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신사
경기 죽산현(竹山縣)에 우박이 내렸다.
심액을 도승지로, 김경(金坰)을 장령으로, 이경전(李慶全)을 형조 판서로, 김시국을 대사성으로, 김진(金振)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4일 갑신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에 지진이 있었다.
원손(元孫)이 심양에 머물렀다. 음식을 대하여서는 들지 않으면서 번번이 우리 나라 음식을 찾으므로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
5월 6일 병술
강원도 철원(鐵原)·안협(安峽)·평강(平康)·인제(麟蹄) 등지에 크게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삼았다.
5월 9일 기축
사간 조경이 모친의 병으로 인해 불러도 오지 않고 10조(條)의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극언하였다. 그 대략에,
"첫째는, 남한 산성의 치욕을 잊지 말고 자강(自强)하는 근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 남한 산성의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봉천(奉天)이 포위되어 어상(御床)에 화살이 날아들고 한단(邯鄲)이 위급했던 것처럼 하루아침에 함락되게 되었으며 종묘 사직이 몹시 위태롭게 되어 끊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밥맛이 좋았겠으며 자리가 편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몸소 누추한 데 거처하시고 추위에 떠시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몸소 장사들을 위무하고 한 그릇의 밥과 반찬이라도 하졸(下卒)들과 함께 먹을 생각을 하셨으니, 그때는 참으로 월나라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 머물러 있던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성하(城下)의 맹약(盟約)은 춘추 시대(春秋時代) 조(曹)·위(衛)와 같은 작은 나라도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더구나 상께서 몸소 걸어서 오랑캐 진영으로 나아갔으니, 2백 년간 전해 내려온 임금의 존엄함이 여기에서 모두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대군(大君)과 빈궁(嬪宮)이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었고 세자가 인질로 잡혀가 호랑이 굴에 갇혀 있으니, 이는 구천도 당하지 않았던 곤욕을 전하께서 당하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남한 산성의 치욕을 잊지 않으신다면 심양을 멸망시키기 전에는 전하의 몸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고 속이 타지 않을 수 없으며 와신 상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참으로 여기에 뜻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정축년에 걸어서 서울에 올라가니, 그때에는 정원(政院)이 어침(御寢)에서 열 걸음도 채 못 되는 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살 명분이 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뿌리면서 비분 강개하였습니다. 그 뒤 무인년에 서울에 올라가 예궐(詣闕)하니, 예전의 형식적인 것들이 모두 다시 설치되었고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을 만나니 원통함을 참느라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이 모두들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서울에 올라가 보니 지난해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인심은 게으르고 나약하며 함께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여러 신하들만이 그러할 뿐 아니라 전하의 마음도 역시 이미 나태해졌습니다. 예전에 오랑캐가 우리 나라에 책사(冊使)를 보낸 경우, 사신이 나오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떠받들고 사신이 떠나면 1년 동안 무사한 것만 다행으로 여겼는데, 전년에도 이와 같이 하여 지금 이미 5년이나 되었습니다. 아래로 공경(公卿) 과 재상들에 이르기까지 눈에 익어 심상한 일로 생각하여 다시는 우리가 오랑캐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누가 남한 산성의 치욕을 알겠으며, 그 누가 개돼지가 우리 군신(君臣)을 업신여긴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느 때에 자강할 수 있겠으며 치욕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군기(軍器)를 마련하고 성을 쌓고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보충하는 것은 자강하는 데 있어서 형식적인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탕고를 풀고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며 좌우에 있는 시녀들을 줄여, 모든 거처와 의복을 임금답게 하지 말아 아랫사람들을 격려시키며 항상 오왕(吳王)의 뒤를 쫓아가 함께 죽을 마음을 가지는 것이 자강하는데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남한 산성의 치욕을 잊지 말고 자강하는 근본으로 삼으시기를 청한 것은 바로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종묘 신주(宗廟神主)의 치욕을 잊지 말고 복수하는 거사를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아, 강도(江都)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 장수가 【 장신(張紳)·김경징(金慶徵)·이민구(李敏求)이다.】 나라를 팔아먹고 상신(相臣)이 【 윤방을 가리킨다.】 적을 맞아들여 종묘 사직까지 도륙당하는 화가 미치고 신주의 몸체에 칼날의 흔적이 났으며, 장릉(長陵)의 봉분이 파헤쳐지는 화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오랑캐들은 우리 나라 신민들이 백세토록 복수해야 할 원수로 함께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랑캐들은 나라를 점령하고서도 취하지 않고 임금을 잡고서도 곧바로 풀어준 것을 말하면서 덕을 베푼 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논에서는 똑같이 그렇게 여기면서 능침을 파헤친 원수로 오랑캐를 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심이 이와 같이 나약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원수인데도 신첩(臣妾)이 되어 섬기며 금백(金帛)으로 떠받든 자는 월 구천과 송 고종(宋高宗)입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간수(干隧)에서 승리012) 하였고, 송나라는 강남쪽에서 구차하게 안주하고 부형(父兄)의 원수를 잊는 데에서 면하지 못하여 역사에서 주벌을 받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두렵게 여기시어 떨쳐 일어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일은 비밀을 지키는 데서 성사되고 말이 누설되면 실패하는 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을 도모하는 사람치고 누구인들 이것으로 경계를 삼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비밀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야 할 것은 원손이 강도에서 화를 면하였다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먼저 말이 퍼져나가 끝내 원손으로 하여금 오랑캐 땅에 볼모로 가게 하였으니,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큰일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어찌하여 누설한 죄를 엄히 다스리고 국경의 출입을 엄히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저들이 하는 바를 우리 나라에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데, 우리들이 하는 일은 사소한 일이라도 저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금법(禁法)이 있고 우리 나라에는 금법이 없어서입니다.
아, 우리 나라에서 오랑캐를 떠받드는 것은 참으로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황제(皇帝)의 호칭은 그 나라 사람들도 다 그렇게 부르지는 않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팔도에서 모두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오랑캐의 사신이 나오면 반드시 조칙(詔勅)이라 칭하고 용(龍)·마(馬) 【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달(馬夫達)이다.】 이하를 반드시 앉는 가마로 맞이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하십니까.
전하께서 그들에게 우리를 살려준 은혜가 있다고 여기시어 오로지 심양에 마음을 두어 시종 일관 한결같이 섬기고자 하신다면 모르거니와 참으로 전하께서 조종들을 위해 치욕을 씻을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같이 하는 한두 신하와 더불어 급급히 이 일에 종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큰 난리가 일어난 뒤로 몇 년이나 되었는데 전혀 아무런 기미가 없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시험삼아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큰일을 감당할 만한 재주와 역량이 있는 자를 헤아려 살피신다면,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있는 자가 어찌 감히 스스로를 숨기겠으며 재주와 지략이 없는 자가 어찌 감히 헛된 말을 함부로 진달하겠습니까. 그런 다음에 복수하는 일을 한결같이 그 사람에게 맡기되, 모든 모의에 있어서 문서(文書)로 오가지 말고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모의가 결정되면 즉시 행하고 비국 당상을 인견하겠다는 말을 하지 마소서. 그러면 도모하는 일이 끝까지 누설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세월은 빨리 흘러가고 인심은 쉽게 나태해지는 법입니다. 이런 상태로 몇 년을 지내어 온 세상 사람들이 오랑캐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어느 쪽이 의리에 맞는 것인 줄 몰라 선택할 바를 모르게 되면, 뒷날에는 비록 뜻을 가다듬어 복수하고자 해도 끝내 떨쳐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조종들을 보실 수 있겠습니까. 신이 종묘 신주의 치욕을 잊지 말고 복수하는 거사를 일으키라고 청한 것은 바로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명나라가 우리 나라를 구원해 준 은혜를 잊지 말아 조빙(朝聘)을 통하는 것입니다.
아, 명나라가 우리 나라를 구원해 준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왜병(倭兵) 20여 만 명이 하루아침에 바다를 건너와서 팔도를 휘몰아쳐 온 나라에 적들이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 선조 대왕께서 의주(義州)로 파천해 계시면서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고하자,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는 향도(嚮導)의 와언을 개의치 않고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 주었습니다. 보내온 군사가 10여 만 명이나 되었고 은이 몇천만 냥이었으며, 산동(山東)에서 실어온 곡식이 몇천만 곡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드디어 나라가 다시 살아났고 백성들이 다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40여 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그 누구의 덕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조 대왕께서는 평소에 한번도 연경(燕京)을 등지고 앉지 않으셨으며, 자문(咨文)과 방물(方物)에 있어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였는바, 그러한 사실은 지금까지도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의 귀에 전해 옵니다.
지금 비록 불행하여 오랑캐들에게 제약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사세의 위급함이 지난 정축년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곧장 한(汗)에게 ‘한이 우리를 살려준 은혜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명나라가 우리 선조 대왕을 살려준 은혜 역시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명나라의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의 후손들도 반드시 한의 은혜를 잊을 것이다. 이는 한에게 있어서도 이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고자 하니, 감히 숨기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저들이 혹 우리를 의롭게 여겨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며, 비록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이 때문에 우리 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한결같이 위축되어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여 항상 분해 하고 불평스러운 마음을 품게 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하겠습니까.
아, 삼월의 사나운 바람이 서쪽으로 갈 배를 뒤엎어 버린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명나라를 돕고 오랑캐를 싫어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않고 위협하는 한마디 말에 겁을 내어 다시 배를 수리하여 그들에게 보낸단 말입니까. 【 전에 가도를 공격하였는데, 지금 또 군사를 보내는 일이 있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과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모두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서 복을 받지 않은 경우는 없으며, 또한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서도 화를 입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서 천하에 죄를 얻는 것이 어찌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려는 오랑캐에게 저항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이 명나라가 구원해 준 은혜를 잊지 말아 조빙을 통하라고 청한 것은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넷째는, 흉악하고 교활한 말을 믿지 말고 국본(國本)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아, 인질을 순환시키라는 이 오랑캐들의 말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인질로 보내어 봉림 대군(鳳林大君)과 바꾸고, 원손(元孫)을 인질로 보내어 세자와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평 대군이 심양에 들어가자 봉림 대군을 보내지 않았으며, 원손이 강을 건너자 세자를 돌려보내라고 재촉하였으니, 세자가 심양에 들어간 뒤에 과연 원손과 봉림 대군이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하늘에 계신 신령께서 도우시어 오랑캐의 마음을 달래서 세자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된다면, 신은 전하께서 다시는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이 흉악하고 교활한 말을 믿지 말고 국본을 보호하라고 청한 것은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다섯째는, 하늘의 경고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병자년 이전의 일을 거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 금년에는 하늘의 경고가 극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음홍(陰虹)이 여러 차례 해를 꿰었고 호남과 영남 및 북관(北關)에는 우박이 내렸습니다. 관서(關西)에는 지진이 있었고 임진강(臨津江)의 물이 붉게 변했습니다. 수락산(水洛山)이 무너지고 궁궐의 나무가 바람에 뽑히었습니다. 그 밖의 물괴(物怪)는 다 거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신은 무슨 재앙이 있으려고 하늘에서 조짐을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고 아끼시어 전하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반성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을해년의 재변에 【 을해년에 덕릉(德陵)과 혜릉(惠陵)이 붕괴되는 재변이 있었다.】 대해 두렵게 여겨서 허물을 뉘우치는 터전으로 삼으신다면 이 재앙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묘목(廟木)에 벼락이 쳤고 능 위에 변괴가 있어서 참봉 홍유일(洪有一)이 치계하였는데, 예조와 상신(相臣)이 봉심하고는 무식한 말에 혹하여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살피지 못하시고 홍유일을 옥리(獄吏)에게 내려서 심문하도록 하였습니다. 【 오윤겸(吳允謙)이 봉심하고 돌아와서는, 두 능의 붕괴는 수재 때문이라고 말하여 홍유일이 보고한 것과 서로 달랐으므로 상소 중에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에 유사(有司)로 있던 신하도 역시 식견이 없어서 재변에 답하는 날에 악관을 벌여놓고 부묘례를 행하였습니다. 【 유사는 홍서봉(洪瑞鳳)을 가리킨다.】 이상의 두 가지 일은 모두 신하들이 전하를 그르친 것이니 죄가 실로 신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도 역시 깨닫지 못하시고 이와 같이 잘못 처리하였으니, 재변을 만나 공구 수성하는 뜻에서 먼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해 병자년에 과연 오랑캐의 난이 있었는데 유식한 선비들이 모두 을해년의 재변에 대해 삼가지 않아서 천지에 크게 유감이 있게 한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하늘의 경고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병자년 이전의 일을 거울로 삼으라고 청한 것은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신이 명나라의 고사를 살펴보건대, 효종 황제(孝宗皇帝)께서는 크게 흥성하는 시대에도 한번 재변을 만나면 공구 수성하면서 아랫사람들을 책려하였으며, 예악(倪岳)이 대면해서 당시의 잘못된 정사를 모두 들어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늘이 노여움을 풀어서 당시가 태평해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옥음을 한번 내려 자신에게 죄를 돌리어 아랫사람들을 격려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조정에 비록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한두 가지 채용할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상하가 모두 두려워하는 뜻이 없이 밤낮으로 힘쓰는 바는 오로지 원수인 오랑캐를 높이 떠받드는 것으로 일을 삼는 것이니, 신은 몹시 답답합니다.
여섯째는, 근습(近習)들과 친밀하게 지내지 말고 날마다 유신(儒臣)들을 접하여서 조섭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어떻게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슬과 서리는 병을 옮기는 법인데 남한 산성의 이슬과 서리가 어떠하였으며, 근심과 걱정은 병이 되는 법인데 전하의 근심과 걱정이 어떠했습니까. 온갖 병은 마음에서 말미암는 것인데, 전하의 마음이 하루라도 화평하실 수 있었습니까. 지금 비록 조금 덜해졌다는 전교를 내리셨으나 아직도 하루 시조(視朝)하시는 것조차 아끼시니, 병근(病根)이 다 없어지지 않아 저절로 침전에서 쉬고 싶은 생각이 나서가 아니겠습니까.
임금의 구중 궁궐은 보통의 여염집과는 달라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하는 자는 부녀자가 아니면 환관들입니다. 전하께서 조용하게 조섭한다고 하는 것은 맛난 음식이나 먹고 몸을 편히 쉬는 데 불과합니다. 밖으로는 만기(萬機)의 번거로움이 있고 안으로는 음사한 도적이 있어서 전하의 가슴속에서 번갈아 들끓고 있으니 역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유신들을 침전 안으로 불러들여서 그들로 하여금 고금의 치란에 대해 말하게 하거나 현재의 세무(世務)에 대해 논란하게 한 다음, 전하께서 궤석(几席)에 기대어 듣느니만 하겠습니까. 그럴 경우 답답한 생각이 어찌 조금은 트이지 않겠으며, 청명한 정치를 하는 데 어찌 조금은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근습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날마다 유신들과 접하여서 조섭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는 것은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일곱째는, 좋아하고 싫어함을 사심(私心)으로 하지 말고 어짐과 사악함을 잘 구별하여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라는 것입니다.
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은 전한(前漢)이 흥성하게 된 이유이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은 후한이 기울어지게 된 이유입니다. 이것은 제갈량(諸葛亮)이 한 말입니다만, 현재에는 참으로 크게 어진 사람도 없고 큰 소인도 없어서 흥성하고 기울어지는 데 관계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어찌 어진 사람과 소인의 구별이 없겠습니까. 성품이 바른말하기를 좋아하고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있지는 않으며, 완악하고 염치가 없어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위하는 자가 없지 않은데, 전하께서 미워하시는 바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있지는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어진 자와 어질지 않은 자가 한 데 뒤섞여 있게 된 것입니다.
서도(胥徒)들이 조신(朝臣)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낭료들이 대관(大官)을 꺼려하지 않음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조신과 대신에게 두려워하거나 꺼려할 만한 실상이 없는 탓입니다. 기강이 문란함은 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더구나 작상(爵賞)을 함부로 베풀고 명기(名器)를 헛되이 주어 고관 대작이 조정에 넘칩니다. 예로부터 이와 같으면서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신이 좋아하고 싫어함을 사사로운 마음으로 하지 말고 어질고 사악함을 구별하여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라고 청한 것은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여덟째는, 형식에 구애되지 말고 착실하게 장수를 가리는 것입니다.
아, 오늘날 어찌 장수가 될 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선발하는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비국의 대신들이 추천하는 것을 믿을 만하다고 여기십니까. 형식적이고 사사로움에 치우칠 뿐입니다.
신이 송(宋)나라 신하 구양수(歐陽修)의 차자를 보고는 참으로 오늘날 장수를 선발하는 방법에 합당하다고 생각되었으므로 그 한 조목을 뽑아 올립니다.【 구양수가 말하기를 ‘신이 보건대, 당나라 및 오대(五代)에서부터 국조(國朝)에 이르기까지 사방을 정벌하면서 싸움터에서 공을 세울 때 그 명장(名將)들은 대부분 군졸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서비(西鄙)에서 용병(用兵)한 이후만 보더라도 무장(武將)들 가운데 조금 이름이 난 자들은 주로 군중(軍中)에서 나왔습니다. 신은 그러므로 군중에서만 장수를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장수 구하는 법을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릇 장수를 구하는 법은, 우선 먼저 가까이 있는 금군(禁軍)에서부터 상군(廂軍)에 이르기까지의 군사들 가운데 나이 어리고 힘이 있는 자들을 등급에 구애되지 말고 뽑아, 재주가 비슷한 자들을 1백 인씩 묶어서 1대(隊)를 만들어 가르칩니다. 그런 다음에 그 1백 명 가운데013) 재주가 뛰어나고 가장 용감한 자가 반드시 한 사람 있을 것이니, 그를 뽑아서 대장(隊長)을 삼습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의 재주와 용맹은 실로 그 나머지 1백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니, 1백 명을 거느릴 만한 장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뽑은 대장을 열 사람을 모아서 또 가르칩니다. 그런 다음 이 열 사람 가운데 또 재주가 뛰어나고 가장 용감한 자가 반드시 한 사람 있을 것이니, 이 사람을 뽑아서 비장(裨將)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이 한 사람의 재주와 용맹은 실로 1천 명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니, 1천 명을 거느릴 만한 장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뽑은 비장 열 명을 모아서 또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 열 사람은 재주와 용맹이 1천 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어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 사람 가운데 반드시 식견(識見)이 있고 변통(變通)할 줄 아는 자가 한 사람 있을 것이니, 그를 뽑아서 대장(大將)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이 한 사람의 재주와 용맹은 1 만 명 가운데서 뽑힌 자이며 또 조금은 변통할 줄도 아니, 지모(智謀)가 있는 자를 택하여 그를 보좌하게 하면 1만 명을 거느릴 만한 장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행히 재주와 용맹은 부족하나 재식(才識)이 만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자가 있을 경우, 이는 불세출의 기장(奇將)으로 보통의 방법으로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군중(軍中)에서만 장수를 얻을 수 있다 함은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이 하여 5∼7만 명의 군사를 얻고 거기에 따라서 또 1만명을 거느릴 만한 5∼7명의 장수를 얻는다면, 그 아래 1백 명이나 1천 명을 거느리는 장수는 저절로 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별도로 군명(軍名)을 세우고 계급에 관한 제도를 만들되, 1만 명을 1군(軍)으로 만들어 숙위(宿衛)에 갖추어서 유사시에는 출정(出征)을 나가게 하고 무사할 때는 궁궐에 머물러 있으면서 천하에 위엄을 보이게 합니다. 그럴 경우 좋은 옷과 후한 녹으로 교만하고 게으른 쓸모없는 군졸을 양성하여, 차차로 승진하여 교수(校師)가 된 어리석고 나약한 자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득실이 천양지차일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대로 시행하여서 1군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수 있다면 예전의 금병(禁兵) 1만 명을 내보내어 외방에서 취식(就食)하게 하여 그들로 대신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새로 설치한 군대는 처음을 잘 제어하고 점차로 예전의 급료보다 더 지급하되 그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풍족하지 않게 하며 항상 훈련을 하게 하여 나태해지지 않게 합니다. 신병(新兵)이 이루어지면 구병(舊兵)은 모두 내보냅니다. 그럴 경우 경사(京師)에서는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정병을 얻을 수 있어 그 이익이 매우 클 것입니다.】 신에게 또 한 가지 어리석은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백성과 사족(士族) 및 공사천(公私賤) 가운데 호란(胡亂)에 죽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들의 고아나 형제들 중에 원통한 생각에 창을 베고 자는 자가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들을 모두 불러모아 1군을 만들되, 그들 가운데 재상이나 장령(將領)들의 자제로서 장수(將帥)가 될 만한 자를 뽑아 통솔하게 하여 위급할 때 쓸 수 있게 한다면, 죽음을 돌보지 않는 의열(義烈)을 어찌 보통 사람에게 비교하겠습니까. 선조 때의 복수 의병(復讐義兵)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홉째는, 성신(誠信)을 가지고 교린하여 국세를 웅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와 이미 국교를 맺고 있으니 처음으로 우호를 도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오직 성심과 신의로 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약 한 차례 사신을 보내어 우리 나라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분명하게 알린다면, 일본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우리 나라를 돕겠다고 승락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일본은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오랑캐들은 믿을 만하단 말입니까. 오랑캐를 섬기는 것이나 일본과 교린하는 것이나 모두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이 모두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일이라면, 이미 화친을 맺고 있는 형세를 이용하여 오랑캐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신의 계책은 오직 위세에 보탬이 되게 하자는 것일 뿐, 왜병을 청하여서 우리 나라와 함께 쳐들어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오랑캐들 역시 항상 왜사(倭使)가 왔는가의 여부를 물으며, 또 ‘우리도 역시 사신을 일본에 보내려고 한다.’ 하는데, 이는 일본을 꺼려서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사정을 몰래 일본에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한 장의 글을 보내어 우리 나라를 침입한 것에 대해 따지게 한다면, 오랑캐들은 필시 처음에는 우리 나라가 그렇게 시킨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나, 우리 나라와 일본이 깊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끝내 가볍게 우리 나라에 쳐들어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른바 그들의 관건을 제압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열째는, 백성들을 어루만져서 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 오늘날 백성들을 어루만지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오랑캐에게 줄 세폐(歲幣)를 백성들에게 책임지우지 않으면 어쩌겠으며 오랑캐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책임지우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세금 외에 살갗을 벗기고 골수를 뽑아내면서 지나치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물건을 아끼는 데 마음을 둔다면,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도 오히려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오랑캐의 사신이 오가는지조차 모르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나라에서이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상께서 절검(節儉)을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궁녀들을 내보내고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를 없애며, 사복시의 곡식 먹는 말을 줄이고 긴요하지 않은 관원을 줄이며, 장오법을 엄하게 하고 수령을 임용함에는 반드시 추천이 있는 사람을 쓰며, 불법을 저지를 경우에는 중률(重律)로 처단하소서. 그렇게 했는데도 백성들이 은택을 입어 힘을 펴지 못하면 신은 망령되게 말한 죄를 받겠습니다." 하였다. 소를 입계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8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註 012] 간수(干隧)에서 승리 : 간수는 옛 오읍(吳邑)을 말함. 이곳에서 월 구천(越句踐)이 산졸(散卒) 3천 명으로 부차(夫差)를 사로잡았다.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註 013] 1백 명 가운데 : ‘1백 명 가운데’에서부터 아래의 ‘가르칩니다’까지는 누락된 부분이 있어 내용 연결이 안 되므로 《구양영숙집(歐陽永叔集)》을 참고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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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또 한 가지 어리석은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백성과 사족(士族) 및 공사천(公私賤) 가운데 호란(胡亂)에 죽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들의 고아나 형제들 중에 원통한 생각에 창을 베고 자는 자가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들을 모두 불러모아 1군을 만들되, 그들 가운데 재상이나 장령(將領)들의 자제로서 장수(將帥)가 될 만한 자를 뽑아 통솔하게 하여 위급할 때 쓸 수 있게 한다면, 죽음을 돌보지 않는 의열(義烈)을 어찌 보통 사람에게 비교하겠습니까. 선조 때의 복수 의병(復讐義兵)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홉째는, 성신(誠信)을 가지고 교린하여 국세를 웅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와 이미 국교를 맺고 있으니 처음으로 우호를 도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오직 성심과 신의로 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약 한 차례 사신을 보내어 우리 나라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분명하게 알린다면, 일본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우리 나라를 돕겠다고 승락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일본은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오랑캐들은 믿을 만하단 말입니까. 오랑캐를 섬기는 것이나 일본과 교린하는 것이나 모두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이 모두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일이라면, 이미 화친을 맺고 있는 형세를 이용하여 오랑캐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신의 계책은 오직 위세에 보탬이 되게 하자는 것일 뿐, 왜병을 청하여서 우리 나라와 함께 쳐들어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오랑캐들 역시 항상 왜사(倭使)가 왔는가의 여부를 물으며, 또 ‘우리도 역시 사신을 일본에 보내려고 한다.’ 하는데, 이는 일본을 꺼려서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사정을 몰래 일본에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한 장의 글을 보내어 우리 나라를 침입한 것에 대해 따지게 한다면, 오랑캐들은 필시 처음에는 우리 나라가 그렇게 시킨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나, 우리 나라와 일본이 깊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끝내 가볍게 우리 나라에 쳐들어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른바 그들의 관건을 제압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열째는, 백성들을 어루만져서 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 오늘날 백성들을 어루만지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오랑캐에게 줄 세폐(歲幣)를 백성들에게 책임지우지 않으면 어쩌겠으며 오랑캐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책임지우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세금 외에 살갗을 벗기고 골수를 뽑아내면서 지나치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물건을 아끼는 데 마음을 둔다면,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도 오히려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오랑캐의 사신이 오가는지조차 모르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나라에서이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상께서 절검(節儉)을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궁녀들을 내보내고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를 없애며, 사복시의 곡식 먹는 말을 줄이고 긴요하지 않은 관원을 줄이며, 장오법을 엄하게 하고 수령을 임용함에는 반드시 추천이 있는 사람을 쓰며, 불법을 저지를 경우에는 중률(重律)로 처단하소서. 그렇게 했는데도 백성들이 은택을 입어 힘을 펴지 못하면 신은 망령되게 말한 죄를 받겠습니다."
하였다. 소를 입계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5월 10일 경인
비국이 아뢰기를,
"임경업이 들어간 뒤로 소식이 끊어져 큰 사고가 있더라도 알 길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별도로 초탐선(哨探船) 한두 척을 정해 들여보내어 종적을 정탐하게 한다면 혹 뒤떨어져 있는 패선(敗船)이나 병든 군졸을 구호하여 돌아올 수 있을 것이며, 또 소식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안 감사로 하여금 잘 헤아려서 조처하게 하여 온 군사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알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관찰사 오단(吳端)이 졸하였다. 우의정으로 추증하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돌보도록 명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처부(妻父)였기 때문이다. 오단은 사람됨이 관대하였으며, 반정(反正) 후에 등과(登科)하여 삼사(三司)를 두루 거쳤고, 관직이 관찰사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전 관찰사 오단(吳端)이 졸하였다. 우의정으로 추증하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돌보도록 명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처부(妻父)였기 때문이다. 오단은 사람됨이 관대하였으며, 반정(反正) 후에 등과(登科)하여 삼사(三司)를 두루 거쳤고, 관직이 관찰사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5월 11일 신묘
예조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뒤로 삼명일(三名日)의 방물 물선(方物物膳)을 모두 폐지하였는데, 크게 향상(享上)하는 예에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금년 탄일(誕日)부터는 전례에 의해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2일 임진
황해도 서흥(瑞興)과 곡산(谷山)에 우박이 내렸다.
전 찰방 안방준(安邦俊)이 상소하여 시사를 극언하였는데, 말이 대부분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소를 입계하자 머물려 두고 답하지 않았다. 상이 다른 날에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안방준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소의 말을 보건대 사정에 어두운 자이다. 채용해 쓸 만한 말이 없으며 또 보고 듣기에 번잡할 것 같기에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을 뿐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판서 민형남(閔馨男)은 인질을 보내는 일로 해서 세 번이나 판서가 되었는데도 집에 누워서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임금을 무시하고 법을 멸시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서로(西路)의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상이 따랐다. 이에 민형남을 평안도 창성(昌城)에 정배하였다. 영의정 홍서봉이 차자를 올리기를,
"민형남은 올해 나이가 77세입니다. 《대명률(大明律)》을 상고해 보면 ‘70세 이상인 자로 유장(流杖) 이하는 수속(收贖)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민형남이 범한 죄는 사형에 처해야 할 것에 이르지 않는데 먼 극변에 정배한다면 어찌 법을 만든 본의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너그러이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극변에 정배되지 않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에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이배(移配)하도록 명하였다.
5월 13일 계사
평안도 선천(宣川)·의주(義州) 등에 우박이 내렸다.
영의정 홍서봉이 차자를 올리기를,
"조경의 상소를 보건대, 그 내용 안에 ‘을해년에 목릉(穆陵)이 붕괴된 것은 벼락이 친 것이 분명한데도 봉심(奉審)한 대신이 사실을 숨기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고(故) 정승 오윤겸(吳允謙)이 대신으로서 나아갔었고 신경진이 선공 제조(繕工提調)로서, 신이 예조 당상으로서 따라갔었습니다. 서로 주위를 돌아가며 간심(看審)한 것이 서너 번도 넘었습니다. 대신이 복명(復命)하면서 목격한 실상대로 서계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의 눈은 같을 것이라고 여겨서입니다. 그 뒤에 바로 달리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있어서 ‘벼락친 것이 분명한데도 여러 신하들이 속였다.’ 하였는데, 이말이 서로 맞장구쳐서 온 나라에 두루 퍼졌습니다. 귀로 들은 것을 사실로 여기고 눈으로 본 것을 거짓으로 여기는 것은 쇠퇴한 세상의 일반적인 작태인 것으로, 이 논의를 하는 자들이 과연 이런 병폐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죄를 소급해서 바로잡는 것은 참으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천벌을 받았다는 설에다 맞추려고 하는 것은 의혹됨이 심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묘할 때 풍악을 벌인 것은 무식한 유사(有司)의 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당시에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등록(謄錄)과 전례를 상고해보니, 제릉(諸陵)에 유고가 있어 개수(改修)하면서 미처 기일(忌日)이 되지 않았을 경우 국가의 모든 예를 행함에 있어서는 일찍이 이로 인하여 정폐(停廢)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묘하던 날 상신(相臣)들에게 의논하고서 그대로 행하고 연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풍악을 사용한 것은 바로 절목간의 일이 전례로 굳어져 행해 온 것이어서 역시 별도로 규정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른바 전하를 그르치게 했다는 죄를 신이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여 공론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맞지 않는 말이니 가슴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5월 14일 갑오
유생을 전강(殿講)하였다.
5월 15일 을미
사람과 가축에게 벼락이 쳤다.
역관(譯官) 홍희남(洪喜男)이 대마도로 가서 도주가 득남(得男)한 것을 축하하였다. 도주가 묻기를,
"귀국에서 난을 겪은 이후로 오랑캐와 국교를 맺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홍희남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문한(文翰)을 숭상하고 예의를 따르며 병혁(兵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오랑캐들이 우리 나라가 생각지 않는 틈을 타서 철기(鐵騎)를 몰고 국도(國都)에까지 들어왔으므로 황급히 도성을 떠난 것이다. 그간의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전해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도주가 말하기를,
"피차간에 사신이 자주 왕래하는가? 한 해에 보내는 물품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답하기를,
"교빙(交騁)하는 것일 뿐이다. 보내는 물건도 쌀이나 포목에 불과하며, 저들이 혹 요구해 오면 토산물을 가끔 보내줄 뿐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부산에서 심양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답하기를,
"5천 리 남짓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귀국의 세자와 왕자들이 심양에 인질로 나가 있다는데, 모두 별고 없는가? 오랑캐들이 우리들을 보러 오고자 한다는데, 그러한가?"
하니, 답하기를,
"동궁과 왕자가 심양에 가 있는 것은 진짜 인질로 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저들이 비록 화친을 맺었으나 항상 우리를 의심하고 있으므로 한번 성의를 보여 저들의 의심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오랑캐들이 남쪽으로 온다는 말은, 나는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 묻기를,
"중원(中原)의 길이 끊어진 뒤로 신사(信使)를 통하지 못했는가? 중원은 천자의 나라이고 저 오랑캐들은 조무래기들이다. 어찌하여 서로 버티면서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는가?"
하니, 답하기를,
"한번 요동의 길이 끊어진 다음부터는 해로(海路)를 경유하여 사신을 통하였다. 지금은 섬 안의 명나라 진(鎭)이 불행히도 모두 함락되어 사신을 보낼 길이 없다. 그러나 피차간에 때때로 소선(小船)이 왕래한다."
하였다. 도주가 말하기를,
"관백(關白)인 정상(政尙)은 준엄하고 집정(執政)들은 모두 뛰어나다. 처음 귀국이 침입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팔을 걷어붙였으며 시기를 틈타서 출병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내가 도모하여 일이 중지되었다. 그런데 관백은 항상 나를 의심하고 있으므로 현재 이곳에 근신(近臣)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섬 안의 형세를 은밀히 살피고 겸하여 귀국의 사정도 정탐하게 하고 있다. 만약 귀국의 일을 일일이 관백에게 전보(轉報)한다면 반드시 일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오랑캐들이 남쪽으로 온다는 말을 그대가 비록 숨기고 있으나 내가 이미 분명하게 알고 있다. 혹 이런 일이 있더라도 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는 법이다. 부산성(釜山城)은 애초에 귀국에서 쌓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일본이 쌓은 것이다. 이제 관왜(館倭)로 하여금 성 안으로 옮겨 살게 하고 기계(器械)를 많이 갖추게 한다면 비록 의외의 변란이 있더라도 귀국과 더불어 기미를 살펴 주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상책이 아니겠는가. 바란건대, 그대는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하여 이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5월 16일 병신
가벼운 죄를 진 전옥(典獄) 죄수를 석방하였다.
조정호(趙廷虎)를 대사성으로, 민응협(閔應協)을 부응교로, 이래(李䅘)를 지평으로 삼았다.
음성 현감(陰城縣監) 유덕함(柳德涵)이 그의 얼족을 위하여 그 현의 사대부 집안에 구혼(求婚)하였는데, 그 집에서 문벌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고 처녀를 데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덕함이 사람을 시켜 그의 아내를 붙잡아 오게 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욕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목을 매어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통분해 하였다. 장령 홍무적(洪茂績)이 덕함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7일 정유
세자가 심양에 도착하였다. 용골대(龍骨大)가 관소에 나와 은밀히 세자에게 말하기를,
"주사(舟師)를 징발하던 처음에 양남(兩南)의 선비들 가운데 중지하자고 상소한 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주사를 징발하라는 명을 받은 뒤로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배를 정비하고 군사를 모으되, 오로지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바다로 나아가 다행히 기일에 늦지 않게 되었는데, 어찌 중지시키려는 자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용골대가 또 말하기를,
"귀화한 사람 중에 처져있는 자가 많은데, 예조에서는 이 무리들을 항상 어렵(漁獵)하는 데 쓰면서 쇄환해 보내려는 뜻이 없습니다. 반드시 예조 판서를 욕보인 뒤에야 바야흐로 거행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이미 상세하게 들었으니 즉시 보내십시오. 주회인(走回人)들도 역시 많이 숨겨주고 있는데 모두 찾아서 보내도록 하십시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보고 듣는 대로 묶어 돌려보낼 것입니다.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습니까."
하였다. 용골대가 또 말하기를,
"원손(元孫)이 심양에 들어올 때에 어떤 나이 어린 문관(文官)이 다른 아이를 대신 보내는 계책을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국왕께서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출발함에 미쳐서는 조정에서 중지시키려고 하였는데, 국왕께서 또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배행(陪行)하는 빈객(賓客)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중로에서 배회한 것이 4개월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정승 신경진이 ‘수사를 보내야 된다.’고 말하여 이 때문에 어떤 종류의 논의에 저촉되어 병을 칭하고 체직되었으며, 심지어는 정승 최명길 역시 파면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두 정승이 파직당한 것은 모두 병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일어나 나갔다. 그날 정명수(鄭命壽)가 안주(安州)로부터 돌아와서 세자를 알현하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양남의 선비가 주사를 중지시킬 것을 간하였는데 들어주지 않자 화를 내면서 돌아가다가 삼전도(三田渡)의 비(碑)를 깨부수었다고 저 역시 들었습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와전된 말이니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였다.
5월 18일 무술
크게 가물었다. 예조가 종묘와 사직 및 북교(北郊)에 날을 가리지 말고 기우제를 지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하도록 명하였다.
5월 19일 기해
승지 구봉서(具鳳瑞)가 은밀히 아뢰기를,
"저 오랑캐들이 털끝만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우리 나라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데,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응당 유배해야 될 죄인들을 반드시 서로(西路)의 극변(極邊)에 유배하는데, 이른바 서로의 극변이란 곳은 저들의 국경과 단지 강물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일이 생김을 다행으로 여겨 반드시 왕래하면서 누설시키고 있을 것인데 그곳 지역을 다스리는 관원들이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서 사기(事機)가 비밀스럽기를 바란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죄지은 자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유배하여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윤허한다는 말 역시 다른 사람이 들으면 시끄러울 것이니 아무 말없이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였다.
5월 20일 경자
승지 구봉서가 아뢰기를,
"상께서 심리(審理)하라고 명하시었는데, 이른바 심리한다고 하는 것은 상습범과 과실범을 자세히 살펴서 조처하는 것입니다. 몇몇 대신과 해조의 당상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하되 면전에서 분별하여 가리게 해서 하늘의 재변에 답하는 알맹이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의심스러운 자가 많지 않은 듯하다. 대신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이에 이해창(李海昌)과 박안제(朴安悌) 등을 석방하였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조정에 하직하였다.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현재 팔도가 모두 요역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나 서로(西路)와 같이 심한 곳은 없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서로에서 가장 큰 병폐가 되고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인부와 말의 폐단입니다. 전에는 감사가 자못 축적해 놓은 것이 있어서 편의에 따라 조처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장차 백성들에게 책임지워야 할 상황입니다. 백성들이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들이 왕래하는 폐단이야 말할 것이 없으나 우리 나라의 사신들도 민력(民力)을 생각지 않는다. 지난번에 황해 감사 임담(林墰)의 장계를 보니 ‘조정의 사목(事目)을 벽 위에다 붙여놓아 사신들이 모두 목격하는데 조금도 준행할 뜻이 없으니, 감사가 금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서로의 수령들은 대부분 무인(武人)들이기 때문에 풍부하게 물자를 대주어 명예를 높이는 밑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자를 간간이 연로의 수령으로 삼는다면 조금은 그 폐단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장(營將)이 겸대하는 고을이 아니면 섞어 차임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잠상(潛商)의 폐단이 이미 몹시 심한데, 그들이 또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니 모두 뒷날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결과가 된다. 의주(義州)로 하여금 항상 엄하게 금지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감사도 살피는 것이 옳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부윤(府尹)과 함께 특별히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엄하게 방지하겠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의 속임수가 갖가지여서 아마도 금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용골대는 저들 가운데 고관인데도 밤을 틈타 우리 나라의 장사꾼들과 사사로이 매매하고 있습니다. 정명수(鄭命壽)는 우리 나라의 역관 무리들과 함께 동관(同官)이라고 칭하면서 거리낌 없이 왕래하는데, 대화하는 사이에 어찌 말을 가려서 하겠습니까. 말이 누설되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비단 잠상들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구봉서(具鳳瑞)가 아뢰기를,
"서울 관아의 서리(胥吏)들이 반 가량은 역관들의 친속인데, 모든 문서에서 비밀로 하고자 하는 일을 가장 먼저 전파하여 저들에게서 한밑천 잡으려 하고 있으니, 일의 비밀이 지켜질 리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달제(吳達濟)에게 유복(遺腹)의 딸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의 형인 오달승(吳達升)이 고원 군수(高原郡守)로 있을 때 달제가 가까이한 관창(官娼)이 있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북쪽 태생이어서 감히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몹시 애처롭다. 면천(免賤)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1일 신축
충청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원두표(元斗杓)가 치계하기를,
"적상 산성(赤裳山城)은 산세가 높고 가파라서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합니다. 만약 승도(僧徒)들을 모집하여 들여보내지 않으면 지킬 수 없습니다. 승려 각성(覺性)을 삼남 도총섭(三南都摠攝)이라고 칭하여 인신(印信)을 지급해 주고서, 그로 하여금 문도(門徒)들을 거느리고 성 안에서 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본도 총섭이라고 칭하여 지키는 데 편리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을사
영중추부사 윤방이 차자를 올려 사직 제조(社稷提調)를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연전에 죄를 입은 것은 오로지 신주(神主) 받드는 것을 삼가지 못해서이니, 지금에 이르러 결단코 제조의 직임을 다시 맡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세 차례나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정광경(鄭廣敬)을 대사헌으로, 유심(柳淰)을 부교리로, 이회(李禬)·이천기(李天基)를 정언으로 삼았다.
가산성(架山城)의 읍명(邑名)을 칠곡부(漆谷府)로 정하고 윤양(尹瀁)을 부사로 삼았다.
5월 27일 정미
유성(流星)이 천변성(天弁星) 위에서 나와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들어갔다. 또 우성(牛星) 위에서 나와 허성(虛星) 아래로 들어갔다.
5월 28일 무신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기관성(騎官星) 위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에까지 비치었다.
5월 30일 경술
집의 김광혁(金光爀)을 동부승지로, 이필행(李必行)을 집의로 삼았다.
대사간 박황(朴潢) 등이 호조의 서리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진달하면서 낭관을 파직하고 서리를 엄하게 형신하여 외방의 백성들에게 사죄할 것을 청하니, 상이 관원은 추고하고 서리는 수치(囚治)하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전(李慶全)이 병으로 사면하였다. 경전은 사람됨이 간사하였으며 처세에 능하였다. 그리고 착용하는 관복(冠服)을 항상 미천한 자와 같이 하였다. 혼조(昏朝)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장차 무너질 것을 알고 점차 소원하게 하여 드디어 화를 면하였다. 정축년 이후에 판서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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