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2권, 인조 14년 1636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31. 13:10
반응형

3월 1일 병오

병조가,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에게 빠른 걸음으로 가서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

 

상이 팔도에 하유하였다.
"우리 나라가 갑자기 정묘 호란을 당하여 부득이 임시로 기미될 것을 허락했는데, 오랑캐의 욕구는 한이 없어서 공갈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이는 참으로 우리 나라에 전에 없던 치욕이다. 그러니 치욕을 참고 통한을 견디면서 장차 한번 기운차게 일어나 이 치욕을 씻기를 생각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요즈음 이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갑자기 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에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 결단을 내려 그 글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차 등이 여러 날 요청을 했으나 끝끝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성을 내고 가게 되었다. 도성 사람들은 병혁의 화가 조석에 박두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그들을 배척하고 끊은 것을 통쾌하게 여기고 있다. 더구나 팔도의 백성들이 만일 조정이 이런 정대한 거조를 하여 위험하고 절박한 기틀에 당면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반드시 풍문만 듣고도 격분하여 죽음을 맹세코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다. 어찌 지역의 원근과 지체의 귀천이 다르다 하여 차이가 있겠는가.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구제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서방의 방수에 나간 군사의 신역을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3월 2일 정미

비국이, 전 부사 문희성(文希聖)을 안주 방어사로 삼기를 청하였다. 그 후에 병사 유림(柳琳)과 체면상 장애가 있게 되어 조방장으로 강등하여 제수하였다.

 

부제학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저번에 원수를 속히 보내라는 뜻을 진달하여 이미 채택하여 시행하겠다는 비답을 받들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원수의 출발을 3월 20일 뒤로 정했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늦추십니까. 사기가 이미 절박해져 한시도 늦출 수 없게 되었는데 어느 겨를에 날짜를 가리겠으며, 원수의 행장은 장검 한 자루일 뿐인데 무슨 행장을 꾸린단 말입니까.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 저들이 혹 용인해주어 다시 사신이 왕복한다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고 태풍과 소낙비처럼 갑자기 쳐들어와 천연적인 참호인 압록강이 저들의 소유가 된다면 손빈(孫臏)과 오기(吳起)같은 장수와 곰과 같이 힘세고 날랜 군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즉시 나가도록 명하여 쏜살같이 달려가서 군사를 다스리고 병기를 정돈해 강탄을 파수하고 성지를 수리하여 사수할 계책을 하고 물러날 계획을 하지 말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성상께서 성과를 이루도록 위임하는 뜻이며 수신(帥臣)이 몸을 바쳐 국은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깁니다.
신이 생각건대, 온 나라의 정병과 무사가 모두 여러 대장의 수하에 모여 있는데, 일이 없으면 농장을 감독하는 역사를 하고 일이 있으면 호위(扈衛)로서 편안함을 취하는 곳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묘 호란에 강도로 피란갔던 일에 대해서는 식자들은 지금까지도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날쌘 군사를 모아 섬속에서 늙히면서 한 명의 병사나 한 마리의 말을 싸움터에 내보내지 않고 수백 보 밖에서 적의 기병을 엿보면서, 내란(內亂)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켜 그것으로 자기네의 목숨을 보전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와 휴척을 함께 할 훈신들은 부귀가 이미 극도에 이르러서,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은 없는 것이 으레 이와 같으니, 급한 때에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지난번과 달라서 저들이 군사를 움직이고 나면 비록 애절한 말로 화친을 구하더라도 반드시 들어주지 않을 것이며 후한 폐백을 주면서 늦취 달라고 해도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망하는 것이 똑같다면 어찌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서 승부를 가르는 것만 하겠습니까. 여러 대장의 군관 및 포수·살수 등 제군의 수가 아주 많으니 정예군을 반으로 나누어 원수에게 붙여 준다면 여러 지방에서 징병하지 않아도 군사의 위엄이 떨쳐질 것입니다.
다섯 달만에 장사 지내는 예(禮)는 제후의 제도이기는 하지만 정도(正道)와 권도를 쓰는 것은 때에 따라 달라야 하는 것으로, 고집스레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초상치르고 장사지내는 것은 앞당겨 행하는 예는 있어도 뒤로 물려 행하는 예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도 난으로 인하여 장례를 하면서 예를 다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대체로 형세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랑캐가 침략해 들어오는 환란이 장사지내기 전에 발발한다면 어쩌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앞당겨 길일을 정하여 빨리 대사를 치루고, 미처 하지 못한 일은 형세를 보아 추후에 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을 것으로, 이는 권도이면서 중도를 얻는 방법이라 여겨집니다. 그런 다음 오로지 무비(武備)에만 정신을 쏟아 송경(松京)에 진주하여 장사들을 독책하고 군율을 엄히 밝혀 송 태조(宋太祖)가 ‘오직 한 자루의 검(劍)이 있을 뿐이다.’라고 한 것처럼 뜻을 더욱 가다듬고 만세의 소리를 우렁차게 외친다면, 간교한 오랑캐의 혼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묘당으로 하여금 채택해서 쓰게 하겠다."
하였다.

 

3월 3일 무신

심 도독(沈都督)이 용골성(龍骨城)과 봉황성(鳳凰城)에 사람을 보내어, 요망(瞭望)하는 우리 나라 사람을 쫓아냈는데, 대개 우리 나라를 의심해서였다.

 

노중(虜中)에 회답사를 보내어 조제(吊祭)한 것에 대해 사례하였다. 그 글에,
"지난 임신년에 국상을 당했을 때에도 귀국이 사신을 보내어 조위해 주셨으므로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지극하였는데, 이번에 또 멀리서 후한 부의와 성대한 제전을 보내 주셨습니다. 전후 베푸신 성대한 정의가 실로 특별한 것이었으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신의 행리가 돌아갈 적에 그 길로 저희 사신을 딸려 보내고 겸하여 보잘것없는 의물(儀物)을 갖추어 안부를 문후하니, 구구한 정성을 깊이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하고, 또 별서(別書)에,
"저희 사신이 도중에 있는데 귀국 사신이 먼저 이르렀으니 더욱 양국의 성의가 서로 미더움을 볼 수 있는바, 매우 다행입니다. 다만 과인에게 병이 있어 즉시 상견하지 못했는데 귀국 사신이 성을 내고 서둘러 떠나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못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귀국 사신이 비록 대동하고 왔으나 별차(別差)와 타서(他書)는 전례에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조약(條約)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접대하는 재신이 감히 수령하여 전시(轉示)하지 못한 것으로, 이 역시 사체에 당연한 일이요, 과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국이 화친을 약속한 지가 지금 10년이 되었습니다. 어찌 사신으로서 이런 괴이한 일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에 회답사의 행차를 인하여 대략 저의 정성을 알리니,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또 별서를 용호(龍胡)에게 뒤따라 부치기를,
"지난번에 춘신(春信)을 사신편에 보냈는데 귀개가 먼저 이르니 감동과 부끄러움이 더욱 더해집니다. 저번에 보낸 폐방(弊邦)의 답서는 사정을 자세히 말하느라 번거롭게 됨을 면치 못했는데, 보내온 글을 보니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는 성대한 뜻을 볼 수 있었는바, 기쁨이 끝이 없었습니다. 다만 들으니 이번에 온 귀국 사신이 접대하는 재신과 별도로 말한 바가 있었는데, 그것은 폐방이 감히 들어 주지 못할 말이었다고 합니다. 재신이 이미 귀국의 사신과 더불어 상세히 말했다 하니, 양찰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온 나라가 황황하여 조석을 보장할 수 없는데 구중 궁궐에 아무 말없이 깊이 앉아 있기를 전과 다름없이 하고 있으며, 묘당의 신하들이 아무렇지 않게 편안히 있는 것을 지난날과 다름없이 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오랑캐의 수족을 묶을 계책이 서 있습니까, 아니면 별도로 제압할 수 있는 계략이 서 있는데 신들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황제를 참칭하는 말을 통렬히 배척했고 사신의 행차를 준열히 거절하여 한서(汗書)를 전하지 못하고 예단(禮單)을 받지 않았으니, 말꼬리를 잡을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침략해 올 화가 있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합니다.
도적들의 침범에 대해서는 그 시기의 조만을 점치기 어려운데, 외방 포수(砲手)가 서울에 올라오는 것은 4월이 기한이니, 신들 역시 지나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훈국(訓局)에서 양성한 군사가 4천 명이 넘는데 지금 조발한 것은 수백 명뿐이고, 사방의 정예들은 모두 각 아문의 군관에게 소속되어 있으면서 수자리를 면하는 도피처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설혹 변란이 있더라도 물가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그치는 데 지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가 군사를 양성한 본 뜻이겠습니까. 속히 각 아문의 군관을 더 뽑아 모두 원수에게 붙여 주어 먼저 강역의 급함을 구제하게 하소서. 그리고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군사를 조발하고 군량을 이어 댈 계책을 강구하되, 불에 타는 자를 구제해 주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 주듯이 하게 하소서. 그리고 평안 병사 유림(柳琳)을 속히 출발하도록 하고 각 아문에 명하여 일체 그가 조발하여 사용하는 대로 따르도록 하되 피하기를 꾀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효시하여 군율을 엄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훈국의 군병을 더 뽑는 일은 불가한 듯하다."
하였다.

 

달이 묘성을 침범하였다.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방성(房星) 위로 들어갔다.

 

3월 4일 기유

간원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헤아릴 수 없어서 대군이 출병하려 하는데도 군량을 댈 계책에 대해 아직까지 변통하는 거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복시·훈련 도감 각 아문에 쌓아 둔 재화를 모두 해사에 보내어 양향을 보충하게 하소서. 원수의 행차에는 군수(軍需)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상금을 걸고 모집하고 상을 주어 격려하는 데 쓸 자금을 주어서 군사의 마음을 북돋아 주소서. 그리고 평안 병사 유림이 금군 10인을 군관으로 삼기를 계청하였는데, 호위청에서 편비(褊裨)를 사사로이 하여 주지 않는 자가 반이나 된다고 합니다. 변방이 견고하면 서울이 편안하고 서울이 편안하면 호위하는 무사가 많을 필요가 없습니다. 비국에 명하여 호위청 군관을 점열하여 그 중에서 씩씩한 자 5백∼6백 인을 뽑아 원수와 평안 병사에게 나누어 주어 지키는 데 협조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국이 스스로 헤아려서 처치할 것이다."
하였다.

 

화약 3백 근, 장전 1천 부, 편전 3백 부, 통아(筒兒) 50개, 흑각궁(黑角弓) 2백 장, 지갑(紙甲) 50부, 조총 1백 병, 목면 5백 필을 의주에 보내라고 명하였다.

 

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김자점(金自點)을 명초하여 인견하였다. 상이 신경진 등에게 일렀다.
"근래 나이 어린 대간들이 사체도 모르면서 군사를 뽑는 데 대해 말하기도 하고 군량을 대는 데 대해 말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군국(軍國)의 일은 그 결단이 조정에 있었다. 그런데 어찌 사람마다 지휘할 수 있겠는가. 전투를 맡은 자가 싸움에 임해서 싸우지 않고 군량을 맡은 자가 군량을 대어 주지 못한다면 논핵해도 좋지만 서둘러 미리 알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별다른 기묘한 계책도 없으면서 이와 같이 번거롭게 굴고 있으니 매우 그르다."

 

3월 5일 경술

이성구(李聖求)를 형조 판서로, 이경여(李敬輿)를 좌부승지로, 구봉서(具鳳瑞)를 우부승지로, 박황(朴潢)을 동부승지로, 심지원(沈之源)을 부수찬으로, 김육(金堉)을 동지사(冬至使)로, 이시우(李時雨)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3월 6일 신해

평안도 대동강 가에서 강오리가 서로 싸워 죽은 것도 있고 거의 죽게 된 것도 있었다. 이때부터 밤마다 매일 싸우더니 10여 일이 되어서야 그쳤다.

 

3월 7일 임자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리기를,
"화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오늘을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병란이 일어나는 것은 비록 분명히 언제라고 알 수는 없으나 또한 위험하고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국가와 종사의 안위를 안주(安州) 한 성의 승부에다만 걸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도적이 해서(海西)로 넘어 들어 온다면 일은 어찌할 수 없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원수는 자모성(慈母城)을, 부원수는 철옹성(鐵甕城)을, 본도 병사는 안주성(安州城)을 진압하게 하고, 관서(關西)를 셋으로 나누어 세 진(鎭)에 소속시킨 다음, 정예한 속읍의 군민과 용감한 무사를 선출하여 무양(撫養)하고 훈련시켜 때로 번갈아 교대해서 스스로 지키게 하면, 반드시 큰 이익이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군사의 수가 적고 힘이 약하여 오랫동안 대적(大敵)을 막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유사시에는 황해도의 군사로 자모성을 구제하고 함경남도의 군사로 안주성을 구제하고 함경북도의 군사로 철옹성을 구제하게 하되, 안주성이 공격을 받을 때는 자모성과 철옹성이 함께 구제하게 하고 철옹성이 공격을 받을 때에는 안주성과 자모성이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하소서. 또 대신과 중신(重臣) 중에 충성스럽고 위망이 있는 자를 가려 평양에 보내어 3진을 통어하게 하되, 먼 곳에서 꼭 일마다 제어하지 말고 전쟁에 나아가 우물쭈물 동요하여 군율을 잃는 자가 있으면 왕명을 청하여 군법을 시행하게 하소서.
또 삼남(三南)·관동(關東)·기내(畿內)의 군사를 뽑아서 무기를 정비하게 하고 급할 때 즉시 불러서 숙위(宿衛)에 보충하게 하소서. 그리고 3진에 소속된 요해처 수령을 간혹 주장(主將)에 천거하여 보고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깊이 가상하게 여겼다. 차자에 진달한 일은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차왜(差倭)가 가지고 온 동래부(東萊府)의 서계 속에 ‘족하(足下)’라고 일컬었는데, 우리 나라가 전례에 없다는 이유로 고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화친을 끊고 오랑캐를 방비할 일로 평안 감사에게 하유한 글을 금군(禁軍)이 싸가지고 가다 가 호차(胡差)의 복병에게 붙잡혔다. 호차가 정명수(鄭命守)를 시켜 평양 감사에게 말하기를, "귀국의 문서를 얻어 이미 불에 태우게 하였다." 하였는데 대개 거짓으로 다른 글을 태우고 그 글을 몰래 가지고 간 것이다. 정원이 다시 반포하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호차 등이 평양에 도착하여 관사(官舍)에 들어가지 않고 산위에 모여 앉아 종호(從胡)를 시켜 좌우를 관망하게 하였는데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전 주부(主簿) 정흥립(丁興立) 등 19인이 상소하여 스스로 종군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의 충의를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은 바로 남아가 공을 세울 때이니 너희는 힘을 써서 장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이어 특별히 전마를 하사하였다.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변방의 흔단이 이미 생겨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서방의 방비를 원수에게 책임지웠으나 요리하고 조처하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기회의 마땅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신은 늙어 정신이 어둡고 일처리를 잘못하는데다가 군사의 일을 모릅니다. 원임 대신 중에 군무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체찰사의 임무를 그에게 맡겨 서방의 기무를 요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은 마땅히 시행하겠다."
하였다.

 

대사성 이식(李植)이 상소하여 비국을 대궐 안으로 옮기고 제고(制誥)의 임무를 홍문관과 예문관에 맡기자고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심 도독이 참장을 보내어 조제(吊祭)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영상 윤방이 전일 등대할 때 파산(罷散)된 문무 제신들을 서용할 것을 계청했습니다. 이처럼 일이 많을 때를 당하여 쓸 만한 인재가 한산한 자리에 많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선 서서히 하라."
하였다.

 

유성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평안 병사 유림을 인견하였다.

 

3월 8일 계축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우림위·사복시·금군(禁軍)의 체지(帖紙)를 얻어서 정찰하는 자에게 상으로 주기를 청하였다. 비국이 수십 장을 보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사체가 온당하지 못하니 시행하지 말라."

 

평안 병사 유림이 선사진(宣沙鎭)과 노강진(老江鎭)의 첨사를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니, 조정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우부승지 구봉서(具鳳瑞)는 일찍이 전랑(銓郞)에 제수되었을 적에 추잡하고 야비한 일을 많이 행했으며, 서로(西路)에 봉사했을 때는 막 국휼(國恤)을 당한 때였는데도 복(服)을 입고 기생을 끼고 있었으며, 인하여 끝내는 축첩하였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9일 갑인

우림위 이인경(李仁慶), 겸사복 김택룡(金澤龍)이 상소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무오년에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서정(西征)했다가 도적의 칼에 죽었으니 선봉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은총어린 답을 내리고, 이어 가서 의주 부윤에 예속되어 조발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민응형(閔應亨)을 동부승지로, 장신(張紳)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응형은 일찍이 간관으로 청대(請對)했을 적에 곧고 간절한 말이 많았으므로 초배(超拜)한 것이다.

 

3월 10일 을묘

상이 철갑 30령, 철주(鐵胄) 30정, 별조궁 2백 장, 상방궁(尙方弓) 2백 장, 장전 7백 부, 편전 1천 부, 동아(筒兒) 7백 개, 조총 50병, 요구창(腰鉤槍) 40병, 당파(鏜把) 20병을 원수에게 보내어 서쪽 변방의 군사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3월 12일 정사

백홍(白虹)이 달을 꿰었다. 영의정 윤방이 차자를 올리기를,
"체직하라는 명을 내려 주시어 옛날의 책면(策免)하던 뜻에 응하소서."
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4일 기미

헌부가 아뢰기를,
"사치의 해는 천재보다도 심하여 비록 풍년이 든 때에도 오히려 경계하고 삼가야 하는데, 더구나 존망이 위급한 때이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여러 궁가(宮家)에서 진향(進香)할 때 채화(綵花)를 오려 만들어서 금사(金絲)로 엮어 달며, 찬품(饌品)도 아주 번다하다고 합니다. 이 슬프고 공경할 자리에 사치스런 풍습이 있다고 하니, 참으로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지금부터는 깨끗하고 검약하게 하는 데 힘쓰도록 하고 이 규책을 준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가장(家長)을 추고하여 치죄하소서. 제향(祭享)에 꽃을 사용하는 것은 본래 경사(經史)에 보이지 않고, 우리 나라의 《오례의(五禮儀)》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크고 작은 제사에 조화(造花)를 쓰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가장을 추고하는 것은 사체가 옳지 않다. 그리고 해사가 지화(紙花)를 만든 것은 소비가 많지 않고 또 이것은 구례이니, 감삭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뒤에 전창위(全昌尉) 유정량(柳廷亮)이 채화 때문에 마침내 추고를 당했다.

 

3월 15일 경신

예조가 아뢰기를,
"《실록》을 등서한 것을 보니, 경오년 국상(國喪) 때에 본조가 아뢴 것과 대신의 논의 및 유신(儒臣)이 널리 고찰한 말은 경전(經傳)을 두루 인용하였는데, 우제(虞祭)·졸곡(卒哭)의 축사(祝辭)에는 ‘국왕이 세자 아무를 시켜서[國王使世子某]’라고 하였고, 별제(別祭)의 축사에는 ‘신하를 보내어[遣臣]’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대행 왕비의 삼년상 안에 모든 제사의 축문 역시 이것을 모방해서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사간으로, 김중일(金重鎰)을 정언으로, 임광(任絖)을 집의로 삼았다.

 

부제학 정온(鄭蘊)이 상차하여 시폐와 변방의 일을 진달하고, 상에게 송도(松都)에 진주하여 민심을 북돋아 주기를 청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이튿날에 또 상차하기를,
"적을 막는 데는 험지를 의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장강의 험함은 하늘이 동서를 나누어 놓은 것인데도 버리고 지키지 않은 채 물러나 산성을 지키고 있으니, 계책이 아닙니다. 신이 듣건대, 의주 부윤 임경업이 성을 지키는 일을 자임하고 있고 그곳의 군민들도 그들의 부모 처자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사기를 북돋아 주는 거조가 없으면 그들에게 필사적으로 싸울 마음을 가지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의주에 과거를 베풀어서 널리 무사를 뽑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라고 하여 장려하는 뜻을 보인다면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감격하여 죽음으로써 국은에 보답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물러나 지키는 것을 상책으로 삼는다면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도둑에게 아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개성에 진주하는 일은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과거를 베푸는 한 조목은 해조로 하여금 품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정온이 또 차자를 올려 진주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3월 17일 임술

사간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동료들이 원수(元帥)를 신칙해야 한다는 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국가가 법을 세운 것이 애당초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 죄가 있으면 그 죄율에 따르는 것이 바로 떳떳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반드시 별도로 논계해서 새로 만든 법이 있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진실로 법을 어겼으면 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고 법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법대로 시행할 것을 주청할 따름입니다. 어찌 훈귀이기 때문에 미리 그가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용서하지 않겠다고 유시해서 도리어 나라의 위엄이 무겁지 않은 것을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신은 바로 그의 종사관인 만큼 조만간에 종정(從征)하여야 하므로 혐의쩍어서 감히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고, 정언 김익희(金益熙)·김중일(金重鎰)이 아뢰기를,
"옛날에 장수를 명하여 출사(出師)할 적에는 훈계와 신칙이 매우 엄했는데, 그것은 여럿의 뜻을 하나로 하고 나태함을 흥기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夏)나라 계(啓)가 감(甘) 땅을 정벌할 때에는 육경에게 맹서하였고, 주 무왕(周武王)이 상나라를 칠 때에는 우방의 임금들에게 맹서했으며, 태조 고황제가 서달(徐達)과 상우춘(常遇春) 등에게 출사를 명할 적에도 계칙하는 글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달 등은 일대의 훈구 대신으로 자신을 잊고 나라의 일을 따르는 데 있어 어찌 계칙이나 면려가 있은 뒤에 힘쓰는 바가 있던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와 같이 한 것은, 대개 온 국내의 군사를 모두 그에게 소속시켰으므로 나라의 존망이 그 일에 달려 있기 때문에 부득이 재삼 신칙하여 군율을 엄히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군율이 엄하지 않기 때문에 적이 오기도 전에 먼저 무너지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먼저 달아납니다. 이에 처음 갑자년에 패했을 때는 적이 경성까지 들어왔었고 재차 정묘년에 패했을 때는 오랑캐가 곧장 치달렸으니, 이는 모두 그 당시의 원수가 우물쭈물하다가 군율을 잃은 탓이었습니다. 지금 장수를 명하는 날을 만났으니 폐지된 군율을 거듭 밝혀서 전의 잘못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신들이 이런 뜻을 가지고 진계했던 것인데, 사간 정태화는 고집을 부려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이미 신용을 받지 못했고 또 논척을 당했으니,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부교리 김수익(金壽翼)·성이성(成以性)과 부수찬 심지한(沈之漢)·권우(權堣)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장수를 명하는 날을 당해서 군율을 밝히고자 하였으니 가상하게 여길 만합니다. 본인이 막좌(幕佐)가 되었다고 하여 공의을 막고자 하였으니 일이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익희·김중일은 출사하게 하고 정태화는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태화의 말은 진실로 소견이 있어서인데 너희들은 체차하라고 논하니 시비가 밝지 못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그러자 김수익 등은 대죄하고 김익희와 김중일은 다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자점이 공을 믿고 법을 업신여겨 적이 오면 달아날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신칙하는 일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태화는 훈귀에게 아첨하여 장황한 말을 하면서 오직 자점이 그 말을 듣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니, 비루하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28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김자점이 공을 믿고 법을 업신여겨 적이 오면 달아날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신칙하는 일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태화는 훈귀에게 아첨하여 장황한 말을 하면서 오직 자점이 그 말을 듣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니, 비루하다.

 

3월 18일 계해

병조 판서 이서(李曙)가 병으로 면직되었다.

 

부교리 김수익과 부수찬 심지한(沈之漢)이 시폐를 진달하였다. 첫 번째는 천견(天譴)에 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장수를 가리는 것이고, 세 번째는 군율을 엄히 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상선(常膳)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마땅히 유념하고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김상(金尙)을 좌승지로, 목서흠(睦叙欽)을 우승지로, 심액(沈詻)을 좌부승지로, 이경여(李敬輿)를 우부승지로, 민응형(閔應亨)을 동부승지로, 조경(趙絅)을 집의로, 송희진(宋希進)을 헌납으로, 한인급(韓仁及)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3월 20일 을축

상이 영의정 윤방, 우의정 홍서봉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애통(哀痛)의 교서를 내리라고 청하였다. 부득불 지금 거행해야 하겠는데, 사체가 중대하니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에 있을 적에 임금에게 과실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애통한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랑캐 사신이 온 것을 통렬히 배척해서 천하 후세에 빛을 남기게 되었는데, 애통한 교서를 내리라는 것은 무엇을 의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의당 임금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 어찌 계청할 수 있는 일인가. 선조께서 용만(龍灣)에 계실 적에 애통한 교서를 내리셨는데, 이것도 나라가 십분 위급했던 때의 일이었다. 옛날의 대간들은 중대한 일이 있으면 대신에게 품의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와 같이 하는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지금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걱정스러운 때를 만났어도 논의하는 것이 있으면 번번이 서로 견제하고 있으니 매우 민망합니다. 개성에 진주하라는 논의는 비록 엄정한 것 같기는 하나, 이것도 전혀 시세를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애통한 교서는 우선 보류하고 구언하는 교서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니, 윤방과 홍서봉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대간이 원수로 하여금 방비하는 데 마음을 다 쓰게 하려고 하니, 그 뜻은 아름답다. 그러나 논계한 것에 이르러 몹시 사체를 잃은 것이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비국에서도 그에 대해 불가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정이 여염집의 아이들이 서로 모여서 놀이하는 것과 같으니 사체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대신이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때에 김익희(金益熙) 등이 천재와 변방의 걱정에 대해 두려워할 만한 단서가 있다고 극진히 진달하고, 인하여 애통한 교서를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대제학에게 교서를 지어 올리게 하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제학 김상헌이 차자를 올려 교서를 찬출할 때 고사(古事)를 본받아 허물을 인책하는 일을 기휘하지 않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마음은 옛사람의 마음과 다름이 없다. 경은 임의대로 찬출하라."
하였다. 상헌이 마침내 추숭(追崇)과 능변(陵變) 등의 일을 아울러 허물을 인책하는 내용 속에 찬입(撰入)하여 글이 이미 이루어졌다. 홍서봉이 경연 석상에서 김익희 등의 계청한 잘못을 힘껏 말하니, 상이 드디어 전에 원수를 신칙하여 보내자고 아뢴 일을 들어 준열히 나무라고, 구언 교서만을 내렸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덕이 부족한 내가 대위(大位)를 외람되이 지킨 지가 14년간이다. 한마음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과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뜻에 있어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나에게 붙좇지 않고 원망만이 마구 일어나고 있으며, 정성이 하늘에 이르지 못하여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있다. 이에 봄 얼음을 밟는 것과 같이 위태로워 잠자고 먹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여 임금된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 달 12일 밤에 백홍(白虹)이 달을 꿰었으니, 이는 실로 만고에 없던 변이다.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위태롭게 여겨 하루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피부에까지 스며든 절박한 재이는 모두가 임금 노릇을 잘못한 내가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양전(量田)은 경계를 바로잡고자 한 것인데 도리어 인화를 상실하였고, 융사(戎事)는 환난을 대비하려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의 원망을 불러들였다. 호령을 발하는 사이에 마땅함을 잃은 것이 많아 수칙하여 거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등용하는 즈음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여 사로(仕路)가 혼탁한 것인가. 언로가 막혀 공론이 아래에서 억눌렸으며, 바른 기운이 사라져 사풍(士風)이 조정에 떨쳐지지 않는 것인가. 여알(女謁)이 성행하여 궁위가 엄하지 못하며, 부역이 고르지 못하여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있는 것인가. 죄가 있고 없는 데 대해 형벌이 맞지 않은 것인가. 공이 있고 없는 데 대해 벼슬 주고 상 줌이 분명하지 못한 것인가. 《서전(書傳)》에 ‘하늘의 보심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보며, 하늘의 들으심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듣는다.’ 하였다. 내가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백성을 살펴보건대, 스스로 부끄럽기만 할 뿐이다.
아, 정묘년의 변란에 기미의 계책을 한 것은 대체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10년 사이에 공갈이 날로 심하더니, 이제는 차마 듣지 못할 말로써 통의(通議)한다는 핑계로 나를 시험하고 있다. 이에 나는 강약을 따지지 않고 의리에 의거하여 배척해 끊었는바, 병혁(兵革)의 화가 조석간에 닥칠 것이다. 이 또한 내가 당초 화친을 허락한 데서 말미암은 소치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름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릇 조정에 있는 신하 및 초야에 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가슴속에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위로는 임금의 잘못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의 질고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다 진달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구제하라."
하였다.

 

김류에게 상사도 도체찰사(上四道都體察使)를 겸하게 하였다.

 

3월 21일 병인

상이 도원수 김자점을 인견하고 보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중임을 받았으니 모든 일을 스스로 잘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장수를 명함에 있어서는 엄하게 신칙해야 하나, 전진에 임해서는 먼 데서 제어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을 적에는 으레 비방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전날에 나갔을 때는 성은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전과 다르니 모름지기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장수를 명할 때 임금이 꿇어앉아 수레바퀴를 민 것은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장수들을 격려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리 경계하고 신칙하여 보내기를 청하고 있으니, 말이 안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양서(兩西)는 수질과 풍토가 좋지 않으니 경은 조심하라."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성상의 염려가 여기까지 미치시니 감격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하직하고 나갔다. 승지 민응형(閔應亨)이, 천변에 대해 두려워하고 백성들의 곤궁함에 대해 애처롭게 여기며, 대간의 기절을 꺾어서는 안 되고 경연을 열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극진히 간하였는데, 정녕히 반복하여 매우 간절하였다. 상이 가납하였다. 또 승지에게 교대로 입시하여 각기 재변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할 방도를 진달하게 하였다.

 

3월 22일 정묘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강도(江都)를 나라의 보장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조정의 계획이 결정되었고 사민(士民)들이 의지하고 있는 바이니,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매번 묘당에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은, 나라의 계책이 마땅히 묘사(廟社)와 군부(君父)를 만전한 지역에 둔 다음에야 싸우거나 지키거나 함에 있어 군색한 일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마침 등대(登對)하는 기회에 망령되이 이에 대해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디 말을 조리 있게 못해 미처 뜻을 다 말하지 못한 채 갑자기 곁에 있던 신료에게 논척당하여 【 윤방이 탑전에서 강도로 이피(移避)하자는 뜻으로 진달하자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면전에서 논척하였다.】  감히 앞서 하던 말을 끝내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일어나 공격을 하였는데, ‘어떤 자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 윤황(尹煌)이 상소한 말이다.】  그러니 사리상 그날로 사퇴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신으로 있는 처지에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였기 때문에 감히 발끈하여 떠나지 못하고 조당(朝堂)에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오늘날까지 있어 왔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들의 상식에 벗어난 말은 마음속에 품어 둘 필요가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신경진(申景禛)을 병조 판서로, 이성구(李聖求)를 대사헌으로, 김반(金槃)을 대사간으로, 유수증(兪守曾)·오단(吳端)을 장령으로, 남노성(南老星)·엄정구(嚴鼎耉)를 정언으로, 심열(沈悅)을 판의금으로, 김수익(金壽翼)·심지한(沈之漢)을 지평으로, 이덕형(李德泂)을 형조 판서로, 홍명일(洪命一)을 부교리로, 박서(朴遾)를 부수찬으로, 김령(金坽)을 사간으로 삼았다.

 

3월 24일 기사

황주(黃州)의 군기고(軍器庫)에 불이 났다.

 

신경진에게 훈련 도감 대장을 그대로 겸직하라고 명하였다. 고사(故事)에 병조 판서가 훈국(訓局)을 겸임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경진이 병조 판서가 되었다 하여 전례를 인용해서 사양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응모에 자원한 이사립(李士立) 등 17인을 시열(試閱)하였다. 입격의 고하에 따라 6품직에 천전하기도 하고 변장에 제수하기도 하고,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기도 하고, 말과 궁전(弓箭)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3월 25일 경오

원손(元孫)이 탄생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손의 탄생은 바로 온 나라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택일하여 종묘에 고하고 반교와 진하(陳賀) 등의 일을 마땅히 전례에 따라 거행해야 합니다. 다만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윤방·김상용·홍서봉이 아뢰기를,
"이미 고묘(告廟)하고 반교(頒敎)하는 일을 행하면 반교할 때에는 그 복색을 따라야 하니, 다만 진전(進箋)을 더하고 만세[山呼]를 한번 불러서 신하들의 송축하는 정성을 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때에 진하하는 것은 자못 타당하지 않으니 반교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 반교문에,
"예(禮)는 봉선(奉先)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오래도록 주기(主器)010)  가 의탁함이 있게 되어 기쁘고 효는 착한 자손에게서 끊어지지 않아 다시 계서(繼序)에 걱정이 없게 되어 다행스럽다. 이에 백성들이 다 함께 기뻐하고 종묘의 제사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나라의 복이 장구한 것은 다 자손이 번창한 데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면면(綿綿)의 시(詩)는 고공단보(古公亶父)를 칭송한 것이며, 진진(振振)의 읊음은 문왕(文王)을 노래한 것이다.
다만 보잘것없는 내가 홍업(洪業)을 이어받아 지킴에 있어서, 조종께서 쌓으신 두터움을 받들었으므로 복을 내려주심이 한량이 없고, 천지의 보호하고 도우시는 영감을 받았기에 큰 명령이 붙어 있는 것이다. 지금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에 더욱 자식의 도움을 받아 안정시킬 것을 생각했고 항상 손자가 늦어지는 것을 우려했었다. 고매(高禖)가 길(吉)함으로 갚아주어 청궁(靑宮)에 해를 꿈꾸는 징조를 효험케 했고, 갑관(甲觀)에 상서가 날리니 자기(紫氣)가 열 달을 채워 탄생함에 응하였다. 길에 가득한 고고의 소리를 들어보니 뛰어난 품성과 자질을 타고났음을 알겠다.
당실(唐室)의 가아(佳兒)와 영부(令婦)는 태종(太宗)의 사랑이 이미 깊었고, 한가(漢家)의 세적(世嫡)과 황손(皇孫)은 선제(宣帝)의 기쁨이 더욱 컸다. 그러니 어찌 한 사람의 경사로만 그치겠는가. 실로 만세의 기쁨인 것이다. 빛이 왕세자에게 더하니 진색(震索)의 중괘(重卦)가 끝났고, 태어남에 대덕(大德)이라 이르니 해택(解澤)이 방류(旁流)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 조상(吊喪)이 문에 있고 하례가 여(閭)에 있어 길사와 흉사가 한꺼번에 닥친 날을 당하였다. 슬픔에 가슴아파하고 기쁨에 노래하면서 중외에 고하는 글을 지었다. 이에 교시하는 바이니 모두 알라."
하였다. 대제학 김상헌이 지은 것이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상소하여 체찰사를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조 판서 심열(沈悅)이 차자를 올리기를,
"의금부의 장관은 품계가 높고 임무가 중한 자리인데 신과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감당해 나가기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6일 신미

이시백(李時白)을 남한 산성 수어사로 삼고 그대로 호위 대장을 겸하게 했다.

 

3월 27일 임신

장단(長湍)의 한 면(面)을 파주(坡州)에 소속시켰다. 장릉(長陵)이 파주에 있는데, 경계가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병조 참지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언로를 열고 공물을 감하며, 병량(兵糧)을 다스리고 군율을 엄히 하며, 내사(內司)를 없애고 사치스러움을 제거하며, 남쪽 지방의 군사에게 포를 거두어서 서로(西路)에서 군사를 모집하며, 궁가를 엄하게 신칙하여 방자한 행위를 억제하고 대군들의 가사를 정파하소서. 인하여 이런 내용으로 허물을 인책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글을 내려 중외에 효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의 소장을 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진달한 일을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