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임신
수찬 오달제가 상소하기를,
"지난번 최명길이 사신을 보내어 서신을 통하자는 의논을 화의(和議)를 거절한 후에 발론했고, 또 삼사의 공론이 이미 제기되었는데도 오히려 국가의 사체(事體)는 생각지 않고 상의 의중만 믿고서 경연 석상에서 등대한 날 감히 황당한 말을 진달하여 위로는 성상의 귀를 현혹시키고 공의(公議)를 견제하였으며, 심지어는 대론(臺論)이 제기되었더라도 한편으로 사신을 들여보내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 ‘한 마디의 말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인가 봅니다. 그 말의 전도됨이 몹시 해괴합니다. 옥당(玉堂)이 대면하여 책망하고 중론이 격분하여 일어나기까지 하였으니, 명길은 의당 황공해 하고 위축되어 물의를 기다리는 것이 도리일텐데, 오히려 태연하게 차자를 올려 이치에 어긋나는 논리를 다시 전개하여 오히려 강화하는 일이 끊기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면서 의리가 어떠한지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대각(臺閣)의 의논은 체면이 몹시 중한 것입니다. 비록 대신의 지위에 있더라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책임을 지고 사직하여 불안한 뜻을 보이는 것인데, 명길은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죄를 바로잡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런 의향을 본관(本館)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여러 번 발론하였으나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발론했으나 견제가 이와 같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대체로 사람이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된 것만 책망하는 것은 옳지만 만약 경중을 살피지 않고 또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기회를 틈타 마음내키는 대로 매도하는 것은 몹시 옳지 못한 것이다. 판윤 최명길은 1품 중신으로 사직에 공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이 설사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절대로 멸시하고 욕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인데,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도 모욕을 주니, 오늘날 국가 풍습은 과연 한심스럽다 하겠다. 오달제를 우선 파직하라."
하였다. 정원과 헌부가 함께,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주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달제가 차자를 올려 명길을 논박하려고 하자 교리 김광혁은 ‘이 논핵은 없을 수 없다.’ 하여 몹시 힘을 주어 말했는데, 그 후에 말하기를 ‘나의 처가 명길의 처와 족분(族分)이 있으니 혐의가 있어 논의에 참석할 수 없다.’ 하였고, 수찬 이도는 처음에는 함께 상의하였으나 뒤에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으니, 달제가 분개하여 마침내 상소하여 대항한 것이다. 달제가 후일 화를 당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도의 부정함은 참으로 논할 것도 없지만, 광혁은 평소 기개가 있다고 일컬어진 사람으로 명길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상의 뜻이 명길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리고 또 홍처후 등이 명길을 논핵하였다가 견책당한 것을 보고는 당초의 소견을 바꾸어 억지로 법 밖의 일로 인혐하니, 물의가 그르게 여겼다.
10월 3일 갑술
천둥과 번개가 쳤다.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정사(呈辭)하기를 40여 차례에 이르니, 상이 이에 허락하였다.
10월 4일 을해
영의정 김류(金瑬), 우의정 이홍주(李弘胄)가 천둥·번개의 변고를 인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민광훈(閔光勳)을 부교리로, 이시우(李時雨)를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5일 병자
태백성이 나타났다.
10월 6일 정축
태백성이 나타났다.
비국이 아뢰기를,
"심양에 들어갈 호역은 이미 행장을 꾸려 출발했는데 대론(臺論)이 갑자기 일어나 잠시 만상(灣上)에서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방금 듣건대, 노한(虜汗)이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갔다는 설이 있으니, 사기(事機)가 종전과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저편의 소식을 막연히 들을 수 없으니 몹시 답답하고 민망스럽습니다. 호역을 보내어 오랑캐의 사정을 염탐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만상에 머물러 있는 호역을 속히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어 양사의 관원을 명초(命招)하여 효유하였는데 양사가 분부를 받들지 않고 종전과 같이 고집하여 논쟁하고, 또 말한 것이 행하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양사가 힘써 간쟁하여 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관례를 따라 인피하여 체면을 추락시켰다는 것으로써 모두 논박하여 체직시켰다. 이어 차자를 올리기를,
"조정이 척화(斥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오랑캐에게 호역을 보내어, 대의에 손상되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중정(衆情)에 거슬리는데도 생각을 아니하며 대간이 간쟁하는데도 따르지 않으시니, 신들은 실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은 명분이 무엇입니까? 간첩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당초 의논하여 보내려던 본의를 변경한 것이고, 격문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죄를 성토하고 절교를 고하는 글이 아니며, 정탐이라고 한다면 상국(上國)의 안위(安危)를 원수인 오랑캐에게 탐문하는 것이니 또한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이것을 행하여 병화를 늦출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명분이 없을까 두려운데, 더구나 병화는 늦추지 못하고 대의를 손상하고 중정을 거슬리기만 하는 데이겠습니까. 신들이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강화라고 하는 것은 간혹 우리가 강하고 저편이 약한 경우 돈이나 비단을 미끼로 주어 변경의 시끄러운 것을 중지시키거나 혹 강약이 서로 같을 적에 약속을 맺고 수호(修好)하여 군사와 백성을 휴식시키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는 자강책을 강구함이 없고 저들은 무한한 욕심이 있는데 사신만 부지런히 보낸다고 하여 흉측하고 교활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나라는 명나라와 명분이 본디 정해져 있으니, 신라와 고려가 당(唐)나라와 송(宋)나라를 섬긴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임진년 난리에 명나라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라를 회복할 수 없었으니, 군신과 상하가 지금까지 서로 보존하여 어육이 되지 않은 것은 누구의 힘입니까. 지금 비록 불행하여 큰 화가 당장 닥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죽음이 있을지언정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천하 후세에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지난 봄 화의를 거절한 일을 중외(中外)가 듣고서 모두 머리를 북으로 향하여 싸우다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으니, 그 사기를 인하여 고취시키면 나라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명분이 없는 차사를 보내어 다시 기미(覊縻)할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비국의 의논은 여러모로 미봉책을 써서 명분을 잡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나 그 흔적은 이미 천하에 퍼졌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대간(臺諫)을 설치한 것은 중권(重權)을 빌려주어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한 것이니, 대론이 조정되지 않으면 크고 작은 일을 가릴 것 없이 거행할 수 없는 것은 곧 조종조가 이목을 중히 여기고 체면을 존중한 훌륭한 뜻입니다. 이번에 양사의 논의가 한창 펼쳐지고 있는데 비국이 갑자기 호역을 들여보내도록 주청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대론을 경시하니, 구규를 무너뜨리고 후일의 폐단을 여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은 속히 호역을 되돌아오도록 명하시어 공의(公議)에 부합하고 대의를 밝히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의 계책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싶으니 경들은 심사 숙고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8일 기묘
김휼(金霱)을 장령으로, 이시우(李時雨)·유황(兪榥)을 지평으로, 지덕해(池德海)를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10일 신사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10월 11일 임오
상이 윤대관을 소견하였다.
조익(趙翼)을 예조 판서 겸 지경연으로, 이행원(李行遠)을 우승지로, 윤집(尹集)을 헌납으로, 윤명은(尹鳴殷)을 교리로, 김익희(金益熙)를 수찬으로, 유철(兪㯙)을 검열로 삼았다.
10월 12일 계미
이에 앞서 제도(諸道)의 목자(牧子)들이 유실한 말의 대가를 치르느라 거의 살아갈 수 없게 되었는데, 제조(提調) 이서(李曙)가 송아지로 대신 보상하는 것을 허락하여 마침내 크게 번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서로(西路)에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여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도 없었다. 조정이 소를 사서 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이서가 그 소를 나누어 보내도록 주청하니, 상이 가상히 여기고 표피(豹皮)로 만든 요를 하사하였다.
승지 민응형(閔應亨)이 관서(關西) 지방의 시험을 관장하면서 문서를 전적으로 하리(下吏)에게 위임하였는데, 하리가 거자(擧子)로부터 수천 금의 뇌물을 받았으며 차비관들도 연줄을 타고 간사한 짓을 하여 말들이 자자하였다. 대간이, 응형을 파직시키고 서리(書吏)를 효시하며 차비관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주청하였는데, 상이 듣지 않고 응형을 소환하고 승지 이덕수(李德洙)를 보내어 대신 관장하게 하였다.
10월 13일 갑신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10월 15일 병술
조빈(趙贇)·이행건(李行健)을 장령으로, 김수익(金壽翼)·이시해(李時楷)를 지평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세자가 장릉(長陵)을 참배하였는데,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말을 타고 세자의 행차를 범하였다. 금부 나졸이 그 종자(從者)를 붙잡으니 성구가 노하여 금부에 이문(移文)하여 그 나졸을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판부사 김신국(金藎國)이 곡진히 그의 뜻을 따라 제명하고 곤장을 때리니 물의가 시끄러웠다. 감찰(監察) 이한(李憪)이 간찰을 좌석에 떨어뜨렸는데 장령 유수증(兪守曾)이 주워서 불에 태우고 인하여 성구에게 은밀히 알려 주었다. 이에 감찰 조칙(趙侙) 등 10여 명이 상소하기를,
"전중(殿中)의 제도를 설치한 것은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조정의 일에 논박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자신이 말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글로 써서 소매 속에 감추었다가 대청(臺廳)에 떨어뜨립니다. 그리하여 그 말이 취할 만하면 논계하고 옳지 않으면 봉인(封印)하여 통속에 넣어 두는 것이 2백 년간 유래한 옛 규례입니다. 이번에 한 감찰이 대청에 간찰을 떨어뜨렸는데 대석(臺席)에서 주워서 불에 태우고 마치 익명서인냥 하였습니다. 이런 폐단이 한번 열리면 전중에 간찰을 떨어뜨리는 규례는 이로부터 영원히 끊어질 것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고풍(古風)을 추락시킨 신들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다. 그대들은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다."
하였다. 헌부가 간찰을 불에 태운 대관(臺官) 유수증을 탄핵하였는데, 상이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10월 18일 기축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이 파하지 않았는데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니, 상이 불안해 하는 빛을 보였다.
10월 19일 경인
이민구(李敏求)를 대사간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부교리로, 이시우를 정언으로, 이도(李禂)를 수찬으로 삼았다. 특별히 정태화(鄭太和)를 집의로 제수하니 태화가 불안해 하여 인피하면서 스스로 논열하기를,
"물의가 신을 허물하고 있으니 공무를 집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간원이 처치하여 체직하였다.
진사 윤성(尹城) 등 수백 명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주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으니 세 번 상소하고 그치었다.
10월 20일 신묘
상이 대신과 육경(六卿), 삼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고 간난하고 불안하기가 날로 심하니, 밤낮으로 걱정되어 두려워하고 있으나 구제할 방법을 모르겠다. 대신들은 요즈음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겨울의 천둥과 성상(星象)의 경고는 실로 신처럼 불초한 사람이 태위(台位)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대부분 지난번 절개를 지킨 사람들인데 현인을 등용한 효험이 전혀 없으니, 이는 신하들의 죄가 아니라 내가 임금답지 못한 소치이다. 오늘은 나의 잘못을 듣기를 원한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때때로 희노(喜怒)가 과격하신 단점이 계시므로 간관(諫官)이 매번 성냄을 다스리는 공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옛사람도 ‘분한 생각을 막는 데 경각심 가지기를 산을 무너뜨리듯이 하라.’ 하였으니, 임금이 이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하의 총명은 하늘에서 타고나셨으나 간혹 조그만 일을 너무 자세히 살피시는 병이 있으시니, 정치에 해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정신을 지나치게 쓰시면 어찌 성체(聖體)에 손상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나의 병통을 바로 맞추었다. 더욱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이민구가 아뢰기를,
"요즈음 연소한 사람들이, 오랑캐에게 사람을 보내는 일로써 과격한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전혀 없어서는 아니되는데 홍처후 등이 함께 준엄한 견책을 입었으니 몹시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사신을 보내는 것을 중지하도록 요청한 것 때문에 죄를 준 것이 아니다. 최명길은 원훈 중신인데 어떻게 크게 간특한 사람이라고 지척할 수 있는가. 조정에서는 예의를 지키고 사양하는 것으로 귀함을 삼는 것이다. 만약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였다. 부제학 김덕함(金德諴)이 아뢰기를,
"반정 초에는 사람들이 모두 조정에 서기를 원했으나 지금은 식자(識者)들이 모두 벼슬에 뜻이 없으니, 한가하실 때 그렇게 된 까닭을 생각해 보소서."
하였다.
10월 21일 임진
학유(學諭) 한극술(韓克述)이 상소하여, 채진후(蔡振後) 등이 정거(停擧)당한 것을 당고(黨錮)의 화라고 지목하고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고사에 비교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극술의 비유는 몹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지난해 관학(館學)의 양쪽 유생이 정거를 당한 것은 모두 곡절이 있었던 것을 성명께서도 통촉하고 계신 바입니다. 그 당시 지관사(知館事) 최명길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정거해야 할 자와 정거하지 않아야 할 자에 대하여 회의하게 하였는데, 채진후 등 3명 이외는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그 후에 권적(權蹟) 등이 또 상소하여 더욱 심하게 헐뜯으니 사관이 또 권적을 정거시켰습니다. 이에 전후로 정거당한 자는 4명뿐으로, 벌을 준 것이 과연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상소 중의 유생은 이미 불미스런 상소에 동참했으나 책벌(責罰)이 자신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스스로 뉘우치고 부끄럽게 여겨 평시처럼 과거에 응시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을지라도 애당초 조정에서 금지시킨 것은 아닌데 어떻게 당고에 비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이번 경외(京外)의 방목(榜目) 중에는 그의 무리 중 참방(參榜)한 자가 몇 명이 있으니 응시하고 참방하지 못한 자도 필시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극술은 지난해 조사하여 처리할 당시는 동참하여 이론이 없다가 뒤이어 이미 풀려난 유생을 정거시켜, 전지를 무시하고 거리낌없이 방자한 행동을 한 죄로 파직당한 자이니,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당연합니다.
대체로 유생이 종사(從祀)를 주청한 것은 단지 선현(先賢)을 존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죄를 줄 만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김이량(金履樑)·한극술 등이 진후를 도와서 정거하게 하였으니, 현인을 만홀히 하고 선량한 사람을 질투한 점은 실로 진후 등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계미년에 허봉(許篈)과 박근원(朴謹元)이 이이(李珥)를 모함할 때 태학(太學) 유생이 상소하여 변론하였는데, 성균관 박사 한연(韓戭)이 상소한 유생을 정거시키니, 선조께서 진노하시어 잡아다 국문하시고 홍원(洪原)에 귀양보냈습니다. 김이량·한극술의 일은 한연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도리어 진후 등 4명이 정거당한 것을 가지고 당고의 화라고 이르고 있으니 그렇다면 선조조에 허봉·한연 등을 귀양보낸 것도 과연 당고라고 이르겠습니까? 대개 극술은 지난해 한패의 당인(黨人) 중에서도 편협하기가 제일 심하니 이것은 공론을 위한 자가 아니고, 그의 말이 부실하기가 또 이와 같으니 소사(疏辭)는 시행치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4일 을미
김덕함을 대사헌으로, 정온(鄭蘊)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황 감군이 섬으로 돌아가 회첩(回帖)하였다.
"당초 안주(安州)에 배를 띄워 속히 섬으로 돌아오려고 생각했던 것은 주달하기 편리함 때문이었는데 바람과 조수에 막혀 3일 동안에 겨우 30리밖에 갈 수 없어서 부득이 언덕으로 올라서 육지로 행하여 이틀 밤낮을 포복하여 초2일에 섬에 당도하였소이다. 연도(沿途)의 비좁고 험악함은 복병을 매복하고 기계(奇計)를 베풀 만하며, 더구나 두어 갈래의 긴 강과 천연적인 요새지는 하늘이 현왕(賢王)에게 보장(保障)을 주신 것이오. 이런 시기를 틈타 장수를 선발하고 병졸을 훈련시켜 30리마다 정장(亭障)과 돈대(敦臺)를 하나씩 세우고 병사를 뽑아서 나누어 지키며 화약과 총포, 투구, 갑옷, 기계를 단단하고 날카롭게 제조하면 노적(奴賊)이 감히 동쪽을 향하여 동정을 엿보지 못할 것이오. 대체로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利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인데 정사를 맡겨도 통달하지 못하면 시 3백 편을 외워도 소용이 없는 것이오. 저는 귀국의 학사·대부가 송독(誦讀)하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소. 뜻도 모르고 응얼거리고 의관(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군현(郡縣)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을 왕의 신하 중 누가 처리할 수 있겠소.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으니 몹시 탄식스럽소. 왕에게 지우(知遇)를 받았으므로 변변치 못한 견해를 대략 진달하오니, 왕은 살피소서."
10월 27일 무술
의금부가 아뢰기를,
"삼성(三省)이, 저주한 죄인 천생(天生)을 결안(決案), 취초(取招)한 후에 임신한 까닭으로 그대로 옥에 가두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해산하였으나 율문(律文)에 이르기를 ‘해산한 지 1백 일이 경과한 후에 형을 집행한다.’고 하였으므로 그 기한을 기다리고 있는데, 소생한 자식이 즉시 죽었다고 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1백 일이 경과한 후에 형을 집행하는 뜻은 그 자식을 살릴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이미 죽었으니 돌보아 줄 이유가 없습니다. 속히 형을 집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기한 전에 형을 집행하는 것도 몹시 측은하니, 기한이 지난 후에 시행하라."
하였다.
10월 29일 경자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치계하였다.
"가달(假㺚) 6명이 강변에 도착하였기에 즉시 소역(小譯)을 보내어 불러 물으니, 명나라를 범한 군대가 패배를 당하고 6명의 왕자(王子) 중 1명이 전사했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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