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2권, 인조 19년 1641년 1월

싸라리리 2026. 1. 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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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무인

당시 청나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쇄송(刷送)하는 일로 인심이 흉흉하였다. 상이 팔도에 하교하여 유시하기를,
"내가 박덕한 몸으로 일국 신민의 임금이 되어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고 감싸 보호할 책임이 있는데도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지혜가 어둡고 사랑하는 정성이 부족하였다. 그 때문에 요역이 많이 일어나 고을마다 괴로움을 겪어 온 지 오래된데다 천도(天道)마저 돕지 않아 재난이 잇따라서, 백성들은 마침내 크게 곤궁해졌고 혼란이 안정되지 않고 있다. 또 내가 사기(事機)를 잘 주선하지 못하여 조용했던 강토가 갑자기 병자·정묘년의 큰 변란을 당하여서 군병들은 모두 전사하고 남녀 백성들이 포로로 붙들려 갔으니, 화란의 참혹스러움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었다.
내가 그 당시에 정의를 다하여 싸울 것을 명령하는 것은 실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허겁지겁 성을 나와 항복하여서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까닭은 구차하게 자신만 온전하게 하려는 계책이 아니었고 사실은 온 나라 민생들을 다시 살리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상처는 더욱 심해졌고 백성들은 거듭 화를 당하고 있는데, 이번 쇄송의 일로 인해 또 온 나라가 놀라움에 떨고 있다.
슬프다. 무고한 우리 백성들이 이역 땅에 잡혀가서 골육을 그리워한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하여 돌아오기를 마치 그물을 벗어난 토끼가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듯 하였다. 그러나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조약이 엄중하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빠 이미 본업도 잃었는데, 일제히 찾아 내어 결박하여 보내기를 도적들을 대하듯 하여, 자식은 부모를, 남편은 아내를 이별하고 있다. 서로가 헤어질 때에 정리가 극도에 달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기도 하고, 혹은 일부러 굶어 죽기도 하며, 심지어는 수족을 잘라 이별을 보류하려는 자도 있다.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움을 당하여, 가는 도중이나 옥중에서 죽는 자도 많이 있다. 게다가 관리들이 엄한 독촉에 쫓기고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인족을 침노하는 등, 그 해독이 온 마을에 퍼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여행하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그의 족속을 대신하여 보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기한이 급박하여 일일이 판별할 수도 없어서 원통함을 안은 채 함께 사지로 끌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인(漢人)으로서 궁한 나머지 우리 나라에 와서 귀순했던 자들의 경우도 이미 우리 백성으로 편입되어 각기 가업이 있는 처지인데, 마침내 이번의 쇄송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아마 그 사이에는 억울하게 당한 자도 역시 많을 것이다. 귀화했던 자들은 저절로 고국에 돌아가게 되는 것이어서 쇄송됨을 싫어할 것이 없겠지만, 역시 여러 대 와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과 혼인하여 자손이나 친척이 서로 뒤섞여 있다. 그들을 분석할 때에 잘못 연루되어 체포를 당하는 등, 그 앙화가 우리 백성들에게까지 미친 사례가 또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아, 싸움터에 나가 창을 맞거나 피난하다가 포로가 된 것은 얼떨결에 생겼던 일이라서 어찌할 계책이 없었을 것이며 나 역시 손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쇄송은 나로 인하여 빚어진 일인데도, 관리들을 호령하여 결박하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인민의 부모가 되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형편이 급박하여 그만둘 수 없는 일이긴 하나, 마치 제 몸의 살을 베어 빈 창자를 채우고 사지를 손상시켜 얼굴과 눈을 구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고 감싸 보호할 책임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하겠는가.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구구한 마음은 있으나,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오랜 병 중에서 이런 일을 차마 보게 되었으므로 밥을 먹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또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말을 하려고 하면 목이 메이며, 위를 쳐다보나 아래를 굽어보나 모두 부끄럽고 두려워 스스로를 용납할 곳이 없다. 다만 국고를 다 털어서라도 속환(贖還)의 방법을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에 관리들을 신칙하여 백성을 안정시킬 대책을 강구토록 하였으나 재력이나 힘이 부족하여 기약할 수도 없다.
아,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유민(遺民)으로서 늙은이와 자제들은 나의 본심을 알아주어 흩어지거나 영을 어길 생각을 품지 말고, 다시 안정하고 농사를 지어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게 함으로써, 우리 이백 년 종묘 사직이 한 가닥의 명맥이나마 이을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하였는데, 대제학 이식(李植)이 지은 것이다.

 

1월 3일 기묘

도승지 한형길(韓亨吉)이 체직되었다. 형길은 각박하고 가혹하게 처리하여 일을 잘한다는 명망을 얻었고 당시의 권문(權門)에 빌붙어 비로소 요직에 들어섰다. 이 직임에 제수되자 물의가 떠들썩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1월 4일 경진

강원·함경 양도의 쇄환될 사람 70여 명을 심양(瀋陽)으로 보냈다.

 

1월 5일 신사

왜인들이 《사서장도(四書章圖)》·《양성재집(楊誠齋集)》·《동파집(東坡集)》·《전등신화(剪燈新話)》와 우리 나라의 지도를 요구하였는데, 조정이 《동파집》과 《전등신화》만 주고 나머지는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1월 7일 계미

헌부가 아뢰기를,
"연소한 종실들이 패려하게 멋대로 행동하는 습관이 근래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영흥 부령(靈興副令) 이경(李暻)이 건원릉(健元陵)의 정조 제관(正朝祭官)인 내자시 직장 송완(宋琬)을 길에서 만났는데, 말[馬]을 범하였다고 하면서 직접 마구 때려 머리가 깨어지고 한쪽 눈이 찢어지게 하였습니다. 이는 예전에 없었던 변고이니, 경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목장흠(睦長欽)을 도승지로, 유심(柳淰)을 집의로, 김경여(金慶餘)를 부응교로, 권령(權坽)을 장령으로, 황감을 교리로, 목행선(睦行善)을 부수찬으로, 홍처윤(洪處尹)을 검열로 삼았다.

 

상이 호조 판서 이명(李溟)과 형조 판서 구인후(具仁垕)를 편전으로 불러 이르기를,
"오래 전부터 경들과 함께 향곡(餉穀)의 운송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려 하였으나, 병이 쾌히 낫지 않아 부득이 문밖에 불러 말하게 되었다."
하였다. 두 신하가 각기 소견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방법을 따라 지휘하게 하라."
하였다.

 

1월 10일 병술

인평 대군 이요가 심양에서 돌아왔다.

 

영의정 홍서봉(洪瑞鳳), 이조 판서 이현영(李顯英), 병조 판서 이경증(李景曾)이 의주(義州)에서 돌아왔다.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1월 11일 정해

심연(沈演)을 도승지로, 이명웅(李命雄)을 동부승지로, 조계원(趙啓遠)을 장령으로, 김홍욱(金弘郁)·성초객(成楚客)을 지평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12일 무자

영의정 홍서봉이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과거에 용호(龍胡)가 의주에 도착하여 김상헌(金尙憲)의 이름을 잘못 사양(斜陽)이라고 하면서, 관교(官敎)를 【 즉 고신첩(告身牒)을 말한다.】  받지 않은 일과 동궁(東宮)을 영접하지 않은 일 및 주사(舟師)의 일을 방해했다는 등의 일을 거론하며 힐문하였다. 그때 서봉이 잘 주선하여 막지 못하고서 김상헌의 이름을 바로 말해 주어 상헌이 청국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논의가 매우 그르게 여겼었다. 그래서 서봉이 조정으로 돌아와서 이 차자를 올린 것이다.

 

1월 15일 신묘

강원 감사 이목이 본도의 경진조(庚辰條) 염선세(塩船稅)의 목면(木綿)을 덜어 진휼하는 밑천으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호조가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상이 특명으로 허락하였다.

 

1월 16일 임진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백홍(白虹)이 햇무리를 꿰뚫었다.

 

기로소 당상 김류 등이 상차하기를,
"민형남(閔馨男)이 두 번에 걸쳐 판서직을 사직했던 이유가 근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으나, 자식을 볼모로 보내는 일을 모면하려 한 자취가 있었던 이상, 형세상 공의(公議)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형남은 죽을 날이 가깝고 이번 사문(赦文)에 죽을 죄를 지은 자라도 모두 풀어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남은 아직 귀양살이를 하고 있으니, 만약 앞서 죽기라도 하여 마침내 타향의 귀신이 되게 한다면, 호생(好生)의 덕에 흠이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즉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월 18일 갑오

임경업(林慶業)이 이주위(伊州衛)로부터 돌아왔는데, 거느린 군병 중에 병사(病死)한 자가 많았다. 상이 듣고 해도(該道)로 하여금 우마(牛馬)를 주어 시체를 싣고 돌아오도록 하고, 그들의 집도 구휼하도록 하였다.

 

윤휘(尹暉)를 공조 판서로, 윤지(尹墀)를 부제학으로, 김지남(金地南)을 지평으로, 신익전(申翊全)을 헌납으로, 박의(朴漪)를 교리로, 정지화(鄭知和)·엄정구(嚴鼎耉)를 부교리로, 정태제(鄭泰齊)를 이조 좌랑으로 삼고, 이명한(李明漢)을 우윤(右尹)에 탁배(擢拜)하였다.

 

1월 20일 병신

행 대사간 박황(朴潢)이 본직과 비국 당상의 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그 전에 박황이 정뇌경(鄭雷卿)의 모략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정명수(鄭命壽)에게 미움을 받았고, 경진년001)   겨울에도 남방을 순검(巡檢)한 일로 힐문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황은 국가에 걱정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소장을 올려 굳이 사직하였으나, 상은 위로하면서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심양에서 또 들여보내도록 하였으므로 사직하여 체직된 것이다.

 

전 판서 김상헌, 전 지평 조한영(曺漢英), 학생(學生) 채이항(蔡以恒) 등이 심양에 도착하였는데, 목에 철쇄(鐵鎖)가 가해지고 두 손이 결박된 채 형부(刑部)의 문밖에 끌려나갔다. 질가왕(質可王)·용골대(龍骨大) 및 피패(皮牌)·가린(加麟)·범문정(范文程) 등 박씨(博氏)들이 부중(府中)에 늘어 앉고, 세자와 사은사 신경진을 맞이하여 동참하게 하였으며, 형관(刑官) 등은 문밖에 나열해 서 있었다. 차례대로 문초하였으나 세 사람의 말이 의주에서 했던 대답과 같자, 마침내 신득연(申得淵)에게 묻기를,
"조·채 두 사람의 대답이 이와 같은데, 당초의 네 말과 어째서 서로 틀리는가?"
하니, 득연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내가 심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용장(龍將)이 엄하게 문초하였을 적에 들은 대로 말했을 뿐이고, 여러 사람들의 상소 내용은 사실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였다. 또 묻기를,
"인부와 말을 징발할 때에 네가 국왕에게 아뢰어 중지하도록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득연이 말하기를,
"그때 조정의 의논은 먼 길에 반드시 도달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가은(價銀)을 들여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를 ‘상국에서 조발(調發)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다시 품정(稟定)하지도 않고 먼저 가은을 보낸다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니 꼭 주문(奏文)을 보내 결정해서 해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소견을 대략 진달했던 것은 신중을 기하려는 뜻에 불과한데, 그 사이에 어찌 멋대로 의논한 점이 있겠는가."
하였다. 청인(淸人)이 정명수(鄭命壽)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신하된 자는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곧 그 직분인데, 병자년에 잘못된 의논이 분분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그런데도 황제께서 특별히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고 곡진하게 보전토록 하셨으니 성심껏 순종했어야 마땅한 일인데, 김상헌 등의 무리들은 뉘우칠 줄을 모르고 오히려 그전 습관대로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조한영이 신료들과 자주 접촉하여 한 말은 필시 상국(上國)에 대한 일이었을 것이고, 채이항이 요역의 번중(煩重)을 말한 것은 반드시 세폐(歲幣)와 군량을 두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득연은 인부와 말을 조발해 보낼 때에 함부로 소장을 올려 기한에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조·채 두 사람의 일은 당초에 이미 발고(發告)하였다가 서로 대면시키자, 그만 애초의 말을 반대로 바꾸었으니 그 간사함을 헤아릴 수 없다.
종전에 있었던 본국의 잘못된 일들은 모두 이런 무리들이 멋대로 논의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열두 건의 일은 너희 나라에서 모두 자복하였고, 또 이 무리들을 즉시 압송하여 황제의 명을 어기지 않았으니, 기왕의 실수는 모두 덮어두겠다. 그리고 네 사람이 범한 죄도 재량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이어 구속한 뒤 외부의 사람과 절대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명수를 시켜 세자에게 말을 전하기를,
"박황(朴潢)에게도 물어볼 일이 있으니 즉시 보내 오도록 하고, 의주 부윤(義州府尹)·평양 서윤(平壤庶尹)·창주 첨사(昌洲僉使)·청성 첨사(靑城僉使)의 범죄는 본국에서 경중에 따라 논단(論斷)토록 하십시오."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뜻밖에 기병(騎兵)을 징발하게 되었는데, 천 필의 말을 무슨 수로 변통할 것인가. 출정할 기일이 삼월이니, 길이 먼 곳의 군병은 반드시 급속히 분부해야만 기일에 늦는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마필을 의당 각도에 분정해야 하겠지만 도감(都監)의 분양마(分養馬)도 그 숫자에 합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제도(諸道)에 6백 필을 분정하고, 또 사복시(司僕寺)의 말 1백 필과 임경업(林慶業)이 사온 말 1백 필 및 전날의 태운마(駄運馬) 2백 필을 채우면 1천 필의 숫자가 찰 것이다."
하였다.

 

1월 21일 정유

최혜길을 대사간으로, 유심을 사간으로, 유영을 집의로, 홍처량(洪處亮)·조복양(趙復陽)을 봉교로 삼았다.

 

1월 22일 무술

백홍(白虹)이 해를 꿰뚫었다.

 

용천부(龍川府)의 관아를 양책참(良策站)에, 황해도 병영을 황주부(黃州府)에 도로 설치하였다. 당초 조정에서 산성을 중요시하여 용천부를 용골 산성(龍骨山城)에, 황주 병영을 정방 산성(正方山城)에 이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청인(淸人)이 싫어하였으므로 이 일이 있게 된 것이다.

 

1월 25일 신축

유성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위로 들어갔다.

 

1월 27일 계묘

임경업이 돌아와 서울에 도착하였다. 상이 인견하여 위로하고 이어 중원(中原)의 수비 상태를 하문하니, 대답하였다.
"조대수(祖大壽)가 바야흐로 각로(閣老)와 혼인 관계를 맺어 여러 성을 수비하는 자가 모두 조씨의 족속들인데, 금주(錦州)의 군병이 10만, 산해관(山海關)은 30만 명이라고 합니다."

 

1월 28일 갑진

이조 판서 이현영(李顯英)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이 전라 감사 원두표(元斗杓)로 하여금 격포(格浦)의 신영(新營)을 겸관(兼管)케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당초에 박황이 순검사로 남방에 있으면서 부안(扶安) 격포의 형세를 아뢰어 새 영문(營門)을 설치하고 그 일을 전관(專管)하면서 급할 때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원두표로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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