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해
정광성(鄭廣成)을 도승지로, 정온(鄭蘊)을 대사간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집의로, 홍명일(洪命一)을 헌납으로, 권령(權坽)을 정언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수찬으로 삼았다.
청파(靑坡)의 돌다리 아래에서 뭇개구리가 서로 싸워 죽은 것이 많았다.
4월 2일 병자
원손의 탄생으로 산실청 도제조(産室廳都提調) 영상 윤방에게는 안구마를, 전 제조 최명길에게는 반숙마 1필을, 권초관(捲草官) 서경주(徐景霌)에게는 숙마 1필을, 내관 김성원(金聲遠) 등 2인에게는 아마 각 1필을 내려주고, 제조 김상헌, 부제조 심액(沈詻), 의관 최득룡(崔得龍), 차지 내관 김인(金寅), 승언색 김언겸(金彦謙)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을 가자하고, 주시관(奏時官) 송성립(宋誠立) 등 2인에게는 모두 본 아문의 첨정(僉正)에 제수하고, 의녀 및 하인 등에게는 미포(米布)를 주되 해조로 하여금 넉넉하게 마련하여 등급을 나누어 제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4월 5일 기묘
고부천(高傅川)을 장령으로, 임담(林墰)을 정언으로, 심액(沈詻)을 좌승지로, 김상(金尙)을 우승지로, 목서흠(睦敍欽)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4월 6일 경진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북군(北軍) 1백 인을 조발하여 쓸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경원을 이미 부원수라고 일컬었는데 수하에 군사가 없습니다. 만약 북군 1백 인을 거느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는 군사가 없는 장수가 되는 셈이니, 사체가 어찌 매몰(埋沒)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관서(關西)와 북도(北道)는 거리가 멀고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 시기에 대해서도 미리 알기가 어려우니, 형세를 관찰하는 즈음에 있어 반드시 기한에 미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부득이하다면 훈련 도감의 마대(馬隊) 1백 인과 어영청의 별초 무사(別抄武士) 50인을 급속히 내려 보내어 그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소서. "
하니, 상이 북군 1백 명을 거느리도록 허락하였다.
전라도에서 스스로 응모하여 서쪽 지방으로 달려온 자 25인에게 궁시를 주어 재주를 시험하게 했다.
4월 7일 신사
대사간 정온(鄭蘊)이 두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겼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체직하였다.
4월 8일 임오
대행 왕비의 계빈전(啓殯奠)을 행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계빈전의 예를 행할 때 정원이 문을 너무 늦게 열어 백관이 미처 일제히 도착해서 예를 행하지 못하였으니, 사체가 매우 해괴하고 경악스럽습니다. 색승지를 추고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색승지를 파직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는 예모관(禮貌官)의 죄이고 색승지의 잘못이 아니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
하였다.
계찬궁전(啓欑宮奠)과 조전(祖奠)을 행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임득열(林得說)을 장령으로, 이행우(李行遇)·박서(朴遾)를 지평으로, 남노성(南老星)을 정언으로 삼았다.
민간에 "발인(發引)하는 날에 서울에 변이 있을 것이다."는 와언이 떠돌았으므로, 이날 저녁에 성 안의 사람들이 일시에 대문을 닫고 몸을 숨겼으며, 재상들의 집에서도 세간살이를 옮기는 자도 있었다.
4월 9일 계미
4경 3점(點)에 대여(大輿)가 대궐을 나와 유시(酉時)에 능소(陵所)에 도착했는데, 여사(輿士) 및 각종 차비군(差備軍)이 6천 7백 70인이었다.
4월 10일 갑신
동지(同知) 박로(朴𥶇)가 상소하기를,
"우리 나라가 저 오랑캐들과 기미(覊縻)하여 전쟁을 쉬고 있는 지가 10년에 이르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 선물을 주어 미끼로 유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재물이 바닥나고 백성은 흩어져서 다시 쓸 미끼도 없게 되면 화친을 끊는 단서가 도리어 우리 나라에서 생길 것이며, 군사 행동을 하고 싶어도 국력이 이미 다된 형편일 것입니다. 요즈음 갑자기 참람하고 반역적인 말을 하다가 배척을 당하고 돌아갔으니, 앞으로 반드시 유감을 품고 분풀이를 하기 위하여 마구 질책하면서 더 많은 재물을 요구해 올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구차하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이는 도리어 그들의 계책에 말려들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백성의 뜻이 조금 분발되고 있고 재력이 아직 다되지 않은 이때에 협력하고 규획하여 사수할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기미하여 미끼로 유인하는 술책을 다시 쓸 수 있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처지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신은 성상께서 돌보아주는 은택을 지나치게 받아 직급의 높음과 임무의 중함이 귀근(貴近)한 신료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에 신은 항상 감격하면서 죽음을 맹세코 보답하기를 꾀하고 있습니다. 만일 저의 작은 정성을 바쳐 국가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간과 뇌가 들판에 뿌려지고 시체가 말가죽에 쌓이는 것이 신의 지극한 바람입니다. 바라건대 신의 충성심을 애처로이 여기시어 다른 무사들이 자원하여 서쪽 지방으로 달려가는 예를 따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면 헛되이 죽어서 이 말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 상소의 사연이 매우 옳으니 형세를 살펴 시행하겠다. 그리고 자원하여 서쪽 지방으로 가기를 청하니, 더욱더 아름답다. 그러나 문관의 재상이 종군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박로는 광명한 시대에 버려진 한 물건일 뿐이다. 국가가 오랑캐와 화친한 뒤에 신사(信使)로 가기를 자원하여, 이것을 힘입어 관직과 은총이 일시에 함께 높아졌다. 화친하는 일이 만약 끊어진다면 박로를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박로의 이 상소는 말이 비록 오랑캐를 막는 데 절실했지만, 그 뜻은 실상 화친을 굳히려는 데 있음이 속을 들여다 보듯 환하여 덮으려 하여도 더욱 드러났다. 그리고 출정에 따라 가겠다고 청한 데 이르러서는 임금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을 알고 감히 임금의 면전에서 속인 것이니, 더욱 통탄스럽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2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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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박로는 광명한 시대에 버려진 한 물건일 뿐이다. 국가가 오랑캐와 화친한 뒤에 신사(信使)로 가기를 자원하여, 이것을 힘입어 관직과 은총이 일시에 함께 높아졌다. 화친하는 일이 만약 끊어진다면 박로를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박로의 이 상소는 말이 비록 오랑캐를 막는 데 절실했지만, 그 뜻은 실상 화친을 굳히려는 데 있음이 속을 들여다 보듯 환하여 덮으려 하여도 더욱 드러났다. 그리고 출정에 따라 가겠다고 청한 데 이르러서는 임금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을 알고 감히 임금의 면전에서 속인 것이니, 더욱 통탄스럽다.
유성이 천시 서원(天市西垣)에서 나와 건방으로 들어갔다.
4월 11일 을유
예조 판서 김상헌이 산릉(山陵)에서 치계(馳啓)하였다.
"《오례의》에는 그날에 반우(返虞)하는 것을 정제(定制)로 삼고 있기 때문에 산릉을 하직하는 한 가지 절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여기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현궁(玄宮)을 내린 다음날 반곡(返哭)은 하면서 사릉(辭陵)하는 예가 없는 것은 실로 흠이 있는 듯합니다. 대신의 뜻도 그러하여 지금 미처 계하받지는 못하였으나, 이곳에서 강정하여 왕세자에게 진달하였습니다. "
이날 현궁을 내렸다. 정원과 옥당의 6품 이상과 육조가 문안례(問安禮)를 행하였다.
4월 12일 병술
반곡(返哭)하고 안신제(安神祭)를 행하였다. 안신제는 대신의 의논에 따라 창설한 것으로 옛제도는 아니다.
4월 14일 무자
예조가 원손(元孫)이 탄생한 경사를 이유로, 과거를 베풀어 취사(取士)하되, 중시(重試)의 대거(對擧)를 합하여 한 과거로 해서 선조조 기해년 별시의 예에 따라 서울에 다 모은 다음, 초장(初場)에는 논(論)·부(賦)를, 종장(終場)에는 책문(策文)을 보여 6백 인을 뽑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북병사 이항(李沆)이 치계하였다.
"오랑캐 기병 3인이 회령(會寧)에 와서 오랑캐 장사꾼과 몰래 말하기를 ‘근래 심양(瀋陽)에 변란이 있다. 병부 상서로 있는 자가 역모를 꾀하여 여러 대장과 결당했는데, 그 중 한 대장의 아내가 바로 한(汗)의 딸로서 몰래 그 아비에게 고하였다. 이에 문서를 찾아내고 대소 장관 1백여 인을 참살했다. ’고 하였습니다. "
4월 18일 임진
상이 승지 정광성(鄭廣成)·목서흠(睦叙欽) 등을 불러 각각 소회를 진달하게 하였다. 광성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평소에는 육조 낭관은 모두 문관이었고 음관(蔭官)은 몇 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공조와 호조는 거의가 다 음관이니, 이것 또한 한 폐단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후로는 문관과 무관을 가려서 차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광성이 아뢰기를,
"조정의 논의가 반드시 한가지로 나온 다음에야 나라의 체통이 비로소 높아지는 것입니다. 지난 선조조 계사년에 환도한 뒤에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을 맡았을 때에는, 한때의 논의가 모두 그에게서 나왔으며, 유성룡이 패한 뒤에 유영경(柳永慶)이 국정을 맡았을 때에도 유성룡 때와 같았습니다. 어찌 논의의 분열이 오늘날과 같았던 때가 있었겠습니까."
하고, 목서흠이 아뢰기를,
"붕당이 처음 갈라진 날부터 국가가 이미 불행해졌지만 지금와서는 더욱 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사대부들이 화합하면 저절로 당파가 없어질 것으로 여겨진다."
하였다.
4월 20일 갑오
이때에 크게 가물었는데, 이날 밤에 서리가 눈같이 내렸다. 상이 예관에게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하고 또 원옥을 심리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새 능의 경내에서 고총(古塚)을 파낸 것이 수백 기(基)에 이르는데, 당초에 옮겨 묻어 주라고 하였으나 창졸간에 혹 묻어주지 못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 가뭄의 재해가 어찌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베풀어서 주인 없는 혼령들을 위안해 주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시종신 심지한(沈之漢)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전 판서 김시양(金時讓)이 차자를 올리기를,
"현재 기강이 무너져 사의(私意)가 흘러 넘치고, 관절(關節)011) 이 크게 행해져 법령이 시행되지 않으며, 탐욕스런 풍조가 점점 성해져 사치가 끝이 없고, 군액(軍額)은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몇 가지 폐단은 모두 오늘날에 있어 병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근원 중에도 큰 것은 관절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공도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폐해지는 것입니다. 만일 엄하게 금단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방납(防納)하는 폐해가 시정(市井)에 있더라도 오히려 나라를 병들게 하기에 족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궁가와 사대부에게 옮겨져서 세력을 끼고 몇 곱절의 이익을 노리고 있으니, 앞으로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습니까. 법은 반드시 귀척과 근신들에게서부터 시행된 다음에야 사람들이 두렵게 여겨 감히 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친족을 친애하는 데 돈독하시어 궁가에 관련된 일이면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신료들을 공경히 대우하시어 죄가 재상들에게 있으면 모두 가벼운 법을 따라 다스리고 계신데, 지금의 계책으로는 위엄을 적절히 써서 여러 사람들을 격려하는 거조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사람이, 사치의 화는 천재보다도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천재는 비록 참혹하더라도 깊고 멀어서 기필하기 어렵지만, 사치의 폐단은 재물을 손상시키고 백성을 병들게 하므로 그 화가 즉시 닥치는 것입니다. 요즘 창우(倡優) 같은 하천(下賤)들도 모두 비단옷을 입고 일반 백성이나 종들도 모두 금수(錦繡)로 치장하고 있으며, 사대부들은 이보다 더욱 심합니다.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궁중에서 항상 무명옷을 입으셨고 세조 대왕께서는 늘 순무명 갓끈을 매셨으며, 성종 대왕께서는 늘 저고리를 빨아 입으시면서 검소한 생활로 아랫사람들을 인도하시어 온 나라가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상께서 진실로 조종들의 검소한 덕을 본받으신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어찌 이를 본받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사천(私賤) 제도는 천하 만국에 없는 것입니다. 호패(號牌)를 시행할 때에 군역으로 정한 자는 겨우 15만여 명이었는데, 사천은 40여 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신이 전에 듣건대, 고려조에서는 양처병산법(良妻幷産法)012) 이 없었기 때문에 한때의 권신(權臣)으로 부가 한 나라를 기울였더라도 노비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며, 고려조에 군사가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국사책을 상고해 보니, 이 법이 태종조 영락(永樂) 8년에 시작되었는데, 누가 건의하여 만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같이 적이 강하고 우리의 군사가 약한 때를 당하여 어찌 변통하지 않고 앉아서 망하기 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이 폐법(弊法)을 고치고, 백성을 모아 교련시키면 20년 후에는 국가에 소속된 강병(强兵)이 10여 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내수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나라에 영을 내린다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으며 누가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아, 이상의 다섯 가지는 오늘날에 있어서 참으로 큰 폐단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폐단은 관절에 있습니다. 관절이 행해지지 않으면 법령은 행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질 것이고 탐욕스런 풍조가 그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칠 것이며, 사치를 없애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고 군액이 많아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괄(李适) 등의 모반(謀叛) 사건은 기찰(譏察)하는 중에서 많이 발각되었으니, 국가에 크게 관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에 있어서는 기찰로 발각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난을 그치게 하는 데 있어 기찰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요즈음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 와언이 쉽게 일어나고 헛소문에 서로 동요되어 흉흉하게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이것이 어떠한 기상입니까. 모반은 바로 대역 부도(大逆不道)로서 혈기가 있는 자면 모두 싫어하는 것인데, 무엇이 걱정되어 모반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기찰을 하여 의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십니까. "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 진술한 것은 모두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다. 폐단을 시정하는 대책에 있어서는 어찌 감히 유념하여 시행해서 경의 뜻에 부응하지 않겠는가. "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차자 중에 진달한 관절과 방납 두 가지 조목은 참으로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법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신칙하여 발견되는 대로 통렬히 다스리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공물을 방납하는 것은 바로 폐단 가운데 큰 것입니다. 이것은 호조로 하여금 각별히 적발한 다음 입계해 논죄하게 해서 숨겨주어 서로 연좌되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합니다. 노(奴)의 양처(良妻) 소생에게 그 아버지의 역을 따르게 하는 법은, 일이 매우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는 더없이 큰 변통에 관계된 일이니, 빈청에서 회의할 때 아울러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니, 답하기를,
"차자 중에 진달한 다섯 가지 폐단은 모두 다 절실한 것으로, 바로 오늘날의 병통에 적중한 것이다. 그런데 단지 두 가지 일만을 들어 간략히 회계하였으니 매우 부당하다. 그 중에서 관절이야말로 가장 큰 폐단이다. 이제 다시 신칙하되 영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귀천을 따지지 말고 사죄(死罪)로 논하라. "
하였다.
4월 21일 을미
이보다 앞서, 경기 여주(驪州)·이천(利川)·죽산(竹山) 등지에서 기승을 부리는 도적들을 충원 현감(忠原縣監) 이배원(李培元)이 계책을 세워 잡아서 참살했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일을 보고하자 가자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이현영(李顯英)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물러가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2일 병신
경기 삭녕(朔寧) 등의 군에 크게 우박이 와서 화곡이 많이 손상되었다. 일을 보고하자, 상이 승지 심액(沈詻)·이경여(李敬輿) 등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재변인들 두렵지 않겠는가마는 한재가 가장 절박한 걱정거리다. "
하니, 심액이 아뢰기를,
"국상이 있어서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운데 한재가 또 이와 같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
하고, 이경여는 아뢰기를,
"선악의 나뉨은 호리의 사이에 있는 것이고 인심이 수습되고 흩어짐은 무상한 것이어서 반드시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혀 이 마음으로 하여금 의리 속에 흠뻑 젖게 해서 물욕에 가려지는 바가 없게 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임금이 경연을 열고 강독을 하는 것은 겉치레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임금의 희로로, 임금의 희로 역시 한 하늘인 것입니다. 지금 하늘의 가뭄이 이와 같으니, 상께서 특별히 크게 은전을 내리시어 반드시 천리에 합하고 인심에 순응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주고 벌주는 즈음에 편벽되게 한다면 무엇으로 한 나라의 인심에 답하겠습니까. 강상죄를 지은 무리들은 혹 석방하거나 양이(量移)하였는데, 말로 인해 죄를 얻은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정이 민망해 하고 답답해 하는 것은 모두 다 형벌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릇 형벌을 쓰는 방도는, 죄목이 중하더라도 위협에 못 이겨 한 경우에는 혹 용서할 수도 있으나, 죄목이 가볍더라도 그 마음씀이 선하지 못하여 말할 수 없는 유폐가 있을 경우에는 결코 가볍게 용서해 주기는 곤란하다. 이는 사사로운 뜻에 가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사리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
하였다.
4월 23일 정유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위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고,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항성(亢星) 위로 들어갔다.
4월 24일 무술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강화 유수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이처럼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가서 쌀값이 비쌀 때에는 창고에 남아 있는 쌀 수천 석을 내다 팔아 포를 사 두었다가 추수 때 도로 내다 팔아 쌀을 사들인다면 반드시 이익이 배가 넘을 것입니다. 설령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사들이기가 어렵더라도 무명과 베를 보관하고 있다가 때를 기다려 운용한다면 마침내는 본전을 잃을 걱정이 없어서 옛날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였던 뜻에 합치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경우에는 세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쌀이 귀한 때에 방출해서 서울과 지방의 곤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고루 그 혜택을 입게 하는 것이 첫 번째 이익입니다. 봄과 여름에는 포를 사들이고 가을과 겨울에는 곡식을 사들이는바, 귀할 때 방출하고 흔할 때 거두어 들이니 소득이 반드시 많을 것이 두 번째 이익입니다. 환자(還子)는 늑급(勒給)·포부(逋負)·독책(督責) 세 가지의 폐단이 있는데 반해 이 법은 이런 폐단이 없고, 또 환색(換色)하고 취식(取息)하는 이익이 저절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 세 번째 이익입니다. 이 뜻을 가지고 널리 물었더니 여럿의 의논이 모두 편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새로운 법을 만드는 데 관계되고 또 군향을 회계하는 일이라서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습니다. 조정에서 참작하고 헤아려서 처치하소서. "
하였다. 호조가 복계하기를,
"이것은 바로 상평창의 유법인데 이것으로 군향을 새것으로 바꾸는 계책을 겸하고자 하였으니, 매우 요령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수천 석만 내다 팔면 혜택이 넓지 못하고 이익도 적습니다. 만일 기꺼이 하려는 자가 있으면 묵은 것을 가져다 값을 더 붙여 팔게 할 경우, 비록 만여 석에 이른다 하더라도 방해될 바가 없을 것입니다. "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수량이 너무 많으면 훗날에 마련하기 어려운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니, 수천 석만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 "
하였다.
4월 25일 기해
상이 하교하기를,
"나라의 치란은 임금의 덕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마디 말이 비록 작은 것이나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판가름 나고, 남은 모르고 나만이 알고 있는 곳이 비록 깊더라도 삼가지 않으면 드러나는 것이니,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본래 바탕이 용렬하고 학문이 없어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고도 어질고 간사함을 식별하지 못하고 일에 임하고 법도를 헤아림에 있어서도 시비를 분별하지 못한다. 이에 분하고 성내는 말이 본래의 생각 밖에서 튀어 나오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뜻이 혹 공정하지 못한 데에 이르기도 한다. 그리고 세월이 오래 지남에 게으른 마음이 날로 생기고 기로(耆老)들이 많이 죽고 없어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해이해져 출치(出治)의 근원이 올바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인심이 분열되고 국가가 망하게 되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그리고 초상을 만난 뒤로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오래도록 경연을 폐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죽은 이를 애도하고 어진 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것도 지나친 일이었다. 지금 하늘의 경고가 갈수록 더욱 심한 것이 귀에 대고 말해 주고 마주보고 명령하는 것보다도 더하기에 나는 매우 두렵게 여긴다. 지금부터는 개과 천선하여 위로 하늘의 경고에 보답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한다. 그러니 우리 신민들은 나의 개과를 받아주고 함께 큰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말며, 또한 각자 마음을 새롭게 가져 구습을 일체 바꾸고 성실하도록 힘써서 기어이 난국을 헤쳐 나가도록 하라.
삼사(三司)는 허물을 바로잡고 잘못을 규정해서 상하로 하여금 허물이 없게 하고, 이조는 사정을 두지 말고 붕당에 치우치지 말아 어진 사람만을 등용하며, 호조는 용도를 줄이고 폐단을 막아서 백성의 힘을 손상하지 말고, 예조는 학업을 권장하여 교화를 밝히며, 병조는 인재를 장려하여 뽑아 기용에 부족하지 않게 하며, 형조는 형벌을 삼가고 죄수를 긍휼히 여겨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며, 공조는 허물어지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여 전날과 같음이 없게 하라. 그리고 여러 관청들도 각각 마음을 다해 직무를 폐함이 없게 하라. 조정이 한번 바루어지면 사방이 반드시 감화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아,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대로 국은을 받았으니 분의(分義)의 막중함을 생각하고 직사(職事)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해, 다스려짐이 이르게 하고 교화가 일어나게 하라. 그러면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어찌 빛남이 있지 않겠는가. 지성껏 하면 이것을 이루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니, 각자 힘쓸지어다. 옛말에 ‘난(亂)한 자를 형벌함에는 중한 법을 쓴다. ’고 하였다. 뒤로는 만일 사정을 따라 법을 업신여기거나 위를 속이고 붕당을 비호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한 법을 적용할 것이며, 귀척과 근신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 노릇하기도 어렵고,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 ’고 하였는데, 상하가 각자 조심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위태로움을 바꿔 편안하게 만든다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으며 즐겁지 않겠는가. "
하니, 승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하교를 보건대, 허물을 자책하시고 신하들을 책려하신 뜻이 말 밖에 흘러 넘치고 있으므로 받들어 두세 번 읽음에 지극히 흠앙하고 감격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끝까지 이것을 생각하시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몸받아 행한다면,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겠으며 백성이 어찌 편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작하여 전화 위복하는 기틀이 참으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신들이 상례에 따라 받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치상 마땅히 정부에 전지하여 백료에게 분명히 알려야 하겠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품달합니다. "
하자, 답하기를,
"글이 짧고 말이 졸렬하여 고유(誥諭)에 합당하지 못하다. 승지는 나를 위하여 잘 다듬어서 계사한 대로 전포(傳布)하라. "
하였다.
주강에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참찬관 유백증(兪伯曾)이 아뢰기를,
"도성 안에 흉패한 무리들이 밤을 타 함부로 다니면서 대군의 집에 가 소리치기를, 역적 이공(李珙)013) 의 아들을 영립(迎立)한다고도 하고, 광해군을 추대한다고도 하고 있습니다. 인심이 어찌 이와 같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세가 이와 같으니 매우 걱정스럽고 두렵다."
하였다. 백증이 아뢰기를,
"반정한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점점 처음만 같지 못하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나간 일은 허물하지 말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함께 국사를 구제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참찬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지금 이 온화하신 교서는 참으로 중흥의 바탕이 됩니다. 나라의 형세가 비록 위태로워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위태로움을 바꿔 편안하게 만드는 계기가 이 교서에 있습니다. 《시경》에 ‘시작이 없는 것은 없으나 끝맺음을 잘 하는 자는 드물다.’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항상 반정하였을 때의 마음을 간직하고 계신다면 나랏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하교는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자세히 내 뜻을 전하지 못하였으나, 이 뒤로 내가 하는 것을 보면 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하였다. 지사 김상헌이 아뢰기를,
"상께서 밤낮없이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시는 것이 지극하기는 합니다. 다만 잗단 일에 마음을 쓰기 때문에 치화(治化)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을 닦은 다음에야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수신하는 데 있어서는 허물을 고치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시고, 백성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재용을 절약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시고,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는 어진 이에게 맡기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소서. 허물이 있으면서 고치지 않으면 몸이 닦여지지 않고 재물이 있다고 절약해 쓰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손상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등용함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총명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의 어진 이를 얻어 그에게 위임하시면 여러 어진 이가 모두 나올 것입니다. 그 나머지 일들은 한 유사의 일일 뿐입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치에 맞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
하였다.
4월 26일 경자
지사 이성구(李聖求)가 차자를 올리기를,
"옛말에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어제 받든 전교에 ‘이기기 좋아하는 뜻이 혹 공정하지 못한 데에 이르기도 한다. ’고 분부하셨는데, 이는 실로 성상께서 속에 쌓인 마음을 헤쳐 내보이셔서 곧바로 병통의 근원을 진술하신 것이니, 교서 한 편 중에서 허물을 인책하신 말씀은 이것보다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행한 일에서 비추어 본다면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큰 은택을 내리심에 있어 폐모의 죄를 지은 흉도들도 은전을 입었는데, 이덕수(李德洙)·이경헌(李景憲)·나만갑(羅萬甲)의 무리는 단지 과격하여 체모를 잃은 죄에 지나지 않는데도 한번 엄한 견책을 입자 석방될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심에서 그렇게 처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번연히 깨달으시어 빨리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는 잘못을 제거하신다면 종사와 신민의 다행함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
하니, 답하기를,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
하였다.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 회답사(回答使) 이확(李廓)이 치계하기를,
"노중(虜中)에 있을 적에 마침 그들이 참호(僭號)를 칭하였는데, 위협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행차가 통원보(通遠堡)에 도착하여 그 글을 열어 보니, 말 뜻이 패악하고 설만하여 감히 싸가지고 오지 못하고 몰래 잡물 속에 두고 왔습니다. 원본은 등사하여 올립니다. 그 글에 ‘대청 황제(大淸皇帝)’라 칭하였고, 우리 나라를 ‘너희 나라’라고 칭하였습니다. "
하였다.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상소하기를,
"나덕헌·이곽 등의 장계의 사연과 등출한 적서(賊書)의 말을 보니 가슴이 찢어져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 적이 참호를 가지고 사신을 구박하는 날 칼에 엎어져 의(義)에 죽는 일은 이 무리들에게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일 구박을 받으면서 고악(鼓樂)의 소리를 참여하여 들은 일은, 중호(衆胡)들에게 견제되어서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참람하고 설만한 글에 이르러서는, 풀로 봉하고 단단히 싸서 즉시 열어 보지 못하고 통원보에 와서야 비로소 열어 보고 몰래 버려두었다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특별한 거조를 하지 않는다면 예의의 나라인 우리 나라가 다 금수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끝내는 인심을 수습하고 사기를 고무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의사(義士) 두어 사람을 모집하여 덕헌 등의 머리를 가지고 적한(賊汗)의 문에 던져 주고는 대의에 의거하여 준열하게 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아무리 개돼지 같다 하더라도 반드시 무서워 꺼릴 것이며, 설혹 분이 나 침략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 장졸이라면 그 누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칼날을 무릅쓰면서 북쪽으로 달려가 죽음으로써 싸울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덕헌 등이 의리에 의거하여 자결하지 못하였으니, 극히 놀랍습니다. 다만 그들이 끝내 굴하지 않은 정상은 대략 한(汗)의 별서(別書)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랑캐들이 이른바 무례하다고 한 것은 바로 그들이 스스로 변명하여 의리를 지킨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만 국서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가지고 왔으며, 열어 본 뒤에 이르러서도 명백하게 던져버려 그들로 하여금 즉시 알게 하지 못하고 몰래 버려두고서 서둘러 돌아왔으니, 일을 처리한 것이 참으로 매우 해괴하고 분합니다. 이미 굴하지 않은 자취가 있는 이상 갑자기 가형하여 죽일 수는 없으나, 봉사(奉使)로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히 잡아다 국문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지금 한서(汗書)의 등본을 보니 위호(僞號)를 자칭하고 우리 나라를 깔보았는데, 성을 내고 협박하며 패만스럽게 한 말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신이 만일 힘껏 다투어 고칠 수 없었다면 마땅히 던져 버리고 왔어야 할 것인데, 지금 묵고 있던 곳에 몰래 버려두고 왔습니다. 오랑캐들이 비록 그것을 보더라도 반드시 그 사실을 감추고 말하지 않고는 오히려 우리 나라 사신이 달갑게 받아 가지고 갔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모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씻기 어려운 나라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덕헌의 이름을 빌려 격서 한 통을 만들어서 통원보에 전달하되, 중도에서 뜯어 보고는 감히 가지고 오지 못하고 묵던 곳에 버려두고 온 사실을 갖추 진술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汗)에게 알리게 해야 합니다. 평안 감사로 하여금 별도로 차인을 가려서 통원보에 급히 보내게 하는 것이 사기에 합당한 듯합니다. 속히 단행하여야 합니다. "
하니, 상이 그 말에 따라 대사성 이식(李植)에게 그 글을 짓게 했는데, 그 글에,
"우리들이 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갑자기 뜻밖의 핍박을 당하여 갖은 곤욕을 당했는데, 이는 전에는 없었던 바입니다. 우리들이 나올 때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두 장수에게 국서를 전해 받았는데, 봉함이 매우 견고하였습니다. 전례에 의거하여 열어 보고자 하니 두 장수가 굳게 고집을 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말을 달려 십리하보(十里河堡)에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뜯어 보았습니다. 서면(書面)의 칭호와 서말(書末)의 인문(印文)이 전의 글과는 체제가 다르고, 글 중에 우리나라를 일컬어 ‘너희 나라[爾國]’라 하면서 질책한 말에는 다시는 형제 사이에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없고 노예와 같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나라의 신하가 어떻게 차마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귀보(貴堡)에 도착하여 말이 병났다고 핑계 대고 귀관(貴館)의 잡물 속에 머물러 두고 왔습니다. 귀보에 바라건대, 그 글을 가져다가 한(汗)에게 전달해 주었으면 합니다. "
하였다.
4월 28일 임인
정홍명(鄭弘溟)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9일 계묘
상이, 예조·공조·한성부가 한 달 동안 한 번도 개좌(開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 공조 판서 심열(沈悅), 좌윤(左尹) 안응형(安應亨)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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