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1권, 인조 18년 1640년 9월

싸라리리 2026. 1. 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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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기묘

유성이 우림성(羽林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고, 또 사공성(司空星) 위에서 나와 대릉성(大陵星) 위로 들어갔다.

 

한인 남녀 8명이 심양에서 도망쳐 돌아왔는데, 그들을 압송하라고 명하였다.

 

9월 3일 신사

암행 어사 남노성(南老星)·유석(柳碩)·유철(兪㯙)·정지화(鄭知和)·김진(金振)·엄정구(嚴鼎耉) 등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냈다.

 

9월 4일 임오

헌부가 아뢰기를,
"권도(權濤)는 깨끗한 조정의 시종신(侍從臣)으로서 바른 품행과 굳은 절조를 스스로 힘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몰래 이끗을 도모할 계책을 품었습니다. 지난 병자년에 남한 산성이 위급해지고 나랏일이 더없이 위태하던 때에 당초 임금에게 달려가 문안드릴 일로 문경(聞慶)까지 왔다가 감사의 진중(陣中)을 드나들면서 사천현(泗川縣)에 부서진 병선(兵船)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배에 대한 문서를 받아내기 위해 얼마 후에 진휼 어사로 내려가서 끝내 스스로 차지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가의 재산이므로, 그 행위가 장오죄에 해당하니, 사판(仕版)에서 그의 성명을 깎아버리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자 상이 따랐다. 이는 지평 이시만(李時萬)이 논한 것이다.

 

9월 5일 계미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누성 아래로 들어갔다.

 

이식(李植)을 대사헌으로, 이목을 강원 감사로, 이명한(李明漢)을 이조 참의로, 조경(趙絅)을 집의로, 변효성(邊孝誠)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6일 갑신

보성 군수(寶城郡守) 조빈(趙贇)이 임소에 가려면서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병자년에 누차 경석(經席)에 입시하여 망령되이 어리석은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후 나랏일이 크게 잘못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신 같은 자가 포박되어 청나라로 압송된 몇 사람과 똑같이 죄를 받지 않고 다시 태양을 보게 된 것은, 바로 성상께서 신을 다시 살려 주신 은혜입니다.
또 신이 일찍이 바다에 빠져 죽겠다던 제(齊)나라의 노중련(魯仲連)과 남송(南宋)의 호전(胡銓)의 말027)  을 가지고, 소장에서 신의 뜻도 그와 같다는 것을 나타냈으나, 성스러운 도량으로 포용하시어 가볍게 견책하셨으니, 황량한 산골에서 농사나 지어먹다가 여생을 마치는 것이 자신의 분수였습니다. 그런데 지방 수령의 직임을 맡겨 주기까지 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병을 가지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의 강개한 충정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격동되니, 비록 오늘이라도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일찍이 회계(會稽)에서 곤액을 당했지만 태왕(太王)과 함께 《맹자(孟子)》에서 찬미된 것028)  은, 그가 오(吳)나라를 연못으로 만들어버린 일이 자신을 변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선비 하호(河鎬)가 이르기를 ‘태왕과 구천이 적을 두려워하기만 하고 끝내 자립(自立)하지 못했다면, 염치없이 구차하게 안일만을 도모한 사람들일 뿐이니, 어찌 슬기가 있었다고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대체로 임금은 비록 한때에 약간 굴했다 하더라도 끝내는 천하에 크게 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옛사람의 논의는 굴한 것을 굴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굴한 처지를 펼 수 있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대저 태왕과 구천이 펼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선유(先儒)의 논의가 ‘겉으로는 자기 몸을 낮추고 안으로는 자기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데 불과하고, 안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또한 ‘정치를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화합시켰다.’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구천은 노기(怒氣)를 발한 개구리에게도 오히려 경례를 하였는데029)  더구나 백성의 노기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태왕은 백성들을 버리고 떠나려 하였지만, 수많은 백성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따라 갔습니다. 그렇다면 태왕과 구천 두 임금이 왕업을 일으키고 치욕을 씻었던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지금 백성들은 노기를 띠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임금 버리기를 마치 물건 버리듯이 하려고 한 지 오래인데,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한결같이 움츠러들기만 해서 치욕을 한번 씻을 마음을 갖지 않고 있으니, 하호(河鎬)의 말에 대해서 또한 부끄러움이 많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고 삼가고 반성하여 깨달아서, 우선 눈앞의 안일만을 탐하지 마시고, 나라를 보전하고 치욕을 씻어서 전대의 왕업을 잘 계승하소서. 그러면 신이 노쇠하고 병들었지만 한번 죽기로써 충성을 다하기를 보장하는 데 있어 남에게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신은 전의 어리석은 뜻을 그대로 지켜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9월 8일 병술

유성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 위로 들어갔다.

 

9월 9일 정해

유심(柳淰)을 교리로, 권우(權堣)를 수찬으로 삼았다.

 

9월 10일 무자

이때 묘당이 군량을 운반할 말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걱정하였는데, 여러 날을 강구하였지만 좋은 계책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도승지 신득연(申得淵)이 일찍이 빈객으로 심양에 머물러 해를 넘겼었기 때문에 스스로 저쪽 사정을 자세히 안다고 말하고, 마침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인부와 말을 마련하기 어려움은 마치 산을 끼고 바다를 뛰어넘기와 같습니다. 또 몇 년 전, 육군(陸軍)을 징발할 적에 저들이 ‘우리 측에서 담당하여 대주겠다.’고 하였으니, 군량을 운반하지 않더라도 후환이 없을 것을 보장합니다."
하니, 상이, 득연이 저쪽과 이쪽의 사정을 잘 헤아린 것이라 여기고, 승문원으로 하여금 득연의 말에 의거해서 자문(咨文)을 지어 보내도록 하였는데, 뒤에 심양에 있는 재신들의 장계로 인하여 중지하였다.

 

9월 11일 기축

종부시의 계사에 따라 종실로서 외방에 살고 있는 상산 도정(商山都正) 이준(李濬) 등 22명의 직을 파하라고 명하였다.

 

9월 12일 경인

청나라 사람이, 군량을 운반할 말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구 성내어 책망하니,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파발마 30필을 가려서 보내 주었다.

 

박지영이 이미 하옥되었는데, 상이 그의 공사(供辭)를 보고 금부에 하교하기를,
"지영이 약재를 가지고 명패라 하고, 부서진 항아리 조각을 가지고 옥규라 하여 상하를 속이고, 심지어는 ‘도리어 폐조(廢朝)만도 못하다.’고 말하여, 매우 사리에 어긋나고 오만스러우니, 엄중하게 형신하여 범죄의 실정을 알아내어라."
하였다. 그의 공사에 이르기를,
"지난 경오년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태도와 용모가 비범한 사람이 자칭 환조 대왕(桓祖大王)이라 하면서 교시하기를 ‘황지에 있는 선대의 능묘를 아직도 찾지 못했으니, 내가 말한 것을 네가 조정에 보고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처음에 환조의 존호도 몰랐었는데, 꿈을 깨어 생각하니, 저절로 기억이 되어 한 자도 빠뜨림이 없었습니다. 그 후 해마다 또 태조 대왕과 환조 대왕을 꿈에 뵈었는데, 역시 누차 교시를 내리셨는바, 그 허다한 문자를 모두 기억하였습니다.
신이 그 허실을 징험하기 위해 신미년에 직접 황지를 가서 찾아보았더니, 주산(主山)·안산(案山)과 전후의 좌향(坐向) 및 위아래로 투장한 분묘들이 한결같이 꿈속에 들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허망해서 근거할 수 없는 일이기에 감히 그때 아뢰지 못하고, 11년이 지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요즘 풍문이 전파되어, 조정에서 신을 불러 물으므로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강석기가 차자를 올려 박지영을 용서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헤아려서 처리하라."
하였는데, 그 후에 분간(分揀)하라고 명하였다.

 

9월 14일 임진

유성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삼성(參星) 위로 들어갔다.

 

9월 15일 계사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지금 군량을 운반하는 일로 나라를 욕되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영의정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군문(軍門)의 보고서를 기다려서 조치하려고 하였는데, 끝내 그들의 진노를 사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신들의 일 처리가 민첩하지 못한 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는 일을 모두 긴요하고 착실하게 하는데, 우리 나라는 항상 해이하고 완만한 것이 걱정이다. 심지어는 문서 한 장도 속히 짓지 못하고 허다한 날짜를 허비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늦어지는 이유는 실로 논의하는 사이에 자세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주위(海州衛)에 머물던 우리 군대를 저들이 쓸 수 없다고 여겨 아주 보내 버린 것이라면 다행이겠다. 그러나 만일 수병(戍兵)을 교체시키는 일이 있게 되면,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졸은 이미 두 차례나 다녀왔으니, 앞으로는 어느 고을의 군졸을 써야 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저쪽 사람들이 황해도 평안도의 군졸만 사용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은 듯합니다. 저들이 만일 어영군을 지목하여 요구해 온다면 신은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모두가 똑같은 우리 군졸인데, 저쪽이나 이쪽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저 사람들이 보루를 쌓고 둔영을 개설하여 지구전을 펼 계획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우리 군졸을 반드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인데, 임경업이 ‘반드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경진이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반드시 돌려보내기를 허락할 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고, 서봉이 아뢰기를,
"저들이 비록 돌려보내기를 허락한다 하더라도, 이쪽에서 미리 교체할 군졸을 정해 둔다면 뒤에 군색해지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주위에 현재 남아 있는 군량은 겨우 두 달 먹을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니, 때맞춰 조달해야 할 것인데 군량을 운반하는 일 역시 좋은 계책이 없으니, 원만히 해결할 바를 모르겠다."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은을 보내어 군량을 무역하는 일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량을 무역하고자 하나 무슨 재력으로 마련하겠는가. 참으로 걱정된다."
하였다. 호조 판서 이명(李溟)에게 이르기를,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의 부모와 처자에게 다달이 늠료(廩料)를 지급하는가?"
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흉년을 당해서 내가 더욱 걱정되니, 경이 잘 헤아려서 더 지급하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홍익한(洪翼漢)은 죄를 범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타국에서 죽었으니, 또한 매우 가엾고 측은하다. 그의 처자에게도 윤집·오달제의 처자와 똑같이 늠료를 지급하라."
하였다.

 

심대부를 헌납으로, 여이재(呂爾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9월 16일 갑오

강원도        관찰사        이명한(李明漢)이 치계하기를,
"신이 삼척부(三陟府)에 도착하여 고을 노인들을 찾아 물어보고, 본부(本府)에 전해온 문서와 예조의 이문(移文)과 손순효(孫舜孝)가 기록한 것과 정철(鄭澈)이 장계한 것을 상고해 보니, 내용이 모두 같았습니다. 만력(萬曆) 39년030)                  에 관찰사        신식(申湜)이 예조의 이문에 따라 본부의 부사        민인백(閔仁伯)을 대동하여 봉심하고 치계했었는데, 그 일이 더욱 가까운 관례로서 근거할 만한 것이기에, 신이 부사        민응협(閔應協)과 지난번 봉심할 때 대동했던 하인 등과 함께 가서 봉심해 보니, 목조의 황비묘는 부의 서쪽으로 30리쯤 되는 동산리(東山里)라는 데에 있고, 목조의 황고묘는 부의 서쪽으로 40리쯤 되는 노동(蘆洞)이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빙 둘러싼 산의 형세와 웅장하고 뛰어나게 생긴 묏자리를 보니, 과연 비범한 자리였습니다. 묘역은 비록 봉분이 이미 무너져 버렸으나 두 능묘가 모두 큰 산 깊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계단 자리의 규모로 보아 그 당시 공사가 거창했음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좌향(坐向)·주산(主山)·안산(案山)·명당(明堂)·수구(水口)·파문(破門) 등도 정철의 도표와 같으므로, 대략 도형(圖形)을 만들어 다시 성상의 열람에 대비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두 능묘 사이에 있는 활기촌(活耆村)이란 마을 안에 목조의 옛 집터가 있는데, 담장 터가 넓고 크며, 주춧돌이 분명하게 있고 집 뒤에는 어정(御井)이라고 전해 오는 샘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두 능묘와의 거리는 동서로 각각 5리쯤 되었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봉심한 결과에 대한 장계를 보건대, 선조(先朝) 때부터 항상 보호해 왔고, 목조의 옛 집터도 지금까지 고적이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수호하는 군졸의 부족한 숫자를 빨리 채워 정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지금부터는 감사가 순행할 때에 으레 모두 봉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관무재(觀武才)031)  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두 사람에게는 6품으로 올려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그 나머지 합격자 91명에게는 물품을 주라고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윤집 등의 죽음을 특별히 진념하시어 은혜가 그들의 가족에게 미치니, 그 말을 들은 자가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윤집·오달제·정뇌경(鄭雷卿) 등의 어미와 아내에게는 각각 쌀 12두, 콩 2두씩 주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았습니다. 홍익한에게는 처음부터 주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 듣건대, 그의 늙은 어미가 아직 시집가지 않은 손녀를 데리고 현재 평택(平澤)에 있다고 하니, 그에게도 윤집 등의 관례에 따라 똑같이 늠료를 지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좌부승지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해주위(海州衛)에 교대시킬 군졸을 이미 삼남(三南) 지역에서 징발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상의 앞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신은 감히 한마디도 참견할 수 없으나, 반복하여 생각해 보니, 차마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삼남 지역은 우리 나라의 근본으로 온갖 부역이 집중되는 곳인데, 이와 같은 극심한 흉년에 또 징발의 명령을 발한다면, 굶주린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놀라 흩어질 것이며, 삼남 지역이 동요되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될 수가 없습니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졸이 치우치게 고통을 받는다고 하지만, 1천 5백 명을 제외한 나머지 군졸은 모두 먼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만일 마지못해 교대시킬 일이 있을 때에는 그 나머지 군졸 가운데서 뽑아내되, 그들에게 노자와 의복 등을 넉넉히 주고 그들의 처자도 후히 대우해 주어 잘 타일러서 보낸다면, 가는 기간이 선후가 다를 뿐, 수역(戍役)에 참여하는 것은 다같이 한 번인데, 어찌 원망이 많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도보다 길도 조금 가까워서 왕래하기가 매우 편리하니, 경솔하게 먼저 삼남 지역을 놀라 동요하게 하는 것과는 그 효과가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9월 17일 을미

천둥이 쳤다.

 

9월 19일 정유

천둥이 치고 번개가 쳤다.

 

우의정 강석기가 재이로 인하여 면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차왜 등지승(藤智繩)이 부산(釜山)에 도착하였다. 차왜의 통역을 시켜 강호(江戶)의 소식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대군(大君)께서는 크리스챤[吉伊施端]을 엄하게 금하여, 심지어는 남만(南蠻)의 배가 왔을 때, 배에 탄 사람을 죽이고 배를 침몰시키고, 10여 명만 살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남만에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9월 20일 무술

유성이 하성(河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9월 21일 기해

김영조(金榮祖)를 대사헌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대사간으로, 응교 유철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9월 22일 경자

번개가 쳤다.

 

고 상신 장유(張維)의 아내 김씨가 그의 아들 선징(善澂)의 처를 이혼시킬 일로 예조에 정장(呈狀)하니,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홍서봉이 의논드리기를,
"장유가 살았을 적에, 아들 선징의 아내가 청나라에 잡혀간 것을 속바치고 찾아왔으므로, 그대로 다시 부부가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아내가 또 단자(單子)를 올려,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뜻을 상상하건대, 죽은 남편이 진정했다가 조정의 윤허를 받지 못했으니, 칠거지악의 의의를 거듭 내세워 반드시 죽은 남편의 지극한 소원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동방은 규문(閨門)의 예법을 가장 중히 여겨, 여염집의 천한 부녀자들도 모두 재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정숙한 행동을 귀하게 여기니, 이는 천하 각국 어디에도 없는 풍속이요, 중국의 풍속도 이것만은 우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근래에 병란이 일어나 사녀(士女)들이 청나라에 잡혀가 오욕을 당한 자가 많은데, 그 정상을 따져보면 실로 불쌍합니다. 만일 제 스스로 음란 패악에 빠져든 무리들과 똑같은 죄악으로 논한다면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들을 처리하는 방도는, 이미 오욕당한 모든 부녀자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으로 책망할 수 없게 되었으니, 동거하는 사람은 그대로 살게 하고, 다시 장가드는 일도 금하지 말아서, 남편 없는 여자와 아내 없는 남자로 하여금 각기 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선조(宣祖)께서 금법을 설치하지 않으신 유지(遺志)이며, 또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도 해롭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강석기가 의논드리기를,
"부인에게 칠거지악이 있다는 것은 선성(先聖)께서 한 말이니, 남의 부인된 사람이 과연 버림받을 악행이 있다면 참으로 그대로 부부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 말 뜻을 살펴보니, 사정이 절박할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불순한 것도 칠거지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해조가 복계(覆啓)한 말 가운데 또 변통한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소원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진실로 매우 윤당합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 인심이 착하지 못하므로, 부부 사이에 혹 서로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 사리를 모르는 자가 한갓 국가에서 이혼의 법을 터놓은 것만 알고서 이를 인하여 패륜의 습관을 증가시키게 된다면, 그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해조가 잘 살펴서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니, 지금 그 법을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훈신(勳臣)의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특별히 그의 소청을 윤허하니, 뒤에 이 일로 관례를 삼지 말라."
하였다.

 

9월 24일 임인

유성이 천준성(天撙星) 아래에서 나와 중태성(中台星) 아래로 들어갔다.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김시양(金時讓)이 충주(忠州)에서 차자를 올려 시사(時事)를 말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삼남 지역에 양전(量田)을 한 이후로 새 전결(田結)이 늘어나서, 역(役)에 응할 것이 거의 10만 결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계산한다면, 늘어난 조세의 수입도 수만 석에 이를 것이니, 이는 병자년 이전에는 없던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서울에 있는 창고들이 가득 차 있어, 가흥창(可興倉)에 있는 세미의 운반을 급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의거해서 미루어 보면, 비록 서량(西糧)을 무명[木]으로 대신 받아서 세폐(歲幣)와 갖가지 비용에 충당하더라도 크게 군색한 데는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만일 한번 내린 명령을 고치기가 어렵다면, 이 늘어난 부세를 면제하시어, 성상께서 백성의 고통을 애써 구제하시는 뜻을 펴시는 것이 시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자, 이를 호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호조가 의논드리기를,
"을해년에 양전한 이후로 삼남 지역에 늘어난 것이 과연 10만 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조정에서 백성들의 원망이 있을까 염려하여, 공부(貢賦)와 요역은 하나도 더 내지 않고 다만 전답에 대한 삼세(三稅)032)  만을 징수하고, 그 늘어난 쌀의 수량으로는 전결에 대한 역(役)을 헤아려 감하고 나니, 결국은 득보다 실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창고가 가득 차 있다는 말은 혹 민간에서 나온 말인 듯합니다. 병자년의 변란 때 군자감(軍資監)의 창고가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지금 비록 새로 짓기는 하였으나 창고 안이 매우 좁기 때문에 미곡 수천 석을 가흥창에 그대로 두었다가 명년 봄에 실어 오려고 하는 터인데, 사람들의 말이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끝만을 가지런히 맞추려고 한다는 격입니다."
하였다.

 

시재(試才)에서 수석을 차지한 호위 군관 정계(鄭桂)는 6품으로 올려 주고, 그 나머지 합격자 박준방(朴俊邦) 등 77인에게는 아마(兒馬)와 장궁(裝弓) 및 죽전(竹箭)을 각각 차등 있게 주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형조에서 유배시킨 죄인 김유견(金愈堅)은 곧 고 집의 김민선(金敏善)의 손자입니다. 그를 배반한 종이 수진궁(壽進宮)에 투속해 제 주인을 모함하여, 형신을 네 차례나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견은 젊은 유생으로 엄한 형장 아래 살아 남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끝내 ‘양인(良人)을 강압하여 종으로 삼았다.’는 율에 승복하여, 장 일백에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신들이 처음 그 말을 듣고 의아스러워 형조의 문안(文案)을 가져다 보니,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단서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해조가 한쪽의 무함하는 말만을 듣고 옥사가 귀일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양인을 강압하여 종으로 삼았다.’는 율을 강제로 정하여 경솔하게 먼저 형벌을 청함으로써, 위로는 죄인을 신중하게 심리하라는 뜻을 저버리고, 아래로는 지극히 공평한 법을 굽혀서, 호소할 곳 없는 유생은 억울하게 형신하여 유배당하게 하고, 주인을 배반한 종은 버젓이 천지 사이에 편히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습니다. 형조의 당해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파직하라 명하시고, 유견의 옥사를 다시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결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6일 갑진

헌부가 아뢰기를,
"금년의 기근 상황은 지난 무인년보다 심합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명년 봄에 받아들일 조세의 숫자를 헤아려 보면, 1년의 경비를 10분의 3∼4도 충당하지 못할 형편입니다. 묘당에서 늠료를 삭감하자고 청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그것은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하니, 물 한 그릇으로 불을 끄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영군과 총융군이 곧 번을 들게 되고 4대장의 군관도 그 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군졸에게 지급할 국가 소유의 말은 태복시에서 기르고 있는 숫자가 9백 필이나 됩니다. 이런 데서 소비된 것이 평상시보다 몇 갑절이나 되니, 명년까지 임시로 이를 폐지했다가, 명년 가을 곡식이 여문 뒤에 다시 설치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서 잘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총융군에 대해서는 해조가 늠료를 지급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어영군은 번에 들 자가 8백 명이라고 하니, 3백 명을 감할 경우 5백 명의 군졸로도 충분히 머물려 두고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조에서 지급한 3백 필의 말은 참으로 전쟁시의 용도에 도움이 된다면 거기에 드는 양료의 소비는 아까울 것이 없지만, 이것은 소비만 있고 도움은 없으니, 의당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서로(西路)의 역마가 피폐하고 쇠잔하니, 병조가 그 가운데 쓸 만한 말을 가려 삼도(三道)의 각역에 지급하고, 합당치 못한 말은 삼남(三南) 지역에서 기르게 하여 명년에 다시 처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태복시에서 기르고 있는 말은, 형편상 임시로 폐지하기도 어렵습니다. 훈련 도감의 별무사(別武士)가 받는 관마(官馬)와 사마(私馬)는 의당 헤아려 감해야 할 듯하니, 도감으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호위 군관은 그 수가 3백 명인데, 들어가는 비용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생각건대, 이들은 대부분 역전의 용사로서 어가를 호종한 사람들인데, 모두가 빈곤하여 풍년에도 이 늠료에 의지해서 생활을 해온 터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흉년을 당해서 그 늠료를 떼버린다는 것은, 정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차마 못할 일이니, 형편상 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말에 대해서는 둔한 말만 제거하고, 어영군은 헤아려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7일 을사

평안도 은산(殷山)에 흰 꿩이 나타났으므로, 감사가 아뢰었다.

 

9월 29일 정미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북두성의 제1성 위로 들어갔다. 천둥이 쳤다.

 

호조가 칙사의 행차 때문에 결포(結布)를 조금만 징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지금 백성들은 살아 남기도 어려운 형편이니, 결포를 조금 징수하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이다. 나라의 저축이 고갈된다 하더라도, 백성이 편안하면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니, 본조가 나라의 저축을 기울여서 마련할 것이요, 외방에 할당하여 징수하지 말라."

 

유경창(柳慶昌)을 수찬으로, 임담을 원접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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