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33권, 인조 14년 1636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3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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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임인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칙서를 받들고 오니, 상이 모화관에 나가 영접하고 인정전에 이르러 의식대로 칙서에 절했다.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한다. 짐은 생각건대 천도(天道)는 사사로움이 없어서 거역하면 흉하게 하고 순히 하면 길하게 하며, 왕화(王化)는 예외가 없어서 포악한 자를 제거하고 충성스런 자를 드러내는 것이다. 무지한 노추(奴酋)가 험고함을 믿고 완강하게 버티는데 아직까지 천토(天討)를 늦추어 죄가 이미 천지에 가득 찼다. 요즈음 변신(邊臣)의 주문(奏聞)에 의거하면, 저 도적이 감히 다시 교활한 꾀를 부려 해국(該國)을 위협했는데, 국왕이 능히 준엄한 말로 거절하고 함께 원수를 갚겠다는 의리가 간절하여 충직하고 양순한 마음을 변치 않았다 하니, 몹시 가상하다. 이미 연해(沿海)의 각 장수에게 신칙하여, 수군(水軍)을 정돈, 격려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여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기책(奇策)을 세워 승리로 이끌어 천토를 펴라 하였으니, 국왕은 더욱 충직하고 양순한 마음을 돈독히 하고 무략(武略)을 크게 드날리어 함께 꾀하고 협력하여 큰 공을 세워서 영원토록 요해(遼海)의 파도를 맑게 하고 힘써 번병(藩屛)의 공렬을 세워 여러 대를 지켜온 나라를 빛내고 훌륭한 포상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라."

 

9월 3일 갑진

황 감군(黃監軍)이 게첩(揭帖)을 보내어 말하기를,
"역노(逆奴)가 내국(內國)을 침범한 지 이제 19년이 되었소. 우리 나라는 귀국과 우환을 함께 하여 입술과 이빨의 관계처럼 정의가 몹시 두텁소. 오늘날 오랑캐를 토벌하는 일은 귀국의 긴밀한 협조를 바라지 아니할 수 없소.
하나는 김소석(金召石)과 백양골(白羊骨)의 봉(封)함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오. 김소석(金召石)과 백양골(白羊骨) 두 추장은 원래 우리의 속이(屬夷)로서 대대로 충성을 다하였는데, 건이(建夷)가 함부로 날뛰어 마침내 두 부족(部族)을 합병하였소. 추장은 비록 망하였다고 하더라도 부락에는 아직까지 생존자가 남아 있으니, 바라건대 현왕(賢王)은 지모(智謀)가 있는 사람을 보내어 금·백의 자손을 은밀히 찾아가 원래의 봉호를 허락하고 그 부락을 거느리고 오게 하는 것이오.
하나는 간첩을 쓸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이오. 요즈음 듣자니, 노적(奴賊)이 3추(三酋)의 자손을 모두 죽이고자 한다 하니, 이것은 바로 천심(天心)이 난리를 싫어하여 역노들로 하여금 한집안에서 창을 잡고 스스로 어육(魚肉)을 만들게 한 것으로, 간첩을 쓰기가 지금보다 편리한 시기는 없소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귀번(貴藩)은 유념하고 몸소 방문하여 저들의 상하 좌우로 하여금 제각기 마음을 다르게 먹게 하시오.
하나는 투항해 오는 사람을 초치(招致)하는 법을 확대시키는 것이오. 노적의 군대는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자가 1만 명도 되지 않고, 대개는 모두 금·백·어(魚)·피(皮) 등의 부족 중에서 강제로 끌려온 오랑캐와 요(遼)·광(廣) 등처의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난중(亂衆)들이니, 지금 법망을 크게 터놓아, 노적에게 빠진 자는 한인(漢人)이나 오랑캐를 가리지 말로 모두 투항을 받아 주시오.
하나는 귀번의 병사를 신칙하는 것이오. 왕국(王國)은 봉역(封域)이 수천 리이고 식량이 수십 년을 지탱할 수 있을 터인데, 하루아침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갑자기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의주(義州)는 나라의 문호이니 지금 옛 성지(城址)를 이용하여 증수하고 동강(東江)과 더불어 서로 기각지세를 형성하면 노적의 인후(咽喉)가 끊기고 왕국은 태산처럼 유지될 것이오.
하나는 공마(貢馬) 제도를 회복시키는 것이오. 조종조의 구제(舊制)에는 해마다 조공에는 으레 명마(名馬)가 있었는데, 노적이 왕국을 유린한 이후로 도로가 막히어 귀번의 공마가 오랜 세월 단절되었소. 지금 병력을 증강하고 진영(鎭營)을 이치(移置)하여 금성 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히 하도록 의논하자면 반드시 먼저 많은 말을 바치어 방어를 돕게 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제도상의 정하여진 액수를 조사하여 보내서 군전(軍前)에 보충하여 타고 싸우는 데 사용하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오. 바라건대 현왕은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대인(大人)께서 불곡(不穀)이 어리석어 더불어 대화할 상대가 못 된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화첩(華帖)을 보내어 속마음을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몹시 감탄스럽소. 예로부터 적을 제어하는 데는 신기한 꾀를 많이 썼으니, 기회를 틈타 계략을 써서 스스로 쇠하게 만든 후에 시기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만전지책이 될 것이오. 여진(女眞)의 유종(遺種)은 본래 많지가 않고 지금 모여 살고 있는 것은 모두 협박을 당한 금·백·홀(忽)·온(溫)의 여러 부족들이니 그 중에는 필시 심복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것이오.
그리고 팔왕자(八王子)는 세력이 균등하여 서로 갈라지기가 쉬운 형편이오. 지금 들으니, 저들 중에 벌써 서로 도모하려는 조짐이 있다 하니, 이는 곧 하늘이 망하게 하는 때이오. 일찍이 진 도독(陳都督)의 게첩과 백 부총(白副摠)이 말한 것을 보면, 모두 적정을 정탐하고 간첩을 이용하도록 분부하였소. 폐방은 황조(皇朝)가 노적을 제어하는 방법을 깊이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폐방이 조금이라도 힘을 다할지언정 감히 심력(心力)을 기울여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소.
모 원수(毛元帥)가 개진(開鎭)한 이래로 귀순하는 요민(遼民)이 끊이지 않았는데 폐방이 길을 인도하여 피도(皮島)로 보냈으니, 이 일은 피도에 있는 제장(諸將)들이 알고 있소. 지금 이처럼 돈독한 분부를 받드니 더욱 심력을 다해 여러 방면으로 개도(開導)하여 대인의 뜻에 부응토록 하겠소.
의주는 폐방의 문호로 정묘 호란에 병화를 제일 혹독하게 당하여 인민이 모두 사망하여 온 경내가 폐허가 되었소. 요즈음 수년 사이에 비로소 유민을 불러 모으고 성첩(城堞)을 보수하여 고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자 하는데, 병사가 적고 식량이 모자라서 아직까지 착수하지 못하고 있소. 폐방의 군신이 주야로 힘써 잊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여기에 있소이다.
폐방은 본래 좋은 말이 없는데다 병란을 겪은 이후 선(宣)·철(鐵) 제도(諸島)의 목장이 모두 비어 있고 민간에서는 전혀 좋은 말이 생산되지 않아, 공사간에 사용하는 말은 모두 노둔한 것들로서 전용(戰用)으로는 합당치 않소이다. 그러나 부지런히 구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니 감히 힘껏 수매(收買)하여 조그만 정성을 표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군사 기밀은 몹시 비밀스런 것이니 대신 1명을 보내어 직접 말씀드리고, 지휘를 받겠소이다."
하였다. 다음날 김류를 보내어 관소(舘所)에 이르니 감군이 좌우를 물리치고 6폭의 글이 든 봉투 하나를 주어 상에게 계달하게 하였다. 상이 인정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감군에게 이르기를,
"소방(小邦)은 척화(斥和)한 이후 조석으로 병화를 입고 있는데 병력이 잔약하여 적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 부모의 나라에서 와서 구원해 주기를 바랄 뿐이오."
하니, 감군이 이르기를,
"귀국은 오로지 문화(文華)만 숭상하고 무략(武略)은 등한히 하였소. 그리고 병사와 농군을 구분하지 않았으므로 이처럼 약한 것이니 조련만 더 시킨다면 단약(單弱)한 것은 걱정할 것이 없소이다."
하였다. 술이 네 순배 돌고 파하였다.

 

9월 4일 을사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감군이 조목별로 진술한 계책은 자기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중국 조정에서 자세히 강론한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 여섯 가지 조목이 백등용(白登庸)의 말과 서로 부합하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는 항시 그들의 내란이 있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반드시 들은 바가 있으므로 이를 인해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니, 우리 나라는 불가불 주선하여 천하의 소망에 보답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신국이 아뢰기를,
"한인(漢人)의 말은 으레 허탄한 것이 많습니다. 사람을 호(胡)에 보내어 김소석·백양골 두 추장으로 하여금 이간하도록 하는 것이 어찌 우리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란 간혹 요행으로 성공하는 수가 있다. 내 생각에는, 이 일은 혹 이익되는 바가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 만약 노추(奴酋)가 이 일로 인하여 김소석·백양골 두 추장을 의심한다면 대접이 반드시 소홀할 것이고, 대접이 소홀하면 원망할 것이며, 원망하면 변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반간(反間)이란 것이다."
하였다. 판윤 최명길이 아뢰기를,
"다만 노추가 먼저 우리 나라가 반간을 하지 않나 하고 의심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말을 보내는 일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몇 필을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
하자, 우의정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저편에서 3천 필을 말하였으나 3백 필을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국사는 착실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년을 지탱하여 보전한 것은 대개 화친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정묘년 변란 초에는 모두 화의(和議)를 나쁘다고 하였으나 강화를 맺고 난 후에는 모두 편하게 여겼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는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황제를 참칭하였으니 지금 화친을 끊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칭신(稱臣)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들과 더불어 지난날처럼 형제의 나라로 칭하고 서로 화친을 끊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논의하는 것은 기미할 계책을 세우자는 것이 아니니 경들은 서로 다투지 말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듣자니, 안주(安州)의 병사는 교련이 자못 익숙하고 유림(柳琳)의 수하에 있는 3천 명은 모두 정예병입니다. 그리고 유림은 남군(南軍)이 수자리에 들어오는 것을 면제하고 그 군인들에게서 군포를 징수하여 서로(西路)의 토착민에게 주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면 5천 명의 정병이 항시 성중(城中)에 머무를 수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안주는 지킬 수 있으나 의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백마(白馬)의 무기와 군량 및 강변(江邊)의 수졸(戍卒)을 의주로 옮겨 들여보내면 또한 지킬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 남아 있는 군량 3만 석으로는 1년을 지탱할 수 있으나 그 뒤를 어떻게 잇겠는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가까운 지방의 병사에게는 군량을 지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주는 안주에 비길 것이 아니다. 반드시 겨울 여름을 가릴 것 없이 항시 지켜야 할 것인데, 지금 미리 조치는 취하지 않고 말로만 지킬 수 있다고 하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하였다.

 

황 감군(黃監軍)이 우리 나라 종이로 인쇄한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요구하니, 상이 기증하라고 명하였다.

 

9월 5일 병오

판윤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요즈음 대각(臺閣)에서는 사람마다 모두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있으나 유독 간원의 차자만은 언론이 몹시 정당하고 방략(方略)이 채택할 만하니, 대중을 따라 부화 뇌동하는 데 비길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참으로 묘당의 뜻이 오로지 척화에 있다면 회계하는 말을 어찌 모두 몽롱하게 엄호하여 한 가지도 시행함이 없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원래 정산(定算)은 없고 다만 지연시키기 위한 계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대체로 간원의 의논을 받아들여 나가 싸우거나 물러가 지킬 계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또 신의 말을 받아들여 병화를 완화시킬 계책을 세우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노기(虜騎)가 휘몰아 오면 체신(體臣)은 강도로 들어가 지키고 수신(帥臣)은 정방(正方)에 물러가 있으면서 청북(淸北)의 여러 고을은 버리어 도적에게 주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필시 안주성만 홀로 온전할 수 없어서 생령이 어육이 되고 종사가 파천(播遷)하게 될 것이니, 이런 지경에 이르면 그 잘못은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대가(大駕)가 진주(進駐)하는 것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나 체신과 수신은 모두 평안도에 개부(開府)하고 병사(兵使)도 의주에 들어가 거처하여, 진격만 있고 퇴각은 없다는 것을 제장(諸將)들과 약속하는 것이, 전수(戰守)의 상도(常道)에 부합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심양(瀋陽)에 서찰을 보내어 군신의 대의를 모두 진달하고 이어 추신(秋信)을 보내지 못한 이유를 말하여 한편으론 오랑캐의 정황을 탐색하고 또 한편으론 저편의 답서를 관찰하여, 저편이 다른 생각이 없고 그대로 형제의 예를 쓰면, 호씨(胡氏)가 논한 것을 따라 우선 전약(前約)을 지키고 안으로 정사를 닦아서 후일을 도모해 후진(後晋)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힘쓰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용만(龍灣)을 고수하여 성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서 안위(安危)를 변상(邊上)에서 결정하는 것이 혹 만전지책은 되지 못하더라도 대책없이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을 놓아두고 도모하지 않고 한결같이 우물쭈물하여, 나아가 싸우자고 말하고 싶으나 의구심이 없지 않고, 기미할 계책을 말하고 싶으나 또 비방하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진퇴가 분명치 않은 것입니다. 강물이 얼게 되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니 소위 ‘너의 의논이 결정될 때는 나는 벌써 강을 건넌다.’는 말과 불행히도 가까우니, 신은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지금은 이미 늦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해볼 만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번 차자를 묘당에 내리시어 혹 지난번처럼 묻어두지 말고, 속히 의논하고 복계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다.

 

9월 6일 정미

박서(朴遾)를 부교리로, 김대덕(金大德)을 사은사로, 최시우(崔時遇)를 서장관으로 삼았는데, 장려하는 칙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성(皇城)이 포위를 당하였으므로 사은 겸 분문사(奔問使)를 차출하여 오는 봄을 기다려 보내려고 하였는데, 호란을 만나 중지하였다.

 

9월 8일 기유

비국이, 감군의 청에 의거하여 호역(胡譯) 권인록(權仁祿) 등을 심양에 보내어 사정을 탐문하도록 주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교리 조빈(趙贇), 수찬 오달제(吳達濟)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감군의 게첩에, 김소석·백양골 두 추장에게 간첩을 써서 노적(奴賊)을 도모하는 계책이 있는데, 조정에서 이와 반대로 계책을 써서 금·백 두 추장이 명조(明朝)를 위해 몰래 노적을 도모하고 있다는 말을 호인(胡人)에게 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내란이 일어나게 하고자 한다 합니다. 신들이 보건대 그 계략이 모순되어 행하기 어려운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고,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의롭지 못하다는 이름을 듣더라도 끝내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대체로 명조가 계략으로 오랑캐를 도모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그 방법을 몰랐었는데, 마침 금·백 양 부락이 부족은 망하고 몸은 포로가 된 것을 보고는 반드시 원한이 있을 것을 알고 큰 이익으로 유혹하여 서로 제거하게 한 것이니, 이는 몹시 비밀스런 군사 기밀입니다. 우리 나라가 간첩을 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렸다면 정직하게 할 수 없다고 사절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명조의 밀계(密計)를 경솔히 오랑캐에게 누설하려고 하니, 설령 우리의 계략대로 되어 금·백이 죽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명조의 방략에 어긋나는 것이니, 실기(失機)한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노적을 이간하지 못하여 금·백을 죽이지 못한 채 명조의 비계(秘計)만 잘못되게 하고 만다면, 오랑캐에게 덕을 보이고 다시 기미의 길을 여는 데에는 좋을 것이나 천하의 사람이 장차 우리 나라를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조정의 생각은 필시, 이 일은 감군과 더불어 강론하여 결정한 것이니 의리에 무슨 손상이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만일 일이 누설된 후에 명조가 힐책하기를 ‘우리에게 비책이 있어서 너희들과 함께 이루려고 하였는데 너희들이 오랑캐에게 누설하여 우리의 대계(大計)를 그르치고 너희들의 화친을 굳게 하였다.’고 하면서, 이 일로 허물을 우리 나라에 돌리고 감군까지 함께 죄준다면, 전하께서는 무슨 말로 천하 후세에 변명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 나라는 이미 오랑캐와 절교하여 신사(信使)를 통하지 않으니 간첩을 쓰는 계책은 시행할 길이 없다.’고 이르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면 금·백과 노추를 이간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후회 막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근일에 의논하여 결정한 일이니 명조는 필시 우리 나라에 대해 의심하거나 노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9월 9일 경술

훈련 도감 포수(砲手) 4백 명을 평안도에 보내어 수자리 살게 하였다.

 

9월 10일 신해

노장(虜將) 마부대(馬夫大)가 장사꾼의 인삼값을 가지고 중강(中江)에 와서 우리 나라 사람을 불러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군관(軍官) 최극현(崔克峴) 등으로 하여금 술대접을 하게 하고 이어 보관하고 있던 격서(檄書)를 전하여 주니 마부대가 극현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듣고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이미 대호(大號)를 칭하였는데 어찌하여 조선에서는 옛 칭호를 다시 쓰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한(汗)이 여러 왕자들과 더불어 매번 이르기를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 하고, 항상 웃는다."
하고, 인하여 격서를 받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오로지 물건 값을 맞추어 지급할 뿐이다. 이 서찰은 한의 명령이 없었으니 가지고 갈 수 없다. 꼭 보내고자 한다면 사람을 따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고, 이어 중강 건너편에서 풀을 베고 있던 한인(漢人) 2 명을 포획하여 도독(都督)이 떠났는지 여부를 캐어묻고는 참수하고 떠나갔다.

 

9월 11일 임자

임련(林堜)을 집의로 삼았다.

 

9월 12일 계축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감군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가도(椵島)로부터 보고서가 올라왔다. 거기에는 노적(虜賊)이 원릉(園陵)을 더럽혔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니, 풍악을 잡히고 삽화(揷花)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말도록 주청하였는데, 감군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노적이 부도하여 원릉을 더럽힌 것은 실로 천하가 함께 놀라고 통탄할 일입니다. 만일 원릉에 차마 말할 수 없는 변고가 생겼다면 당연히 변을 당했을 때에 행하는 예절이 있을 듯한데, 준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우선 반찬 수를 줄이고 궁전을 피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감군이 우리 경내에 들어온 이후 증정한 인삼의 통계가 2백 12근이나 되니 참으로 많습니다. 별도로 기증할 숫자는 70근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3일 갑인

대사간 이식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 비국에 내리신 소장(疏章)을 두루 살펴보건대, 논한 것이 모두 군덕(君德)은 심성을 교화하는 것으로 주를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성현이 극진히 말씀하신 바이니, 천하의 이치가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이 심법(心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주(周)나라 이후 수천 년간을 전혀 계승한 자가 없었으니 요(堯)·순(舜)만 같지 못한 것은 이미 세상 인주들의 큰 수치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하가 이것을 임금에게 바라는 것은 축사(祝詞)와도 같은 것이니, 말을 함에 족히 품위가 높아지고 말을 들음에 귀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자가 비록 많기는 하나 결국은 공문(空文)이 되어버리고 마는 이유입니다.
검약(儉約), 관혜(寬惠), 이신(履信), 병공(秉公) 같은 것을 정치의 기본으로 삼는 것은, 왕도(王道)를 하는 자가 반드시 그러할 뿐만 아니라 패도(霸道)를 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것을 빌려 패도를 이루고, 부강을 하는 자도 반드시 이것을 빌려 부강하며, 아래로 간웅(奸雄)이 뜻을 얻고 융적(戎狄)이 임금을 두는 데까지도 여기에 방법을 빌리지 않는 이가 없으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도적도 예(禮)와 악(樂)이 있다.’는 것이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성패(成敗)와 화복(禍福)의 관건으로, 이에서 거꾸로 베풀면 다시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속론(俗論)은 그렇지 아니하여, 왕도는 존모(尊慕)할 수는 있으나 시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여 잡패(雜霸) 이하는 모두 탐사(貪詐)로 얻는 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에 순수한 이치를 고상하게 말하면서 부정하고 비열한 정치를 드러내놓고 행하여 이원(利源)이 날로 열리고 방본(邦本)이 날로 훼손됩니다. 패망의 화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으니 아, 생각이 몹시 깊지 못합니다. 옛날 혹리(酷吏)는 청렴하고 검소한 자가 많았는데 요즈음 혹리는 탐학(貪虐)만을 일삼으며, 옛날 염신(斂臣)은 법을 만들어놓고 음성적으로 취하였는데 요즈음 염신은 억눌러서 이유없이 탈취하며, 옛날 소인은 얼굴을 바꾸면서 법을 두려워하였는데 요즈음 소인은 득의한 듯이 선량한 사람을 능멸하며, 옛날 맹정(猛政)은 크게 교활한 사람에게 베풀었는데 요즈음 맹정은 연약한 사람에게 베풀며, 옛날 세도가는 은택 때문에 풍요했는데 요즈음 세도가는 횡점(橫占)으로 부유하며, 옛날 귀족은 태평한 세상에 교만이 넘쳤는데 요즈음 귀족은 망해가는 나라에 사치가 지나치니, 이는 서진(西晋)과 소양(蕭梁)의 폐습인데 말하는 자는 조송(趙宋)의 어질고 연약함으로 견주고 있습니다. 아, 조송에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다행히 성상께서 간과(干戈)를 삼가시고 검소한 생활을 솔선 수범하시며 법을 닦고 부세를 줄여 한결같이 선왕의 아름다운 뜻을 준수하고자 하시니, 이것은 몸소 실행하는 것이고 명분을 빌린 것이 아닌 것으로, 중외(中外)가 모두 크게 작위(作爲)함이 있기를 우러러 바라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신은 그간의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하고 일을 처리한 대략을 살펴보건대, 거꾸로 시행하던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한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생각의 사정(邪正)만을 살피시고 시비(是非)를 만기(萬幾)에 살피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혹 선가(禪家)의 견해처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 묘도(妙道)를 삼고 정책과 사무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치를 아직 다 밝히지 못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 채우지 못하여 구습에 얽매이고 잡다한 사무가 복잡하여 정돈할 겨를이 없어서, 구습을 버리시지 못하고 잘못된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진실로 그렇다면 이는 성명(聖明)의 정치가 왕도를 편 요·순 문·무만 같지 못할 뿐만 아니라 패업(霸業)을 이룩한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晋文公)의 업적에도 끝내 미치지 못할 것이며, 화란(禍亂)의 조짐이 늦추어질 때가 없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진작이니 변통이니 하는 것은 여러 소장에서 항시 말하는 것이니 한두 가지로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진작이란 것은 오로지 상벌과 진퇴시키는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차례 용관(冗官)을 파면하고 현재(賢才)를 천거한 일은, 유사(有司)의 상규(常規)요 해조(該曹)가 죽도록 지켜야 할 법에 불과한 것인데, 요행의 문이 뚫려서 사의(私意)가 크게 행하여져, 한두 명의 발탁자는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탁무(卓茂)를 봉한 것처럼 민중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고, 천거로 입사(入仕)한 자는 이미 파면시킨 자들보다도 못한 자가 많습니다. 전하께서는 또 좌우 신료들과 더불어 물어서 조사하고 강론하여 그 현부(賢否)를 꼭 보고 나서 진퇴시키려고 아니하셨으니, 어떻게 인재를 얻어 쓰고 공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변통이란 것은, 폐정(弊政)을 경장(更張)하고 나라를 좀먹는 간신들을 제거하여 일체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을 당무(當務)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공(御供)을 줄이고 조그만 비용을 절약하면서 구차하고 고식적인 정치와 백성을 성가시게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은 일체를 그대로 따라 답습하시었습니다. ‘한갓 착하기만 한 것[徒善]은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대체로 국가의 폐정은 낱낱이 셀 수 없으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고르지 않은 것입니다. 고르지 않은 중에서도 군정(軍政)과 재정(財政)이 제일 심하니, 더욱 시급히 개혁하여 확장되어가는 오랑캐의 세력을 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서변(西邊)의 10여 산성(山城)으로 차단할 계획을 세우면서, 실패하면 처자까지 도륙하는 법으로 서변의 장수들을 묶어 두려 하니, 이는 도적이 이르는 날 사죄를 용서받은 왕현모(王玄謀)와 봉상청(封常淸)을 함부로 죽인 것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니 패망의 화를 막는 데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가 병사를 두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병사를 둔다면 양성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백성에게 역(役)을 안 시킨다면 모르지만 시킨다면 홀로 수고롭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대개 고금의 병제(兵制)는 병사와 백성을 구분하느냐 아니하느냐의 두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병사와 백성을 분리하지 않으면 정(井)과 이(里)가 서로 돕고, 병사와 백성을 분리하면 백성으로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니, 비록 제도상의 장단점은 있다고 하더라도 양성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미 모든 백성을 병사로 삼지 않았고 병사는 또 백성에게 양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성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거기에다 박해까지 더하고 있으니, 이처럼 좋지 않은 병제는 고금의 국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내외직을 출입하면서 곁에서 가만히 관찰하고 널리 묻고 의논하여 약간의 일정한 주견을 가진 지 오래입니다. 지금 여러 소장에서 논한 것을 살펴보고 인정과 사세를 참작해보니, 모든 백성을 병사로 삼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회의 끝에 논한 바가 있었으나 이치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로 취급당하여 살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다시 성상을 위하여 그 중 한두 가지를 진달하겠습니다.
옛날에는 나라에 큰 변란이 있으면 두루 변경으로 나가는 법이 있어서 공경(公卿) 이하가 차례로 나가 장수가 되었고, 고려 때는 사대부(士大夫)도 종군하여 적을 방어했습니다. 이는 모두 난리를 만나 살아남기를 도모하고 원수를 함께 적개하는 조치이니, 어찌 명을 어기고 나라를 원망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신이 지난 병인년 겨울에 체신(體臣) 장만(張晩)을 따라 입시하였는데, 만이 말하기를 ‘패안(牌案)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양반으로 1군(一軍)을 만들고 양정(良丁)으로 1군을 만들며 천정(賤丁)으로 1군을 만들면 형세가 몹시 좋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께서 가납하시고 이 계획이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시었습니다. 지금 패법(牌法)은 비록 파하였으나 이 제도만은 시행할 만합니다.
삼가 듣건대, 수원부(水原府)는 호(戶)마다 대오에 편입하여 여리(閭里)에서는 병사가 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합니다. 그런데도 수원의 군병(軍兵) 중에 아직도 도망하는 자가 있는 것은 온 나라 백성을 모두 병사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관서(關西) 지방이 교생(校生)을 모두 모아서 대오에 편입시키고 ‘교생군’이라고 호칭하자 민중이 싫어하지 않은 것은 명분이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양반은 천 명, 백 명 가운데 병사가 된 자는 한두 명도 없고, 민정은 수십 명 중에 병사가 된 자는 한두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병사가 된 자들은 스스로 무기를 갖추고 조련과 정수(征戍)의 고통이 항시 따르니, 어찌 원망하고 도망할 생각을 갖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충의위(忠義衛)에서 뽑아내어 별도로 군오(軍伍)를 만들었는데, 나라의 양반과 서천(庶賤)은 태연하게 한가로이 놀고 있습니다. 충의위는 나라에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치우치게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구전(口傳)하는 원수(元數)를 모두 모으지 못하고 단지 수령으로 하여금 찾아내어 낱낱이 보고하게 하였으므로 모두 숨기고 빠뜨려 열에 하나도 뽑아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고르지 않은 중에도 크게 고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충의위의 병사된 자가 어찌 원망하고 도망할 생각을 갖지 않겠습니까.
남한 산성은 병기가 미비하고 군량의 저축이 충분치 아니하여 수어할 형편이 아직도 서로(西路)의 제성(諸城)에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 소속된 다섯 고을의 군사로 하여금 처자를 이끌고 가산을 운반하여 일제히 들어가게 하고, 또 초모(招募)에 응하는 자가 없으므로 수령으로 하여금 사민(士民)을 몰아서 명을 따르게 하니, 다른 고을의 군사에 비교하면 과연 치우치게 혹독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성은 본래 한강의 방어를 위한 것이니 당연히 한강 이남의 주현(州縣) 주민을 소속되게 해야 하는 것인데 한강 이북의 군읍(郡邑) 주민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이것은 고르지 않은 중에도 크게 고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다섯 고을의 병사된 자가 어찌 원망하고 도망할 생각을 갖지 않겠습니까. 이런 무리가 무너져서 흩어질 조짐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사대부는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서 인심이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니, 어찌 그리 생각이 깊지 못합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 노고를 균등히 하여 원망이 없게 하고 정장(精壯)한 병사를 양성하여 애착심을 갖게 하는 두 가지 일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마땅히 옛 제도를 모방하고 민심을 참작하여 공경(公卿) 이하 한 사람도 종군하지 않는 이가 없게 하여 대율령(大律令)을 만든 후에 정3품 이상은 장수로 호칭하고 종6품 이상은 장관(將官)으로 호칭하며, 7품 이하는 조사군(朝士軍)으로 호칭하고, 유생은 유생군, 무학(武學)은 무학군이라 호칭하며, 잡직(雜職)이나 제위(諸衛), 시민, 방민(坊民), 서리(胥吏), 전복(典僕)은 각각 그 종류별로 호칭을 하면, 공사천(公私賤), 유수(遊手), 한민(閑民)이 스스로 출현하여 대오에 증편되고 숨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 뒤에 현재 재직 중인 자는 정역(征役)을 면제하고 역사(役使) 중인 자는 정역을 면제하며, 부자가 한 군적에 있으면 애비는 정역을 면제하고 형제가 한 군적에 있으면 형은 정역을 면제하며, 3명에 1명을 면제하고 6명에 2명을 면제하며, 노복(奴僕)이 역사를 바라는 자는 수를 제한하여 정역을 면제하고 늙고 병든 자는 정역을 면제하며, 또 그 중에서 사대부로부터 서리, 노복, 잡직에 이르기까지 병사가 되려고 아니하는 자는 수를 정하여 물건을 납품하게 하고 정역을 면제하여 줍니다. 정역에 제외된 자는 제정첩(除征帖)을 주고 정역에 면제된 자는 면정첩(免征帖)을 줍니다. 그 나머지로 속오군(束伍軍)에 편입하여 부대를 만들고, 또 그 중에서 모법(募法)을 행하거나 혹은 초법(抄法)을 행하여 양반은 효건대(驍健隊)로 이송하고 민정(民丁)은 어영군(御營軍)으로 이송하며, 그 나머지는 조사(朝士) 중에 재직하지 않은 자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여 병기(兵技)와 진법(陣法)을 교육하고, 경성은 호종(扈從)을 갖추거나 유관(留管)을 따르게 하고 지방은 향리를 지키고 도적을 금지시키게 합니다. 속오군을 편성하는 사무는 한성부는 오부(五部) 관아에서 관장하고 지방은 감사와 수령이 관장하게 합니다. 별도로 부서를 설치하여 간람(姦濫)을 돕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속오군의 편성이 결정된 후에는 관원을 파견하여 속오군에 입적되지 않았거나 면제첩을 갖지 않은 자를 조사하여 향리에서 효시(梟示)하면 1도에 수삼 명만 단죄하여도 바람을 좇듯이 휩쓸릴 것입니다. 그리고 정역을 면하고 납품한 것을 각 부(府)와 현에다 저축해 두고 해사(該司)가 출입하는 큰 숫자를 맡아 관리하여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으로 삼아 병기를 공급하기도 하고 혹은 상격(賞格)에 충당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어영군과 효건대의 수가 수만 명에 이른즉 혹은 칼과 도끼를 쓰는 기술을 연습시키기도 하고 혹은 순거(楯車)의 제도를 강론하게 하여, 원수(元帥)에게 소속시켜 강하(江河)와 관령(關嶺)을 차단하는 일을 도모하게 하면 거의 유용한 병사가 될 것입니다. 이 제도는 단적으로 행할 만한 것이니 순리적이고 어려운 점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성상께서 혁연(赫然)히 결단을 내리고 사방에 분명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일이 결정되면 즉시 파한다는 뜻을 효유하신다면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사안(事案)을 완결지을 수 있을 것이니, 이미 속오군에 편성된 군대와 시행하고 있는 제도상에 조금도 방해되는 바가 없이 스스로 증보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서도(西都)의 진주(進駐)를 의논할 수 있고 강화(江華)의 포기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화의(和議)가 이미 단절되고 대의(大義)를 이미 밝혔다. 군사는 명분이 곧은 것이 건장함이 되고 인심은 화합하는 것이 최상이 된다. 이미 성지(城池)를 쌓았으니 적의 침입을 차단할 수 있고 이미 군사를 뽑았으니 횡행할 만하다. 오랑캐의 후미를 제어할 수 있고 요동(遼東)을 회복할 수 있다. 다시 병제(兵制)를 의논할 필요도 없이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이른다면, 이는 묘의(廟議)에서 언급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촌동(村童), 야부(野夫)가 듣더라도 비웃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니,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무슨 확고한 계획이 있길래 이처럼 기약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는 다시 자세히 살피시어 이것이건 저것이건 간에 결연하게 시행하시고, 부질없이 번잡하게 권장하는 비답이나 내리고 날마다 형식적인 것만 일삼으면서 앉아서 세월만 허송하여 결국은 패망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하시면, 종사(宗社)와 생령에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다만 어영군과 효건대가 이미 증원되었다면 군량을 공급하는 길이 더욱 넓어졌을 것입니다. 지금 비록 체부(體府)의 정초군(精抄軍)이라 하더라도 군량을 공급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재물은 나올 곳이 없고 부역도 다시 더 무겁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 도내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감사를 오래도록 맡겨서 관할하여 규례에 따라 군포(軍布)를 거두고 토산물을 갖추도록 감독하며, 차사원을 보내어 곧바로 각사(各司)에 납부하여 간리(奸吏)들의 막대한 부정을 막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 잉여분을 취하면 군자(軍資)는 저절로 충분해질 것입니다. 지금 어공을 줄이는 시기를 당하여 강론하여 시행하면 필시 어려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신이 정묘년 여름에 사직소를 인하여 이 조목을 언급하였고, 충주(忠州)에 부임하여 또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이 법을 시행하고자 하다가 해조에 의해 중지되는 것을 보았으며, 신이 지난번 다시 빈청에 헌의하였으나 역시 살피지 않았습니다. 조정의 정사를 주간하는 신하가 각기 자신의 재능만 믿고서 힘써 상규(常規)를 지키고 한결같이 변통하는 것을 증오하고 싫어합니다. 더구나 이 의논은 신처럼 허탄하고 망령되며 멍청한 자의 입에서 나온 것인 데이겠습니까. 쉽게 물리침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법도 조리가 있으나 지금은 자세히 논의할 겨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살피시어 사람이 못났다고 하여 말까지 폐하지 않으시면 이는 국가가 이미 시험한 일이니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지 않고도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부(該部)만은 변경하는 것을 꺼리고 구습을 따르는 것을 기뻐하며, 또 간사한 자들이 어지럽힐까 두려워하여 실행하지 않으려는 의논이 있고, 심지어는 아주 조그만 일까지도 일일이 들추어서 어렵다고 핑계대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전 영상(領相) 윤방(尹昉)은 실지로 대동법의 의논을 주장하였고 신의 계획을 좋게 여겼으니 이는 신만의 견해가 아닙니다. 만약에 ‘조석으로 변란을 기다리는 처지이니 특별한 조치는 용납하기 어렵다.’고 이른다면, 앞으로 병화를 입는 날 가혹한 세금을 거두는 일은 그만두지 못할 형편이니, 어찌 국가를 다스리는 제도를 미리 결정하여 위급할 때 자용(資用)할 수 있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 자세히 알았다. 크게 가상히 여긴다. 소장의 내용은 소견이 없지 않으니 묘당과 더불어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공경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병사를 만들고 간혹 늙고 병든 사람에게 정역을 면제하고 물품을 납품하게 하면 족식(足食), 족병(足兵)은 두 가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으나 이해가 반반이라 거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대동법을 설치하는 일은 논한 자가 한두 명이 아니나 반드시 잘 변통해야 비로소 유익하고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조리가 있고 절목도 많으니 이식(李植)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마주 앉아 의논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 후 일은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9월 14일 을묘

일찍이 전라도에 유치하였던 한인(漢人) 남녀 3백 1명을 섬으로 쇄환(刷還)하였다.

 

상의원(尙衣院)에 도적이 들어 황금 72냥과 금은 기물 10여 종, 은 1백 냥, 진옥(眞玉) 등 7종을 훔쳐갔다. 일이 발각되어 뒤쫓아가 붙잡았는데 추징한 것이 반이 넘었다. 본원(本院)이 그 나머지를 일족에게서 추징하도록 주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도적만 주륙하였다.

 

9월 15일 병진

황 감군이 서변(西邊)으로 돌아갔다. 상이 모화관에 나아가 환송했다.

 

이때 묘당이 사람을 심양(瀋陽)으로 보낼 계획을 이미 확정했는데, 이는 대개 황 감군의 오랑캐 동정을 정탐하라는 요청에 의한 것으로, 겸하여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으려는 것이다. 헌납 이일상(李一相), 정언 유황(兪榥)·홍전(洪瑑)이 아뢰기를,
"지난번 적로(賊虜)가 참호(僭號)하고 방자하게 글을 보냈는데 전하께서 벌컥 성을 내고 분발하여 대의로 거절하고, 독부(督府)에 이자(移咨)하고 명조에 전주(轉奏)하시었습니다. 당시에는 떠났던 인심이 다시 화합하고 저상(沮傷)되었던 사기가 다시 진작되고 어두웠던 의리가 다시 밝아졌으니, 이는 참으로 위태로움이 변하여 안정이 되는 하나의 커다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수개월도 되지 않아 분별 없는 논의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심지어는 정탐한다는 명분을 빌려 차사를 오랑캐에게 보내고 국서를 부치려고 하니, 전하를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국가의 일은 사람마다 경솔히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국사를 도모하는 것은 비록 권모(權謀)를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명백하게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도적이 황성(皇城)을 핍박하고 원릉(園陵)을 더럽혔으니 신자된 자치고 누군들 원통함을 품고 죽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갑옷을 입고 달려가서 위급한 부모를 구제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차마 우리 스스로 일을 도모하여 이런 무익한 서찰을 보낸단 말입니까. 가령 이 일이 오로지 감군의 청을 받들어 명조를 위해 간첩을 쓰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내고 싶어도 보내지 못하였던 것을 이 일을 빙자하여 부송한다면, 신들은 봉승한 뜻이 밝혀지기도 전에 의심하는 비방이 먼저 이를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병가(兵家)에서 간첩을 씀에 있어서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차인(差人)이 역말을 타고 국서(國書)가 뒤따르니, 이 역시 하나의 사신입니다. 그 누가 명조를 위해 간첩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르겠습니까.
아, 화친은 이미 끊어졌고 장려하는 칙서가 겨우 내려졌는데 거조가 바르지 못하여 군정(群情)이 의심을 가지니, 위로는 명조를 배반하고 아래로는 우리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들의 구구한 생각으로는 참으로 이것이 두려워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주청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간 정태화(鄭太和)가 지난번 경연 석상에서 이미 이론을 제기하려 하였고, 또 오늘 간통을 보내어 문의한즉 병을 칭탁하고 답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은 일에 임하여 헤아려 처리하지 못하고 이해를 비교하여 동료에게 경멸을 당하였으니,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더없이 중대한 일을 이처럼 함부로 논하니 그대들의 소행은 몹시 부당하다."
하였다. 사간 정태화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교전 중에도 서로 사신을 통하여 적의 동정을 정탐하고 겸하여 국서를 부치기도 했으니, 묘당이 강론하여 결정한 것이 어찌 소견이 없다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전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마침 갑자기 중병을 얻어 이미 사직서를 마련했는데 그제사 간통이 이르렀으니, 한편으론 체직을 바라고 또 한편으로는 답장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릇된 견해를 바꾸지 아니하고, 또 급히 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지었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장령 김휼(金霱)·민광훈(閔光勳), 지평 민응협(閔應協)이 아뢰기를,
"지난번 적로가 제멋대로 참호하고 우리를 다시 인호(隣好)의 도리로 대접하지 않으니 대의가 있는 한 화친하는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중외에 포고하고 명조에 전하여 알렸으니 바로 조약을 폐기하고 사신을 끊어 자강책을 강구하는 데 급급해야 마땅할 것인데, 지금 다시 구구하게 국서를 통하니, 분명히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황제의 칙서가 내려지고 장려하는 유지(諭旨)가 함께 이르렀는데, 겉으론 간첩을 보낸다는 명분을 빌리고 실지로는 스스로 하려던 계획을 이루려고 하니, 거조가 잘못된 것이고 의리에도 해롭습니다. 대각의 신하가 의리에 의거하여 집요하게 논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신들이 여러 차례 발언하였으나 장관(長官)에게 견제당함을 면할 수 없었으니, 몹시 연약했기 때문입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집의 임련(林堜)도 이 일로써 인피하였다. 교리 조빈(趙贇)·박서(朴遾), 수찬 오달제(吳達濟) 등이 처치하기를,
"요즈음 여기저기서 다른 의논이 함부로 생겨 신사(信使)를 다시 통하고자 하였으나 핑계댈 말이 없을까 걱정하였는데, 감군의 말을 듣고서 갑자기 사람을 보내고 서신을 부치려고 하였으니, 이는 간첩의 명분을 빌려서 기미하려는 계책을 이루려고 하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양사의 논쟁이 실로 정당한 의논인데 자기 소견을 고집하고 많은 말로 이론을 세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라건대 이일상·유황·홍전·김휼·민광훈·민응협·임련은 출사를 명하고 정태화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김류, 우의정 이홍주가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간원이 인피한 말을 보니, 역관을 차출하여 오랑캐에게 격서(檄書)를 보내는 것으로 우리 백성을 기만하고 명조를 배반하였다 하여 은연중 죄를 묘당에 돌리고 있으니, 신들은 몹시 놀랍습니다. 대의가 있는 한 참으로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를 도모하는 도는 한 가지 의논을 고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감군이 오랑캐의 동정을 정탐하고 간첩을 행하는 것을 전적으로 우리 나라에 책임지우고 전후의 자문과 게첩이 몹시 간곡하였으니, 이 일은 우리에게서 제기된 의논이 아닙니다. 신사(信使)는 결코 들여보낼 수 없으나, 호역(胡譯)을 보내어 격문을 전달한다고 칭탁하고 이어 오랑캐의 형편을 정찰하며 혹은 편리에 따라 계략을 행하는 것도 역시 임기 응변하는 방법이니, 어찌 반드시 이익이 없을 것을 알고서 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이미 언관에게 거조가 부정하다는 지척을 받았으니 어떻게 감히 뻔뻔스럽게 공무를 집행하여 국사를 그르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신들의 죄를 바로잡고 다시 바른 것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시어 물정을 흔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사를 살펴보고 자세히 알았다. 그 말은 개의할 것이 못 되니 경들은 공사(控辭)하지 말라. 그리고 차자 속에 발명한 말과 낭패스러워하는 태도는 모두 타당치 않은 듯하다. 대신의 말이 이처럼 연약한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하였다.

 

9월 17일 무오

김반(金槃)을 부제학으로, 민광훈(閔光勳)을 장령으로, 이상형(李尙馨)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19일 경신

호역 박인범(朴仁範)·권인록(權仁祿)을 심양으로 보내고 아울러 의주(義州)에 유치해 두었던 격서를 부쳤다. 이어 다시 한(汗)에게 서찰을 보내기를,
"지난번 폐국의 사신이 귀국에 갔을 때 함부로 비례(非禮)로 대접하고 장사하던 물건을 유치한 것은 다만 조그만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들으니, 국서 중에 ‘너희 나라가 갑자기 종전의 서독체(書牘體)를 어기었다.’고 하였다 하니, 불곡(不穀)은 몹시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귀국의 뜻은 그뿐이 아니라 맹서를 저버린 허물까지도 억지로 우리 나라에 돌렸으니, 이것은 더욱 변명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신을 다시 보내는 것은 참으로 무안하게 느껴졌으므로 별도로 한 통의 서찰을 준비하여 변신(邊臣)에게 부쳐서 전달할 수 있는 편을 기다렸는데, 끝내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유치하였던 인삼 값을 재차 맞추어 보내었고, 또 변신의 보고에 의거하면, 귀국 차사가, 사신이 욕을 당한 일은 귀국도 후회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니, 참으로 이와 같을진댄 많은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로 전하는 것은 확실히 믿을 수 없기에 이에 역관을 보내어 뜻을 전하고 아울러 지난번 서찰을 함께 보냅니다. 귀국의 재량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 최명길(崔鳴吉)의 말이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이번에 오랑캐에게 역관을 보내는 것은 본래 간첩을 행하라는 감군의 청을 인하여 국서를 부송하고, 또 김소석·백양골이 오랑캐를 도모하는 계략을 노추(虜酋)에게 말해 주려고 해서라 하니, 이는 참으로 상대의 계획을 알아 역이용하여 서로 의심하게 만들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명조를 지성으로 섬기었고, 오랑캐인즉 비록 더불어 기미는 하더라도 속으로는 실상 원수로 대접하고 있으니, 음흉하고 교활한 오랑캐로서 의당 모를 리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이런 말을 듣는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가 감군과 더불어 계략을 꾸미고 이것으로 그 상하를 이간하려고 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에 도리어 의심하고 노여워하는 마음만 더한다면 무사한 중에 흔단을 만드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반드시 대계(大計)에 유익하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비책(秘策)을 저들에게 경솔히 누설하는 것이 될 것이니, 명조에서 듣고 혹 의심이라도 한다면 몹시 난처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잘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신들은 모두 불초한 사람으로 비국에 대죄하고 있으면서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때를 당하여 성상께서 서변을 돌보시는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는 한 가지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지난날 의주에 유치하였던 격서를 물건 값을 가지고 온 오랑캐에게 부쳐보내어 맹세를 저버린 책임이 저편에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뜻으로 책망하고자 하였는데, 마호(馬胡)가 끝내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런 시기에 감군이 적정을 정탐하고 간첩을 행하도록 여러 차례 간곡히 부탁하였는데, 사리에 어긋나고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역관을 보내고 이어 격문을 부송하고자 한 것은 당초에는 감군의 요청에서 나온 것이나, 또한 국가를 도모하는 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군신의 대의가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는 것인즉 신들이 비록 우매하더라도 본디 강론한 바가 있으니,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먹고 일을 만들어 천하의 대방(大防)을 무너뜨리겠습니까.
이번에 대간이, 위로 명조를 배반하고 아래로 우리 백성을 기만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이 말은 몹시 엄정하기는 하나 너무 박절하지 않습니까? 신들은 부끄러워 사죄하는 이외에 다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마호가 의주에 나오던 날 임경업(林慶業)이 역관을 차송하고 격서를 보낼 의향으로 문답하였으니, 저 도적이 이미 역관을 들여 보내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일로 인하여 전쟁을 늦추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어찌 만에 하나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의 대계는 한번 결정된 후에 맺고 끊음이 없이 우유 부단한 것도 좋은 계책이 아니니, 전에 결정한 대로 시행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양사가 그래도 지난번 의논을 고집하고 옥당도 계속 상차하여 논핵하니, 비국이 호역을 만상(灣上)에 머물게 하고 논의가 결말되기를 기다려 들여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상이 붕당(朋黨)의 폐해에 대해 이르기를,
"김상헌(金尙憲)은 선량한 사람인데 성지(聖旨)에 따라 진언한 사람을 죄주고자 하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지사 최명길이 아뢰기를,
"상헌은 도량이 편협하고 기개가 강직하므로 좋은 곳에 들어가면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상이 있고 잘못 들어간 곳에서도 뜻을 굽혀 고칠 생각이 없으니, 식견이 모자라서인 듯합니다."
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상헌이 종묘의 제관(祭官)이 되어서는 6월 혹서에도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종일 재계하였고, 내의원 제조가 되어 어약(御藥)을 조제할 때에는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다른 일로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지 못하게 한 뒤에 지어 올렸으며, 문안할 때에도 역시 ‘군부(君父)께서 병환이 있으신데 어떻게 사가에 물러가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반드시 궐문(闕門) 밖에서 유숙하고 일찍 들어와 문안하였으니, 이 또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점을 알고 있으므로 지난날 강제로 기용한 것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요즈음 오랑캐에게 사람을 보내는 일이 이처럼 지연되고 있으니 몹시 민망스럽습니다. 대간이 비록 논계하였으나 어찌 끝까지 고집하여 논쟁하겠습니까. 한편으로 들여 보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명조를 배반하고 우리 백성을 기만하였다고 말을 하니, 내 몹시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감군이 간첩을 쓰는 일을 간곡히 부탁하였으니, 이 일로 인해 사람을 보내는 것은 참으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연소한 무리들의 모든 논의는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막중한 대사를 이처럼 경솔히 논하니 몹시 믿을 수가 없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들으니, 여름 경연 석상에서 상께서 청국 한(淸國汗)이라고 쓰는 것이 타당하다는 분부가 계셨다 하는데, 참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이미 국호를 고쳤은즉 그 고친 호칭을 따라서 쓰는 것이 타당하니, 지금 이후로는 영원히 항식(恒式)을 만들어 청국이라고 써서 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도 청자를 쓰는 것은 무방하다고 여기는데 여론이 이와 같으니,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간첩을 이용하는 계획은 이미 누설되었으니 지금 간첩을 보낼 수 없다. 곧바로 사람만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군사 기밀의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 강도(江都)에 있을 적에 대간이 야간에 습격하는 일을 가지고 논계하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오늘의 일은 상께서 심복 대신과 더불어 은밀히 의논하여 결정하시는 것이 타당하고 승지와 내관도 듣지 못하게 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조빈(趙贇)은 아뢰기를,
"신이 이 일은 당연히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사람을 오랑캐에 보내는 것은 대의에 해로움이 있으므로 신의 소사(疏辭)와 양사를 처치함에 있어서 모두 운운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대간은 소회를 진달할 뿐입니다. 어찌 명성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른바 명성을 좋아한다고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대간이 논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독대(獨對)를 청하거나 밀계를 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막중한 대사를 이처럼 드러내놓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바깥의 사람들은 모두 내가 겉으로 장려한 칙서를 빙자하여 사적인 일을 행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내 생각에는 이 일은 오랑캐와 강화하고서 욕을 당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여긴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연소한 사람은 기절(氣節)은 취할 만하나 그의 말이 어찌 모두 적중하겠습니까? 호역은 급히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자, 검토관 오달제는 아뢰기를,
"이 일의 옳고 그른 것은 참으로 의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양사가 지금 집요하게 논쟁하고 있는데 명길이 기필코 중론을 배척하고 사람을 보내려고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비밀을 지키지 못한 것은 참으로 잘못이나, 조정이 지금 다시 화친을 닦으려고 하는 즈음에 간첩을 행하는 일로 인하여 사람을 보내는 일을 하면 누군들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이 말은 몹시 준엄하니 신이 굽히겠습니다."
하였다. 조빈이 아뢰기를,
"화친하는 일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않겠습니다. 다만 정묘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자강책을 강구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만약 지금 다시 화친을 닦아 날로 위축되어 간다면 결국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중국을 높이고 이적을 배척하는 것을 입국(立國)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혼조(昏朝) 때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오랑캐와 왕래하였는데, 반정(反正) 초에 혼조의 비정을 들추는 중에 이 한 조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참호하는 오랑캐와 화친을 한다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승지 최연(崔葕)은 아뢰기를,
"지금의 상책은 스스로 지키는 것뿐입니다. 간첩을 행하는 일은 말이 이미 누설되었으니 사람을 보내기가 어려울 듯싶습니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비록 누설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오랑캐에게 들어갔겠습니까."
하니, 달제가 아뢰기를,
"삼사(三司)가 한참 정론(正論)을 펼치고 있는데 명길이 감히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이처럼 상달할 수 있습니까?"
하자, 명길이 아뢰기를,
"참으로 소회가 있으면 군부(君父)의 앞에서 어찌 진달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달제가 아뢰기를,
"삼사와 서로 논쟁하고 있으니 사체가 어떻습니까?"
하자, 명길이 마침내 서둘러 나갔다.

 

9월 20일 신유

왕세자가 장릉(長陵)에 참배하였다.

 

9월 21일 임술

우역(牛疫)이 치성하여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지고 경성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으니 소 값이 갑자기 떨어지고 살아 있는 것은 도살하였다. 한성부에서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을 거듭 밝히기를 계청하니, 따랐다.

 

9월 22일 계해

교리 조빈이 상소하기를,
"국가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근본이 있습니다. 삼대(三代)로 말하면 하(夏)나라가 일어난 것은 수토(水土)를 다스린 데 근본하였고, 은(殷)나라가 일어난 것은 오교(五敎)021)  를 널리 베푼 데 근본하였으며, 주(周)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것은 실로 후직(后稷)과 공유(公劉)가 어렵게 농사지은 데서 근본하였습니다. 아, 우리 왕조가 왕업을 일으킨 것도 근본이 있습니다. 고려 말에 난신(亂臣)의 모략을 듣고서 명조의 홍무(洪武) 정삭(正朔)을 폐하고 북원(北元)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병기를 들어 반란하여 위화도(威化島)에 진군하였으니, 당시의 생민의 화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의를 들어 회군하여 크게 동방(東方) 사민의 소망을 위로하였으므로, 천심과 인심이 함께 돌아와 역수(曆數)가 자신에게 돌아왔고 보명(寶命)과 경복(景福)을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마침내 억만년 무강한 왕업을 열었으니 저 고려가 망녕되게 군사를 일으킨 것은 마침 우리를 위해 백성을 몰아준 것입니다.
이로부터 대대로 그 공을 지키어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서는 상국(上國)의 협공책을 받들어 마침내 일부의 군사를 일으켜 이만주(李滿住)를 주멸하여 의성(義聲)을 천하에 드날리고 큰복이 국가에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한즉 우리 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근본은 중국을 높이고 이적을 배척한 데 있지 않겠습니까. 오직 이런 까닭으로 임진년 변란에 우리 선왕(先王)께서 거듭 명조가 구제해 준 힘을 입어 위태롭던 국가의 운명을 다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만일 조종조의 충성심이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숙이 사무치지 않았다면 만리가 넘는 곳에 군사를 일으켜 사력을 다해 구원할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중국을 대신하여 병화를 받고, 지성을 미루어 황제의 마음을 돌려 놓아 마침내 대의를 사해(四海)에 드러내고 국조(國祚)를 후세에 연면하게 하셨으니, 그 공렬이 어떠합니까. 아, 무오년 요해(遼海)를 넘은 역사(役事)는, 정치가 혼란하고 신하는 아첨스러워 나라를 잘못 운영해 몰래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군사 기밀을 누설하여 명장(明將)이 함몰하고 요(遼)·심(瀋)이 패망하게 한 것으로, 우리 나라의 의롭다는 명성은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저상되었습니다. 계해년 반정 초 혼조의 죄상에는 이것이 그중 하나였습니다.
지난 봄 노적이 참호한다는 말이 있을 적에 전하께서 대의에 의거하여 휘척(揮斥)하시고 자문을 보내 전주(轉奏)하고 팔방에 선교(宣敎)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대업을 계승하고 천심(天心)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조종조의 덕업(德業)을 잘 계승하여 이적을 배척하고 중국을 높이는 도리에서 나온 것이고, 혼조가 비계(秘計)를 오랑캐에게 알려 준 것도 전하를 위해 백성을 몰아준 데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보면 이치를 거스르면 망하고 순응하면 흥한다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존주(尊周)의 의리를 밝힌 것은 우리 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손이 이 도리를 배반하면 반드시 천의(天意)와 민심을 거슬러서 국가를 보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강(三綱)을 부식(扶植)하고 조종조의 업적을 거듭 빛내는 것이 전하가 왕업을 계승하는 근본입니다. 오늘날 혹시라도 이 도리를 배반하면 반드시 천의와 민심을 거슬러서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즉 천명(天命)의 거취(去就)와 민심이 이합(離合)하는 기미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우리 나라의 인민은 자기의 조상으로부터 성조(聖祖)의 왕업에 대한 것을 익히 들었으니, 그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존주의 대의가 없었으면 어떻게 이 나라를 보존하였겠는가 하고, 임진년의 황은(皇恩)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상국의 두터운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오늘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하여, 그 마음에 자연히 명조를 부모처럼 여기는 것으로 이것은 교령(敎令)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묘년의 강화는 참호하기 이전이어서 형제국으로 명칭하였으나 의사(義士)들이 분한 마음을 품은 것은 오히려 극도에 달했는데, 더구나 오늘날 참호한 이후에 다시 전쟁을 완화시킨다는 명분을 빌려 다시 화친의 약속을 하려 한다면, 말은 못한 채 분노하는 자가 어떠하겠습니까?
대체로 제후의 나라로서 참호하는 도적과 사신을 통하면 신은 이 사신을 무어라고 명칭해야 할지 모르겠으며, 제후의 나라로서 참호하는 도적과 서신을 통하면 신은 이 서신을 무어라고 명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唐)나라 신하 이고(李翺)가 말하기를 ‘신요(神堯)는 일려(一旅)로 천하를 취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자손은 천하를 가지고 하북(河北)을 취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천고(千古) 의사의 명언입니다. 신도 그 말을 외워서, 성조께서는 일려로 왕업을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으셨는데 오늘날에는 팔도를 가지고도 역천하는 일개 오랑캐를 배척하지 못하느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나라 팔도의 지방과 백성은 만승(萬乘)의 부(富)와 천리의 크기에 그치지 않는데 자강하지 못하고 도리어 위축되어 오랑캐 보기를 호랑이처럼 무서워하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천리로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능히 우리 백성의 분발함을 인하여 충의심을 고취하여 중국으로 향하고, 현명한 보좌를 얻어 국정을 위임하고, 적심(赤心)을 미루어 사람들 마음속에 두면, 사람들이 자기 재능을 다하고 병사들이 사력을 다할 것이니, 일개의 미친 오랑캐를 무어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장려하는 칙서가 겨우 내려져 아직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였고 황릉(皇陵)이 더럽혀져 천하가 함께 분노하고 있는데, 그들과 사신을 교환하고 비계를 누설시킨다면 혼조가 하서국을 보낸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은 난을 생각하는 백성이 구실을 삼을까 두렵습니다. 그런즉 인심의 이합(離合)하는 기미가 이미 나누어졌고 천명의 거취가 이미 결정되어서 오랑캐가 맹서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종기가 안에서 곪아 터져서 종사가 먼저 멸망될 것이니, 두렵지 않습니까? 신은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말이 군부를 불의에 빠뜨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강개하는 마음이 격앙되어 큰 소리로 부르짖어 전하께서 대오 각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전하께서 신의 말을 오활(迂闊)하다 하시고 다시 기미할 길을 도모하신다면, 신은 노련(魯連)·호전(胡銓)과 함께 동해에 빠져 죽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사(疏辭)는 비유가 정밀하지 못하고 너무 지나치게 헐뜯어 배척하였으니,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다고 하겠다."
하였다.

 

9월 23일 갑자

수찬 오달제·이도(李禂)가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오랑캐에 사람을 보내는 일은 크게 불가한 바가 있습니다. 아, 이것 역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까? 교활한 오랑캐가 창궐하여 더욱 방자하게 공갈을 치고 제멋대로 참호하며 감히 와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으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이 성충(聖衷)을 계도하여 흉서(兇書)를 발송하지 아니하고 오랑캐의 사신을 준엄하게 배척한 다음 팔도에 포고하니 사기가 배가되고 상국에 전주하니 의성이 충분히 들리었으며, 칙사가 광림하고 장유(奬諭)가 돈독하니 온 동토 전역이 눈을 씻고 서로 하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요즈음 여기저기서 이론이 생겨나 정탐을 칭탁하여 차사를 보내고 책유(責諭)를 핑계하여 서신을 통하였습니다. 이에 모책(謀策)이 불량하여 의리가 막히고 떠도는 소문이 자자하여 인심이 이미 흩어졌으며, 비방하는 의논이 흉흉하여 국사가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미처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까.
지금 의논드리는 자는 권변(權變)을 칭탁하고 이해로 움직여서 위로는 천청(天聽)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묘산(廟算)을 현란시켜 반드시 다시 화친을 닦아 구차스럽게 편안하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아, 너무 심합니다.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자강책을 강구하지 않고 오로지 고식적인 것만 힘쓰며 의리를 돌보지 않고 치욕을 달게 여기면, 위로 명조를 섬김에 어떻게 변명하며 아래로 신민에 임함에 어떻게 충성을 권하겠습니까. 만세에 기롱을 끼칠 뿐 목전의 급함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득실의 기미를 어찌 지혜로운 자라야 알겠습니까. 인심이 분노하여 허물을 위에 돌리고 사기가 쇠약해져 목숨을 바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니,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신민에게 충의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지경에 이른 후에는 의논한 자의 살을 씹어 먹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봄 화친을 끊은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우리가 먼저 끊지 않으면 어찌 족히 의리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도리어 사람을 보내고 서찰을 통하여 먼저 끊지 않은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 참역(僭逆)한 오랑캐는 참으로 당연히 우리 스스로 먼저 끊어야 할 것인데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기에 이처럼 꼭 변명하고자 하십니까? 구차한 거조는 차마 말할 수 없고 묘당의 성산(成算)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차사를 보내는 것은 본디 간첩을 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간첩을 행하는 일을 중지하였은즉 다시 무슨 명분을 빌리겠습니까? 본의가 서신을 통하는 데 있으면서 반드시 겉으로 가리고자 하니, 이처럼 정직하지 못하면 어떻게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역관을 보내고 서신을 통한다는 명을 속히 중지하여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격서를 보내어 적정을 탐색하는 것은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으니 그대들은 자세히 살피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4일 을축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대사간으로, 신상(申恦)·홍처후(洪處厚)를 정언으로 삼았다.

 

9월 26일 정묘

비국이 아뢰기를,
"호역(胡譯)의 행차가 이미 엊그제 합계(合啓)하기 이전에 있었는데 떠난 뒤에 삼사가 계속 집요하게 논쟁하고 있으니, 사체를 헤아려 보건대, 먼저 들여 보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선 용만(龍灣)에 머물러 있게 하여 결말이 난 후에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7일 무진

간원이 아뢰기를,
"국가를 도모하는 도는 반드시 먼저 대의를 밝히고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인데, 지경연 최명길은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금한(金汗)을 일러 ‘청국 한(淸國汗)’이라고 하여, 정식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명길의 말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이 깊지 못합니까. 저들이 청국으로 호칭하는 것은 실로 범연히 호칭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참호를 우리가 인하여 호칭한다면 이것은 그의 참호를 허여하는 것이니, 점점 확산되는 폐단이 무엇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명길은 공론이 한참 전개되고 있는 시기에 대의를 돌아보지 않고 감히 차마 듣지 못할 말로 성상의 귀를 더렵혔으니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행동이 이미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국가의 대사는 당연히 심복 대신과 더불어 은밀하게 논의해야 하고 승지와 사관도 물리쳐야 한다.’ 하였습니다. 아, 승지는 후설(喉舌)의 직책으로 왕명을 출납함에 잠시도 임금의 곁을 떠날 수 없는 것인데, 이번에 명길이 모두 물리치려고 하였으니, 그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임금과 정승이 서로 더불어 한자리에서 국사를 도모하는 것은 실로 군국(軍國)의 막중한 대사이고 광명 정대한 거조인데 무슨 승지에게 숨길 것이 있겠습니까. 명길이 술수를 써서 자기 뜻을 마음대로 행하려는 것이 곧 그의 본래의 마음입니다. 남의 이목을 가리어 듣고 보지 못하게 하고 성상의 총명을 가리어 기필코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행하려고 하였으니, 만일 그의 말이 세상에 행하여지게 된다면 국가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크게 간특한 자의 소행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으니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판윤(判尹)이 신호(新號)를 사용토록 주청한 것은 사례가 당연한 것이고, 은밀하게 의논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이른 것도 경박한 무리들이 함부로 대사를 누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들이 논한 것 같다면 장량(張良)이나 진평(陳平)이 모두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원훈 중신(元勳重臣)으로 헛된 명성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성실에 힘썼으니, 그의 충성심과 계략은 사람들이 모두 미칠 수 없다. 그대들이 이 두어 가지 말을 인연하여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어 다시 등대(登對)할 수 없게 하고자 하니, 그 계략이 과연 소루하다 하겠다. 지난번 사정(私情)을 따라 붕당을 옹호하지 말라고 하교하여 계칙하였는데 수개월도 되지 않아 마음씀이 이와 같으니, 오늘날 국사가 과연 한심스럽다 하겠다."
하고, 인하여 정언 홍처후(洪處厚)·신상(申恦) 등의 체차를 명하였다. 뒤에, 특별히 처후를 제천 현감(堤川縣監)으로, 신상을 개성 교수(開城敎授)로 임명하였다.

 

9월 30일 신미

김덕함(金德諴)을 부제학으로, 김령(金坽)을 사간으로, 김광혁(金光爀)·이시해(李時楷)를 교리로, 윤집(尹集)을 헌납으로, 홍익한(洪翼漢)을 정언으로, 이만(李曼)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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