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신축
상이 호종(扈從)한 백관을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비국 낭청 위산보(魏山寶)를 파견하여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새해 인사를 하면서 오랑캐의 형세를 엿보게 하였는데, 청나라 장수가 황제가 이미 왔으므로 감히 마음대로 받지 못한다고 하며 공갈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산보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상이 삼공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김류 등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형세가 필시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인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가 이름은 황제여도 스스로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않으니, 그가 오지 않았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한(汗)이 만약 온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면 분명 까닭없이 군사를 되돌리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 병력으로는 결단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화친하는 뜻으로 저들의 실정을 은밀하게 탐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어 사신을 파견해서 편지를 가지고 한에게 곧장 보내어 ‘듣건대 황제가 나왔다고 하니 본국의 실정을 모두 진달해야 하겠다.’고 한다면 저들이 응당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제신들은 모두 이를 불가하다고 하였으므로 오래도록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상이 마침내 최명길의 말을 따라 드디어 김신국(金藎國)·이경직(李景稷)을 파견하여 오랑캐 진에 가서 화친을 청하게 하였다. 오랑캐 장수 마부달(馬夫達)이 말하기를,
"황제가 지금 성을 순찰하고 있으므로 천천히 여쭈어 결정해야 할 것이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파견하시오."
하였으므로, 김신국 등이 되돌아왔다.
일식(日食)이 있었다.
삶은 고기와 찐 콩을 성첩(城堞)을 지키는 장졸(將卒)에게 내리도록 명하였다.
1월 2일 임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그 문서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마땅히 ‘한(汗)이 멀리서 우리 나라에 왔기에 국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問安)한다’는 내용으로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듯 회계(會稽)의 치욕001) 을 당하여 어찌 굴복하는 말을 피하겠습니까."
하고,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지난날 근거없는 논의 때문에 일을 그르친 실수를 모두 말해야 합니다. 형제의 의를 맺은 지 이제 10 년인데, 한번 사과한다고 하여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니,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안 된다고 고집하였다. 최명길이 소리를 높여 아뢰기를,
"참으로 저 말과 같으면 이는 화친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한번 한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겁을 내어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미리 강구하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범려(范蠡)와 대부 종(大夫種)이 그 임금을 위하여 원수인 적에게 화친하기를 빌었으니, 국가가 보존된 뒤에야 바야흐로 와신상담(臥薪嘗膽)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적중(賊中)의 허실(虛實)을 환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대부 종과 범려에게 비교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교전 중에도 사신이 왕래하는 법이니, 편지 내용은 완곡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국도 약한 나라에 대해 거만하게 대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더구나 강국을 대하는 약한 나라의 입장이겠는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명분(名分)에 대한 사항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니, 2품 이상이 모여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한 건이 가장 중대하니 잘 생각하고 분간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홍서봉 등이 한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그 글001) 에,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002) 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003) 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바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하였다. 상이 즉시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앞으로의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저들이 이미 조유(詔諭)란 글자를 사용한 이상 회답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한(漢)나라 때에도 묵특의 편지에 회답하였으니, 오늘날에도 회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회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상이 각자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으나 모두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영의정·좌의정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김상헌이 아뢰기를,
"지금 사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서(賊書)를 삼군(三軍)에 반포해 보여주어 사기를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한이 일단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첩(城堞)을 굳게 지키면서 속히 회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상헌은 답서의 방식을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극력 간하였는데, 최명길은 답서에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고 칭하기를 청하고 홍서봉은 저쪽을 제형(帝兄)이라고 부르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이야말로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다. 위로 종묘 사직이 있고 아래로 백성이 있으니 고담(高談)이나 하다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예판은 여전히 고집만 부리지 말라."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한갓 고담이나 하면서 존망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저 적의 뜻이 거짓으로 꾸미는 겉치레의 문자에 있지 않고 마침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해올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비국 당상이 왕복하는 글을 소매에다 넣고 출납하였으므로 승지와 사관도 볼 수 없었다.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상이 그를 위하여 통곡하였는데 곡성이 밖에까지 들렸다. 의복과 명주를 하사하여 염습하게 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하였으며, 도성에 돌아온 뒤에는 빈소를 그 집안에 들이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서는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후손이다. 무과로 진출하였는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지조가 있었다. 광해군 때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반정(反正) 때에는 장단 부사(長湍府使)로서 관군을 규합 통솔하여 상을 받들어 내란을 평정함으로써 상훈(上勳)에 기록되었다. 경기 감사·판의금부사·호조 판서·병조 판서·형조 판서·공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강명(剛明)하고 부지런하게 마음을 다해 봉직하였는데, 까다롭고 잗단 결함이 있어 이익을 늘이려 하다가 원망을 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남한 산성의 역사를 감독하여 완성시키고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는 대가가 머물면서 의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溫王廟)004) 를 세워 이서를 배향(配享)하도록 명하였다.
1월 3일 계묘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홍서봉 등이 서계를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조유(詔諭)라고 일컬었는데도 조정에서 장차 회답을 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화친하는 일을 끝내 이룰 수 없을 뿐더러 교활한 오랑캐의 계략에 말려들어 천하 후세에 비난만 받게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저 오랑캐가 이미 멋대로 황제로 자처하고 또 친히 대군을 통솔하였다는 등의 말로 방자하게 위협하니, 그 뜻은 정묘년처럼 사신과 약조하고 그만두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 피폐(皮幣)와 금백(金帛)을 더 줄 수도 있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내줄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한 등급이라도 더 가해주는 일은 따를 수 없습니다. 이는 천경지위(天經地緯)처럼 큰 명분이 관련되어 있으니, 문란시킬 수 없습니다. 저들이 따를 수 없는 일과 문란시킬 수 없는 명분을 요구하고 있는데, 조정에서는 장차 어떻게 조처할 것입니까. 지금 공손한 말로 동정을 구한다 하더라도 이 한 조목을 잘못 처리하면 끝내 성패(成敗)의 수(數)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글이 아무리 패역스럽고 거만했어도 아직 조유(詔諭)라는 두 글자는 없었고, 사명을 받든 신하가 중도에서 내버렸는데도 오히려 처벌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 거짓 조서가 군부(君父) 앞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우리가 포위당하였다 하더라도 지리적인 잇점을 충분히 의지할 수 있고 군사들의 마음도 아직 이탈되지 않았으며 구원하는 군사 또한 모이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호칭을 참람하게 하는 오랑캐에 굴복하지 않고 명나라를 위해 대신 병화(兵禍)를 당하는 것이고 보면 의열(義烈)이 당당하여 일월을 꿰뚫을 만합니다. 천도(天道)가 멀지 않고 신리(神理)가 어긋나지 않으니, 보존을 도모하고 어려움을 구제하는 계책은 다만 우리 성명(聖明)께서 뜻 세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오랑캐의 글을 태워 버려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의를 펴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군관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다시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다. 그 글에,
"조선 국왕 성(姓) 모(某)는 삼가 대청(大淸)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에게 글을 올립니다. 소방이 대국에 죄를 얻어 스스로 병화를 불러 외로운 성에 몸을 의탁한 채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닥쳤습니다. 전사(專使)에게 글을 받들게 하여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려고 생각했지만 군사가 대치한 상황에서 길이 막혀 자연 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듣건대 황제께서 궁벽하고 누추한 곳까지 오셨다기에 반신반의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습니다. 이제 대국이 옛날의 맹약을 잊지 않고 분명하게 가르침과 책망을 내려 주어 스스로 죄를 알게 하였으니, 지금이야말로 소방의 심사(心事)를 펼 수 있는 때입니다.
소방이 정묘년에 화친을 맺은 이래 10여 년간 돈독하게 우의를 다지고 공손히 예절을 지킨 것은 대국이 아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실로 황천(皇天)이 살피는 바인데, 지난해의 일은 소방이 참으로 그 죄를 변명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소방의 신민이 식견이 얕고 좁아 명분과 의리를 변통성 없이 지키려고 한 데 연유한 것으로 마침내는 사신이 화를 내고 곧바로 떠나게 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방의 군신이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변신(邊臣)을 신칙하였는데, 사신(詞臣)이 글을 지으면서 내용이 사리에 어긋나고 자극하는 것이 많아 모르는 사이에 대국의 노여움을 촉발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하들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하여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명나라는 바로 우리 나라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전후에 걸쳐 대국의 병마(兵馬)가 관(關)에 들어 갔을 적에 소방은 일찍이 화살 하나도 서로 겨누지 않으면서 형제국으로서의 맹약과 우호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토록까지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 역시 소방의 성실성이 미덥지 못해 대국의 의심을 받게 된 데서 나온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일에 대한 죄는 소방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으면 정벌했다가 죄를 깨달으면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심(天心)을 체득하여 만물을 포용하는 대국이 취하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만일 정묘년에 하늘을 두고 맹서한 언약을 생각하고 소방 생령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소방으로 하여금 계책을 바꾸어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용납한다면, 소방이 마음을 씻고 종사(從事)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대국이 기꺼이 용서해 주지 않고서 기필코 그 병력을 끝까지 쓰려고 한다면, 소방은 사리가 막히고 형세가 극에 달하여 스스로 죽기를 기약할 따름 입니다. 감히 심정을 진달하며 공손히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하였는데,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삼사가 간하여 중지시켰다. 당시 문장을 대부분 최명길이 작성했는데, 못할 말없이 우리를 낮추고 아첨하였으므로, 보고는 통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오늘부터 비로소 다른 법식을 【 다른 법식이란 신(臣)이라고 일컫는 것을 말한다.】 쓰는데, 일이 매우 중대하니, 2품 이상이 모여 의논하게 하소서. 그러나 사기(事幾)를 지연시킬까 두렵습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사람마다 생각이 있겠지만 일이 막중하기 때문에 감히 드러내 발설하지 못합니다. 전하를 받들어 모시고 이 성에 들어왔는데 어찌 다른 것을 돌아 볼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오늘날의 일을 담당하여 기꺼이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울면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죽지 않고 오래 살아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봉교 이지항(李之恒), 대교 김홍욱(金弘郁),설서 유계(兪棨)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지금 만약 회답을 하면 필시 신하로 일컫기를 요구할 것이고, 신하로 일컬은 뒤에는 또 서로 회합하기를 요구할 것이며, 서로 회합한 뒤에는 필시 청성(靑城)에서의 행동005) 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지항이 아뢰기를,
"지난번 묘당이 감히 저군(儲君)을 내보내야 한다고 발언하였는데, 내일은 틀림없이 전하께 성을 나가도록 권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망령되이 논하지 말라."
하였다. 세 사람이 또 반복하여 진달하니, 상이 노한 소리로 이르기를,
"다시 말하지 말라. 사태를 살피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1월 4일 갑진
황해도 관찰사 이배원(李培元),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등의 장계가 들어왔다.
"유도 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이 경성을 버리고 광릉(光陵)에 물러나 주둔하였습니다. 이때 심기원의 수하에 군사가 없었는데, 훈련 도감의 천총(千摠) 이정길(李井吉)이 낙후된 포수(砲手) 수백 명을 거느리고 그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사신을 자주 왕래시키는 것은 한갓 그들의 술책에 빠지는 것이고 호서(胡書)에 답서를 보내는 것은 오늘날의 급무가 아닙니다. 군신 상하가 마음을 굳게 정하여 동요됨이 없이 한 뜻으로 싸우고 지키는 데 대비해야 합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제로(諸路)의 관군 대부분이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으니 이때 아무리 군사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적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사도 많이 꺾이고 손상되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것도 점점 엉성해지고 있으니,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합니다."
하였는데, 꽤나 화가 난 기색이었다. 이성구(李聖求)가 김자점을 양서 원수(兩西元帥)로 일컫고, 심기원을 삼남·강원도 원수로 일컫기를 청하니, 따랐다.
사간 이명웅(李命雄), 교리 윤집(尹集), 정언 김중일(金重鎰), 수찬 이상형(李尙馨) 등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어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했지만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화친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오직 싸움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계책은 단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인데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문(南門)이 위태롭고 급박했을 즈음에 이조 판서가 나와 적진에 가기를 청해서 적의 예봉을 늦추었으니, 나라를 위한 그 정성이 가상하였다. 지금 여러 재신들이 저들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최명길의 죄만 다스린다면 역시 원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모두 최명길의 죄입니다. 사신을 보내자고 청하여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을 불러들였고, 답서 보내기를 서두르면서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그가 지은 문서에 대해서는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삼사의 제신들은 대부분 용렬하여 꼬리와 머리를 감추고 자신의 몸만 보호할 계책을 품고 있으니, 성명께서 무슨 방법으로 아시겠습니까.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전투와 수비를 말하면 번번이 저지시켰고 적의 형세를 논할 때는 반드시 과장하였으니, 이것으로 죄를 삼더라도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무슨 말인가. 이와 같이 실정에 어긋난 말은 하지 말라."
하였다. 이명웅이 아뢰기를,
"전투와 수비에 관한 계책을 언제나 최명길이 감언(甘言)으로 동요시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을 헤아려 볼 때 꼭 나라를 그르치려는 것이 아니었고 또 사직에 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말감(末減)하여 청하는 것이니, 그의 죄를 바로잡아 화친과 전투가 양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이소서. 만일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신들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평소에 이러한 환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언제나 시기에 맞춰 주선하려고 하였다. 지금 속임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실로 남보다 뛰어난 식견이 있었으니 처벌할 수 없다. 그대들은 물러나서 생각해 보라."
하였다.
협수사(協守使)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지금 추악한 오랑캐가 지구전(持久戰)에 뜻을 두고는 아직 화친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구원병의 진로를 차단하여 전진할 수 없게 하고 오래도록 포위하고 풀지 않아 안팎으로 하여금 막히고 단절되게 하고 있으니, 존망의 기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하겠습니다. 지금 만약 신(臣)이라고 일컫기만 하고 포위가 풀린다면 그래도 오히려 후일을 기약할 수 있으니, 신이 꼭 극력 다투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성(靑城)에서 당한 것과 같은 결과를 필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사전을 벌여야 한다는 뜻을 구원병에게 신칙하고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을 경우 즉시 목을 벤다면 사기가 저절로 배가 될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형세상 반드시 망할 것이고 결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는 이치가 있으니 지금 해야할 계책은 오직 위엄을 크게 세우고 대의를 밝히며 군율(軍律)을 시행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무릇 화란을 수습하고 평정하는 일은 평소 관위만 차지하고 녹을 받아먹던 무리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에 있는 자는 윤방(尹昉)과 김류뿐입니다. 그런데 윤방은 재능도 없고 덕망도 없이 조당(朝堂)에서 녹봉만 받아 먹으면서 임금에게 실책이 있어도 감히 한 마디의 말을 올려 바로잡지 못하였고, 국가의 형세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도 한 가지 계책을 계획하여 구원하지도 못한 채 자기 몸만 돌보고 지위만 보전하려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때 영의정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을 형편없이 처리하여 전쟁의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오늘날의 변고는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김류는 겁만 많고 꾀는 없으며 시기하고 괴팍스러워 제멋대로 하는데 정승으로 병권을 아울러 쥐어 뇌물이 그 집 문에 폭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병이 치달려 와 흉봉(兇鋒)이 육박했을 때 강도(江都)로 행차하기를 청하며 상에게 미복(微服)으로 몰래 떠나도록 권하였는데, 만약 성명께서 성을 나갔다가 되돌아 오시지 않았다면, 일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싸우느냐 화친하느냐를 결단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하고 적을 구경만 하면서 날짜를 보내, 군사들을 지치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추악한 오랑캐에게 글을 올려 화친을 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따진다면 누가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이 두 신하를 주벌(誅罰)하고 또 애통해 하는 분부를 내려 사방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면, 큰 위엄이 저절로 수립되고 대의가 저절로 밝혀질 것이며 군율도 저절로 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인하여 생각건대 장사(壯士)의 마음을 용동(聳動)시키는 데는 관작(官爵)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장사(壯士)를 많이 모집하여 상직(賞職)을 내린 뒤, 형세를 보아 야습하기도 하고 복병을 섬멸하는 등 날마다 이와 같이 하게 함으로써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구원병이 대거 모이기를 기다려 한번 사생(死生)을 건 결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김류가 감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인퇴(引退)하였다. 상이 즉시 불러다 보고 이어 위로하며 출사하도록 권하고, 유백증이 상소하면서 두 대신을 공척(攻斥)하였다고 하여 그의 파직을 명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재신(宰臣)을 뽑아 협수사(協守使)의 명칭을 주어 성중(城中)의 사대부를 통솔하면서 북성(北城)의 수비를 돕도록 하였는데, 유백증이 파면되자 이목(李楘)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협수사(協守使)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지금 추악한 오랑캐가 지구전(持久戰)에 뜻을 두고는 아직 화친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구원병의 진로를 차단하여 전진할 수 없게 하고 오래도록 포위하고 풀지 않아 안팎으로 하여금 막히고 단절되게 하고 있으니, 존망의 기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하겠습니다. 지금 만약 신(臣)이라고 일컫기만 하고 포위가 풀린다면 그래도 오히려 후일을 기약할 수 있으니, 신이 꼭 극력 다투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성(靑城)에서 당한 것과 같은 결과를 필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사전을 벌여야 한다는 뜻을 구원병에게 신칙하고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을 경우 즉시 목을 벤다면 사기가 저절로 배가 될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형세상 반드시 망할 것이고 결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는 이치가 있으니 지금 해야할 계책은 오직 위엄을 크게 세우고 대의를 밝히며 군율(軍律)을 시행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무릇 화란을 수습하고 평정하는 일은 평소 관위만 차지하고 녹을 받아먹던 무리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에 있는 자는 윤방(尹昉)과 김류뿐입니다. 그런데 윤방은 재능도 없고 덕망도 없이 조당(朝堂)에서 녹봉만 받아 먹으면서 임금에게 실책이 있어도 감히 한 마디의 말을 올려 바로잡지 못하였고, 국가의 형세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도 한 가지 계책을 계획하여 구원하지도 못한 채 자기 몸만 돌보고 지위만 보전하려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때 영의정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을 형편없이 처리하여 전쟁의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오늘날의 변고는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김류는 겁만 많고 꾀는 없으며 시기하고 괴팍스러워 제멋대로 하는데 정승으로 병권을 아울러 쥐어 뇌물이 그 집 문에 폭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병이 치달려 와 흉봉(兇鋒)이 육박했을 때 강도(江都)로 행차하기를 청하며 상에게 미복(微服)으로 몰래 떠나도록 권하였는데, 만약 성명께서 성을 나갔다가 되돌아 오시지 않았다면, 일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싸우느냐 화친하느냐를 결단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하고 적을 구경만 하면서 날짜를 보내, 군사들을 지치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추악한 오랑캐에게 글을 올려 화친을 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따진다면 누가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이 두 신하를 주벌(誅罰)하고 또 애통해 하는 분부를 내려 사방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면, 큰 위엄이 저절로 수립되고 대의가 저절로 밝혀질 것이며 군율도 저절로 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인하여 생각건대 장사(壯士)의 마음을 용동(聳動)시키는 데는 관작(官爵)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장사(壯士)를 많이 모집하여 상직(賞職)을 내린 뒤, 형세를 보아 야습하기도 하고 복병을 섬멸하는 등 날마다 이와 같이 하게 함으로써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구원병이 대거 모이기를 기다려 한번 사생(死生)을 건 결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김류가 감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인퇴(引退)하였다. 상이 즉시 불러다 보고 이어 위로하며 출사하도록 권하고, 유백증이 상소하면서 두 대신을 공척(攻斥)하였다고 하여 그의 파직을 명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재신(宰臣)을 뽑아 협수사(協守使)의 명칭을 주어 성중(城中)의 사대부를 통솔하면서 북성(北城)의 수비를 돕도록 하였는데, 유백증이 파면되자 이목(李楘)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선전관 민진익(閔震益)이 글을 지니고 몰래 나가 여러 진의 근왕병들에게 조정의 명을 전하겠다고 청하여 몸소 적의 화살을 맞으면서 세 번이나 나갔다가 들어왔다. 상이 그를 인견하여 가상하게 여기고 감탄하며 차고 있던 칼을 풀어 하사하고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초계(超階)하였다.
1월 5일 을사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등의 장계(狀啓)가 들어 왔다.
자원하여 출전한 김사호(金士豪)가 성 밖을 순찰하다가 도망하는 군사를 붙잡아 효시(梟示)하였는데, 체부(體府)가 적을 벤 예에 의거하여 6품의 실직(實職)으로 승진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들어와 광교산(光敎山)에 【 경기의 수원(水原)과 용인(龍仁) 사이에 있다.】 주둔하며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치계(馳啓)하였다. 당시 남한 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원병의 소식이 잇따라 이르렀으므로 성 안에서 이를 믿고 안정을 되찾았다.
1월 6일 병오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의 장계가 들어 왔는데, 건치(乾雉) 4수(首)를 올렸다. 그 장계에 "춘천 영장(春川營將) 권정길(權井吉)이 군사를 거느리고 검단산(儉丹山)에 주둔하면서 여러 차례 싸워 많이 이겼는데 갑자기 청병(淸兵)이 뒤를 엄습하는 바람에 무너졌고, 조정호는 현재 용진(龍津)에 주둔하면서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북병(北兵)을 기다렸다가 연합작전으로 진격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강원도 금화현(金化縣)에 도착하였다는 장계가 들어 왔다.
사방에 운무(雲霧)가 끼어 하루종일 어두웠는데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도승지 정광경(鄭廣敬)이 수원(水原)이 공격당하였음을 듣고, 그의 아비 정창연(鄭昌衍)이 현재 수원에서 피난 중인데 생사를 모른다는 것으로 마침내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이경직(李景稷)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1월 7일 정미
상이 중관(中官)을 보내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장졸(將卒)을 위로 하였다.
성 안에 사는 서흔남(徐欣男)과 승려 두청(斗淸)이 모집에 응하여 나갔다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장계를 가지고 왔다.
성 안에 사는 서흔남(徐欣男)과 승려 두청(斗淸)이 모집에 응하여 나갔다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장계를 가지고 왔다.
1월 8일 무신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온조왕(溫祚王)의 도사(禱祀)를 행할 때 엉겁결에 구차하게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미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날짜를 가려 중신(重臣)을 파견해서 경건하게 정성껏 치제(致祭)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궁해지면 근본을 생각하게 되고 병이 들어 아프면 부모를 부르게 마련입니다. 숭은전(崇恩殿)의 수용(睟容)을 방금 성 안의 사찰에 봉안하였으니, 상께서 친히 제사를 지내어 명명(冥冥)한 가운데 신의 가호(加護)를 비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9일 기유
김류·홍서봉·최명길이 청대(請對)하였는데, 도승지 이경직이 입시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오랑캐 진영에 사신을 파견하는 일에 대해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보내려고 한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신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무익한 줄 압니다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의 요행을 바랄 뿐입니다. 문서를 이미 작성하였으니 예람(睿覽)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다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직이 아뢰기를,
"저들이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곤궁하게 하려고 하니 정상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사람을 보낸다 하더라도 기꺼이 허락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해로움은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류가 그날 바로 내보내기를 청하니, 따랐다.
예조 판서 김상헌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어제 대신이 사신을 보내자고 청했을 때는 상께서 무익하다고 하였는데, 오늘 또 청대하여 윤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성상의 뜻은 파견하고 싶지 않은데 대신이 이해관계를 진달하였기 때문에 따르신 것은 아닙니까? 저들이 이미 상의하여 회보(回報)하겠다고 한 이상, 우리가 아무리 자주 사신을 파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우니, 한갓 보탬이 없을 뿐만이 아니고 해로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해로움이 있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무도(無道)한 말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데 사람들이 모두 화친을 믿고 있으니 사기가 필시 저하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사신을 구류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무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만, 구류할 근심은 필시 없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계책이 궁해서 나온 것이니, 어찌 기모(奇謀)와 선책(善策)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김반(金槃), 집의 채유후(蔡𥙿後), 교리 김익희(金益熙)가 청대하여 각기 사신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동부승지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삼사의 말이 이와 같으니 다시 대신을 불러 헤아려 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명소(命召)하여 하문하기를,
"오랑캐 진영에 사신을 파견하는 일에 대하여 예조 판서 등 여러 사람이 모두 무익하다고 하는데, 그 의논이 어떠한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 또한 틀림없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고 일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거론을 한 것입니다."
하고, 이홍주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틀림없이 무익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고, 김반이 아뢰기를,
"보내자고 하는 사람은 한두 명의 대신에 불과하고 또 나머지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말합니다. 지난번 북문(北門)에서 조금 꺾인 뒤로 저들의 기세가 한창 교만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잇따라 왕래하였는데, 당시의 문자(文字)는 곧 항서(降書)였지 화서(和書)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강해진 뒤에야 화친도 성립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때나 스스로 강해지겠는가."
하였다. 김반이 아뢰기를,
"이의배(李義培)는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았고, 이시방(李時昉)은 김준룡(金俊龍)을 구원하지 않아 광교(光敎)에서 패배를 당하게 하였으니, 모두 분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을 처벌하여 군율을 밝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령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오늘 승려를 모집해서 원수(元帥)에게 보내 먼저 이의배를 참(斬)하게 한 뒤 통솔할 장수를 대신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장수를 바꾸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크게 꺼리는 일이니 용이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김상헌이 아뢰기를,
"보낼 문서를 신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곁에서 듣건대 관온 인성(寬溫仁聖) 등 단어의 뜻을 해석하여 찬미하였다고 합니다. 삼공이 모여 다시 더 재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전부터 문장을 잘못 작성하여 강한 오랑캐를 가볍게 보고 도발시킴으로써 이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한갓 빈 말만 숭상할 수는 없다."
하였다. 대사헌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밖에서 공격하는 일은 위태롭습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오늘날에는 장수가 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싸우지 않으면 사론(士論)이 그르다고 하고, 싸워서 불리하게 되면 역시 사론이 비난하니, 일을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1월 11일 신해
상이 해가 뜰 무렵에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영정(影幀)에 제사를 지냈다.
지평 염우혁(廉友赫), 헌납 김경여(金慶餘)가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사신을 파견하는 것은 크게 불가하다고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이 의논이 다시 제기되었고 또 그 문자(文字)에 애걸하는 내용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적이 만약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면 아무리 사연을 비굴하게 하더라도 끝내는 무익할 것이 분명하니, 사신을 보내는 일을 속히 정지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는 실로 부득이해서 나온 일이다. 그대들은 다시 더 생각하고 요량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김류·홍서봉·최명길 등이 청대하였다. 김류가 글을 보낼 것을 굳이 청하니, 상이 열람하고 하문하기를,
"고쳐야 할 곳은 없는가?"
하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성상 앞에서 여쭈어 고쳤으면 합니다."
하고, 인하여 붓을 잡고 문장의 자구를 고쳤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에 소방의 재신(宰臣)이 군문(軍門)에 글을 올려 품청(稟請)하였는데, 황제로부터 장차 후명(後命)이 있을 것이라고 돌아와서 말하기에, 소방의 군신(君臣)은 발돋움하고 목을 빼어 날마다 덕음(德音)을 기다렸으나 지금 열흘이 지나도록 분명한 회답이 없습니다. 이에 곤궁하고 사정이 급박하여 다시 아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황제께서는 살펴 주소서.
소방은 앞서 대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도 형제의 의리를 맺고 천지에 명백히 고하였으니, 지역은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정의(情意)는 간격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손 만대의 한없는 복이 되었다고 스스로 여겼는데 맹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혹으로 인한 분쟁의 발단이 마음 속에서 생겨나 그만 위태롭고 급박한 화란을 당함으로써 거듭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찾아 보건대, 모두가 천성이 유약한 탓으로 군신(羣臣)에게 잘못 이끌린 채 사리에 어두워 살피지 못함으로써 오늘날의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스스로를 책망할 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형이 아우에게 잘못이 있음을 보고 노여워하여 책망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나 엄하게 책망한 나머지 도리어 형제의 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되면, 어찌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소방은 바다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을 일삼고 병혁(兵革)은 일삼지 않았습니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복종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서로 견주겠습니까. 다만 명나라와는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명분(名分)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에 소방이 조석(朝夕)으로 망하게 될 운명이었는데,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수화(水火) 가운데 빠진 백성들을 건져내고 구제하셨으므로, 소방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마음과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대국에게 잘못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하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은혜를 베푼 것이 두터워 사람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사람에게 베푸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진실로 생령(生靈)의 목숨을 살리고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군사를 일으켜 환란을 구제하거나 회군하여 보존되도록 도모해 주는 그 일이 비록 다르다고는 하더라도 그 은혜는 마찬가지라고 할 것입니다.
지난해 소방의 일처리가 잘못되어 대국으로부터 여러 차례나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여전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여 화란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일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되도록 허락하여 종사를 보존하고 대국을 오래도록 받들게 해 주신다면, 소방의 군신(君臣)이 장차 마음에 새기고 감격하여 자손 대대로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고, 천하에서도 이를 듣고 대국의 위신(威信)에 복종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대국이 한번의 거사로 큰 은혜를 조선에 베푸는 일이 됨과 동시에, 더 없는 영예를 사방의 나라에 베푸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직 하루아침의 분함을 쾌하게 하려고 병력으로 추궁하기를 힘써 형제 사이의 은혜를 손상시키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길을 막음으로써 제국(諸國)의 소망을 끊어버린다면, 대국의 입장으로 볼 때에도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할 듯합니다. 고명하신 황제께서 어찌 이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못하시겠습니까.
가을에 만물을 죽이고 봄에 살리는 것은 천지의 도이고, 약한 나라를 어여삐 여기고 망해가는 나라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패왕(伯王)의 사업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바야흐로 영명하고 용맹스런 계략으로 제국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고 새로 대호(大號)를 세우면서 맨 먼저 관온 인성(寬溫仁聖) 네 글자를 내걸었습니다. 이 뜻이 대체로 장차 천지의 도를 체득하여 패왕의 사업을 넓히려고 하는 것이니, 소방처럼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넓은 은혜에 의지하기를 바라는 자에 대해서는 의당 끊어서 버리는 가운데에 포함시키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이에 다시 구구한 정을 펴 집사(執事)에게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우의정 이홍주, 호조 판서 김신국, 예조 판서 김상헌 및 비국 당상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갖가지를 생각하고 헤아려 보아도 국서(國書)를 보내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일 왕래한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먼저 말로 용골대(龍骨大)에게 가서 물어보게 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로 전하는 이야기를 저들이 어찌 응답하겠는가."
하였다. 김상헌이 아뢰기를,
"문서 가운데에 ‘임진년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군사를 출동시켜 난리를 구원하였다. 지금 만약 군사를 거두어 보존하도록 도모해 준다면 그 은혜가 다름이 없으니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 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로는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리라고 기대하기 어렵고, 문장을 작성한 것도 매우 타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김류·홍서봉·최명길을 불러서 들어 오게 하고, 이르기를,
"우상의 뜻은 문서를 보내지 말고 단지 말로 먼저 탐지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김류와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허다한 이해 관계를 말로 전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국서는 이미 작성되었는데, 여러 갈래로 논의가 많으니 어느 때나 결정되겠습니까. 지금은 여러 의논을 배격하고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창백색(蒼白色) 구름 한 가닥이 동방에서 일어나 곧바로 곤방을 가리켰다.
1월 13일 계축
홍서봉·최명길·윤휘(尹暉)가 청대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호역(胡譯) 이신검(李信儉)이 와서 말하기를 ‘일찍이 정묘년에 유해(劉海)에게 기만책을 써서 그 덕분에 강화하였다. 지금도 정명수(鄭命壽)에게 뇌물을 주면 강화하는 일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런 계책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모름지기 비밀리에 주고 누설되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은(銀) 1천 냥(兩)을 정명수에게 주고 용골대와 마부대(馬夫大)에게도 각각 3천 냥씩 주게 하였다.
상이 세자와 성을 순시하다가 동성(東城)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려 장사(將士)들을 위로하였다. 또 남격대(南格臺)에 이르러 총융사(憁戎使) 구굉(具宏)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 장졸(將卒)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보내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두루 유시하게 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글을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는데, 용골대가 황제에게 품하여 즉시 회보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홍서봉 등이 돌아 와서 강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동풍이 크게 불었다. 헌릉(獻陵)에 불이 나서 연기와 화염이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동부승지 이경증(李景曾)이 사소(四所) 및 하위(下衛)의 군사에게 3년을 기한으로 1결(結)씩 복호(復戶)해 주어 그 노고를 보상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1월 14일 갑인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 중에 직책을 받기를 자원하는 자는 차등있게 직책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한량(閑良)은 금군(禁軍)에, 금군은 수문장(守門將)에 임명하고, 수문장과 부장(部將)은 사과(司果)로 옮기고,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은 복호하고 아울러 직첩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있었다.
1월 15일 을묘
도원수 심기원(沈器遠)의 군관 지기룡(池起龍)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 대구어(大口魚) 알과 연어(漣魚) 등의 물품을 바쳤다. 체부(體府)가 아뢰기를,
"지기룡·김기량(金起良)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와 구원병의 소식을 알렸으니, 논상하소서."
하니, 따랐다.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군사를 합쳐 양근(楊根)의 미원(薇原)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2만 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평안도 별장이 8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안협(安峽)에 도착하였다.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이 군사를 거느리고 쌍령(雙嶺)에 도착하였는데, 교전하지도 못하고 군사가 패하여 죽었으며, 우병사 민영(閔栐)은 한참동안 힘껏 싸우다가 역시 패하여 죽었다.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진군하여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 진을 쳤으나 적에게 패하여 생사를 모른다고 하였다.
최명길과 윤휘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저들이 장차 회보하겠다고 하고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볼까 하는데, 대신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충청 감사의 생사가 불확실한데, 두 원수(元帥)도 조정의 명령이 없으면 필시 스스로 알아서 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편리할 대로 처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묘당은 화친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장사(將士)는 수비책을 힘써야 할 것이며, 외부의 구원병은 전투를 임무로 삼아야 하니, 이 세 가지를 병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잘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의승(義僧) 두청(斗淸)이 유지(有旨)를 가지고 나갔다.
본부(本府)가 약반(藥飯)을 양전(兩殿)에 바쳤다.
1월 16일 병진
오랑캐가 ‘초항(招降: 항복하라)’이라는 두 글자를 기폭에 크게 써서 성중에 보였다.
홍서봉·윤휘·최명길을 오랑캐 진영에 보냈는데, 용골대가 말하기를,
"새로운 말이 없으면 다시 올 필요가 없다."
하였다. 최명길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이신검(李信儉)006) 에게 물었더니 이신검이 여량(汝亮)과 정명수(鄭命守)의 뜻을 전하였는데, 이른바 새로운 말이란 바로 무조건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군(人君)과 필부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어떻게든 보존될 수만 있다면 최후의 방법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말을 운운한 것은 우리가 먼저 꺼내도록 한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적당한 시기에 우리가 먼저 그 말을 꺼내어 화친하는 일을 완결짓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영상을 불러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갑작스레 의논해서 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런 이야기를 사책(史冊)에 쓰게 하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호군(護軍) 민형남(閔馨男)이 상소하였다.
"오늘날의 일이 급박합니다. 밖으로는 구원병이 승리했다는 보고가 없고 안으로는 믿을 만한 명장이 없이 외로운 성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육이 될 운명에 놓여 있는 온 나라의 백성이야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더라도 2백 년 동안 내려온 종사(宗社)는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당초에 정도(正道)를 그대로 지키자는 의논이 섣불리 강한 오랑캐의 노여움을 촉발하여 그만 병화(兵禍)를 불러들이게 되었으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모의 병이 위독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효자의 마음에 어찌 차마 옛날의 처방만을 고수하며 구급약을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옛날 산의생(散宜生)의 무리는 주옥(珠玉)과 미녀(美女)를 뇌물로 바쳐 유리(羑里)에 갇힌 문왕(文王)을 탈출시켰으니, 이는 실로 부득이하여 취한 조치였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록 포위당한 것은 백등(白登)에서 포위당한 것007) 보다 급박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는 묵특보다도 심하니, 만약 진평(陳平)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면 비계(秘計)와 기모(奇謀)를 무엇인들 극진히 하지 않겠습니까.
바야흐로 지금은 국체(國體)가 중하게 되지 못하고 대신도 업신여김을 받는데, 일종(一種)의 논의가 끝없이 다투고 있으며 대각(臺閣)도 대립된 채 걸핏하면 기회를 놓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군사 작전에서는 속임수도 꺼리지 않으니, 오로지 전승을 거둘 계책이 중요합니다. 모든 계책은 모름지기 대신과 상의하여 성심(聖心)으로 굳게 결정하고 동요되어 다시 고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정의 신하로 하여금 각기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하도록 하소서."
1월 17일 정사
오랑캐가 보낸 사람이 서문(西門) 밖에 와서 사신을 불렀다. 이에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오랑캐 진영에 가도록 하였다. 홍서봉 등이 무릎을 꿇고 한(汗)의 글을 받아 돌아왔는데, 그 글에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에게 조유(詔諭)한다."고 하였다. 그 대략에,
"짐(朕)이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 그대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고 그대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치의 곡직(曲直)을 따지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천지의 도는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법이다. 짐은 천지의 도를 체득하여,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관대하게 길러주고, 소문만 듣고도 항복하기를 원하는 자는 안전하게 해 주되, 명을 거역하는 자는 천명을 받들어 토벌하고, 악의 무리를 지어 예봉에 맞서는 자는 주벌(誅罰)하고, 완악한 백성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로잡고, 구태여 고집을 부려 굴복하지 않는 자는 경계를 시키고, 교활하게 속이는 자는 할 말이 없도록 만들 것이다.
지금 그대가 짐과 대적하므로 내가 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여기에 이르렀으나, 만약 그대 나라가 모두 우리의 판도에 들어 온다면, 짐이 어떻게 살리고 기르며 안전하게 하고 사랑하기를 적자(赤子)처럼 하지 않겠는가. 지금 그대가 살고 싶다면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다면 또한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양국의 군사가 서로 싸우다 보면 하늘이 자연 처분을 내릴 것이다."
하였는데, 홍서봉 등이 입대(入對)하여 답서를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나가서 제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정언 이시우(李時雨)가 와서 아뢰기를,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포위된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는데도 제도(諸道)의 구원병 중에 한 사람도 목숨을 바쳐 이 어려움을 구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바로 몇 년 전부터 군사들의 기율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의배(李義培)처럼 군사만 장악하고 머뭇거리면서 주장(主將)이 패배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는 자를 아직까지 주벌(誅罰)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제장(諸將)을 두렵게 징계시켜 생사를 가볍게 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급히 결사대를 모집하여 수신(帥臣)에게 하유함으로써 군율을 어기거나 머뭇거리는 제장은 먼저 참(斬)한 뒤에 아뢰도록 하여 군사의 기율을 엄격히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수신으로 하여금 제군(諸軍)을 감독하고 통솔하여 하루가 급하게 전진해서 한 번 결사전을 벌임으로써 군부의 위급함을 풀도록 하소서.
또 얼음이 녹은 뒤에 모든 배를 독촉해서 징발하여 경강(京江)에 와 정박하게 하고 수채(水寨)를 만들어 위급할 때를 대비하게 하소서. 그리고 경기는 감사와 수령이 모두 포위된 성 가운데 있으므로 한 도에 호령할 사람이 없습니다. 감사는 외부에 있는 여러 재신(宰臣) 가운데에서 뽑아 임명하고, 수령은 임시로 뽑은 이들을 진짜로 삼아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급히 품지(稟旨)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갑자년008) 의 사례에 의거하여 이명(李溟)은 좌도 감사(左道監司)라고 하여 오로지 성 안의 일을 보살피게 하고, 외부에 있는 사람 중에 그 방면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가려 우도 감사(右道監司)라고 칭한 뒤 한 도의 일을 겸해서 보살피도록 하소서. 그리고 열읍(列邑) 가운데 수령이 없는 곳은 임시로 수령을 차출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소서. 이의배 등과 군기를 어긴 제장(諸將)은 먼저 참한 뒤에 아뢰도록 하고, 각 포구의 전선과 병선 및 제도의 주사(舟師)와 강화(江華)의 배는 모두 경강(京江)으로 되돌려 정박하게 해서 급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수신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경강(京江)의 배는 수습해서 머물며 대기하다가 즉시 강화로 되돌려 정박하게 하라. 이의배 등의 일은 명확하게 조사하여 처치하도록 하라. 성에 들어온 수령은 공로가 매우 중하니, 뒷날에도 체직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민구(李敏求)를 경기 우도 관찰사(京畿右道觀察使)로 삼았다. 【 당시 이민구는 검찰 부사(檢察副使)로 강도(江都)에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6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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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무오
대신이 문서(文書)를 품정(稟定)하였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문서를 제술(製述)한 사람도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상이 문서 열람을 마치고 최명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勘定)하게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군부(君父)를 모시고 외로운 성에 들어와 이토록 위급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에 누가 다른 의논을 내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바로 국가의 막중한 조치인데 어떻게 비밀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 및 2품 이상을 불러 분명하게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마음은 성실성이 부족하여 속 마음과 말이 다르다. 나랏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니, 이 점이 염려스럽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설령 다른 의논이 있더라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羣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성(二聖)009) 이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상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 무제(晋武帝)나 송 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의 일010) 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金)나라의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지만, 급기야 사막(沙漠)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汴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김상헌의 말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였으며 말하면서 눈물이 줄을 이었으므로 입시한 제신들로서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상의 곁에 있으면서 목놓아 우는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 【 이 밑에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제신이 간쟁하여 지웠다.】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건대 거듭 유시해 주셨으니, 간절히 책망하신 것은 바로 지극하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서 추상과 같이 엄한 말 속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기운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국이 위덕(威德)을 멀리 가해 주시니 여러 번국(藩國)이 사례해야 마땅하고, 천명과 인심이 돌아갔으니 크나큰 명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한다면, 문서(文書)와 예절(禮節)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이 저절로 있으니,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간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반드시 죽고자 하여 자결하려 하니 그 심정이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방의 진정한 소원이 이미 위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보면, 이는 변명도 궁하게 된 것이고 경계할 줄 알게 된 것이며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관대하게 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기에,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삼사 및 이식(李植)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문자에 타당하지 않은 곳이 많이 있으니, 우선 내일을 기다렸다가 사람을 보내도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최명길이 화를 내어 꾸짖기를,
"그대들이 매번 조그마한 곡절을 다투고 분변하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치욕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되었겠는가. 삼사는 단지 신(臣)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그 가부만 논하면 된다. 사신을 언제 보내느냐 하는 것은 곧 묘당의 책임으로서 그대들이 알 일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경석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사신들이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니, 용골대(龍骨大)가 마부대(馬夫大)가 나갔다는 것을 핑계대고 받지 않았으므로, 도로 가지고 와서 마침내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를 더하였다.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대죄(待罪)하기를,
"신 또한 화친을 배척하였으니, 청나라 진영에 나아가 죽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눈이 크게 왔다.
1월 19일 기미
오랑캐가 보낸 사람이 서문(西門) 밖에 와서 사신을 보내라고 독촉하였다. 좌상 홍서봉이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였으므로 우상 이홍주와 최명길·윤휘를 보내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조 참판 정온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외간에 떠들썩하게 전파된 말을 듣건대, 어제 사신의 행차에 신(臣)이라고 일컬으며 애걸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말 맞습니까? 만약 실제로 그러하다면 이는 필시 최명길의 말일 것입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간담이 다 떨어져 목이 메어 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후에 걸쳐 국서는 모두 최명길의 손에서 나왔는데, 매우 비루하고 아첨하는 말 뿐이었으니, 이는 곧 하나의 항서(降書)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래도 신(臣)이라는 한 글자를 쓰지 않아 명분이 아직은 미정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신이라고 일컫는다면 군신(君臣)의 명분이 이미 정하여진 것입니다. 군신의 명분이 이미 정해졌으면 앞으로 그 명령만을 따라야 할 것인데 저들이 만약 나와서 항복하라고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나가서 항복하시렵니까? 북쪽으로 떠나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북쪽으로 떠나시겠습니까? 옷을 갈아 입고 술을 따르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술을 따라 올리겠습니까? 따르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군신의 의리를 가지고 그 죄를 따지며 토벌할 것이고, 따른다면 나라가 이미 망한 것이니, 이러한 처지에 이르러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최명길의 생각으로는, 한번 신이라고 일컬으면 포위당한 성도 풀 수 있으며 군부도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이와 같이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부녀자들이나 소인의 충성 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절대로 이럴 리도 없음이겠습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하의 국가가 길이 보존되기만 하고 망하지 않은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정도(正道)를 지키며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한 번 결전을 벌인다면 성을 완전하게 하는 방법이 없지 않은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 명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입장은 고려 말엽의 금(金)나라나 원(元)나라의 경우와 같지 않은데, 부자와 같은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으며 군신의 의리를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인데 최명길은 두 개의 태양을 만들려고 하며, 백성들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두 임금을 만들려 합니다. 이런 일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신은 몸이 병들고 힘이 약하여 비록 수판(手板)으로 후려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같은 좌석 사이에서 서로 용납하고 싶지 않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최명길의 말을 통렬히 배척하여 나라를 팔아 넘긴 죄를 바로잡으소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거든 속히 신을 파척(罷斥)하도록 명하시어 망언을 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지 않았다.
1월 20일 경신
오랑캐가 보낸 사람이 또 와서 사신을 독촉하였다.
대사헌 김수현(金壽賢), 집의 채유후(蔡𥙿後), 장령 임담(林墰)·황일호(黃一皓) 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국서에 그 전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기로 의논하여 정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신 자를 썼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신이라고 일컬으면 다시는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일이 아무리 위태롭고 급박하다 하더라도 명분은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번 신 자를 썼다가 문득 신하의 도리로 책망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면서 끊임없이 이해관계를 반복하여 진달하였다. 상이 영상을 명초(命招)하여 하문하기를,
"헌부가 불가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모르겠습니만, 헌부가, 명분이 지극히 엄하니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야말로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최명길이 들어와 상에게 나아가 귀에 대고 말을 하였으므로 입시한 사람들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은 죄인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마땅하니,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만약 신 자를 일컫지 아니하고 한갓 지난번과 같은 모양의 문서를 주고받는다면, 저들이 반드시 화를 내어 다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외복(外服)의 제후(諸侯)로서 상국(上國)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의리에 죽은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사론(士論)을 견지하는 자는 하루라도 늦추어 신이라고 일컬으려 하며, 계려(計慮)가 있는 자는 약조 맺기를 기다린 뒤에 일컬어 여지를 만들려 하는데, 신은 빨리 일컫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이홍주(李弘胄) 등을 보내 지난번의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도록 하였는데, 답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글에,
"그대가 하늘의 명을 어기고 맹세를 배반하였기에 짐이 매우 노엽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러 왔으니 뜻이 용서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직접 준절하게 책망한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알아 여러 번 글을 올려 면하기를 원했으므로,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는 힘으로 공격해서 취할 수 없거나 형세상 에워쌀 수 없어서가 아니라 불러서 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성은 공격하기만 하면 진실로 함락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대의 꼴과 식량을 군사와 말이 다 먹도록 해서 저절로 곤궁하게 하면 또한 함락시킬 수 있다. 이처럼 보잘것 없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면 장차 어떻게 유연(幽燕)을 함락시키겠는가.
그대에게 성을 나와 짐과 대면하기를 명하는 것은, 첫째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를 보려 함이며, 둘째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어 나라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줌으로써 천하에 인자함과 신의를 보이려 함이다. 꾀로 그대를 유인하려는 짓은 하지 않는다. 짐은 바야흐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사방을 평정하고 있으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여 줌으로써 남조(南朝)에 본보기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 큰 천하를 어떻게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니, 진실로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다 아는 일이다. 그대가 만약 날짜를 미루고 나오지 않는다면, 지방이 유린되고 꼴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생령이 도탄에 허덕이고 재해와 고통이 날마다 더할 것이니, 진실로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일이다.
맹서를 어기도록 앞장 서서 모의한 그대의 신하에 대해 짐이 처음에는 모두 죽인 뒤에야 그만 두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정말로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앞장 서서 모의한 신하 2, 3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 짐이 효시(梟示)하여 후인을 경계시키겠다. 짐이 서쪽으로 정벌하려는 큰 계책을 그르치게 하고 백성을 수화(水火)에 빠뜨린 자가 이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만약 앞장 서서 모의한 자를 미리 보내지 않더라도 그대가 이미 귀순한 뒤에 비로소 찾아 내는 짓은 짐이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간절하게 빌고 청하더라도 짐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유시한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오늘 저들의 말이 어떠하였는가?"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정말로 조금도 호의를 가지지 않았는데, 그대 나라가 한결같이 사죄하였기 때문에 황제께서 지난날의 노여움을 모두 푼 것이다. 지금 만일 성에서 나오려거든 먼저 앞장 서서 화친을 배척한 1, 2명을 잡아 보내라. 이와 같이 한다면 내일 포위를 풀고 떠나겠다. 그렇지 않으면 성에서 나온 뒤에 또 한 번 다투는 단서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어찌 차마 묶어서 보내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남조(南朝)에 복종하여 섬겨 온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배신할 수 없다고 한 몇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부터 대국(大國)을 섬긴다면 그들도 오늘날 남조를 배반하지 않는 것처럼 뒷날 대국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조약(條約)을 강정(講定)하면서 그들의 답변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다만 답서를 지어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1일 신유
이홍주(李弘胄) 등을 보내 국서를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 신 성휘(姓諱)는 삼가 대청국(大淸國)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 폐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신이 하늘에 죄를 얻어 고립된 성에서 고달프게 지내면서 곧 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여러 번 서소(書疏)를 올려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찾았습니다만, 실제로 감히 크게 노여워하시는 하늘에 꼭 용서받으리라고 확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은혜로운 유지(諭旨)를 받들건대 지난 날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여 추상(秋霜)같은 엄숙한 위엄을 늦추시고 양춘(陽春)같은 혜택을 베푸심으로써 장차 동방 수천 리의 백성들로 하여금 수화(水火) 가운데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니, 어찌 한 성(城)의 목숨만 연장되는 것이겠습니까. 군신 부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를 모를 것입니다.
저번에 성에서 나오라는 명을 받고는 실로 의혹되고 두려워지는 단서가 많았는데, 마침 하늘의 노여움이 아직 거치지 않은 때라서 감히 마음에 품은 생각을 모두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실을 숨김없이 알리고 정령하게 인도하시는 유시를 받들건대, 이는 참으로 옛사람이 이른바 ‘진심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뱃속에 넣어 둔다.’고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대국을 받들어 섬긴 지 10여 년 동안에 폐하의 신의를 심복해 온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평상시의 언행도 서로 부합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더구나 신실하기가 사시(四時)와 같은 사륜(絲綸)의 명이겠습니까. 따라서 신은 다시 이것을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에게 안타깝고 절박한 사정이 있기에 폐하에게 호소하려 합니다. 동방의 풍속은 대국적이 못되어 예절이 너무하리만큼 꼼꼼합니다. 그리하여 군상(君上)의 행동에 조금만 상도(常度)와 다른 점이 보이면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며 괴상한 일로 여깁니다. 만약 이런 풍속을 따라서 다스리지 않으면 마침내는 나라를 세울 수가 없게 됩니다. 정묘년 이후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사실 다른 논의가 많았으나 가능한 한 진정시키려고 하면서 거연히 나무라거나 책망하지를 감히 못했던 것은 대체로 이런 점을 염려해서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온 성의 백관과 사서(士庶)가 위태롭고 급박한 사세를 목도하고 귀순하자는 의논에 대해서는 똑같은 말로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성에서 나가는 한 조목에 대해서만은 모두들 고려조(高麗朝) 이래로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죽는 것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나가지 않으려 합니다. 따라서 만약 대국이 독촉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뒷날 얻는 것은 쌓인 시체와 텅 빈 성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조만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말들 하는데, 더구나 다른 일의 경우이겠습니까.
예로부터 국가가 망한 이유가 오로지 적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폐하의 은덕을 입어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인정(人情)을 살펴 보건대 반드시 신을 임금으로 떠받들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렵게 여기는 바입니다. 폐하께서 귀순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대체로 소방의 종사(宗社)를 보전시키려 함인데, 이 한 가지일 때문에 나라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한 채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면 이는 분명히 폐하께서 감싸주고 돌보아 주시는 본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가 천둥 번개와 같은 군사로 깊이 천 리나 떨어진 지경에 들어와 두 달도 채 못되어 그 나라를 신하로 만들고 그 백성들을 어루만지셨으니, 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공으로서 전대(前代)에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꼭 신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야 바야흐로 이 성을 이겼다고 말하겠습니까. 폐하의 위무(威武)에도 손상이 가지 않고 소방의 존망(存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 점 하나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국이 이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이기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또 성을 공격하는 목적은 죄 있는 자를 토벌하기 위함인데, 지금 이미 신하로서 복종하였으니, 성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천부적인 예지(睿智)로 만물을 밝게 살피시니, 소방의 진정(眞情)과 실상에 대하여 반드시 남김없이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화친을 배척한 제신(諸臣)의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방은 으레 대간(臺諫)을 두어 쟁논(諍論)하는 직무를 주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행동은 실로 그릇되고 망령되기 짝이 없었으니, 소방의 생령으로 하여금 도탄에 허덕이게 한 것은 이 무리들의 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가을 무렵에 이미 근거 없는 논의로 일을 그르친 자를 적발하여 모두 배척해서 내쫓았습니다. 지금 황제의 명을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마는, 지금 이 무리들의 본정(本情)을 생각해 보면, 식견이 좁고 어두워 천명(天命)이 있는 곳을 모르고 마음속으로 옛날의 습관만 융통성 없이 지키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데 불과합니다. 이제 폐하께서 바야흐로 군신의 대의로 한 세대를 감화시킨다면, 이와 같은 무리도 당연히 불쌍히 여겨 용서하는 가운데 포함시켜야 될 듯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 하늘과 같은 도량으로 이미 국군(國君)의 죄를 용서해 주신 이상, 보잘것없는 이들 소신(小臣)을 곧바로 소방의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도록 회부해 주신다면, 관대한 덕이 더욱 나타날 것이기에 아울러 어리석은 견해를 진달하며 폐하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숭덕(崇德) 모년 월 일."
도승지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신하들이 불충하여 끝내 망극한 치욕을 군상(君上)의 몸에 미치게 하였습니다. 흉적에게 핍박당해 이렇듯 부득이한 조치를 취한 일을 종친과 문무 백관을 모아 고유(告諭)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질지 못해서 끝내 이렇게 되었는데, 무슨 낯으로 신료를 대하여 알리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이는 모두가 제신(諸臣)의 죄인데, 어찌 성상의 잘못이겠습니까?"
하였다.
이홍주(李弘胄) 등이 국서를 전하고 온 뒤에 인견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난번의 글에 두 건의 일이 있었는데 듣고 싶다.’ 하기에 신이 먼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일을 대답하고, 성에서 나오는 한 건은 국서 내용을 해석하여 말했더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황제가 심양(瀋陽)에 있다면 문서(文書)만 보내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나왔으니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기필코 유인하여 성에서 나오게 하려는 것은 잡아서 북쪽으로 데려 가려는 계책이다. 경들은 대답을 우물쭈물하지 않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준엄한 말로 끊었습니다."
하였다.
저녁 때에 용골대가 서문 밖에 와서 급히 사신을 청했다. 상이 대신 이하를 명하여 인견하고, 분부하기를,
"성에서 나가는 한 건은 다시 응답하지도 말도록 하라."
하니,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필경 따르기 어려운 일을 어찌 섣불리 대답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는 성질이 본래 유약하니, 저들이 혹시라도 화를 내면 틀림없이 좋은 말로 해명할 것인데, 이렇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혹시 등급을 낮추는 말을 꺼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하였는데, 등급을 낮춘다는 것은 세자(世子)가 성에서 나오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홍주가 아뢰기를,
"세자는 상제(祥制)도 아직 마치지 못했으니, 병이 중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상 이하가 나가니, 용골대가 국서를 되돌려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답한 것은 황제의 글 내용과 틀리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1월 22일 임술
사간 이명웅(李命雄)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적이 위협하는 것은 단지 두 가지일 뿐인데, 신도 화친을 배척한 사람입니다. 만에 하나 포위를 푸는 데 보탬이 된다면, 신자(臣子)의 직분과 의리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니, 먼저 나가서 그들의 뜻을 막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령 포위를 푼다 하더라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절대로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김수현(金壽賢)·황일호(黃一皓)·임담(林墰) 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이라고 일컬은 뒤에도 포위를 풀고 떠나지 않으니, 이제 대신의 글을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보내어 ‘군상은 뜻을 굽혀서 억지로 따르려고 하지만 부형과 백관은 모두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장차 먼저 노약자를 죽이고 다음은 꼴과 양식을 태워버리고 날랜 장정을 뽑아 한 번 결사전을 벌이려 한다. 남한 산성 하나야 완전히 망한다 하더라도, 조선 사람들이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아우는 형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갚을 것이니, 부질없이 만대(萬代)의 원한만 맺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말하여 저들이 응답하는 것을 살펴 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도 이런 의논이 있었다마는, 본래 그렇게도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노여움만 더하게 될 것이니, 무익할 듯하다."
하였다.
김류·이성구(李聖求)·최명길이 입대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다시 문서를 작성하여 회답해야겠습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의 의논이 당시에는 정론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그르친 죄를 피할 길이 없으니, 그들이 나가기를 자청한다면 좋겠습니다. 홍익한(洪翼漢)은 현재 평양(平壤)에 있는데, 저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처치를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은 홍익한과 한 집안입니다. 그러나 연(燕)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자 태자 단(丹)의 목을 베어 보냈으며,011) 송조(宋朝)에도 한탁주(韓侂胄)의 일012) 이 있었습니다. 만약 상의 명령이 있으면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겠습니까."
하고, 이홍주가 아뢰기를,
"지금 만약 묶어 보내어 저들이 즉시 포위를 푼다면 그런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들이 꼭 포위를 푼다는 보장이 없는데 묶어서 보내는 일을 어떻게 차마 하겠습니까."
하고, 이성구가 아뢰기를,
"이런 일은 아래에서 강정할 일입니다. 중한 군부(君父)의 입장에서 그런 것을 어떻게 돌아보겠습니까. 홍익한의 죄는 경연광(景延廣)의 죄013) 보다도 크니 저들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이 일은 아래에서 해야 하니, 어찌 품지(稟旨)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너무나 참혹한 일이다. 날씨가 매우 추우니 우선 물러가서 쉬도록 하라."
하였다.
삼사가 청대(請對)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부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자수(自首)하도록 하였다.
세자가 봉서(封書)를 비국에 내렸다.
"태산(泰山)이 이미 새알[鳥卵]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의 운명을 누가 경돌[磬石]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구구하게 차자를 진달한 뜻은 실로 최명길이 신(臣)이라고 일컫는 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그 계책이 행해지고 말았습니다. 신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죽음으로 간쟁하지 못했으니 신의 죄가 크기만 한데, 군주가 이토록까지 치욕을 당했으니, 신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머뭇거리고 은인자중하며 자결(自決)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다행히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니, 어떻게 신이 앞질러 죽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저 오랑캐가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매우 급히 찾는다고 합니다. 신이 그들의 사신을 베고 국서를 태우도록 앞장 서서 청한 사람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일은 신이 실제로 하였습니다. 신이 죽어서 조금이라도 존망(存亡)의 계책에 도움이 된다면 신이 어찌 감히 자신을 아끼고 군부를 위하여 죽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오랑캐의 요구를 신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지 않았다.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014) 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적이 성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중관(中官)이 원손(元孫)을 업고 나가 피했으며, 성에 있던 조사(朝士)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出擊)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얼마 뒤에 대병(大兵)이 성을 포위하였다. 노왕(虜王)이 사람을 보내어 성 밑에서 소리치기를,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쉽지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조명(詔命) 때문이다. 황제가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급히 관원을 보내 와서 듣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군이 한흥일(韓興一)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말은 믿을 수 없으나 화친하는 일은 이미 들었다. 시험삼아 가서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즉시 말을 달려 진소(陣所)로 가니,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와야만 한다."
하였으므로, 대군이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에게 가도록 하였다. 견여(肩輿)로 진중(陣中)에 들어가 늙고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음을 핑계대고 예모를 갖추지 않으니, 좌우에서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으나 노왕(虜王)이 중지하게 하였다. 이어 조정이 화친을 이룬 일을 말하고 대군과 서로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돌아와서 보고하니, 대군이 이르기를,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듣건대 동궁(東宮)께서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문(陣門)으로 갔다. 그러자 노왕(虜王)이 역자(譯者)로 하여금 인도해 들이게 하고 경례(敬禮)를 하였다. 저물녘에 대군이 노왕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갔는데, 군사들은 성 밖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동서(東西)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하게 하였으며, 제진(諸陣)으로 하여금 사로잡힌 사녀(士女)를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대군에게 행재소(行在所)에 글을 올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치계(馳啓)하도록 청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 역자(譯者)가 돌아와 말하기를 ‘국왕이 장차 황제를 만나 보고 인하여 도성(都城)으로 돌아갈 것이니, 대군과 궁빈(宮嬪) 그리고 여러 재신(宰臣)도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출발할 즈음에 국구(國舅)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자손으로서 궁내(宮內)에 피신해 있다가 자결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이튿날 노왕이 도로 강을 건너갔는데, 몽병(蒙兵)이 난을 일으켜 거의 남김없이 불지르고 파헤치며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도제조 윤방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성중(城中)에 뒤떨어져 머물면서 묘(廟) 아래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몽병(蒙兵)이 파헤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신주(神主)를 잃어버렸다.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인하여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이고 호는 선원(仙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묘(宣廟)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해야 할 일을 만나면 임금이 싫어해도 극언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박두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이 반정(反正)함에 이르러 더욱 중하게 은총을 받아 지위가 정축(鼎軸)015) 에 이르렀지만,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국가가 위망에 처하자 먼저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강도의 인사들이 그의 충렬(忠烈)에 감복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은 젊었을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번 종반(從班)을 역임하였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던 날, 미처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뒤따라 강도에 들어갔다가 김상용을 따라 남문루(南門樓)의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뒤에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생원 김익겸(金益兼)은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재명(才名)이 있었다. 어미를 모시고 강도에 피난 중 적이 이르자 남문루에서 김상용을 따랐다. 그의 어미가 장차 자결하려고 불러다 서로 이별하자 익겸이 울면서 ‘내가 어찌 차마 어미가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고, 마침내 떠나지 않고 함께 타죽었다.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은 참판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다. 김익겸과 함께 남문루에 갔는데, 김상용이 장차 스스로 불에 타죽으려 하면서 그들에게 피해 떠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함께 죽었다. 뒤에 모두 관직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은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로 본래 조행(操行)이 있었으며 충효를 스스로 힘썼다. 강도가 함락되자 먼저 스스로 염습(斂襲)할 기구를 마련해 놓은 뒤 신기(神氣)를 편안히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후손으로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했으며 공평하고 정직하였다. 적이 성에 들어오자 송시영(宋時榮)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인(古人)의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시영이 먼저 죽자 스스로 가서 초빈한 뒤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그 중 하나를 비워두고 말하기를,
"나를 묻어라."
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그의 아들 이경(李憬)에게 부치기를,
"장강(長江)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 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 아, 내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구구하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네가 나의 뜻을 잘 잇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심현(沈誢)은 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뜻을 맹세하였다. 적의 공격을 받던 날, 그의 가족이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피하도록 청하니, 듣지 않고 직접 유소(遺疏)를 쓰기를,
"뜻하지 않게 흉적이 오늘 갑진(甲津)을 건넜으니, 종사(宗社)가 이미 망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부인(夫人) 송성(宋姓)과 함께 진강(鎭江)에서 죽어 맹세코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하고, 드디어 관대(冠帶)를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처도 손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함께 죽었다. 상이 유소를 보고 이르기를,
"국가가 심현에게 별로 은택을 내려 준 일이 없는데, 난리에 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기를 중신(重臣)들보다 먼저 했으니 대현(大賢)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그의 처 송씨가 함께 죽은 절개 또한 매우 가상하다. 해조로 하여금 함께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여 그 충렬(忠烈)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전 사헌부 장령 정백형(鄭百亨)은 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인데, 그의 고조(高祖) 이하 4세(世)가 모두 절의(節義)와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정효성이 연로한데다 병까지 위독하여 강도에 피난하였는데, 적이 성에 침입하자 정백형이 그의 아비를 돌보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게 노략질하자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조복(朝服)을 갖추고 남한 산성을 바라보며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두 첩도 함께 죽었다.
전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시골 집에 있었는데, 적병이 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성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상길은 선조(先朝)의 기구(耆舊)로서 양사의 장관을 역임하였고, 뒤에 나이 80이 넘었다 하여 초자(超資)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예조가 정표(旌表)하도록 계청하였다.
충의(忠義) 민성(閔垶)은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의 아들이다. 강도가 함락되던 날, 먼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벤 뒤 자살하였다. 기타 유사(儒士)와 부녀(婦女)로서 변란을 듣고 자결한 자와 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1월 23일 계해
예조 판서 김상헌이 관을 벗고 대궐 문 밖에서 짚을 깔고 엎드려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세자가 인마(人馬)를 정돈하여 오랑캐 진영에 나가게 하도록 하라고 급히 영을 내리니, 묘당이 회달(回達)하였다.
"신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일이기에 감히 영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수원(水原)의 장관(將官)들이 정원(政院) 문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내보내도록 청하였다.
밤중에 적이 서성(西城)에 육박하였는데,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힘을 다해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적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갔다. 조금 뒤에 또 동성(東城)을 습격하였다가 패배하여 도망하였다.
도체부(都體府)가 아뢰기를,
"군사들이 추위에 몸이 얼어 상당히 원망하며 괴로워하는 말이 있으니, 일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특별히 무과(武科)를 베풀어 위로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채유후(蔡𥙿後), 사간 이명웅(李命雄), 장령 황일호(黃一皓)·이후원(李厚源), 지평 임담(林墰), 헌납 김경여(金慶餘), 정언 김중일(金重鎰)·이시우(李時雨) 등이 세자가 장차 오랑캐 진영으로 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와서 아뢰기를,
"듣건대 왕세자가 망극한 심정으로 궁관(宮官)과 사부(師傅), 제신(諸臣)에게 하령(下令)하였다고 하는데, 신들이 듣고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세자의 지정(至情)에서 발로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차마 듣지 못할 영을 내린단 말입니까. 옛날부터 국가가 망할 때에 이와 같은 행동으로 위급함을 구제하여 온전함을 얻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성에 가득한 신민으로 누가 세자를 위하여 죽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어떻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교활한 오랑캐가 갖가지로 속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신이 왕래하면서 설령 뜻 밖의 말이 있다 하더라도 사신이 명백하고 통렬하게 배척하며 죽음으로 항거하지 못할 경우에는, 임금을 업신여긴 율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사과(副司果)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자신이 아비016) 를 대신하여 성에서 나가 그의 목숨으로 속(贖) 바치기를 청하는 한편, 그 역시 일찍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사신을 보내는 것의 부당함을 논한 이상 실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이니 오랑캐 진영에 가기를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전 교리 윤집(尹集), 전 수찬 오달제(吳達濟)가 상소하였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묘당이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수(自首)하고 가게 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군부의 위급함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조정에 있는 어느 제신(諸臣)인들 감히 나가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지난해 가을과 겨울에 상소를 올려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였으니 이는 바로 더욱 드러나게 화친을 배척한 것입니다. 오랑캐 진영에 가 한 번 칼날을 받음으로써 교활한 오랑캐의 한 건의 요청을 막도록 하소서. 다만 듣건대 묘당의 의논이 신들로 하여금 짐승들에게 사죄시키려 한다고 하니, 묘당의 뜻 역시 슬프기만 합니다. 신들에게 이미 사죄할 것이 없고 또 명을 받든 신하도 아닌데, 어떻게 노적(虜賊)과 수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부호군 윤황(尹煌)이 상소하였다.
"신이 일찍이 간원의 장관으로 있으면서 망령되게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진달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야 합니다.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하소서."
우윤(右尹) 김대덕(金大德)이 상소하여 간신(諫臣)을 결박하여 보내는 의논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 보고 모두 자세히 알았다. 묘당의 일이 놀랍기 짝이 없기에 이미 그 잘못을 책망하였다."
우상 이하가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갔는데, 용골대와 마부대 두 오랑캐가 멀리 황제가 진소(陣所)에 있다고 핑계대고 받지 않았다. 그 글에,
"조선 국왕 신 모(某)는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소방은 해외의 약소국으로서 중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 오직 강대한 나라에 대하여 신하로서 복종하였으니, 고려(高麗) 때 요(遼)·금(金)·원(元)나라를 섬긴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하늘의 돌보심을 받아 큰 운세를 여시었는데, 소방은 영토가 서로 잇닿아 복종하며 섬겨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먼저 귀순하여 제국(諸國)의 앞장을 섰어야 본디 마땅한데, 지금까지 머뭇거렸던 까닭은 대대로 명(明)나라를 섬겨 명분(名分)이 본래 정해졌기 때문이니, 신하로서의 절의를 갑자기 변경시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 또한 인정과 예의로 볼 때 당연한 행동의 발로였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사리에 어두워 망령되이 일을 처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난 해 봄 이후부터 대국은 한결같은 정의(情意)로 소방을 대해 온 데 반해 소방이 대국에 죄를 얻은 것은 한두 번만이 아니었으니, 대군이 오게 된 것은 실로 자신이 불러들인 결과입니다. 그래서 군신 상하가 두려움 속에서 날을 보내며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하늘과 같은 성덕(聖德)으로 불쌍하게 굽어 살펴주시며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달 17일 황지(皇旨)에 이르기를 ‘그대 나라가 모두 나의 판도에 들어온다면 짐이 어찌 살려서 길러주고 안전하게 해 주기를 적자(赤子)처럼 하지 않겠는가.’ 하셨으며, 20 일의 황지에는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스스로 새롭게 하기를 허락한다.’ 하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로운 말씀이 한번 펼쳐지자 만물이 모두 봄을 만난 듯하니, 참으로 이른바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고 뼈에 살을 붙여준 격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동방 백성들이 자손 대대로 모두 폐하의 공덕을 칭송할 것인데, 더구나 직접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은 신의 경우이겠습니까. 이제 신하라고 일컬으며 표문(表文)을 받들고 번방(藩邦)이 되어 대대로 대조(大朝)를 섬기고 싶어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이 이미 몸을 폐하에게 맡긴 이상 폐하의 명에 대해서는 진실로 분주하게 받드느라 겨를이 없어야 당연한데, 감히 성에서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신의 실정과 형세가 참으로 지난번에 진달드린 바와 같기 때문이니, 이 한 조목에 있어서만은 신에게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늘은 반드시 따라준다.’고 하셨습니다. 폐하는 바로 신의 하늘입니다. 어찌 굽어 살펴 받아들여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이미 죄를 용서하여 신하되는 것을 허락하셨고, 신이 이미 신하의 예로 폐하를 섬기게 된 이상, 성을 나가느냐의 여부는 소절(小節)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큰 것은 허락하시면서 작은 것은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따라서 신의 소망은 천병(天兵)이 퇴군하는 날을 기다려 성 안에서 직접 은혜스런 조칙에 절을 하고 단(壇)을 설치하여 망배(望拜)하면서 승여(乘輿)를 전송하고, 즉시 대신을 사은사(謝恩使)로 차출해서 성심으로 감동하고 기뻐하는 소방의 심정을 나타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대(事大)하는 예를 상식(常式)으로 삼아 영원히 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성심껏 폐하를 섬기고 폐하께서도 예의로 소방을 대하시어 군신 사이에 각기 그 도리를 다함으로써 생령(生靈)의 화(禍)를 풀어주고 후세의 칭송을 받게 된다면, 오늘날 소방이 병화를 입은 것이야말로 자손들에게 한없이 아름다운 경사가 될 것입니다.
화친을 배척한 제신(諸臣)에 대해서는 지난번 글에서 또한 이미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대저 이 무리들이 감히 그릇되고 망령된 말을 하여 두 나라의 대계(大計)를 무너뜨렸으니, 이는 폐하가 미워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실로 소방의 군신(君臣)이 공통으로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주벌(誅罰)하는 데 대해서 어찌 조금이라도 돌아보고 아깝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지난 해 봄 초에 앞장서서 주장한 대간 홍익한(洪翼漢)은 대군이 우리 국경에 이르렀을 때 그를 배척하여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임명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군대의 예봉을 스스로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군사들 앞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본토(本土)의 반사(班師)하는 길목에 있을 것이니 그를 체포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타 배척을 당하여 지방에 있는 자 또한 길이 뚫린 뒤에는 그 거처를 심문하여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을 따라 성 안에 있는 자는 혹 부화뇌동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죄는 저들에 비하여 조금 가볍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폐하가 소방의 사정과 상황을 살피지 못하신 나머지 신이 그들을 감싸준다고 의심하실 경우 지성으로 귀순하는 신의 마음을 장차 자백(自白)할 수 없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미 조정으로 하여금 세밀히 조사하고 심문하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조사가 끝나는 대로 진소(陣所)에 내보내어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는데, 최명길이 지은 것이었다.
시강원 설서 유계(兪棨)가 상소하였다.
"신이 지난밤에 삼가 듣건대, 묘당의 신하들이 성상께 여쭈지도 않고 마음대로 양전(兩銓)에 분부하여 각사(各司)에 통지해서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명단을 기록하게 한 뒤, 장차 그들을 오랑캐 진영에 잡아 보내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지극히 분하고 놀라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는데, 송(宋)나라 변경(汴京)에서도 없었던 일을 바로 오늘날에 보게 될줄이야 일찍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외간에서 전해지는 말을 삼가 듣건대, 이 무리들이 오래도록 불측한 마음을 품고 한 시대의 명류(名流)를 반드시 제거하려고 했는데, 그 뜻을 이룰 길이 없자 겉으로 교활한 오랑캐의 말을 빌려 살육하는 빌미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온 성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다만 이 무리들의 기세에 위축된 나머지 감히 성상에게 진언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그 사실을 듣고 믿지 않았는데 이번 일을 겪고 나서는 과연 징험하였습니다.
아, 전하께서 계해년 반정(反正) 초기에 광해군(光海君)의 죄를 낱낱이 거론할 때에, 오랑캐와 서로 통한 것이 실로 그 중 하나를 차지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나라를 세우게 된 근본이라 할 것입니다. 저 화친을 배척한 인사들이 또한 어찌 자신을 위하여 계책한 것이겠습니까. 단지 천지의 떳떳한 법도를 알아 바꿀 수 없는 대의를 붙들어 세우려고 한 것일 뿐인데, 무슨 나라를 그르친 죄가 있겠습니까. 설령 조정이 그 말을 모두 적용한 결과로 전쟁을 야기시켰다 하더라도, 고금 천하 어디에 자신의 지체(肢體)를 잘라 이리와 호랑이에게 먹이로 주면서 ‘저가 앞으로 나를 아껴 깨물지 않을 것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 좌상 홍서봉(洪瑞鳳)이 오랑캐 진영에서 돌아와 감히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분주하게 와서 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들 무리 8, 9명이 같은 소리로 서로 호응하고 행동을 같이 하며 입대해서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태도를 보이면서 실제로 속으로는 임금을 버리고 자신을 안전하게 보전할 계책을 품고서 반드시 저군(儲君)017) 을 협박하여 호랑이의 입에다 던져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여 칼을 품고 노려보면서 다투어 그들의 배에 칼을 꽂으려 하자, 이 무리들도 스스로 저지른 죄가 막중하여 천하에 용납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약 속히 당초의 계획을 진척시켜 오랑캐의 세력을 끼고서 조정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몸도 보전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갖가지로 시간을 끌면서 사기(事機)를 저지시키고 그르치게 하였는데, 적의 형세가 약화되고 전사(戰士)들이 적개심으로 충만될 때에는 혹 날짜가 불길하다거나 바람이 순조롭지 않다고 핑계대는가 하면, 장차 군사를 내보려고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경우가 혹 하루에 두세 차례나 있게 하는 등 시일을 지체시키고 날짜를 끌어 사기가 꺾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의 원병이 크게 이른 뒤에는 허세를 부리며 을러대고 공갈하여 성상의 마음을 동요시킴으로써 조종(祖宗)의 수백 년 종사(宗社)를 마침내 짐승 같은 오랑캐의 번국(蕃國)이 되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겹겹의 포위는 풀리지 않고 오랑캐는 불만족스럽게 여겨 기필코 우리 임금과 세자에게 푸른 옷을 입혀 종으로 삼으려 하니, 신하된 자로서 또한 어떻게 차마 입을 열고 말하며 다시 이 적과 서로 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무리들은 도리어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한 시대의 명류(名流)를 모두 제거시킴으로써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게 한 연후에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를 팔아 자신을 온전하게 하여 혼자 왕시옹(王時雍)이나 범경(范瓊)처럼 이득을 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감히 떳떳치 못한 해괴한 행동을 하면서도 오히려 성상께서 마음 속으로 차마 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궁문(宮門)을 지척에 두고도 상께 여쭈지 않고 마음대로 분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강제로 문안(文案)을 작성케 한 뒤 성에서 나가 사죄한다고 일컬으며 잡아보내는 흔적을 숨기려고 한 것인데, 실제로는 사류(士流)를 해치려고 한 것입니다.
아, 그들의 계교가 교활하고도 참혹한데 어떻게 그런 줄을 알겠습니까. 오랑캐의 글에는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약을 무너뜨린 자를 말하였는데 이 무리들은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자를 섞어서 거론하였으며, 오랑캐의 글에는 두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이 무리들은 그 수효를 정하지 않고 꼭 그들이 미워하는 자를 모두 섬멸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지난날의 사사로운 유감을 보복하고 한편으로는 훗날의 언로(言路)를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 몇 가지만 가지고 살피더라도 그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환히 알 수 있는데, 신은 아마도 한 시대의 명류가 모두 죽은 뒤에는 이 무리들의 마음에 못할 짓이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신이 감히 성상의 뜻을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잡아 보내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당초 이 무리들은 말하기를 ‘만약 왕자와 대신을 보내면 화친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미 보낸 뒤에는 곧 이어 세자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또 말하기를 ‘신하라고 일컬으면 포위를 풀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신이라고 일컬은 뒤에는 또 성에서 나오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이것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교활한 오랑캐의 욕심이 끝이 없어 갈수록 요구 조건이 더 심각해지기만 하니, 신은 백마역(白馬驛)의 화(禍)처럼 사류를 일망타진하는 것이 왕과 대신이 끌려간 청성(靑城)의 치욕을 완화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삼군(三軍)을 지휘하는 원수(元帥)는 꺾을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선비에게는 진실로 몸이 가루가 되어도 본래의 마음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아무리 왜곡되게 사죄하는 명목을 붙여 축출하는 계교를 이룬다 하더라도 화친을 배척한 인사들의 입장에서는 당초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 죄가 있겠습니까. 그저 흉측한 무리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에 불과하여 전하의 처지에서 군신(君臣) 간의 대의를 끊는 결과가 되어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모두 배반하여 흩어질 것을 생각하게 할 뿐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차마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설혹 이렇게 해서 겹겹의 포위가 풀린다 하더라도 국가의 명맥(命脈)은 이미 끊어졌으니, 결코 얼마 동안이라도 연장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함께 망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필이면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을 하여 천하 후세에 비웃음을 남긴 뒤에야 그만두려 하십니까.
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구하고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진실로 이 무리들을 베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끝내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에서 나가기도 전에 먼저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있을 듯싶습니다. 신이 근일에 이 무리들의 정상을 익숙히 보고 통분스러운 마음이 골수에 사무쳐 한마디 하려고 생각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무리들이 바야흐로 국사를 맡고 있어 말해도 무익할 뿐 분란만 초래할까 참으로 염려되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은인자중하며 감히 발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이미 끝장이 나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에 한번 죽을 계획을 결심하고 어리석은 심정을 모두 진달하니, 전하께서 혹시라도 신이 무고하는 말을 한다고 여겨지시거든 먼저 신의 머리를 베어 간교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신은 차라리 송(宋)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죽을지언정 차마 이 무리들과 함께 천지 사이에 서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드릴 말씀이 한 가지 있는데, 신이 죽게 된 때를 당하여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창업하거나 중흥한 제왕치고 죽음 가운데에서 살기를 구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 번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한 번 살 수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간신들이 자신을 안전하게 하는 계책을 곧이 듣고서 늘 죽을 사(死) 자를 한 쪽에 비켜둔 채 감히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단지 애처로운 사연과 괴로운 말로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요행히 모면하는 훌륭한 계책을 삼으면서 힘없이 구차스럽게 행동하여 오늘날처럼 극도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만전(萬全)을 기하는 계책은 실로 만위(萬危)의 방법 속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 마음을 굳게 정하여 흥망과 성패에 동요됨이 없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계책과 힘이 다하여 장차 망할 운명에 이르면 온 성 안의 무리를 네 문으로 나누어 내보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길을 떠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들과 뒤섞여 형양(滎陽)에서 한 고조(漢高祖)가 했던 일이나 계성(薊城)에서 광무제(光武帝)가 했던 것처럼 말을 달려 탈출하셔야 합니다. 하늘이 만약 순조롭게 도와주어 국가의 운명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흥복(興復)시킬 기약을 그래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설혹 불행하게 된다 하더라도 온 족속이 북쪽으로 끌려 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데, 그야말로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1월 24일 갑자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적이 서문(西門) 밖에 와서 사신을 보내라고 독촉하였다. 사신 이홍주(李弘胄)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대사헌 김수현(金壽賢), 부제학 이경석(李景奭), 집의 채유후(蔡𥙿後), 정언 이시우(李時雨)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교활한 오랑캐가 갖가지로 속임수를 쓰면서 갈수록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지금 아무리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보낸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그만두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군부의 화를 구원할 수만 있다면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필시 자진하여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박하여 보내는 일을 어찌 조정이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난을 해소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먼저 그 수족(手足)을 스스로 자른다면 망하는 것을 재촉하는 결과만 될 뿐이니,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습니까. 더구나 당초 오랑캐에게 답할 때 이미 배척하여 쫓아냈다고 말했고 보면, 오늘날 그들보다 조금 가벼운 자들을 조사하여 보내겠다는 말은 앞뒤가 틀릴 뿐만 아니라, 오랑캐가 요구한 것은 주모자인데 그들보다 가벼운 자들까지 아울러 거론하는 것은 아, 또한 참혹합니다.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그 의논을 개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5일 을축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덕형(李德泂)·최명길(崔鳴吉)·이성구(李聖求) 등이 가서 그들을 보니,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인데,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거든 사신은 절대로 다시 오지 말라."
하고, 이어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되돌려 주었으므로 최명길이 이야기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1월 26일 병인
훈련 도감의 장졸 및 어영청의 군병이 성 위에서 서로 인솔하여 와서 대궐문 밖에 모여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 진영에 보낼 것을 청하였다. 당시 신경진(申景禛)이 훈련 도감의 군병을 거느리고 동성(東城)을 지켰으며, 구굉(具宏)은 남성(南城)을 지켰고, 구인후(具仁垕)는 수원 부사(水原府使)로서 남문(南門)을 지켰는데, 홍진도(洪振道)와 은밀히 모의하고 군졸들을 교유(敎誘)하여 이렇게 협박하는 변고를 일으켰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기면서 두려워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기를,
"군정(軍情)이 어떠한가?"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군정이 이미 동요되어 물러가도록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습니다. 저들은 부모와 처자가 모두 살육당했으므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보기를 원수처럼 여겨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진정시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직 그 뜻을 따르도록 힘쓰는 것이 마땅하니, 오늘 의논해서 결정하여 내일 내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태가 이미 위급해졌다. 세자가 자진하여 나가려고 하니, 오늘 사람을 보내 말하도록 하라."
하니, 대신이 모두 아뢰기를,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군병들이 중로(中路)에서 배회하며 아직도 물러나지 않고 있는데, 신은 변고가 목전에 닥칠까 염려됩니다. 이것은 대신이 처리할 일이니, 어찌 상의 분부를 기다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성을 보전하지 못하면 역시 화를 벗어나기 어려우니 함께 죽을 뿐이다. 세자가 성에서 나갈 것이라고 한 번 말해 보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옳습니다. 이것을 말하여 굳은 약속을 받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태가 매우 급박하니 신이 나갔으면 합니다."
하니, 김류가 안 된다고 하였는데,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금이 진실로 어떤 때인데 형식적으로 하겠습니까?"
하자, 김류가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세자가 나온다는 뜻을 알리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
하고, 인하여 윤방·한흥일의 장계와 대군(大君)의 수서(手書)를 전해 주었다. 이에 처음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이 홍서봉 등을 인견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청나라사람들이 매번 강도를 공격하겠다고 하더니, 지금 정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천하 만고에 어찌 이와 같은 화란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방의 장계를 내어 보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빈궁(嬪宮) 이하에 대해서 매우 극진하게 예우하는데, 재상의 가속들도 많이 거느리고 왔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큰 강으로 가로막힌 천연의 요새가 있다 하더라도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승지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신이 강도의 장계를 보건대 네 사람의 서명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혹시 필적을 모방해서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하니, 윤구로 하여금 윤방의 서명을 살펴보도록 명하였으나, 윤구 역시 자세히 분변하지 못하였다.
대신 및 최명길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강도의 장계는 위조한 것인 듯싶은데, 대군의 사서(私書)는 믿을 만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의 서찰은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으며, 편지 내용 중에도 다른 말은 별로 없고 화친하는 일로 만나 보러 나간다고 하였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장계 가운데 김경징(金慶徵)·이민구(李敏求)의 이름이 없는데, 추측하건대 이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른 곳에 있거나 아니면 혹시 전사해서 그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외지에 도망하여 피했기 때문에 장계 가운데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늘 청원한 것은 화(禍)를 늦출 만한 것이었는데도 저들이 또 거절했으니, 장차 무슨 계책을 내겠는가."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외로운 성의 형세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 저들이 또 새로 강도까지 얻었으니 지금 한창 뜻이 교만할 때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머뭇거린다면 헤아릴 수 없는 화가 필시 닥칠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조종하는 권한이 그들 손아귀에 쥐어 있으나, 변고에 대처하는 방법은 의당 우리 쪽에서 먼저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반드시 상께서 마음속으로 결단한 뒤에야 할 수 있는데, 신자(臣子)의 입장에서는 차마 우러러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일찍 결단하시면 그래도 만에 하나 희망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세가 이미 막다른 길까지 왔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제궁(諸宮)을 거느리고 인질로 삼고 있으니, 나 또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하자, 모두 아뢰기를,
"저들의 문서나 언어는 모두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에서 나가면 보존되고 위태로운 확률이 반반이지만 나가지 않을 경우에는 열이면 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성상의 뜻이 정해질 경우, 이로 인해 회복의 기틀이 마련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前朝)때에도 나가 만났다고 한다. 사세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고사(故事)는 있었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내일 결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국서를 만들어 약속을 정한 뒤에 하시겠습니까? 응당 표문(表文)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표문을 만들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삼사가 청대하여 통곡하며 아뢰기를,
"내일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하신다니, 사람이 생긴 이래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 보아도 짐승 같은 나라에게 나가 항복하여 화를 면한 자가 몇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성 안의 식량도 수십 일을 버티기에 충분한데, 내일 성을 나가신다니 이것이 무슨 계책입니까. 더구나 교활한 오랑캐의 흉모는 헤아릴 수 없으니, 한번 나간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처음 생각에 이런 일은 결코 따를 수 없고 오직 성을 등지고서 한 바탕 싸워 사직과 함께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정(軍情)이 이미 변했고 사태도 크게 달라졌다. 밤낮으로 기대했던 것은 그래도 강도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자부(子婦)들이 모두 잡혔을 뿐만 아니라 백관의 족속들도 모두 결박당해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내가 혼자 산다고 하더라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다시 보겠는가."
하자, 제신(諸臣)이 통곡하며 나갔다.
1월 27일 정묘
부제학 이경석(李景奭), 집의 이명웅(李命雄)이 세자가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무(軍務)를 통제하고 국사를 감독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대신과 의논하여 정하겠다고 하였다.
이홍주·김신국·최명길을 보내 글을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다. 그 글에,
"조선 국왕 신 성휘(姓諱)는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달 20 일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절실히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고, 그대가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대의 나라를 회복시켜줌으로써 회군한 뒤에 천하에 인애와 신의를 보이려고 함이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면 천하가 크기도 한데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 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 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하였는데, 마부대가 글을 받고 말하기를,
"황제에게 품하여 날짜를 정해서 통보하겠다."
하였다.
1월 28일 무진
예조 판서 김상헌이 출사하지 않으므로 장유(張維)에게 대신하게 하였다.
대사헌 김수현(金壽賢)이 나이가 많아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성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으로 차자를 올려 해직(解職)을 청하니, 따랐다.
삼공(三公)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대가가 성에서 나간다면 세자가 응당 성중에 머물러 있어야 할텐데, 성을 나가거나 머물게 하는 권한이 저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으니, 저들이 만약 나오기를 청하면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혹시라도 함께 원한다면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 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 뿐만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사람이 많다고 해서 용서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용골대(龍骨大)가 한(汗)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보내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에 대한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는 것인가. 그러나 짐은 본래 나의 정성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니, 지난번의 말을 틀림없이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일 유신(維新)하게 하는 데에도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이 대대로 지킬 신의(信義)로 삼는 바이다.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明)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여, 혹 수만 명으로 하거나, 혹 기한과 모일 곳을 정하면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사로잡은 사람이니,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조칙으로 보이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녹피(鹿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하였다. 홍서봉(洪瑞鳳) 등이 나가서 칙서를 맞았는데, 용골대가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명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의 의례(儀例)는 어떠하였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칙서를 받든 자는 남쪽을 향하여 서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받았소이다."
하자, 여기서 의거하여 주고받은 뒤에,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요즈음 매우 추운데 수고스럽지 않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온전히 살려주신 덕택으로 노고를 면하게 되었소이다."
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삼전포(三田浦)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았는데, 황제가 서울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용포(龍袍)를 착용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
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남문(南門)으로 나와야 하겠지요?"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正門)을 통해 나올 수 없소."
하였다.
제사(諸司)의 문서를 거두어 모아 모두 태웠다. 문서 가운데 간혹 적(賊)이라고 호칭한 등의 말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이조 참판 정온이 입으로 한 편의 절구(絶句)를 읊기를,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과 같은데
외로운 성 깨뜨리니 군사들 기세 흉흉하네
늙은 신하만은 담소하며 듣고서
모사에다 견주어 조용하다고 하네
하고, 또 읊기를,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또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짓기를,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대가(大駕)를 따라가 항복하는 것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
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하고, 인하여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지 않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72면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역사-편사(編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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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지 않겠는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적과 금화(金化)에서 크게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처음에 홍명구가 적보(賊報)를 듣고 자모성(慈母城)에 들어가 지켰는데, 얼마 뒤에 오랑캐 기병(騎兵)이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의 별장 장훈(張壎) 등 2천 기(騎)를 보내어 들어가 구원하게 하였다. 그 뒤 거가(車駕)가 남한 산성에서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자신이 날랜 포병(砲兵) 3천 명을 조발(調發)하여 먼저 떠나는 한편, 납서(蠟書)로 병사(兵使) 유림(柳琳)에게 동행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유림이 뒤따라 오다가 강동(江東)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이 없다는 것을 핑계대고 군대의 행진을 저지시키려고 하자, 홍명구가 꾸짖기를,
"군부가 화란을 당했으니, 직분상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 더구나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와서 전투하게 함으로써 남한 산성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이다."
하고, 마침내 진격하니, 전로(前路)에 주둔한 적이 도망하였다. 금화(金化)에 이르러 적을 만나 수백 명을 베고 사로잡힌 사람과 가축을 빼앗았는데 몇십 몇백을 헤아렸다. 군사를 백전산(柏田山)으로 옮겼을 때 적의 연합군 1만 기(騎)가 침범해 왔다. 홍명구가 이들을 맞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두 명의 장수를 죽였는데 시체가 즐비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의 한 진(陣)이 산 뒤편을 돌아 나왔는데, 말을 버리고 언덕에 올라 모포로 몸을 감싸고 밀어부치며 일제히 옹위하여 진격해 오니 그 형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홍명구가 급히 유림을 부르며 서로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유림이 응하지 않고 도망하였으므로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많이 전사하였다. 이에 홍명구가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부인(符印)을 가져다 소리(小吏)에게 주며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
하고, 활을 당겨 적을 사살하였는데, 몸에 세 개의 화살을 맞자 스스로 뽑아버리고 칼을 빼어 치고 찌르다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그 일이 알려지자 상이 울면서 이르기를,
"내가 평소 그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렇게 나라가 결딴난 때에 단지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또 상장(喪葬)의 비용을 관에서 마련하고, 그의 어미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며,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홍명구의 자(字)는 원로(元老)로 사람됨이 명민하고 강직했으며 문행(文行)과 기식(器識)이 후진(後進) 가운데 첫째로 꼽혔다. 이른 나이에 갑과(甲科)의 장원으로 발탁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그 뒤 관서 관찰사의 명을 받자 방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방략(方略)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매우 기의(機宜)에 합당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화란이 장차 박두하자 오직 한 번 죽는 것으로 스스로 맹세하였는데, 행재소(行在所)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전투하고 곧장 전진하면서 죽어도 후퇴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1월 29일 기사
최명길(崔鳴吉)·이영달(李英達)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보내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인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잡아 보내었다. 윤집 등이 하직 인사를 하자,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그대들의 식견이 얕다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도를 살펴 보면 본래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오열(嗚咽)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다시 이르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단지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시게 된 것을 망극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뜻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대들에게 부모와 처자가 있는가?"
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아들 셋이 있는데, 모두 남양(南陽)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부사(府使)가 적을 만나 몰락하였다고 하니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단지 70세 된 노모가 있고 아직 자녀는 없으며 임신 중인 아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혹하고 참혹하다."
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들은 떠나갑니다만, 전하께서 만약 세자와 함께 나가신다면 성 안이 무너져 흩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이점이 실로 염려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세자를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함께 나가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차 죽을 곳에 가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하는가. 그대들이 죄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성에서 나간 뒤에 국가의 존망 역시 단정할 수는 없다만, 만일 온전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와 처자는 마땅히 돌보아 주겠다. 모르겠다만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의 연세는 얼마이며, 그대들의 나이는 또 얼마인가?"
하였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어미의 나이는 무진생(戊辰生)이며 신의 나이는 무신생(戊申生)입니다."
하고,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단지 조모가 있는데 나이는 지금 77세입니다. 신의 나이는 정미생(丁未生)입니다."
하고, 드디어 절하고 하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앉아라."
하고,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술을 대접하게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사신이 벌써 문에 나와 재촉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와 같이 급박하게 제촉하는가."
하였다. 두 신하가 술을 다 마시고 아뢰기를,
"시간이 이미 늦었습니다. 하직하고 떠날까 합니다."
하니, 상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소중히 하도록 하라. 혹시라도 다행히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하자,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나아가니 조금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 날 새벽에 김류(金瑬)·이홍주(李弘胄)·최명길(崔鳴吉)이 청대(請對)하여 상이 침전(寢殿) 안에 들어갔는데, 승지와 사관은 문 밖에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이루어진 말을 기록할 수 없었다. 상이 이경직(李景稷)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오늘의 말은 원래 중대한 일과는 관계가 없으니, 사관이 책(策)에 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하였다. 국서(國書)에,
"소방에 일찍이 일종의 근거없는 논의가 있어 국사를 무너뜨리고 그르쳤기 때문에, 작년 가을에 신이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자 약간 명을 적발하여 모두 배척해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수창(首倡)한 대간 한 명은 천병(天兵)이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임명하고 그 날로 즉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촉하였는데, 혹 군사에게 잡혔는지 아니면 샛길로 부임하였는지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성 안에 있는 자는 혹 부화뇌동한 죄는 있다 하더라도 앞서 배척을 당한 자에 비교하면 경중이 현격히 다릅니다. 그러나 신이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게만 여긴다면 폐하께서 본국의 사정을 살피지 못하고 신이 숨겨주는 것으로 의심하시어 신의 진실한 마음을 장차 밝힐 수 없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조사해 내어 군전(軍前)에 보내면서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두 사람을 이끌고 청나라 진영에 나아가니, 한(汗)이 그들의 결박을 풀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최명길 등을 불러 자리를 내리고 크게 대접할 기구를 올리게 하면서 초구(貂裘) 1습(襲)을 각각 지급하게 하였다. 최명길 등이 이것을 입고 네 번 절하였다.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당시 대신이 세자를 따라 인질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홍주(李弘胄)가 연로했기 때문에 이성구로 대신한 것이다. 신경진(申景禛)을 병조 판서로, 한여직(韓汝溭)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월 30일 경오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렸다.
"신이 자결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전하의 오늘날의 일을 차마 볼 수 없어서인데, 실오라기 같은 잔명(殘命)이 3일 동안이나 그대로 붙어 있으니, 신은 실로 괴이하게 여겨집니다.
최명길이 이미 전하로 하여금 신이라 일컫게 하고 나가서 항복하게 하였으니,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신하라고 해서 임금에 대해 명령을 잘 받드는 것만으로 공손함을 삼을 것이 아니라 간쟁할 일이 있으면 간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명나라의 인(印)을 바치도록 요구해 오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간쟁하기를 ‘조종조로부터 이 인을 받아 사용한 지가 지금 3백 년이 되니, 이 인은 명나라에 도로 바쳐야지 청나라에는 바칠 수 없다.’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이 만약 명나라를 공격할 군사를 요구한다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간쟁하기를 ‘명나라와 부자(父子)와 같은 은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청나라도 알텐데, 자식을 시켜서 부모를 공격하게 하는 것은 윤리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는 공격하는 자에게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한 자 또한 옳지 않다.’고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이 아무리 흉악하고 교활하다 하더라도 또한 필시 양해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 두 가지를 간쟁하여 천하 후세에 죄를 얻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의 목숨이 거의 다하여 이미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할 수도 없고 또 길가에서 통곡하며 하직할 수도 없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을 체직하시어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018)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 형조 판서 심집(沈諿)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
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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