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계묘
이때 날마다 짙은 안개가 끼니 식자들이 걱정했다.
11월 4일 갑진
접반사 이필영(李必榮)이 치계하였다.
"도주하여 돌아온 한인(漢人) 왕언과(王彦科) 등이 말하기를 ‘노적(奴賊)은 10월 1일에 이미 소굴로 돌아갔는데, 서쪽을 침범했을 당시 장령(將領) 2명이 전사했으며, 겨울쯤에는 동쪽 고려(高麗) 지방으로 가려고 지금 말을 먹이고 있다.’ 하였습니다."
접반사 이필영(李必榮)이 치계하였다.
"도주하여 돌아온 한인(漢人) 왕언과(王彦科) 등이 말하기를 ‘노적(奴賊)은 10월 1일에 이미 소굴로 돌아갔는데, 서쪽을 침범했을 당시 장령(將領) 2명이 전사했으며, 겨울쯤에는 동쪽 고려(高麗) 지방으로 가려고 지금 말을 먹이고 있다.’ 하였습니다."
11월 6일 병오
판윤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명길이 화의를 거절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힘껏 진달하자 옥당이 상장(上章)하여 논핵하고 대간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으나 명길이 스스로 불안하게 여기었으므로 마침내 체직되었다.
유성(流星)이 수위성(水位星) 아래에서 나와 호성(弧星) 위로 들어갔다.
11월 7일 정미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당장 대제학을 차출해야 할 것이다. 만일 당상관 중에 합당한 자가 있으면 뽑아내어 권점(圈點)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전례를 상고해 보면 전 대제학이 추천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만일 전 대제학이 없으면 간혹 전전 대제학이 의논하여 추천한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 대제학 김상헌(金尙憲)은 지방에 있고 전전 대제학 최명길은 병으로 체직되어 현재 직함이 없으며 또 그 전 대제학은 장유(張維)입니다. 명소(命召)하여 천거케 해야 합니까? 또 일찍이 대제학을 지내고 현재 대신인 자가 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였다. 상이 대신 중 대제학을 지낸 자로 하여금 의논하여 추천케 하였는데, 결국 이식(李植)을 대제학으로 삼고 이어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예문관 제학 조익(趙翼)이, 이식의 자급(資級)이 자기 아래에 있어서 문서와 좌차(坐次)에 모두 구애되는 바가 있다 하여 제학과 동지성균관사를 해직해 줄 것을 주청하였는데, 이조가, 예문관은 별로 회좌(會坐)할 일이 없다 하여, 제학은 잉대(仍帶)하고 동지성균관사만 체직토록 계청하였다.
11월 8일 무신
부교리 윤집(尹集)이 상소하기를,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 나라가 살아서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형세가 크게 확장하여 경사(京師)를 핍박하고 황릉(皇陵)을 더럽혔는데,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는 이때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력이 미약하여 모두 출병시켜 정벌에 나가지 못하였지만, 또한 어찌 차마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제창할 수야 있겠습니까.
지난날 성명께서 크게 분발하시어 의리에 의거하여 화의를 물리치고 중외에 포고하고 명나라에 알리시니, 온 동토(東土) 수천 리가 모두 크게 기뻐하여 서로 고하기를 ‘우리가 오랑캐가 됨을 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려하는 칙서가 내려지자마자 부정한 의논이 나왔는데 차마 ‘청국 한(淸國汗)’이란 3자를 그 입에서 거론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승지와 시신(侍臣)을 내보내라고 한 말이 있으니, 아, 너무도 심합니다. 국정을 도모하는 것은 귓속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군신간에는 밀어(密語)하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이라면 천만 명이 참석하여 듣더라도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으며 만일 의롭지 못한 것이라면 아무리 은밀한 곳에서 하더라도 부끄러운 것이니 비밀로 한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는 진회(秦檜)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하였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홍처후의 계사와 오달제의 상소는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준엄한 견책을 당하여 사정(私情)을 따라 모함하였다고 지척하고,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으로 지목하였으며, 심지어는 신상(申恦)을 의망(擬望)하였다는 이유로 특별히 전관(銓官)을 파직시키기까지 하여 만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였으니, 천둥 같은 위엄에 억눌려 꺾이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삼사의 직책을 가진 자가 벌벌 떨면서 모두 입을 다물었고 심지어 이민구 같은 이는 관직이 높은 간장(諫長)으로서 스스로 성상의 총애만 믿고 공의는 생각지 아니하여 글을 얽어 인피하고 갑자기 지난번 올린 계사를 중지하여 위로는 성상의 뜻에 영합하고 아래로는 명길에게 아첨하고 있으니, 기타 신진 후배 중 이시우(李時雨) 같은 사람들이 간사하게 아첨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는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은 후에는 잃을까 걱정하는 그들의 작태를 살피고 계십니까?
신이 명길의 차자를 취하여 보니, 사설을 장황하게 하여 성상의 귀를 현혹하고 있기에 다 훑어 보기도 전에 눈언저리가 찢어지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국가의 대계(大計)는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연소한 무리가 감히 참여하여 알 것이 아니라는 것과, 정치가 대각(臺閣)에 돌아가고 부의(浮議)에 제재당한다는 등의 말은 은연 중 대각을 협박하고 공의를 저지하려는 흉계가 있는 것이니, 아, 간교하고 참혹스럽습니다. 옛날에 좋지 못한 일을 하는 자는 남이 알까봐 숨기려고 하였는데, 지금 명길이 화의를 주장함에 있어서는 팔뚝을 걷어올리고 나서서 조금도 기휘(忌諱)함이 없이 방자하며, 마침내 주희(朱熹)·호안국(胡安國) 두 현인과 우리 나라의 몇몇 명현을 들어서 구실을 삼았습니다. 또 지난번 화의를 물리친 것을 성상의 과오로 지적하였고, 심지어는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였으며, 계속하여 말하기를,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종묘 사직이 혈식(血食)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말을 변화시켜 성심(聖心)을 동요케 하였습니다. 대체로 밖으로 도적의 강성한 세력을 업고서 안으로 자기 임금을 겁주었으니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대론이 제기되었더라도 한편으로 서찰을 보내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전하를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신은 듣건대, 이것도 명길이 경연에서 드린 말이라고 합니다. 조정을 무시하고 대각을 무시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이 말 역시 전하의 나라를 망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 죄를 바로잡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말을 들어주어 합계(合啓)가 한참 펼쳐지고 있는데 국서(國書)는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아, 국가가 대간을 설치한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독단하여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대론(臺論)을 생각지 않으며 부정한 의논만을 따르고 아첨하는 신하만을 의지하여 결국 나라를 잃게 한 후에 말 것이니, 이것은 명길이 계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머리털이 곤두섭니다.
이행건(李行健)의 피혐하는 말에 이르기를 ‘대론이 조정되기 전에 지레 들여 보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만일 시비를 몰랐다면 이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이니 크게 책망할 것이 못되거니와, 혹 시비를 알고도 일부러 이런 모호한 말을 하였다면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속이고 밖으로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태화(鄭太和)는 공의(公議)가 한참 펼쳐질 당시에 부정한 의논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곡진히 아첨하다가 청의(淸議)에 버림을 당했는데 전하께서 특별히 집의를 제수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신하들에게 아첨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전하의 이목(耳目)이 되고 전하의 유악(帷幄)에 있는 자 중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직간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하들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지은 것인데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아, 조종조의 부여한 책임과 신민의 커다란 소망이 모두 전하의 한 몸에 모여 있는데, 뜻을 영합하는 부정한 말에 현혹되시어 직간하는 자가 있으면 온 힘을 기울여 진노하여 물리치시고, 성의(聖意)를 살피어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자는 미치지 못할 듯이 높여 권장하고 총애하여 발탁하시니, 신은 천하 후세에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이르며 나라를 어떤 지경에 놓아 두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당당하던 수백 년의 종묘 사직을 결국 명길의 말 한 마디에 망하게 하시렵니까? 신은 대정(大庭)에서 통곡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고 망녕되어 때에 따라 맞추어 나가지 못하니, 차마 오늘날의 삼사와 더불어 행동을 같이하여 구차스럽게 마음에 들도록 결코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사판에서 깎아내어 공사(公私)간에 편케 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대내에 머물려 두었다. 이에 대사간 이민구는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양사의 많은 관원도 서로 뒤를 이어 인피하였으며, 옥당은, 삼사는 한몸이니 감히 처치할 수 없다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윤집(尹集)이 삼사를 꾸짖어 욕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싶고 옥당이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것도 소견이 있는 듯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처럼 걸핏하면 허물을 얻는 자는 진퇴시키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윤집으로 하여금 양사를 처리하게 하든지 해조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라. 그리고 판윤 최명길은 당일의 말이 중신을 침범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몹시 부당하다.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여 시비를 함부로 논하여 국가에 해를 끼친 죄를 징계하라."
하였다. 대개 지난날 경연 석상에서 명길이 조경(趙絅)의 일로 인하여 김상헌(金尙憲)의 단점을 말하였는데, 윤집은 상헌의 일가 사람이다. 상은 그가 상헌에게 편당하여 명길을 공박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으므로 이런 하교가 있은 것이다. 정원이, 양사가 윤집의 상소로 인하여 인피하였는데 윤집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니, 이에 이조가 옥당 신하들로 하여금 처치하게 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교리 조빈(趙贇), 수찬 이도(李禂)·이만(李曼) 등이 마침내 차자를 올리기를,
"사람들의 말이 실정 밖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처신을 구차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신들이 얼굴을 치켜들고 무릅쓰고 나온 것도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대간이 된 자는 반드시 남의 비방을 당하고도 그대로 재직하는 이치가 없으니, 함께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말이 실정 밖에서 나왔다고 하고는 또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니 고금에 어찌 이런 공론이 있는가. 그대들은 시비를 가리는 것으로 중함을 삼지 않고 다만 꾀를 부려 피하고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참으로 몹시 한심스럽다. 위로는 임금의 손을 묶어놓고 아래로는 의견을 달리하는 자의 혀를 붙들어 맨 뒤에야 마음이 상쾌하겠는가. 모두 계사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11월 11일 신해
유성이 역성(易星) 아래에서 나와 위성(胃星)으로 들어갔다.
11월 12일 임자
상이 어교(魚膠) 4백 근과 정근(正筋) 2백 근, 꿩깃 5만 개, 전죽(箭竹) 7만 개를 의주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경연 이성구(李聖求)가 나아가 아뢰기를,
"돌아온 호역(胡譯)의 말을 들으면 저 도적이 군대를 동원시킬 낌새가 있다 하니, 외방(外方)의 병마(兵馬)를 국경에 불러모아 몇 달 동안 변고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역이 어떻게 오랑캐의 실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구가 아뢰기를,
"이미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니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어할 준비를 하고자 하면 형세가 이와 같고 기미(覊縻)할 방책을 세우고자 하면 명사(名士)의 무리가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11월 13일 계축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박인범(朴仁範) 등의 서계(書啓)를 보고, 또 김명길(金命吉)의 말을 들으니, 저 오랑캐가 우리 나라와 절교하려고 아니하는 것이 말이나 표정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막연히 보답하지 않아 짐승 같은 자들의 노기를 도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춘추로 정례적으로 보내는 사신은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박난영(朴蘭英)을 별사(別使)로 삼아 일찍 들여보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황을 탐색하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절교하지 않았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인범(仁範) 등이 격문을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적의 발동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있을 것입니다. 얼음이 언 후에 불의의 변고가 있게 되면 하도(下道)의 군사를 징발하는 일은 매우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이미 삼남(三南)과 강원도로 하여금 정초군(精抄軍) 1만 8천 3백여 명을 단속하여 대기하게 하였으니, 지금 경상 좌·우 병사와 전라·공청도 병사, 강원도 춘천 영장(春川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오는 12월 10일에 각각 필요한 무기를 가지고 경상(境上)에 진주(進駐)하여 해빙되기 전까지 변고에 대비하게 하고, 경유하는 각 관아에서는 산료(散料)를 공궤(供饋)하고, 국경에 유주(留駐)하는 기간은 그 본읍으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여 계속 공급하게 하며, 또 머물러 있을 때는 항시 조련(操練)을 시켜 위기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뜻을 선전관을 보내어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둘지 말라. 그리고 각읍이 군량을 계속 대는 것은 참으로 지탱하기 어려우니 해조로 하여금 조용히 다루어 처리하여 미리 첫들머리 고을에 비축하여 큰 폐단을 제거케 하라."
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을 대사헌으로, 이민구를 동지경연으로, 김반(金槃)을 대사간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사간으로, 민광훈(閔光勳)·황일호(黃一皓)를 장령으로, 정뇌경(鄭雷卿)·염우혁(廉友赫)을 지평으로, 이시해(李時楷)를 헌납으로, 김수익(金壽翼)·김익희(金益熙)를 교리로, 윤문거(尹文擧)·신열도(申悅道)를 정언으로, 최명길을 겸지경연(兼知經筵)으로 삼았다. 특지(特旨)로 교리 조빈을 평안 도사(平安都事)로 삼았는데, 이는 척화론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후에 연신(筵臣)이 서로(西路)에 두는 것은 불가하다고 건의하여 마침내 충청 도사로 고쳐 제수하였다. 당시 신상(申恦)·홍처후·조빈 등은 모두 척화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계속하여 외직으로 방출되니, 조야(朝野)가 놀라고 탄식하였다.
11월 14일 갑인
유성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가고,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11월 15일 을묘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로(胡虜)가 강화하고서 다른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예전부터 있어온 상사입니다. 오늘날 오랑캐의 정세가 전일과 같지 않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후로는 만일 호인(胡人)들이 나오는 일이 있으면 성을 지키고 있는 변경에서는 절대로 성문을 열고 곧바로 받아들이지 말고, 호인의 수가 수백천 명이 넘으면 화호(和好)를 칭탁하고 오더라도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만일 듣지 않고 그냥 들어오면 비록 무기를 사용하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 뜻을 미리 변신(邊臣)에게 알려 만에 하나 조심성이 부족하여 그르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오랑캐와 기미한 것이 이제 10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자강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으니, 국가를 경영하는 방법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오늘날 자강책은 의주성(義州城)을 수축하고 변방의 수비를 튼튼히 하여 급한 일이 생길 때에 대비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재력이 잔약하여 일을 착수하기가 쉽지 않으니 신들은 민망스럽게 생각합니다. 군량과 병기는 이미 경영하였으나 마련한 수는 많지가 않습니다. 어제 성지(聖旨)를 받건대 내부(內府)에 비축한 궁전(弓箭)의 재료를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보고 듣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여 감동하고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서인에 이르기까지 힘에 따라 출자하여 군수(軍需)를 돕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이런 내용을 중외에 효유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강요하지 말라."
하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비국의 계사를 보니, 박난영을 별사로 삼아 국서는 주지 않고 심양으로 들여보낸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신중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신의 마음에는 의심스런 점이 있습니다. 박인범이 갔을 적에 저들이 비록 국서는 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화의를 거절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우리 사신을 기다리고 있는 뜻이 말과 표정에 나타났으니, 그들이 말한 따르기 어려운 두어 가지의 청은 짐짓 우리를 시험하여 본 데 불과한 것이고 진실한 마음은 아닌 듯싶습니다. 우리가 우려할 것은 단지 명분상에 있을 뿐인데 지금 수작하는 즈음에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으니 저들도 스스로 화친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한다면 종전과 다름없는 정묘년에 강화한 금한(金汗)이니, 우리 입장에서는 진실로 평탄하게 처리해야지 무엇 때문에 다시 많은 사단을 만들고 세월을 끌어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의심과 두려움을 품게 하고 오랑캐로 하여금 괴이하고 의아해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까.
근래에 오랑캐는 본디 별다른 뜻이 없는데 우리 나라가 먼저 스스로 도리를 잃은 것이 많습니다. 춘신사(春信使)의 세폐(歲幣) 중 준납(準納)하지 못한 숫자를 아직도 수송하지 않았으니, 이는 우리의 신의(信義)가 도리어 오랑캐만도 못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곧바로 추신사(秋信使)를 보내느니만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문관 당상으로 정사를 삼고 박난영으로 부사를 삼아 그 일을 소중히 하고, 세폐와 상고(商賈) 및 전후의 체포된 호인을 일시에 들여보내고, 국서에는 말을 만들기를 ‘우리가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다만 구구하게 지키는 것은 명분에 있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호역이 돌아올 적에 국서는 전하지 않았으나 그의 구전(口傳)을 들으니 귀국이 특별히 다른 뜻이 없음을 알 수 있고 우리도 의심이 풀렸으므로 전례에 따라 사신을 보내는 것이다…….’ 하면, 저들도 반드시 의심이 확 풀려 화친하는 일이 처음 같이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듣건대, 양서(兩西) 지방은 흉작이 제일 심하고 가축의 전염병이 더욱 참혹하다 합니다. 명년의 농사는 전혀 가망이 없는데 거기다 산성을 수축하고 장사(將士)를 접대하느라 1결(結)에 30여 필의 베를 내게 하였으므로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우(邊虞)가 급박함으로 인하여 수확한 곡식을 모두 산성으로 실어들이게 하고 있습니다만 소는 모두 죽고 남정(男丁)들은 관문(官門)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는데 곡식을 수일정(數日程) 밖으로 운반하게 하니 형세가 해낼 길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흉년인데도 곡가가 전년에 비해 배나 싸고 노약자가 울부짖는 소리는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합니다. 이러한 때에 화친하는 일을 종결짓는 일은 하루가 시급한 것입니다.
실로 신사의 행차가 무사히 복명(復命)한다면 수신(帥臣)이 오래도록 머무를 필요가 없고 백성들도 소개할 필요가 없으며 별방(別防)이 준삭(准朔)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관에서는 군량의 소비를 걱정할 것이 없고 백성은 어깨를 쉴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묘당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나 그런데도 별사로 주청한 것은, 필시 당초 대신의 계사 중에 신사(信使)는 절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사신을 보내자고 주청하면 사람들이 혹 의아해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나, 신은 꼭 그러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묘당의 계책은 반드시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안녕을 중하게 여겨야 하고 사소한 혐의는 개의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제는 징병(徵兵)을 계청하고 오늘은 사신을 보내도록 주청하며, 또 내일은 국서를 제거하도록 주청하니, 어찌 겁을 먹고 혼란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리고 비국의 계사 2통을 보았는데, 하나는 호차(胡差)가 나올 때에 변신으로 하여금 성문을 열고 곧바로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중외 사민(士民)에게 고유(告諭)하여 재물과 식량을 출연하여 의주를 돕게 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신의 생각에는 모두 미안한 바가 있기에 진달하고자 합니다.
대체로 금차(金差)가 우리 나라를 왕래한 것이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일로(一路)의 접대는 따로 상규(常規)가 있는데, 지금 만약 갑자기 성례(成例)를 고친다면 저들은 필시 크게 의아해 할 것이니 신은 일에 도움은 되지 않고 도리어 시끄러운 사단만 더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오랑캐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우리의 병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만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니, 명분을 삼가 지키면 개돼지 마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전쟁을 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꺼려 철기(鐵騎)를 휘몰아 달려오지 않고 이처럼 몰래 기습할 계획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정말로 비국의 계사처럼 수백천 명이 일시에 나온다면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니 막고서 들이지 않더라도 가합니다. 그러나 고문(古文)에 이른바 수백천이란 것은 곧 수천을 이른 것입니다. 변신이 고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뜻을 잘못 알아 수백 명의 차호(差胡)를 만나 갑자기 서로 무기를 겨눈다면 어찌 일을 그르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묘당은 이토록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가 없고 만약에 꼭 행회(行會)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말을 고쳐서 변신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재물을 관에 바치는 백성은 국가를 위하는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계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공사천(公私賤)은 천역 면하기를 희망할 것이고 양반은 벼슬을 희망할 것이니,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몹시 많을 것입니다. 일이 국가를 다스리는 체통에 관계되는 것이니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주성을 들어가 지키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 제일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일이기는 하나 반드시 병사와 군량을 미리 준비한 뒤에야 비로소 이 일을 의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지킬 만한 병사가 없고 또 계속 댈 수 있는 군량이 없는데, 먼저 국가의 대계(大計)를 중외에 포고하면 설령 약간의 미포(米布)를 거두어 모은다고 하더라도 형편상 즉시 지키기는 어려울 듯하니, 어찌 외방(外方)에 비웃음과 모욕만 당하는 빌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먼저 화친하는 일을 종결지어 민력을 휴식시키고 재용(財用)을 존절히 하여 차차 국계(國計)를 여유 있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별도의 처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를 도모하는 방법은 성실에 힘써야 하는 것이니 형식을 갖추는 데 그쳐서는 아니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11월 16일 병진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심양에 사신 보내는 일을 의논하였다. 영의정 김류가 대답하기를,
"신들은 이미 함께 상의하였는데 박난영(朴蘭英)을 보내어 우리가 화의를 거절하지 않은 뜻을 보이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화(講和)이든 절화(絶和)이든 한 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에 화호하고자 아니한다면 별사(別使)도 보낼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당초에 가도(椵島)에 자문(咨文)을 보내고 팔방에 효유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절화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번에 만약 힘과 형세를 잘 판단하여 적절하게 처리하였다면 어찌 이런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 윤방(尹昉)은 아뢰기를,
"똑같이 사신을 보내는 것인데 별사와 신사(信使)가 무엇이 다릅니까. 차라리 신사를 들여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사를 들여보낸다면 일이 성실에 가까워야 한다. 우리가 만약 성실하지 못하면 저들도 불성실한 것으로 대접할 것이니 낭패스런 일이 생길까 두렵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화(和)’라는 한 글자는 밖에서 의논하기는 모두 불충(不忠)하고 옳지 않다고 말하나 신들은 이 일을 담당하고 있으니 남의 말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고, 물러갈 적에 아뢰기를,
"난영의 행차는 정말로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구박하여 내어쫓기는 변이 생긴다면 뒤에 신사를 보내려고 하더라도 형편이 몹시 어려울 것입니다. 추신사는 지모와 사려가 깊은 사람으로 각별히 가려서 보내고, 국서에는 특별한 말은 필요없이 안부만 언급하고 되도록 빨리 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조용히 떠나보내어 연말에 도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부득이하여 다시 기미한다는 뜻을 중외에 포고하라."
하였다. 비국이 또 최명길의 차자에 대해 회계하기를,
"신사를 보내는 일은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나 상사와 부사를 보낸다면 사체가 과중할 뿐만 아니라 장래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박로(朴𥶇)만 차출하여 신사를 삼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수백천 명이라는 말은 차사(箚辭)의 뜻대로 분명하게 통지하여 알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사신을 보내는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11월 17일 정사
청풍 군수(淸風郡守) 권경기(權儆己)가 본군의 공물선(貢物船)을 개조하면서 면포(綿布)를 남용하였는데, 상이 금부에 명하여 가두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경기는 탐욕스럽고 방자하기가 아대부(阿大夫)보다도 더하니 죄가 주륙을 면하기 어렵다. 상의하여 처치하라."
하니, 금부가 아뢰기를,
"대체로 죄인은 신문하여 자복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율(律)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니, 신들은 특별히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기는 죄상이 명백하다. 만약 중률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탐욕스런 풍습이 날로 심하고 백성의 원성이 날로 극할 것이니, 도성 안에서 효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죄에는 반역을 도모하는 것보다 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복을 얻어내지 못하면 정형(正刑)에 처하지 못하는 것은 그 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후에 법을 적용하여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대신과 양사가 모두 강력하게 진언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 후 상이 그의 죄가 사형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결국 정배(定配)를 명하였다.
11월 19일 기미
전시(殿試) 시관이 아뢰기를,
"유생의 파출(罷黜)은 인정(人定) 종소리로 한정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밤이 깊었는데도 경고(更鼓) 소리를 듣지 못하여 의심스러워 물어보니 북은 이미 두 번이나 울렸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한이 지난 것은 좌경 별감(坐更別監)이 즉시 알리지 않은 소치이니 그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0일 경신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해조로 하여금 엷은 옷을 입은 군사에게 동옷[襦衣]을 나누어 주고, 또 각처의 숙직자에게 빈 섬을 나누어 주게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이조 참판 정온(鄭蘊)에게 특별히 쌀과 반찬을 하사하여 군색함을 걱정하는 일이 없게 하라."
11월 21일 신유
군기시(軍器寺)의 화약 4천 근을 강도(江都)로 운반하게 하였다.
이조 참판 정온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도로에서 삼가 듣자니, 전하께서 경솔하게 최명길의 말을 믿고서 은밀하게 호역을 보내어 기미할 계획을 보이셨다 하기에, 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성명(聖明)의 조정에서 어찌 이처럼 어둡고 부정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보(邸報)를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불행히도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탄식하기를 ‘당당한 천승지국(千乘之國)에서 다른 나라에 사신을 통하는 일이 얼마나 중한 일인데 승지와 사관을 물리쳐서 참여하여 듣지 못하게 하고 홀로 가까운 중신과 더불어 계획을 정하여 발송하였는가. 이것이 정말로 명길이 말씀드린 것인가?’ 하였습니다. 신은 명길이 고인(古人)의 글을 읽은 사람으로서 이처럼 전례 없는 간사하고 해괴한 일을 만들어 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명길의 마음은 신이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는 원훈 중신으로 나라와 함께 휴척(休戚)을 같이해야 한다고 여기어 옆 사람의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사리의 사정(邪正)을 계산하지 않은 채 구차스럽게 목전의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 이처럼 고식적인 계책을 취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금(金)나라를 사모하는 사람과 다르나 그 일은 금나라를 사모하는 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역이 이미 왕래하였으니 신이 말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제사 지낸 후에 북을 울리는 격으로 시끄럽게 떠벌리는 것은, 실로 후세에 음흉하고 비밀스런 계략을 꾸미려고 하는 크게 간특한 자들이 반드시 이 일을 원용하여 증거로 삼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삼사의 관원은 모두 무서워서 말을 못하고 유독 간원 두어 사람이 비로소 직언을 하였으나 전하께서 물리쳐 외면하시었으니, 이것이 신사를 통하자는 의논이 오늘날에 다시 나오게 된 까닭입니다.
아, 지난번 감군의 행차는 무엇 때문에 왔습니까? 척화(斥和)하였다는 소리가 천하에 들리니 황상(皇上)이 가상히 여기시고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포장(褒奬)하시었는데, 그 먹물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도리어 이런 거조가 있으니 천하 후세에 어떻게 할말이 있겠습니까. 설사 이 일로 인연하여 4, 5년간 무사하더라도 신의가 없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더구나 이번에 신사를 통한 것은 애당초 불순한 싹을 꺾기에 충분치 못하고 다만 그의 경멸하는 마음만 열어 주는데이겠습니까.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은 우리에게 자강지책이 없는데 기미할 계교를 하지 않는 것이 옳으냐고 하겠지만, 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었으나 저들과 교전한 적이 없으니 강약은 참으로 판명되지 않았고 승부는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강하고 날쌘 군사로 힘을 합하여 서변(西邊)으로 가 중국과 기각의 형세를 이루면 저들은 항상 강하고 우리는 항상 약하다고 기필할 수 없고, 또 저들이 항상 이기고 우리가 항상 진다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정묘년 이후에 강화한다는 설이 그 사이에 그르쳐 놓았으므로 군민(軍民)이 해이되고 상하가 쇠미해져 다만 금은(金銀), 폐백(幣帛)으로 나라를 보존하는 것으로 장책(長策)을 삼아 날로 낮고 약해지는 것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자강하지 못하는 것은 강화한다는 설이 그르친 것이고, 저들이 오만하게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도 강화한다는 설이 도와 준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사신을 통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신하로 칭하라고 요구할 것이고, 신하로 칭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땅을 떼어주기를 요구할 것이니, 온 조정의 신료(臣僚)가 오랑캐의 배신(陪臣)이 되며, 온 나라 인민이 오랑캐의 인민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단지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입니다.
대체로 화전(和戰)의 이익과 불이익은 《송사(宋史)》를 상고하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오늘날 나라를 도모하는 자는 오히려 앞 사람의 실패를 답습하려고 합니다. 나라를 그리칠 계획을 진술하는데도 그 사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신은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대개 준엄한 분부가 한번 내려진 후로 곧은 기개가 꺾이어 대각의 신하도 말하는 것을 경계하니 이대로 계속되면 전하의 국사는 끝장이 날 것입니다. 이는 신이 통곡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마시고 평온한 마음으로 이치를 살피시어 신의 말이 채용할 만하다고 여겨지시면 속히 신사의 행차를 중지하시고 자강책을 더욱 진작하실 것이며, 신의 말이 미치광스럽고 해괴하다고 여겨지시면 파면하셔도 좋고 죽이거나 귀양보내셔도 좋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의논은 부득이해서 나온 조치이니, 경도 심사 숙고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교리 김익희(金益熙), 부수찬 이상형(李尙馨)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조정이 신사를 특차(特差)하여 참람한 오랑캐에게 가서 화친을 구하였습니다. 아, 소역(小譯)의 행차는 신사에 비길 것이 못되는 데도 국민들은 오히려 수모를 당하고 허약함을 보이는 것은 의리에 해로울 뿐이라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랑캐의 기세는 더욱 교만해져서 국서를 물리치고 거만한 글과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이는 우리가 강화에 급한 것을 보고 우리는 무엇이든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허튼 소리로 공갈치고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꼬투리로 협박하여 우리로 하여금 달려가서 애걸하게 하고 방자하게 중국에 과시하려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추악한 오랑캐는 간사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리어 벌벌 떨면서 화친을 맺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옥백(玉帛)을 치장하여 뇌물로 바치고 사신을 급히 보내 정성을 보이어, 대체로 지난날 함께 원수로 여기고 함께 분개하던 것을 모두 보잘것 없는 것으로 돌려버렸으니, 아, 괴이합니다. 올 봄 화의를 거절한 일은 실로 대의(大義)를 밝히고 일통(一統)을 높인 데서 나온 것이니, 애당초 전쟁의 성패와 국가의 존망은 계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국민이 신임하고 황칙(皇勅)이 장려하여 의성(義聲)이 전파되어 사기가 점점 신장되더니 얼마 안 가서 국시가 변하고 말았습니다.
대체로 자신과 처자를 보전한 신하들은 구차스럽게 목전의 무사만을 바라서 상유한(桑維翰)과 경연광(景延廣)의 득실 논의022) 를 군부(君父)에게 증명하고 태연하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니, 저들은 참으로 깊이 책망할 것도 못 됩니다만 한스러운 것은 명성(明聖)하신 전하께서도 고식적이고 목전의 안락만 탐하는 말에 동요되시어 의향이 어디에 계시는가 매우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론(正論)이 모두 꺾이고 이의(異議)가 제멋대로 행하여 오늘은 박인범(朴仁範)을 보내도록 주청하고 내일은 박난영(朴蘭英)을 보내도록 주청하며, 또 내일은 신사(信使)를 보내도록 주청하고 심지어는 ‘청(淸)’ 자의 호칭을 전하께서 결정하기까지 하였으니, 의리를 손상함이 몹시 큽니다. 만일 저들이 새 국호에 따른 서식을 한번 본다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청’ 자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제(帝)’ 자를 쓰도록 협박하여, 기탄없이 우리를 신첩(臣妾)으로 대우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다만 통곡하고 싶은 심정뿐이나 그러지를 못합니다.
아, 저들이 참절(僭竊)한 호칭은 이미 우리를 위해 폄손(貶損)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예절과 우리에게 답하는 언사가 다시는 이웃 나라로 대접하지 않을 것인데, 당당하신 성조(聖朝)께서 또 차마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줄 수 없다고 한다면, 그때에도 화친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준엄한 말로 사절하여 다시는 그와 화친하지 않아 위로는 명조(明朝)의 권장하는 유지(諭旨)를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신민의 소망을 절망시키지 아니하여 의리를 내걸고 사기를 고취하면 자강을 도모할 수 있는 것만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 더구나 조정의 거조(擧措)는 마땅히 정당한 데서 나와야 하고 묘당의 계책은 반드시 일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번 호역을 보낼 때는, 이는 정탐을 위한 신사이니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하여, 이미 나라 안에 영을 내렸었습니다. 이번에는 호역이 돌아왔으나 오랑캐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국서를 전달하지 못하자 난영을 보내야 한다고 하였고, 난영을 그들이 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자, 또 신사를 반드시 보내야 하고 세폐를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하여 겁을 먹고 혼란되어 갈팡질팡하는 것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고 중의(衆議)를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부터 비방하는 의논이 흉흉하여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비웃고 나라의 계획을 잘못 세운다고 통탄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오랑캐가 강을 건너오기도 전에 인심이 이미 와해되었습니다. 아, 자강하지 못하는 까닭은 기미하려는 계책이 그르친 것이니, 진실로 크게 분발하여 깨끗이 털어버리고 용병(用兵)에 전일하면 싸움을 하든 지키든 간에 어찌 오랑캐의 밑에 들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의가 있는 곳을 생각하고 대중이 함께 하는 것을 인하여 확고한 단안을 내려 화의를 거절하며 몸소 와신상담하여 삼군(三軍)을 격려하시어 황칙의 장려하신 뜻을 잊지 말고 속히 신사의 행차를 중지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의논하여 결정한 일이니 지금 고치기는 어렵다. 그대들도 심사 숙고하고 지나치게 우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로부터 삼사가 한 달이 넘도록 집요하게 논쟁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11월 22일 임술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번 연신(筵臣)의 계품으로 인하여 이미 양서 지방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소개하고 대기하게 하였는데 불행히도 금년에는 소들이 모두 죽었으니 만일 백성으로 하여금 등에 지고 머리에 이어 곡식을 옮기게 한다면 백성의 고통이 반드시 클 것이다. 잠시 재촉하지 말고 민폐를 제거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요즈음 날씨가 몹시 추운데 변경에서 수자리 서는 장졸(將卒)들은 어떻게 견디어내는가? 금년의 방수(防守)는 예상 밖에서 나온 것이니 의복이 허술하고 사정이 딱한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 고통을 생각하면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도원수와 평안 병사(平安兵使)는 모두 병을 앓는 사람으로 오래 기후가 나쁜 곳에 머물러 있으면 필시 몸을 더 손상할 것이니 나는 몹시 걱정이 된다. 장사들 중에 스스로 응모한 자는 모두 충의스런 병사이니 실로 얻기 힘든 사람들이다. 만약 변신(邊臣)이 범인(凡人)으로 취급하고 예우를 후히 하지 않는다면 애지중지하는 과인의 생각과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양서 지방의 생민은 한인(漢人)에게 침략당하고 또 금년처럼 어려운 일이 많은 해를 만났으니 신체적인 고통과 재물의 소비는 필시 옛날보다 배는 될 것이다. 그들의 시달림을 생각할 때 안스럽기만 하다. 지금 초피(貂皮) 이엄(耳掩) 17부(部)와 설면자(雪綿子) 1백 근을 보내니, 부원수 이하 여러 장수들에게 하사하여 위로하는 뜻을 보이고, 또 어관(御冠)과 이엄을 원수 김자점(金自點)에게 하사하라."
하였다.
11월 23일 계해
별시(別試)의 전시(殿試)를 베풀어 신유(申濡) 등 11명을 취하였다.
우박이 오고 밤에 번개가 쳤다.
11월 24일 갑자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듣자오니, 국서의 외면에 ‘청국(淸國)’이란 두 글자를 쓰기로 정하였다는데 신이 비국에 재직하고 있으니 소회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묘년 이후 ‘금국(金國)’이라고 호칭한 지 대개 1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청’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곧 그들이 건국하면서 참람하게 부른 명칭인데, 우리가 그들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는 좇고 하나는 좇지 않는 것이니 사리에 미안할 뿐만이 아닙니다. 사납고 간사하기가 그지없는 이 오랑캐는, 남들이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들의 뜻에 따르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곧 그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지금 만약 황급하게 그 고친 호칭을 사용하여 문서에 쓴다면 저들은 우리 나라가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위협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황제의 호칭을 삭제한 까닭을 힐책할 것이고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할 것이니 그때는 의리에 의거하여 거절하기도 수고로울 것입니다. 지금 이 문서는 종전에 사용하던 용어만 관례에 따라 써 보내되, 만약 저들이 ‘청국’이라고 쓰지 않은 이유를 힐책하면 ‘지난날 귀국 사신이 문서를 전하지 않고 갔으니, 이웃 나라의 고친 호칭을 어떻게 전하는 말만 믿고서 호칭할 수 있겠는가.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는 것이니, 당신의 참람한 칭호는 호칭할 수 없으나 고친 국호는 호칭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앞으로는 마땅히 청국 한(淸國汗)이라고 쓸 것인가에 대해 서로 강론하여 결정한 후에 춘신(春信)의 행차 때부터 사용하겠다.’고 답하면 오히려 약간의 여유가 생길 것이고 참호를 호칭하지 않은 뜻도 말하지 않은 속에 자연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고, 대사헌 이경석(李景奭)도 차자를 올리기를,
"‘청’이라고 호칭하는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의리와 이해를 가지고 반복하여 생각건대 ‘금(金)’은 한(汗)을 일컬을 때의 호칭이고 ‘청’은 참람하게 제(帝)라고 한 후의 호칭입니다. 지금 우리가 갑자기 옛 칭호를 버리고 새로운 호칭을 사용하면 저들은 필시 우리에게 한층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요구해 올 것이니,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강적이라 따지기 어렵다고 하여 더불어 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르기 어려워진 뒤에 따지는 것보다는 일을 도모하는 시초에 살피는 것이 낫습니다.
말하는 자는 필시, 오랑캐의 본의는 화호하는 데 있으니 반드시 그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하다면 ‘금’이라고 칭하는 것은 더욱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묘년에 하늘에 맹세한 약속을 지켜 옛날의 칭호를 호칭하는 것은 이치에 근거가 있고 언어에 순함이 되고 신의에 잃음이 없으니, 저들이 처음에 힐책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유 작작하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짐승 같다 하더라도 우리가 말이나 이치가 사리에 닿고 옳으면 예전부터 굽혀 따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뜻이 진실로 화호(和好)하는 데 있다면 이 일은 반드시 힘을 다하여 다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두 의논이 모두 소견이 없지 않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당초의 소견을 고수하여 온 조정의 통일된 공의(公議)에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이해를 밝게 보지 못하였으니 의당 공의를 따라 고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의 의견이 이와 같다면 병판의 차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1월 25일 을축
추신사(秋信使) 박로(朴𥶇)가 아뢰기를,
"현재 오랑캐의 사정이 전일과 크게 다른데 신이 조그마한 단신으로 뭇 호랑이 사이에 끼어 있으니, 난처한 일은 미리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신이 홀로 들어가니 이미 저들의 소망에 어긋났고 국사를 완료하기에는 또 신의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사오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부사를 차송하거나 종사관을 차송케 하소서."
하니, 묘당에 말하라고 답하였는데 묘당이 불가하다고 하니, 일이 결국 중지되었다.
11월 26일 병인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을 발탁하여 판윤으로 삼고, 정광성(鄭廣成)을 도승지로 삼았다.
헌납 이시해(李時楷)가 외지에 있다가 돌아와 아뢰기를,
"지금 국경에는 우환이 많고 정령(政令)은 날로 문란해져 위아래가 통하지 아니하고 조의(朝議)가 서로 갈라져서 근래에는 묘당과 대각이 서로 대립하여 조정에는 외경(畏敬)하고 화협(和協)하는 풍토를 찾아볼 수 없고 진신(搢紳) 간에는 날로 뒤틀리는 조짐이 보이니, 이는 비록 거조를 잘못하여 이처럼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것이기는 하나 결국은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난번 최명길이 근신(近臣)을 내보내라고 한 말은 참으로 망발입니다. 만일 이 말을 실행한다면 장차 후일에 무궁한 폐단을 열어 놓게 될 것입니다. 공의가 있는 곳에는 스스로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다만 그 당시 대간의 말이 과중하다고 하여 모함하여 배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으셨으니, 아, 이것이 어찌 군신 간에 성의(誠意)로 믿는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그 마음은 모두 나라와 공익을 위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명길의 말이 망발에서 나왔다면 이는 곧 공죄(公罪)이고 대간의 논핵이 과격한 데 빠졌다면 이 역시 공죄인데, 전하께서 준엄한 교지를 여러 차례 내리시고 심지어는 외직으로 내보내기까지 하시니, 신은 참으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대간이 최명길의 공죄를 다스린 것이 과중하다고 그르게 여기신다면 전하께서 신상(申恦) 등의 공죄를 다스리신 것이 과중한 것은 유독 허물이 되지 않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한 가지 일을 하고서 세 가지 잘못을 범하신 것이니 전하의 실책이 큽니다. 전하께서 마음을 편히 하고 헤아려 살펴보시면 반드시 석연한 바가 있으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근년 이래로 대각의 진언을 너무 지나치게 기를 꺾어서 일상적인 평론도 막연히 들어 주시려는 뜻이 없으시니, 곧은 절조가 소침해지고 기상이 쓸쓸해집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온 세상이 모두 입을 봉한 금인(金人)이 될 것이니, 누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화란 속으로 뛰어들어 정직한 의논을 진달하고 직언을 올리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거듭 개탄하는 연유입니다.
윤집(尹集)의 상소에 대한 것은 신이 오랫동안 외방에 있어서 곡절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온 세상을 몰아서 아첨하여 구차스럽게 구는 데로 돌아가게 했다.’고 한 말은 분하고 원통한 김에 나온 말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윤집은 평소에 강개하는 뜻을 품고 있었으니 무슨 일로 촉발하여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마음은 역시 공적인 것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습니까. 조빈(趙贇)이 대간을 처치한 것도 아직 그 내용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소회가 있어서 자기 소견을 진달하였으니, 설사 사리에 어긋나는 실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 때문에 거듭 추궁하고 갑자기 폄출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언론이 막혀 답답하면 점점 과격해지고 과격하면 점점 분란이 생기며, 말문을 열어놓으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화평이 생기는 것인데, 오늘날의 언론은 대개 과격합니다. 지금 국사는 날로 불안해지고 인심이 날로 쇠퇴해 가니, 전하께서는 진정시키고 수용하시어 지사(志士)의 기개를 널리 펴게 하고 충직한 풍토를 배양하여 국가의 명맥을 길이 보존하고 공론을 부식해야지, 갑자기 무서운 위엄을 보여 인심이 답답해하고 물정이 엇갈리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신이 궐하(闕下)에 도착하여 듣건대, 조정이 다시 화친의 사신을 보내려고 한다 하니, 대간이 고집하여 간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지난번 오랑캐 사신이 왔을 적에는 별다른 흔단이 없었는데도 조야(朝野)가 두려워하고 묘당의 모책(謀策)이 허둥지둥하여 일을 처리함에 타당성을 잃고 계책을 씀이 소략하였습니다. 그 후에 조정 신하들이 척화(斥和)하자는 의논을 드리자, 온 나라 사람들이 충의를 고취하고 적세(賊勢)를 꺾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신사를 통해야 한다는 설이 다시 일어나니, 누군들 조정의 의논에 놀라지 않겠습니까. 필부(匹夫)가 일을 처리하는 데도 오히려 이랬다저랬다 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제왕이 국사를 도모하고 적을 제어하는 계책을 세우면서 어찌 일정한 견해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습니까.
또 듣건대, 국서에 ‘청’ 자로 호칭하는 것은 성교에서 나왔다 하니, 이것은 강화하는 데는 이로울 것이 없고 의리에만 크게 해로운 것입니다. 아, 신사도 오히려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청’ 자의 호칭이겠습니까. 이미 ‘청’ 자를 호칭하였으니 차례로 다가올 치욕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호전(胡銓)이 봉사(封事)를 올리자 송(宋)나라 조정은 괴상한 의논이라고 하여, 마침내 귀양보냈었는데, 송나라는 마침내 떨치지를 못했습니다. 만일 호전의 말을 들어 썼다면 금나라가 어찌 감히 송나라를 제압하고 몽고(蒙古)가 어찌 감히 송나라를 삼킬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지금 화의를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자강책을 떨친다면 적이 감히 능멸하는 마음을 갖지 못할 것이고, 지금 다시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자강책을 강구함이 없으면 적의 공갈은 따르기 어려운 바가 있어서 결국 나라를 부지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살펴 처리하소서. 신은 본디 크게 나약한 사람으로 헌부에 재직하면서 일을 논함에 실상을 잃었으니, 신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상이 받아들였다.023)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5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註 023] 옥당이…… 상이 받아들였다. : 문맥이 연결되지 않음. 빠진 문장이 있는 듯함.
ⓒ 한국고전번역원
11월 30일 경오
이날 밤 종묘의 집사청에 불이 나 두어 칸을 연달아 태웠는데, 위안제(慰安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종묘 집사청은 수직관(守直官)의 거처와 몹시 멀고 인적이 이르지 않는 곳인데 갑자기 불이 났다. 다음날 아침 묘관(廟官)이 가서 살펴보니 아래에는 불이 번진 곳이 없고 대들보 사이에서 불이 처음 났다. 당시 항간에는 종묘 각 실의 문이 절로 열렸다는 설도 있었으나 홍유일(洪有一)이 능변(陵變)으로 형벌을 받은 뒤로는 감히 재이를 말하는 자가 없었다.
민광훈(閔光勳)을 장령으로, 임담(林墰)을 지평으로, 김경여(金慶餘)를 헌납으로, 이시해(李時楷)를 교리로, 정뇌경(鄭雷卿)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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