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0권, 인조 18년 1640년 3월

싸라리리 2026. 1. 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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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임오

이조 참판        이식(李植)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요즈음 백성들의 위태로운 상황은 정축년 난리에 손실을 당한 뒤보다도 더 심합니다. 그렇게 된 것이 해마다 가뭄의 재앙이 든 탓이기도 하지만, 실로 요역을 빈번하게 일으켜 철저하게 착취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듣건대, 요역을 일으키는 것 중에 세폐(歲幣)에 관한 것과 객사(客使)를 지공하는 등의 요역은 형세상 그만둘 수 없다고 합니다만, 탐악하고 잔학스런 관리를 높이 등용하고 큰 역사를 자주 일으켜서 재력이 고갈되게 하여 간악한 짓이 불어나게 한 것은, 오로지 묘당(廟堂)에서 주의(注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까.
남한 산성을 더 축조하는 것은 청나라의 의심을 산 데다가 지금 이미 불화가 생겨 헛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산(架山)의 역사에 온 도가 완전히 고갈되었는데, 이것으로 왜적을 방비하고자 한다면 왜병이 공격하는 앞에는 견고한 성이 쓸모가 없으며, 또 몰래 보내는 세세한 적들은 또한 깊이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오랑캐를 방비하고자 한다면, 오랑캐가 어찌 수천 리를 넘어와서 오로지 이 성만을 공격하겠습니까. 지금 또 변산(邊山)에다 역사를 일으켜 큰 항구를 만들어서 선척을 보관하려고 하는데, 1년 안에 항구가 반드시 진흙으로 메꾸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타 번잡스런 낭비도 많으며 육지와 연결시켜 바다를 방어한다는 것도 봉산(峯山)의 형세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역사에 동원하는 뜻을 신은 실로 모르겠습니다. 이 일은 묘당에서 논의를 주도하고 있으므로 일을 담당한 신하가 속히 완수하고자 하여, 이론(異論) 배척하기를 원수 대하듯이 해서입니다. 그러니 비록 이 일로 인하여 큰 화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누구를 통하여 듣겠습니까.
현재의 계책으로는 백성들을 안집시키는 것만한 일이 없고, 저축하는 것이 그 다음이며, 군정(軍政)을 변혁시키는 것이 또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일이 이미 급박하게 되어 군정은 곧바로 변혁시키기 어려운 일이니, 오로지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만 전화 위복이 될 것입니다. 오로지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안집시키는 것이 큰 규모(規模)가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가장 시행하기 어려운 선정(善政)을 가려서 시행하고, 가장 버리기 어려운 폐정을 가려서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위로는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속히 애통스럽게 여기는 교서를 내려 조처가 잘못되었음을 모두 말하고, 소원하게 버려두었던 과감히 말하는 선비들을 등용시켜 대각(臺閣)에 앉혀 탄핵을 받아들여서 탐학스런 관리를 모두 없애고, 천거하여 임용하는 길을 넓혀 청렴하고 근신한 관리를 등용하기를 힘써서 오로지 백성들을 안집시키는 데에 뜻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고통에서 풀려나 쉬는 것이 오로지 이 일에 달려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이에 앞서 걱정되는 바가 있습니다. 세자께서 멀리 이역에 있어서, 보도(輔導)와 보부(保傅)가 전에 비해 몹시 허술하며 모시고 책응하는 일에 있어서도 급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관소(館所)에 있는 재신(宰臣)은 단지 두 빈객(賓客)이 있을 뿐이니, 두 사람의 지위와 위세가 서로 대등하여 논의를 함에 있어서 서로 대립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빈객은 단지 한 사람만 보내고 다시 이사(貳師)의 관원을 두어 중신(重臣) 가운데서 뽑아 보내면 세자께서도 존경하여 의지할 바가 있게 되고 궁료(宮僚)들도 통섭되어 따를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화란(禍亂)의 발생이나 사기(事機)의 대응에 있어서도 역시 순하지 않겠습니까.
또 듣건대, 관소에 있는 신료들의 거처와 의복이 고생스러움은 먼 변방의 수졸(戍卒)들보다도 더 심하다고 합니다. 신과 같은 무리는 편안히 거처하고 맛진 음식을 먹고 있으므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몹시 가슴 아프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묘당의 신하들 역시 이미 들어갔는데, 눈으로 보고 입으로 전해오는 말들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지공하는 물품의 조목은 삭감하고 단속해서 중한 죄수를 대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상께서 신하들의 뜻을 체득하는 도리이며, 같은 조정에 있으면서 화란을 함께 하는 의리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별도로 비용을 만들어 물품을 더 보내 주고, 가인(家人)들이 짐바리를 더 보내는 것도 허락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간간이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여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몸이 축나 병이 드는 것을 면하여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안의 이른바 국출신(局出身)이라고 하는 자들이 무리를 끌어모아 작당하는데, 날이 갈수록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사대부를 구타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데 비록 그들의 장령(將領)이라 하더라도 봉욕을 면치 못합니다. 이자들은 호위(扈衛)에 수고한 자들로 본래 교만했던 병사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조처를 잘못함으로 인하여 별도의 이름을 붙이었고, 또 늠료(廩料)가 박하고 번을 서기가 고생스러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졸오(卒伍)와 같이 보므로 업(業)을 잃고 원망을 품어 점차 시끄럽게 된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속히 이 국(局)을 없애고 그들로 하여금 각자 본업(本業)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곧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장신(將臣)들은 그들의 재주를 이롭게 여겨서 전부 버려두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무리들을 호위 군관(扈衛軍官)에 소속시키되, 다른 군사의 예에 의하여 요미(料米)를 주고 번을 나누어 주어 이름과 등급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이 편한 대로 출입하게 한다면, 반드시 스스로를 아끼고 중하게 여겨 화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시행하기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도의 사냥하는 포수(砲手) 중에 군대에 소속되지 않은 자가 몹시 많습니다. 이 무리들이 날로 성해지는 것은 시대의 운수에 관계되는 것인 듯합니다. 이들을 모두 나라에서 쓸 수 있게 된다면 크게 좋을 것이지만, 혹 흩어져서 거두어 쓰지 못하여 도적이 되게 한다면 크게 불행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읍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 내어 뛰어난 기예로 수렵을 하러 다니면서도 이름이 군적(軍籍)에 올라 있지 않은 자들을 모두 중한 율로 논하여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영군(營軍)이 점차 많아지고 장수와 수령들도 아병(牙兵)을 얻어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깊이 유념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뒤에 이사(貳師)를 뽑아 보내고 궁료들의 물품을 더 보내었다.

 

3월 3일 갑신

역관(譯官) 장예충(張禮忠)을 심양에 보내어 서쪽으로 갈 배가 난파된 상황을 알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요즈음 풍재(風災)가 더욱 심하여 서쪽으로 갈 배가 잇따라 난파되었다. 내가 덕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1년도 편안히 보전하지 못하고서 또 명령을 어기지 못하여 배를 타고 가다가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니 애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한질(韓晊)은 오랫동안 내승(內乘)으로 있었으니 더욱 애석하다. 재변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면 하늘이 내리는 견책에 답할 수 있겠는가?"
하니,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어찌 다른 조처가 있겠습니까. 선유(先儒)의 말이 평범한 것 같으나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늘이 견책을 내리는 것은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자 해서이니 더욱더 힘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든 역사를 우선은 정지시켜야 합니다. 박황(朴潢)이 부안(扶安)에 진(鎭)을 설치하고 있는 것도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장은 급하지 않은 듯하나 뒷날에는 마땅히 여기에서 힘을 얻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우선은 역사를 늦추어서 민폐가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석기가 아뢰기를,
"남의 분묘(墳墓)를 파내는 것이 몹시 많다고 하는데, 이 역시 옳지 않은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금산(禁山)에는 거기에 따른 법과 전례가 있으니 파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석이 아뢰기를,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일은 유사가 있습니다만 이와 같이 재변이 있는 시기에는 죄를 받은 자 가운데 용서할 만한 자를 사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심리(審理)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경석이 이르기를,
"물에 빠져 죽은 자들에게 초혼제(招魂祭)를 지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예관(禮官)에게 물었다. 이덕형(李德泂)이 아뢰기를,
"국가의 일로 죽었으니 제사를 지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싸움에서 죽은 것과는 다르나 역시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예문관 제학으로, 박심(朴𥳍)을 장령으로, 심세탁(沈世鐸)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4일 을유

날이 어두컴컴하였다.

 

3월 5일 병술

간원이 아뢰기를,
"삼사(三司)가 군국(軍國)의 일에 대하여 참여하여 듣는 것은 실로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요즈음 인견할 때에 삼사의 관원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원에서 부를 것을 청하자 근례(近例)대로 부르지 말라고 명하였다고 하는데, 근례라고 하는 것이 어느 때부터 시행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이목(耳目)은 오로지 삼사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난 후에 비로소 신료들을 인견하면서 이목의 신하는 한 사람도 입시시키지 않았는바, 소원하게 대하는 조짐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대신이 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원 역시 거듭 아뢰지 않았으니 어찌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군국의 일은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는 것이니 여러 사람에게 널리 물어야만 차질이 없는 법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즈음에 어찌 따질 만한 일이 없겠습니까. 침소 안에서 자주 신료들을 인접하고 아울러 삼사의 관원도 들어와 참여하도록 하여 보탬이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 엊그저께는 별로 중요한 일이 없었으므로 명초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3월 6일 정해

김신국을 세자 이사(世子貳師)로, 안헌징(安獻徵)을 장령으로, 유철을 응교로 삼았다.

 

3월 7일 무자

세자가 서울로 들어왔다. 원방(遠方)에 있는 파직자(罷職者)와 산관(散官) 및 조관(朝官)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백관들은 반으로 나뉘어서 연서역(延曙驛)에서 맞이하였고 산관과 유생들은 홍제원(弘濟院)에서 맞이하였다. 그 나머지 백관들은 궐하(闕下)에서 맞이하였다. 궐내에서 입직하는 관원들은 금천교(禁川橋)에서 맞이하였다. 벽제(碧蹄)에서부터 궐문에 이르기까지 사민들이 가득 메워 흐느꼈다. 상이 승지 박로를 보내 오목도(梧木道)에게 접견을 청하였다. 세자 역시 사람을 보내어서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갈 뜻을 알렸다. 오목도가 이에 나아가 세자와 함께 입궐하였다. 장경문(長慶門)에 이르러 세자와 더불어 서서 말하기를,
"밀서(密書)를 전달할 때 반드시 좌우를 모두 물리치고 단지 신임할 만한 내관 한 사람과 함께 뜯어보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양화당(養和堂)에 나아가 오목도를 접견하고 말하기를,
"내가 병이 심하여 다시 세자를 만나보지 못할까 염려하였는데 이제 황제께서 돌려보내 만나보도록 하시었습니다. 대인들께서 주선해 주신 덕분이니,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오목도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왕께서 병이 있다고 듣고는 세자로 하여금 근친하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병이 조금 나았다 하니 기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자가 이에 들어와 상 앞에 이르러 부복하고는 눈물을 흘리니, 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루만졌다. 시신(侍臣)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오목도가 저지시키자, 상이 말하기를,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저절로 슬퍼져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였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임경업(林慶業)이 자기가 심양에 가서 수군이 빠져 죽은 상황을 진술하겠다고 청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임경업은 오랫동안 서쪽 변방에 있었으므로 오랑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임경업으로 하여금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기미를 살펴 잘 대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8일 기축

세자가 종묘에 전알(展謁)하였다. 이어서 남별궁(南別宮)으로 가서 오목도를 만났다.

 

상이 삼공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비국 당상·삼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운이 몹시 편안치 않으나 어제 밀서가 있었으므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밀서를 내어 보이었다. 그 밀서에 이르기를,
"왕이 지난번에 알현하였을 때 짐(朕)이 사소한 문제를 모두 떨쳐 버리고서 곧바로 함께 앉아서 옷을 벗어서 입혀 주고 음식을 권하여 먹게 하였다. 아껴 돌보아줌이 이와 같았는데 어찌 보답하기를 생각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왕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고 있지 않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왕의 여러 신하들이 술수를 부리면서 참언을 하여 중간에서 이간질하는 것을 왕이 혹 믿을까 하는 것이다.
또 듣건대, 볼모로 보낸 여러 신하들의 아들들이 대부분 서출(庶出)이거나 양자(養子) 또는 친족 중의 촌수가 먼 조카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을 왕이 어찌 알겠는가. 대개 여러 신하들이 짐과 왕을 모두 흐리멍덩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왕은 상세히 살피라.
사신 마부달(馬夫達)과 통사 도리(刀里)가 같은 병으로 죽은 일에 대해서는, 심양(瀋陽)의 여러 의원들의 이야기로는 만독(慢毒)을 받아들여서라고 한다. 이것이 의원들 말일 뿐이고, 진위를 어찌 알겠는가. 짐이 생각건대, 혹 관원 중에 악독한 마음을 품은 간사한 자가 있거나 전쟁 중에 해를 당한 원수의 집안이 있어서 원한을 갚고자 하여 독기를 부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왕이 어찌 알겠는가. 특별히 이 칙서를 보내어 왕에게 알리는 바이니, 왕은 유념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독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영의정 홍서봉이 아뢰기를,
"심유경(沈惟敬)이 평수길(平秀吉)을 독살하였는데008)  그때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같은 증세로 죽었으니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비밀로 할 일이 아닌데 비밀히 보내온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을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자식들을 인질로 보낸 일에 대해서는 여러 신하들에게 죄를 돌렸었는데 지금은 모두 나에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은 뒷날의 폐단을 막고자 해서이다. 나라에서 이미 세자를 보내었으니 조신들은 적자(嫡子)가 있으면 적자를 보내고 적자가 없으면 첩자(妾子)를 보내야 하는 법이다. 지금 대부분 다른 사람의 아들을 대신 보내었다고 하는데, 진실로 시골에서 농사지을 수 없어서 조정에 들어왔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하였다.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이 얼손(孼孫)을 보내고 판부사(判府事) 심열(沈悅)이 첩자를 보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대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다른 사람의 아들을 대신 보낸 자들을 불경(不敬)하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대사간 이행원(李行遠)이 조사해 내어 치죄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중을 분간하여 논죄하라."
하였다.

 

3월 9일 경인

비국이 재신(宰臣)들 가운데 거짓으로 인질을 보낸 자들을 조사하여 아뢰니, 상이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과 이조 판서 이경석(李景奭)을 파직하고,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과 전 판서 홍보·남이공(南以恭)은 의금부에 내려 중도(中道)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심택(沈澤)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는 것은 나라의 급선무로, 삼공이 으레 사(師)·부(傅)를 겸하고, 이사(貳師)·빈객(賓客)에서 당하(堂下)의 궁료(宮僚)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대의 극선(極選)으로 공의(公議)에 따라 택차하는 것은,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세자가 심양에 들어간 뒤로는 오로지 빈객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그 책임이 더욱 중합니다. 그러니 전조(銓曹)에서는 반드시 재주와 학문이 넉넉하고 지위와 명망이 뛰어난 자를 뽑아 보내야만 공도를 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전부터 청망(淸望)을 거치지 않고 실직(實職)을 지내지 않은 자를 잡다하게 의망하여 구차히 충당한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관소(館所)가 비록 낙토(樂土)는 아니나 분의(分義)가 있는 바이니 누군들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후로 차견된 자들은 대부분 시의(時議)에 거스름을 받는 자들이며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는 자들은 온갖 방법으로 모면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이에 미처 주의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누구누구라고 떠들고 있으며 제목(除目)을 보면 과연 말한 바와 일치합니다. 일반 백성들부터 궁료들까지 모두 벌을 받는 자리로 여기고 있으니 보고 듣기에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이사는 지위와 명망이 높아 빈객과는 다릅니다. 상의 말씀이 정녕하였고 직접 마주하여서 간절히 명하였으니 전조에서는 명망이 있는 자로 잘 가려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삼망(三望)이 모두 늙어 병든 사람이 아니면 인망(人望)에 차지 않거나 이제 막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정2품을 아울러 의망하라고 하교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김신국은 생각과 재주가 뛰어나 깊은 명망이 있습니다만 나이가 이미 일흔이어서 혈기가 쇠하였으니 이국 땅에서 돌아다니자면 자신의 몸조차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세자 보전하는 일을 주선하며 아침 저녁으로 보도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정사(政事)가 마땅치 않아 물정이 모두 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이것을 논계하고자 하였으나 동료들이 혐의가 있다고 핑계대거나 정사(呈辭)하면서 끝내 가타부타하지 않으니, 신이 어찌 감히 혼자서 아뢸 수 있었겠습니까. 신의 직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사간 이상형과 대사간 이행원, 헌납 임전 등도 아울러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신분이 언관으로 있으면서는 진실로 본 바가 있을 경우 일에 따라 논집하는 것은 실로 체통을 얻은 것입니다. 일에 피혐할 만한 점이 있으면 참론(參論)하지 않으려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이미 정사(呈辭)하였으면 비록 입계하지 않았더라도 간통(簡通)을 보지 않는 것 역시 규례입니다. 모두 체직할 만한 잘못이 없으니 이행원·이상형·임전·심택을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이행원·이상형·임전 등이 취직(就職)한 뒤에도 앞서의 말을 고집하였다. 심택이 혼자 아뢰기를,
"이사(貳師)의 삼망(三望) 가운데 김신국은 비록 재주가 있으나 이미 노쇠하였고, 홍보는 인망에 차지 않으며, 남이웅은 배행(陪行)하고 갔다가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전 이조 판서 이경석이 마음대로 처리하여 정사를 잘못한 죄는, 이미 체직되었다 하여 그대로 버려둘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동참하였던 당상관도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헌납 임전은 별다른 일이 없는데도 병을 핑계하고 나가 동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비와 득실은 따지지 않고 오로지 사당(私黨)만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지금 같은 지경이 된 것은 모두 사당만을 위하는 데서 나온 화입니다. 몸이 간관으로 있으면서 직분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사당만을 따랐습니다. 이런 습관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모두 추고하도록 하였다.

 

3월 10일 신묘

종실 양천군(陽川君) 이봉수(李鳳壽) 등이 비국에 글을 올려, 심양에 사람을 보내어 그의 자녀들을 속환(贖還)해 오겠다고 청하였다. 비국이 이 말을 상에게 아뢰니, 상이 호조로 하여금 값을 주도록 하였다.

 

3월 11일 임진

원옥(冤獄)을 심리하였다. 정배하였던 윤휘(尹暉)·이진행(李震行) 등 7인을 풀어주도록 명하고, 또 윤방을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사간 이상형이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논하는 즈음에는 간통(簡通)하거나 혹 마주 앉아 의논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면 각자 소견을 말하는 것이 예입니다. 어찌 동석(同席)을 탄핵하면서 혼자 마음대로 판단하여 여러 동료에게 간통하지 않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심택이 임전을 탄핵하면서 이틀 동안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간의 체면이 이로부터 모두 무너졌습니다. 무슨 그리 중대한 일이라고 이와 같이 급급히 한단 말입니까. 심택의 행위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이미 모욕을 당하였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이행원은 아뢰기를,
"심택이 동료와 의논하지도 않고 급급히 한 것을 신은 몹시 괴이하게 여깁니다. 신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무시를 당하였으니,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고, 정언 심택은 아뢰기를,
"이경석이 정사를 공정치 않게 하였다는 말이 온 나라에 자자하므로 신은 시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언관이라는 이름만 믿고서 논핵하고자 하였습니다. 임전이 병을 핑계대고 나가 사당(私黨)을 위한 흔적이 현저히 있기에 역시 논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료가 서로 통보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데 신이 신진(新進)으로서 고사(故事)에 익숙치 못해서였습니다. 또 애초의 계사에 그들이 연명하지 않았으므로 즉시 간통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무슨 중대한 문제란 말입니까. 그런데도 드러나게 동료의 배척을 받고 있으니 신을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이행원 등을 출사하게 하고 심택을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오목도가 백악(白嶽)과 남산(南山) 등처를 유람하기를 요구하자 전례가 없다고 알려 중지시켰다. 그러자 한강(漢江)에 나아가 유람하였다.

 

주사 상장(舟師上將) 임경업이 치계하기를,
"중군 별장(中軍別將)을 사람들마다 모두 죽도록 회피하고 있습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피하려고 도모하는 자들을 적발하여 모두 본선(本船)에 충군하도록 하라고 회계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이조 판서로, 남이웅(南以雄)을 대사헌으로, 채성귀(蔡聖龜)를 정언으로, 목행선(睦行善)을 수찬으로 삼았다. 특별히 이경증(李景曾)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3월 12일 계사

오목도가 전후의 예단(禮單)을 헤아려 이전 등록(謄錄)과 비교해 보고는 부족함이 있자 박대한다고 화를 내었다. 비국이 서로(西路)의 예단을 준급(准給)해 주고 사죄(謝罪)하는 뜻을 보이자고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준급해 주기만 하면 된다. 어찌 사죄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목도가 관반(館伴) 이명(李溟)을 보내어서 세자의 떠날 기일을 정하도록 재촉하였다.

 

오목도가 말을 전달해 오기를,
"듣건대 최명길(崔鳴吉)이 인질을 대신 보내어 죄를 얻었다고 하는데, 바꾸도록 전에 허락한 것은 용장(龍將)009)  과 황제의 뜻이었다. 용장이 이것을 온당치 않게 여기므로 부득불 변명해 주는 것이다."
하였다. 관반(館半)이 이것을 아뢰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최명길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해 오목도가 온당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최명길이 이미 재상에서 면직되었으므로 그의 인질로 간 동생은 스스로 교체되어 돌아올 것이니, 잡아 오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파직한 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감히 함부로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친동생을 보내지 않은 죄는 파직을 면하기 어렵다. 단지 인질로 보낸 동생을 잡아 오지 않는 것만 허락한다."
하였다.

 

3월 14일 을미

평안도 상원군(祥原郡)에 눈이 내렸다.

 

세자가 오목도를 가서 보고 잔치를 베풀었다.

 

조경을 집의로, 이래(李崍)를 장령으로, 김응조(金應祖)를 헌납으로, 이이존(李以存)을 정언으로, 박종부(朴宗阜)를 교리로, 정지화(鄭知和)·목행선(睦行善)을 수찬으로, 윤방을 영중추부사로, 이성구(李聖求)를 판중추부사로, 구굉(具宏)을 공조 판서로, 김육(金堉)을 좌부승지로, 민진익(閔震益)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3월 15일 병신

북 병사(北兵使) 정익(鄭榏)이 치계하기를,
"호장(胡將) 사을규(沙乙糾)의 위협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막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전에 요구해 온 3천 4백 석을 수대로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도감의 반신(伴臣)들이 오목도가 떠나기를 재촉한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잘못 주선하였으니 그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하였다. 비국이 그믐 사이에 행기(行期)를 정하고 내관(內官)을 보내어 오목도에게 말할 것을 청하니, 상이 영상 홍서봉으로 하여금 가서 오목도를 만나 보고 청하게 하였다. 홍서봉이 주상(主上)의 병세와 세자가 이제 막 돌아와 갑자기 먼길을 떠나기 어려운 상황을 갖추어 말하니, 오목도가 따르지 않고 더욱더 심하게 재촉하였다.

 

3월 16일 정유

어떤 한 미친 사람이 몰래 심양으로 가려고 하는 것을 의주에서 잡아서 아뢰었다. 비국이 효시(梟示)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실성한 사람이었으므로 석방하였다.

 

3월 19일 경자

회안 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은 태조(太祖)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이 대군으로 있을 때 방간이 가병(家兵)으로 공격하였는데, 일이 실패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서산(瑞山)으로 유배하였는데, 자손이 그대로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속적(屬籍)에서 끊어져 관리가 천역(賤役)에다 배정하였다. 그 뒤에 이의남(李義男)과 이원백(李元白) 등이 말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면서 사장(私藏)하였던 책 1권을 바쳤는데, 그의 선조인 이유(李愈)가 원통함을 호소한 사적이었다. 만력(萬曆) 정미년010)  에 선원록 교정청(璿源錄校正廳)이, ‘방간을 신설(伸雪)하는 여부에 대해서 《실록》을 상고해 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이용(李瑢)의 자손의 예에 의거하여 삭제하기를 청하였는데, 용은 바로 안평 대군(安平大君)이다. 이에 선조께서 하교하기를,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태조의 자손이다. 오늘날 군신(君臣)들은 마땅히 태조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아야 한다. 당시의 일을 생각해 보면, 필시 스스로를 삼가지 못하여서 일시적으로 죄를 얻은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1백 년이 지난 뒤에도 그대로 죄적(罪籍)이 남아 있어 그 자손들로 하여금 천역에 정역(定役)되고 유리하여 보전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연코 열성(列聖)들의 뜻이 아니다. 당시에 지은 죄를 진실로 용서하기는 어려우나 백세의 후손을 어찌 영원히 끊을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모두 용서하여 《선원록》에 기록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고 여긴다. 내가 그 죄의 경중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스스로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건대 온편치 못한 바가 있다. 지금 기록을 허락하는 것은 바로 태조의 마음을 우러러 체득한 것이며 열성들의 뜻을 공경히 떠받드는 것으로, 그분들이 시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을 행할 따름이다. 당시에 죄를 결정한 것은 하늘에 떠있는 뜬구름과 같다. 구름이 지나간 후에 하늘은 저절로 원상태를 회복한다. 어찌 일찍이 그 흔적이 남아 있던가.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큰 난리가 일어난 후에 처음으로 《선원록》을 정리하면서 두 사람을 기록하도록 허락함은 국체(國體)에 있어서 방해되는 바가 없을 듯하다. 오래 지난 일을 이와 같이 말하자니 참으로 마음이 서글퍼진다.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예관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기를 청하니, 선조가 즉시 따랐었다. 그 후에 이원백(李元白) 등이 또 천역에 다시 정역되었다고 종부시에 진소(陳訴)하였는데, 종부시가 회계하기를,
"선조께서 전교하신 것이 이와 같이 정녕한데도 오히려 《선원록》에 수록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일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수록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예조가 수록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니, 상이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된다 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상 홍서봉이 의논드리기를,
"신이 일찍이 태조조의 《일기》를 고찰해 보니 방간이 태종에게 실로 대역(大逆)의 죄를 지었습니다. 선조께서 전교하신 것은 권도(權道)에 따라 처리하여 종친(宗親)을 보존하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후손들은 단지 천역만 면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우상 강석기는 의논드리기를,
"사적(事跡)이 이와 같이 명백한데도 일찍이 수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심을 두어, 한 차례 수정을 가하지 않아 왕실(王室)의 후손으로 하여금 천역을 면치 못하게 한다면, 실로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홍서봉의 의논에 따라 다시 수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철을 사간으로, 김경(金坰)을 장령으로, 윤득열(尹得說)을 지평으로, 이상형(李尙馨)을 교리로 삼았다.

 

3월 20일 신축

상이 하교하였다.
"심양에 있는 사람들의 거처와 의복이 수졸(戍卒)들과 같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이래로 마음이 몹시 아프다. 해조로 하여금 넉넉하게 물품을 싸보내게 하고 본가(本家)에서 보내는 노복과 마필도 더 들여보내도록 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이 나지 않게 하라."

 

심양에 전후로 배종(陪從)하였던 재신과 궁료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3월 21일 임인

크게 가물었다. 관원을 보내어 산천(山川)에 기우제를 지냈다.

 

3월 22일 계묘

판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 예조 참판 정광경(鄭廣敬), 예조 정랑 이래(李䅘)를 심양으로 보내어 세자의 귀근(歸覲)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비국이 은(銀) 1천 냥을 세자의 행차에 싸 보내 예물(禮物)에 수응하는 물품으로 삼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3일 갑진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바야흐로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상중(喪中)에 있다가 청나라로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이에 재기(再期)와 상제(祥祭)·담제(禫祭)를 모두 이국 땅에서 지내게 되어 지극한 효성의 남은 정성을 펴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겨우 돌아왔는데 곧바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 숙녕전(肅寧殿)에서 【 인열 왕후의 혼전(魂殿)이다.】  출발할 때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참으로 정례(情禮)에 합당합니다. 종묘에도 전알(展謁)하고서 출발을 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4일 을사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오목도가 박로를 보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가서 보도록 허락하였다. 오목도가 박로에게 말하기를,
"국왕의 병이 전에 비하여 조금 나았다 하는데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하니, 박로가 답하기를,
"국왕의 병환은 차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눈앞에서 조금 나아졌다고 하여 회복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세자가 출발할 날이 멀지 않으니 이 때문에 증세가 심해질까 염려됩니다."
하자, 오목도가 말하기를,
"세자가 빨리 돌아가면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대계에 어찌 잠시 떠나가 있는 것을 염려합니까."
하였다.

 

3월 25일 병오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위에서 나와 구진성(鉤陳星) 아래로 들어갔다.

 

역관(譯官) 장예충(張禮忠)이 심양에서 와서 말하기를 "청나라 장수 3인이 오랑캐 60명을 거느리고 오는데, 두 장수는 수군의 출발을 독촉하여 4월 상순에 바다로 나아갈 모양이고, 한 장수는 안주(安州)에서 감군(監軍)하다가 수군이 출발하기를 기다려 돌아간다고 합니다." 하였다. 장예충이 가지고 온 칙서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짐이, 보내온 자문을 자세히 보니, 모두 군량이 난파되어 짐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었으며 아울러 군량을 기일에 맞추어 보내지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필시 나를 속이고자 해서 미리 교활하게 꾸며댄 것이다. 예전부터 바다를 운행하던 몇 백 척의 배 가운데는 한두 척이 난파된 경우도 있었으니, 너희 나라가 지난날 배를 끌고 다니면서 어찌 낭패가 없었겠는가. 너희가 숭덕(崇德) 3년011)  에 일찍이 사기(師期)를 그르친 것을 이미 복죄(服罪)하였으며, 짐 역시 용서하면서 스스로 뒷날에 보답하리라 기대하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나를 속이고자 하다니, 이것으로 보면 남한 산성과 평양성을 수리하는 것은 못된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참으로 알 수가 있다.
사람이 은혜를 보답함에 있어서 여러 세대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자도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3년 사이에 은혜를 완전히 잊었단 말인가. 짐이 요(遼)·금(金)·원(元) 3사(史)를 읽어보니 조선국은 반복이 무상하여 그들 나라에 화만 끼쳤을 뿐, 일찍이 그들에게 무슨 이익을 준 것이 없었다. 대개 선을 쌓는 것은 여러 세대로도 부족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하루아침으로도 남음이 있는 법이다. 더구나 3년 사이에 우리가 어찌 약해졌겠으며 너희가 어찌 강해졌겠는가. 너희가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참으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짐을 저버리는 일이다.
짐이 이달 20일에 병사와 군량의 출발을 독촉하는 장관(將官) 1원과 배를 이끌고 올 장관 1원을 파견하여 앞서 안주(安州)로 가게 해서 다음달에는 분명히 출발시키게 하겠다."

 

이조에서, 문·무·음관을 구분하지 않고 죄를 입어 파산(罷散)된 사람 가운데 조금이나마 쓸 만한 재주가 있으면서 용서할 만한 죄를 지은 자를 대신과 상의하여 40인을 초록(抄錄)해서 아뢰니, 답하였다.
"죄는 중하고 재주는 보잘것없으니 서용하기에 합당치 않다. 모두 내버려 두라."

 

3월 28일 기유

특별히 좌승지 박로를 파견하여 안주에서 감군(監軍)을 문안하게 하였다.

 

3월 29일 경술

청장(淸將)이 정주에 도착하였다. 역관(譯官) 정명수가 말하기를,
"이번에 군사를 파견하면서 한결같이 무오년의 군제(軍制)에 의거하여 도원수(都元帥)·부원수(副元帥)·육영장(六營將)·별장(別將)·중군(中軍)·종사관(從事官)을 갖추었는가?"
하였다.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이를 아뢰니, 비국에 계하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상장(上將)은 바로 도원수이고 부장(副將)은 부원수입니다. 지금에 와서 특별히 명호(名號)를 바꿀 일이 없습니다. 이미 5영장(營將)을 두어서 군사를 분속시켰으니, 반드시 1영을 더 두고자 하면 중군(中軍)을 옮겨 차임하고, 종사관은 상장과 부장이 편비(褊裨)들 가운데서 가려 차임해서 데리고 가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손(元孫)이 강을 건넜다.

 

3월 30일 신해

해주(海州)에 크게 우박이 내려 5∼6촌(寸)이나 땅에 쌓였다. 양맥(兩麥)이 모두 손상되었다.

 

이조가, 세자가 심양으로 돌아갈 때에 서울에 있는 시강원의 관원들로 하여금 벽제(碧蹄)까지 전송하도록 청하였다. 겸보덕(兼輔德) 이상형(李尙馨) 등이 상소하기를,
"이번에 전송하는 정례(情禮)는 맞이하던 때와는 다르고 또 장릉(長陵)에 전알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니 며칠간 모시고 가는 것은 한갓 신들의 지극한 정성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사체에 있어서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례로 논한다면 너희들의 말이 과연 옳다. 그러나 나라에는 이미 정해진 법이 있으니 멀리 가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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