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2권, 인조 14년 1636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3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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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진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사 이홍주(李弘胄)가 나아가 아뢰기를,
"선현의 자손을 이제 녹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사로 하여금 회의하게 하소서.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회의란 것은 선현에게 기록할 만한 것이 있는가의 여부를 의논하여 그 자손을 등용하고자 하는 것인가? "
하자, 홍주가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신중하게 간택해야 한다. 그리고 청백리(淸白吏)의 자손도 거두어 쓰는 거조가 있는가? "
하니, 홍주가 아뢰기를,
"으레 병조에서 부록(付祿)한다고 합니다. "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즘 염치의 풍조가 전혀 없으니 지금 그들도 똑같이 녹용하여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
하였다.

 

병조 판서 최명길이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일 을사

김신국을 호조 판서로, 강석기(姜碩期)를 예조 판서로, 장유(張維)를 공조 판서로,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이행우(李行遇)를 헌납으로, 조경을 사간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연신(筵臣) 한여직(韓汝溭)이 아뢰기를,
"중외의 가난한 사람 중에 혼인의 시기를 놓친 자가 많으니 관에서 물자를 주어 예를 올리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 말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법전을 상고해 보니 《예전(禮典)》 혜휼조(惠恤條)에 ‘사족의 딸로 30세가 가깝도록 가난하여 시집 못 간 자에게는 본조가 계문하여 물품을 헤아려 준다.’고 하였는데, 난리를 치른 뒤로 복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연신이 진달한 것은 참으로 지극히 윤당하니, 경외에 알려 법례(法例)대로 거행하소서. "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5월 3일 병오

공조 판서 장유(張維)가 병으로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5월 4일 정미

상이 하교하였다.
"지난해 국휼을 당하여 백성들의 재력이 바닥났는데 올 여름에 다시 가뭄을 만나 들판의 곡식이 모두 말랐다. 지금 비록 비가 왔으나 두루 흡족하지 못하고, 팔도가 모두 그러한지도 기필할 수 없으니, 민생을 생각하면 참으로 걱정스럽다. 정축년 정조(正朝) 이전의 명일 방물(名日方物)을 제도로 하여금 모두 봉진하지 말게 하여 조금의 폐단이나마 덜게 하라. 또한 해조에 명하여 도시 백성들의 폐해와 병통을 자세히 살펴 사의(事宜)를 헤아려 변통해서 내가 백성들을 보살피는 뜻에 부응하게 하라."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이 졸하였다.
충신은 광주(光州)의 아전이었다. 젊어서부터 민첩하고 총기가 있었다. 임진 왜란으로 선조가 용만(龍灣)으로 피난하였을 적에 본도 병사가 사람을 뽑아 행재소(行在所)에 일을 아뢰고자 했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충신이 솔선하여 용만으로 달려가자 선조께서 불러 보았다. 고상(故相) 이항복(李恒福)이 이끌어 휘하에 두었는데 매우 친애를 받았다. 갑자년에 별장(別將)으로 원수(元帥)        장만(張晩)을 따라 남이흥(南以興)과 더불어 역적 이괄을 토벌하여 죽임으로 해서 1등 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여러 번 곤직(閫職)을 역임했으며, 부원수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한 것이다.

 

조위한(趙緯韓)을 좌부승지로, 민응형(閔應亨)을 우부승지로, 유성증(兪省曾)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부수찬 김익희(金益熙)가 상소하기를,
"신은 들으니, 다스리는 도에는 본(本)과 말(末)이 있는데 근본이 바루어진 자는 비록 오활하고 느리더라도 실은 힘이 되기 쉽고, 말단을 구하는 자는 비록 절박하고 지극한 것 같으나 실은 공이 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어진 논사자들은 반드시 깊이 본말의 소재를 밝혀서 먼저 근본을 바루었으니, 근본이 바루어지면 말단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은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천하의 일은 천변 만화하여 그 단서가 무궁하나 한 가지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인주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어느 한 가지도 정(正)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게 되고, 인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천하의 일이 어느 한 가지도 정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 이는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본체는 처음에는 모두 혼연하고 순수한 것이지만, 정(正)과 부정(不正)의 다름이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이 마음 가운데에는 본디부터 반드시 천리도 있고 인욕도 있는데 이것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천리를 따르면 이 마음이 공변되고 바르며 인욕을 따르면 이 마음이 사사롭게 되고 간사해집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용하는 사이에는 두 가지가 번갈아 이기고 지고 하는데, 한 몸의 시비 득실과 국가의 치란 안위가 여기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근본을 단정히 하고 다스리는 데 있어서 지극히 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왕위에 오르신 지 10여 년이 되었지만, 성상의 뜻에 보답하고 잠시라도 백성의 바람을 위로해 줄 만한 조그마한 효과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비판한 조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현사(賢邪)를 알고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고 계시며, 화를 억누르고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을 경계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일일이 점검해 보면 사욕의 얽매임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언(知言)과 지인(知人)에 있어서는 요·순도 어렵게 여겼습니다. 진실로 총명이 요·순에 미치지 못하는데 또 한 몸의 사사로움으로 호오(好惡)의 공심을 침범당한다면 충(忠)을 가지고 사(邪)라 하고 불초(不肖)를 가지고 현(賢)이라 하며 비(非)를 시(是)라 하고 시를 비라고 하는 데 이르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신은 누가 군자고 누가 소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청천 백일같이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행동이 귀신이나 도깨비와 같아서 예측할 수 없는 자는 반드시 소인이요, 빼어나기가 송백(松柏)과 같고 깨끗하기가 빙옥(氷玉)과 같은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빌붙기를 등나무나 담쟁이같이 하고 교결하기를 뱀이나 지렁이와 같이 하는 자는 반드시 소인일 것이요,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고 이해를 돌아보지 않는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사심을 영위하고 제 몸만을 이롭게 하여 염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소인일 것이요, 임금의 안전에서 바른 말을 하면서 꺼리지 않고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군자이고, 아첨하면서 잘못된 대로 따르며 총애만을 차지하려고 힘쓰는 자는 반드시 소인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임금 자리에 오르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신하들을 부리는 데 이미 익숙하시니, 신하들의 사정(邪正)과 현부(賢否)를 어찌 살피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군자와 소인을 함께 거두고 감(甘)·고(苦)를 겸해 조화시켜 그 사이에서 무마하고 길들이려 하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오른 자는 여리고 나약한 사람이 많고 소원하게 대하는 자는 반드시 강직하고 꼿꼿한 선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전하께서 조정 위에서 현부를 분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한 마음 가운데에 호오를 공변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 발동하기 쉽고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성냄이 가장 심한데 성을 내되 사리에 맞지 않으면 해로움이 가장 크기 때문에 부자(夫子)가 손괘(損卦)의 상(象)과 숭덕(崇德)의 물음에 대해 모두 정녕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바름을 얻지 못하게 되고 화(禍)의 근원이 모두 이 속에서 따라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신데다 맑은 정치에 종사하신 지도 이미 오래되셨으니 가슴속이 맑으실 터인데, 무슨 분하고 성낼 일이 있기에 말하고 수응하는 데 노기가 발하여 화평한 기상이 전혀 없단 말입니까. 이는 아마도 본원을 함양한 공력이 지극하지 못한 데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을 따져보면 이 역시 사의(私意)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일 그 병통의 근원을 세밀히 검토하여 힘써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분노의 발동이 치달리는 우레와 같이 갑자기 치받쳐 오는 것을 그 누가 안정시켜 잠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과 같은 것은, 또한 사사로운 뜻과 기필함과 꽉 막힘과 사사로운 사심이 심중에 쌓이고, 화내고 원망하며 억세고 억지를 부리는 기운이 밖에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잠시 역경(逆境)에 부딪히면 오로지 자기 뜻을 펴기에만 힘을 씁니다. 이에 비록 뭇 신하들에게는 자신의 뜻대로 하면서도 끝내는 자기 한 몸의 사정에 굴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삽시간에 발생한 것이나 마침내는 무궁한 걱정을 불러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대체로 이 네 가지 병통은 모두 사사로운 뜻이 제거되지 못한 것에 근본한 것으로, 마침내는 일을 처리하는 데 작용해서 정치를 해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유는 말하기를 ‘불세출의 큰 공을 세우기는 쉬우나 지극히 작은 본심은 보존하기 어렵고 중국을 침략하는 오랑캐는 축출하기 쉬우나 한 몸의 사의는 제거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학문을 강마하는 공부에 더욱 힘쓰시어 반드시 이치를 궁구해 마음을 밝게 하고 잡념을 제거하여 몸가짐을 바르게 하소서. 그리고 또 힘써 행하여 그 실상을 실천해서 항상 의리로써 심흉에 대어 주어, 다만 밝고 넓은 본원만을 보고 사욕에 얽매이지 말게 하소서. 그리하여 청명한 본연의 체(體)를 온전하게 하고 물건에 대응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싹트면 반드시 삼가서 살펴 보아 과연 천리에 합당한 것이면 공경히 넓혀 나가서 조금이라도 막힘이 없게 하시고, 과연 인욕에서 나온 것이면 공경으로 이겨내어 조금이라도 막히지 않게 하여 일호의 사의도 그 사이에 낄 수 없게 하소서. 그러면 천하의 일이 장차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전하께서 삼사(三司)를 격려하신 교시에 거듭 감동하였습니다. 삼사는 공의(公義)가 있는 곳이므로 천하의 일에 있어 참여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구양수(歐陽修)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직수(職守)에 매이지 않은 것은 오직 대간만이 말할 수 있고 재상만이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 경력(慶曆) 연간에 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이 정승이 되었었는데, 그때 대간은 일을 만나면 신바람이 나서 힘있는 대로 묘당(廟堂)을 공격했으나 한기와 부필은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상정으로 말한다면, 대간의 세력은 너무 거센 듯했으며 재상의 권력은 또한 너무 가벼운 듯했습니다. 그러나 경력 연간의 세상 도의는 오늘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한기와 부필의 재상으로의 업적은 지금 사람이 바랄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차라리 대간의 풍지(風旨)를 받을지언정 언로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대신다운 말로, 후세에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고 홀로 일대(一代)의 종신(宗臣)이 되기에 충분한 말입니다.
아, 허물을 다스리고 잘못을 규정하여 상하로 하여금 허물이 없게 만드는 것이 본디 삼사의 직책입니다. 그런데 삼사가 된 자들이 이에 대한 의리를 알지 못하고 오직 입을 다물고 구차하게 용납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으니, 마땅히 전하께서는 이것을 개연히 여기시고 특별히 격려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삼사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역시 전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뜻에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고 거역하는 것을 꺼리며, 나약한 것을 기뻐하고 날카로운 것을 싫어하여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드러나게 호오를 보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상정(常情)은 호령을 따르지 않고 뜻을 따르는 법입니다. 그 때문에 대간의 풍채가 날로 위축되어 오직 자질구레한 것만 적발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묵고 낡은 것만을 주워 모아 형식적으로 책임만 메꾸려는 바탕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자신에 대해 통렬히 징계하여 지성으로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정직한 기상을 후히 용납하시어 꺾지 마시며, 언로를 넓게 열어서 가리워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면 전하의 삼사(三司)가 된 자 중에 누가 힘쓰고 연마하여 성덕을 만에 하나나마 도우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전에 대간으로 있을 적에 구봉서(具鳳瑞)를 탄핵했었는데, 어찌 일호인들 봉서에게 원한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다만 편협한 성격에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며, 또 관직이 간관임을 생각하여 공의에 따라 논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무고(誣告)를 갑자기 받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통촉하실 것이고 공의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신은 그들과 서로 견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중신(重臣)에게 논척을 받았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심정과 사세를 통찰하시어 빨리 벼슬을 깎아 주소서. "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지극한 뜻을 잘 알았다. 그대가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 가상하다. 상소의 말이 아름다운 말과 지극한 논의가 아닌 것이 없으니, 내 마땅히 유념하여 개혁하겠다. 지난번 중신의 말에 대해서는 나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행공하라. "
하고, 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김익희가 구언을 인하여 소장을 올렸는데 그 말이 솔직하고 간절하여 그 뜻이 가상하였다. 뜻 있는 선비들이 즐겁게 듣고 흥기하기를 모두 이 사람과 같이 한다면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고 백성이 옛스럽지 않은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에게 숙마 1필을 하사하여 나의 뜻을 알리라. "
하였다.

 

5월 5일 무신

비국이 아뢰기를,
"요즈음 화친하는 일이 이미 끊어져 침략해 오는 변란이 조만간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부원수는 수하의 군사가 수백 명도 되지 않고, 임경업(林慶業)이 가장 앞에서 적을 막고 있는데 수비가 완전하지 못하며, 유림(柳琳)이 포수(砲手)를 연습시키고 있으나 또한 특별히 격려해 주는 거조가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계책은 결코 고집스럽게 상규(常規)만을 지키다가 사기(事機)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경중에서 자원한 사람인 정흥립(丁興立) 등 19인과 경기의 이상준(李尙俊) 등 32인, 전라도의 신여장(申汝章) 등 10인을 먼저 부원수에게 보내주되, 그 수가 매우 적으니, 신들이 전에 청한 훈국의 마대(馬隊) 1백 인은 연습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도성 안에 두어도 긴급히 쓸 곳이 없으니, 아울러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서변(西邊)에 과거를 설치하는 것은 내지에서와 같이 병액(兵額)을 잃어버리고 사로를 혼탁하게 하는 폐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과액(科額)에 포함되면 정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명기와 사체에 대해서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이때에 미쳐 평안도에 가서 먼저 한 과거를 설치하고자 하는데, 다만 편전(片箭)과 포수(砲手)를 시험보여 한 기예만 입격하면 선출해서 많은 무사를 뽑아 일로(一路)의 장정(長征)에 쓰는 것이 사의에 마땅할 듯합니다. 또한 임경업이 말한 금군 공명첩(禁軍空名帖) 10여 장에 대해서는, 본래 관직이 아니고 수도 많지 않습니다. 과연 이것을 가지고 순절(殉節)할 선비를 얻을 수 있다면, 사체에 별로 손상될 것이 없고 혹 위급함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진달하는 바입니다. "
하니, 답하기를,
"마땅한 쪽으로 면대해 의논하여 처치하라. 그리고 금군첩은 만들어 보내라. "
하였다.

 

5월 8일 신해

대사간 김경징(金慶徵)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경징은 경박하고 교만하여 대사간에 적합하지 않은데, 대관들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양하여 체직될 수 있게 하였다. 명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3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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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경징은 경박하고 교만하여 대사간에 적합하지 않은데, 대관들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양하여 체직될 수 있게 하였다. 명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5월 10일 계축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5월 11일 갑인

유성이 위성(危星) 위에서 나와 실성(室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정치를 하는 요점은 인재를 얻는 데 있으며, 다스림을 이루는 일은 어진 이 구하는 데 급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인재는 각 시대마다 부족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어진 이를 오게 하는 도가 넓지 못하여 어진 이로 하여금 문지기나 야경꾼으로 있게 하고 은자(隱者)로 하여금 오히려 깊이 숨지 못할까 근심하게 한다면, 비록 다스림을 이루고 교화를 일으키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지금에 할 도리로는, 널리 현능한 사람을 구하여 직무를 맡기는 것보다 나은 방도가 없다. 몸가짐을 방정하게 하여 덕행이 있는 자, 의리에 마음을 쏟아 학술이 있는 자,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아 공무를 봉행함에 굳세고 과단성이 있는 자, 용기와 슬기가 남보다 뛰어나 대적을 억누를 수 있는 자, 기개와 절의가 돈독하고 확고하여 직간할 수 있는 자, 세상 일에 통달하고 일 처리에 밝고 민첩한 자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쓸 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관직에 있는 문무 관원들로 하여금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라. 또 제도(諸道)의 감사들에게 명하여 찾고 물어서 계문하게 하여 어진 이가 버려지는 탄식이 없게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기는 매우 어려우나 자신을 아는 데는 밝은 법이다. 재주와 지혜가 탁이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외침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각자 자기 자신을 천거하여 내가 등용하기를 기다리라. 아, 옛날 사람 중에는 스스로를 천거한 자가 있었다. 만약 임금을 잘 인도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서 국가를 태평하게 할 수 있다면 어찌 반드시 모셔가기만을 기다리고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
하였다. 이에 문관·무관 3품 이상이 각각 2인씩 천거하였다.

 

5월 15일 무오

이민구(李敏求)를 대사헌으로, 조정호(趙廷虎)를 강원 감사로, 민응형(閔應亨)을 동부승지로, 전식(全湜)을 부제학으로, 윤집(尹集)을 이조 정랑으로, 홍명일(洪命一)을 헌납으로, 조빈(趙贇)을 교리로, 유황(兪榥)·조수익(趙壽益)을 정언으로 삼았다.

 

신경원(申景瑗)이, 먼저 함경남도의 출신(出身) 8백 60여 인 및 무학(武學) 3백 60여 인을 조발하여 위급할 때 쓸 수 있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신경원이 부원수의 임무를 맡았으니 책임이 막중한데, 수하에 병사가 없습니다. 만일 뜻밖의 변을 만날 경우 어떻게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겠습니까. 함경남도의 일은 경원이 자세히 알고 있으니, 본도에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제외하고 전마(戰馬)가 있는 날쌔고 건장한 자 3백 인을 가려 뽑아서 급히 교부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평안 병영(平安兵營)의 수영패(隨營牌)는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역시 전마가 있는 자 2백 인을 부원수에게 이속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6일 기미

예조가 아뢰기를,
"근년에 오면서 동몽 교관(童蒙敎官) 중에 직무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 자가 많아, 매번 본조가 고강(考講)할 때 구두를 해석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강에 응하여 녹을 받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지금 이후부터는 교관에게 명하여 소속된 동몽들에 대해 각각 성명과 나이를 써서 나열하여 거안(擧案)을 만들게 한 다음, 한 달에 두차례씩 고강하되, 혹 예절을 논란하게도 하고 재예를 시험하게도 하소서. 그리고 교관의 근만을 등급을 매겨 성과를 이룬 자가 있으면 계품하여 승진시켜서 격려하고 권면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외방에 대해서는 목이나 부 등 큰 고을에는 교양관을 가려 보내어 그에게 늠료를 주어서 체모를 무겁게 해 속읍을 순회하며 유생을 가르치게 하되, 1년마다 서로 체임하게 하고, 감사는 그의 근만을 고찰하여 전최(殿最)를 엄격하게 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작은 고을은 본 고을 수령이 감사와 상의하여 각각 그 고을 사람 중에 재행이 있는 자를 가려 뽑아 학장(學長)으로 삼은 다음, 학업을 권장하고 겸하여 예절을 강론케 하며, 또 재예를 시험하되 일체 규례에 의하게 하고 교양관이 순회할 때 그 배운 것을 시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직임을 잘 거행한 교양관 및 학장은 본도 감사로 하여금 사실대로 계문하게 하여 교양관은 실직에 올려 서용하고, 학장도 상당한 직을 제수하여 조정에서 권장하는 뜻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인재가 성취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규정에 관계되는 것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
하였다. 김상용(金尙容)·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해조에서 아뢴 바가 매우 마땅하니, 착실히 거행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1년마다 체임한다면 반드시 성과가 없을 것이니, 2년으로 기한을 정하라. "
하였다.

 

5월 21일 갑자

비국이 아뢰기를,
"겸사복 장(兼司僕將) 김택룡(金澤龍)이 여러 고을을 오가며 부형을 위하여 복수할 자를 모집해서 2백 44인을 얻었으니, 이는 복수군(復讎軍)입니다. 그들이 날쌔고 용감함을 알 수 있으며, 그 일 또한 아름답다고 할 만합니다. 상당한 직첩을 주어 격려하고 권장하는 표시로 삼으소서. "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모집에 응한 사람에게도 일체로 시행하도록 하라. "
하였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오랑캐 사신이 참람된 글을 가지고 왔을 적에 애당초 뜯어 보지 않았고 또 화친을 끊은 뜻을 도독에게 통보하여 천하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다시 화친하는 일을 한다면 나라의 체통이 전도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얼굴을 들겠습니까.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참으로 정론이다. 그러나 오랑캐가 만약 침략해 온다면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
하였다. 우상 홍서봉이 아뢰기를,
"답서를 해도 무익할 듯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도모하는 도는 대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대신이 막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답서를 보낼 필요가 없다. "
하였다.

 

5월 22일 을축

홍서봉을 좌의정에 세자부(世子傅)로, 이홍주(李弘胄)를 우의정으로, 임광(任絖)을 동부승지로, 이시매(李時楳)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우의정 이홍주가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4일 정묘

퍼붓듯이 큰비가 내렸다. 성안의 집이 물에 뜨고 잠겼으며 벼락이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 쳤고 또 충훈부 대청에도 쳤는데, 벼락에 맞아 죽은 자가 있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천둥치며 폭우가 쏟아지면서 곳곳에 벼락이 쳐 사람이 죽고 곡식이 손상되기까지 하였으니, 나는 매우 두렵다. 여러 승지는 나를 위하여 재변을 그치게 할 방도를 자세히 진달해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
하고, 또 하교하기를,
"경외의 표몰된 인가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서봉이 재이를 이유로 책면(策免)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5일 무진

김상헌을 이조 판서로,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응교로, 김경여(金慶餘)를 헌납으로, 홍명일(洪命一)을 수찬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김상헌은 한때의 인망을 지고 있었으나 곧은 것으로 거스름을 당해 오래도록 중요하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제야 비로소 발탁되어 제수되니 사론이 흡족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3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김상헌은 한때의 인망을 지고 있었으나 곧은 것으로 거스름을 당해 오래도록 중요하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제야 비로소 발탁되어 제수되니 사론이 흡족하게 여겼다.

 

5월 26일 기사

상이 하교하기를,
"금나라 오랑캐가 참람된 칭호를 쓴 뒤부터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이 전년보다 더욱 심하다. 우리 나라는 수천 리의 국토를 가지고 있는데 어찌 한결같이 움츠리고만 있으면서 그의 모욕을 받아야 하겠는가. 지난번 용골대의 일을 보면, 그가 겁이 많고 꾀가 없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보다도 심하다. 그런데도 저 오랑캐들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것은 실로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호령이 엄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헤아려 보면 우리 나라 군사가 비록 겁이 많지만 참으로 양장(良將)을 얻어 기율을 밝힌다면 변화시켜 용감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꼭 오랑캐보다 못하겠는가.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사졸을 후하게 양성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다 함께 진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군율을 거듭 밝혀 물러나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는 뜻을 알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체찰사 김류로 하여금 하사도(下四道)를 겸찰(兼察)하게 하여 무릇 선발하고 교련하는 방도와 무마하고 방어하는 계책을 십분 헤아려서 속히 품달하여 시행하게 하라.
그리고 듣건대, 안주(安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모두 군대에 충정(充定)되었으나 군사가 된 것을 즐겁게 여겨 도피하는 자가 없다고 한다. 본성은 적들이 반드시 빼앗으려는 지역인데 인심이 이와 같다고 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는바, 나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그러니 내탕고(內帑庫)에 저장한 목면 1천 필을 관서(關西)에 내려 보내어, 안주의 사졸 및 거느리는 장사들을 시험보여 그 반을 나누어 주고, 그 나머지는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나누어 보내어 시재(試才)하고 상을 주게 하라. "
하였다.

 

5월 27일 경오

이보다 앞서 나덕헌(羅德憲) 등이 돌아오자, 양사가 모두 효시(梟示)하여 대중을 경계시키자고 청하였는데, 묘당이 덕헌 등에게 혹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고 힘껏 말하자 마침내 서변(西邊)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양사가 다시 고집하여 다투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5월 29일 임신

서생포 첨사(西生浦僉使) 민응건(閔應騫)이 상소하여 서변에 종사하기를 청하니, 전마 한 필을 주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헌이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온화하게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시독관 김익희(金益熙)가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수재가 매우 혹독한데, 예로부터 수재는 음이 성하고 양이 쇠하여 군자의 도가 사라지고 소인의 도가 자라날 때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밝고 거룩한 세상에는 이런 걱정이 반드시 없었습니다. 또한 수재를 병란의 상징으로 여기는 자도 있는데, 지금 오랑캐와 흔단이 이미 생겼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
하고, 검토관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어렵고 위태롭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서만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무릇 사람은 나이 젊고 힘이 강할 때에 국사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늙어 힘이 미치지 못하면 비록 국사를 위하고자 하나 할 수 있겠습니까. "
하자, 익희가 아뢰기를,
"순전히 노성한 인재만을 쓰면 나약하게 되고 순전히 연소한 인재만을 쓰면 과격한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
하니, 상이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5월 30일 계유

서경우(徐景雨)를 대사헌으로, 유백증(兪伯曾)을 대사간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도승지로, 오달제(吳達濟)를 지평으로, 남노성(南老星)을 정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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