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을해
상이 하교하기를,
"왕자(王者)의 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 것인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요점은 요역(徭役)을 가볍게 해 주고 수령을 가려 보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지감(知鑑)과 식견이 미치질 못하고 국가에 일이 많으며 일이 여의치 않아서 백성이 은혜를 입지 못하는 마당에 매양 수재와 한재 및 풍재와 상재(霜災)를 만났으므로, 미상불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게 나라를 이어받았으니, 성취시켜 주기를 바라는 자는 경상(卿相)이고, 함께 다스릴 자는 방백과 곤수와 수령이다. 그런데 그 직책을 다할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으니, 몹시 한탄스럽다.
이제부터는 수령은 간결로써 자신을 지키고 성심으로 공직을 봉행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여 경내를 편안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장은 융무(戎務)에 마음을 다 기울이고 군졸을 어루만지고 사랑해서 내가 군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청렴하고 신근한 자가 있으면 내가 큰 상을 주어 공경(公卿)으로 뽑아 올릴 것이며 탐학한 자가 있으면 내가 형벌을 베풀어 사형에 처할 것이다. 제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실효가 있도록 책망해, 도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는 것으로 선치(善治)라 여기지 말게 하고, 군졸을 침해하여 병기를 비축하는 것으로 직무를 다했다고 생하지 말게 하라. "
하였다. 정원이 제도에 선유(宣諭)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하교하기를,
"요즈음 사대부의 자제들 가운데 학식이 없고 재능이 없으면서 관직에 앉아 있는 자들이 자못 많다. 그들을 다 도태해 버리고 지금 특별히 천거한 사람으로 차임하여 그 자리를 메꾸라. "
하였다.
6월 3일 병자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사복시가 목면 1천 필과 소 1백 두를 서변(西邊)에 상으로 주는 자본으로 보충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으니, 따로 차관을 정하여 원수에게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소는, 반은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쇄마(刷馬)의 일을 돕게 하고, 반은 각 성에 나누어 보내어 군사들을 호궤하는 데 보충하게 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목면은 시재 어사(試才御史)의 행차에 주어 보내서 상으로 나누어 줄 자본으로 삼게 하고, 소는 승지의 행차에 붙여 보내어 호궤하는 데 쓰게 하라. "
하였다.
김세렴(金世濂)을 사간으로, 박서(朴遾)를 지평으로, 홍명일(洪命一)을 교리로, 엄정구(嚴鼎耉)를 정언으로, 김수익(金壽翼)을 수찬으로 삼았다.
김덕함(金德諴)이 간장(諫長)이 되었을 적에 상소하여 화친을 배척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보고 깊이 가상하게 여겼다. 마땅히 유념하고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
6월 5일 무인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오랑캐가 제호(帝號)를 참칭하여 변방 정세가 크게 변하였습니다. 비록 도진(島鎭)에 이미 자문을 보냈으나 그를 전달하여 주문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실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 절사(節使) 행차에 사유를 갖추어 주문해서 직접 황제께 알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주문(奏文)을 짓게 하여 그 행차에 부쳐 보내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요즘 사의(私意)가 성행하고 요행을 바라는 문호가 크게 열려 시기를 틈타 이익을 노리는 무리들이 형세를 따라 틈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특명으로 관직을 올려 준 자 중에는 혹 여러 사람의 마음에 차지 않는 자와 폐모를 정청한 무리들도 있는데, 오래도록 수서(收叙)되지 못한 자 중에는 바로 언사로 임금의 뜻을 거스른 자가 많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선을 권장하며 어떻게 악을 징계하겠습니까. "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6월 6일 기묘
승지 민응형(閔應亨)이 서로(西路) 무과(武科)의 시관(試官)으로 떠나려고 조정에 하직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과거를 베풀 때에 간사한 짓을 밝게 살펴서 다른 사람이 대신 쓰는 폐단이 없게 하라. 안주(安州)의 군병을 호궤할 때 승지가 친히 검찰하여 매몰스럽게 하지 말라. 그리고 철전(鐵箭)과 조총 등의 물건을 시재한 사람에게 시상하되, 맞춘 자가 많지 않아서 철전과 조총이 남을 경우 다시 점수가 없는 사람에게 시험보여서 주라. 부채 3백 70자루는 병사 이하 중군·별장·우후·판관·천총·파총·초관·군관 등에게 나누어 주라. "
6월 7일 경진
유백증을 이조 참의로, 정홍명(鄭弘溟)을 대사간으로, 조빈(趙贇)을 장령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수찬으로 삼았다.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가 상소하여 시폐를 조목별로 진달했다. 그리고 원손(元孫)을 외가에 내다 기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극론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예조 판서 강석기(姜碩期)가 차자를 올리기를,
"원손을 신의 집에 나와 우거하게 하는 것이 비록 성상께서 원손을 보호하려는 지극한 뜻이오나 사리를 헤아려 보면 크게 온당치 못한 바가 있기에 신은 자나깨나 늘 편안치 못하게 지내 왔습니다. 윤계의 상소를 보니, 말의 뜻이 정성스럽고 솔직하여 신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내다 기르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보부(保傅)의 교훈을 극진히 하시어 만세의 규범으로 삼으소서. "
하니, 답하기를,
"윤계의 말은 지나치게 염려한 데서 나온 듯하니 두렵게 여기지 말라. "
하였다.
6월 8일 신사
이때 장맛비가 한 달이 다 되도록 개지 않으니, 유사에게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 판윤 심즙(沈諿)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 유백증의 상소 속에 특명으로 관질을 올려 준 자들이 여러 사람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답하였다.
"유백증은 고집 불통의 병이 있어서 나도 매우 괴롭게 여긴다. 그러나 마음이 충성되고 질박하여 명예를 구하는 태도가 없기 때문에 내가 그의 장점을 취한 것이다. 상소 속에 진달한 것은 반드시 경 때문에 말한 것은 아니니, 사직하지 말고 편히 직무를 살피라. "
청백리(淸白吏)로 김상헌(金尙憲)·이안눌(李安訥)·김덕함(金德諴)·김시양(金時讓)·성하종(成夏宗) 등 5인을 뽑아 각각 가자하였는데, 하종은 무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안눌은 자기가 갖는 데에는 청렴하고 남에게 주는 데에는 지나쳤다. 김시양은 본래 나타난 청렴의 조행이 없는데도 이 선발에 참여되었으므로 물의가 시원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3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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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안눌은 자기가 갖는 데에는 청렴하고 남에게 주는 데에는 지나쳤다. 김시양은 본래 나타난 청렴의 조행이 없는데도 이 선발에 참여되었으므로 물의가 시원하게 여기지 않았다.
6월 9일 임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6월 10일 계미
상이 하교하기를,
"이경헌(李景憲)·김광현(金光炫) 등을 아울러 서용하라. 전 승지 이덕수(李德洙)를 승지에 제수하라. "
하였다. 이덕수가 좌승지 김상(金尙)과 사돈간이라는 이유로 상피하니, 상이 상례를 깨뜨리고 체직시키지 말라 하였다. 덕수가 전에 승지로서 추숭(追崇)하던 때를 당하여 전지를 환봉(還封)했다가 죄를 얻어 중도 부처(中道付處)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윤황(尹煌)을 이조 참의로, 유황(兪榥)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11일 갑신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기를,
"저번날 추천한 이찬(李燦)·최온(崔蘊)·송준길(宋浚吉)을 초탁(超擢)하여 조정에 두소서. "
하고, 또 아뢰기를,
"세도가 나빠지면서 풍속이 못되어져 전혀 스승과 제자의 기풍이 없어졌는데, 유독 김장생(金長生)에게만은 생도가 있습니다. 신이 그의 문하생들을 보니 재주가 있고 없고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선은 행해야 하고 악은 미워해야 하며, 임금은 충성으로 섬겨야 하고 어버이는 효성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신은 이것으로써 더욱 사도(師道)가 풍속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은 그 가훈을 지킴에 있어 자기 아버지의 풍도가 있는데, 지난번 정목(政目)을 보니 장령에 승배(陞拜)되어 있으므로 신은 참으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은 모두 김장생의 문인인데, 신은 비록 서로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사람들은 감히 멋대로 그른 짓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송준길이 예를 논한 글과 송시열의 과장(科場)의 글을 보고서 그들이 속유(俗儒)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박지계(朴知誡)의 문인 조극선(趙克善)은 가장 어질다는 이름이 있어 진신들 사이에도 자못 알려진 자입니다. 부서(簿書)의 직임에 이르러서는 그가 처할 바가 아닌 듯합니다. 또 들으니, 김극형(金克亨)이란 자가 있는데 독실한 뜻으로 선을 행하며 끊임없이 덕과 학문을 닦는다고 합니다. 전 현감 허후(許厚)는 몸가짐에 법도가 있고 스스로의 기대가 가볍지 않으며, 전 교관(敎官) 황종해(黃宗海)는 전야에서 조용히 자신을 지키면서 늙도록 글을 읽으며, 학생 권시(權諰)는 이름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뜻과 행실이 맑고 깨끗합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훌륭한 선비라고 할 만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알아보기 쉽지 않으나, 비유하자면 이들은 계곡에 핀 난초나 형산(荊山)에 묻힌 박옥(璞玉)이 향기와 빛깔을 채 토해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그들을 털어주고 닦아주어서 광채를 더하게 한다면 어찌 뒷날 이름을 떨칠 명유(名儒)가 이들 중에서 나오지 않을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
하고, 또 조정 신하 중에 학문에 뜻을 둔 자로 조익(趙翼)·이경석(李景奭)·이경여(李敬輿)·조석윤(趙錫胤)·송몽석(宋夢錫) 등을 천거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조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영사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서변(西邊)에 조석으로 외침이 있을 근심이 있으니, 만사를 제쳐 놓고 요리하는 데 뜻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평양은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정묘년 이후 폐기한 곳으로 되었습니다.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현재 수축하고자 하는데 백성들도 지키기를 원하고 있다고 하니, 백성들이 바라는 대로 수축하게 해야 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이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물이 없는 성이라서 지키지 못할 듯하다. "
하였다.
6월 13일 병술
영의정 윤방이 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면서 20여 차례 정사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조 정랑 조석윤이 상소하여 시폐 및 자강할 계책을 극진히 진달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완성군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강도(江都)에 이어하기를 청하자, 묘당이 불가하다고 하여 일이 중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6월 14일 정해
상이, 전 군수 정세규(鄭世規)가 가장 많이 천거를 받았고 일찍이 수령이 되었을 적에도 치적이 드러났다는 이유로 공청 감사(公淸監司)에 탁배하고자 하여 이조에 물으니, 이조가 회계하기를,
"정세규의 치적에 대하여는 비록 평소에 많이 들었으나 그의 재주에 대해서는 실상 잘 알지 못합니다. 4품에서 감사로 초수(超授)하는 것은 조정의 중대한 일이니, 오직 상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렸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생각건대 반드시 직책에 맞을 것이다. 특별히 제수하여 시험해 보라. "
하였다. 이식(李植)을 대사간으로, 김덕함(金德諴)을 대사성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사간으로, 송희진(宋希進)을 장령으로, 이후원(李厚源)·이명웅(李命雄)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16일 기축
이보다 앞서 생원 이광길(李光吉)이 상소하여, 이공(李珙)014) 의 자녀가 오래도록 시집 장가를 가지 못하니 관가에서 정혼해 주기를 청했는데, 예조가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상이 일렀다.
"그 집에서 비록 혼인을 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즐겨 따르지 않으면 형세상 강청하기가 어렵다. 그 집에 물어보아 관가에서 정혼해 주라. "
행 호군(行護軍)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여, 황해도·전라도 등에서 진상하는 건부어(乾鮒魚)를 감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17일 경인
상이 명정전(明政殿)에서 배표례(拜表禮)를 행했다.
금나라 한(汗)의 글에 답하여 만상(灣上)에 보내면서 격(檄)으로 칭했는데, 그 글에,
"두 나라가 화친한 지 이제 10년이 되었으니, 실로 생민들이 복을 맞이한 것이요, 하늘이 도움을 내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뜻하지 않게 사단이 갑자기 생겨나 꾸짖는 말이 크게 닥치니 아, 불행함이 심합니다. 사신이 비록 국서를 전하지는 않았으나, 입으로 말하면서 모든 뜻을 다 말하였습니다. 의견이 다를 경우에는 다른 말을 할 겨를이 없고 생각한 바가 있으면 또한 잠자코 있기도 어려운 법입니다. 이에 곧바로 정성을 다하여 맹약이 깨지게 된 원인이 우리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바, 말이 박절하고 바름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국의 군사는 날쌔고 용감하여 싸우면 이기고 공략하면 차지해서 이제 또 삽한(揷漢)015) 을 복속시켰고 사막(沙漠)에까지 땅이 뻗쳤으니, 웅장하고 강한 형세는 당연히 자부할 만하여 두렵거나 꺼릴 바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처하여 농사를 짓고 누에를 길러 스스로 봉양하며 예와 의를 지키면서 스스로 보존하고 있을 뿐, 병갑(兵甲)과 전투는 본래 익힌 것이 아닌데, 무슨 이길 만한 형세가 있어서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습니까. 귀국이 우리 나라에 책망하는 것은 대략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한인(漢人)에 관한 일이고, 둘째는 변민(邊民)에 관한 일이고, 셋째는 참소에 관한 말입니다.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신하로서 섬기고 한인을 공경스럽게 대하는 것은 곧 예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무릇 한인이 하는 바를 우리가 어떻게 호령으로 금단할 수 있겠습니까. 화친을 약속한 처음에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첫번째 조건으로 삼았는데, 귀국이 조선이 명나라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좋은 뜻이라고 여겨 마침내 교린의 약속을 정한 것으로, 이는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요즘 명나라를 향하고 한인을 접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책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화친을 약속한 본래의 뜻이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에 향하는 것은 천지가 다할 때까지 고금을 통하는 큰 의리인데, 이것을 죄라고 한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기꺼이 듣고서 순순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정령이 엄하지 못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금법을 범했으니, 이는 과인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전후로 법을 범한 자는 그 즉시 형륙을 행했으며, 귀국이 꾸짖어 올 때는 늘 겸손히 사과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가 고의로 옳지 않은 짓을 한 것이겠습니까. 호화(好貨)를 숨기고 상고(商賈)를 죽이며 강홍립(姜弘立)을 죽이고 사신을 홀대하였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모두 간사한 자들이 꾸며댄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귀국이 비록 번번이 이에 대한 말이 있더라도 우리 나라는 이런 일이 없으니 과인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귀국이 이미 호의로 서로 대하고 있는 터인데도 이 세 가지에 대해 용서하지 않고 살피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이미 약속하여 형제국이 되었는데도 서사(書辭)에 일컬은 꾸짖고 욕하는 말이 전날에 서로 공경하던 체모가 전혀 아니니, 사신이 감히 그 글을 싸 가지고 돌아오지 못한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저 삽한 왕자(揷漢王子)는 바로 망한 나라의 포로이니 참으로 귀국의 왕자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접때 무단히 대등한 예로 통서(通書)하면서 문서의 체재도 대등하게 하여, 여국(與國)의 한(汗)과 똑같은 체모로 우리 나라와 사귀려 했으니, 우리 나라가 어찌 마음 편히 그 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한 말에 있어서는 참으로 우리 나라가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객관(客館)의 신하가 글을 받지 않은 것 역시 감히 스스로 자기 임금을 낮출 수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인이 귀국의 사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즉시 회답한 국서 속에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어떤 말로 왕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전대부터 중국 조정을 섬겨 동번(東藩)이라 칭하면서 일찍이 강약과 성패를 가지고 신하의 절개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본디 예의를 스스로 지킨다고 일컫게 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명나라는 곧 2백여 년간 중국을 통일해 다스려온 주인인데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한번 요동과 심양 한쪽 땅을 잃었다 하여 문득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귀국이 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한마디 말할 것이 있습니다.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대해 지존(至尊)입니다. 그러나 특수한 예로 대우하여 사명(辭命)의 사이에 일찍이 설만한 말과 준절한 나무람을 쓰지 않았고, 우리 나라가 공헌(貢獻)을 지극히 박하게 해도 중국 조정에서는 매우 후하게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동과 심양 사람들이 환하게 아는 바인데 어찌하여 귀국은 이웃으로 화친하기를 약속하고도 번번이 깔보고 업신여기며 꾸짖고 욕합니까. 그리고 금번에 신사(信使)가 갔을 적에는 비례(非禮)로써 겁주고 온갖 곤욕을 보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웃 나라 사신을 대우하는 예입니까? 귀국의 사신이 와서는 우리 신료들에게 욕을 하면서 예로 공경하는 뜻이 전혀 없었고, 강매(强賣)하면서 마구 빼앗기를 끝이 없이 하였습니다. 당초 맹약을 맺은 것은 본래 국경을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은 백성에게는 남은 힘이 없고 시장에는 남은 재화가 없어 연로(沿路)의 고을은 곳곳마다 텅 비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않는다면 병화를 받아 망한 것과 똑같을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발하여 화친을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인이 처음의 마음을 변치 못하는 것은 하늘에 맹서한 맹약을 먼저 저버릴 수 없고 이웃 나라와 사귀는 의리를 먼저 상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국은 도리어 우리가 먼저 맹약을 깨뜨리려 한다고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의지할 만한 군사가 없고 충분한 재물이 없으나, 강조하는 것은 대의이고 믿는 것은 하늘뿐입니다. 옛날 왜구가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 중국을 범하고자 했으나 우리 나라가 의리로써 배척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단서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구는 우리 나라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백성을 잔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계책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뒤에 수길(秀吉)이 죽자 그 뒤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는데, 머리가 떨어져 죽은 자들은 모두 전날에 우리에게 독기를 부렸던 장사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씨(源氏)가 평씨(平氏)를 축출하여 멸망시키고 우리 나라와 통호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성한 것이 평수길(平秀吉)의 시대보다 배나 됩니다. 천도(天道)가 전쟁을 싫어하며 선을 돕고 악을 벌한다는 것이,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귀국이 우리 서로(西路)를 침략해 왔으나 병세(兵勢)를 끝까지 부리지 않고 맹약을 맺고 물러갔으니, 그것은 천도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를 곤욕스럽게 하고 우리에게 반드시 따르지 못할 일로써 억지를 부리면서 병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형제지국을 협박하면서 우리 나라가 먼저 전쟁의 꼬투리를 열었다고 말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로 다툴 수 없는 것이며, 역시 하늘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믿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천심이 매인 바는 실로 백성에게 있는 것이니, 설사 우리 나라가 의를 지키다가 병화를 입어 그 병화가 비록 참혹하더라도 원래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반드시 떠나지 않고 국명도 혹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귀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민심이 반드시 떠나가고 나라가 따라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접한 것으로 어둡지도 민멸하지도 않을 도리로서, 서생(書生) 소자(小子)가 간책 위에서 주워온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과인이 이것에 대하여 또 어찌 적실하게 알고 분명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귀국이 널리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하였다. 비국이, 격서의 첫머리 말에 청국(淸國)이란 국호를 쓰지 말자고 청했는데, 그 뒤에 마침내 그들이 일컫는 바에 따라 청국이라고 써서 보냈다.
6월 18일 신묘
능침(陵寢)의 오향(五享)을 임시로 파하고 어공(御供)의 물선(物膳)을 감손시켰다. 이보다 앞서 상이 윤황(尹煌)·김시양(金時讓) 등의 상소를 가지고 대신·육경·삼사 장관에게 명하여 빈청에 모여 의논해서 아뢰라고 하였으나 결정을 짓지 못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인견하고 묻기를,
"능침의 오향은 예로 말한다면 과연 번독스러운 듯하다. 그러나 행해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정파하니, 어떨지 모르겠다. "
하니, 대신 이하가 모두 아뢰기를,
"시세가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예에 있어서도 미안한 바가 있으니 정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했는데, 이덕형(李德泂)만 홀로 아뢰기를,
"갑자기 정지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듯합니다. "
하였으며,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경비를 줄이는 일로 인하여 정파하는 것은 과연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다만 옛말에 이르기를 ‘예는 시기가 중요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했다는 이유로 파한다면 인정과 예절에 있어서 혐의로울 것이 없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을 파해서 백성이 만약 혜택을 입는다면 혹 가하거니와,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데 제향에만 흠전(欠典)이 있게 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
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예가 아닌 예를 혁파하여 위급한 형세를 구제한다면 이는 곧 천만세토록 영원히 제향할 종묘의 사전(祀典)의 근본이 될 것입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지금 우선 정파하고 어공(御供)하는 공물도 감손하게 하라. "
하고, 또 이르기를,
"김시양이 차자 속에서 논한 양녀(良女)에 대한 한 조목은 크게 변혁하는 것으로서, 국가에 크게 유익한 것이다. "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일이 비록 편하고 유익하나 폐단이 이미 굳어져서 모두 행하지 못할 것으로 여깁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태어난 자부터 양인으로 삼으면 좋을 듯하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아비는 천역을 하는데 자식은 양인이 되어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있게 되면 크게 명분에 해로움이 있게 됩니다. "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분이 비록 중하나 백성의 숫자가 적으면 국가에 군사가 없어 위망에 이르게 될 것이니, 그 또한 중하지 않은가? "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군역(軍役)에 정한다면 가하거니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겨 뒤에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6월 19일 임진
간원이 아뢰기를,
"대군(大君)의 가사(家舍)에 대해서, 겨우 연신의 아룀으로 인하여 역사(役事)를 정지하게 했는데, 곧바로 유사에게 명하여 다시 짓게 하였으나, 거조가 전도되어 임금이 백성에게 실제를 보여 주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하물며 어렵고 우려스런 때를 당하여 이런 급하지 않는 역사를 일으켜 보고 듣는 자들을 놀라게 한단 말입니까. "
하니, 답하기를,
"이런 때 집을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 되는 줄은 알고 있다. 다만 많은 재목을 헛되이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한 채의 작은 집을 지어 재목을 저장하는 곳으로 삼는 것은 무방할 듯하다. "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김세렴(金世濂)을 집의로, 조경(趙絅)을 사간으로, 유수증(兪守曾)을 장령으로, 조빈(趙贇)을 교리로, 이시매(李時楳)를 정언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이조 좌랑으로, 김홍욱(金弘郁)을 검열로 삼았다.
6월 20일 계사
상이 하교하였다.
"가뭄으로 탄 뒤에 수재가 매우 혹독하니, 제도에서 올리는 물선(物膳)과 공상지(供上紙)를 아울러 햇수를 정하여 정파하라. "
6월 21일 갑오
호조가 백관의 봉록(俸祿)과 하인의 늠료(廩料)를 줄이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관의 녹봉이 매우 박한데 또 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조종조의 반록(頒祿)은 20두를 1석으로 하였으며, 석수도 많았기 때문에 비록 9품관이라도 처자를 양육하고 의식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임진란 뒤로는 석수를 감하고 또 15두로 1석을 삼았으며, 혹 흉년을 만나면 감하고 또 감해서 대소 관료들의 녹봉이 매우 박하기 때문에 구차하게 이익을 얻으려는 짓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또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6월 22일 을미
비국이 쓸데없는 관원을 줄이기를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가 수십 원을 감했고 병조가 6원과 군직 체아(軍職遞兒) 46명을 줄였다.
6월 23일 병신
이도(李禂)를 정언으로, 한흥일(韓興一)을 동부승지로, 유백증(兪伯曾)을 부제학으로, 장현광(張顯光)을 지중추부사로, 최온(崔蘊)을 순창 현감(淳昌縣監)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예산 현감(禮山縣監)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최온은 남원(南原) 사람인데 기국과 도량이 맑고 쾌활하여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송준길은 회덕(懷德) 사람으로 자질이 온아하였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기면서는 마침내 거자업(擧子業)을 포기하였다. 여러 번 익위사 세마와 대군 사부(大君師傅)를 제수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김상용(金尙容)이 천거하여 이 제수가 있었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3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최온은 남원(南原) 사람인데 기국과 도량이 맑고 쾌활하여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송준길은 회덕(懷德) 사람으로 자질이 온아하였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기면서는 마침내 거자업(擧子業)을 포기하였다. 여러 번 익위사 세마와 대군 사부(大君師傅)를 제수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김상용(金尙容)이 천거하여 이 제수가 있었던 것이다.
6월 24일 정유
사간 조경(趙絅)이 상소하기를,
"신은 먼저 성상의 허물을 거론하고 다음으로 대신의 허물을 논하고자 합니다. 전하께서 대군(大君)에 대해 정(正)으로써 양육하고 의방(義方)으로써 가르치는 것은, 이는 바로 사랑이 깊고 은혜가 지극해서입니다. 집을 크게 지어 주고 전토를 많이 차지하게 하는 것이 어찌 교양하는 급무이겠습니까. 신의 집은 포천(抱川)입니다. 듣건대, 현에 사는 황가(黃哥) 성을 가진 자의 농토를 궁노(宮奴)가 빼앗아서 송사를 일으킨 것이 여러 차례라고 합니다. 대군의 높은 지체로서 필부와 전토를 다투고 있으니, 신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깁니다. 듣건대 경자년 등록(謄錄)에는 빈전(殯殿)·국장(國葬) 두 도감의 도청(都廳)은 모두 상직(賞職)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장릉(長陵)의 상격에는 심지원(沈之源)·오단(吳端)이 【 오단은 바로 대군 부인의 아버지이다.】 모두 당상에 승진했으니, 신은 이것이 또한 전하께서 요즈음에 행하신 허물이라고 여깁니다.
태재(台宰)의 직임은 백료의 우두머리이고 한 나라를 좌우할 수 있는 권형을 잡고 있어서 치란과 흥망이 매어 있는 바입니다. 임금이 된 자가 참으로 혼란을 좋아하고 다스림을 싫어하며 망함을 즐거워하고 흥함을 싫어하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어진 보좌를 가려 도움을 받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은 뇌물을 받아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가 일찍이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한 무부(武夫)가 곧바로 정청(政廳)으로 들어와 그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산 사람들을 모조리 열거하면서 무서운 얼굴로 꾸짖자, 서봉은 끝내 감히 말 한마디하여 그 무부를 죄주지 못하였는데, 얼굴과 목이 붉어지며 정청에 있던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나라 안에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두 서로 전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신이 전에 헌부에 있을 때 서봉이 정승에 처음 제수되었는데, 그때 양성(陽城)이 열마(裂麻)한 일016) 이 실로 마음에 간절했었습니다만 그 당시 산릉(山陵)의 일이 급한 관계로 총호(摠護)의 여러 일이 반드시 오래도록 지체될 것이라는 점을 한 번 논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봉이 혹 성상께서 높이 총애하는 뜻에 감동하여 예전에 한 일들에 대해 뉘우칠 것이라고 여겼었습니다. 그 뒤에 신이 병으로 시골에 내려가 있을 적에 시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전 제주 판관(濟州判官) 이대하(李大廈)란 자가 명마(名馬) 한 마리를 얻어 학곡 상공(鶴谷相公)에 바쳤다고 했는데, 학곡은 바로 서봉의 별호(別號)입니다. 신이 그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서봉의 탐묵(貪墨)은 종신토록 떨쳐버리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처럼 전에 없던 천변을 만났으니, 탐묵한 정승을 내쫓으시고 또 성상의 과실을 신칙하시어 하늘에 대응하는 실상으로 삼으소서.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상은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이 없을 것인데 조경이 남의 말을 곧이 듣고 경솔히 대신을 논핵하니, 사체가 지극히 부당하다.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 "
하였다. 조경이 곧 피혐하기를,
"신이 홍서봉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은, 국가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이롭게 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집을 부하게 하기에만 힘쓰고 있으며,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하게 할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만 살찌우기에 힘써, 오욕스런 말을 달갑게 받으면서 허물을 고치고 뉘우칠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자신을 잊고 입을 열어 잘못을 지적하면서 절박하게 탄핵한 것으로, 이는 성상께서 한번 깨닫기를 바라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소장을 되돌려 주라는 명을 내리고, 또 대신을 경솔하게 논핵했다고 신을 나무라시니, 신은 참으로 황공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은 성상의 과실에 대해서도 거리끼지 않고 곧바로 거론했는데, 대신에 대해서 무엇이 꺼릴 게 있겠습니까. 신은 이로부터는 이보다 심한 자가 있어서 거만금을 장오(贓汚)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전하께 한 마디 말도 하는 자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말이 쓰이지 않는데도 무릅쓰고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파척을 명하소서. "
하였다. 대사간 이식(李植)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좌의정 홍서봉은 깨끗한 이름으로 발신(拔身)하였고 훈업(勳業)으로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성상께서 가려뽑아 정승 자리에 두어서 나라의 주석(柱石)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조경이 참으로 듣고 본 데서 근거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대간의 직에 있으니 마땅히 공의를 참작하여 논계하면서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장을 올려 마치 초야에서 전지에 응하여 진언하는 자와 같이 추잡한 말로 공격하였으니, 자못 대관의 체모를 상실했습니다. 체직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홍서봉이 사직하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말이 허망스러운 듯하므로 나는 그렇다고 여기지 않는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
경상도 양산(梁山) 땅에 높이가 20척, 둘레가 4척인 소나무가 있는데, 지난해 11월에 바람에 뽑혀 쓰러졌다가, 금년 5월에 다시 일어났다.
6월 25일 무술
대마도(對馬島)에서 특견선(特遣船)이 나왔는데, 진공 단자(進貢單子)에 ‘진상(進上)’ 두 글자를 쓰지 않아 구례와 어긋났다. 이는 대개 우리 나라를 업신여긴 것이다.
6월 28일 신축
태백성이 나타났다.
6월 29일 임인
태백성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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