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3권, 인조 14년 1636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3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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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계묘

일식하였다.

 

7월 2일 갑진

헌납        홍명일(洪命一)이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 홍서봉(洪瑞鳳)이 조경(趙絅)의 터무니없는 모함을 당하여 석고 대죄하고 있는데, 스스로 해명을 하면 체면에 손상이 가겠고 마음속에 감춘 채 참고 발론하지 않으면 진실이 감추어져 드러날 길이 없습니다. 신은 부자지간이니 간절한 마음을 대신 호소하는 것은 법적으로 당연한 일이기에,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성상께 호소합니다.
지난 신미년017)                  에 신의 아비가 전장(銓長)으로 있을 당시 조경은 낭관(郞官)이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항시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경이 관직에 있으면서 공무를 집행하는 것은 반드시 남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으나 소탈하고 속되지 않은 점은 취할 만하다.’고 하였는데, 추숭(追崇)하는 예를 의논함에 있어 조정의 의논이 분분할 적에, 경이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면서 스스로 한 떼의 여론에 부화(附和)하였습니다. 이에 요리조리 교묘하게 출몰하여 도피한 흔적이 남김없이 드러나자, 신의 아비가 대중 앞에서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간사한 사람에게 속았다. 애당초 이런 사람인 줄을 몰랐으니 사람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조정에 있던 모든 신하가 함께 들었으니 경이 감정을 품은 것이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
소장 내용 중 이른바 ‘무부(武夫)가 곧바로 정청(政廳)으로 들어와 질책했다.’는 조목은, 신의 아비가 병조 판서로서 정청에 이르렀을 때, 이비 정청(吏批政廳)의 앞을 바라보니, 취한(醉漢) 1명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으시대며 야유하고 있었는데, 물으니 금군(禁軍)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아비가 ‘금군이 정청에서 술에 취해 있는 것은 병조의 책임이다.’라고 말하고, 즉시 금부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원래 병비 정청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 당시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있었으니, 그에게 하문하시면 그 전말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제일 명마(名馬)에 대한 일은, 6∼7년 전 이대하(李大廈)가 도감 장관(都監將官)으로서 명함을 내어 놓고 와서 신의 아비를 보고 고상(故相) 이항복(李恒福)의 질손(姪孫)이라고 하였는데, 신의 아비가 범범하게 대접했습니다. 그 후 제주(濟州)로 부임할 때 와서 인사하였고, 임지에 도착한 후 약재(藥材)와 전복 등 물품을 보내왔는데, 관례대로 받고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는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서울에 있는지 시골에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대개 1등 명마는 축산(畜産)이라고는 하더라도 예사롭게 보아 넘길 물건이 아닙니다. 아무개 집에 무슨 말이 있는데 어디에서 왔다는 것은 도성(都城) 사람이 모두 잘 알 것이고, 그 말을 타고 출입하면 많은 사람들이 볼 것인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대하가 헌납한 말을 경이 직접 보았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소위 ‘향인(鄕人)’이라는 사람은 내막을 자세히 알아서 이런 말을 꺼냈을 것이고, 경은 필시 분명히 지목할 곳이 있기에 성상께 품달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대하가 죽지 않았으니 한 곳에서 국문하면 자연 그릇된 것을 조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해가 내려다 보고 있는데 저들이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신이 3월 중에 구봉서(具鳳瑞)를 논핵할 적에 경이 사간으로서 그 논핵에 참여하고 곧바로 인피하기에, 신이 ‘가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반복하여 말을 바꾸니 경의 현혹됨이 심하다.’는 등의 말로 인피하면서 엄중히 배척하여 그 옳고 그름이 판가름났던 것은 성상께서 필시 기억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이 홀로 공의(公議)를 견지하고 경솔히 예봉(銳鋒)을 범하였다가 점점 확대되어 여기까지 이르러 신의 아비에게 거듭 오늘의 욕됨을 더하였으니, 불효 불초한 신의 죄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해와 달이 사물을 공평히 비추듯 참언(讒言)하는 자의 망극한 행태를 살피시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이대하도 상소하여, 조경의 소장 중 ‘향인’이라고 한 사람과 한 곳에서 변핵(辨覈)하여 원통한 누명을 풀게 해주기를 주청하였는데, 그 소를 모두 금부에 내렸다. 상이 조경을 정원으로 불러 소문의 출처를 하문하니, 경이 서면으로 답변하기를,
"대하는 포천(抱川)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자입니다. 말을 헌납했다는 설은 온 고을을 속일 수 없는 것이어서 소신도 들었습니다. 한 사람만 전한 것이 신의 귀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 어떻게 온 고을 사람의 성명을 지적하여 들 수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노둔하고 용렬하나 진언할 당시는 대간이었습니다. 타인을 끌어대어 소문의 출처를 증명하는 것은 우리 나라 2백 년 사상 전례가 없는 일인데, 신이 어찌 주륙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여, 타인을 끌어들이는 길을 열어 놓겠습니까.
대간에게 풍문(風聞)을 허락한 것은 그 유래가 대개 오래 되었습니다. 등롱금(燈籠錦)018)                  의 일은 당개(唐介)의 풍문에서 비롯된 것인데, 문언박(文彦博)처럼 어진 사람도 오히려 용서해 주지 아니하고 어전에서 대놓고 책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당시 문언박은 사죄하였을 뿐 자식을 사주하여 스스로 발명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고, 인종(仁宗)이 크게 노하여 당개를 파면시켜 축출하기는 하였으나 당개에게 소문의 출처를 힐문하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신이 들은 것은 당개에 비해 절실하고, 홍서봉의 탐욕스러움은 대하에게서 말 한 필을 받은 데 그치지 않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용서할 소지가 있겠습니까. 소신이 봉사(封事)에서 논한 것은 특별히 요즈음의 일을 들었을 뿐입니다.
서봉 부자의 주택과 정자는 온 고을에 걸쳐 있어 사치스럽고 화려하기가 극에 달했고, 두른 담장은 참람되게 제궁(諸宮)에 견주니, 비록 혼조(昏朝) 때의 유희분(柳希奮)이나 박승종(朴承宗)의 집이라도 여기에서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기증(李起曾)이 집터를 바치고, 진응기(秦應己)가 은(銀)을 헌납했다는 소문은 사람들의 입에 자자합니다. 더구나 홍시태(洪時泰)가 쌀을 바쳤다는 설은 이미 상께서 들으셨으니 더욱 속일 수 없는 것인즉, 대하에게서 말 한 필을 받은 것이 무어 대단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하가 관작을 도둑질하고 권세 있는 재상에게 말을 뇌물로 바친 것이 조그만 장물이 아닌즉 일이 발각된 후에 어찌 죽음으로 스스로 변명하고자 아니하겠습니까. 그러기에 당로(當路)의 권세를 빙자하여 이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신이 발분하여 말씀을 올린 것은 대개 성상께서 깨달으시고 진노하시어 탐욕스럽고 더러운 풍습을 깨끗이 씻어버리게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지금 도리어 명일과 대하가 반론을 제기하여 상께서 소문의 근원을 힐문하시니 차라리 신이 홀로 망언한 벌을 받을지언정 많은 향인에게 화가 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금부가 회계하기를,
"조경이 향인의 성명을 말하지 않으니 힐문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의논드리기를,
"향인의 성명을 한사코 말하지 않고 도리어 지난번 상소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일을 거론하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추잡하게 비방하고 있으니, 과연 모든 것이 지공 무사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모호한 듯싶으니, 분명하게 가리어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관 말직도 그러한 것인데 더구나 대신이겠습니까.
지난 성종조(成宗朝)에 대사헌        권건(權健)이 모호한 일을 가지고 김작(金碏)을 논핵하였는데, 성종께서 체직시키고 문책하여 결국 발설한 사람을 찾아냈으니, 이는 지난 일 중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후의 처리는 오직 성상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홍주(李弘胄)는 의논드리기를,
"서봉이 뇌물을 받은 일이 실지로 있었으면 조경이 무엇 때문에 봉장(封章)에 두루 거론하지 않고 말을 바친 한 가지 일만 들어서 죄안을 만들었겠습니까? 집터를 바친 사람들은 성명을 두루 지적하면서 향인에 관해서는 굳이 숨기고 말하지 않으니 스스로 정직하다고 믿는 자가 과연 이럴 수 있습니까. 지금 다시 힐문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솔직하게 진술할 리가 없습니다. 오직 성상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영돈녕부사        김상용(金尙容)은 의논드리기를,
"조경이 향인을 비호할 줄만 알고 임금을 경외할 줄은 모르니 이것이 어찌 임금을 섬김에 은휘(隱諱)함이 없어야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잡아다 국문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상용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는데, 동지의금부사        민형남(閔馨男)이 상소하여, 잡아다 국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니, 마침내 그 소를 형조에 내렸다. 지평        이명웅(李命雄)이 소명을 받고 들어와서 아뢰기를,
"신이 물에 막혀 사은이 늦었으니 응당 체직될 만한 실책을 범하였습니다만 구구한 회포는 스스로 숨길 수 없습니다. 홍명일이 아비를 위해 원통하다고 따진 것은 그래도 핑계댈 수 있다고 하나, 이대하는 어찌 감히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거만스레 상소하여 대간과 서로 겨룰 수 있습니까? 참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그런데도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가 아무 것도 모르고 봉입(捧入)하였고, 언론을 맡은 대간이 그 죄를 거론하지 않았으니, 신은 정원과 대간이 똑같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전하께서 정위(廷尉)의 주청에 따라 대신에게 의논하시었고, 오히려 가벼운 의논을 따라 조경을 정원에서 평문(平問)하셨습니다. 조경이 임금을 섬김에 숨김이 없어야 하는 의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간신(諫臣)의 진언은 풍문(風聞)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사람을 끌어대는 것은 의리상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이 있어서이겠습니까. 만일 경으로 하여금 끝내 관리의 처분을 따르게 한다면, 지금의 조경은 참으로 평인이나, 진언할 당시는 성지(聖旨)에 응한 대간이었으니 청조(淸朝)의 수치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명웅은 사은을 늦게 했다 하여 체직당하고 조경은 마침내 하옥되니, 모두 놀라고 탄식하였다. 그 후 주강 때 특진관        유백증(兪伯曾)이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조정이 언관을 잡아다 국문한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조경은 대간이니 진실로 소견이 있으면 간통을 보내어 한 곳에 모여 의논하고 이견이 있은 뒤에 피혐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범범하게 상소하여 논핵한 것은 과연 체례(體例)에 어긋난 것이나 그의 말인즉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이 전에 상의 하교를 보니, 대신을 모함했다는 말씀이 있기에 신은 몹시 의아해 했습니다. 어찌 끝내 잡아다 가두는 데 이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 대신들이 끝까지 소문의 출처를 캐어 물으려고 하는데, 대신은 모두 서봉의 동료들이므로 그를 위하는 입장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 김성일(金誠一)이 경연에서 노수신(盧守愼)의 탐욕스럽고 더러운 모습을 대놓고 책망하자 선조께서 진노하시어 죄주려고 하였는데, 수신이 잘 해명하여 곧 풀려났습니다. 지금 조경이 대신을 논핵한 까닭으로 붙잡혀 국문까지 당하고 있는데 만일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형장(刑杖)으로 다스릴 것입니까? 이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거조입니다. 유영경(柳永慶)의 권세로도 정인홍(鄭仁弘)을 가두지 못하였고, 이이첨(李爾瞻)의 전횡으로도 윤선도(尹善道)를 죽이지 못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처럼 전에 없던 일이 생겨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의논이 이와 같고, 옥당이 이곳에 있는데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니, 이는 필시 의리에 해롭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백증이 아뢰기를,
"이것은 대신이 당인을 옹호해서 그런 것입니다. 만일 대신이 공도(公道)를 행하였다면 국사(國事)가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고, 시독관        이시해(李時楷)는 아뢰기를,
"홍서봉이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훈업을 재건했으니 전에 가난하고 후에 부유한 것은 참으로 예상사입니다. 만약 청고(淸苦)하다고 이른다면 옳지 않으나, 어찌 조경이 말한 것처럼 탐욕스럽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하옥한 것인즉 사체가 온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의 시비에 관계된 것이므로 경솔히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백증이 아뢰기를,
"옛날에 옷깃을 잡고 간한 자가 있었으니, 신의 소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단연코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지사(知事)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백증이 실언하였습니다. 유영경과 이이첨의 일을 어찌 오늘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옥한 거조는 지극히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체면으로 말하면 대신이 오명을 받았으니 그 또한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백증이 벌컥 성을 내면서 석기에게 말하기를,
"내가 무슨 실언을 했습니까."
하고, 이어 아뢰기를,
"석기가 말을 다하지도 않고 도리어 신더러 실언을 했다 하니, 성상을 지척에 모신 자리에서 어찌 감히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석기가 아뢰기를,
"형장으로 다스리는 일인즉 반드시 그럴 리는 없습니다. 백증의 말은 실로 지나친 우려인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형신한 일이 있었다."
하니, 백증이 아뢰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국가의 체면에 손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봉에게도 도리어 해로울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석방한다면 성상의 덕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卿)이 대신을 비방한 것은 잘못됐으나, 잡아다 국문하는 것을 미안하다고 한 것은 옳은 듯싶다."
하였다. 백증이 아뢰기를,
"이는 더할 수 없이 중대한 거조인데 대신의 의논이 인심을 복종시키지 못하였으니 신의 말이 어찌 지나칩니까. 그리고 상께서 잡아다 국문하는 것이 미안한 것임을 아셨다면 무엇 때문에 속히 석방하지 않으십니까. 옛날에 옷깃을 잡고 간한 자가 있었으니, 만약 전하께서 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신이 불경죄를 범하더라도 탑전으로 뛰어나가 옷깃을 잡고 굳이 청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가두도록 계청하였으니 결국 대신이 결말을 지어야 한다.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였다. 백증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는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만약 잡아다 국문하는 것을 옳게 여기신다면 그뿐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상하간에 서로 책임을 미루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한 마디의 말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정말 허물이 있으면 참으로 논핵하지 못할 이치가 없으나,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급히 서둘러 상소하였으니 조경의 처사도 몹시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반드시 소문의 근원을 끝까지 캐어 물으려고 하니, 어찌 해괴하지 않겠는가. 이후로는 비록 탐욕스런 대신이 있더라도 누가 다시 논핵하겠는가. 나는 참으로 조경을 추문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조정 신하들의 소행을 시험하여 관찰하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서봉도 상소하여 석방을 주청하였으나 상이 그래도 윤허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형조가 민형남의 소에 대해 회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좌상        홍서봉은 선조(先朝)의 학사(學士)로 본디 명망이 중후하니 백수(白首)에 청렴을 손상하는 것은 반드시 마음에 달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주택과 정자가 약간 광활하고 의식(衣食)이 조금 여유 있는 것은, 실상 훈적(勳籍)에 재차 참여하고 녹봉도 후하기 때문이다. 어찌 남에게 뇌물을 받아서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그리고 조경이 상신을 논핵한 것은 이미 옛 규례에 어긋났으니 그 일이 공정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고, 하문할 때에 끝까지 향인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진실치 못한 것도 알 수 있다. 대신의 원통함을 이에서 씻어 줄 수 있으니 어찌 반드시 잡아다 국문한 뒤에 그렇지 않음을 밝히겠는가. 조경을 석방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경의 소장 내용에는 실상보다 지나친 말이 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는 간관의 직책에 있었은즉, 대하는 일개 미미한 무부(武夫)로서 어찌 감히 항소(抗疏)하여 마치 논쟁하듯 스스로 떠벌릴 수 있는가. 기강의 해이함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경이 하옥된 후에 조정에 있는 경상(卿相) 중에 그 불가함을 말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형남이 앞에서 말하고 백증이 뒤에서 논쟁했으니, 만일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조정의 수치가 되지 않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3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註 017]          신미년 : 1631 인조 9년.[註 018]          등롱금(燈籠錦) : 등롱의 형상을 넣어 짠 비단.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조경의 소장 내용에는 실상보다 지나친 말이 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는 간관의 직책에 있었은즉, 대하는 일개 미미한 무부(武夫)로서 어찌 감히 항소(抗疏)하여 마치 논쟁하듯 스스로 떠벌릴 수 있는가. 기강의 해이함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경이 하옥된 후에 조정에 있는 경상(卿相) 중에 그 불가함을 말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형남이 앞에서 말하고 백증이 뒤에서 논쟁했으니, 만일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조정의 수치가 되지 않았겠는가.

 

7월 3일 을사

정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찌는 듯한 더위로 인해 경연을 중지하시도록 주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하건대, 시사(時事)가 크게 어렵고 변방의 근심이 몹시 급박하니 한가하실 때 대신과 유신(儒臣)을 자주 접대하여 득실을 자문하시는 것이 도움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재이(災異)로 인하여 매일 경연을 열었고, 또 권면하는 교지를 내려 마음을 고쳐 먹고 직무에 진력하도록 하였으나 직무를 게을리하는 습성이 날로 고질이 되어 나만 홀로 애쓰니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김시양(金時讓)이 이른바 ‘앵무새’라고 한 말이 불행히도 가까우니, 내 시속 사람들을 위해 부끄럽게 여긴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처사를 미진하게 한 소치이니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7월 4일 병오

평안도에서 유생을 제술(製述)로 시험하여, 진사 안헌민(安獻民), 생원 양경억(楊景億)·양점형(楊漸亨) 등 3명을 뽑아서 모두 전시에 직부하도록 명하였다. 무과(武科)의 대거(對擧)였다.

 

김류가 각도의 속오군 2만 명을 가려 뽑아 불시에 사용할 수 있게 하도록 주청하였다. 상이 묻기를,
"그 수가 어째서 이뿐인가?"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신이 팔도의 군안(軍案)을 모두 살펴보니, 출무(出武)·연무(演武)·장무(壯武)·충장(忠壯)·충익(忠翊)·충순(忠順)·충찬(忠贊)·업무(業武)·신선(新選) 등 제색군(諸色軍)을 속오군과 함께 계산하니 도합 11만 8천 8백 25명인데, 평안도와 각도의 제색군을 제외하면 속오군은 8만 6천 73명입니다. 이번의 선발은 속오군 중에서만 뽑아내었으므로 그 수가 4분의 1입니다."
하였다.

 

7월 5일 정미

특명으로 부제학 유백증을 이조 참판으로 승진 임명하고, 김수인(金壽仁)을 상원 현감(祥原縣監)으로 삼았다. 백증은 꾸밈이 없고 정직하며 과감하게 진언하였다. 상이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하였으므로 이번 명이 있은 것이다. 수인은 김광현(金光炫)의 아들인데 사람들이 그가 여력(膂力)이 있다고 천거하였으므로 특별히 이 직책을 제수한 것이다.

 

7월 7일 기유

이보다 앞서 충원 영장(忠原營將) 이엄(李淹)은 나이가 70이 넘었다. 본직에 부임하는 것을 꺼려하여 기필코 면직되려고 하였는데, 마침 장령 송희진(宋希進)이 그가 연로하여 장령(將領)에 합당치 않다고 탄핵하여 체직되었다. 그러자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희진이 사정(私情)을 따라 논핵하여 체직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그를 일러바쳤다. 상이 하교하기를,
"청탁과 사정을 따르는 것은 국금(國禁)이 준엄하다. 법관인 자는 더욱 두렵게 생각해야 할 터인데, 송희진은 지난번에 장령으로서 남의 사적인 청탁을 받고 영장을 논핵하여 면직을 도모한 자로 하여금 뜻을 이루게 하였으니, 일이 몹시 놀랍다. 즉시 잡아다 국문하라. 그리고 이현영(李顯英)은 장관으로서 동료가 사정을 따른 일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진작시키라."
하니, 헌납 김익희(金益熙), 정언 신상(申恦)이 아뢰기를,
"대간이 논사(論事)하는데 풍문을 허락하는 것은 전부터 내려오는 규례입니다. 열성조(列聖朝)가 간관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실상을 잃었다고 죄주지 않은 것은, 대개 매사를 반드시 직접 보고 논핵하면 참으로 논핵할 시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송희진 등이 이엄의 노쇠함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필시 소문이 있어서 논핵하였을 것이고, 이성구는 당초에 체직을 도모하는 것을 미워했는데 마침 대간의 논핵이 나온 것을 보고 마침내 대관(臺官)이 사정을 따른 것이 아닌가 의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차자 내용 중에도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의심스러운 것을 가지고 허실을 가리지 않으신 채, 조금도 생각함이 없이 옥에 가두고 파직 추고하십니까? 전하께서는 나라의 기강이 진작되지 못하는 것을 민망스럽게 여기시고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우려하시어 이런 조치를 하시었으나, 죄를 받은 자가 승복한 후에야 징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신 것이니 어찌 큰 불찰이 아니겠습니까. 희진이 아침에는 대관이었는데 저녁에는 옥에 갇혔으니, 이후로는 언론을 책임 맡은 자가 모두 희진을 경계삼아 다시는 전하를 위해 진언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희진도 오히려 죄를 줄 수 없는데 더구나 현영이겠습니까. 바라건대 내린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급히 따랐다.

 

7월 9일 신해

감시(監試) 이소(二所)의 거자(擧子)가 고관(考官) 정두경(鄭斗卿)을 축출하였다. 사관(四館)에 명하여 유학(幼學) 강인(姜戭)  【 강대수(姜大遂)의 아들이다.】 ·심창(沈敞)  【 심동귀(沈東龜)의 아들이다.】 ·김하영(金廈楹)·조정항(曺挺恒)·조시망(曺時望)·박빈(朴賓)·박수행(朴粹行) 등 수창자 7명을 적발하여 모두 장형으로 다스리고 충군하였다.
이에 앞서 두경이 망발로 인하여 탄핵을 입었는데, 일대(一隊)의 의논은 엄하게 따져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었다. 고관이 되자 강인 등이 창언(倡言)하기를,
"선성(先聖)을 모욕한 자가 어떻게 감히 많은 선비의 시험을 주관할 수 있는가?"
하고, 서로 인솔하여 축출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파장(罷場)을 의논토록 명하였는데, 결국 이조 판서 김상헌의 말을 따라서 일소(一所)의 양시(兩試)에서 성편(成篇)한 자 중에서 각각 1백 명씩을 더 취하여 이소에서 취해야 할 수를 충족시키고, 그 난동자의 우두머리를 모두 처단하였다. 대간 중에는 혹 일소·이소를 모두 파하고 다시 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주청하고, 혹은 이소만 파하고 다시 시험보아야 한다고 주청하였으며, 또 제도(諸道)의 방(榜)을 모두 파하고자 한 자도 있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7월 11일 계축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좌의정 홍서봉에게 효유하기를,
"조경의 말이 모함에서 나왔다는 것은 내가 이미 통촉하고 있으니, 경은 속히 들어와서 상하의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
하니, 서봉이 대답하기를,
"신이 성상께 큰 죄를 짓고 교외에 숨어 살면서 꾸짖어 벌하시기를 공손히 기다리고 있는데, 사관을 보내어 특별히 은지(恩旨)를 베풀기까지 하시니,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흘러 주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답하기를,
"조경의 말은 갈수록 더욱 해괴하다. 그러나 공론이 있으니 경은 대죄하지 말고 또한 개의하지도 말라."
하였다.

 

7월 14일 병진

병조의 군포(軍布) 4백여 동을 의주(義州)에 보내어 양곡을 무역하여 수성(守城)할 대비를 하게 하였다.

 

김류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김류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온화한 말로 효유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5일 정사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 입방(入防)할 군사는 1만 2천 7백명입니다. 경기(京畿)에 소속된 군은 신이 응당 산성으로 나가 수령과 장관(將官)을 초치하여 지킬 곳을 획정할 것이나 원주(原州)·안동(安東)·대구(大丘) 등 3읍은 바라건대 종사관(從事官) 1명을 파견하여 기예(技藝)를 사열하게 하고, 또 위급할 때 영을 속히 따라야 한다는 뜻을 효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7일 기미

대교(待敎) 이지항(李之恒)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4월 25일의 비망기를 보니, 걱정하고 분발하시는 뜻이 말 밖에 흘러 넘쳤습니다. 신은 마침 그때 체직되어 산직(散職)에 있어서, 청광(淸光)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하문하시는 옥음(玉音)을 직접 듣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는데, 얼마 되지 않아 본직에 복직되어 경연에 입시한즉 전하께서 잠자코 침묵만 지키시던 병을 고치시고, 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시는 습관을 크게 바꾸시어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말을 메아리처럼 수작하시니, 신은 지난날의 하교가 정말로 전하의 성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더욱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하시는 일을 보면 이번 달이 지난 달만 못하고, 오늘이 어제만 못하니 이대로 가다간 다시 수개월이 경과하면 반드시 당초의 마음까지 모두 함께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이는 전하께서 스스로 성심(聖心)을 저버리시는 것이고, 온 나라가 모두 전하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뒤에는 전하께서 날마다 오늘보다도 더 간절하고 측은한 비망기를 내리신다고 하더라도 누가 믿으려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성지(聖志)를 굳건히 가지시고 전일 하교하신 말씀을 애써 실천하시어, 애타게 갈망하는 신료들의 소망에 크게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7월 19일 신유

경상도 거제현(巨濟縣)에 우박이 크게 오고, 해조(海潮)가 범람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사 김상헌(金尙憲)이 진언하기를,
"기내(畿內)의 백성은 산이나 들에 나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메마른 밭에서 수확한 것은 모두 요역(徭役)으로 들어가고, 가을·겨울에는 나무를 베어다가 팔아서 의복과 식량을 구득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세도가의 입안(立案)이 더욱 혹심하여 백성들이 손을 쓸 수가 없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상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간이 사정(私情)을 따라 비호하여, 전혀 서로 규계하지 아니하여 이런 폐단이 있는 것이다. 만약 동료의 잘못을 떼 지어 공격하여 물리친다면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 반드시 방자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성상의 전교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여러 신하들의 죄입니다. 지금 만약 법관에게 위임하여 중률(重律)로 다스린다면 기강이 설 것입니다."
하고, 승지 조위한(趙緯韓)은 아뢰기를,
"궁가(宮家)와 훈신 중에 이런 일이 많이 있으나 다른 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헌이 또 아뢰기를,
"고인이 임금의 덕을 칭함에 인(仁)·명(明)·무(武) 세 가지로써 한 것은, 인이 넉넉하더라도 명과 무가 부족하면 그 나라는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근래의 홍서봉의 일로 말하면, 서봉이 과연 뇌물을 받은 죄가 있다면 비록 대신이라고 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고, 만약 조경이 무함한 흔적이 있다면 비록 대간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그 죄를 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필시 수뢰한 사실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경이 경솔히 말하고 또 소문의 출처를 굳이 숨기고 있으니, 매우 해괴하다. 경의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색목(色目)의 혐의는 신도 면할 수 없으니 시비를 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서봉이 일찍이 조경에게 마음씀이 부정하다고 지척하였던 것은 조정 신하들이 모두 그 말을 들었습니다. 경은 서봉에게 혐의가 있는 사이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위 부정하다는 것은 무슨 일을 두고 이른 것인가?"
하자, 상헌이 아뢰기를,
"경은 평소에 추숭(追崇)하는 것에 대해 가장 심하게 비판하였었는데, 종묘에 신주를 들일 때에는 사간으로 있으면서 회피하고 참석하지 아니하여, 채유후(蔡𥙿後)가 그를 대신하였다가 죄를 입었습니다. 이것이 부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7월 20일 임술

정온(鄭蘊)을 부제학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동지 경연사로, 최혜길(崔惠吉)을 좌승지로, 이만(李曼)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명하여 인견하고 권면하여 보냈다.

 

전 판서 장현광(張顯光)이 소명(召命)이 있음을 듣고 올라오던 중 함창현(咸昌縣)에 이르러 병이 나서 올라오지 못하고 그의 아들 장응일(張應一)을 시켜 상소하였는데,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불러 오게 하여 그 아버지의 병세를 하문하고 이어 호초(胡椒)와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7월 21일 계해

상이 문정전(文政殿)에 나아가 윤대관을 소견하였다.

 

7월 22일 갑자

상이 하교하였다.
"천하와 국가의 인륜이 있는 곳에는 각각 군신(君臣)의 정교(政敎)가 없는 곳이 없는데, 잘 다스려지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며, 역년이 오래 가기도 하고 속히 망하기도 한 것은, 인(仁)과 공(公), 사(私)와 포(暴)가 각각 유별로 응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화목하면서 망한 나라가 없으며, 또한 임금이 어둡고 신하가 붕당을 하면서 나라를 보존한 경우도 없다. 나는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처음에 붕당에 병들고, 다시 폐모(廢母)로 더욱 심하여져 나라의 명맥을 보존함이 터럭처럼 위험하다. 만일 군신 상하가 서로 화합하고 외경하여 힘과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재변이 없더라도 반드시 나라를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천재가 거듭 생기고 국민이 의지가 확립되지 않은 경우이겠는가.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마음을 펴서 거듭 신린(臣隣)들에게 고하여 서로 더불어 각성하기를 바랐는데, 그 후 하는 짓을 보면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꾼 흔적이 없는 듯하다. 이는 실상 내가 부덕하고 사리에 어두워 정성이 남을 감동시키지 못한 소치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혹자는 오래 있으면 효험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나 모든 일은 진전이 없으면 퇴보하는 것이 정상적인 이치이다. 지금 신료들이 몸은 주야로 부지런히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뜻은 사정(私情)을 따르는 데 습관이 되었으니, 과연 진전이 없다 할 것이다. 이미 진전이 없다면 퇴보한 것을 알 수 있고, 이미 퇴보하였으면 오래 되어도 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본디 재덕(才德)이 없으니 군신들이 비록 심신(心身)이 파리하도록 힘을 다하더라도 참으로 치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좋은 생각을 가지고 서로 권면했으니 허물을 고치게 하고 마음을 다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일 것이다. 만일 임금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신하가 스스로 포기하거나 임금이 근면하려고 하는데 신하가 더욱 태만해져 해가 점점 기울어지고 물이 점점 깊어지듯 한다면 그 허물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아, 사랑해야 할 것은 임금이 아니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성이 아니던가. 고인 중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가 있다. 충성이 지극하면 목숨을 버리기도 하는데, 더구나 목숨을 버리지 않는 공변되고 부지런히 하는 것이겠는가. 공변되면 식견이 스스로 밝아지고 근면하면 재주가 스스로 진척될 것이며, 욕심이 이기면 흉하고 태만심이 이기면 자멸하는 것이다. 아, 너희 백관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더욱 직무를 다하여 꼭 지치(至治)를 보도록 하고, 망국의 대부가 되지 말며 또한 치세의 기인(棄人)이 되지 말라."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특진관 최내길(崔來吉)이 나와 아뢰기를,
"신은 외람되게 사옹원에 있습니다. 본원에서 진헌하는 물품과 지방에서 공납하는 토산물이 모두 매우 적은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감하기를 청하니, 필시 이처럼 빈약함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공하는 토산물을 완전히 혁파한다면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방에 행회(行會)하였으니, 지금 다시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7월 23일 을축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의주(義州)의 옛 성을 수축하여 관방(關防)을 삼도록 주청하고, 또 부원수를 창성(昌城)에 옮겨 둘 것을 주청하였는데, 상이 체부(體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다. 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의주는 참으로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탕패(蕩敗)한 후로 군량과 병기가 크게 우려되어 수복하는 일을 경솔히 의논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기미(覊縻)할 계책은 이미 세울 수 없으니, 마땅히 힘을 다해 급할 때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것뿐입니다. 본성을 수비하는 데 필요한 군대는 7천 명을 써야 한다 하는데, 이번 무과에 청북(淸北)에서 입격한 자가 이미 1천 3백여 명에 이르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청남(淸南)의 수는 필시 이보다 배는 될 것입니다. 방방(放榜)한 후에 신은(新恩)으로 부방하는 자는 모두 들여 보내고, 황해도에서 전례대로 입방(入防)한 2천 명은 예전대로 본주(本州)에 들여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청북의 군병은 이미 행회하여 단속하게 하였으니 만약 완전히 끝마치기를 기다려 교체하여 보내면 그 수가 1천여 명은 될 것이고, 청북의 복수병(復讐兵)도 2백 30여 명이니 합하여 계산하면 7천 명은 거의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군(南軍) 1 천 6 백 명은 이전대로 백마성(白馬城)으로 파견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군량은 호조와 병조가 금년에 녹봉을 감한 수가 쌀이 1천 8백 24석이고 콩이 3백 4석이니, 시중의 미가(米價)가 제일 비쌀 때에 값을 감하여 무명과 바꾸면 1석으로도 4∼5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서변(西邊)으로 들여보내 추수를 기다려 곡식과 바꾸면 소득이 몇 배는 될 것입니다. 병조는 무명 9백여 동 중에 5백여 동을 덜어내고, 선혜청(宣惠廳)은 재감(裁減)할 때 남은 미포(米布)를 모두 들여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본주의 저축미와 콩이 이미 1만 3천∼4천 석이 있고 겉잡곡이 3만여 석인데, 듣자니 관향미(管餉米)도 8천 5백 석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의주와 백마 두 성으로 나누어 들여보내면 군량이 떨어질 걱정은 거의 없습니다. 제일 모자라는 것은 병기입니다. 연전에 각도에 배정한 화약 5천 근 중에서 3천 근을 내어 제주(濟州)에서 만들어 보낸 활과 화살과 함께 먼저 보내고 총포(銃砲)와 기계를 계속 수송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신이 연전에 관서(關西) 지방을 출입하여 본도의 형세를 대략 알고 있습니다. 강계(江界)에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두른 산봉우리가 8백여 리에 뻗쳐 있고, 그 사이에는 관(關)과 영(嶺)이 다섯이 있으니, 강계의 적유령(狄踰嶺)과 이산(理山)의 우장(牛場), 벽동(碧潼)의 구계(九階), 창성(昌城)의 영병(迎兵), 창주(昌洲)의 우구리(牛仇里)가 이것입니다.
영병 이상은 지세가 험준하고 비좁으며, 산석(山石)이 험준하고 한가닥 뚫린 길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습니다. 그러나 창주 이하는 산이 낮고 물이 얕아서 저항할 길이 없습니다. 적이 만약 창주를 경유하여 곧바로 영변(寧邊)으로 충돌해 온다면 청북의 길이 차단될 것이니, 창성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승패에는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원수가 크게 궁벽진 곳인 능한 산성(凌漢山城)에 거처하여 중외와 연락이 끊기면 호령이 통하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임기 응변하여 내지로 들어온 적을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홍명구가 창성을 수축하고 부원수를 옮겨두도록 주청한 것은 비단 힘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수어하는 좋은 계책이 아닌 듯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출신(出身)이 부방한 후에 교대할 군병과 군량을 이어 댈 방책을 함께 처리하여 장구히 수어할 계책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경연사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지난번 홍명구의 장계 중에 의주 옛성을 수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의당 황급히 처리해야 할 것인데, 체신(體臣)의 회계에 대해 지금껏 내리지 않고 있으니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물러간 지 10년이 되었는데 한 가지도 조처한 바가 없고, 지금에 와서 비로소 운운한 바가 있으니, 이래가지고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지금 오합지졸을 가지고 갑자기 평지의 대성을 지키다가 만에 하나 방어하지 못한다면 안주(安州) 이남은 반드시 풍문만 듣고도 흩어져 도망할 것이다. 임경업(林慶業)이 조정을 기만하고 홍명구는 한낱 백면 서생(白面書生)으로 사세를 알지 못하는데, 묘당이 꼭 그 청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대개 여론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마땅히 사세의 옳고 그름을 헤아려야 할 뿐인데 어찌 남의 말에 동요되는가."
하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교린(交隣)하는 도는 당연히 정하여진 격식을 그대로 따라야지 형세에 따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일과 시기가 달라서 꼭 변통해야 할 형편이라면 구례를 억지로 고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중요한 것은 국가를 보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일본(日本)의 사기(事機)가 조금 달라진 것을 인하여 지난번에는 미봉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재(馬才)를 보내고 서식(書式)을 고친 것은 모두 마도(馬島)의 청을 그대로 따랐으나 유독 예단(禮單) 한 가지 일만은 준허를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초 본국이 덕천가강(德川家康)과 화친을 맺을 때에는, 가강이 새로 뜻을 얻어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하는 일을 모두 반대하여 화친을 구하는 뜻이 지성에서 나왔으며, 강화하는 일을 전적으로 도주(島主)에게 위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주가 우리 나라와 교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의 지극한 소원이었으므로 예단의 많고 적은 것은 원래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소략한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본도(本島)에서 약간의 물건을 더 준비하여 관백(關白)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이미 사신의 일기 속에 기록되어 있으니, 역관이 지어낸 말이 아닌 듯싶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관백은 연소하고 경망스러우며 조부의 부강함을 믿고 지나치게 허세를 부리는데다가 조흥(調興)의 참소로 인하여 의심이 누적되어 있으니, 인서당(麟西堂)이 나온 데서 도주가 위태로운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도주가 죄를 입고 조흥이 다시 등용되면 화가 양국에 전가될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그렇다면 도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곧 우리 변경을 편안히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격식을 어기는 것 때문에 어렵게 여긴다면 마상재(馬上才)는 보낼 필요가 없고 서식을 고칠 필요가 없으며, 만약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2필의 말과 20필의 비단은 지극히 사소한 것입니다. 그러니 해마다 보낸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소비되는 것 때문에 변경의 걱정과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10년에 한번 행하는 데이겠습니까. 이 일의 이해와 득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차라리 도주에게 기롱을 당할지언정 너무 인색하게 하고 고집을 부려 변경의 사기(事機)를 그르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무사(武士)를 널리 취하는 것은 국가의 막대한 폐단이 됩니다. 출신(出身)이 군오(軍伍)에서 많이 나와 군사의 수효가 날로 줄어드는 것이 첫 번째 폐단이고, 출신이 많아져 관작이 두루 미치지 못하면 도리어 원망을 조정에 돌리는 것이 두 번째 폐단이며, 임진 왜란 이후 무사를 널리 취하는 것만 생각하고 시기(試技)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여 요행히 참방(參榜)한 자가 많아, 농부와 천례(賤隷)들이 그의 동류가 어렵지 않게 양반이 되는 것을 보고 문득 경멸하는 마음이 생겨 명기(名器)가 날로 가벼워지고 사람들이 제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않는 것이 세 번째 폐단입니다.
요즈음 국사를 말하는 자가 일시의 부방(赴防)이 소중한 것만 알고 후일의 폐단은 생각지 아니하여 매번 널리 취하는 것으로 말을 하는데, 신은 항시 마음속으로 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요즈음 서로(西路)에 과거를 베푼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래도 너무 지나쳤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더구나 비국의 공사를 보면, 또 삼남(三南) 지방 교생(校生)을 달래어 무예를 시험보인 다음 열명(列名)하여 계문해 앞으로 볼 별거(別擧)에 합방(合榜)하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한때의 구차한 정사를 서로에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체로 말하면, 막중한 과거를 어떻게 한 번의 시재(試才)로 참방을 허락할 수 있겠으며, 도리로 말하면, 국가가 교생을 설치하는 것은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풍속을 교화하는 일을 도우려는 것인데, 지금 교양의 실적이 없는데도 도리어 이끗으로 유혹하여 문(文)을 등지고 무(武)로 나가게 하니, 어찌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먼저 경전(經傳)을 가르치는 정치를 시행하여 학습을 권면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전례에 따라 도태시켜 군역(軍役)에 충정하면, 비로소 사체를 얻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교생을 시재하는 일은 소견이 없지 않으니 마땅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24일 병인

약방의 술과 쌀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도승지로, 서경우(徐景雨)를 대사헌으로, 윤황(尹煌)을 대사간으로, 임련(林堜)을 사간으로, 이일상(李一相)을 헌납으로, 김휼(金霱)을 장령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25일 정묘

전라도 전주(全州)·남원(南原) 등지에 홍수가 져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익사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7월 26일 무진

송시길(宋時吉)을 장령으로, 이도(李禂)를 수찬으로, 민응협(閔應協)·이시해(李時楷)를 지평으로, 유황(兪榥)을 정언으로, 유수증(兪守曾)을 필선으로, 윤구(尹坵)를 부교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신이 지난번 호조의 계사를 보니, 하삼도(下三道)에 경차관을 보내어 양전(量田)한 후에 재해를 입은 전답을 다시 살피도록 주청하였는데, 그 말 중에 ‘삼남의 원망하는 민심을 위로하고 국가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 이 일은 전적으로 백성을 구휼하기 위하여 발론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지금 경차관이 싸가지고 가는 사목(事目)을 보면 자못 번거로운 듯싶습니다.
거기에 말한 것을 보면, 제언(堤堰) 적간(摘奸), 가경(加耕) 적간, 마장(馬場) 화리(花利), 가속관전(假屬官田) 출세(出稅), 내수사전(內需司田) 추쇄(抽刷), 소모(召募) 및 각 아문 둔전(衙門屯田) 성책(成冊) 등 대체로 숨긴 이익을 수색함에 미세한 것까지도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해조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소요스런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도 크게 불가한 것이 있으니, 제3조에 ‘진전(陳田)을 면세로 경작하는 자는 종전 사목대로 3년을 한정하여 세금을 물리지 말되 간사한 백성이 세금을 내는 숙전(熟田)을 버려두고 세금이 없는 진전을 경작하는 자는 진전의 세금을 절대로 감하여 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이미 전안(田案)에 올라 있는 민전(民田)은 후에 묵더라도 으레 모두 세금을 내니, 전답을 경작하고 않는 것은 상세(常稅)의 수입과는 무관한 것으로, 원래 국가에서 문책할 바가 아닙니다. 또 허다한 진전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응당 세금을 내야 하고 어떤 사람은 내지 않아야 할 것을 일일이 사정(査正)하는 즈음에, 힘없는 백성은 죄를 지을까 겁을 먹고 서원(書員)은 뇌물 받는 것을 이롭게 여겨 진전을 경작하는 자가 똑같이 피해를 입을 것이니, 명실(名實)이 서로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양전 후에 재산이 많고 세력이 센 족속들이 서로 선동하여 억지로 고치고자 하는 자가 몹시 많은데, 이런 무리가 해조의 계사를 얼핏 보고 각각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경차관이 내려감에 미쳐 끝내 소망에 부합하는 것은 없고 갖가지 폐단만 있게 되면 허물을 조정에 돌리는 것은 필시 전일보다 배가 될 것입니다. 이는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조정의 뜻이 도리어 비방을 취하는 빌미가 될 것이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전주(田疇)에 대한 정치는 사기 수법이 여러 가지이니, 왕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대체(大體)를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지난해의 양안(量案)은 대개 가닥이 잡혀 있으니 나머지 누락된 사소한 이익은 우선 버려두어 백성과 휴식을 같이 하는 것이 사체를 얻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호남 지방은 재해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곡식이 자못 무성하여, 앞으로 특별한 재해만 없다면 풍년의 가망이 없지 않고, 호서 지방은 그 다음이며, 영남 지방은 두 도에 비해 재해가 더욱 혹독하다.’고 하니, 소문처럼 크게 혹심하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지난해의 예에 따라 우선 복심(覆審)을 중지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경차관을 보내어 현재의 사목으로 다시 한번 정돈하고, 금년에 재해를 당한 곳은 본도로 하여금 전례대로 계문하게 하여 재해를 입은 전답에 대해 구실을 면제하여 주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다만 수령이 토민(土民)을 비호하여 흔히 실상대로 보고하지 않고, 도사(都事)가 행역(行役)을 꺼려하여 필시 일일이 조사하여 살피지 않을 것이니, 만약 조정에서 이런 점을 우려한다면 경차관을 급재 어사(給災御史)로 개칭하여 아직 떠나보내지 말고, 본도에서 장계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재해를 보고한 곳으로 달려가 적간하고 오게 하면, 소요스런 걱정은 없고 착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호조에 있었기에 세입(歲入)의 원수를 가지고 1년 용도를 헤아려 보았는데, 크게 군색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고, 다만 여유가 없는 것이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이번 급재(給災)로 줄어드는 것은 수천 석에 불과하고, 명년에는 또 당연히 결수에 의해 세금을 낼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천 석의 쌀을 아껴 이런 소요를 일으키십니까? 그만둘 수 없다면 한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평상시 세금을 거두는 규칙은, 금진(今陳)은 으레 모두 쌀을 내었는데, 지난해 양안할 당시는 사목을 마련하기 이전 경작한 것에만 의거하여 전안에 편입시키고, 이런 등의 전답은 모두 수록하지 않은 채, 다만 ‘금진(今陳)’이란 두 글자만 써서 분별했습니다. 상규(常規)로 말한다면 당연히 세금을 내는 속에 편입시켜야 하나 큰일을 하기 위한 여사이니, 평상시와는 차등이 있으므로 모두 버리어 백성에게 주어서 힘을 펴게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세금이 모자라는 것을 우려한다면 각 관아로 하여금 전안에 기록된 ‘금진’이라고 된 곳을 직접 심사하게 하여, 이미 기경(起耕)한 곳은 결수(結數)에 따라 쌀을 내게 하면, 일이 근거가 있으며, 약간의 보탬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불문에 부쳐 혜택이 광대하게 미치도록 하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호조에 계하하였다. 겸판서(兼判書) 김신국이 상차하기를,
"신이 당초에 경차관을 보내자고 추정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하삼도에 양전을 이미 마쳤으나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서입니다. 그리고 금년은 수재를 만났으므로 다시 분명하게 심사하여 변통하는 것도 해롭지 않은 것이니, 이는 백성에게 가혹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최명길의 차사를 보면 사목 중의 폐단에 대해 지적한 것이 몹시 많습니다. 그 중에 변명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시험삼아 진달하겠습니다.
그가 말한 연분(年分)을 복심하는 것인즉,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만약 연분을 복심하지 않는다면 세금을 내는 데 있어 상고하여 비교할 길이 없으니, 이것은 조종조의 금석지전(金石之典)입니다. 만일 본관이 보고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복심을 행하지 않는다면 조세를 거두는 중대사가 장차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간혹 복심을 행하지 않는 해가 있으면 해조가 반드시 정해진 세입의 수에 의거하여 전년보다 감함이 없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리를 취하는 정치이니 어찌 크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금년은 홍수가 진 나머지 밭두둑이 시내와 골짜기로 변하여 추수가 필시 지난해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데, 또 어찌 억지로 전년에 수조(收租)한 수를 따라 징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가 말한 사결(私結)을 조사하여 낸다는 것은, 사결이란 것은 각읍이 간혹 약간의 결수를 덜어내어 관가에 사역(私役)하고 공부(公賦)에 부역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적발하여 계문해 장률(贓律)로 논죄하는 것은 곧 항시 행하고 있는 규례입니다.
그가 말한 제언 적간이란 것은, 제언은 하민이 혜택을 입는 기본인데, 요즈음 흔히 세도가들이 침점(侵占)하여 제언 밑의 양전(良田)이 반쯤은 모두 황폐되었습니다. 지난해 전답을 측량할 때에 사목을 따로 세워 제언을 수축하게 하였으니, 지금 심사하는 것은 역시 응당 시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가 말한 가경 적간이란 것은, 사목 중에는 본래 이 조항이 없고, 다만 산골짜기를 새로 개간하고 정전(正田)을 버리는 자는 변명을 들어주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새로운 세금을 더 얻어내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한 마장 화리란 것은, 사목 중에 ‘군장(軍場)이나 마장을 함부로 경작하는 곳이 있으면 법전에 의해 화리를 관에 몰수한다.’고 이른 것이 있으니, 이는 경작을 금지시키는 뜻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가 말한 가속관전 출세란 것은, 관전(官田)이나 둔전(屯田)의 결부(結負)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정해진 수가 있으나 지방에 간혹 많이 점령하고서 관가의 용도라고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적발하여 역을 내게 하는 것은 역시 민결(民結)을 보충하는 계책입니다.
그가 말한 내수사전 추쇄란 것은, 사목 중에는 명칭을 칭탁하여 세금을 면제 받은 것은 더욱 자세히 추쇄하여 실상을 밝혀 세금을 내게 한다고 이른 것이 있으니, 역시 예전부터 내려오는 사목입니다.
그가 말한 소모와 각 아문 둔전 성책이란 것은, 사목 중에는 각도의 소모와 변경 요긴한 곳의 둔전은 면세를 하더라도, 자호(字號) 결부와 아문 명호(名號)를 사칭한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그것을 답험(踏驗)한 후에 세금을 거둔다고 이른 것이 있으니, 이 역시 간사하고 함부로 징수하는 폐단을 없애고자 한 것입니다.
둔전을 3년 기한으로 세금을 물리지 말라는 조목은, 겨우 빈청의 의계로 인하여 탑전에서 단정한 것인데, 이는 난리를 겪은 이후 전답은 많고 백성은 적어서 묵은 땅을 몰래 경작하고 숙전의 세금을 면하려 하므로 부득이 이런 조치가 있은 것이고, 숨긴 이익을 찾아내어 윗사람에게 보태주는 정치를 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신이 탁지(度支)에 근무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나 소견이 어두워 백성이 허물을 조정에 돌리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체직하여 공사간에 편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자세히 알았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무에 충실하라."
하였다.

 

7월 27일 기사

이때 부총(副摠) 백등용(白登庸)이 서울에 들어와 남별궁(南別宮)에 관사를 정하였다. 상이 찾아가서 만나니, 부총이 청포(靑布)를 내어 악공(樂工)에게 주도록 청하였다. 상이 사양하니 부총이 굳이 청하여 허락하였다.

 

7월 28일 경오

백 부총이 찾아와서 사례하였다. 상이 인정전(仁政殿)으로 나가 접견하였다. 부총이 먼저 종자(從者)를 물리치고, 이어 상에게 좌우를 물리치도록 청하고는 은밀히 말하기를,
"불행히 오랑캐가 천명을 거스르고 제멋대로 흉악한 짓을 하여, 귀국에 해를 끼치고 생령(生靈)을 해쳤으니, 참으로 몹시 원통한 일이오. 이번에 진 도독(陳都督)이 제일 먼저 대책(大策)을 세워 요(遼)·광(廣)을 평정할 것을 의논하고, 출사(出師)하던 날 융무(戎務)에 대한 일을 직접 주달하였는데, 모두 윤허를 얻었소이다. 귀국이 정말로 등주(登州)의 공로(貢路)를 다시 통하고자 하면 도독에게 자문을 보내어 황상(皇上)께 전달하게 하면 반드시 허락을 받을 것이오. 다만 오랑캐의 정황을 염탐하여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니, 귀국이 근래에 화의(和議)를 배척하기는 하였으나 기미하는 즈음에 혹시라도 적정(賊情)을 탐색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기회를 살펴 은밀히 독부(督府)에 알려 준다면 그 은혜가 클 것이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번 본국의 차인(差人)이 마침 도적이 참호(僭號)하던 날을 당하여 죽음으로 스스로 지키고 하례의 반열에 불참하자 도적이 노하여 차인을 축출하였소. 이로부터 화의는 이미 단절되었으니 정탐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소. 그러나 시일을 기한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서서히 주선하겠소이다."
하였다.

 

7월 29일 신미

영의정 김류가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이조 참판 유백증(兪伯曾)이 조경(趙絅)을 구제하기 위해 한 말 중에 ‘대신은 모두 홍서봉(洪瑞鳳)의 한때 동료들이니 그 헌의(獻議)는 당인을 비호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대신이 만일 공도(公道)가 있었다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유영경의 권세로도 정인홍을 가두지 못하였고, 이이첨의 방자함으로도 윤선도를 죽이지는 못하였습니다. 어찌 오늘날 이런 해괴한 일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간담이 내려 앉았습니다. 신이 헌의하던 날 저의 생각은 오로지 사건을 명백히 분별하여 시비를 결정하려는 데 있었을 뿐이고 진실로 터럭끝만큼도 치우치게 비호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홍서봉과 젊어서부터 친하게 지낸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니, 백증이 신을 의심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대체로 신하가 임금의 은혜를 잊고 당인을 비호한 죄를 지었으면 참으로 천지간에 용서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구나 이첨도 하지 않은 짓을 한 자이겠습니까. 이첨의 죄는 이미 중형에 처해졌으니, 이첨보다 더한 자는 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신이 죽게 된 나이에 스스로 불측(不測)한 지경에 빠졌으니, 원통함을 품은 채 곧바로 배를 가르고 자포(自暴)하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죄를 올바로 밝혀서 불충한 신하들이 경계를 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백증은 본래 성품이 과격하니, 경은 마음을 편히 갖고 개의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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