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2권, 인조 14년 1636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3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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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정축

안산군(安山郡)에 있는 세 개의 돌이 바닷속에서 옮겨져 왔는데, 그 돌이 지나온 곳에 거의 40여 보(步)나 길이 만들어졌다.

 

2월 3일 무인

상이 국장 도감에 하교하였다.
"대행 왕후는 부드럽고 온순하고 정결하고 조용한 자품을 타고났으며, 인자하고 후덕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덕을 지니고 있었다. 잠저에 있을 때부터 시부모님을 잘 섬기어 정성과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했으며, 나를 동기간처럼 대하여 사친(私親)에게 하는 것보다 더 잘하였다. 그리고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서 훌륭히 여훈(女訓)을 준행하였다. 을묘년007)  에 능창군(綾昌君)의 화가 있을 적에 안팎의 간흉들의 끊임없는 주구(誅求)에 대해 친가(親家)에 없는 것도 번번이 마련해 냈으며, 귀한 보물도 난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에 원종 대왕(元宗大王)께서 왕후의 뜻과 행실을 가상하게 여기시어 그의 어짊을 자주 칭찬하셨다.
반정(反正)할 때에는 걱정스러워하면서 조용히 처리하여 남모르게 도운 공이 많았다. 왕후가 되어서는 자전(慈殿)을 받들어 섬기되 효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고, 좌우의 여종들에게도 성의와 정성을 다하였다. 자전께서 돌아가심에 이르러서는 슬픔과 사모함이 더욱 깊었다. 이는 대개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워 그랬던 것이다. 나를 섬김에 있어서 반드시 공경하고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며, 일에 따라 경계를 해 주었으므로 도움된 바가 많았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반드시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조정의 정사에 대해서는 간여하려 하지 않았고 친정집의 사사로운 일은 일체 말하지 않았으며, 나인(內人)들의 간청에 대해서는 이치로써 설득하여 물리쳤다. 이에 궁위(宮闈)가 엄숙하고 가지런하게 되었다. 심상한 언동이 반드시 법도에 맞도록 삼갔으며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하게 지내고자 하여 화려한 꾸밈새를 좋아하지 않았고, 재산을 모으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질언(疾言)과 욕설을 하지 않았고 겉꾸밈새와 몸단장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외의 친속을 염려해 주고 보살펴 주되 고르게 하였다.
그리고 선왕의 자손들에게는 더욱 지극한 생각을 더했고, 여러 자식을 가르치되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써 타일러 익히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효제와 돈목을 다하도록 하였다. 아랫사람을 부리되 너그럽고 공평하게 하고 엄하면서도 은혜롭게 하였으므로 혼조(昏朝)의 궁인들도 모두 마음으로 굴복하고 사랑으로 떠받들었다.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는 매양 위졸들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염려하여 가끔씩 궤향하는 일이 있었다. 숙의(淑儀) 장씨(張氏)가 들어오자 예로써 대우하여 내려주는 물품이 매우 많으니, 궁인들이 모두 전에는 듣지 못했던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내가 전에 복주도(覆舟圖)를 그려서 벽 위에 붙였었는데, 진계하기를 ‘이 그림을 단지 보기만 할 뿐이라면 끝내는 아무런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보실 때마다 반드시 위태로움을 생각하시어 실효가 있도록 힘쓰소서.’ 하였다. 그리고 혹 원유(園囿)를 가꾸는 일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매우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후를 위해서 하지 않은 적이 많았다. 무릇 진계하고 권선(勸善)함에 있어서 대부분 이러하였다. 내족(內族)과 인친(姻親)이 벼슬에 제배(除拜)되었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혹 여러 번 낙점을 받지 못한 적이 있어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으며, 혹 관직에 있으면서 출사(出仕)하는 자가 있어도 나는 그가 친속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무릇 내외를 엄격하게 하고 사사로운 청탁을 끊음도 역시 이와 같았다.
왕후가 보좌(輔佐)하고 북돋아준 도리와 내치를 밝게 한 교화가 대개 이와 같았다. 그런데도 이처럼 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것은 바로 사실만을 말한 것이요, 조금도 꾸민 것이 아니다."

 

2월 4일 기묘

정묘 호란이 있은 뒤로 금나라에 세폐를 보낸 것은 잡색주(雜色紬) 6백 필, 백저포(白苧布) 2백 필, 백포(白布) 4백 필, 잡색 목면 2천 필, 정목면(正木綿) 5천 필, 표피(豹皮) 50장, 수달피 2백 장, 청서피(靑黍皮) 1백 60장, 상화지(霜華紙) 5백 권, 백면지(白綿紙) 1천 권, 채화석(彩花席) 50장, 화문석(花紋席) 50장, 용석(龍席) 1장, 호도(好刀) 8병(柄), 소도(小刀) 8병, 단목(丹木) 2백 근, 호초·황률·대추·은행 각 10두, 건시(乾柿) 50첩, 전복 10첩, 천지다(天池茶)·작설다(雀舌茶) 각 50봉이었는데, 금년에는 또 금나라에서 힐책함으로 인해 백주 2백 필, 백포 2백 필, 정목면 3천 필, 청서피 40장, 백면지 5백 권, 호도 12병, 소도 12병을 더 보냈다.

 

유성이 누성(婁星) 위에서 나와 건방으로 들어갔다. 또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심성(心星) 위로 들어갔다.

 

2월 5일 경진

도원수 김자점이 상소하여, 의주 부윤 임경업이 제 마음대로 장사꾼을 보낸 죄를 용서해 주어 도로 임소에 부임시켜 군민을 돌보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으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6일 신사

유성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삼성(參星) 위로 들어갔다.

 

2월 7일 임오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상소하기를,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생기는 법이라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있고, 영화를 탐하고 은총에 연연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비방이 일어나고 있으며, 허물에 대해 스스로 지나치게 변명하여 대론(臺論)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들고 뻔뻔스럽게 자리에 있는 것은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루한 자에 가까운 일입니다. 차라리 죽음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절대로 다시 나갈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이 고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다. 속히 대정(大政)을 하여 민폐를 없게 하라."
하였다. 이성구가 출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지난 갑술년에 상이 부묘(祔廟)의 예를 행하고자 하였는데 온 조정이 왕의 뜻에 순응한 자가 없었으며, 삼사는 예경(禮經)을 근거로 힘껏 간쟁하였다. 그때 이성구는 사헌부의 장으로서 갑자기 그 논의를 정지시켰는데, 마침내 아경으로서 특별히 총재(冢宰)에 제배되었다. 임금의 뜻이 어찌 반드시 대론을 정지시킨 것에 보답하려고 그랬겠는가마는, 바깥 의논은 다들 그 때문에 초탁(超擢)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가령 박종부(朴宗阜)가 직접 이 일을 들어 논핵하였다면 이성구도 어찌 감히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다만 말의 과실을 가지고 죄안을 만들려고 하였으니, 이성구가 할 말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2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지난 갑술년에 상이 부묘(祔廟)의 예를 행하고자 하였는데 온 조정이 왕의 뜻에 순응한 자가 없었으며, 삼사는 예경(禮經)을 근거로 힘껏 간쟁하였다. 그때 이성구는 사헌부의 장으로서 갑자기 그 논의를 정지시켰는데, 마침내 아경으로서 특별히 총재(冢宰)에 제배되었다. 임금의 뜻이 어찌 반드시 대론을 정지시킨 것에 보답하려고 그랬겠는가마는, 바깥 의논은 다들 그 때문에 초탁(超擢)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가령 박종부(朴宗阜)가 직접 이 일을 들어 논핵하였다면 이성구도 어찌 감히 논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다만 말의 과실을 가지고 죄안을 만들려고 하였으니, 이성구가 할 말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

 

2월 8일 계미

상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비국 당상, 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요즈음 변괴가 자못 많았던 것은 바로 대척(大戚)008)  에 대한 조짐이었는데, 그 뒤에도 재이가 많으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돌이 옮겨진 변괴가 전에도 있었는가?"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춘추》에 돌이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한 선제(漢宣帝) 때에는 돌이 저절로 일어선 변괴가 있었으며, 신묘년에는 죽산(竹山) 지방에서 큰 돌이 저절로 옮겨진 일이 있었는데, 그 이듬해에 왜변이 있었습니다."
하고, 대사헌 윤황(尹煌)은 아뢰기를,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얼(妖孼)이 있게 마련입니다. 재이가 이와 같은데도 나라를 보전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신의 광망한 소를 겨우 정원에 올렸으나 미처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채택하여 받아들이신다면 어찌 어리석은 신만의 다행이겠습니까."
하고, 승지 이경여(李敬輿)는 아뢰기를,
"윤황이 진달한 바가 과연 모두 절실한 말입니다. 대신들은 나아가 알현은 하지만 재변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방도를 말하지 않으며, 상께서도 자신을 죄책하고 구언하지 않으십니다. 이와 같으면 하루에 세 번씩 접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신은 정원에 있으므로 성상께서 밤낮으로 걱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만, 실행하시는 일이 없으니 실효를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가다듬고 분발하여 성상의 뜻을 견고히 정한다면 지금의 대신들이 모두 고굉의 어진 신하가 될 것이며, 대간들도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가 될 것입니다."
하고, 김상용(金尙容)은 아뢰기를,
"이경여의 말이 충직하니 들어주어야 마땅하며 윤황의 상소는 아주 적절하니 또한 채택하여 시행하기에 적합합니다."
하고, 윤방이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과연 모두 간절하고 솔직하니 부디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여의 말이 옳다. 그러나 오랑캐에게 보내는 세폐(歲幣)는 전에 없었던 것이며, 자주 국상을 당하여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의 원망이 많다. 어떻게 하면 위로해 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상용이 아뢰기를,
"이경여의 뜻은 반드시 일대 변혁을 꾀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생각을 물어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경여가 아뢰기를,
"진작시키는 방도는 말단적인 일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상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성의와 정심을 힘써 다하는 것이 바로 그 근본입니다. 오늘날 다스림을 도모하기를 만약 계해년 초처럼 하신다면 반드시 온 나라가 순식간에 위급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들도 여기에 있으니 신은 감히 속에 있는 말을 다하겠습니다. 무릇 지금의 신료들은 임금 사랑하기를 자기 몸 사랑하듯이 하지 않고, 나라 걱정하기를 자기 집 걱정하듯이 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대사성 이식이 아뢰기를,
"경여는 다만 그 병폐만을 말했을 뿐 폐단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다만 법제를 수명하고 인재를 수습하는 데 있을 뿐이라고 여깁니다. 경여가 진달한 것은 상소나 차자에서 늘 하는 말일 뿐이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책문(策問) 역시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하고, 김상용이 아뢰기를,
"신료들이 대간이나 시종에 출입하며 오래도록 그 직책에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말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시끄럽게 정고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어찌 대간의 말이라 하여 가부를 가리지 않고 따르기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대간에게 책임을 맡긴 것이 중하기 때문에 일을 논하는 사체를 자세하고 신중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나의 소견이 미치지 못하여서 혹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속생각을 다 말하지 않는다면 어찌 신하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사간원이, 이식이 말한 우리 나라의 책문에 대한 말은 실없는 말에 가깝다고 논하고 추고하기를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9일 갑신

상이 하교하였다.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부인이 손자 김천석(金天錫)이 부임하는 곳에 따라간다고 하니, 지나는 각 고을로 하여금 특별히 우대하고 또 교자꾼을 주게 하라."

 

영상 윤방, 우상 홍서봉이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지관(地官)들과 산릉(山陵)으로 쓰기에 합당한 땅을 상의해 보니, 모두 파주(坡州) 지방의 산이 제일이라고 하여 그리로 정했습니다. 파주의 산은 바로 고 부윤 이유징(李幼澄)의 묘가 있는 산인데, 지관 이간(李衎)이 앞장서서 의논하여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뒤에 이간에게 통정(通政)을 상가(賞加)하였다.

 

윤구(尹坵)를 이조 좌랑으로, 윤강(尹絳)을 헌납으로, 윤계(尹棨)를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삼았다.

 

2월 10일 을유

대사간 윤황이 상소하기를,
"신이 관서 지방에 사명을 받들고 갔다가 생민들이 도륙당하는 것과 군량이 떨어진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돌아와 급함을 구제할 계책을 주달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종묘의 악무(樂舞)를 정지하고 여러 관사의 필요치 않은 경비를 줄여서 군량에 보충하게 하소서.
아, 나라의 대사는 제사와 전쟁에 있습니다. 태묘의 주악이 어떠한 대례입니까. 신이 풍병이 들고 본 정신이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종묘의 주악을 철폐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반드시 종묘의 주악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대개 종묘의 주악을 철폐하면 어선(御膳)도 반드시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고, 어복(御服)도 반드시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고, 내수사와 내탕고의 물건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환관과 궁첩들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진상을 파할 수 있고, 공물을 줄일 수 있어 이를 미루어 나간다면 온갖 헛된 경비를 일체 줄일 수 있을 것이니, 위태로움이 변하여 편안하게 되는 것이 이 한번의 착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재물이 넉넉하여 향사(享祀)의 예를 아주 풍성하게 갖추어 심지어는 오향(五享)의 대제를 이미 종묘에 행하고서 또 능침에까지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덤의 체백(體魄)을 편하게 모시고 사당에 제사하는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비록 평상시일지라도 번독스럽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능침에 오향을 올리는 일을 파해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수를 공상(貢上)009)  하게 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외방의 물품은 비록 깨끗하다 하더라도 쓸 수 없으며 자성(粢盛)으로 쓰는 것은 아주 적은데 민간에서 내는 것은 아주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공물을 다 혁파하고 시장에서 사서 쓰게 한다면, 향사는 궐하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는 덜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진헌하는 물건에 있어서도 그 폐단이 제향에 쓰는 공물의 폐단과 동일하니, 감히 감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공물을 모두 파하고 시장에서 사다가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공(御供)에 이르러서는 바로 전하께 관계된 것입니다. 일체 견감해 버린다고 하더라도 어찌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입을 것이 아름답지 않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복용(服用)을 완호하심이 반정 초년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공상하는 종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반정 초엽에는 초주지(草注紙)를 올려다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종이의 품질이 좋은 것이 태평할 때보다도 지나쳐서 종이 한 권의 값이 목면 10필이나 됩니다. 이것으로써 전하께서 검약하는 마음이 게을러졌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군들의 제택에 있어서도 굉장하고 화려함이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이 참으로 어떤 때인데 이처럼 지나치게 한단 말입니까. 지난번 헌부가 제도에 넘치는 집에 대하여 논의했었는데 김상헌(金尙憲)같이 강직한 자도 오히려 감히 곧바로 논척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극기하는 마음이 해이해졌음을 알겠습니다.
사옹원의 어전(漁箭)과 상의원의 직조(織組)와 공작(工作) 등의 일에 이르러서도 백성의 재물을 축내고 힘을 낭비하는 것이 그 얼마나 되는지를 모릅니다. 이것은 유사가 감히 청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상의 결단이 어떠하시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외방에서 진상하는 물건은 먼 지방에서 오기 때문에 맛이 변질되어 대부분 먹을 수 없는데, 그 때문에 끼쳐지는 민폐는 끝이 없습니다. 이에 손에는 진상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人情物)을 싣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공조에 이르러서는 기인(其人)의 피해가 공물의 폐해보다 심합니다. 때문에 가포(價布)가 평시보다 곱절은 많습니다. 이는 대개 평시에는 전하를 모시는 귀빈(貴嬪)들이 모두 판방(板房)에 거처했었는데, 지금은 궁중의 하례들도 모두 온돌방에 거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복시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은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집니다. 예로부터 나라에서 말을 기른 것은 전쟁에 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내사복시와 외사복시에서 기르는 것과 각 고을에서 나누어 맡아 기르는 것, 여러 섬에 방목하여 기르는 것이 그 수가 몇 천 필인지 알 수 없고, 제원(諸員)들이 내는 가포와 마료가(馬料價)·마초가(馬草價) 및 각처의 둔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그 숫자가 아주 많은데, 일찍이 한 필의 말과 한 끝의 포도 전쟁용으로 쓴 적이 없고 상사(賞賜)의 자료로 삼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신은 내구(內廐)에서 관리하는 어승마(御乘馬) 10여 필을 제외하고는 그 말을 모두 가져다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전곡을 거두어다가 군사들을 양성하는 데 썼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로움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이 호조의 문안(文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반록(頒祿)과 산료(散料) 및 기타 1년 비용이 쌀 10만 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도에서 현재 사용되는 전결 및 3도에서 새로 측량한 것을 상고해 보니 18만 결이 넘었으며, 1년에 조세로 들어 오는 것이 모두 15만∼16만 석이었습니다. 거기서 별수미(別收米)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13만∼14만 석은 됩니다. 10만 석의 경비를 제외하고도 3만∼4만 석이 남으며 또 자질구레한 비용을 깨끗이 없애고도 1만여 석의 여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남은 것을 가져다 공물의 값으로 충당을 한다면 제향에 쓰고 사대에 쓰고 어공에 쓰더라도 반드시 부족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원세(元稅) 외의 각양의 잡부(雜賦)를 모두다 면제해 주고 매 1결당 쌀 5두와 포 1필만을 거두어 양병(養兵)의 자본으로 삼는다면, 군사의 양식이 남아돌고 병사의 힘이 저절로 강해질 것입니다.
신이 군사정책을 보건대 더욱더 형편이 없습니다. 곤수와 변장이 된 자가 각기 제색 군병에게 방수(防守)를 면제해 주고 가포를 징수하기 때문에 비록 부민이라도 한번 그 군역에 예속되면 가산을 탕진한 채 도망하여 그 책임이 이웃과 친족에게 미치므로, 한 촌락이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각 고을의 속오군(束伍軍)에 이르러서는, 군적에 편입된 농민은 의복과 양식을 스스로 준비해야 하며, 겸하여 잡역을 제공해야 하므로 스스로 보존할 수가 없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났을 때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신은 각색의 정군(正軍) 및 출신, 새로 뽑은 아병(牙兵)과 속오 가운데 정예병을 엄격히 가려 뽑은 다음 신역을 면제해 주고 의식을 넉넉하게 해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병사가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도록 하고, 각각 장령(將領)을 가려 번을 나누어 조련하도록 하고는 10결에서 거두는 미포(米布)로 1명의 병졸을 기르게 한다면, 팔도를 통틀어 7만∼8만의 병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이 7만∼8만의 정병으로 험지에 웅거하여 요새를 지킨다면 남쪽의 왜적과 북쪽의 오랑캐를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 우리 나라는 사방이 수천 리로서 토지가 넓고 인민이 많기가 저 오랑캐에 비해 곱절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단지 강도(江都)만을 보장의 지역으로 여겨 궁궐을 수축하고 창고를 채워 피란할 계획만 하고 있으니 임시만 편안하게 지내려는 계책은 제대로 세웠다고 하겠으나, 팔도의 백성들은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신하가 스스로 극진하게 해야 할 것은 임금과 어버이의 초상으로, 이 일에 부족함이 있으면 불충이요 불효라고 여깁니다. 다만 우리 나라가 전성하던 때에는 국장(國葬)에 쓰는 의물(儀物)이 천박하고 화려한 것이 많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등록(謄錄)에 실었기 때문에 감히 변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미 분정하여 견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쓴 것을 분명하게 조사해서 저축되어 있는 남은 물건을 국용에 보충하는 것으로 등록을 다시 만들어 후래의 법으로 삼는다면,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건원릉(健元陵)은 바로 개국하신 태조의 능입니다. 지금의 석물(石物)도 의당 건원릉의 것보다 좀 작게 만들어서 낮추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억측을 밝은 것으로 여기시어 화를 내며 편벽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에 말이 승여(乘輿)에 미치면 업신여기는가 의심하시고, 일이 궁액에 관계되면 불경한가 의심하시고, 논의가 권귀에 미치면 경알(傾軋)하는가 의심하시며, 관리의 간사함을 논핵하면 부실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시며, 재이(災異)에 대해 진달하면 견강 부회하는가 의심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말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정 밖의 분부가 있기까지 하여 말한 자를 견책하고 배척하여 쫓아내면서도 조금도 고려하거나 용서함이 없습니다. 이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다 의심을 품은 나머지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르기만을 힘쓰고 있으니, 신은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위한 충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일은 모두 백성을 구활하는 계책이니 마땅히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2월 11일 병술

김익희(金益熙)를 정언으로, 신경진(申景禛)을 형조 판서로, 윤지(尹墀)를 부제학으로, 정치화(鄭致和)를 부교리로, 권우(權堣)를 부수찬으로, 양만용(梁曼容)을 봉교로, 이회(李禬)를 대교로, 구봉서(具鳳瑞)를 공조 참의로 삼았다.
구봉서는 처음에 유희분(柳希奮)의 아들 유명립(柳命立)과 사귀어서 발신(發身)의 바탕으로 삼고자 하였고, 또 심연(沈演)과 함께 반궁(泮宮)에 들어가서 흉도들과 체결했었다. 반정(反正) 초엽에 심연은 마침내 정거(停擧)를 당했으나 구봉서는 다행히 모면했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장인인 오윤겸(吳允謙)을 등에 업고 청현직에 올랐다. 최명길이 화의를 주장하고 추숭하기를 청한 뒤로는 선비들이 친하게 붙좇는 자가 없었는데 구봉서만이 그의 심복이 되었다. 명길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됨에 미쳐서 그를 끌어들여 전랑(銓郞)으로 삼고는 그가 말하는 것이면 모두 따랐다. 이에 무변(武弁)이나 음사(蔭仕)가 그의 손에서 나온 자가 많았다. 뒤에 우부승지에 제배되어 정언 김익희(金益熙)에게 탄핵당하자 시의(時議)가 통쾌하게 여겼다.

 

2월 12일 정해

김상헌(金尙憲)을 겸 지경연으로, 정온(鄭蘊)을 동지경연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수찬으로, 목서흠(睦叙欽)을 좌승지로 삼았다.

 

2월 13일 무자

총호사 홍서봉 등이 파주(坡州)의 산릉에 가서 묘좌 유향(卯坐酉向)으로 혈(穴)을 정했다.

 

2월 16일 신묘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서달(西㺚)의 대장 47인, 차장 30인과 종호(從胡) 98인을 거느리고 나왔다. 용골대가 의주 부윤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이에 서달의 여러 왕자들이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귀국과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차인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만 보낼 수 없어서 우리들도 함께 온 것이다."
하였는데, 의주 부윤 이준(李浚)이 조정에 계문하였다.

 

2월 18일 계사

정온(鄭蘊)을 대사간으로, 이현(李𥙆)을 동지사(冬至使)로, 조경(趙絅)을 사간으로, 정치화(鄭致和)를 헌납으로, 심지한(沈之漢)·성이성(成以性)을 정언으로, 윤강(尹絳)을 수찬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19일 갑오

헌부가 아뢰기를,
"재궁(梓宮)이 빈소(殯所)에 계시니 진신(搢紳)들이 최복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은 참으로 응당 시행해야 할 제도이며 정리에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번의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명이 비록 부모가 자식이 병이 날까 걱정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어찌 신하로서 편안히 봉행할 일이겠습니까.
지금 사대부들이 자기 집에서 하는 것에 있어서는 일률적으로 가지런하게 할 수는 없으나 크고 작은 공회(公會)에서 모두 고기를 쓰지 않으니 예를 지키려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외방에서는 해조의 행회(行會)를 그대로 따른다고 합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봉사(奉使)하는 신하들이 관청의 주방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목숨에 관계될 경우 대충 권의(權宜)에 따라 지쳐 쓰러지지 않게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그 유폐가 혹시라도 몸에는 최마(衰麻)를 입었는데 밥상에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먹는다거나 소돼지를 잡고 사냥을 하고 고기를 잡는 등, 하지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면, 어찌 너무나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예조가 한때의 하교로 인하여 경솔히 외방에 행회한 것은 일이 극히 부당합니다. 추고하고 빨리 그 공사를 환수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박종부(朴宗阜)의 논핵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신릉(新陵)의 구역 안에 있던, 옮긴 고총(古塚)이 7백 56개소인데, 그 중에서 주인이 있는 무덤이 89개소, 주인이 없는 무덤이 6백 67개소였다. 썩은 뼈를 거두어 묻어 주라고 명하였다.

 

2월 21일 병신

사간 조경이 상소하여 서달(西㺚)이 국문(國門)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깊이 추장해 주었다. 장령 홍익한(洪翼漢)이 상소하기를,
"신이 들으니, 지금 용호(龍胡)가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정묘년 초에 적신(賊臣) 강홍립(姜弘立)이 도적을 이끌고 갑자기 쳐들어와서 승여(乘輿)가 피난하였습니다. 이에 화친을 애걸하는 일이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한결같이 꺾이고 무너져서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참으로 그 때 먼저 홍립의 머리를 효시하여 우선 임금과 신하의 분의를 밝힌 다음에 교린의 도를 강구하고 형제의 의를 약속했다면, 오랑캐들이 비록 승냥이나 이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어찌 감동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계교를 이렇게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홍립을 얻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 머리를 숙이고 그들의 명령을 들었으니, 저 오랑캐들이 우리 나라의 풍속을 오랑캐화하고 우리 군신을 신첩(臣妾)으로 삼으려는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소문이 나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를 섬기며 편안함을 취해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을 연장해 가고 있으나, 조종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천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후세에 대해서는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호차가 데리고 온 자들 중 반은 새로 부속된 서달이라고 합니다. 서달은 우리 나라와 교빙의 예가 없는데, 어찌 빈접(儐接)의 도가 있겠습니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되는데, 국경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묘당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묘당에 있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베개를 높이 베고 깊이 잠을 자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아, 몸소 묘당에 재직하고 있으면서 편안하게 날짜만 보내고 있으며, 잠시 뒤에 닥칠 화가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고, 수모를 당하는 것을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사람들이 서로 보듯 보통으로 여기고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랑캐가 황제라 일컫는 것은,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묘당에서 황제라 일컫게 해서 오랑캐가 할 수 없이 황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천자라 일컫고 대위(大位)에 오르고 싶으면 스스로 제 나라에서 황제가 되고 제 나라에 호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누가 그것을 금하기에 반드시 우리 나라에게 물어본 뒤에 황제의 일을 행하려 한단 말입니까.
그들이 맹약을 변경하고 흔단을 연 것은, 우리를 호통하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리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장차 천하에 일컫기를 ‘조선이 우리를 높여 천자로 삼았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그 국서를 취하여 사신의 머리를 함에 담아 명나라 조정에 주문한 다음 형제의 약속을 배신한 것과 참람하게 천자의 호를 일컫는 것을 책하면서 예의의 중대함을 분명히 말하고 이웃 나라의 도리를 상세히 진술한다면, 우리의 설명이 더욱 펴지고 우리의 형세가 더욱 확장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힘써 분발하고 큰 용기를 더욱 떨쳐서 빨리 관(館)에 있는 노사(虜使)를 잡아다 큰길에 늘어 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를 가하소서. 만일 신의 말을 망령되어 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신의 머리를 참하여 오랑캐에게 사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위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사신을 참하라고 진달한 것은 이른 것 같다. 형세를 보아가며 처리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이홍주(李弘胄)를 이조 판서로, 김신국을 호조 판서로, 김상헌(金尙憲)를 예조 판서로, 조익(趙翼)을 공조 판서로, 성이성(成以性)을 부교리로, 이일상(李一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요즈음 오랑캐 사신 용골대 등이 가지고 온 거만한 글에 존호(尊號)를 확정했다고 칭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들은 적이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정묘년의 난리에 참혹하게 유린당하고 기미(覊縻)의 거조가 궁여지책에서 나와 생민(生民)의 고혈을 다 기울여 사신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비굴한 말로 애걸한 것이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위호(僞號)를 참람하게 칭하려고 하였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으로 여길 것으로, 상의하여 정탈한다는 등의 말에서 그들의 행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하여서 거듭 조종에게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비록 그 글을 불태우고 사신을 참하여 삼군(三軍)의 사기를 진작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친히 적의 사신을 접견하시어 부도한 말을 듣는단 말입니까. 의당 엄준한 말로 배척하여 끊는 뜻을 분명히 보이고 참람하게 반역하는 단서를 통렬하게 끊어, 저 오랑캐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지키는 바에 대해 기강을 범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 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 서달에 이르러서는, 천조에 대해 새로 반역한 죄가 있으니, 우리 나라와는 통신(通信)을 왕래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사신을 따라 제멋대로 국경에 들어왔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빨리 구금하라 명하여 상경하지 못하도록 해서 엄히 끊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충성심에 분개하는 뜻을 모두 알았다. 진달한 바의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에 따라 호차(胡差)를 접견하지 마소서. 서달의 경우는 비록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자 하나 형세상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2월 22일 정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김상헌이 먼저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성상의 뜻을 분발하고 인재를 진작시키기를 청하였다. 홍서봉이 문희성(文希聖)·이일원(李一元)·나덕헌(羅德憲) 등을 천거하자, 김상헌이 아뢰기를,
"이일원 등은 일찍이 오랑캐의 뜰에서 무릎을 꿇은 자인데 지금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한다면 오랑캐가 반드시 얕잡아보고 업신여길 것입니다. 또 나덕헌은 지난번 안악(安岳)의 수령이 되었을 때 고을살이를 형편없이 했으니 바로 장리(贓吏)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패장도 공을 세운 자가 많았다. 일원 등이 참으로 재능이 있다면 뽑아 써도 무방하다. 덕헌은 범한 죄가 매우 중하니 합당한가를 살펴본 다음에 비로소 써야 한다. 만일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하자가 없는 사람을 버려두고 먼저 이런 무리를 쓴다면 국가의 체면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2월 24일 기해

금의 차인 용골대 등이 서울에 들어왔다. 구관소(句管所)의 제관(諸官)이 들어가 금의 차인을 만나 보았다. 금의 차인이 한(汗)의 글 3장을 내어 보였는데, 한 장은 춘신사(春信使)의 문안에 관한 글이었고 한 장은 국상의 조위(吊慰)에 관한 글이었으며, 한 장은 제를 올릴 때 쓸 물품의 목록이었다. 또 두 개의 봉서(封書)가 있었는데, 한 봉투에는 금국집정팔대신(金國執政八大臣)이라고 썼고, 한 봉투에는 금국외번몽고(金國外藩蒙古)라고 썼으며, 뒷면에는 모두 봉서조선국왕(奉書朝鮮國王)이라고 쓰여 있었다. 제관이 이것이 누구의 글이냐고 묻자, 답하기를,
"팔고산(八高山) 및 몽고의 여러 왕자의 글이다."
하였다. 제관이 말하기를,
"인신의 처지로 다른 나라 임금에게 글을 보내는 규례는 없다. 이웃 나라 군신은 일체(一體)로서 서로 공경하는데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글을 보낸단 말인가."
하고, 물리치고 보지 않으니, 용호 등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팔고산과 밖으로는 제번(諸藩)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서달이 일시에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명나라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나라와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
하였다. 이때 조정에선 한창 회답할 일에 대해 의논 중이었다. 대사간        정온(鄭蘊)이 상소하기를,
"금의 차인이 청한 것은 참으로 매우 놀랍고 통탄스러운 말입니다. 대의가 있는 것이 청천 백일과 같아서 삼척 동자에게 물어보아도 반드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비국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겠으며 성상의 영특하신 결단이겠습니까. 그러나 물음에 답하고 서신에 답할 즈음에 준절한 뜻을 보이지 못하고 혹시라도 우물쭈물하며 구차한 말을 하면 저들은 반드시 이를 구실로 삼아 말하기를 ‘조선도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니, 한번 말을 잘못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입니다. 서달의 경우는 당초 중국을 배반했으니, 이는 부모의 원수입니다. 비록 관문을 닫고 배척하여 끊지는 못하더라도 마땅히 종호(從胡)의 예로 대우해서 반역자는 동맹국 신사(信使)의 반열에 끼워 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이 비록 겉으로는 성내는 빛을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의롭게 여길 것입니다.
수신(帥臣)이 직책을 잘 이행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마는, 그 직책을 맡겼으면 마땅히 그에 대한 효과가 있도록 책임지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산릉(山陵)의 역사를 감독하는 데 어찌 다른 사람이 없기에 아직도 내려 보내지 않습니까?          【 이때 김자점이 산릉 제조로 능소(陵所)에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리고 체부(體府)의 설치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변방의 흔단이 이미 생겼는데, 어찌하여 시임, 원임 중에서 군사의 일을 조금 아는 자로 한 사람을 가려서 체부을 열고 그 일을 위임시키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25면
【분류】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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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체부(體府)의 설치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변방의 흔단이 이미 생겼는데, 어찌하여 시임, 원임 중에서 군사의 일을 조금 아는 자로 한 사람을 가려서 체부을 열고 그 일을 위임시키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상이 도원수 김자점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오늘 가는 것은 출정(出征)이 아니라 바로 요리하려는 것이니, 아직은 군병을 거느리고 가지 말라. 그리고 춘신사(春信使)가 돌아가기 전에는 나갈 필요가 없으니, 마땅히 군량을 미리 갖추고 기다려야 한다."
하니, 자점이 부원수를 차출할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고 이어 쓸 만한 사람을 물으니, 자점이 이일원(李一元)·문희성(文希聖)·나덕헌(羅德憲) 등을 추천했다.

 

2월 25일 경자

태학생 김수홍(金壽弘) 등 1백 38인 및 유학(幼學) 이형기(李亨基)가 상소하여, 오랑캐 사신을 참하고 그 글을 불살라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너희들의 강개한 뜻을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오랑캐 사신이 말하는 것은 엄한 말로 준절하게 배척해야 옳다. 사신을 참하고 글을 불사르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2월 26일 신축

호차 마부대가 종호를 거느리고 명정문(明政門) 밖에서 조제(吊祭)를 행하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기를,
"용호의 일행은 다만 춘신사와 조제(吊祭)로 명분을 삼고 있으며 한서(汗書)에도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이른바 설만한 글이란 것은 바로 팔고산(八高山)과 몽고 왕자의 글입니다. 그들의 의례적인 글에는 답을 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거절해야 군신의 의리와 이웃 나라의 도의가 둘 다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임시 방편으로 화를 늦출 대책에 대해서도 어떻게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차는 불러들여 만나 보아도 무방하며 만나 보아서 안 될 것은 서달일 뿐입니다. 그러나 서달도 박대할 필요는 없고 엄한 말로 배척할 것은 이치에 어긋난 글일 뿐입니다. 일의 기틀이 한번 잘못되면 뒤에는 후회하더라도 소용없을 것이니,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비국에서 명백하게 처치하고 따로 답서(答書)를 작성하기를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가 용호 등이 그들의 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 대해 성이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비국에서는 박난영(朴蘭英)을 보내어 머물도록 타이르게 하기를 청하고, 정원에서는 돌아오게 하지 말고 오로지 자강할 계책을 생각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머물러 기다린다고 하니 부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난영을 보내어 용호를 따라 모화관에 가서 굳이 만류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별서(別書)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만일 열어 보기를 허락한다면 마땅히 도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마침내 다시 무신 및 역관을 보내어 부르기 위하여 벽제(碧蹄)까지 따라 갔으나 용호 등이 끝내 오지 않았다. 그들이 성을 나갈 때에 구경하는 관중이 길을 메웠는데, 여러 아이들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며 욕을 하기도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구관소(句管所)는 그들이 달아날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병조 낭관과 도감의 초관은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차호가 지레 나간 것은 반드시 사신을 참하자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역관 중에 몰래 그들과 통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찾아내어 효시(梟示)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7일 임인

간원이 아뢰기를,
"오랑캐 사신이 지레 나갔으니 위기가 이미 닥친 것으로 비어할 계책을 전에 비해 더욱 깊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께서는 깊은 대궐 속에 계시면서 신료들을 드물게 접견하시니, 신들은 민망하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날마다 대신을 접견하여 빨리 싸우고 지킬 계획을 강구하고 또 대의로써 호차의 청을 배척하고 끊은 뜻을 중외에 분명히 유시하소서. 그리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직질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말고 모책과 계책가 있으면 각자 진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과 정승이 용렬하다 하더라도 혹 먼저 의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겁을 내지 말라."
하였다. 승지 이경여(李敬輿)가 비답의 사연이 미안하다는 뜻을 진계하니, 답하기를,
"너희 말이 옳다."
하였다. 사간 조경, 정언 이일상(李一相)이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나갔다.

 

유림(柳琳)을 부원수로 삼았다.

 

2월 29일 갑진

대신과 비국 당상, 삼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우리 나라는 끝내 오랑캐의 침략을 당할 것입니다. 마땅히 방어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도성은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니 미리 강도에 들어가서 조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오늘날 강구할 것은 방어할 방법이지 피란에 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강도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두 번째의 일입니다."
하였다.

 

윤지(尹墀)를 대사간으로, 홍명일(洪命一)을 헌납으로, 김익희(金益熙)를 정언으로, 윤황(尹煌)을 이조 참의로, 심열(沈悅)을 공조 판서로, 오달제(吳達濟)를 수찬으로, 유림(柳琳)을 평안 병사로, 정온(鄭蘊)을 부제학으로, 이항(李沆)을 북병사로, 이시방(李時昉)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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