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신
충청도 홍주(洪州)·대흥(大興)·덕산(德山)·전의(全義)·임천(林川)·예산(禮山) 등의 지역에 크게 천둥치고 바람불고 우박이 내렸다.
10월 2일 기유
우의정 강석기가 차자를 올리기를,
"국가의 큰 걱정은 오로지 수군에 있습니다. 당초 수군을 징발하여 보낼 적에 백성의 힘이 벌써 다하였는데, 이제 와서 또 군량을 운반할 말을 보내지 않는다고 힐책하니, 고용한 값으로 줄 은은 이미 들여보냈지만, 또 이 다음에 얼마나 공갈을 더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임경업이 있는 곳에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는 데 있어 군율을 위반한 것과 배를 부수고 군졸을 도망치게 한 죄를 책망하고, 인하여 공을 세워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라는 뜻으로 신칙한다면, 저들의 불신에 의한 분노를 풀 길이 있을 것이다.’ 하는데 이 말은 진실로 의견이 있는 말이며, 변사(變事)를 처리하는 방도에 또한 도움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경업이 저쪽 땅에 머물러 있는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조정에서 일찍이 한 번도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생사에 대해 진념하시는 뜻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저 사람들이 또한 이것을 가지고 의심을 갖게 되는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니, 이는 진실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일에 김육(金堉)이 교대할 군졸에 대한 일로 비밀히 아뢰었는데, 회계할 적에 비국의 여러 신하들이 상의해 결정하여, 그 말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였습니다. 신이 그 후에 반복하여 생각해 보니, 삼남 지역은 곧 국가의 근본인데,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뒷수습을 잘할 수 있는 계책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흉년을 만나 인심이 흔들리기 쉬운 터에, 군졸을 징발하는 일이 있음을 한번 듣기만 한다면 반드시 도망가 흩어질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쪽에 그대로 머물러 있은 군졸은 비록 남보다 더 고생한다는 원망을 하겠지만, 이미 군문에 몸을 맡겼으니, 자신의 분수를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에서 그들의 부모와 처자를 돌보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은덕을 베푸는 뜻을 알게 하고, 또 관원 한 사람을 보내, 호궤하고 시상(施賞)할 물품을 넉넉히 가지고 가서 직접 그들을 대면하여 그들만이 유능한 탓으로 오랫동안 전장에서 수고하는 정상을 위로해 주도록 한다면, 뭇사람의 감정이 깊이 원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당 여러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이어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임경업은 배를 부수고 군졸을 도망치게 한 죄가 없지 않으니, 공을 세워 남의 본보기가 되라는 것으로 책임지우고, 또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군문에 한번 사람을 보내어 진념하는 뜻을 보인다면, 어찌 군졸들만 감격하겠습니까. 저 사람들도 우리가 그들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니, 의당 이 차자에 따라 거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삼남 지역에서 군졸을 징발하기 곤란한 점에 대해서는 신들만 서로 걱정할 뿐 아니라, 중외의 식견 있는 사람들의 논의가 모두 다 그러합니다. 그러니 군졸 교대에 관한 한 가지 사항은 우선 위산보(魏山寶)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자세하게 의논하여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임경업이 군대를 거느리는 데 있어 군율을 위반한 것이 이미 잘못된 일이라면 저들이 의심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을 듯하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위산보(魏山寶)와 윤순지(尹順之)가 돌아오는 날이 아마도 열흘에서 보름 사이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의당 그들의 얘기를 살펴보고서 다시 의논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3일 경술
조석윤(趙錫胤)을 집의로, 유심(柳淰)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간원이, 쌀과 베가 있는 서울의 각 아문 및 감사·병사·수사는 각기 저축해 놓은 것을 다 털어내어 칙사를 접대하는 데 돕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감영(監營)·병영(兵營)에 저축해 놓은 것을 가져다 쓰는 것은 타당치 못할 듯하다."
10월 5일 임자
유성이 건방(乾方)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또 구진성(鉤陳星) 아래에서 나왔다.
10월 6일 계축
간원이 아뢰기를,
"장사치들이 기회를 틈타 이익을 탐하기 때문에 쌀값이 치솟으니, 법부(法府)에서 엄하게 금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인명은 매우 소중한 것이고, 형벌에는 규칙이 있는 것이니, 어찌 형장을 남용하여 사람 죽이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지난번 형조에서는 며칠 사이에 2인을 장살(杖殺)하였습니다. 법을 적용함이 너무 지나쳐 모두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당해 당상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참판은 한형길(韓亨吉)이고, 참의는 유대화(柳大華)였다. 그 후 헌부에서 대화의 추고 함사(推考緘辭)를 가지고 고신(告身)을 삭탈하는 율을 적용하였는데, 파직만을 명하였다.
10월 7일 갑인
문안사 윤순지(尹順之)가 돌아오는 길에 강을 건너와 치계하였다.
"신이 심양(瀋陽)에 들어가니, 예부의 만월개(滿月介) 등이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사신이 추위를 무릅쓰고 달려와 목욕한 뒤의 건강에 대해 문안해 오니, 국왕의 정성이 가상하고 또 예를 안다고 하겠다. 황제는 목욕한 이후로 감기 기운이 모두 가시어 전보다 갑절 건강하니, 경사스런 희소식을 국왕에게 돌아가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상형(李尙馨)을 교리로 삼고, 특지로 인동 부사(仁同府使) 정호서(丁好恕)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10월 8일 을묘
헌부가 아뢰기를,
"양서와 경기 지방이 똑같이 흉년이 들었는데, 청사의 행차가 또 뜻밖에 나와, 참(站)에서 공궤할 비용과 민간의 출역(出役)을 전혀 댈 길이 없습니다. 양서는 관향 미포(管餉米布)에서 덜어내고, 경기는 각 아문에 저축해 둔 은화를 덜어내어 긴급함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조발(調發)한 쇄마(刷馬)의 수효가 5, 6백 바리나 됩니다. 선혜청에서 그 값을 모두 지급하지 못하고 경기 지방의 민간에게 분배하였는데, 고립(雇立)한 자가 그 값을 갑절로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선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해서(海西)는 일찍이 본도의 계청으로 인하여 쌀 7백 석과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 절반을 제급하였고, 관서(關西)에는 일찍이 더 지급한 예가 없으니, 감사로 하여금 헤아려서 아울러 계문하게 하소서. 그리고 아문에 저축해 둔 것은 일찍이 간원의 계청으로 인하여 이미 호조에서 보충해 썼으므로, 경기 고을에 나누어 주기가 곤란한 형편입니다. 호조의 쌀 2백 석과 육조의 면포 15동을 경기 진영으로 옮겨 지급해서 각 참의 은화와 예단의 비용으로 쓰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쇄마에 있어서는 금년 가을 선혜청에서 받아들인 쌀이 6백여 석이니, 6백 바리의 쇄마를 내더라도 충분히 고립(雇立)하고도 남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1일 무오
황해도 황주(黃州)에 지진이 있었다.
10월 12일 기미
유성이 남하성(南河星) 위에서 나와 유성(柳星) 아래로 들어갔다.
이래(李䅘)를 지평으로, 권령(權坽)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15일 임술
심양에 있는 재신(宰臣)이 치계하였다.
"용골대와 피패(皮牌)·범문정(范文程) 등이 12건의 일을 나열해 써가지고 관소(館所)에 와서 말하기를 ‘1. 전일 군사를 징발할 적에 기한을 어겨서 일을 그르쳤고, 2. 금년에 주사(舟師)가 바다에서 침몰하였다는 핑계로 일부러 늦게 돌아왔으며, 3. 상륙한 뒤에 군병이 탈 말을 15필만 보내오고 군량을 운반할 말도 즉시 보내지 않고 엄동이 되도록 지연시켜 결국 쓸모없는 물건이 되게 하였고, 4. 도망쳐 돌아간 사람들을 즉시 찾아서 돌려 보내지 않았으며, 5. 향화인(向化人)도 2구만으로 책임을 메우고서 다시 더 쇄환하지 않았고, 6. 성을 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약조에 있는데도 마음대로 남한 산성을 수리하였으며, 7. 도망한 한인을 모두 숨겨주었고, 8. 일찍이 유림(柳琳)을 장수로 정하도록 했는데 일부러 남쪽 지방으로 보냈으며, 9. 육경(六卿)의 자식을 볼모로 보냄에 있어서 서얼을 보내거나 먼 인족을 보내어 상국을 기만하였고, 10. 국경을 넘어와 삼을 캐는 사람을 금지하지 않았으며, 11. 가도의 전투에서 도망친 뱃사람과 철산(鐵山)에 도착한 한선(漢船)을 몰래 구제해 주고 끝내 붙들어서 보내지 않았고, 12. 김통가(金通可)가 부탁한 포로를 병사(病死)했다고 핑계하고 아직까지 쇄송하지 않았다. 이미 부자간의 나라가 되고서도 일마다 기만하여 정성과 신의가 조금도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으며, 심지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10월 17일 갑자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다시 심양으로 갔다.
10월 18일 을축
심양에서 재신 등이 치계하기를,
"정명수가 관소에 와서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용장(龍將)이 이달 15일 본국으로 나가는데, 황제가 본국의 흉년을 특별히 염려하여 용장으로 하여금 의주에 머물도록 하고 박씨(博氏) 등만 서울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주에 도착한 뒤에 분부하는 일이 많을 것이니, 재신의 시종 관원이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세자가 놀라서 나가는 이유를 묻고, 의주에서 군색하고 급박할 것을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미리 통지하고자 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용장이 직접 황제에게서 명을 받았으므로 매우 비밀스러운 일이니, 먼저 누설해서는 안 된다. 이번의 행차는 대개 12건에 관한 일 때문이나, 의도는 오로지 군사를 조발해서 수자리를 교체하는 일과, 수상(水上)과 수하(水下)의 각읍에 도망친 한인을 수색하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용골대와 오목도(梧木道) 및 형부의 관원 알사(謁沙) 등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명을 받들고 의주로 갈 것인데, 연전에 마병을 징발할 때와 이번에 주사를 조발해 보낼 적에 감히 횡의(橫議)를 내어서 군기를 그르치게 한 자를 모두 적발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말이 분명치 않아서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만일 먼저 알리지 않으면 의주 사람들이 필시 놀라 동요할 것이다.’ 하니, 비로소 아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용골대가 갑자기 나온다니 그 뜻을 참으로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접대하고 대응하기 어려움은 보통 생각으로서는 미리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소위 12조항 중에서 징병하여 교체하는 일이 가장 주된 의도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 밖의 횡의에 관한 말이 더욱 우려스럽습니다. 이런 일은 의당 그때그때 알맞게 대답해야 하니, 빈신(儐臣)이 내려갈 적에 서로 잘 강구해서 보내되 원접사는 2품 중에서 엄선하여 주의(注擬)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박씨(博氏) 2인이 의주에서 별도의 행차로 서울에 들어올 때에도 접반관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에서 황감을 접반관으로 삼았다.
10월 19일 병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고 묻기를,
"용장이 나온다는데 그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다. 경들의 소견은 어떤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헤아릴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영상 홍서봉이, 윤휘(尹暉)를 다시 기용해 원접사로 삼고 별문안사(別問安使)는 시임 승지로 차출하여 보낼 것을 청하였고, 이경증(李景曾)이, 승지 편에 털담요를 별도로 보내서 후대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0월 20일 정묘
번개가 쳤다.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죽었다. 허적은 사람됨이 경박하여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 상변(上變)한 공로로 인해서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추숭(追崇)하자는 논의에 편승하여 여러 차례 상소하였는데, 망령스럽고 괴이한 말이 많았다. 그러나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원접사 윤휘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 접견하고 묻기를,
"경은 오늘의 사세를 어떻게 보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보기에는, 횡의를 함부로 낸 사람과 가짜 아들을 볼모로 보낸 사람은 붙들려서 욕을 당하게 될 듯합니다. 그리고 도감의 포수와 어영의 군병을 용골대가 이미 보았으니, 이 군사로 교체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횡의에 대한 설에 대해서는 ‘성에서 내려온 뒤로는 모두가 두려워하여 명령만을 따르는데 어찌 다른 의논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라. 저들의 징병이 과연 지금 추측과 같다면, 경은 의당 ‘나라 안이 뒤숭숭한데다가 기근까지 겹쳤는데 뜻밖에 사변이라도 있을 경우 이 군사가 없으면 방어할 수 없고, 또 이들이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외모는 그다지 어리석게 보이지 않지만 기예는 뛰어나지 못하다.’고 답하도록 하라. 경은 일찍이 용골대와 서로 잘 알고 또 식견이 있기 때문에 번거롭게 멀리 보내는 것이다. 모든 일에 전력을 다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전라도 김제군(金堤郡)에서 염소가 발이 셋 달린 새끼를 낳았다.
10월 23일 경오
번개가 쳤다.
영의정 홍서봉, 우의정 강석기, 호조 판서 이명(李溟)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접견하고 이르기를,
"이번에 칙사의 행차가 갑자기 나오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석기가 아뢰기를,
"저들이 일찍이 12건의 일을 말하였는데, 이제 용골대가 의주에 주재하고 있으니, 수응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고, 서봉이 아뢰기를,
"지금 민후(閔煦)의 말을 들으니, 그 뜻이 대체로 주사(舟師)로 인하여 감정을 가진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명이 나아가 아뢰기를,
"1개월의 식량을 말 6백 필로 운송해야 하는데, 만일 군량을 이어대지 못하면 말썽이 일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을 시켜 은을 싸가지고 가서 저들에게서 식량을 사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허락하지 않으니, 운송하는 비용을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8백 필을 조발해서 군병이 교체할 때 나누어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4일 신미
충청도 청안(淸安)·정산(定山)·해미(海美)·태안(泰安)·서산(瑞山)·온양(溫陽)·청양(靑陽)·결성(結城)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용골대 등이 중강(中江)에 도착해서 그대로 머물면서 의주에 들어오지 않고 빈객 이행원(李行遠)을 시켜 치계하게 하기를,
"영의정, 이조 판서, 도승지 및 박황(朴潢)은 모두 만나서 의논할 일이 있으니 24일까지 올 것이며, 만일 기한내에 오지 않으면 반드시 큰 우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감히 어기지 못하고 먼저 영의정 홍서봉, 이조 판서 이현영(李顯英), 도승지 신득연(申得淵)을 보내고, 박황은 순검사(巡檢使)로서 남쪽에 가 있었기 때문에 밀지로 불러와 뒤이어 보냈다. 서봉 등이 떠나려 할 때 상이 불러 접견하였는데, 원임 대신(原任大臣)도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사가 이미 중강에 도착했다 한다. 그들의 거조가 어떠한가?"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신은 이번의 행차가 심상한 일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또 들으니, 개주(盖州)의 군사가 사냥을 핑계로 나왔다고 하는데, 필시 군대로 협박하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먼저 이현영과 박황 및 신을 부른 것은 필시 횡의를 낸 사람을 깊이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현영은 그의 아들 이휘조(李徽祚)가 일찍이 심양에서 죄를 얻었는데 현영이 현재 육경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오랑캐들이 안 것이고, 박황은 정뇌경(鄭雷卿)이 죽게 된 일에 대해서 같이 참여해 알고 있는 것으로 정역(鄭譯)이 의심하여 항상 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남한 산성에서 강화를 의논할 때 종시토록 왕래하였었는데 현재 재상의 직에 있습니다. 저들이 부른 것은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맞다."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저들이 만일 먼저 횡의를 주장한 사람을 거론해서 이름을 힐문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은 필시 조정으로 하여금 분명히 적발하라고 할 것이므로 먼저 스스로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부터 나는 이런 근심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소장 중에서 청국에 관계되는 것은 정원에서 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정원이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서 반드시 모두 봉입(捧入)해 다시 내리는 일이 있게 하여, 보고 듣기에 번거롭게만 하였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일이 매우 중대하니 충분히 의논해 결정해서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신이 의주에 가서 저들에게 ‘나이 어린 사람이 혹 그런 의논을 제기한 경우가 있었으나 조정에서 하나도 채용하지 않았다. 몰래 하는 헛말들을 어떻게 다 금할 수 있겠는가.’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저들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는데도 숨기고 내놓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 필시 더욱 진노할 것이다."
하자, 서봉이 아뢰기를,
"신은 그곳에 도착해서 일에 따라 계품해서 조정의 지휘를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이는 실로 국가의 막중한 일이다. 나라를 위해 죽을지언정 두 가지 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정에 품명하는 것은 바로 번신(藩臣)이나 하는 일이니, 어찌 시임 대신이 할 말인가."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저들이 조정과 논의하여 정하겠다고 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경은 강을 건너도록 놔두고 뒤따라 오려는가?"
하자, 서봉이 아뢰기를,
"저들이 한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억지로 강을 건너면 힘없는 신으로서야 전혀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소신은 근력을 다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하였다. 서봉이 아뢰기를,
"용장은 신과 산성에서부터 구면이니 혹 갖은 말로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끝내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록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어찌 경을 죽이겠는가."
하자, 서봉이 아뢰기를,
"비록 신을 죽이지는 않을지라도 심양으로 묶어서 보내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김영조(金榮祖)가 아뢰기를,
"저들의 군사가 용만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조정에서 선처하는 데 달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이 죽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한숨을 쉬면서 이르기를,
"내가 병자년의 난 때 산성에서 죽었더라면 어찌 다시 오늘날의 일을 보았겠는가. 종사와 생령을 위해서 치욕을 참고 성에서 나와 지난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하였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죽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한숨만 쉬고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을 좌의정으로, 한형길(韓亨吉)을 도승지로 삼았다.
10월 25일 임신
유성이 북두성 위에서 나와 초제성(招提星) 아래로 들어갔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였다.
"역관 정명수가 은밀히 말하기를 ‘영상은 남한 산성에서 약조할 때의 대신으로서 현재 영상의 자리에 있고, 이조 판서는 한때의 전형을 주관하여 인물을 진퇴시키고, 도승지는 임금 앞에 출입하기 때문에 이들과 큰일을 논의하여 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속히 오면 일이 매우 순조로울 것이다. 그리고 박황은 일찍이 관소(館所)에 있으면서 범한 바가 있었고, 그 뒤에도 관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불러서 묻고자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좌승지 이덕수(李德洙)를 보내서 청사에게 문안하였다.
조경을 집의로 삼고, 유정익(柳廷益)을 발탁해서 통제사로 삼았다.
10월 26일 계유
유성이 남하성(南河星) 위에서 나와 곤방으로 들어갔다.
신득연(申得淵)이 개성부에 도착하니, 위산보(魏山寶)가 심양에서 돌아오다 득연을 만나서 말하기를,
"도승지를 부른 것은 근시(近侍)일 뿐만이 아니고 일찍이 식량을 운반하는 인마(人馬)를 막았기 때문에 저들이 불러다 힐책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득연이 그 말을 듣고서 크게 놀라 즉시 변복을 하고 샛길로 달려 돌아가면서 "돌아가 조정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홍서봉 등이 치계하여 재촉하자 부득이 그대로 나아갔다.
홍서봉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서쪽에서 온 장계를 열어보니, 내용 중에 역관 정명수의 무리가 일찍이 말한 ‘다른 나라 국왕들은 모두 조회를 오니 조선 국왕도 입조해야 한다.’는 등의 말이 있어 경악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이 일이 허락받을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극히 어려운 일로써 사단을 만들어 그들의 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앞으로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길 때에 본래 그런 일이 없었다. 다만 고려 때 혹 있기는 하였으나 전대의 일을 어찌 그대로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주상께서는 3년 동안이나 고질병을 앓아 문밖을 나올 수 없으니, 이런 일이 있게 되면 필시 길에서 쓰러지시고 말 것이다.’는 말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장계 중의 말이 자세하지 못한 듯하다. ‘바람을 쐴 수 없어 문을 열지 못하고 다리가 약해서 걸음을 걷지 못하니, 결코 움직이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대답하고, 이른바 고사(古事)에 대해서는 제기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7일 갑술
금성(金星)·목성(木星)·수성(水星) 세 별이 남두(南斗)에서 합치고, 유성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으로 들어갔다.
10월 28일 을해
정언 박장원(朴長遠)이 월과(月課)로 지은 반포오시(反哺烏詩)에,
어버이 집에 계시지만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네
하찮은 새만도 못하니
반포하는 까마귀에 눈물짓네
하였는데, 상이 보고 하교하기를,
"박장원에게 부모가 있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장원은 어미만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절구를 보니 말 속에 정이 나타나 있다. 한 가문의 충효가 【 외조부 심현(沈誢)은 강화에서 절의를 지켜 자결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한다.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는 슬픔을 고인은 가슴아파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쌀과 베를 넉넉히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9일 병자
용골대가 원접사로 윤휘(尹暉)가 왔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서 사람을 가려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비국이 이경증(李景曾)으로 대신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청사가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병환으로 교외에 나가 영접하지 못하고 양화당(養和堂)에서 접견하고 이어 칙서를 받았다. 그 칙서에,
"왕이 남한 산성에 있을 적에 ‘성은(聖恩)을 입어 살아나서 나라가 보전되고 종사의 대가 끊기지 않게 된다면, 신으로부터 온 나라 백성들까지 천지와 같이 큰 황상의 공덕을 우러러 받들 것입니다. 모든 명령은 감히 털끝만큼도 어기지 않을 것이며, 자자손손 오직 공경히 지킬 것입니다.’고 하였고, 짐도, 왕이 살려주고 보전케 해준 은덕을 생각해서 반드시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 말을 실천할 것이라 여겨서, 나의 덕을 베풀어 그대의 국가를 보전하게 하여 대대로 지켜온 종사를 유지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짐이 보기에 명을 어기고 일을 그르치는가 하면 우리의 사기(師期)를 그르치는 것도 많았다. 그리고 사전에 미리 교묘하게 꾸며댈 바탕을 마련해 놓고는 뒷날 거짓말을 하면서 앞서의 말에 꿰맞추었다. 소행이 이와 같으니, 이는 당초의 생각이 아니며 전날의 말과도 다르다. 때문에 대신 영아아대 【 용골대이다.】 등에게 특별히 명하여 의주에 도착해서 모든 일을 왕에게 말하고 그 결과를 회주(回奏)토록 하였다. 특별히 유시한다."
하였다. 이때 청사가 상의 병환의 경중을 염탐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상이 환관에게 부축하도록 해서 행례하였는데, 이불과 베개를 치우지 않고 접견하였다.
10월 30일 정축
청사가 삼전도(三田渡)에 가서 비각(碑閣)을 살펴보았다. 이는 영남의 선비가 비를 파괴하였다는 헛소문이 심양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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