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임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묻기를,
"가뭄이 이렇게 극심하니, 굶주린 백성을 어떻게 진구하겠는가?"
하니, 영상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반드시 공물 등을 줄여 변통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삭감을 거듭해 온 나머지 각사를 점검해 보아도 더 이상 줄일 곳이 없습니다. 백성들을 모아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한데, 재력 있는 백성들의 소망은 실직첩(實職帖)을 받는 데 있습니다. 신도 관작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조종조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곡식을 바친 사람 가운데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직과 걸맞는 인재를 잘 가려서 관직을 제수하되, 규정을 엄격하게 세워서 문란하고 혼잡한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국가가 무사할 때에 미리 장수의 재목을 기르지 않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지금의 나라 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데이겠는가. 먼저 장수의 재목을 얻어 그를 후하게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예로부터 어지러운 때를 틈타 떨쳐 일어나서 공명을 세운 자들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큰 난리를 누차 겪었는데도 아직껏 한 사람도 앞장서서 떨쳐 일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상이 구굉(具宏)에게 이르기를,
"경기의 군병을 도감(都監)과 총융청(摠戎廳)에 나누어 소속시킨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인데, 지금 서로 견제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총융사(摠戎使)를 가려 임명해서 전과 같이 나누어 소속시키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신경원(申景瑗)은 재능이 총융사의 직임에 합당합니다."
하고, 대사간 박황(朴潢)이 아뢰기를,
"전쟁에서 패한 장수일지라도 춘추 시대의 맹명(孟明) 같은 사람이라면 다시 기용하여 공 세우기를 요구할 수 있겠지만, 남보다 뛰어난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 다시 중대한 직임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옥당에서 올린 차자 가운데 온당치 않은 문자가 있기에 다시 짓게 하였으나 끝내 내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 소를 올려 체직되고야 말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자신의 과실을 듣기 싫어하여 자신을 나무란 문자를 지우라고 명했다면 신하로서 의당 순종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차자의 경우는 내용이 청(淸)나라에 관계된 것이어서 실로 아무런 이익도 될 것이 없는데, 굳이 고집하여 고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서 더욱 상하가 서로 화합하지 못함을 알겠다."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매양 세초(歲抄)015) 에 대해 모두 서용하였습니다. 요즘 소계자(小啓字)016) 를 찍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하고,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가지고 성상의 뜻을 은밀히 엿보는 것은 매우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 있는 자가 요행으로 서용되면 인사를 맡은 관원이 반드시 번거롭게 자주 의망해야 되므로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7월 4일 계미
내주방(內酒房)의 주미(酒米)를 감하였다.
7월 5일 갑신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오는데, 각 고을로 하여금 모두 역참에 나와 출영하지 말도록 하였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오는데, 각 고을로 하여금 모두 역참에 나와 출영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원진(李元鎭)을 교리로, 심택(沈澤)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6일 을유
지평 이이존(李以存)이 아뢰기를,
"병조의 낭관 선발이 본래의 규정에 크게 어긋나서 혼잡하다는 탄식이 있으나, 그래도 일찍이 4품을 지낸 사람을 낭관으로 삼은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의 정사(政事)에서 전 군수 이진(李𥘼)을 병조 정랑에 으뜸으로 의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심택은 일찍이 정언으로 있을 적에 시사(時事)를 말한 것이 사리에 어긋나서 여론이 그를 그르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대간·시종의 직에 의망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판서와 낭관이 참여하지도 않은 정사에서 갑자기 그를 정언의 수망(首望)으로 의망하였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이 이조의 당해 당상을 추고하기를 청할 일과 심택을 체직하기를 청할 일로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내 발의했으나, 신의 말이 신용을 얻지 못하였으니, 신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그러자 대사헌 정광경(鄭廣敬), 장령 유경즙(柳景緝)은 나중에 다같이 회좌(會坐)할 때를 기다려 논의하자는 뜻으로 답하였으나 그 말이 신용을 얻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지평 이시만(李時萬), 집의 이행우(李行遇)는 이이존의 소견과 서로 같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장령 이래는 관리가 지켜야 할 직무 규정에 익숙하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박황(朴潢)이 처치하여, 이이존 등은 모두 출사하게 하고 이래는 체직하도록 청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고 이이존도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7월 7일 병술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우림성(羽林星) 위로 들어갔다.
훈련 도감의 초관(哨官) 장사한(張師漢)·윤전지(尹全之) 등이 역적 이괄(李适)의 잔당으로 망명한 김개(金介)를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의 아우 최만길(崔晩吉)의 집에서 체포하여 보고하였다. 도감이 아뢰기를,
"이 역적이 송도(松都)에서 이괄을 맞이하여 호조 정랑이라 자칭하고 이괄과 함께 도성에 들어와 길거리에서 군졸을 모집하였으니, 하찮은 졸개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의 명에 따라 장사한 등에게는 상을 주고 김개는 율에 의거하여 사형에 처했으며, 최만길(崔晩吉)은 죄인을 은닉시킨 죄로 잡혀와 신문을 받고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역적 김개는 천한 노예라고는 하지만 도주했다가 다시 돌아온 지가 이미 수년이 되었으니, 그가 망명했던 흉인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최만길이 그를 용납하여 받아들인 죄는 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완성 부원군 최명길은 나라에서는 대신이요 집안에서는 가장인데 일을 꾀하는 것이 어리석어 일찌감치 처치하지 못함으로써, 이제야 그 정상이 드러나 역적이 이미 처형되었으니, 그가 역적을 용납하여 보호해 준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시키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경상도 인동(仁同)의 남녀 두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7월 8일 정해
전 강원 감사 최현(崔晛)이 죽었다. 최현은 영남 사람으로 문예가 있고 단아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반정(反正) 후에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지내고 강원 감사로 나갔다가 이인거(李仁居)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폐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이조 참의 김세렴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이는 이이존이 논핵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1일 경인
심양에 가 있는 재신(宰臣) 김신국 등이 치계하였다.
"전일에 범문정(范文程)017) 등이 우리 수군이 도착한 곳을 다녀왔는데, 그 다음날 문정 등이 황제의 명을 전하여 이르기를 ‘임경업(林慶業) 등의 수군이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려 하지 않고, 쌀부대를 요하구(遼河口)에 내리라고 해도 가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인가?’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지금 이 말을 듣고 보니 비록 그 진퇴의 쉽고 어려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문정이 말하기를 ‘5월 그믐날 수군이 한선을 만났는데도 발포하지 않았고, 발포하더라도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였으며, 그 앞에 있던 배도 또한 서로 구해 주지 않았다. 또 배 3척은 표류해 가버렸다고 핑계하였는데, 한인(漢人)이 빈 배 한 척에다 조선 사람 2명을 실어 보냈다. 한선 38척이 또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도 그들과 맞아 싸우지 않았으니, 이는 곧 조정의 분부로 인하여 한인과 서로 내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본국이 힘을 다해 군대를 징발하여 화기(火器) 등 전쟁 기구를 많이 싣고 갔으니,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는가. 그리고 장수를 정하여 국경을 나갔으면 성패가 장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그 내막을 조정과 관중(館中)이 알 바이겠는가. 그 공죄(功罪)와 상벌(賞罰)에 대해서는 오직 대국의 처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본국이 어떻게 관여하여 알 수 있겠는가.’ 하자, 문정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칙서를 가지고 가서 임경업을 회유하겠다.’고 했습니다."
이행우(李行遇)를 응교로, 이상형(李尙馨)을 집의로,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김상(金鋿)을 지평으로, 김응조(金應祖)를 헌납으로, 이명웅(李命雄)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7월 12일 신묘
신경원(申景瑗)을 총융사로 삼았다.
7월 13일 임진
처음에 한인 남녀 1백 65명을 평안도 양덕(陽德) 등 아홉 고을에 나누어 안치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국이, 금년까지만 그들을 그곳에 안치시켜두고 그대로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고, 내년부터는 제각기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금년까지만 양식을 공급해 준다면 내년 봄에는 반드시 지탱하여 살아날 방도가 없을 것이다. 내년 보리가을까지 양식을 공급해 주라."
하였다. 이들은 곧 가도를 공격한 후 각지에 나누어 안치한 한인들이다.
한인 남녀 5명이 심양으로부터 도망쳐 오다가 의주(義州)에서 붙잡혔는데, 비국이 심양으로 압송하기를 청하였다.
7월 14일 계사
상이 충청 감사 이후원(李厚源),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에게 내년 봄까지 그대로 더 유임하여 진휼하는 정사를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박로를 도승지로, 이빈(李彬)을 지평으로, 이시해(李時楷)를 부교리로 삼았다.
7월 15일 갑오
경상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치계하기를,
"풍기(豊基) 사람 박지영(朴之英)이 꿈에 황지(黃池)의 능묘(陵墓)를 찾아냈다 하고 이어 몽서(夢書) 1책을 올렸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목조(穆祖)018) 의 황고비(皇考妣)가 전주(全州)에서 삼척(三陟)으로 옮겨가 살다가 죽자 그곳에 장사지내고, 목조는 북도(北道)로 옮겨가 그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마침내 삼척에 있는 장지(葬地)의 소재를 잃어버렸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능이 황지의 노동(蘆洞)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투장(偸葬)을 했다.’고 하나 사실인지 알 수가 없고, 《여지지(輿地誌)》에도 노동과 동산리(東山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어느 언덕인지 알 수가 없어, 여러 대의 조정에서 그곳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박지영이 스스로 말하기를,
"꿈으로 인하여 그곳을 알아냈는데, 그곳 가까이 사는 주민이 그 묘를 파내고 정혈(正穴)에 투장을 했다. 태조·세종·선조 세 임금의 신령이 나에게 그곳을 가르쳐 주면서 조정에 그 사실을 고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그 말이 영남 일대에 전파된 지가 수년이 되었다. 박황(朴潢)이 그 이웃 고을을 왕래하다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서울의 여러 재신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에 감사로 하여금 그곳을 방문하고서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이른바 몽서(夢書)는 글이 무려 1만여 자나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백두산(白頭山) 정맥(正脈)이 태백산(太白山)에 결집하여 동해(東海)를 안(案)으로 삼았으니, 황지의 묘는 곧 운이 트여서 왕이 나올 좋은 묏자리이다. 조선의 왕업이 본디 여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지금 간악한 백성이 그곳에 투장하여 선조의 신령이 안식처를 잃었기 때문에 나라에 난리가 많이 일어나서 장차 위망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금 만일 다시 장사를 지내고 봉분을 하고 나무를 심는다면 국운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 임금의 신령께서 선령(先靈)이 간악한 백성에 의해 파헤쳐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국운이 연장되지 못할까 걱정하여, 하루 빨리 조정에 보고하기를 재촉하였는데, 그 말씀이 매우 간절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지석(誌石)과 표석(表石)이 모두 있는데, 모처에 간직되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 임금께서 명패(命牌)와 옥규(玉圭)를 주어 신표(信標)로 삼도록 했다."
하였는데, 말들이 분명치 못하고 괴이하며, 이른바 명패니, 옥규니 하는 것은 더욱 황당하였다.
청국에서 재신을 시켜 치계하기를,
"수군 1천 명만을 지금 골라서 쓰고 그 나머지는 육로를 따라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곳에 머물러 있는 군졸의 양식과 노자 및 기마(騎馬)를 아울러 모두 들여 보내시오."
하였다. 상이 이에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묻기를,
"청국에서 보낸 서한 내용이 이러한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금주(錦州)의 싸움이 필시 오래갈 터인데, 그 양식과 노자를 어떻게 다 대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량 대는 일뿐만이 아니라, 군대를 교체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니, 영의정 홍서봉이 아뢰기를,
"옷은 유의(襦衣)019) 를 만들어 보내고, 군량은 은자를 가지고 심양에서 무역을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황지의 능묘에 관한 일은 증거가 될 만한 사책이 없으니, 꿈속에 있었던 일을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일을 말한 자가 있으니 또한 방치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그의 말은 정도에 어긋난 것이 많습니다. 막중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어찌 꿈속의 일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유신(儒臣)에게 널리 상고하도록 하여 처리해야만 후세의 비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박지영을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보고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옳다. 능묘에 대해서는 그 진위는 알 수 없으나, 만일 지리를 아는 자에게 보인다면 운이 트일 자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이 과연 운이 트일 자리라면 남들이 투장을 못하도록 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16일 을미
심양에서 원손(元孫)020) 을 돌려 보내도록 허락하였다.
7월 17일 병신
헌부가 아뢰기를,
"도승지 박로는 사람됨이 거칠고 비루하여 사류에 끼지 못한 사람인데, 다만 분주히 왕래한 노고로 인하여 누차 은전을 입어 발탁되어 아경(亞卿)의 지위에 올랐으니, 노고에 보답한 은전이 이미 지극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다시 승정원의 가장 윗자리를 제수하여 관작을 혼잡하게 하십니까.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로는 재간도 있고 공도 있으니, 지금 이 직임에 제수하여도 안 될 것이 없다."
하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평창 군수(平昌郡守) 심지한(沈之漢)은 일찍이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있던 병자년에 마침 우리 군대가 마구 패하여 무너지던 때를 당해서, 명나라 사신을 내쫓는 변을 일으킬 때 조금이나마 가담한 흔적이 있었으니, 사형에 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가 고의적으로 한 사실이 없었음을 특별히 용서하여 비록 형률은 쓰지 않았다 할지라도, 지금 곧바로 수령의 직임을 제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성태구(成台耉)를 장령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8일 정유
남이공(南以恭)이 죽었다. 그의 관작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이공은 사람됨이 임기 응변의 꾀가 많고 당론(黨論)을 좋아하여, 전후 조정에 있는 동안 오직 알력만을 일삼았다. 정축년 이후에는 최명길에게 아부하여 이조 판서가 되고 급급하게 모의하여 자기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므로, 상이 좋게 여기지 않자 이공이 마침내 사직을 청하여 체직되었다. 그 후 청나라에 인질보내는 일로 파직되었다가 이 때에 이르러 죽었다.
7월 19일 무술
강화 유수 이경직(李景稷)이 죽었다. 경직은 타고난 국량과 인품이 뛰어났고, 집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였다. 광해조에는 실정 밖의 억울한 비방을 입기도 하였다. 반정 후에는 재주와 국량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나 여러 벼슬을 거쳐 호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7월 21일 경자
홍무적(洪茂績)을 장령으로, 이천기(李天基)를 정언으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사은사(謝恩使)로, 안응형(安應亨)을 부사로, 윤득열(尹得說)을 서장관으로, 목성선(睦性善)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4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총융사 신경원은 자신이 원수(元帥)이면서 반 걸음도 적을 향해 전진하지 못하고 몸을 빼서 달아나다가 마침내 적에게 사로잡혔으니, 형벌을 가하지 않은 것도 이미 매우 형법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갑자기 총융사의 중대한 직임을 제수하십니까?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신경원이 성을 이탈하여 몰래 사잇길로 빠져 나간 것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던 것이니, 다시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실정 밖의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요즈음 요사한 사람이 괴상 망측한 말을 많이 늘어놓은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조정에서 장차 그 사람을 불러서 물어보려고 한다 하니, 어찌 그런 괴이한 무리로 하여금 도성까지 와서 괴상한 말을 제멋대로 떠벌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은 매우 허황된 것인데, 혹시라도 그의 말을 믿고 쓰게 된다면 식자들의 웃음거리만 될 뿐 아니라, 또한 후일에 난처한 변이 있게 될까 염려됩니다. 박지영을 올라오라고 한 명을 거두어서 뭇사람의 의혹을 풀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불러서 물어보고 처리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엄정구(嚴鼎耉)를 수찬으로, 신득연(申得淵)을 도승지로, 유심(柳淰)을 교리로, 박로를 경기 감사로 삼았다.
7월 27일 병오
유성(流星)이 벽성(壁星) 아래에서 나와 천창성(天倉星) 위로 들어갔다.
경상도에 큰바람이 불었다.
7월 28일 정미
유성이 등사성(騰蛇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을 비추었고 소리가 있었다.
세자가 문학 임전을 보내어 문안례를 행하였다.
7월 29일 무신
수군의 부장(副將) 이완이 돌아오다가 봉황성(鳳凰城)에 도착하여 치계하였다.
"7월15 일에 제군(諸軍) 및 선격(船格) 4천 6백 51명을 거느리고 상장(上將) 임경업(林慶業)과 함께 개주(蓋州)를 출발하여 귀국하는데, 경업은 군졸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해주(海州)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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