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1권, 인조 18년 1640년 8월

싸라리리 2026. 1. 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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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술

유성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8월 2일 신해

박지영이 풍기(豊基)에서 올라왔다. 상이 대신, 비국 당상,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빈청에 모여서 자세히 물어보고 아뢰도록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이 그를 불러 물어보고 나서 아뢰기를,
"그가 직접 한 말도 몽서(夢書)에 실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의 단서가 이미 나왔으므로, 꿈속의 흐릿한 일로만 돌려버리고 자세히 점검하여 수록해 두지 않기는 어려울 듯하니, 한번쯤 자세히 살펴보아 허실을 시험해 보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황지’라는 곳이 경상도와 강원도의 접경에 있으니, 예조 당상 한 사람이 지관(地官)과 화원(畵員)을 거느리고 박지영을 대동하고 내려가 경상·강원 양도의 감사와 서로 의논하여 자세히 아뢰게 해서, 거기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선조조(先祖朝)에서 능을 찾을 때의 일을 기록한 작은 책자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이것은 바로 어느 사대부 집의 개인 소장인데, 이것을 보면 조종조에서 자세하게 헤아려 처리하신 훌륭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른바 명패(命牌)니 옥규(玉圭)니 하는 것을 들여오라."
하였다. 얼마 후에 상이 내의원으로 하여금 빈랑(檳榔)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대체로 이른바 명패라는 것이 곧 빈랑이기 때문에 비교해 보기 위해서였다. 상이 명하여 대신 이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박지영이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그 사람의 외모는 경망하지는 않은 듯한데, 꿈속의 일을 실제의 일로 여기니, 진실로 신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또한 전연 폐기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그의 말이 매우 흐리멍덩했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더욱 괴이하고 허망합니다."
하고, 신경진이 아뢰기를,
"그가 말하기를 ‘지석(誌石)과 표석(表石)이 있어 그것을 지적해 줄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것을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만일 지석과 표석을 얻는다면 더욱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명패란 무슨 물건이며, 옥은 어디서 나는 옥인가?"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패는 곧 빈랑이고, 옥은 바로 성천(成川)에서 나는 옥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물건이 더욱 가소롭다. 또 그 책자에 실려 있는 문자는 《전등신화(剪燈新話)》의 말을 사용하였는데, 선왕께서 어찌 이런 말을 썼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십이국(十二國)을 말할 때는 반드시 이륙국(二六國)021)  이라 칭하였으니, 그 말이 실상이 없음을 알겠다. 또 거기에 ‘세 거북이 있어 청량미죽(淸涼米粥)으로 거북을 길렀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능을 찾을 때의 일을 기록한 소책자의 기록으로 본다면, 노동은 바로 목조의 황고비릉(皇考妣陵)인 듯하고, 황지는 바로 목조의 조고비릉(祖考妣陵)인 듯하니, 이는 박지영의 말과 서로 다른 듯하다."
하니, 여럿이 아뢰기를,
"《선원록(璿源錄)》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공자는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당당한 조정에서 어찌 사리에 어긋난 부정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선조조(宣祖朝)에서 능을 찾을 때의 일과 다르다. 지금 이 말로 인해서 찾는다면 조정의 체모가 매우 가벼워져서 반드시 나중에 남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니,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이 아뢰기를,
"의당 감사로 하여금 그 능 자리를 봉심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만 본도에서 사람을 정하여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명일(三名日)에 바칠 방물과 물선(物膳)을 명년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바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흉년이 들었으니, 아직 알리지 말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손(元孫)이 귀국하게 된 것은 실로 지극하신 소망에서 나온 것이므로, 여러 사람의 의논이, 진하(陳賀)의 행사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나 또한 하지 못할 점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 일을 중하게 다룬 사실을 저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에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8월 3일 임자

도망쳐 돌아온 우리 나라 사람 2명과 한인(漢人) 남녀 5명을 심양으로 압송하였다.

 

황해도의 수군이 쌍도(雙島)에 이르러 큰바람을 만나 90여 명이 빠져 죽었는데, 구휼하는 은전을 아울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정광경(鄭廣敬)을 대사간으로, 이행우(李行遇)를 응교로, 이래(李䅘)를 지평으로, 유심(柳淰)을 이조 정랑으로, 남로성(南老星)·정지화(鄭知和)·정태제(鄭泰齊)를 이조 좌랑으로, 이이존(李以存)을 정언으로, 목성선(睦性善)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8월 4일 계축

원손이 심양에서 돌아왔다. 대궐 안에 있던 여러 관원들이 대궐 문에서 맞이하였다.

 

영중추부사 윤방이 병세가 위독하여 상소하기를,
"신이 살아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고 이제 곧 성조(聖朝)를 영원히 하직하게 되었으므로 임금 사모하는 정성을 감당하지 못하여 감히 혼몽한 가운데 충성어린 말씀을 드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시고 소인을 멀리할 것이며, 대신에게 정사를 일임하시고 훌륭한 장수를 신중히 선발할 것이며, 법을 잘 지키는 관리를 장려하여 임용하고 백성을 잘 감싸서 보호할 것이며, 선비를 등용하는 데 있어서는 헛된 명예만 따르지 말고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헛된 꾸밈만 숭상하지 말 것이며, 함부로 강대국에 도전하여 다시 위망의 곤욕을 취하지 마시고 중국을 소홀히 하거나 멀리하지 말아서 후일의 우환에 대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니, 지극한 뜻에 깊이 감동된다. 경이 진달한 말을 내가 의당 유념할 것이니, 경은 조리를 잘해서 병이 저절로 나아버리는 기쁨을 얻도록 하라."
하고, 이어 명하여 승지를 보내 문병을 하였다.

 

8월 5일 갑인

예조가 아뢰기를,
"선대의 능묘가 삼척(三陟)에 있다는 것은 옛날부터 전해온 사실입니다. 연대가 멀어짐으로 인하여 후세에 그곳이 어느 언덕인지 확실하게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화(成化) 기해년022)  에 손순효(孫舜孝)가 기록한 것과 만력(萬曆) 경진년023)  에 정철(鄭澈)이 제작한 도표(圖表)를 가지고 보면 ‘목조의 황고묘는 노동에 있고, 황비묘는 동산리에 있는데 모두 삼척 지방에 속한다.’ 하였으니, 이는 당시에 반드시 근거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대 임금께서 다시 봉분을 하고 나무를 심지는 않았으나 수호 등의 일은 준행해 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이제 와서 그 사이에 의심을 가질 것이 없을 듯합니다. 보호할 사항을 거듭 밝히어 묘당으로 하여금 결정하여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척에 있는 선대의 능묘에 대해 조종조에서 이미 산에서 불 쓰는 것과 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군졸을 정하여 수호하는 등의 일을 시행해 왔는데, 묘역(墓域)의 정확한 위치는 비록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지만, 분명히 어느 동, 어느 마을에 있다는 사유만은 대강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뒤로 이전의 수호하던 일을 다시 거행하지 못하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다시 본도로 하여금 노인들이 서로 전해온 말과 증거가 될 만한 문서를 자세히 상고하여 일체 예전 관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고, 그 골짜기 안에 투장한 자가 있다면 또한 옮겨가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원경 왕후(元敬王后)024)  의 신주(神主)에 쓰여 있는 ‘후덕(厚德)’ 두 자는 곧 세종조인 영락(永樂) 16년025)  에 올린 존호(尊號)이고, ‘창덕 소열(彰德昭烈)’ 네 자는 그 후에 더 올린 시호였습니다. 신주의 전면에 존호를 아울러 쓰는 것은 예인데, 향실(香室)의 축문(祝文)에는 ‘후덕’ 두 자가 없으니, 그 까닭은 모르겠으나 아마 후대에 와서 ‘덕’자가 중첩된 것을 꺼려 바로잡은 것인 듯합니다. 지금 신주를 봉심해 보니, 신주의 전면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 다섯 자만 쓰여 있으므로, 휘호(徽號)를 바로잡으려 해도 의거할 데가 없습니다. 이는 반드시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야만 착오가 없게 될 것이니, 의당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춘추관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상고해 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여 왔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사관이 원경 왕후 실록을 상고하여 아뢴 단자를 보니 ‘후덕’ 두 자는 곧 대비(大妃) 때에 올린 호인데, 신주에 글자를 쓸 때에 ‘원경’ 두 자만 썼었고 ‘창덕 소열’ 네 자는 부묘할 적에 더 올린 존호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여러 신하들이 강론하여 결정하기를 ‘신주의 전면에는 추후에 써 넣는 관례가 없다.’ 하고, 또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에는 추후에 올린 존호들을 모두 썼습니다. 그러므로 향실의 축문에서는 ‘후덕’ 두 자를 빼버리고 쓰지 않은 듯하나 어디에 의거해서 그렇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축문 가운데 ‘창덕 소열’ 네 자 위에다 ‘후덕’ 두 자를 함께 쓰더라도 흠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마는 신들은 본디 예경(禮經)에 어두우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삼가 실록에서 상고해 낸 문자를 보니, 사리로 미루어 보건대 ‘후덕’ 두 자를 ‘창덕 소열’ 위에 써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성스러운 임금이 위에 계셨고 훌륭한 신하가 아래에 있었으니, 강론하여 결정할 적에 어찌 충분히 헤아리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 반드시 은미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개혁에 관한 일은, 부득불 고쳐야 할 것이 아니면 역대 임금이 계승해 온 고사를 좇아 쓰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7일 병진

달이 남두성(南斗星) 여섯째 별을 범했고, 번개가 쳤다. 유성이 천원성(天苑星) 위에서 나와 삼성(參星) 아래로 들어갔다.

 

간원이 아뢰기를,
"박지영의 속이는 정상을 성상의 밝으신 지혜로 이미 환하게 살피시어 통쾌히 결단하신 전교를 특별히 내리셨습니다. 다만 요사스런 말을 함부로 하는 데 대해서는 국가에 정해진 형벌이 있고, 전지(傳旨)를 사칭한 것은 또한 사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도 처벌하지 않는다면 오활하고 괴상한 무리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율에 의거해서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그냥 두라고 답하였다. 누차 아뢰자 그제야 따랐다.

 

8월 8일 정사

영충주부사 윤방이 죽었다. 윤방은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다. 그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인망이 있었다. 광해군 때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을 적에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시골에 은퇴해 있었다. 상이 반정하고 나서 그를 재상으로 발탁하였는데, 국가 대사에 대해 특별히 의견을 진달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갑자년026)  에 이괄(李适)의 난이 평정된 후 맨 먼저 도성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책자 한 권을 바쳤는데, 곧 역적 이괄에게 붙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것이었으므로, 그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불태워 버렸다. 그래서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분의 큰 역량이 아니었으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정묘 호란이 있기 전에 조용히 은퇴했거나, 병자 호란 때 죽기로 결심을 했더라면 이름난 재상이 되었을 것이다.’고 하니, 그 말이 맞다고 하겠다. 그가 죽자 상이 도승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8월 9일 무오

행 호군 박황(朴潢)이 상소하기를,
"박지영의 몽서(夢書)를 허망한 것으로만 돌려 버릴 수는 없으니, 선대의 능묘를 찾는 일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일은 신이 전파함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지금 조정에서 지영의 죄를 다스리려고 하니, 신의 죄를 먼저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성상의 밝으신 지혜로 이미 흐리멍덩하고 허탄한 정상을 환히 살피시고 통쾌하게 결단하여 물리치셨으니, 지금 다시 그 일을 제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1일 경신

평안도의 영원(寧遠)·강계(江界)·평양(平壤)·상원(祥原) 등 고을에 이른 서리가 내려 벼가 피해를 입어 백성들이 울부짖었다. 감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박황은 식견 있는 재신으로서 허망한 말을 지나치게 믿고 그 말을 전파하여 위에 알렸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성상의 결단이 이미 내렸고 공론이 이미 나왔으니, 의당 황송하여 몸을 움츠리고 물러가 엎드려 있으면서 일이 귀결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방자하게 변명을 늘어놓아서 반드시 그 일을 시행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니, 조정의 체면을 어찌 제멋대로 무너뜨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8월 12일 신유

헌부가 아뢰기를,
"호남·영남의 연해 지역에 있는 여러 고을로 하여금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한 것은 정치가 문란했던 광해군 때에 시작되었는데, 국가의 경비가 부족한 탓으로 그대로 답습하여 폐지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고통거리가 되어 온 지 오래입니다. 당초에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한 데 대해, 그 대강만을 들어 말하면, 종이 1속(束)에 베 3필, 활[弓] 1장에 베 6필로 값을 정하였는데, 베 1필당 쌀 10두로 환산하였으며, 다른 물건도 모두 그렇게 환산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부역이 이렇게 심하게 무거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흉황은 연해 지역이 가장 혹심하니, 변통하는 조처가 더욱 필요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는데, 비국과 호조가 모두 그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니, 두수(斗數)만 감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사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가는 신하는 반드시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사람을 가려서 대동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염치가 모조리 없어져서, 전후로 심양을 왕래한 사신들이 시정 모리배들을 많이 거느리고 가서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앞으로는 사신의 일행으로 따라가는 군관은 반드시 정직(正職)을 가진 무신으로 엄격하게 가려서 대동하여 가도록 하고, 만일 다시 범하는 일이 있으면 사신 및 수행한 자를 아울러 무거운 율에 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3일 임술

고 참판 권진기(權盡己)의 아내가 비국에 정문(呈文)하기를,
"아들 권순장(權順長)이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였는데, 그의 딸이 심양에 포로로 잡혀가 있으니, 종과 말을 보내어 속바칠 값[贖價]을 가지고 가게 해 주소서."
하였다. 비국이 그 사실을 보고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윤허하고, 이어 호조로 하여금 속바칠 값을 헤아려 지급하도록 하였다.

 

강도의 사민(士民)들이 병자년에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이상길(李尙吉)·심현(沈誢)·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榮)·구원일(具元一) 및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 등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는데, 윤계는 강도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참여된 것이다.

 

8월 14일 계해

충청도에서 보낸 치계에는, 7월 26일 청주(淸州)·제천(堤川) 등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하였고, 황해도에서 보낸 치계에는, 7월 6일에 서리가 내렸다고 하였다.

 

8월 16일 을축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신이 능묘를 봉심하는 길에 양천(陽川)·김포(金浦)·부평(富平)·금천(衿川) 등 네 고을의 지경을 거쳐오면서 서리가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은 참상을 보고 매우 가엾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게 심은 곡식은 비가 온 뒤에 비로소 소생했으나, 이삭이 패기만 하고 결실을 하지 못한 채 갑자기 말라 버렸으니, 앞으로의 농사 작황은 이미 가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변통, 조처하여 백성들이 굶어죽거나 떠돌아다니게 되는 걱정이 없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8월 18일 정묘

좌부승지 윤순지(尹順之)를 보내어 심양에 문안하게 하였는데, 한(汗)이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충청도 전의(全義)·정산(定山)·회덕(懷德)·은진(恩津)·온양(溫陽)·연기(燕岐)·이산(尼山) 등 고을에 눈이 내렸고, 직산(稷山)의 냇물은 모두 얼었다. 8월에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린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8월 19일 무진

이시만(李時萬)을 지평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집의로, 이진(李𥘼)을 부교리로, 이덕수(李德洙)를 우승지로 삼았다.

 

8월 23일 임신

평안도 덕천군(德川郡)에 눈이 내렸다.

 

국내에 크게 기근이 들어 서울의 시장 쌀값이 폭등하여 쌀 7∼8되 값이 면포 1필과 맞먹었다.

 

8월 24일 계유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천변성(天弁星) 위로 들어갔다.

 

정원이 아뢰기를,
"큰 가뭄 뒤에 이른 서리까지 내려 들판에 수확할 곡식이 없으니, 백성들의 목숨이 얼마 못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만일 대단한 변통과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백성의 생활과 국가의 살림 두 가지를 다 원만히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널리 자문하여 여러 가지로 방법을 강구해서 온갖 계책을 다 써야만이 백성을 보호하고 나라 살림도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보건대, 성상께서 건강이 조금 괜찮으시니,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삼사(三司)의 여러 관료들로 하여금 성상의 앞에 입시하여 각기 생각한 바를 진술하도록 윤허하소서. 그러면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으나, 시행하지는 않았다.

 

8월 27일 병자

장씨(張氏)를 귀인(貴人)으로, 조씨(趙氏)를 소용(昭容)으로 삼았다.

 

헌부가 재이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현재의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였다.

 

이행우(李行遇)를 사간으로, 이시해(李時楷)를 집의로, 유경즙(柳景緝)을 헌납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정언으로, 조중려(趙重呂)를 부교리로, 유철을 응교로 삼았다.

 

8월 28일 정축

유성이 외병성(外屛星) 위에서 나와 천창성(天倉星) 위로 들어갔는데, 흰빛이 땅에 비쳤다.

 

헌부가 아뢰기를,
"남양군(南陽君) 홍진도(洪振道)는 공을 믿고 법을 무시하여 제관(祭官)이 된 것이 싫어서 감히 지엄한 전정(殿庭)에서 승지가 향(香)을 전할 때 전관(銓官)에게 욕을 하고 해당 하리를 구타하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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