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미
황해 병사 황집(黃緝)이 치계하기를,
"정방성(正方城)의 진영을 옮기는 일이 겨울을 당하였기 때문에 성 안의 백성들이 일시에 살 곳을 잃게 되었습니다. 용골성의 예와 같이 명년 봄을 기다려서 진영을 옮기도록 해주소서."
하니, 따랐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의주의 지공(支供)에 대한 폐해를 진계하였는데, 비국이 함경도와 황해도가 힘을 합하여 같이 지공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정광경(鄭廣敬), 집의 조석윤(趙錫胤), 장령 유경즙(柳景緝), 지평 김상(金鋿) 등이 아뢰기를,
"지금 서로(西路)는 재정이 탕진된 터에 이런 전에 없던 책응(策應)을 해야 하게 되었으므로 온 도내의 물력이 남김없이 고갈되어 공억(供億)하는 일이 멀리 해서의 읍들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이에 난리를 겪은 백성들이 거듭된 기근으로 사망자가 늘어날 우환이 조석간에 임박하였으나,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곡식을 모두 털어 징렴에 응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일로에 인마(人馬)의 요역은 끝이 없는데 역마(驛馬)는 대부분 거의 죽어버렸으니 쇄마(刷馬)를 계속 판출해 낼 힘이 없습니다. 구제하고 변통할 수 있는 모든 방도를 동원해야 하겠습니다.
내수사 노비로서 양서(兩西)에 있는 자가 몹시 많은데 전부터 잡역을 복호해 주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렇게 온 나라 백성이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이들도 같은 나라의 백성인데 고락이 이처럼 현저하게 다르니, 실로 성상께서 일체로 인덕을 베푸는 방도가 아닙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내수사 노비에 대해서 복호를 허락하지 말고 일반 백성과 같이 차역(差役)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신공 미포(身貢米布)도 일로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각 감사들로 하여금 관장하여 받아들이게 해서 인마(人馬)의 값에 보충해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의 힘을 펴고 인심을 위로하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내수사 노비의 고발하는 폐단이 오늘날 백성을 괴롭히는 고질입니다. 송사가 날로 번다해지고 있으며 억울함이 날로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근래 인심이 고약하고 명분이 엄정하지 못한 것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힘없는 주인의 노비는 모두 배반할 마음을 품고서 내수사 노비와 결탁하여 온갖 방법으로 투속하여 이름을 고쳐 문서에 허위로 올립니다. 한미한 사족이 혹 송사를 해서 호소하기도 하지만 원통함을 품은 채 뜻을 이루지 못한 자도 많아서 원성이 마구 일어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내수사 노비는 본래 성세(盛世)의 일은 아닙니다. 성상께서 하루아침에 혁파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이토록 원망을 부르는 길을 열어두어서 성덕에 누가 되고 인심을 크게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득실과 경중을 비교해 보면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후로 고발하는 규례를 영원히 혁파하고, 만일 성상의 뜻을 어기고 다시 전일의 습속을 답습하는 간사한 내수사 노비가 있으면 유사에게 명하여 중한 법으로 다스려 왕자의 공평한 정사를 밝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새로 창설한 일이 아니니 혁파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논의하는 것이 번다하다."
하였다. 헌부가 이로써 연계하니, 답하기를,
"법전에 있는 일이니 상고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조석윤이 "대관(臺官)으로서 법전을 모르고 경솔히 일을 논하여 성상께서 힘들게 하교하도록 하였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르기를,
"신은 생각건대 성상의 원래 병통이 대부분 재리(財利)에 있는데도 통렬히 극복하고 다스리는 공력을 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처지에 이르러서도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에 온당치 못한 하교를 내려 굳게 거절하시니, 이는 잘못을 번연히 깨달아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남의 주장을 따르는 대성인의 도가 아닙니다.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광경, 장령 유경즙, 지평 김상도 인피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헌부의 많은 관원이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몹시 위급한 백성들의 상황을 목격하고 이를 논한 것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그 논의가 매우 바르고 그 뜻이 매우 아름다우니, 법전에 있느냐 없느냐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모두 인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대사헌 정광경, 집의 조석윤, 장령 유경즙, 지평 김상을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재리는 비루한 일인데 조석윤이 지척하여 곧바로 말하였고, 그대들도 정당한 논의라고 하였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청렴치 못하다고 하지 않고 보궤(簠簋)를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036) 고 하는 뜻과는 다르다."
하였다.
팔도의 편오군(編伍軍)이 10만 1천 9백 14인이고, 무사(武士)가 1만 7백 17인, 제색군(諸色軍)이 29만 9천 4백 76인으로, 이는 병조 도안(都案)에 있는 수효이다. 그러나 병란 이후로 실종과 사망이 매우 많아 모두 채우지 못하였다. 여러 도의 역마가 3천 2백 74필, 제주의 관목장(官牧場)의 말이 9천 3백 14필이다.
한성부와 여러 동의 호적(戶籍)의 수효는, 서울 5부가 1만 2천 4백 90호, 경상도가 15만 5천 8백 6호, 전라도가 11만 8천 7백 38호, 충청도가 6만 4백 61호, 강원도가 5천 3백 76호, 경기가 3만 8천 40호, 황해도가 2만 9천 4백 11호, 함경도가 2만 8천 12호, 평안도가 5만 4천 7백 90호로 합계가 51만 3천 1백 4호이다. 이는 기묘년037) 에 작성한 호적이다.
호조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의 수효는, 경기가 쌀 2천 6백 31석, 콩 2천 7백 31석이고, 경상도가 쌀 9천 8백 17석, 콩 6천 4백 74석이고, 전라도가 쌀 2만 8천 8백 49석, 콩 1만 1천 3 백 27석이고, 충청도가 쌀 1만 2천 1백 84석, 콩 8천 3백 85석이고, 강원도가 쌀 1백 67석, 콩 2백 84석으로, 쌀과 콩의 통계가 7만 2천 8백 49석이다. 그러나 많거나 적기도 하여 매년 다르며, 황해·평안·함경 등 3도의 부세는 본도에 모아 회록(會錄)하고 상납하지 않는다.
12월 5일 신해
충청도에 기근이 들었다.
집의 조석윤을 패초(牌招)하였으나 오지 않아 파직하였다.
대사간 최혜길(崔惠吉), 사간 이행우(李行遇), 헌납 심대부(沈大孚), 정언 여이재(呂爾載)·강백년(姜栢年) 등이 관례대로 처치하였다가 도리어 엄한 하교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처치하기를,
"논열할 때에 난색을 보이시고, 처치할 때에 또 미안한 하교를 하시어 결국 모두가 답답해 하고 중외가 실망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들이 성상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출사하도록 청하는 처치는 바로 공의(公議)에 합당한 것이므로 준엄한 성상의 비답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던 바입니다. 최혜길·이행우·여이재·강백년·심대부·유경즙·김상을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헌부가 출사한 뒤에 또 내수사 노비에 관한 일을 가지고 쟁론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6일 임자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 영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 판중추부사 심열(沈悅)이 상차하기를,
"김상헌 등이 끝내 이역으로 떠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상의 본심이겠습니까. 지난날 산성(山城)의 위급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의 의논에 몰리어 윤집(尹集) 등을 내보낼 적에도 성상께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불쌍해 하는 빛이 옥안에 가득하였었는데, 이제 상헌 등의 떠남에 대해서 신들은 참으로 성상의 회포가 더욱 말할 수 없을 줄 압니다. 삼가 생각건대 김상헌은 병자년 봄에 그의 소견이 연소배와는 전혀 달랐는데, 나덕헌(羅德憲)을 논한 일로038) 인하여 연소배의 공격을 받아 대사헌의 직에서 체직되기까지 하였고, 그의 상소에 ‘위세를 끼고 자존 망대함은 없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니039) 바로 그의 본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산성이 포위를 당하여 어찌할 수 없음을 보고서는 사수(死守)하자는 의논을 창도하여 비로소 강화하자는 의논과 어긋나게 되었으며, 일이 위급하게 된 뒤에는 또 ‘성을 나가면 반드시 온전할 리가 없다.’고 강력히 고집하여 일관하였는데, 이는 당시 망언을 하여 흔단을 야기한 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본성이 강직하고 편협해서 자기의 소견을 지나치게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야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유언비어가 전파되어 점점 더 보태어져서 마침내는 간사한 자가 나라를 파는 기화가 되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오늘날의 사태가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헌은 바로 선조(先朝)의 구신으로서 숭품의 반열에 있어 전부터 후한 은총과 대우를 받아왔으며, 나머지 조한영(曺漢英)과 채이항(蔡以恒) 2인은 시종을 역임했거나, 유적(儒籍)에 이름이 있는 이들입니다. 옛말에 ‘선비는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일은 반드시 도리에 맞도록 처리해야 합니다. 어찌 차마 도망쳐 온 한인이나 향화인의 무리와 같이 험한 처지에 뒤섞이게 하여 구박과 곤욕을 당하도록 내버려두고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청사가 의주에 머물고 있어 이목이 상당히 번거로우니 참으로 가엾게 여기는 기색을 드러내어 그들의 의아심을 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원역(員役)을 차출해서 대동하여 들어가게 하면서 명목을 압송한다고 하고 호위를 겸하게 하고, 또 노자를 지급하여 삭방의 들녁에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들의 논의가 비록 조정에서 채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협박을 받은 뒤에 부득이해서 보낸다는 뜻을 저들이 모를 리가 없으니, 우리가 채용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태연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대죄(待罪)한다는 뜻을 진술한 국서 한 장을 보내고 아울러 상헌에 대한 전후의 사실을 사실대로 나열하되, 그중에 이미 상신(相臣)이 말한 관교(官敎)를 받들지 않았다는 한 조목과 와전된 데서 나온 연호를 쓰지 말도록 사주했다느니 하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해명하여야지 분명치 못하게 뒤섞어서 의논해서 그의 죄목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여러 신하들이 횡의(橫議)한 문자는 신들이 원고를 보지 못하여 어떻게 표현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해 척화의 논의와는 필시 간격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적당하게 잘 말하여 본 실정을 알게 하되 다른 희망을 갖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다만 스스로 깨닫게만 하면 만에 하나 모두 살아날 가망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관소(館所)의 신하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으로 정역에게 말하게 하기를 ‘지난달 윤집(尹集) 등을 죽이고, 전년에 정뇌경(鄭雷卿)을 죽였는데, 이는 모두가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으니, 말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면령 이전이니 이제 완전 석방은 안 되더라도 본국에 돌려보내어 본국에서 스스로 죄를 내리게 해야 한다. 상국의 체면에 어찌 이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하여 용장의 귀에 흘러 들어가게 한다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신득연이 이미 입증하였으니 자문(咨文)에 쓸 말이 참으로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경들의 소견이 이러하니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었다.
"김상헌이 오늘 서울에 도착하였기에 빈신에게 이문하여 저들에게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평양부의 어떤 자가 청의 역관 한거원(韓巨源)에게 빌붙어 나라 안의 은밀한 일을 많이 말하고, 그의 종이 되어 심양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방산 만호(方山萬戶) 백광조(白光祖)가 잡아서 보고하니, 국경에서 죽이라고 명하고, 광조에게 첨사(僉使)를 제수하였다.
12월 7일 계축
정명수에게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인하여 그 어미에게 월료(月料)를 지급하였다.
전 이조 참판 이경의(李景義)가 졸하였다. 경의는 어려서 그의 숙부인 태학사 이호민(李好閔)에게 수학하였는데, 문장에 꽤 능하였다. 위인이 침착하고 강직하여 기국이 있었다. 전후하여 올린 봉장(封章)은 건백(建白)한 바가 많았으며, 상이 등용하려고 하는 참에 갑자기 졸하였으므로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12월 8일 갑인
상이 하교하기를,
"김상헌의 일이 더없이 비통스럽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가 있겠는가? 이자(移咨)하는 일을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다. 밀주(密奏)를 지어서 중관(中官)을 시켜 보내면 좋을 듯도 싶다."
하였는데, 비국이 자문을 고쳐 주문으로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김상헌이 안동에서 길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 위로하고 초구(貂裘) 1벌, 백금 5백 냥 및 기타 다른 물건도 이에 맞도록 하사하였다. 조한영(曺漢英)과 채이항(蔡以恒)도 북쪽으로 떠나려 할 때 한영에게는 백금 3백 냥, 이항에게는 1백 5십 냥을 하사하고 기타 다른 물건도 차등 있게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심양에 은그릇을 만들어 보냈는데, 그 비용이 7백여 냥이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상헌이 이제 떠나려 하는데, 노병으로 죽어가니 무사히 도착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자제 1인을 대동하고 가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심양에 들어간 뒤에 형편에 따라 주선해야 할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니 관향 은화(管餉銀貨)를 하사하여 가엾게 여기시는 성상의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은화는 이미 해조로 하여금 계산해서 지급하도록 하였다."
하고, 또 명하여 수행하는 그의 자제에게 말을 지급하게 하고 각읍으로 하여금 음식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12월 9일 을묘
향화인과 도망온 한인, 도망온 우리 나라 백성 6백여 명을 심양으로 되돌려 보냈다.
김상헌이 떠나면서 상소하기를,
"신은, 말은 조금도 도움됨이 없이 몸은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국문(國門)을 지나 궁궐과 멀어지니 근심스런 마음에 사모하는 생각만 더해갑니다. 뜻밖에 성상께서 하찮은 저의 정상을 곡진히 살피시어 내사(內使)를 시켜 간절하신 말씀으로 안부를 물어주셨습니다. 보배스런 초구를 입으니, 따뜻한 기운에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조정에 나아가 다시 용안을 뵈옵게 된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하더라도 사는 날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성상께로 향하는 피눈물 어린 충정을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매우 비통스럽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하여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선전관 1인을 보내 호송하게 하니, 도성의 백성이 모두 통곡하였다.
12월 11일 정사
경상도 울산(蔚山)과 봉화(奉化) 등지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으므로 향축(香祝)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기원하게 하였다.
유림(柳琳)을 의주에 보냈는데, 청인이 불렀기 때문이다.
조경을 집의로, 신익전(申翊全)을 교리로, 유영을 응교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 양사 장관을 인견하여 이르기를,
"김상헌 등의 일은 종사의 대계에 쫓겨 이런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였으니 기가 막힌다."
하자, 판중추부사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를 들은 신료들이 누군들 감동하여 울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러 자유로이 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들여 보냈으나 참으로 차마 죽으러 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지 못하겠다. 구원하고자 하나 계책이 없다."
하니,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어제 자문을 고쳐서 주문으로 하라는 성상의 하교를 받았는데, 주문이 자문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식(李植)이 지은 주문을 보니, 말이 잘 맞지 않을 뿐 아니라 3인에 관한 일만을 거론해서 그들을 변명하는 듯한 점이 있어 타당하지 못한 듯하였습니다. 주문만 보내는 것도 명분이 없을 듯하니, 새로 제조한 금그릇과 은그릇을 이 인편에 같이 보내어 먼저 용납될 바탕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러 신하에게 의논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도망쳐 온 사람을 쇄송하는 일을 주내용으로 하고 김상헌 등의 일은 말단에 넣어 쇄송하는 일을 중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주문에 전연 죄가 없다고 해서 비호하는 뜻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식의 문장이 좋기는 하나 이러한 문서를 짓는데는 부드러운 면이 부족하니, 이경석(李景奭)과 상의해서 지어, 간곡한 글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날의 일이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백성들이 국가의 처사를 어떻게 보겠는가. 한인의 일로 말하더라도 궁해서 우리에게 온 지가 여러 해인데 묶어서 돌려보내니, 이 또한 차마 못할 일이고, 우리 나라 사람에 있어서도 온갖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왔는데 또다시 몰아서 보내니 이토록 놀랍고 참혹한 정상이 또 있겠는가. 국가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속환(贖還)해 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강석기가 아뢰기를,
"그러한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국가의 재력이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더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 듣자니 지방에서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포로가 된 적이 없는 자를 억지로 보낸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그러한가?"
하였다. 석기가 아뢰기를,
"수령이 목전의 죄책을 면하려고 진위를 분별하지 않고서 협박해서 들여보낸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적발해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쇄환하는 일은 인심의 향배가 달려 있는데 색출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까지 있으니 인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교서를 내려 팔도에 유시하여 조정에서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요즘 기상의 참혹함이 정축년과 다름이 없다. 심지어 재상을 붙들어 보냈으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김상헌의 상소를 보니 그가 직접 쓴 것인 듯한데, 이는 바로 영결(永訣)하는 뜻이다."
하고, 인하여 몇 줄기 눈물을 흘리니, 신하들이 모두 울었다. 상이 대신에게 묻기를,
"경들은 상헌을 보았는가? 그의 뜻이 어떠하던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들에게 가서 말하는 과정에 노여움을 폭발할 염려가 없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그 점을 가지고 경계하였습니다. 또 상의 뜻이 기필코 구원하려고 한다는 점을 들어 말하니, 답하기를 ‘저들이 하는 것을 보아서 할 것이다. 죄인으로 잡혀가는 사람이니 별로 예의에 구애될 것이 없다. 저들이 말하면 묻는 대로 따라서 대답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조금도 마음의 변동이 없더란 말인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행동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조한영이 상소한 것은 주사(舟師)가 출발한 뒤였으니 그가 횡의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한영의 생각은 신득연과 서로 대면하여 변명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영의 사람됨은 어떠한가?"
하자, 이식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신에게서 수학하였기에 그의 사람됨을 익히 압니다. 조정의 사체를 모르기는 하지만 지기(志氣)는 용렬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에게 가서 응답할 적에 선후를 혼동할 염려가 있으니 그 점이 우려된다."
하자, 강석기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 회은군(懷恩君)을 사신 일행에 포함하여 들여보내서 주선하도록 하고 싶었으나 불가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서 중지하였습니다."
하였다.
12월 13일 기미
전옥(典獄)의 경범 죄수를 석방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그저께 등대(登對)하였을 때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는데, 오늘날 쇄환하는 일은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국가에서 속환(贖還)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비록 나누어 징수하더라도 사람들이 원망하거나 괴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조정에서 태평하게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정없는 저들의 욕심에 우리가 속환하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면 높은 값을 요구하여 괴롭힐 것이 뻔합니다. 정역(鄭譯)과 친한 아래 무리에게 조용히 염탐하도록 해서 그들의 속환을 허락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 나서 의주에 있는 제신에게 정역과 값을 작정하게 한다면 우리 백성을 속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리한 사람 하나를 가려 보내어 제신에게 상세하게 유시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람을 보내는 것은 안 된다. 이문(移文)하여 통지하라."
하였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심양으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렇게 날씨가 추우니 옷이 얇은 군사에게 동옷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12월 14일 경신
역관 이화룡(李化龍)을 보내서 은화를 가지고 심양에 들어가 식량을 사오도록 하였는데 청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이경석과 이식을 불러 접견하고 이르기를,
"어제 경들이 지은 글을 보니 오로지 세 신하의 일만으로 주된 뜻을 삼아 귀속시키는 곳이 없었다. 전일 면대하여 하교한 뜻과 어찌하여 서로 다른가?"
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3 건의 일과 세 신하에 관한 일은 모두 긴중하여 경중을 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익히 헤아려 보았는데도 문세가 자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경석은 아뢰기를,
"신은 병이 나서 집에 있었으므로 전해 들은 말을 가지고 지었기 때문에 지리하고 번다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인(漢人)은, 임진년에 나왔다가 우리 나라에 남아서 이미 우리 백성으로 편입되어 각기 가업(家業)이 있는데도 뒤섞여 쇄환당하였으니, 이 점이 첫째 원통함이고, 향화인은 우리 나라에 오래 거주하면서 자손을 기르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요역을 면하려고 그들 마을에 투속한 자들까지도 잘못 함께 체포되었으니, 이 점이 두 번째 원통함이며, 도망쳐 온 사람은 당초 진영에서 패하여 흩어진 자들로서 일시적으로 면역(免役)을 바라서 포로가 되었었다고 거짓으로 말한 것인데도 고을에서 수색할 적에 역시 면치 못하였고, 혹은 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쳐 왔거나 또는 속환되었으나 문서를 분실한 자도 모두 붙들려 감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 점이 세 번째 원통함이다. 인심이 이로 인하여 술렁거려 장차 진정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글을 짓되, 해부(該部)로 하여금 조사해서 처리하게 해 달라는 말을 하고서, 세 신하에 관한 일은 그 끝에 넣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채이항의 상소도 주사를 들여보낸 뒤에 있었으니 조한영과 같이 거론하여 해명하여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曺)와 채(蔡)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심술이 바르지 못하면 끌어다 대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참으로 염려스럽다."
하니, 모두 아뢰기를,
"반드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항은 혹 말을 경솔히 할지언정 역시 용렬한 무리는 아닙니다. 비국의 여러 신하가 불러다 경계하기를 ‘저들에게 가서 말을 주고받을 적에 화를 촉발하는 말을 해서 국가에 해를 끼치지 말라.’고 하자, 이항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죽은 몸이라 살아서 돌아올 가망이 없다. 그러나 국가에 해가 되는 말은 감히 말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참찬관 김세렴이 나아가 아뢰기를,
"그저께 인대할 적에 심열의 건백으로 인하여 팔도에 하유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떻게 문자를 알겠습니까. 실질적인 은혜를 베푸는 것만 못합니다. 다만 국가의 경비가 탕갈되어 이 일을 해낼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신이 제도에서 쇄송한 수효를 가져다 보니 겨우 1백여 인이었습니다. 은 3천∼4천 냥을 특별히 내어 회은군의 가는 편에 부쳐서 속환해 오도록 한다면 온 나라 백성이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사람 수효가 매우 많아 힘이 미칠 수 없을까 염려했었는데, 이제 승지의 말을 들으니, 그들의 수효가 그 정도라면 공가(公家)에서 값을 치르고 속환해야 한다."
하였다. 세렴이 또 아뢰기를,
"신이 동래 부사의 장계를 보니 왜인들이 요구한 것이 몇 가지 안 되는데도 우리가 허락하지 않았으니, 먼데서 온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가 너무 박한 것은 아닙니까. 신은 이로 인하여 필시 병화(兵禍)의 단서가 일어날지는 모르겠으나 공갈하는 말이 자주 이르러 동남 변방의 근심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들 욕심이 한이 없으니 우리가 모두 허락할 방도가 없다."
하였다. 당시 도주(島主) 평의성(平義成)이 언만(彦滿)의 세견선(歲遣船) 1척을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고, 차왜(差倭) 등지승(藤智繩)이 관직을 받기를 청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렴이 언급한 것이다.
12월 15일 신유
은 1천 냥을 정명수에게 뇌물주고, 내구마 3필, 역마(驛馬) 4필을 세 장수에게 나누어 주었다.
12월 16일 임술
청인이 의주에 60여 일간을 머물고 있었는데, 혹심한 추위를 만나 각읍의 지공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상과 굶주림을 겪었고 죽는 자도 있었다.
영의정 홍서봉이 치계하였다.
"신이 식량을 살 수 있는 계책을 정명수에게 물으니, 명수가 말하기를 ‘요동과 심양의 농민은 그 해에 수확한 곡식을 모두 팔고산(八高山)의 집으로 들이므로 가난해서 자기들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 남는 것이 있어서 팔 수가 있겠는가. 팔고산이 쌓아놓은 식량이 모두 심양에 있으니 이 곡식을 빌려 쓰고 봉황성(鳳凰城)으로 상환 납부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그 식량을 얻더라도 어떻게 이주(伊州)로 운반하겠는가?’ 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조선에서는 이미 4백 필의 말을 준비하여 식량 운반용으로 쓴다고 하니, 먼저 일륜거(一輪車) 2백 량을 사들여서 말이 끌도록 하여 번을 나누어 서로 교대하게 한다면 말 1마리가 운반하는 수효가 3석 이상은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경석을 대사헌으로, 이덕수(李德洙)를 이조 참의로, 이도장(李道長)을 이조 정랑으로, 정태제(鄭泰齊)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갑자
남해(南海)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정축년040) 에 청병(淸兵)이 철수해 돌아갈 때에 포로로 잡은 남녀 3인을 역관 김통가(金通可)에게 주고 갔는데 통가가 그들을 잃어버렸다. 용호가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와 병사 이현달(李顯達)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들이 필시 귀가(貴家)의 자제일 것이니 그 값이 백금 3만 냥은 더 될 것이다. 반드시 그 값을 갚으라. 만일 갚지 못하면 감사와 병사는 같이 심양으로 들어가 3만 냥을 납부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정태화가 말하기를 "심양으로 들어가기는 쉽고 은을 준비하기는 어려운데 꼭 같이 강을 건너고자 하면 어찌 감히 어기겠는가. 김통가가 아직 있는데 그 사람에게 묻지 않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용호가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서 중지하였다.
12월 19일 을축
김상헌이 의주에 도착하자 용골대가 영상 이하 여러 재신과 사은사 일행을 관(館)에다 모아놓고 불러 들이게 하였다. 상헌이 베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와 절을 하지 않고 이현영(李顯英)의 우측에 의지해 누워있었다. 청차(淸差) 3인이 한참 동안 서로 의논한 뒤에 묻기를,
"우리들이 들은 바가 있으니 모두 말하라."
하니, 상헌이 답하기를,
"묻는 말이 있으면 내 의당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단서를 말하지 않고서 말하라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정축년의 난에 국왕이 성을 나왔는데도 유독 청국을 섬길 수가 없다 하였고,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하자, 상헌이 말하기를,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병으로 따르지 못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정축년 이후로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는데도 받지 않고 고신(告身)을 반납한 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하자, 상헌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노병 중이라 하여 직에 제수한 적이 없는데 무슨 관직을 제배하여 받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처럼 허탄한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또 묻기를,
"주사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하였는가?"
하자, 답하기를,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나의 임금에게 고하였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
하니, 용호가 급히 말하기를,
"어찌해서 다른 나라라고 하는가?"
하자, 말하기를,
"피차 두 나라는 각기 경계가 있는데 어찌 다른 나라라고 할 수 없는가?"
하였다. 세 호인이 서로 쳐다보면서 말이 없다가 즉시 나가도록 하였다. 나간 뒤에 오목도(梧木道)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였는데, 여러 호인이 둘러서서 보고 감탄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김상헌 판서와 신득연 승지는 심양으로 들여가야겠다. 차사원을 시켜 압송해 오라. 빈객 보덕은 우리와 내일 강을 건너야 한다."
하였다.
12월 20일 병인
용호가 또 좋은 말을 요구하여 내구마 1필을 주었다. 달리기를 시험해 보고 나서 좌의정 신경진에게 말하였다.
"이 말은 잘 달리지 못하니 어디에 쓰겠는가. 두고 갈 터이니 준마를 가려서 뒤따라 들여보내라."
조한영과 채이항도 의주에 도착하였는데, 용호가 신득연과 대질시켰다. 신득연이 말하기를,
"심양에 있을 적에 이 두 사람이 상소를 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주내용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창황한 중에 경솔하게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주었던 것이다."
하였다. 한영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옥체가 미령하시어 오래도록 신료를 접견하지 못하셨으므로 와내(臥內)에서 대신과 시종신을 만나보기를 청한 것이다. 상소의 뜻은 이뿐이었다. 그 당시는 주사가 이미 떠났는데 어찌 지난 일을 추론하였겠는가."
하였고, 이항은 말하기를,
"시골에 살면서 백성들의 신역이 번다하고 과중한 것을 보고 폐해를 덜어달라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었다. 먼 지방에 있는 한미한 자가 어찌 감히 주사의 이해에 대해 말하였겠는가."
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내가 마음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같이 심양으로 들여가도록 하라."
하였다. 용호 등이 마침내 떠났다. 여러 호인들이 여러 설비와 솥 등을 모두 가지고 떠나 의주의 관이 쓸쓸히 텅비었다.
의주 부윤 심지명(沈之溟), 창성 부사(昌城府使) 허동립(許東岦), 평양 서윤(平壤庶尹) 조정립(曺挺立), 청성 첨사(靑城僉使) 단희봉(段希鳳), 창주 첨사(昌洲僉使) 안윤신(安潤身), 묘동 권관(廟洞權管) 김성일(金聲逸)이 도망쳐 온 한인을 받아들였다가 청인에게 발각되었는데, 붙잡아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떠나려 할 즈음에 정명수를 시켜서 말을 전하기를 "당초에는 심양으로 데려가서 추문하려 하였으나 이제 잡아가지는 않겠다. 의당 뒤에 명이 있을 것이니 본래의 직임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부득이 모두 체직시켰다.
12월 21일 정묘
충청도 태안(泰安)에서 바다 속에서 우레같은 소리가 났다.
12월 22일 무진
홍서봉 등이 의주에 있으면서 치계하기를,
"들으니, 조정에서 삼색인(三色人) 쇄환의 일로 심양에 별도로 진주사를 보낸다고 하는데, 용호의 행차가 오로지 이 일을 위해서이니, 6백 명을 쇄송해도 오히려 적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덕인(李德仁)의 일행이 필시 돌아가는 용호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니, 저지당하는 우환이 없지도 않습니다. 성사는 안 되고 도리어 해로움만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성사가 안 된다 해도 해롭지는 않을 것이라 하여 그대로 보냈다.
12월 24일 경오
청나라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통정(通政)의 품계로 올려줄 것을 명하였다. 이는 의주에서 분주히 일을 주선해준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25일 신미
헌부가 상차하기를,
"접때 전 집의 조석윤(趙錫胤)이 인피한 말에 감히 ‘화리(貨利)’ 두 자를 가지고 전하의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마음이 언제 화리에 얽매인 적이 있었기에 연소한 대간이 문득 이 말로서 지척한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깊이 수치스러워하고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옛날의 신하는 자기의 임금을 걸·주나 후한의 환제(桓帝)나 영제(靈帝)에 비교하고 면대하여 욕심이 많다고 지척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임금은 죄를 주지 않았으므로 후세에 미덕으로 칭송합니다. 그리고 당나라 신하 육지(陸贄)는 봉천(奉天)에서 경림(瓊林)과 대영(大盈) 두 창고를 혁파할 것을 청하면서 ‘탐욕으로 법을 삼으니 그 폐해를 장차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지존의 자리를 낮추어서 창고나 지키는 관리의 일을 하고 만승의 자리를 욕되게 하여 필부가 재산을 모으는 것을 본받는다.’고 하였는데, 당시에 이를 죄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그 비루함을 깊이 수치스러워 하시니, 전하께서 그러한 마음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그러한 마음이 없으니 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말하는 과정에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어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듯이 하신단 말입니까. 신들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간원이 조석윤을 처치할 적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시기는 했지만, 이어 엄한 전지를 내렸으니, 이는 들어오라면서 문을 닫는 것과 같습니다. 석윤이 감히 부름에 나오지 못한 것은 황공하여 그런 것이니 원래 명을 업신여긴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나오지 않는 자는 파직하는 것이 근래의 관례이지만 쟁신(爭臣)을 특별히 용서해 주는 것도 하나의 방도입니다.
그리고 전 판서 김상헌이 심양으로 떠난 것은 실로 만부득이해서였지만 원근의 백성들이 놀란 것이 어떠하며 조정에서 침통해 한 것이 어떠합니까. 그가 국문을 지나 서쪽으로 갈 적에 부로와 사녀들이 서로 돌아보고 통곡하고, 아이들과 사졸들이 모두 슬퍼하였으니, 인심의 거취와 국가의 존망이 여기에서 결판났습니다.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여러 신하에게 모두 있습니다. 어찌 유독 세 신하에게만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세 신하를 추문하신 것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잠시 형리(刑吏)에게 내리기는 하지만 끝내 무사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파직되었으므로 의혹됨이 없지 않습니다.
비록 세 신하가 몽롱하여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이야 결단코 다른 의도가 없었는데, 이 일만은 유독 용서할 일이 못 되었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세 신하의 허물을 씻어주시어 뭇사람들의 의혹을 통쾌하게 풀어 주소서. 그러면 한때의 소망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즉시 허계(許啓)와 이명한(李明漢), 임담(林墰), 조석윤(趙錫胤)을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7일 계유
정광경(鄭廣敬)을 이조 참판으로, 이천기(李天基)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일원(李一元)을 자헌(資憲)에 문희성(文希聖)을 가의(嘉義)에 가자하였는데, 이는 남한 산성의 성을 쌓은 공을 상준 것이었다. 살펴보건대 일원과 희성은 모두 무오년에 오랑캐에게 항복한 사람들인데 참람하게 금관 옥대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모두가 놀라고 분개하였다. 간원이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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