지난해 소도리(所道里)가 왔을 때 귀국에서 제시한 물목(物目)에 금은(金銀)과 궁각(弓角)을 제외하고도 그밖에 토산물이 너무나 엄청나 진실로 우리 나라에서 판출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 오가면서 조정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귀국의 승낙을 받아 우리 사신과 귀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맞대어 약속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나라는 실로 이를 믿고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할 것으로 여겼으므로, 보내온 글에 말한 것은 단지 괜히 해본 말이려니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일부러 보낸 사신에게 책망을 받고 보니, 우리가 만약 한결같이 고집한다면, 귀국이 우리 나라의 재력이 이미 고갈된 것은 모르고 도리어 우리 나라가 형제의 의리를 가볍게 여긴다고 할까 두렵기 때문에 다시 재정을 담당한 신하와 별도로 조정하여 더 증가한 수목(數目)으로 온 사신과 협상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말씀하신 원래 수량에는 미달되오나, 우리에게는 다시금 남은 힘이 없으니, 내가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귀국의 호의를 받들고자 하는 것이 여기에서 다하였습니다.
북쪽 백성들이 사사로이 장사하는 것은 우리 나라가 본래부터 통렬히 금지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벌로 사형까지 시키고 있으므로 요즈음 이 폐단이 약간 줄었습니다. 다만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캐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내가 진실로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시 거듭 엄하게 단속하여 반드시 통렬하게 끊고야 말겠으니, 잠시 용서해 주면 다행이겠습니다. 개시(開市) 무역에 관한 한 문제는 실로 난처한 점이 있는데, 그 내용은 온 사신이 자세히 알고 갈 것입니다. "
하였다. 이어 은밀히 마호(馬胡)에게 뇌물을 주어 삼을 캐다가 붙잡혀 간 우리 백성들을 돌려 보내도록 주선하게 하였다.
박동량(朴東亮)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동량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등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는데, 대신 윤방(尹昉)·오윤겸(吳允謙)·김류·김상용(金尙容) 등은 의논을 올려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고, 정언 이해창(李海昌)은 그 불가함을 논하다가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였다.
"선왕이 일곱 신하에게 유교(遺敎)를 내려 그들로 하여금 대군(大君)을 보호하게 하였으니073) , 일곱 신하의 처지로는 비록 감히 드러나게 구호는 못할망정, 그에게 해가 되는 말은 의리상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감히 난언(亂言)을 해서 광해군으로 하여금 듣기 좋게 했으니, 그의 마음에 얽어 모함하려는 계책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목숨이 아까워서 임금을 잊어버린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32권, 인조 14년 1636년 2월 (0) | 2025.12.31 |
|---|---|
| 인조실록32권, 인조 14년 1636년 1월 (0) | 2025.12.31 |
|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11월 (0) | 2025.12.31 |
|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10월 (2) | 2025.12.31 |
|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1635년 9월 (0) | 2025.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