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인
이보다 앞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횡의를 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위협하는 말로 협박하자, 세자가 화를 내면서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하니,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하였다고 한다.
11월 2일 기묘
이성구(李聖求)를 영중추부사로, 이진경(李眞卿)을 경상 우병사로, 김술(金述)을 전라 우수사로, 이도장(李道長)을 교리로 삼았다.
11월 3일 경진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일렀다.
"향화인은 저들이 같은 무리로써 요구하니 수색하여 보내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도망쳐 돌아온 사람은 정상의 애처로움이 차마 말할 수 없고 실로 인심의 거취에 관계되니, 결코 가볍게 허락할 수가 없다. 먼저 약간의 향화인으로 책임을 때우되, 도망쳐 온 한인을 수색해서 보내는 것도 그만둘 수 없겠다."
11월 4일 신사
경상우도의 유생 박익(朴翊) 등이 상소하기를,
"지난해 세를 낼 적에 전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좌도의 전결 1만 2천 6백 24결을 우도로 이송하였는데, 부세(賦稅)로 계산하면 1천 6백 83석입니다. 좌도의 부세를 우도의 백성에게 징수하는 것은 참으로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이송해 온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다시 본래의 지역으로 되돌려 주소서."
하였는데, 호조에 계하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왕자의 정치는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전세를 균등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해조에서는 매번 경차관을 보내서 자세히 복심(覆審)한 것으로 회계하고 있으나, 복심하는 관원이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지 못하고 전례를 답습해 온 지가 여러 해이니, 우도에서 억울하다고 하는 말은 당연합니다.
신역(身役)을 균등하게 해달라는 의논이 본도에서부터 일어나 묘당에서 시행한 것이 비록 공평하고 균등한 듯하나, 실로 올바른 전제(田制)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수조(收租)가 끝나 개창(開倉)이 박두한 지금 속속 고칠 수가 없으니, 명년을 기다려 전제를 다시 밝혀 모두 법전대로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5일 임오
홍서봉과 이현영 등이 치계하였다.
"용호가 나온 것이 전일과는 크게 달라 12건에 대한 일을 응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중에서도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조목은 더욱 긴박하여 만일 따르지 않으면 저들이 직접 수색하겠다고 합니다. 임시 조처를 취해서 대충 저들의 소망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럴 경우 향화인과 도망온 한인이 도리어 근심을 늦추게 하는 데 일조가 된다고 합니다."
충청도 황간현(黃澗縣)에 넘어졌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섰다.
11월 6일 계미
강백년(姜栢年)을 정언으로, 남노성(南老星)을 이조 정랑으로, 유심(柳淰)을 부응교로 삼았다.
11월 7일 갑신
홍서봉과 이현영 등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의주에 도착하니 용호가 각기 다른 곳에서 접견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수일 후에 용골대가 알사(謁沙)와 같이 앉아서 신들에게 원접사 윤휘(尹暉), 승지 이덕수(李德洙), 감사 정태화(鄭太和), 병사 이현달(李顯達), 빈객 이행원(李行遠), 보덕 정치화(鄭致和)와 함께 들어와 앉도록 하였습니다. 용호가 말하기를 ‘산성에서 약조를 정할 때에 홍 정승과 윤 판서가 모두 참여하였었다. 그런데 몇 년도 채 못 되어 조약을 실천하지 않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남조(南朝)033) 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약조에 실려 있는데도 해마다 국서를 가진 사신을 보냈으며, 도망쳐 돌아간 사람을 붙잡아 보내고 향화인을 쇄환하고 도망친 한인을 돌려 보낸다는 것도 약조에 있는데 모두 이행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기에, 서봉이 답하기를 ‘3건의 일은 의당 온 힘을 다해서 쇄환할 것이다. 그러나 남조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정례(情禮)를 갖추어 대국을 섬기는 것을 황제도 이미 통촉하시는 바인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니, 용호가 말하기를 ‘실제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모른다고 여기지 말라.’ 하기에, 답하기를 ‘연전에 최효일(崔孝一)이 조정에 죄를 짓고 섬으로 도망쳐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를 지적해서 하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유림(柳琳)은 남쪽 지방에 변이 있음으로 해서 통제사로 차임되었는데, 이는 유림이 전에 왜(倭)를 방어한 명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대국의 말을 듣고 이미 상경하여 조발에 응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1월 8일 을유
홍서봉 등이 치계하였다.
"용호 등 세 장수가 한곳에 앉아서 좌우를 물리치고 신들을 불러서 정역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김사양(金斜陽)이란 자가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고 관작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기에, 서봉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원래 김사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없고, 전 판서 김시양(金時讓)이 있는데 눈뜬 장님으로 을해년034) 부터 벼슬에서 떠났다.’고 하니, 용호가 또 묻기를 ‘그 사람은 같이 산성에 들어갔다가 어가를 따라오지 않고 그대로 시골로 내려가서 관작을 제수해도 전혀 받지 않았고, 동궁(東宮)이 왕래하던 날 모든 사대부는 전송과 영접을 하는데도 유독 참여하지 않았으며, 또 연소배를 시켜서 소장을 함부로 올린 자인데, 과연 그런 사람이 없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그것이 누구를 지적한 것인지를 알았지마는, 감히 가볍게 말하지 못하고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용호가 계속해서 다그쳤습니다. 신은 끝내 숨길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답하기를 ‘김시양은 병으로 산성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김상헌은 산성에 들어갔지만 병으로 어가를 따라 내려오지 못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니, 용호가 갑자기 묻기를 ‘지금 어디 있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나이가 많고 병들어 안동(安東)에 물러가 있다.’ 하니, 용호가 말하기를 ‘안동이 어느 도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경상도이다.’고 하니, 용호가 말하기를 ‘즉시 조정에 보고해서 속히 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11월 9일 병술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상신(相臣)의 장계를 보건대, 저들이 이름을 지적해서 찾으니 우리가 즉시 분별해서 밝히지 않으면 피차간의 왕래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전례가 한번 생기고 나면, 감정으로 인하여 무함하는 우환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멀리 내다보는 계책이 어찌 이 일만 위해서이겠습니까.
상헌은 70이 넘은 나이로 노환이 깊어 시골에 은둔해 지낸 지가 이미 여러 해입니다. 지금 비록 그의 죄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그의 생사를 논하지 않은 채 억지로 들여 보낸다 하더라도, 노병으로 거의 죽어가는 지경이니 결코 그곳까지 살아서 도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상신에게 이런 내용으로 말하게 해서 기어이 선처하도록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상헌이 혹시라도 지레 죽는다면 필시 국가에 근심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 점을 경들은 생각하라."
하였다.
11월 10일 정해
홍서봉 등이 치계하기를,
"용호가 와서 말하기를 ‘상신 신경진과 만나서 의논할 일이 있으니 속히 아뢰어서 들어오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수상(首相)이 이미 내려갔는데 좌상이 또 다시 멀리 나가면 국사를 관장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신경진이 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1일 무자
호조에 명하여 은 6천 냥을 의주로 보내서 호장(胡將)들에게 주도록 하였다.
11월 12일 기축
우상 강석기가 상차하기를,
"김상헌은 정축년035) 이후로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에서 죽기로 작정하였는데, 지금 70세가 넘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품성이 강직하고 편협하여 일에 따라 적당히 적응하지 못하니, 이제 급박한 일을 만나 미봉책을 책임지우는 것은 형세상 참으로 곤란합니다. 그리고 의논하는 자들은 지금 직명(職名)을 주어서 그가 관직을 받지 않은 행적을 은폐하고자 하나, 이는 성실한 일이 못 될 뿐 아니라 저들이 알고서 속였다는 것으로 책망하면 더욱 난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들이 상헌을 지적해서 말하는 것은 필시 간사한 무리가 몰래 내통하여 무함한 소치이니, 저들이 알고 힐책해 올 것이 당연합니다.
이제 만일 급박하게 독촉하는 데에 겁먹고 사실을 변론하지 않은 채 지레 보내게 되면, 목전의 위급함은 조금 늦추어지기는 하겠지만, 이런 전례가 한번 시작되면 점점 만연되어 유감을 품은 무리가 제각기 틈을 엿보아 무함을 자행할 것이니, 앞으로의 우환이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심의 거취와 국가의 존망이 참으로 이번의 일에 달렸습니다. 성상께서는 여러 대신에게 하문하시고 이해를 따져보아 좋은 계책을 채용하여 후회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차자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동부승지 신민일(申敏一)이 상소하기를,
"오늘날의 국사가 참으로 통곡할 만합니다. 용장이 의주에 머물고 있어 접대하는 비용이 이미 말할 수 없이 많고, 쇄환하는 우환이 관서(關西)에서 먼저 시작되어 경기까지 파급되었으며, 이제 또 상신과 중신을 불러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염의 백성이 잇따라 피란하는 지금 불행히도 뜻밖의 환란이 생기게 되면 파발의 길도 끊길 것이니, 전일의 일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믿을 만한 형세가 없고 관방(關防)은 믿을 만한 곳이 없으니, 토붕 와해의 형세가 이미 목전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궁중에 깊이 계시면서 신료를 자주 접견하지 않으시니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다 아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비록 정양 중에 계시지만, 누워계신 대내에서 때때로 여러 신하를 소대하여 시사에 대해 자문하시고 좋은 말을 살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필시 총명이 넓게 열려 국가를 위한 계책에 도움이 될 것이니, 환관들과 계시는 것보다 어찌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유념하겠다."
하였다.
11월 13일 경인
사은사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이 칙서를 가지고 심양에서 돌아왔다.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월 25일은 바로 짐의 생신으로 실로 중외에서 은전을 바라는 날이다. 따라서 옛법에 의거하여 10악(十惡)을 제외한 국내의 일체 죄인을 모두 사면하였다. 짐이 생각건대 중외가 모두 나의 나라이니, 국내에 이미 사면하였으므로 밖의 번국(藩國)에도 은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대 나라의 세공미(歲貢米) 1만 포(包)는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므로, 이제 9 천 포를 감해주어 그대의 신민들로 하여금 이 기쁨을 같이하게 하고자 한다. 인하여 안구마(鞍具馬) 1필과 백금 3백 냥, 초피 1백 6십 령(領)을 보낸다."
좌의정 신경진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접견하였는데, 우의정과 여러 재상이 동참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저들이 신을 부른다는 말이 있었는데 묘당에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일단 말을 한 뒤에는 중지할 리가 전혀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화를 낸 뒤에 가는 것보다는 속히 가서 조용히 응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상헌에게 급히 하유해야 하는데도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이르기를,
"하유할 필요가 없다. 우선 그대로 두라. 그 사람은 식견이 있으니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올라 올 것이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밖의 사람들이 ‘상헌은 품성이 강경하고 편협하니 지레 죽어버릴 근심이 없지 않다.’고들 하는데, 하유하면 필시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불가불 하유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에는 나라를 위하는 것과 자신을 위하는 구별이 있다. 나라를 위한다면 어찌 감히 죽겠는가. 본래부터 친했던 자들은 그의 본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다."
하였다.
곽성귀(郭聖龜)를 지평으로, 여이재(呂爾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4일 신묘
우박이 내렸다.
홍서봉 등이 치계하였다.
"역관 정명수가 신에게 말하기를 ‘전번의 건(件)은 중대하기 짝이 없는 것인데, 우리가 여기 온 지 20일이 경과하도록 조정에서 명백한 회보가 없다. 이는 감사와 병사가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소치이다. 팔도의 감사와 병사를 모두 잡아오라. 나와 대신 이하는 다시 중강(中江)을 건너가 기한 없이 있다가 일이 완료된 뒤에 돌아오겠다. 그리고 비국의 유사 당상도 불러서 문초해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11월 15일 임진
향화인과 도망온 한인 및 도망쳐 돌아온 사람 등 77인을 심양으로 압송하였다.
11월 17일 갑오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기를,
"세 장수가 육군·주사 및 원손이 들어갈 당시 횡의를 주장한 사람을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육군의 조발과 원손이 들어갈 당시 나는 돌아가지 못하고 심양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일은 모르고, 부마(夫馬)에 관한 것은 내가 아는 일이다.’고 하자, 용장이 화를 내어 꾸짖으면서 ‘횡의를 주장한 자를 이제야 알겠다. 모든 일을 한결같이 받들어 시행하지 않은 것은 모두 도승지의 소행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갖은 말로 극력 변명하였으나 못 들은 척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신에게 분풀이를 해서 위엄을 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정역에게 살 수 있는 방도를 물으니, 말하기를 ‘횡의를 주장한 자를 모두 써서 보이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의 죄를 한꺼번에 뒤집어쓰고 죽게 된다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기에 부득이 최명길과 【 육군을 조발할 적에 명길이 자신이 가서 죄를 받겠다는 말을 하였다.】 김상헌·조한영(曺漢英) 및 함창(咸昌) 유생 채씨(蔡氏) 【 주사 조발과 원손이 갈 적에 3인이 상소하였다.】 등을 써서 보이니, 말하기를 ‘김상헌은 이미 불러오도록 하였다. 조(曺)와 채(蔡) 두 사람을 급히 내려오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인하여 생각하건대, 조정에서 신을 구제하려면 신이 본래 화친을 주장한 사람이었음을 밝혀서 다른 의논이 없었음을 보장하고, 앞으로 쇄환할 일을 각도의 감사와 전적으로 관장하여 책임지고 완료하게 하겠으니 속죄해 달라고 하면 들어줄 가망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신득연이 써서 제시한 사람은 설사 진달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채용하지 않았으니 공언에 그친 데 불과합니다. 이제 한 사람의 실언으로 인해서 갑자기 불측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은 실로 성명께서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며, 또 인심이 의구하여 모두 보존되지 못할까 하는 근심을 품게 될까 염려됩니다. 빈신으로 하여금 완곡한 말로 잘 주선하여 그들의 뜻을 엿보아 처리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득연의 일은 실로 근거할 데가 없으나, 살아나고자 하는 계책이니, 역시 매우 가련합니다. 이 일도 빈신으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남을 사지에 밀어넣고 자신은 살기를 구하였으니 의가 아니며, 국가에 근심을 끼쳤으니 충이 아니다. 그런데도 경들은 분노하지 않고 ‘근거할 데가 없다.’고만 하니, 오늘날의 조정은 법이 없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역관 정명수가 홍서봉에게 말하기를 "상국의 호령을 폐기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곳이 있다. 비국의 유사 당상을 속히 들여보내고, 좌상도 속히 오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11월 18일 을미
상이 하교하였다.
"신(申)의 말을 따를 것인지를 속히 회답하게 하라. 우롱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서 중난한 일이 아닌데도 그곳의 시종한 관원들은 굽신거리며 명을 따르고 감히 말을 못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이 중대한 일을 무슨 재주와 기력으로 성난 야수와 같은 저들의 마음을 돌리겠는가. 강약의 형세가 다르고 중국과 오랑캐의 실정이 다름을 경들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언(空言)’ 2자만을 가지고서 증거가 있는 일을 억누르려고 하니, 이익은 없고 해로움만 있을까 염려스럽다.
오늘날의 일은 그들의 말대로 따르는 것은 인정상 차마할 수가 없는 일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경솔하게 사단만 야기시키는 것으로, ‘공언’ 2자는 그대로 들어줄 리가 만무하니, 매우 염려스럽다. 이번 일에 대한 계책으로는 지성으로 개유하여 만일의 요행을 바라는 것이 제일이다. 우상이 내려가서 결말을 내고 오라."
우상 강석기가 아뢰기를,
"아침나절에 삼가 신이 내려가서 결말을 내고 오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신은 지체없이 속히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좌상이 자신이 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난번 용장이 좌상을 불렀을 적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사은사로 선임된 뒤에도 사은의 행차를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됨에도 국사를 관장하는 사람이 없어 즉시 떠나지 못한다는 뜻을 저들에게 은밀히 통지하여 저들이 사세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레 간다면 전후의 말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성의와 신의로 서로 대하는 도리가 아닐 듯하며, 이로 인하여 의심하고 힐책을 가해 온다면 참으로 큰 걱정입니다. 이번에 신이 가는 것을 단연코 지체해서는 안 되니 내일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비국의 유사 당상과 같이 가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유사 당상은 오늘 떠나보내라."
하였다. 좌상 신경진이 아뢰기를,
"우상이 아무리 지성으로 개유한다 해도 들어줄 리가 없을 듯합니다. 저들이 신을 불렀고, 이제 또 재촉하는데, 신이 끝내 가지 않고 다른 정승으로 대신 가게 한다면 실로 일은 해결되지 않고 그들의 화만 돋울 듯합니다. 이번에 신이 가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속히 먼저 가서 후회를 남기지 않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상의 계사를 보면 경이 내려가는 것은 실로 불가하다."
하였다.
11월 19일 병신
홍서봉과 이경증 등이 치계하였다.
"어젯밤 신득연이 매우 겁을 내어 행동거지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추궁하여 묻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지레 스스로 써서 제시하여 자신의 죄가 나누어지기를 바랐으며, 횡설 수설하여 마치 실성한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김상헌에 대해서는 신들이 감히 용호에게 분명히 변명하지는 못하였지만, 매번 역관들을 시켜서 ‘그가 노병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조정에 죄를 얻어 원래 직책이 없다.’고 말하게 해서 이런 내용이 귀에 익숙하게 된 뒤에 기회를 보아 잘 설득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득연이 써서 제시한 뒤에 정명수가 역관들에게 ‘너희가 항상 김상헌의 억울함에 대해서 말했었는데 이제 이렇게 되었다. 앞서는 어째서 속였는가.’ 하였으니, 이후로는 다시 힘을 써볼 바탕이 없습니다. 그리고 역관들에게 들으니 ‘좌상의 행차가 비록 대단한 일에 관계되는 것은 없지만, 칙사들이 본래 좌상이 왕의 인척이자 훌륭한 장수로서 위엄과 명망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호령할 적에 그의 위세를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청국은 일단 말을 하면 그대로 하고야 맙니다. 좌상이 호출을 받은 것도 등한히 할 일이 아니니, 만일 조금이라도 지연되면 그들의 화만 더 돋우게 되어 필시 뜻밖의 우환이 있게 될 것입니다."
몰래 무역한 상인 2인을 의주에서 처형하였는데, 칙사의 분부로 인한 것이다.
11월 20일 정유
홍서봉 등이 치계하였다.
"용호가 와서 말하기를 ‘팔도 감사를 소집하도록 명하였는데, 그들이 오는지의 여부를 어찌하여 지금까지 보고하지 않는가? 정승 신경진은 비록 「국왕이 미령하여 의약을 관장하느라고 이토록 지체되고 있다.」고 하나 혹시라도 명을 어겨서 후회되는 일이 없게 하라. 신득연이 말한 판서 김상헌과 지평 조한영은 어찌 소식이 없는가? 그리고 양서(兩西)의 여러 산성은 다시 수리하지 말고 주민들을 모두 내몰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는데도 성을 점거하고 내려오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습니다. 이에 서봉이 답하기를 ‘검산(釰山)·운암(雲巖)·자모(慈母)·약산(藥山)·능한(凌漢) 등의 성은 그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을 거느리고 모두 평지로 내려와 살고 있으며, 용골(龍骨)은 민가가 모두 그 안에 있고 구읍(舊邑)에는 가옥이 한 채도 없으니 많은 민가를 어떻게 갑자기 지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정방(正方)은 황주(黃州) 고을이 풍토병이 심한 데 비하여 산성은 물 맛이 상당히 좋아 사람들이 질병이 없다. 병사(兵使)가 아직 산성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역관 정명수가 또 말하기를 ‘각도의 감사를 집합시키는 영이 어찌 괜히 한 말이겠는가. 황해 감사는 이달 18일에, 경기 감사는 20일에, 함경 감사는 22일에 들어오고, 기타 먼 도의 감사는 24일까지 오라. 만일 기일 내에 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처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비국이 아뢰기를,
"세폐미(歲幣米) 9천 석을 감해준 것은 실로 큰 은혜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중외에 사면령을 시행한다고 말하였으니, 칙서가 들어오는 날 전례대로 교서를 반포하면 의주에서 그 말을 전해 듣고서 필시 생색이 있을 것이고, 의주 등처에서도 죄인을 풀어주는 것이 더욱 착실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광경(鄭廣敬)을 대사헌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집의로, 황감(黃㦿)을 부수찬으로, 엄정구(嚴鼎耉)를 부교리로, 변시익(卞時益)을 장령으로, 김상(金鋿)을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22일 기해
사면령을 내렸다.
11월 23일 경자
황해도 황주의 태허루(太虛樓)가 불탔다.
범문정(范文程)이 수레에다 큰 물고기 2마리, 유수 소주(乳酥燒酒) 1병을 싣고 관소(館所)에 찾아와서 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맛이 매우 좋으니 국왕에게 보내라." 하였다. 이에 세자가 선전관 김번(金繁)을 시켜 보내왔다.
11월 24일 신축
명하여 동지사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에게 등급을 뛰어넘어 가자하고 노비 5구를 내렸으며, 부사 안응형(安應亨)과 서장관 윤득열(尹得說) 등에게 가자하였는데, 이는 세폐미를 감해온 때문이었다.
11월 25일 임인
달이 저성(氐星) 남쪽 제 2성을 범하였다.
용호 등이 김상헌이 아직까지 들어온다는 기별이 없다는 이유로 군대를 거느리고 안주(安州)로 곧바로 왔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상이 하교하기를,
"전일 대신이 청대하였을 적에 전 판서 김상헌에게 행회(行會)할 것으로 품의해서 정했었는데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아 나라가 욕되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고 괴이하다. 그날 입시하였던 유사 당상을 모두 나추하라."
하였다. 이에 임담(林墰)과 허계(許啓) 등이 연계되어 파직되었으며, 이명한(李明漢)은 의주에 있었기 때문에 돌아온 뒤에 나추하라는 명이 있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팔도의 감사를 들어오라고 한 말은 쇄환의 일로 인한 것만이 아니라 달리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아마도 그만두지는 않을 듯합니다. 불가불 주선해서 막아야 하니, 빈신으로 하여금 개유하게 하되 ‘지금 쇄환의 일이 한참 진행중이라서 만일 감사가 없으면 조정의 명령도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매한 백성들이 감사가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두 놀라 흩어질 것이다.’는 뜻으로 잘 말하여 기필코 허락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계묘
달이 구발성(鉤鉢星)을 범하였다.
홍서봉 등이 치계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김상헌이 아직도 소식이 없는데, 우리가 공들을 몰아 심양으로 들어갈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체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이 우리가 다시 건너가는 것을 보면 필시 대군이 곧 나올 것이라 여겨서 놀라 흩어질 우환이 있을까 염려해서이다. 우리는 국왕과 대신 이하 모두가 김상헌과 한마음이라서 비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끝내 보내오지 않으면 공들을 포대에다 담아 함거에다 싣고 심양으로 가서 가둘 것이다. 그리고 김상헌을 체포하겠다는 뜻으로 글을 만들어 팔도에 효유해서 백성들이 놀라지 않도록 하고, 군대를 투입할 것이다. 그때 가서 오늘날 우리가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누누이 개유하였으나 이토록 심한 공갈을 하였습니다. 수일 내로 확실한 보고가 없으면 아무래도 큰 재앙을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11월 29일 병오
향화인 30여 인을 의주로 압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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