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임신
간원이 아뢰기를,
"공조(工曹) 기인(其人)의 폐단이 참으로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문안(文案)을 취하여 상고해 보니, 1년의 가포(價布)가 3만 5천여 필이나 되는데, 섬세하고 길기가 보통 물건의 5배도 더 됩니다. 국가의 땔감에 소용되는 비용이 많다고는 하더라도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는 필시 중간에서 함부로 낭비한 소치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부엌 하나에 소용되는 땔나무가 1백 14근인즉, 그 절반을 감하더라도 겨울에는 추우나 여름에는 따뜻하니 충분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더 줄이소서.
요사이 병란의 기미가 이미 생겨 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하늘이 크게 재앙을 내려 수해와 한재가 거듭 계속되니, 팔도의 생령이 모두 죽게 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쟁까지 하게 된다면 국가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어찌 평상시처럼 안일에 젖어 태평 시절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듣자니,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의 수가 점점 많아져서 내관(內官)이 1백 60명, 나인(內人)이 2백 30명, 별감(別監)이 1백 50명이라 합니다. 긴요하지 않은 식량의 소비가 적지 않은데, 지난번 재감을 의논할 적에 유독 여기에는 언급이 없었으니, 궁부(宮府)는 일체라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옛날 어진 임금은 좌우에서 모시는 내관은 겨우 명을 전달할 정도였으나 재앙을 만나 궁인을 방출한 경우도 있습니다. 바라건대 나인과 환관·별감을 모두 더 줄이소서.
내수사를 혁파하지 않은 것은 신들이 참으로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으나,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 어찌 원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사사로이 축재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혁파를 명하시어 국인의 마음을 감동시키소서.
제궁가(諸宮家)와 훈신의 사패지지(賜牌之地)를 면세하는 것과 절수(折受)를 입안하는 등의 일이 크게 불어나서, 간혹 백성의 전답을 광범하게 차지하고 죄를 짓고 도망한 자를 불러 모으는 일도 있으며 심지어는 노전(蘆田), 어전(魚箭), 염분(塩盆), 해택(海澤)의 이익까지도 함부로 점령하고 있어, 백성들이 손을 놀릴 곳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원망과 화를 불렀던 혼조(昏朝)의 일을 본받고 있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임금은 이미 감손(減損)한 바가 있는데, 훈척 대신들이 자청하여 공가(公家)에 보충하도록 건의한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임금의 뜻을 본받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각 아문의 저축이 걸핏하면 만으로 계산되는데 둔전, 어전, 염분을 강제로 점거한 폐단이 궁가와 똑같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하여 무익한 소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하고 모두 혁파하여 그 수입으로 군수(軍需)를 보충케 하소서.
탁지(度支)는 사무가 몹시 번잡한데 낭관의 수가 적어서 모든 문서를 전적으로 산원(算員)과 서리(書吏)의 손에 맡기어, 문서를 훔치고 재물을 도적질하는 짓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감손하였다고는 하나 폐해는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경국대전》에 의해 산원과 서리의 수를 감원하고 낭관 몇 명을 증원하여 출입하는 숫자를 분장(分掌)하고 각자 회계(會計)하게 하여 간람(奸濫)을 막으소서.
그리고 듣자니, 서리와 산원 중에는 죄를 범한 자가 몹시 많지만 뇌물 꾸러미가 귀신을 부리므로 덮어두고 발고하지 않는다 하니, 《경국대전》의 완악한 향리를 다스리는 예에 의거하여 세초(歲抄)에 간람이 크게 심한 자는 전가 사변시키고 사정을 따라 비호하는 관원은 장률로 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계사를 살펴보니, 간혹 곡절이 분명치 않은 곳이 있고, 또 명수를 잘못 기록한 곳이 있다. 일이 미세한 것인 듯하니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모두 대신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모두 간원의 계사대로 재감하도록 주청하니, 답하기를,
"제궁(諸宮)에 소속된 것인즉 선왕조(先王朝)에 하사하신 것이니, 차마 갑자기 관부(官府)에 떼어 붙일 수 없다. 내관과 나인은, 사령이 부족하기는 하나 헤아려 감손하겠다. 땔나무는, 대내(大內)의 아궁이 둘을 감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이어 각처에서 보내는 땔나무 값을 감하도록 주청하니, 감해진 무명이 9백 36 필이었다.
8월 2일 계유
비국이, 평안도 청남(淸南)의 정원외 교생(校生) 중에 신체가 건장한 자 1천 3백여 명을 선발하여 면강(免講)을 허락하고 활과 포 쏘는 법을 익히게 하며, 또 전남도(全南道)의 정원외 교생 중에 1천 3백 명을 선출하여 대오(隊伍)를 만들도록 주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교생 중에 학업에 뜻을 둔 자는 일체 대오를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 양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홍주(李弘胄)에게 하문하기를,
"요즈음 오랑캐의 동정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저들이 필시 화의가 이미 단절된 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마호(馬胡)는 8월에 다시 온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거느리고 오면 싸울 수 있으나 마호가 예물만을 가지고 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대사간 윤황(尹煌), 승지 이덕수(李德洙)가 아뢰기를,
"화의를 물리친 후에 서변(西邊)에 부방한 군사가 모두 한번 싸워보기를 원한다 합니다. 병가의 승패가 어찌 전적으로 강하고 약한 데 있겠습니까. 만약 지금 다시 기미할 계책을 세운다면 인심이 모두 해이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8월 4일 을해
김준룡(金俊龍)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신천익(愼天翊)을 집의로 삼았다. 천익은 호남 사람이다. 기상이 탁월하고 속박되기를 싫어하여 반정(反正) 초기에 제현(諸賢)들이 모두 조정에 나가 벼슬하였으나 천익은 부름을 받고 나갔다가 얼마 후 돌아왔고, 그 후에 여러 번 소명이 있었으나 나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예조가, 감시(監試)의 회시(會試)에서 《소학(小學)》·《가례(家禮)》를 강경(講經)할 때 시관을 골라 임명하여 글의 뜻을 질문토록 주청하니, 상이 매우 옳게 여겼다.
이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삼가 들으니, 유백증(兪伯曾)이 경연 중에서 조경(趙絅)의 나문(拿問)을 부당한 것이라고 논하고, 또 좌상은 본래 청렴이 부족한 사람이니 경의 말이 과하지 않다고 말하여, 마치 그가 전후로 지적한 것을 증거하듯이 하고, 인하여 그의 아비가 좌상과 친한 사실을 두루 진달하여 강직하고 사심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냈다 하니, 신은 저도 모르게 몹시 상심이 되고 슬퍼집니다.
홍서봉은 권력을 잡고 나라를 그르쳤거나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병들게 한 죄는 없고, 다만 조경의 마음씨가 부정한 점을 드러내놓고 말하고 처리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경이 스스로 마음먹기를 ‘좌상은 현재 정승 자리에 있으니 어진 이를 나오게 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곧 그의 직책이다. 급히 상문(上聞)했다가는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고 있었는데, 마침 간관에 제수되자 기회를 타서 뛰쳐나와 근거 없는 말들을 주워 모아서 교묘하게 선수를 쳐 상대를 견제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동료와 의논하지 않고 대관(臺官)에게도 통고하지 않은 채 마치 급변이나 고하는 것처럼 곧바로 봉장(封章)을 올려 단창에 관통시키려고 계획하였으니, 그 마음씨가 참으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백증은 필시 그 아비가 친후하게 지내는 자가 곤경에 빠진 것을 역이용하여 강직함을 팔아 스스로 이름을 내려고 한 것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그 종말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까닭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붕당의 폐습을 크게 미워하시어, 명예를 구하기 위해 색다른 논리를 펴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편당이 없다고 이르시고 더욱 총애하고 발탁하여 그 길을 넓혀 놓으셨으므로, 올바르지 못한 무리가 진취(進取)에 급급하여 남의 허물을 찾아내는 것을 자기가 출세하는 계제(階梯)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에 도리어 붕당을 파괴하고 공도(公道)를 진작시키지는 못하고 다만 인심을 더욱 파괴하고 세도(世道)를 더욱 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대로 길들여져 이익을 탐하고 자리 얻기를 걱정하여 만족할 줄 모르게 되면 국가의 걱정이 어찌 붕당을 갈라서 서로 대립하는 데에만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조경의 논핵이 설혹 지나쳤다고는 하더라도 유백증이 경연에서 아뢴 것은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김상헌은 정직한 사람으로서 두 신하를 공박함이 너무 심하였다. 애석하다! 친애한 데 치우쳐서 깨닫지 못하였구나.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4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조경의 논핵이 설혹 지나쳤다고는 하더라도 유백증이 경연에서 아뢴 것은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김상헌은 정직한 사람으로서 두 신하를 공박함이 너무 심하였다. 애석하다! 친애한 데 치우쳐서 깨닫지 못하였구나.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사리에 어둡기는 하나 임금이다. 오늘날 신료들이 어찌 감히 감정을 가지고 서로 헐뜯어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가. 지난번 유백증의 말은 사리에 합당한 듯하였으나 말을 구성하는 데 있어 성난 듯한 어투가 많았으므로 내가 크게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김상헌의 상소를 보건대 그 말은 더욱 성난 듯하니, 내가 몹시 한심스럽게 여긴다. 이런 습관이 그대로 자란다면 나라가 제 꼴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조 판서와 참판은 우선 가볍게 죄를 주어 모두 체직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체직의 명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니, 답하기를,
"근래에 조정 신하들이 사당(私黨)이 있는 것만 알고 국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니, 국사가 날로 뒤틀리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하였다.
8월 6일 정축
상이 하교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수해와 한재를 겪은 끝에 갑자기 칙사(勅使)의 행차를 만났으니, 지금 민력(民力)으로는 결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몹시 걱정이 되어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지금 호표피(虎豹皮)·첩선(貼扇)·유둔(油芚)·어교(魚膠) 등 물품을 내려 접대에 보조하고, 외방(外方)에 배정한 물품은 이 수에 의거하여 감하여 주며, 각사(各司)에 저축한 것도 부표(付標)에 의해 취해다 쓰고, 이밖에 감할 수 있는 물품은 더 재감하여 나의 보살피는 뜻에 부응케 하라."
8월 7일 무인
최명길(崔鳴吉)을 예조 판서로, 김광혁(金光爀)을 교리로, 오달제(吳達濟)를 수찬으로, 이시해(李時楷)를 지평으로, 유황(兪榥)을 정언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석기는 성품이 순후하고 조심스러우며 청렴, 검약(儉約)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추앙받았는데, 국혼(國婚)을 한 후로는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니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그가 전장(銓長)에 임명되자 간혹 인척이라고 하여 말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석기가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10일 신사
예조 판서 최명길이 병으로 사직하니, 이현영(李顯英)을 대신 임명하였다.
8월 12일 계미
좌의정 홍서봉이 20여 차례나 정사(呈辭)하였다.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효유하기를,
"대신은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으니 그 진퇴를 경솔히 할 수 없다. 그리고 조경의 말은 기회를 틈타 원한을 보복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하니, 경이 만약 이것 때문에 사퇴한다면 상신(相臣)과 원한이 있는 자가 모두 이런 폐습을 본받을 것이다. 이런 점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속히 들어오라."
하였는데, 서봉이 다시 고사하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효유하였다.
판돈녕 김상용(金尙容)이 상소하기를,
"신의 나이 80에 이르니 노병(老病)이 날로 깊어져 힘을 감내할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떠나야 할 이유이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사리에 어두워서 비방이 산처럼 쌓여 현시국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 떠나야 할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일찍이 선왕조(先王朝)에서는 대란(大亂)을 겪은 이후 시사(時事)가 몹시 어렵고 위태로웠는데도 상신(相臣) 심수경(沈守慶)과 정탁(鄭琢)이 모두 연로하다는 이유로 퇴직을 청하자 선묘(宣廟)께서 즉시 허락하셨는데, 지금까지도 성덕(聖德)을 칭송하여 미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처럼 노패(老敗)하고 혼망(昏妄)한 자는 국사에 도움되는 것은 없고 국가에 해가 될 뿐이니, 나오고 물러감과 떠나고 머무는 것은 구우 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조의 고사를 따라서 특별히 고향에 돌아가 죽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일은 상하의 처리가 모두 미진한 듯하나, 나의 과실이 자못 중하였으므로 마음속으로 몹시 후회하고 있으니, 경은 굳이 사직하지 말아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지난번 일이란 조경이 홍서봉의 일을 논핵한 것인데, 상용이 힘껏 서봉을 구호하고 조경을 국문토록 주청하였기 때문이다.
8월 13일 갑신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천창성(天倉星) 위로 들어갔다.
8월 14일 을유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치계하였다.
"노적(虜賊)이 중국의 창평현(昌平縣)을 침범하였는데, 창평에서 황성(皇城)까지는 70∼80 리의 거리라 합니다."
예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양주(楊州)에서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조익(趙翼)을 대신 임명하였다. 심즙(沈諿)을 형조 판서로, 최연(崔葕)을 우승지로, 이식(李植)을 대사성으로, 최명길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8월 15일 병술
평안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었다.
8월 18일 기축
상이 하교하였다.
"이길(李佶) 등 제매(弟妹)가 혼기가 지났으니 내 불쌍히 여긴다. 지금 들으니, 그의 어미가 상경하고자 한다 하니, 양도 감사로 하여금 인마(人馬)를 헤아려 지급하고 특별히 우대하게 하라. 그리고 예조로 하여금 지난번 하교한 대로 즉시 정혼하게 하라."
8월 20일 신묘
간원이 아뢰기를,
"훈련 도감 군졸 가운데 늙어 병든 자가 3백 90여 명에 이른다 하니, 바라건대 파면시키고 정예병을 다시 뽑아 실제로 쓸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고 도주하였거나 늙어 제외된 자는 반드시 보(保)가 있을 것이니, 3보를 채우지 못한 자에게 옮겨 지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군정(軍政)을 수행하는 것은 오로지 주장(主將)에게 달려 있는데, 신경진(申景禛)은 구습을 그대로 따라 하여 고식적인 것에만 힘쓰고 고질적인 커다란 폐단을 고칠 생각을 아니하며, 상법(常法)을 포기하여 국고를 허비하였으니, 그의 직무를 태만히 한 죄와 관직을 황폐하게 만든 책임은 중신이라고 하여 관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여러 달 동안 병을 핑계하여 직무를 폐기하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도감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라. 신경진은 별로 파직시킬 만한 죄가 없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대사간 윤황(尹煌)이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구획(區劃)하고 시행할 방법은 참으로 한두 가지가 아니나 우선 족식(足食), 족병(足兵), 임장(任將)의 방법을 들어서 재택(裁擇)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군역(軍役)의 고통이 사민(四民)019) 들에게는 제일 심하여,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 생각해 죽기를 한하고 모면하려고 하므로 10 호가 살고 있는 촌락에 군으로 정하여진 자는 겨우 1∼2명에 지나지 않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여러 가지 탈을 대어 빠졌으니, 사족(士族)·품관(品官)·유생·충의(忠義)·공장(工匠)·상고(商賈)·내노(內奴)·사노(寺奴)요, 그밖에도 서리(書吏)·생도(生徒)·응사(鷹師)·제원(諸員)·악생(樂生) 등 이루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양민(良民)이 역(役)을 피해 승려가 되는 자가 10 중 6∼7이니, 병사의 수가 어찌 적지 않을 수 있으며 국력이 어찌 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측은한 말씀으로 중외(中外)에 효유하시기를 ‘만일 이 도적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대부는 어떻게 집안을 보전하며 사서인은 어떻게 몸을 보전하겠는가? 똑같이 망하고 죽을 뿐이다. 신민(臣民)과 합심 협력하여 이 도적에게 대항하여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아낼 계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하시고, 전하께서 먼저 궁액(宮掖)과 근신 중에서 젊고 건장한 자를 일으키고, 다음으로 종실(宗室)과 백관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자를 일으키고, 그 다음에 유생·서리·시민·공사천(公私賤)을 차례로 일으키면 도성 안에서 수만 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궁문에 납시어 몸소 활과 칼을 잡고서 사민(士民)을 창도하시고, 번을 나누어 재주를 시험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시면, 수개월도 되지 않아 성숙한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방의 병사 선발도 이 방법을 써서 먼저 부유하고 세도 있는 사람을 일으킨 뒤에 힘없는 백성에게 미치면 온 나라 백성이 모두 감동하여 따를 것이니, 누가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며, 누가 감히 법망을 피할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면 10수만 명의 정병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외방의 요역(徭役)이 너무 무거워서 10부(負)에 베 1필을 내고, 1결(結)에 10필을 낸다 하니, 민간이 내는 것을 기준하여 계산하면 국가의 재용(財用)이 크게 여유가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내외가 탕진하여 수개월의 비축도 없습니까? 대개 우리 나라 전부(田賦)가 조세(租稅)는 가벼운데 공물(貢物)이 무겁고, 기타 잡역(雜役)이 또 공물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런데 조세만 국용이 되고 공물과 잡역은 모두 10배나 되는 값을 거두면서도 교활한 아전과 방납자(防納者)의 주머니 속으로 모두 들어가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으며 나라가 어떻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만사를 제쳐놓고 군량에 전력을 쏟아야 할 것인데, 제향(祭享)은 비록 큰일이기는 하나 마땅히 변통해야 할 바가 있고 어공(御供)은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또 무엇이 어려워서 공물의 폐단을 개혁하지 못하십니까.
그리고 경비가 모자랄까 항시 걱정하는 것은 긴요치 않은 식량의 소비와 불필요한 낭비가 많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풍족하던 구규(舊規)에 얽매이지 마시고 환관과 궁첩(宮妾)은 사령(使令)할 만큼만 남겨두고 모두 파면하며, 기타 의복과 사용하시는 물품 중에 약간 사치스런 듯한 것은 모두 재감(裁減)하게 하시면, 외정(外廷)의 긴요치 않은 식량 소비와 외사(外司)의 불필요한 낭비는 일필(一筆)로 제거시킬 수 있습니다.
산택(山澤)의 이익은 예로부터 탁지(度支)에 속한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모두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내수사(內需司)를 파하여 모두 유사(有司)에게 돌아가게 하시면, 모든 훈구, 척신과 각 아문은 감히 사사로이 점유하지 못할 것이고, 여러 가지 세금과 공물이 모두 국유가 되어 재용이 넉넉할 것입니다. 참으로 능히 이것을 행하여 군수에만 전념한다면 10만 명의 군량은 변통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군율이 엄하지 아니하여 장수가 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경계하여야 할 급박한 사태가 있게 된다면 먼저 스스로 도망하여 적들이 무인지경처럼 들어올 것이니,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마땅히 먼저 장수를 가리어 병사와 군량을 풍족하게 하고 병기를 구비한 다음 나가서 싸우거나 물러가 지키는 것을 하는 대로 맡겨두고 절대로 멀리서 통제하지 말며, 누적된 시기로 하여 의심을 갖지 말고 참소와 이간 때문에 현혹되지 말아서 오랫동안 책임을 맡겨 실효를 거두도록 하고, 성공하면 후한 상을 내리고 실패하면 처자까지 중형을 받게 하되 이 법을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장수된 자는 반드시 지혜와 용맹을 다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감히 병기 소리만 듣고 도망하거나 풍문만 듣고 흩어져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니, 장수를 맡기는 도리가 참으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발흥(發興)하는 계책을 저해하고 분려(奮勵)하는 뜻을 패퇴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오로지 강도(江都)로 보장(保障)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위로는 종묘(宗廟)를 받들고 아래로는 만민을 돌보시어 간대(艱大)한 임무와 부모로서의 책임이 높고도 중대하니, 어찌 차마 혼자만 온전하다고 하여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혹 전하께서 한번 강도로 들어가신 후에 오랑캐의 병사가 국내에 가득하여 백만 생령들이 모두 그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면 전하께서는 그때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임금은 한갓 고식적인 방법으로 병화(兵禍)를 피하려고 마음먹으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잊고 부모와 처자식을 버린 채 즐거운 마음으로 끓는 물 타는 불 속으로 뛰어들기를 바란다면, 그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의논드리는 자는 이르기를 ‘군부(君父)와 종사(宗社)를 아주 안전한 곳에 모신 후에야 국사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하나, 신들의 생각에는 강도에 있는 병사와 군량, 무기를 속히 철수하여 모두 서로(西路)로 실어보내고 행궁(行宮)을 불사르고 거처하지 않아야 그제사 국세(國勢)가 진작되고 인심을 보존하여 망국의 화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소위 군부와 종사를 위한 만전지책이라고 여겨집니다.
신들은 또 생각건대, 지금 계획을 변동시키지 못하는 까닭은 한 가지 빌미가 될 만한 일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변란을 여러 번 치른 후라 인심이 걱정하고 불안해 하며 상하가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예기치 않은 변란이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항시 염려하고, 무슨 일을 하면 곧바로 의심을 하므로 위망(危亡)의 화가 당장 닥치는 것을 보고도 감히 크게 시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오랜 병고를 치르는 사람이 허리와 배가 서로 끌어 당기고 목과 등이 서로 끌어 당기며, 앞에는 사나운 짐승이 있고 뒤에는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서 조금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런 대책없이 그대로 죽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런 데에 현혹된 바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인심의 향배는 군주의 덕에 달려 있는 것이니, 거조가 올바르면 인심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고 원근(遠近)이 사랑하여 받들 것이며, 백성에게 편협함을 보이면 여기저기서 혐오하여 틈이 생기고 환란이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광무제(漢光武帝)는 자신의 적심(赤心)을 사람들 뱃속에 두었다고 할 정도였기에 도적떼가 충성을 다해 목숨을 바쳤고, 송 태조(宋太祖)는 ‘천명(天命)을 가진 자는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도 반측자(反側者)가 숨을 죽인다.’고 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슬기로운 군주가 난리를 평정하여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오늘날 책임을 맡은 자는 덕에 힘써 사람을 복종시킬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시기하고 의심하던 말세의 전철을 밟고 있으니, 이것이 여러 사람이 함께 걱정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점이며 장사(將士)들이 맥이 풀리는 이유입니다. 아, 변성(邊城)이란 것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곧 외적을 막는 방법이니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지 않고 먼저 피난할 곳을 찾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송 진종(宋眞宗) 때에 거란의 백만 대군이 천하를 유린할 기세로 쳐들어왔는데, 군신(群臣)들은 앞다투어 피난할 계책을 말하였으나 유독 구준(寇準)만은 친히 정벌에 나설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리하여 전연(澶淵)에 출사(出師)하였는데, 육군(六軍)은 사기가 북돋아지고 노병(虜兵)은 넋이 빠진 채 강화를 청하고 달아났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군신들이 두려워서 겁을 먹고 나약한 마음을 가졌다면 어떻게 위엄을 떨치고 승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난번 정온(鄭蘊)이 전하에게 개성에 진주(進駐)하시도록 주청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고 미친 말이라고 비웃었으나 이것은 참으로 전하를 위한 심오한 계책이었습니다. 전하께서 항시 강도로 들어가 보전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시었으므로 군신들의 해태한 마음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만일 개성에 진주할 마음을 가지셨다면 국사가 어찌 이처럼 극한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에는 개성도 오히려 가깝게 느껴지니 평양(平壤)에 진주하는 것이 최선인 듯합니다. 전하께서 혹여 싸워서 지키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가지시고 물러가 피난하겠다는 생각을 아주 끊어버리시어, 강도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평양을 보전하고 진주하여 친정(親征)할 계책을 세우신다면 전하의 신하들 중 누가 감히 움츠리고 물러가 살기를 도모할 마음을 갖겠습니까. 사방의 근왕병(勤王兵)과 팔도의 충의지사(忠義之士)들까지도 반드시 구름이 모이고 그림자가 따르듯이 식량을 싸가지고 멀리서 달려와 전하의 위급함을 구할 것이어서, 병사는 소집하지 않아도 스스로 모이고 군량은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쌓일 것이며, 성을 지키는 장수와 대오에 편성된 병사까지도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감히 발길을 돌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싸움을 하거나 수비를 하거나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흔쾌히 영단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간원의 차자는 사의(辭義)가 엄정하여 다 읽기도 전에 고무하고 진작하는 늠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정묘년020) 의 강화는 다만 형세가 불리하고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휴식을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으니, 종사를 위하고 생령을 위해서였습니다. 도적이 황제라 참칭한 후에는 의리에 의거하여 물리쳐 거절했는데, 지난번에 인삼 값을 가지고 온 오랑캐에게 서찰을 부치고자 한 것은, 명분을 간범한 죄를 책망하고 맹약을 먼저 깬 뜻을 힐책하는 데 불과하였던 것이니, 어찌 다시 기미(覊縻)할 계책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부질없는 의논이 분분하여 먼 곳에까지 전파되어 심지어는 진신(搢紳)들까지도 파란을 부채질하여 그 세를 돕고 있습니다. 이는 무식한 자의 말이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성지(城池), 병기, 족식, 족병의 허다한 직무는 전수(戰守)를 위한 큰일이니 어찌 잠시인들 마음속에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서둘러 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민력이 감당하지 못하여 혹시 내란에 이르지 않을까 두려워해서입니다. 국가가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심입니다. 지금 만약 종실(宗室) 이하 제반(諸班)의 각종 사람들을 모두 모으고 시민과 공사천에 이르기까지 병사를 만든다면, 군대의 수는 많이 얻을지라도 반드시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 것입니다. 이 무리들로 하여금 도적을 막게 한다면 양떼를 몰아서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병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고식적인 방법을 많이 쓰고 군율이 엄하지 않다.’는 간원의 말은 참으로 오늘날 고질적인 폐단을 적중한 것입니다. 만일 도적이 국경을 침범하여 관서(關西) 지방을 통과한다면 순찰사(巡察使)와 병사(兵使)는 당연히 처자까지도 극형에 처해야 하고 해서(海西) 지방을 통과한다 하여도 역시 그렇게 하여 절대로 너그러이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 조 간자(趙簡子)는 진양(晋陽)으로 보장(保障)을 삼아 끝내 이익을 얻었습니다. 오늘날 강도는 부득이한 데서 나온 조치인데 어찌 반드시 행궁을 먼저 불사른 후에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평양은 참으로 우리 나라의 큰 도시로 험악한 성지와 풍부한 물력은 국내에서 제일이고,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현재 경영하여 적을 차단할 곳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상께서 진주하시는 것은 오늘날 경솔히 의논할 바가 아닌 듯합니다.
전연의 일은 천고의 미담이나 육군(六軍)의 성대함이 어찌 오늘 같으며 인재의 많기가 어찌 오늘 같겠습니까. 그리고 형세의 강약과 성지의 견고함도 오늘에 비길 수 없습니다. 국가를 도모하는 방법은 참으로 만전지책을 써야 하는 것인데 간원의 모든 신하들이 어찌 이 점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걱정하고 분개하는 마음이 격함으로 인하여 이런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간원의 이 말은 천하의 대의(大義)로 없어서는 아니될 의논입니다. 한가하실 때 좀더 생각하시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만일 도적이 국내에 깊이 들어온다면 체찰사도 중한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절대로 예전처럼 태만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8월 27일 무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 최명길이 아뢰기를,
"병법은 권모 술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추신사(秋信使)는 보내지 않더라도 우선 호역(胡譯)을 보내어 그들의 동태를 관찰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시독관 조빈(趙贇)은 아뢰기를,
"정묘 호란을 겪은 이후 자강(自强)하지 못한 것은 화의(和議)가 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강화는 하였더라도 결국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똑같이 병화를 입는 것이니, 차라리 대의를 밝혀 거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8월 30일 신축
이민구(李敏求)를 이조 참판으로, 민광훈(閔光勳)을 장령으로, 이식(李植)을 대사간으로, 김수익(金壽翼)을 지평으로, 윤구(尹坵)를 이조 좌랑으로, 김덕함(金德諴)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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