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0권, 인조 18년 1640년 6월

싸라리리 2026. 1. 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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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신해

지평        정태제(鄭泰齊)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저삼(苧衫)의 사용을 금하였는데, 금리(禁吏)가 잡아온 자가 바로 어떤 상신(相臣) 집의 여종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즉시 석방하라는 뜻이 쓰여있고 끝에 서명이 되어 있는 쪽지가 동료에게 왔습니다. 이에 동료가 그 쪽지를 신에게 보이는데, 신의 뜻으로는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실로 거실(巨室)들이 먼저 범하는 데서 말미암는다. 비록 이것이 상신의 청이기는 하나 뜻을 굽혀 따르기는 어려울 듯하다.’고 여겨서 드디어 그 삼(衫)을 불태웠습니다. 그러자 상신이 즉시 본부의 도리(都吏)를 불러 꾸짖고, 또 금리를 배리(陪吏)로 늑정(勒定)하여 벌을 주었습니다. 금령(禁令)이 행해지지 않음이 장차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고, 김경(金坰)은 아뢰기를,
"신이 집에 있을 때 어떤 하인이 와서 상신의 말을 전하기를 ‘집안의 여종이 저삼의 금법을 범하였는데, 분간해 주면 다행이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쪽지를 받아보니 여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또 서명이 있었습니다. 신은 그 쪽지를 정태제에게 보내어 그의 처분에 맡겼습니다. 신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간청이 들어옴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고, 홍무적(洪茂績)은 아뢰기를,
"지난번에 영의정        홍서봉 집 종이 금법을 범하였는데, 서봉이 즉시 부리(府吏)를 불러서 억지로 감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어찌 상신이 이런 비루하고 체모를 잃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고, 하인이 농간한 말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서봉의 여종이 잡혀왔는데 서봉이 쪽지에다 서명을 하여 신의를 보여서 김경에게 보냈으며, 속히 시행하지 않은 데 대해 화를 내어 금리를 배리(陪吏)로 늑정하여 곤욕을 주었습니다. 금리에게 곤욕을 준 것은 바로 대관(臺官)에게 곤욕을 준 것입니다.
신은 대관으로 있으면서 재상이 법을 어긴 날에 즉시 탄핵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헌        정광경(鄭廣敬), 지평        이래도 역시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상신의 간청을 따르지 않은 것은 심히 법관의 체모를 얻은 것이고, 금리에게 벌을 준 것은 책임질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법관으로 있으면서 금물(禁物)을 감하기를 요청한 것은 몹시 법을 집행하는 뜻을 잃은 것입니다. 대신은 임금 다음으로 체면이 중하여서 가볍게 논해서는 안 되는데, 피혐하면서 헐뜯기를 소관(小官) 탄핵하듯이 하였습니다. 엄정한 풍도는 가상하나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잘못이 저들에게 있고 이쪽은 잘못이 없습니다. 정태제·정광경·이래는 출사하게 하고 김경·홍무적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홍서봉이 차자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열거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6월 2일 임자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위에서 나와 북두성(北斗星) 아래로 들어갔다. 또 직녀성(織女星) 위에서 나와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들어갔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심리(審理)하여 오래된 죄수를 석방하라고 특별히 명하셨으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화기(和氣)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잔뜩 끼기만 하고 비를 뿌리지 않으니 원기가 뭉쳐 있는 듯합니다. 생각건대 임금의 은택을 입지 못한 채 혹 살피지 못하여 오래도록 갇혀 있는 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혹 죄명은 비록 중하더라도 정상은 용서할 만한 자도 있고 혹 정상과 죄명이 모두 중하나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자도 있으며, 고신·얼자로 나라를 떠나 친속과 떨어져 있는 자도 있습니다.
비록 용서하기 어려운 죄를 지은 경우라 하더라도 억울함이 쌓이면 하늘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에 족합니다. 속히 모두 용서해 주는 은전(恩典)을 내려 단비와 같은 은택을 흡족하게 내리시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곧바로 은전을 내리는 전지를 특별히 내려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 가운데 정상과 죄명이 모두 중한 자도 사면하자는 의논은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해사(該司)로 하여금 다시 상세하게 심리하여 원통함을 품고 있는 자들이 모두 풀어질 수 있게 하라."
하였다.

 

6월 3일 계축

최명길(崔鳴吉)을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유철을 사간으로 삼았다.

 

6월 4일 갑인

전라도 금산(錦山)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심양으로 간 보덕(輔德) 정치화(鄭致和)가 와서 주사(舟師)를 독촉하였다.

 

6월 5일 을묘

유성이 북두 제5성 아래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아래로 들어갔다.

 

6월 6일 병진

구인후(具仁垕)를 형조 판서로, 이이존(李以存)을 지평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도승지로, 목성선(睦性善)을 우승지로 삼았다.

 

6월 7일 정사

종묘와 사직 및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지내었다.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문묘(文廟)의 제기(祭器)와 석전 의주(釋奠儀註), 우리 나라 지도(地圖), 청나라 개갑(鎧甲)·편곤(鞭棍)·환도(環刀)·마상장도(馬上長刀)를 보기를 청하였다. 또 준마(駿馬)와 안장 및 응련(鷹連)·황앵(黃鶯)·야학(野鶴)·어피(魚皮)·인삼·필묵·약재 등을 요구하였다. 모두 허락하였으나 청나라의 개갑은 주지 않았다.

 

6월 8일 무오

큰바람이 태묘(太廟)의 나무를 꺾었는데, 소리가 전내(殿內)까지 진동하였다. 위안제(慰安祭)를 지내었다.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에서 사람이 벼락에 맞았다.

 

한재가 있어서 이시방 등 30여 명을 서용하였다.

 

6월 9일 기미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어리석은 자질로 크나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므로 감당해내지 못할까 두려워 밤낮으로 걱정하였다. 그런데 병란과 가뭄으로 번갈아 재해가 들어 18년간 없는 해가 없었다. 금년 여름에는 가뭄이 더욱 혹심하여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오늘부터는 정전(正殿)을 피하여 더욱더 반성하고 자책하는 바탕으로 삼겠다. 감선(減膳)하고 금주(禁酒)하는 등의 일을 각사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지어 널리 직언을 구해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충하라. 또한 생각해 보건대, 이런 재변이 오는 것이 비록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이기는 하나, 모든 집사(執事)에게도 어찌 잘못이 없겠는가. 중외의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하라."

 

6월 12일 임술

유성이 묘성 위에서 나와 천봉성(天棓星) 아래로 들어갔다.

 

경상도 다대포(多大浦)에 크게 우레가 치고 바람이 불어 전선(戰船)이 부수어졌다. 경기 안성(安城)·진위(振威) 등에 우박이 내렸다.

 

정원이 아뢰기를,
"올해의 가뭄이 이처럼 극심하여 겨우 살아 남은 백성들이 모두들 굶어죽을 판이니, 앞으로의 국사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는 형식적이고 말단적인 일로 하늘의 견책에 응하지 마시고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시면서 전하에게 있는 실덕(實德)을 다하소서. 그러면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위로는 하늘의 견책에 답할 수 있어서 재변을 혹 소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난리에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원기(冤氣)는 뭉쳐서 화기(和氣)를 손상시킵니다. 강도(江都)·쌍령(雙嶺)·험천(險川)·안변(安邊) 등처에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위로해 주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재변으로 인하여 면책되기를 빌고, 이어서 재변을 해소시킬 계책을 진달하니, 답하였다.
"차자의 말은 지론이 아닌 것이 없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늘이 재변을 내리는 것은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6월 13일 계해

평안도 성천(成川)·함종(咸從) 등에 크게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다. 선천(宣川)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조석윤(趙錫胤)을 응교로, 이만(李曼)을 교리로, 정지화(鄭知和)를 부교리로, 이덕수(李德洙)를 좌승지로, 김홍욱(金弘郁)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헌부가 전지(傳旨)에 응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구언은 하면서 채용하려는 성심이 없고, 사람을 쓰면서 공명하게 하려는 성심이 없으며, 상하간에 서로 믿으려는 성심이 없고, 신하들은 일을 담당하려는 성심이 없는 이 네 가지는 현재 온갖 폐단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수사에서 옥을 설치한 폐단은 그 유래가 오래입니다. 지난번 원옥을 심리할 때에 균등하게 석방되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임금이 옥사를 결단하는 데에는 의금부도 있고 형부(刑部)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몸소 안옥(按獄)하시면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막중하고도 막대한 권한을 내시의 무리들에게 준단 말입니까. 서민들 중에 가슴을 치는 자가 없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원통함을 품으면 재변을 불러들이기에 족한 것인데 더구나 한 사람뿐만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의 말은 지론이 아닌 것이 없다. 내 마땅히 두렵게 생각하며 스스로 노력하겠다."
하였다.

 

집의 이필행(李必行)이 병으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우부승지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뙤약볕이 연일 계속되는데다가 풍재(風災)마저 있어 종묘의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진동하였으니, 하늘이 보인 경고가 심히 두려워할 만합니다. 전하께서 지극히 근심하시나 하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아 전혀 감응이 없습니다. 우리 동방의 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신은 해당 승지로 있으며 날마다 수안(囚案)을 보는데, 그 가운데 혹 원통함을 품고 있으면서 신원되지 못한 자가 있을까 매양 염려하였습니다.
조선(漕船)들 가운데 가까운 근해에서 부서지는 것은 대부분 조졸들이 훔쳐내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해 주는 것은 폐단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망망 대해에서 대풍을 갑자기 만나 온 배 안의 사람 중 죽은 자가 몹시 많은 경우, 그것이 어찌 고의적으로 부서지게 한 것이겠습니까. 살아 남은 자는 다행히 목숨만 건진 것입니다. 가두고 심문하며 잃어버린 것을 모두 징수한다면, 한 몸만 간신히 살아나 다른 고을에 갇혀 있으면서 어떻게 수백 석의 쌀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는 호남에서 부서진 배의 조졸을 호서(湖西)에 가두었었습니다. 국법으로 말한다면 비록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우나 재변을 만나 특별히 신리(伸理)하는 경우이고 보면, 이것은 완전히 용서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봉상시의 하리들이 국법을 무시하고 중포(中脯)를 만들어서 방납(防納)할 계책을 짰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간악하기는 합니다만, 범법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도 않은 자가 2년이 되도록 옥에 갇혀 있으며, 형신을 받은 것도 여러 차례입니다. 그 가운데에도 역시 원통한 사정이 없지 않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박충겸(朴忠謙)의 아들 박정길(朴廷吉) 3형제가 수감되었는데, 두 사람은 은택을 입어 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정길은 4년이 되도록 홀로 석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길이 과연 부모의 원수를 갚았다면 갇힌 채 죽더라도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원수를 갚지 못한 채 홀로 옥중에서 죽은 귀신이 된다면 어찌 지극히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상의 몇 사람들이 그 죄가 의심스러운데도 신리할 때에 논의되지 못한 것은 아마도 비천한 자들이어서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버러지같은 미물에 대해서도 임금은 양치질하면서 피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막중한 인명에 대해서 어찌 귀천을 구별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6월 14일 갑자

간원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본조(本朝)는 임금과 신하간의 존엄함이 고려조보다 더욱 엄격합니다. 그런데 성상에 이르러서는 신료들을 접견함이 드물 뿐만 아니라, 또한 지나치게 아무 말없이 묵묵히 지냅니다. 이에 고굉이나 심복으로서 헌납(獻納)하고 논사(論思)하는 신하들이 주야로 헤아려 전하 앞에서 충성과 규계를 진달하면서도, 항상 전하께서 거부할까 걱정스러워 속에 품은 생각을 다 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더구나 소원한 신하가 한차례 전하를 뵙고는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은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아조(我朝)의 사문(赦文)에는 본래 ‘관계 국가(關係國家)’라는 네 자가 없었는데 중종조의 간신(奸臣)인 김안로(金安老)가 정사(正士)들을 금고시키고자 이런 조목을 만들어서 사대부들에게 관계되는 일이면 아무리 하찮은 죄를 지은 경우에라도 ‘관계 국가’라는 조목을 적용시켜 풀려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계책이 참으로 간교하고도 참혹스럽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한번 현재의 사문(赦文)을 보십시오. 그러면 잡범(雜犯)의 경우에는 사죄(死罪) 이하가 모두 석방되는데 사대부들에 이르러서는 ‘관계 국가’라는 핑계로 파직되거나 삭직된 자들까지도 품재(稟裁)하는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여 사면해 주는 본뜻이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인종께서 등극하신 처음에 즉시 바로잡도록 명하였는데, 인종께서 승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을사년의 간흉들에 의해서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법령과 같이 준행해 온 것입니다.
지금 비록 예전의 잘못된 규례를 완전히 혁파하여 널리 은택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명을 석방해 주는 것만으로는 원기(冤氣)를 풀고 천심(天心)에 부응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 이경전(李慶全)은 혼조(昏朝) 때 허물을 지어 자신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반정(反正) 후에 즉시 정죄하지 않고 작위(爵位)를 보존해 주었으니, 은택이 지극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정성을 다해 보답하기를 도모하면서 죽기로써 기약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관직에 있으면서는 공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장난하듯이 하였으므로 물정이 분개해 온 지 오래입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시사가 위태로워지자 인질을 보내는 것을 모면하고자, 공의(公議)는 돌아보지 않고 육경(六卿) 자리 피하기를 함정 피하듯이 하면서 잇달아 사직서를 올려 기어이 체직되고자 하였습니다.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탈 관작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홍서봉이 재변으로 인하여 면책되기를 구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5일 을축

유성이 묘성 위에서 나와 오거성(五車星) 아래로 들어갔다.

 

연안(延安)·배천(白川)·봉산(鳳山)·황주(黃州) 등지에 크게 바람이 불었다.

 

6월 16일 병인

유성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北斗星) 아래로 들어갔다.

 

김집(金集)을 우부승지로, 이행우(李行遇)를 집의로 삼았다.

 

6월 17일 정묘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 하늘가로 들어갔다.

 

6월 19일 기사

강원도에 가뭄이 있었다. 춘천부(春川府)에서 벼락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원주(原州)에 크게 바람이 불었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계해년 이후의 《일기》를 강화 사고(江華史庫)에 옮겨 보관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된 뒤에 건(件)에 따라 일일이 헤아려 보니 전권(全卷)이 없어진 것이 47책이나 되었습니다. 만약 속히 찬수하지 않는다면 전사(全史)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특별히 명망 있는 사람을 택하여 나누어 찬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0일 경오

유성이 심성(心星) 위에서 나와 미성(尾星) 아래로 들어갔다.

 

경상도 예천(醴泉)에 벼락이 쳐서 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21일 신미

행 호군 이경의(李景義)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의 일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은 비록 용서할 만해도 자취는 가리기 어렵습니다. 밝고 밝은 하늘에게 어찌 용서할 만한 정상을 살펴 가리기 어려운 자취를 용서해 주기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항상 이 점에 대해 두렵게 여기면서 애통해 하여 일각도 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하의 그런 마음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참으로 여러 신하들이 충성스럽지 못한 죄입니다.
재상이 된 자들은 안배하여 성취하는 방도를 잃었고 장수가 된 자들은 침략을 방어하는 계책이 없습니다. 상하는 모두 태평스럽게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으며, 사당(私黨) 세우기를 힘써 서로 파당을 만들고 있으며, 사사로움을 행하고 공도(公道)를 멸시하여 탐욕스러운 풍조가 극성스럽습니다.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들이 벼슬에 나올 준비를 하고 점잖은 선비들은 손을 빼고 물러나고 있습니다. 당의(黨議)를 좋아하는 자들은 이쪽이나 저쪽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무리들이어서 세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날뛰며 한 사람도 용감하게 앞장 서서 국사를 담당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이처럼 방자하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깊은 궁궐 속에 계시니 어떻게 외정(外廷)의 상황을 아실 수 있겠습니까. 말이 이에 이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을 치고 통곡하게 됩니다. 전하께서도 항상 하늘을 본받아 좋아하고 싫어함과 쓰고 버림을 한결같이 하늘의 뜻에 따르며 조금도 속이거나 거절하는 사사로움이 없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정축년014)   이후로 난을 당하였을 당시의 어려움을 잊고 계십니다. 원유(苑囿)와 누각에서 유람하기를 그치지 않고 기예(技藝)와 화석(花石)이 줄지어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전하께서 부득이해서 하시는 것입니까. 상방(尙方)의 신하들은 다투어 사치스럽게 하기를 힘써 미쁨을 받는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내수사의 관원은 이익을 노리고 허물을 저질러 영합하려는 계책을 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전하께서 무슨 취할 것이 있다고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총애한단 말입니까. 위(魏)나라 태화(太和) 2년에 크게 가뭄이 들었는데, 선유(先儒)들은 궁실을 높고 크게 하고 의복과 음식을 사치스럽게 한 응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일이 불행히도 여기에 가까우니, 신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궁궐 안의 일에 대해서는 금법(禁法)이 있어서 외부 사람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길가나 민간에서 여기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짓은 일이 없는 평상시의 어리석고 용렬한 임금도 하지 않던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오늘날에 어떻게 차마 하신단 말입니까. 신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심하였다가 끝내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는 놀라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곧바로 전폐(殿陛) 아래에 나아가 머리를 부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득이한 것을 마음속으로 두렵게 여기시면서 더욱더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다하소서. 척연히 근본을 돌이키어 개과 천선하며, 군자를 등용시키고 소인을 내치며, 사치를 제거하고 검약을 숭상하며, 좋아하고 미워함을 한결같이 하늘의 뜻에 따라 하소서. 그리고 죄가 있는 자는 용서하지 말고 죄가 없는 자는 깨끗하게 석방하며, 원유(園囿)와 놀이하는 도구를 혁파하고 상방궁과 내수사에서 보관한 것을 없애소서. 전하께서는 편전(便殿)에 앉아 계시면서 군신을 불러보되 스스로를 책하고 스스로를 면려하여 가언(嘉言)이 모두 진달되게 하고 모든 계책이 반드시 거행되게 하소서. 그러면 하늘과 사람은 한가지 이치여서 곧바로 감응이 있을 것으로, 어찌 비가 쏟아지는 감응만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에게 병이 있어서 조섭하는 중에 병을 조리하는 방도를 조금 터득했습니다. 옛날에 송나라 유신(儒臣)인 여조겸(呂祖謙)이 처음에 양병술(養病術)로 인하여 곧바로 양심술(養心術)을 깨달았는데, 오래도록 함양(涵養)하여 크게 효험을 보아서 병을 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심학(心學)의 공을 이루었습니다. 귀천은 비록 다르나 효험을 얻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차분히 조섭하시는 가운데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힘을 써 조존(操存)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해 양병하여 양쪽 다 묘리를 얻는다면, 오늘날 옥후가 편치 않은 것이 뒷날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는 바탕이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때때로 와내(臥內)에서 유신들을 인견하시어 인심의 사정과 시정(時政)의 득실 및 재변을 불러온 까닭과 하늘에 응답하는 방도에 대해서 토론하여 해결책을 강구하소서. 그리고 환관과 궁첩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면 오늘날의 끊임없는 재변이 우리 동방 백성들의 복이 되고 종사의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전라도 광주(光州)·태인(泰仁)·임피(臨陂)·영암(靈巖)·구례(求禮)·화순(和順) 등읍에 벼락이 쳐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다.

 

6월 23일 계유

예조가 서쪽으로 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장졸(將卒)에 대하여 향(香)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조석윤(趙錫胤)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총명을 타고나시었으나 예전의 성왕(聖王)이 되려는 목표가 없고, 만기(萬機)를 부지런히 처리하시나 평소에 무언가 크게 이루어 보려는 뜻이 없습니다.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미리 헤아리는 병폐가 있으며 말을 듣는 데에는 포용하는 도량이 부족합니다. 호오와 진퇴가 혹 편벽된 데서 나오기도 하고 호령과 조처가 사정(私情)에 가리워지기도 합니다. 정사는 관례를 따르기만 하면서 대부분 고식적으로 처리합니다. 이에 청명하던 처음의 정치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고, 어지러움을 다스려 반정(反正)한 공이 날로 위축되게 되었습니다. 근본이 병이 들면 외모(外侮)가 따르는 법으로 화란이 계속 일어나 끝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온 나라 백성들만 통탄스럽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들의 영령도 반드시 아득한 곳에서 상심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나라를 일으켰으니, 위 문공(衛文公)이나 월(越) 구천(句踐)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겪으신 병자년 난리는 들판이나 산에 거처한 데 비할 바가 아닙니다. 천지가 위치를 바꾸고 온 나라가 오랑캐가 되는 변고여서 위 문공이나 월 구천도 겪지 않았던 바입니다. 당시의 일은 종묘 사직을 위해서였고 백성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표(表)를 바치고 신하라 칭하며 예를 낮추고 후한 폐백을 준 것은 참으로 모면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조종에 대한 일념이야 어찌 밥먹을 때나 쉴 때나 잊을 수 있겠으며, 우리 나라가 자강(自强)하는 것을 어찌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서쪽으로 군사를 보내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일 가운데서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전하께서 애통하고 절박한 마음이 도성(都城)을 떠날 때보다 더하실 것입니다. 신들은 전하께서 이런 변고를 만난 이래로 마음을 충동시켜 성품을 참을성 있게 만들며, 전의 일에 징계되어 뒷날을 삼가며, 각고 면려하여 분발하며, 감히 스스로를 편하게 하지 못하면서 과연 문공과 같이 삼베 옷을 입고 삼베 관을 쓰며, 구천과 같이 불을 쥐고 얼음을 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길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근년 이래로 의복과 음식 및 기완(器玩)을 자못 사치스럽게 하고 원유(園囿)와 대지(臺池)도 꾸며 장차 편히 쉬면서 놀이나 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 아닌 말이 떠돈 것이라 한다면 그만이겠습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사실에 가깝다면 어찌 크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생각건대, 내수사를 설치한 것은 본래 사방의 오직 정상적인 지공만을 쓴다고 하는 성왕(聖王)의 도가 아닙니다. 무릇 임금의 일용(日用)을 받드는 것은 유사(有司)가 모두를 충분하게 지공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필 사재(私財)와 사노(私奴)를 가지고 있어 재화(財貨)를 늘리지 않는다는 덕목에 누가 되게 하신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도 오히려 여기에 연연해 함을 면치 못하시니, 모든 고질적인 폐단을 씻고 통렬히 스스로 힘쓸 뜻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이 어떠한 시기라고 보고 계십니까. 천고에 없었던 화란을 겪었고 백세토록 씻기 어려운 수치를 당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겨우 털 한 오라기에 매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군신 상하가 절치 부심하고 각고 면려하면서 모두들 천하에 얼굴을 들고 살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밤낮으로 게으름 없이 크게 구제하여 어려움을 헤쳐나갈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성상의 거조와 조정의 기상은 평소와 다름을 볼 수 없으며, 도리어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형세가 십분 위급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한심하게 여길 것입니다. 만약 나라의 운명이 오랑캐들에게 달려 있어서 손쓸 방법이 없다고 한다면, 자신을 굽히고 힘을 다하여 원수를 위해 역사(役事)에 나아가는 것은 대개 한때의 권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경 지위(天經地緯)와 사람이 사람된 까닭은 끝내 그것을 하찮은 물건이나 하찮은 일이라 하면서 쉽게 끊을 수는 없습니다.
수치를 씻고 자신을 신장시킴은 비록 창졸간에 이루어지기를 기약할 수는 없으나, 각고 면려하면서 자강할 계책을 도모한다면 하늘과 사람이 협응(協應)하리니, 어찌 이룰 수 있는 길이 없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병자년 난리 때 싸움터에서 오랑캐의 칼날에 죽은 자가 얼마입니까. 병란에 가까스로 살아 남은 뒤에는 또 가렴 주구와 사신 지공에 시달리고, 기한에 떨며 흩어져 부자간에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뒤이어 꼼짝 못하게 윽박질러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닷길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이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은 전고에 없던 바입니다. 그런데다 가뭄과 흉년의 재변이 또 한꺼번에 혹독하게 닥쳤습니다. 이러한 때에 임금이 진실로 애통해 하고 측은해 하면서 급급하게 보호해 주기를 불속에 있는 자를 꺼내고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듯이 하지 않는다면 백성을 통하여 보고 듣는 하늘이 어찌 죄를 내리지 않겠습니까.
현재 팔도에 모두 재변이 들어서 곡식을 옮길 길이 없으며, 저축도 완전히 고갈되어서 창고를 풀 수도 없습니다. 신들은 조정에서 구황하는 정책을 펴면서 어떻게 계획을 낼지 모르겠습니다. 무릇 관직을 팔아 곡식을 모으며, 관청을 설치하여 기민을 구제하는 것은 거기에 따른 고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계책이 여기에 그칠 뿐이라면 백성들을 구제하여 살리고 크게 인심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할까 염려됩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재물을 풍족하게 하는 방도는 재물을 낭비하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 최고이며, 백성들을 보존하는 정책은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공물을 방납하는 폐단이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것입니다.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을 여러 차례 줄였으므로 갑작스럽게 또 견감하기를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중간에서 사사로이 쓰이는 것이 정공(正供)의 숫자 몇 배는 됩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이서(吏胥)들의 주머니 속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게 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하루라도 빨리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성왕(聖王)의 정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염분(塩盆)과 어전(漁箭) 및 시장(柴場)에 대한 금법(禁法)이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원망하게 하는 것 가운데 큰 것입니다. 재변을 만난 시기를 인해 하나하나 혁파하여 백성들을 살리고 재변을 그치게 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해서(海西)의 노전(蘆田)은 지역이 몹시 넓고 땅이 아주 비옥한데 그 이익이 모두 사문(私門)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만약 이곳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혹 백성들에게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 반을 거두어들인다면, 군국(軍國)의 수요에 적지 않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요즈음 압도(鴨島)에 있는 궁가(宮家) 소속의 전지를 조사하여 수괄하고 있는데, 민전(民田)까지도 침해한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도 생각지 않으십니까. 백성이 있은 다음에야 나라가 있으며, 나라가 있은 다음에야 부귀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산성(山城)에서 포위당하였던 날에 전하의 재물과 전하의 전지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까? 지난날의 일이 오래지 않은데 어찌하여 지금도 깨우치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신들은 통탄스럽고 애석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또 듣건대, 상방(尙方)의 공사가 없는 날이 거의 없으며, 또 온갖 기교를 다 부려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여기에 뜻을 두시었단 말입니까. 전하의 마음을 방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허비되는 재물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곧바로 정파(停罷)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궁중에서 지공하는 것 가운데 전하에게 긴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절약하여 줄여야 합니다. 그러면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에 어찌 보탬이 적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덕(天德)을 왕도(王道)의 근본으로 삼고 마음에 간직하고 정사에 발현하는 것을 한결같이 모두 하늘의 도리로 법칙을 삼으며, 날로 새롭게 하여 오래도록 쉬임이 없게 하소서. 그리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고 하늘이 뜻을 돌리며, 전하께서 크게 하고자 하는 바가 뜻과 같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어찌 두려워 떨면서 조석간도 보전하지 못하는 데야 이르겠습니까."
하였다. 차자를 입계하자 곧바로 정원에 다시 내렸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 차자 안에는 말해서는 안 될 내용이 들어 있다. 다시 고치게 하라."
하였다. 조석윤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하늘의 재변이 아주 혹심하고 백성들이 너무나 고생하는 것을 보고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구언하는 전지를 인하여 외람되이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차자의 내용을 고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도 성상께서 말씀하시는 이른바 말해서는 안 될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신들은 오늘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고 망발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충분(忠憤)이 터져나와 말을 가려하지 못하였습니다. 망령된 생각으로는, 성상께서 신들의 말이 옳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실 것이고, 비록 옳지 않다고 여기신다 하더라도 반드시 누설시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부(可否)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고 다만 고쳐 쓰라고만 명하시었습니다. 이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입을 틀어 막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셨습니까. 신들이 비록 몹시 형편없기는 하나, 직분이 논사(論思)하는 신하입니다. 말한 내용의 옳고 그름은 논할 것 없이 성상의 이번 거동은 실로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어찌 감히 전교를 받들어서 사체를 손상시키겠습니까. 이번 일은 모두가 신들의 성의가 깊지 못하여 믿음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만, 성상께서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는 어떠십니까. 신들이 성심으로 진언한 것이 도리어 임금으로 하여금 잘못된 거동을 하게 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처럼 해가 있는 말을 하여 나라에 화를 끼치니, 너무나 어리석지 아니한가. 몇 마디 말을 삭제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입을 틀어막는다고 하면서 사직하기까지 하니, 너무나 이상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시만(李時萬)을 지평으로, 유영(柳潁)·유심(柳淰)을 이조 정랑으로, 목행선(睦行善)을 부교리로, 조중려(趙重呂)를 수찬으로 삼았다.

 

6월 24일 갑술

홍득일(洪得一)을 좌승지로, 김진(金振)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허적(許積)을 평안 도사로 삼았는데,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그의 재주를 추천하여 함께 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6월 25일 을해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와 판윤 김자점(金自點)이 차자를 올려 대죄하였다. 이경의(李景義)의 상소 가운데 ‘상방(尙方)이 사치함으로 상을 인도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6월 27일 정축

유성이 별성(鱉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황해도 황주(黃州)·봉산(鳳山) 등지에 황충이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현재 비가 흡족하게 내려 기우제를 이미 끝냈습니다. 내일부터는 정전(正殿)으로 나아가시고 상선(常膳)을 회복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장차 돌아오게 되었는데, 범문정(范文程) 등이 세자에게 고하기를,
"대군께서 떠나게 되었으니 원손(元孫)도 함께 가야만 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날씨가 몹시 덥고 어린아이가 병이 많으니, 서늘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출발시키려고 합니다."
하자, 문정 등이 아뢰기를,
"황제께서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늦게 떠나느냐 빨리 떠나느냐는 세자께서 알아서 하시오."
하였다.

 

6월 28일 무인

유시(酉時)에 유성이 해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경상도 상주(尙州)에 크게 우레와 바람이 있었다.

 

백송골을 심양(瀋陽)에 보냈다.

 

전에 윤겸선(尹兼善)을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는데, 오로지 각박하게 하기만을 힘써 공로로 녹공(錄功)된 자 및 물품을 납부하고 면역(免役)된 각사(各司)의 노비들을 모두 환천(還賤)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았다고 하고 없는 자를 있다고까지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능하다고 하였으나 백성들은 모두 겸선을 손가락질하며 원망하였다. 얼마 뒤 본원(本院)의 문서고(文書庫)에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불탔는데, 대사헌        정광경(鄭廣敬)이 ‘겸선이 공정하게 처리하며 흔들리지 않자 하리들이 변을 낸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직관(守直官)을 파직하고 색리(色吏)와 고자(庫子)를 포도청으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게 하여 형장(刑杖)이 혹심하였으므로, 원망이 더욱 심해지고 물의가 모두 정광경을 그르다고 하였다. 이에 이조 참판        이식(李植)이 상소를 통해 극언(極言)하기를,
"겸선은 본래 극악 무도한 사람인데, 외람되이 음관(蔭官)의 극품(極品)이 되어 오로지 노비를 쇄괄(刷括)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으면서 과장하여 위에 아뢰고 재능과 이름을 팔았으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듣고는 모두들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이리저리 붕당(朋黨)을 맺어 성세(聲勢)를 키워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비호를 받으면서 명예를 얻으니, 누가 감히 입을 열어 드러내놓고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깜깜한 한밤중에 불지르고 훔치는 변고는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한 일이니,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는 것이며, 전수(典守)를 맡은 자가 스스로 불지르기란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지나친 형신에 의지하여 사감(私憾)을 풀게 하였으니, 폐조(廢朝) 때 역적을 국문하던 참혹함도 이와 같이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성 안 사람들이 모두 기운을 잃고 ‘이후로 비가 내린다면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한 것이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공정(公正)’이라는 두 글자를 뱀같이 잔인한 자의 몸에다 붙여 주었습니다. 인심이 함닉(陷溺)되고 학술(學術)이 꽉 막힘이 이와 같을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윤겸선과 정광경은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빌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이식은 한 차례 소를 올리자 체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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