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정미
상이 병환이 있어 정월 초하루 아침의 망궐례(望闕禮)를 정지하였다.
1월 2일 무신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여러 능(陵)에 가 살펴본 뒤에 들어와서 영릉(英陵)이 있는 홍제동(弘濟洞)에 쓸 만하다고 하자, 상이 홍제동은 서울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다시 가서 살펴 가리게 하고, 이어 환관 서후행(徐後行)에게 홍서봉을 따라가도록 명하였다. 산릉 자리를 가릴 때 환관이 함께 가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월 3일 기유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병석에 눕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또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이경여(李敬輿)를 좌부승지로, 권령(權坽)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4일 경술
경상도 산음현(山陰縣)에서 고목(古木)에 벼락이 쳤고, 또 민가에 쌓아 놓은 풀더미에 벼락이 쳤다.
예조가 전의 국상(國喪) 때의 예에 의하여 춘향 대제(春享大祭)를 행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인열 왕후(仁烈王后)가 아직 빈전(殯殿)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1월 5일 신해
우부승지 이경여가 아뢰기를,
"《예경(禮經)》에 ‘죽은 자를 보내면서 산 자처럼 대우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죽은 자를 보내면서 아주 죽은 자로 대우하는 것도 어질지 못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릇 초상에 있어 장사지내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살아 있는 자에게 하는 예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대체로 성인(聖人)이, 효자가 차마 그 어버이가 돌아가셨다고 여기지 못하는 마음을 깊이 생각한 것으로, 의장(儀章)의 도수와 형식적인 자질구레한 예에 이르기까지도 신근(愼謹)을 다한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상사에 있어 그 예절이 이와 같다면 신하로서 나라의 상사에 있어서도 어찌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대행 왕비(大行王妃)를 아직 선침(仙寢)001) 에 옮기지 못했고, 몸과 옷에 온기가 채 식지도 않았는데, 중외의 정공(正供)과 아침과 저녁으로 진선(進膳)하는 절차와 옷이나 이불 및 세수하는 도구 등이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백료(百僚)들이 조알(朝謁)하는 막대한 예절에 있어서만은 왕비가 돌아가신 다음날이라 하여 갑자기 정지하여, 원근에서 분주해 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방황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슬픔을 펼 장소가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과 사리에 편안한 바이며 절차와 예문에 결함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예관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전례가 없고 일이 새로운 의를 일으키는 것에 가깝다는 이유로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이경여가 아뢴 말이 자못 깊고 간절하니, 소절(小節)이라 하여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말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본부가 올린 차자의 내용 속에 시호를 논한 한 조목에 대해서는, 시호란 유사가 의논할 일로서 만약 한때의 임금의 뜻에서 나오게 된다면 후세의 논의를 초래하고 후일의 전례를 열어 놓을까 염려됩니다. 지금 대행 왕후의 시호를 조정에서 이미 논의하여 주의(注擬)했다가 하교로 인하여 다른 글자로 고쳤는데, 그때에 상께서 하문하신 것이나 여러 신하들이 순종하여 받든 것이 모두 잘못이었습니다.
삼가 어제 상신(相臣)들이 아뢴 말을 보니, 이미 결정된 호를 다시 의논하기는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의 뜻은 본래 처음에 결정한 시호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인데, 상신들은 그 말을 사용하면서 그 뜻을 반대로 하였으니, 신들은 몹시 의혹됩니다. 천하의 공도(公道)는 오직 시호에 있는 것이므로 아들이나 손자라 할지라도 감히 고치지 못하는 법으로, 이는 성현의 정론이요,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만약 시호를 고치는 예가 오늘에 시작된다면 어찌 후세의 무궁한 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결단을 내려 그대로 처음에 주의한 시호를 사용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사연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다시 낙점하였다."
하였다.
1월 6일 임자
유성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1월 7일 계축
산릉 도감(山陵都監)이 아뢰기를,
"먼 지방의 역군(役軍)을 조발하면 노력과 경비가 백 배는 들 것입니다. 만약 가포(價布)를 거두어 바치게 해서 그것으로 역군을 모집해 부역에 충당한다면 백성의 힘을 조금은 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어서는 임신년의 예에 따라 반은 1인당 포 10필을 거두고 반은 군정을 뽑아 보내게 하되,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서 중간 거리 이하에서는 군정을 발송하게 하고 중간 거리 이상에서는 가포를 거두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산릉 도감이 아뢴 말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8일 갑인
비국이 아뢰기를,
"저번에 대마도가 자체 내에서 혼란이 있음으로 인하여 인정이 두려워하여 먼저 일을 낼 우려가 없지 않아서, 하삼도(下三道)에 산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저축하게 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대마도의 배가 나왔으니 조석간에 변이 생길 우려는 별로 없습니다. 이처럼 국상으로 일이 많은 때를 당하였으니 여러 곳의 산성을 우선 수축하지 말고 후일을 기다려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일이 전도될 듯하니 지금은 우선 버려두라."
하였다.
1월 9일 을묘
상이 복(服)을 벗었다. 백관이 봉위례(奉慰禮)를 행하였다. 이날부터 백관들이 옅은 담색 옷을 입고 궐내에 드나들었다.
상이 왕비를 애도하여 오랫동안 상선(常膳)을 들지 않으니, 약방이 아뢰기를,
"13일이 지난 뒤에는 으레 상선을 드시는 법인데, 본원에서 올리는 낙죽(酪粥)도 올리지 말라고 하시니, 신들은 지나친 일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30일이 이미 지났으니, 음식과 기거의 절차를 마땅히 평상시대로 회복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백관들은 오늘부터 개소(開素)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백관들에게 개소하라는 하교를 재궁(梓宮)002) 이 빈전(殯殿)에 계신 날에 갑자기 내리시니, 성상께서 신하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인정과 예절로 헤아려 보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성명을 거두시고 일체 전례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날짜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개소해도 무방하다."
하였다.
1월 10일 병진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한 언관이 신이 임금의 뜻을 미리 헤아려서 받들어 따르기만 한다고 완석(完席)에서 발론하였다고 하니, 신은 놀랍고 의아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번에 이기발(李起浡)·송몽석(宋夢錫)이 대간이 되어 일을 논의함에 있어 마땅함을 잃었으므로 과연 대간직에 의망하지 않은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옛말에 ‘죄를 더 주고 싶으면 어찌 핑계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는데, 이 다음에는 장차 무엇으로써 죄를 더하려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빨리 신의 관직을 깎아 내어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실정 밖의 말을 서로 따질 필요가 없다.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정언 박종부(朴宗阜)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성구가 정사하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상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을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만 취하려는 것입니다. 이성구는 계해년 이후부터 임금의 총애와 대우를 가장 많이 받고 있으나 아직 한 마디 말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으며, 한 가지 일도 볼 만한 것이 없었기에 신은 진실로 그 사람이 바른 도로 전하를 섬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음에 미쳐서는 또한 그 사람이 성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이 완석에서 발론하여 규핵을 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이 우선 논핵을 정지하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처리하게 하려 하기에, 신이 감히 스스로의 의견만을 옳다고 여기지 않고 그들의 뜻에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성구가 상소한 말을 보니, 전혀 잘못한 바가 없는데도 신이 허위로 꾸며 죄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만약 실지로 그런 말이었다면 신이 논핵한 바는 망령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허다한 과격한 말을 하여 대관과 서로 견주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또 실지로 그런 말이 있다면 비록 소진(蘇秦)·장의(張儀) 같은 변설의 재주가 있더라도 어찌 임금의 뜻을 미리 헤아려 순종하기만 한 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즉시 논계하지 않았으니 이미 나약하게 한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고, 또 성구의 논척을 입었습니다. 빨리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대사간 김덕함(金德諴), 사간 임광(任絖), 헌납 윤구(尹坵), 정언 권령(權坽)이 아뢰기를,
"일을 논하는 법은, 자세하고 신중함을 싫어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총재(冢宰)의 직책은 서관(庶官)과 동일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다시 알아보자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 처리하게 하자고 하기도 하자, 박종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논핵을 정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약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습니다. 나약하게 한 잘못은 신들에게 해당됩니다.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박종부가 말을 듣자마자 규정하고자 한 것은 매우 간관의 체통을 얻은 것이며, 동료들의 의논을 듣고서 우선 논계를 하지 않은 것을 어찌 나약하였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김덕함 등이 다시 알아보고자 한 것은 신중하게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다. 뒤에 덕함 등이 서로 잇따라 사직하여 체직되자, 종부가 다시 이 일을 가지고 인피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체차시켰다.
경상도 대구(大丘) 지방에 큰 황새들이 모여들어 패를 갈라 남북으로 진을 치고 날개를 벌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서로 싸웠다고 한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심한 추위 때문에 경연을 철폐하였는데, 계속하여 국상이 나서 경연을 열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으셨고 봄날이 따뜻해지고 있으니, 경연의 시사(視事)를 내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2일 무오
홍서봉(洪瑞鳳)을 우의정으로, 심즙(沈諿)을 형조 판서로, 김상헌(金尙憲)을 공조 판서로,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이홍주(李弘胄)을 예조 판서로,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이지항(李之恒)을 검열로 삼았다.
우의정 홍서봉이 차자를 올려 우의정을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어 오윤겸(吳允謙)을 대신하여 산릉 총호사로 삼았다.
1월 14일 경신
예조가 아뢰기를,
"이달 15일 묘시에 지하 월식(地下月蝕)003) 을 한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월식이 시작될 때를 당하여 전물(奠物)을 진설해 놓고 백관들이 모여서 곡하는 것은 한뜻으로 경계하고 근신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빈전의 망제(望祭) 시각을 조금 물렸다가 달이 다시 둥글게 되기를 기다려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6일 임술
이조 판서 이성구가, 박종부가 특명으로 체직되었다는 이유로 또 상소하여 사직하자, 참의 박황(朴潢)이 이성구를 위하여 상소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성구가 대석(臺席)에서 있었던 말을 듣고 재차 소장을 올렸는데, 어조가 불평하여 대간과 서로 따지는 것처럼 하였으니, 자못 경사(卿士)로서 자중하는 뜻이 없습니다. 박황과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간여되지 않았는데도 감히 소장을 올려 한편으로는 장관을 위하고 한편으로는 말이 언관을 침해하였으니,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성구와 박황의 함사(緘辭)에 매우 분해하고 성을 내는 말이 있었는데, 상이 모두 내버려 두었다. 이는 대개 박종부가 이성구를 탄핵한 것이 당론(黨論)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다.
정기광(鄭基廣)을 우승지로, 조경(趙絅)을 사간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정언으로 삼았다.
1월 17일 계해
비국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 지난해 각곡(各穀) 2만 5백 13석을 나누어 주었는데,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5천 1백여 석이라고 합니다. 납부하지 않은 중에 더욱 심한 자를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고 납부를 독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8일 갑자
유성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낭성(狼星) 아래로 들어갔다.
1월 19일 을축
심 도독(沈都督)이 포 참장(包參將)을 보내어 상의 안부를 묻고 예폐(禮幣)를 보냈는데, 반을 해조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반드시 세세한 행실을 삼갔으며, 감히 작은 허물이라 하여 스스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하가 간언을 진달함에 있어서 또한 일이 나기 전에 조짐을 막는 것으로 요체로 삼았습니다. 요즘 도독이 선물로 준 것이 있는데, 반은 위에 올리고 반은 아래에 내려 전부를 유사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중국 장관들의 하절 예폐(賀節禮幣)는 저들이 이미 말이 있었으니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겨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생각건대 어리석고 천박한 자들의 상정(常情)으로 어떻게 성상께서 의도하고 계신 바를 알겠습니까. 보고 듣는 사람들이 혹시나 받지 않아야 될 것을 받은 것으로 의심할 경우, 덕을 손상케 됨은 물건의 수량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즉시 유사에게 내어주라고 명하였다. 【 이것은 우부승지 이경여의 계사이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22면
【분류】외교-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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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부가 아뢰기를,
"왕자 경창군(慶昌君) 이주(李珘)는, 지난번 호차(胡差)가 서울에 들어오던 날 호조에서 초피(貂皮)를 사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당치 않은 싼 값에 시장 백성들에게 억지로 사들였다가, 끝내 호조에 바치려는 계획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시장 백성들에게 배로 값을 받고 내주었습니다. 위협하면서 방자한 짓을 한 정상을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일이 사리에 가깝지 않으며 체면이 중하니 경솔하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오윤겸이 졸하였다.
윤겸은 일찍이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종유하였으므로 학업에 자못 연원이 있었으며, 사람됨이 온순하고 청아하고 단정하고 순수하여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다. 혼조(昏朝) 때 신사(信使)로 일본에 들어갔었는데 몸가짐이 간이하고 깨끗하여 왜인들이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조정에 돌아온 지 몇 해가 못 되어 요동 지방이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으므로, 우리 나라 사신들이 등주(登州)·내주(萊州)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들어갔는데, 사신으로 떠났던 두어 무리가 잇따라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러므로 또 사신을 파견하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뇌물을 바치고 면하기를 도모하여 마침내 오윤겸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겸은 꺼리는 안색이 조금도 없이 태연히 길을 떠났다.
계해년에 반정이 되자 제일 먼저 대사헌에 제배되었고, 얼마 안 되어 이조 판서로 옮겼다가 병인년에 드디어 의정에 제배되었다. 청백하고 근신함으로써 몸을 지켰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므로 어진 정승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경국 제세의 재능과 곧은 말을 하는 기풍이 없어서 명성이 정승이 되기 전보다 떨어졌다. 을해년에 능(陵)의 변괴가 생겨 명을 받들고 가서 실태를 살폈는데, 사람들의 말썽이 크게 나자 교외에 나가 대죄(待罪)하였다. 그러자 상이 위로의 유시를 내려 불러 들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임종할 때에 아들에게 명하여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1월 21일 정묘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함흥 본궁(咸興本宮)은 바로 성조(聖祖)의 잠저가 있던 옛터인데, 지금은 원묘(原廟)로서 선비들이 노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세가 강가라서 물결에 패여 나가 표몰될 우려가 있습니다. 남병사 이완(李浣)에게 함흥에서 함께 조련하게 하고 그 길로 힘을 합해 제방을 쌓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부승지 이경여, 동부승지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삼년상에 성복을 하고 나서는 그 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아무 때나 가하다.’ 하였습니다. 왕세자가 진현할 때에 초립(草笠)에 흑대(黑帶)를 착용함을 응당 행해야 할 의주(儀注)로 만든 것은 진실로 압굴(壓屈)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압굴의 예에는 임금이 신하의 상에 임한 것보다 더 엄한 것이 없는데, 주인이 최마(衰麻)의 복식을 변경하지 않고 다만 질(絰)004) ·장(杖)005) 만 제거하니, 이는 참으로 흉복을 변경할 수 없고 지극한 정은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임금 부자의 사이에서만 억지로 탈정(奪情)하고 변복(變服)하게 하여 이미 강복(降服)된 기년 상복마저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리입니까. 세자에게 큰 슬픔을 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반드시 세자를 보심에 슬픔이 계실까 두렵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길사와 흉사는 서로 섞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고구(羔裘)와 현관(玄冠) 차림으로 조문하지 않았던 것은 성인(聖人)이 상을 당한 자에 대해 슬퍼하는 예가 그랬던 것입니다. 타인의 상사에도 길복 차림으로 가지 않는데, 하물며 자최의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의 상사가 같은 궁궐에 초빈(初殯)되어 있는데, 가복(嘉服)을 평시와 똑같이 입을 수 있습니까. 성상의 처지에 있어서는 설혹 하상(下喪)이라고 핑계댈 수 있겠지만 지금 입시하는 군신들에게도 모두 길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압존의 예가 조정의 의식에 관계된다고는 하나, 방상(方喪)의 의리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날짜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선침(仙寢)이 채 식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복장과 조신들의 복식을 평소와 다름이 없게 한다면 마음에 편안하겠으며 예절에 있어 옳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들이 어쩔 줄 모르고 민망해 하면서 반드시 변통을 하여, 선유들이 검은 띠에 붉은 원삼을 입었던 것을 기롱한 것을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자는 ‘당(唐)나라의 제도에는 비록 권제(權制)로 복을 벗더라도 역월(易月)이 지나 계빈(啓殯)이 있을 경우에는 각각 최복(衰服)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예기(禮記)》의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오래 되었는데도 장사지내지 않은 경우에는 마복(麻服)으로 달수를 마치고 복을 벗으면 그만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기년복 이하부터 시마복의 친척까지는 마복을 입다가 달수가 차면 벗는다. 그러나 반드시 그 복을 잘 간직해두고서 장사지낼 때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하께서 권제를 사용하여 복을 벗을지라도 인산(因山)006) 으로 멀리 떠나는 날에는 최복을 입고 상(喪)에 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인정과 예문으로 헤아려 볼 때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행 왕비를 장사지내기 전에 왕세자가 진현할 때의 복색과 전하께서 신하들에게 임어하실 때의 복색 및 발인할 때의 복색, 군신들의 졸곡 전에 입시할 때의 복색에 대해서, 아울러 예조에게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가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윤방, 우의정 홍서봉이 아뢰기를,
"선왕들이 행하신 제도와 예절을 경솔하게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2일 무진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耉),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청대하여 서쪽 지방의 일을 진달하고자 하였다. 상이 불러보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글로 써서 아뢰게 하였다.
우의정 홍서봉이 차자를 올려 대제학을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4일 경오
상이 대신을 보내어 대행 왕비에게 치제하였다.
경상 좌수영을 감만(戡蠻) 【 지명(地名)이다.】 으로 옮겼다. 구영(舊營)은 배를 감춰 둘 곳이 없어서 광풍을 만나면 배가 부서지고 침몰되곤 하였는데, 감만은 지세가 편리하고 좋으며 지키면서 변란을 대비하기에도 구영보다 나았다. 경상 감사 유백증(兪伯曾)이 이런 내용으로 치계하자 조정에서 따른 것이다.
1월 25일 신미
한인급(韓仁及)을 형조 판서로, 윤황(尹煌)을 대사간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사간으로, 이시직(李時稷)을 장령으로, 김중일(金重鎰)을 정언으로, 성이성(成以性)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26일 임신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에서 크고 작은 돌 20여 개가 스스로 자리를 옮겼다.
1월 28일 갑술
간원이 아뢰기를,
"즉위하신 이후로 세 번이나 조사(詔使)를 겪었고 자주 국상을 당했습니다. 금나라 사람들을 책응하는 횟수와 중국 차인(差人)이 억지로 물건을 파는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시정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소득이 없는데도 빌려 쓴다고 하고는 곧바로 값을 갚지 않고 있습니다. 경기 백성들이 받는 폐해에 이르러서도 지금이 더욱 심한 형편입니다. 만일 변통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원성이 날이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 호조에 이미 별도로 마련해 둔 무명 1천여 동이 있으며 선혜청에도 쓰고 남은 쌀 수천 석이 있습니다. 호조의 무명을 내어 시정 백성들에게 빌어 쓴 것을 갚아 주고 선혜청의 쌀을 내어 경기 도내 봉수군의 품삯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요즈음 나라의 형세를 보건대, 날이 갈수록 더욱 어렵고 위태로워져 흙더미가 무너지듯 무너져버릴 걱정이 당장 닥칠 형편입니다. 그런데 경연을 정지하여 그만둔 지가 여러 달이 되어 군국(軍國)의 기무를 상달할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신과 시종신들도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 볼 수 없으니 임금의 대궐이 천리처럼 멀다는 것은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입니다.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아서 옛날의 제왕들은 와내(臥內)에 끌어들여 만나보기도 하고 편전(便殿)에서 일을 주달하게도 하였습니다. 구구한 작은 절차에 구애될 필요가 없이 지금부터는 경연에 자주 나아가시는 한편, 때로는 편전에서 소대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심정을 진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대제학으로, 김수익(金壽翼)을 부교리로 삼았다. 상헌은 문장과 명망이 세상에 추중(推重)을 받는 터여서 제수의 명이 한번 내리자 사림이 흡족하게 여겼다.
선혜청이 나라에 큰 상사가 있어서 경기의 백성들이 산역(山役)에 번거롭다는 이유로 아뢰기를,
"춘등(春等)에 바쳐야 할 수량을 매결당 3두의 쌀을 바치지 말도록 하여 눈앞의 급함을 펴지게 하였다가, 가을 농사의 풍흉을 보아서 수량을 감하거나 아니면 조세(租稅)로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영원히 견감해 주어서 백성의 힘이 펴지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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